#Mission3. Edward in wonderland (3)
다행히 시릴의 손톱으로 인해 생긴 자상은 보이는 것처럼 깊지 않았다. 상처 위에 지혈제를 퍼부은 후 출혈이 멈춘 상처를 깨끗이 소독한 의무실 담당자는 그렌샤의 마법처치를 받은 팔을 붙잡고 쯧, 혀를 차더니 거즈와 반창고로 상처 부위를 정리해 새 붕대를 감아주었다.
오른팔을 목에 매단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 케일리는 그길로 웨일즈와 함께 강의실을 향했다. 점심 먹고 한 번 저녁 먹고 한 번 일주일은 복용해야 한다며 항생제까지 넉넉히 챙겨준 의무실 담당자 덕분에 주머니가 빵빵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월요일이었고, 월요일의 스케줄은 각종 이론 강의를 듣는 게 전부였다.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이어지는 강의의 내용은 두 시간의 강의 사이에 십 분을 쉬고 다음 강의로 이어지는 하드 코스로 전술전략 이론, 화기 이론, 생존술, 이종족의 이해의 네 과목이었다. 그 주의 월요일에 배운 이론을 나머지 요일의 실전훈련에서 적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짜인 커리큘럼이었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속절없이 야외에 나가야 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한 케일리였다.
그러고 보면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러시아의 어느 시인이 말했더랬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에너지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서, 분노하는 것을 포기한 케일리에게 있어서는 좋은 삶의 지표가 되어주는 말이기도 했다.
맞아, 분노는 소비열량이 높으니 비효율적인 감정이지.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지만, 역시 가능하다면 그 이상 불이 번지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다. 실패 패널티가 온몸으로 겪는 종합선물 세트임에야 아무리 귀찮아도 미래를 위해서 전력을 다한다는 선택에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법무사(사무 변호사) 시험을 준비할 때 이후 처음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케일리는 인생무상을 느꼈다.
결국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기 위해 정계에 진출한다는 가업을 피해 사업으로 발을 돌렸지만 이 모양 이 꼴이 났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군에나 입대하는 게 편히 사는 지름길이 아니었을까.
입대할 부대를 잘못 고르지만 않는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정해진 일정에만 맞춰 행동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군대생활이 자신에게는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시작된 훈련을 피할 수는 없으니 그런 가정을 하는 것조차 때 늦은 후회였다.
책자에 적혀 있던 훈련일정에 따르면, 총 4주의 훈련기간 동안 주어지는 수면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았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 패널티가 없는 팀에 한해서 주말 하루와 월요일 이론 강의가 끝난 후의 하룻밤뿐이었다.
바다 건너,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부르짖는 시끄러운 나라의 해군 특수부대 선발과정이 인권을 무시하고 첫 4주간 하루 네 시간만 재운다는 것을 떠올리면 입안이 썼다.
정보기관이라고 생각하고 지원했는데 포장을 까보니 군 특수부대 못지않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니, 이거야말로 절박하고 순진한 구직자를 희롱하는 희대의 구인 사기가 아닐 수 없다고 케일리는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리를 강의실 앞까지 데리고 온 것으로 제 임무를 마무리한 웨일즈는 약간의 트러블로 십여 분 늦게 시작해야 할 강의를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가 단상에 올라갔다. 뒤따라 들어간 케일리는 어수선한 강의실 안을 스윽 둘러보았고 제일 가까운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썩 넓은 강의실 안은 정해진 좌석이 없는지 이 빠진 옥수수처럼 드문드문 채워져 있었다. 총 인원은 많아봤자 사오십 남짓. 모세의 기적처럼 가운데 자리만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왼쪽에 앉아 있는 집단과 오른쪽에 앉은 집단 사이에 돌아올 수 없는 강 하나가 가로지른 모양이었다.
탕탕, 마이크를 든 손으로 단상을 두어 번 내리친 웨일즈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군들, 저번 주에 이어 대(対) 이종족 전략전술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네.”
그가 손에 든 리모컨을 누르자 거대한 화이트보드 위로 스크린이 내려왔다. 이어서 강의실 불이 꺼졌고 프로젝터가 영상 하나를 비췄다.
초반의 영상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마추어가 찍은 다큐멘터리 같기도 했고, CCTV같기도 한 묘한 영상이었다. 제법 깨끗한 화질의 초반부를 빠른 속도로 돌린 웨일즈가 특정 지점에서 영상을 재생했다.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 무너져가는 회색빛 도시 한가운데의 시가전을 촬영한 영상이었다.
“이 영상은 지난 주말 동안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진 시가지에서 민간인을 구출하는 작전을 촬영한 걸세.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게릴라 폭격과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국제 사회에서도 정치적 이유로 손을 쓸 수 없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지. 우리 측에서도 특수부대를 파견해 미군과 연합해 탈레반과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작전은 주둔 중인 부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시행한 비공식 구조작전이었지.”
어느새 머릿수가 늘어난 영상 속에서는 그곳에는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두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튜와 시릴이었다.
개인 화기로 무장한 거구의 사내들이 특수부대 요원으로 보이는 이들과 구조작업을 벌이는 영상은 시종일관 위험천만해 보였다. 진짜 전쟁을 목도한 적이 없는 케일리의 눈으로도 특수부대 요원과 훈련생들의 차이가 명백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케일리의 눈에 보이는 훈련생들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되었다.
첫째, 그들은 시가지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장과 화기 선택으로 구조를 하려는 건지, 도시를 파괴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둘째, 보통 인간들은 총에 맞으면 죽기 때문에 몸을 사릴 텐데, 라이칸이 분명한 훈련생들은 적군과의 대치에서 총을 던지고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내는 만행을 보였다.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다른 라이칸이 숫제 본모습으로 돌아가려 자세를 잡던 동료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질질 끌고 간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종족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케일리가 보기에도, 민간인을 상대로 스스로가 이족보행 짐승임을 드러내는 게 국가 간의 분쟁을 넘어선 문제가 되리라는 건 명백했다. 내전 한복판에 라이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마 그 양상이 아주 복잡하게 바뀔 테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였는데,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이 일어난 틈에 민간인을 구출한다는 작전 내용을 완전히 잊고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상황에서 양측에 총을 갈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너희 머저리들이 반군과 정부군을 상대하는 사이 현지 주둔 부대원들에 의한 민간인 구조작전은 성공했지만, 전술적인 면에서 낙제점도 아까운 작전이었어. 애초에 이 작전에 전술이니 전략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지.
아무리 연수 초반이라지만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다면 최소한 작전 내용이 구조라는 건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혹시 인간과 라이칸의 사이에서 구조라는 말이 다르게 쓰이는지 내 아는 라이칸 동료한테 물어보기까지 했다네.”
그건 아니라더군. 그러니 자네들이 아주 무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꼴이 되겠어.
신랄하게 덧붙이는 웨일즈의 발언에 영상을 보는 내내 침묵에 잠겨 있던 강의실 안이 술렁거렸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라이칸 동료들-시릴과 매튜가 그쪽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러리라 예상했다.-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것처럼 씩씩거렸고, 왼쪽에 앉아 있는 인간 동료들은 휘파람을 불며 그들을 놀리고 있었다.
웨일즈의 말에는 케일리도 백분 동의하는 바였다. 삼십 분가량으로 편집된 영상만 보아도 라이칸들의 문제점은 명확했고 거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의 있습니다!”
잠시간 술렁이던 강의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말과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영상 안에서 변신하려는 동료의 뒤통수를 쳐 끌고 갔던 이성적인 라이칸이었다.
“말해보게나.”
“라이칸들은 인간과의 대적에서 화기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체능력만으로도 화기를 가진 인간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것도 증명된 사실이고요. 쓸데없는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인간의 룰에 맞춰서 움직이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전술입니다.”
리모컨을 들어 강의실 불을 켠 웨일즈가 이의를 제기한 라이칸을 잠시간 응시했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자네……, 그래, 다니엘이라고 했나. 안타깝네만 그 주장은 전제 자체가 글러먹었다네.”
“어느 부분이 말입니까.”
“자네는 라이칸의 신체로 전투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변신을 하든, 하지 않든 그 신체능력에 의존하는 시점에서 인간들 사이에 섞여드는 게 불가능해진다네.”
“어째서죠?”
“보통 인간은 총알받이가 되기 위해 방탄조끼도 입지 않고 전쟁통에 들어가는 인간을 보고 미쳤다고 표현한다네. 더해서 무기 하나 없이 화기를 가진 적과 대적하는 건 돌았다고 하지. 그런 인간을 보면 꼭 정신병원에 데려다 줘야 한다네. 전두엽에 문제가 생겨서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위험한 상황일 게 분명하거든.”
으득, 이를 간 라이칸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이 작전을 훌륭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술적 판단을 위해 먼저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해당 작전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짚어보도록…….”
“질문 있습니다.”
영상을 끄고 화이트보드에 필기를 시작한 웨일즈의 말을 끊은 것은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케일리였다. 그다지 열성적인 학생으로 보이지는 않는 케일리가 한 손을 번쩍 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웨일즈는 강사라는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손에 든 마커펜을 멈췄다.
“뭔가?”
자리에 앉은 그대로, 케일리는 이 시점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왜 저분들은 훈련을 시리아에서 받고 있는 거죠? 제가 알기로 거긴 여행금지지역일 텐데요.”
영상의 배경을 통해서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지역명을 입에 올리며 케일리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시리아와 리비아 등지를 수년간 폐허로 만든 이슬람 무장 세력과 대적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지 같은 강의실에 앉아 있는 상처투성이 동료들이었다. 그러니까 강의실 오른쪽에 무리 지어 앉아 있는 라이칸 동료들.
영상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사내들도 다수 비춰졌는데, 케일리의 상식에 문제가 없다면 이 시점에 저곳에서 저런 복장을 하고 이슬람 과격분자와 총질을 할 정도의 집단은 악명 높은 영국의 육군 22연대밖에 없었다.
“ATT 말아먹은 팀이 패널티로 주말 동안 전지훈련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라네. 덜떨어진 만큼 몸으로라도 익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전쟁터 나가서 적응도 하고 활약도 하고 멀쩡히 살아 돌아오는 간단한 미션이라네. 아주 쉬운 훈련이지.”
전지(轉地)훈련이 아니라 전지(戦地)훈련이었다. 자신의 상상을 뜀틀마냥 훌쩍 뛰어넘는 훈련 내용에 기가 죽은 케일리가 웨일즈의 가벼운 대답에 잠시간 말을 잃었다.
“전쟁터가 쉽나요……?”
우물우물 흘러나온 목소리에 웨일즈는 버릇처럼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그렇다네. 전쟁은 상대가 인간으로 한정되지 않나. 그 정도면 제법 할 만하지. 적어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에 대적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일세. 최악을 가정했을 때 튀어나오는 게 핵무기 정도라고 생각하면 제법 안심이 되지 않는가? 적어도 그게 사용될 일은 현 국제 정세에서는 제로에 가까운 데다, 핵을 빼면 기껏해야 미사일이나 포탄이니 마법과 저주 같은 것들과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고 알기 쉬운 적인 셈이지.”
맞는 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물론 마법이나 저주에 대항해서 전술을 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지기야 하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핵을 맞을 최악까지 가정하고 살아가는 삶을 원하지 않는 케일리에게 있어서는 이 모든 상황이 재난이었다.
신문을 보고 전화할 때 생각했던 첩보기관과의 사이에 쉽사리 건널 수 없는 강 하나를 둔 것처럼 한참은 동떨어진 훈련과 상상을 초월하는 각오-적어도 첩보요원으로 일하면서 핵 맞을 걱정을 할 일은 없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내용에 기가 질렸다.
뿐만 아니라 되짚어보면 웨일즈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분명 ‘대(対) 이종족 전략전술’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패널티로 떠났다는 전지훈련이-라고 쓰고 파병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다.- 인간들 사이의 전쟁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라면 이종족과 대적하기 위한 전술과 전략이라는 강의 내용 설명과 말이 맞지 않았다.
즉, 패널티는 어디까지나 패널티이며 실제 강의 내용과 그것을 살린 실전훈련은 더 높은 난이도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땅굴이라도 파야 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케일리가 잠시간 침묵했고, 처음 질문을 던질 때와 같이 단정히 왼손을 들고는 웨일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평화를 사랑하는 반전주의자라 어린 시절부터 지켜온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 훈련에 참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양심적 거부 같은 건 어떻게 처리해주시나요?”
강의를 계속하기 위해 화이트보드를 향해 돌아선 웨일즈의 몸이 휘청거렸다.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몸을 지탱한 그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케일리를 향해 물었다.
“자네, 아까까지만 해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케일리가 번쩍 치켜든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특유의 단정한 얼굴은 별달리 낭패한 기색이 없었지만, 그 안의 밤색 시선이 빠른 포기를 담고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제가…… 그랬나요?”
그치고는 제법 물고 늘어져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웨일즈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네만.”
“그것 참 이상한 노릇이네요…….”
변명 아닌 변명이 우물우물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폭력이랑 무력은 엄연히 다른 거고 제 신념은 평화를 위한 폭력까지는 허락하지만 무력은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밖에 내보내지만 않아주시면…….”
포기하지 않고 무어라 주장을 하는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와서는 더 이상 논리조차 없는 헛소리였다.
“뭘 그렇게 몸을 사리는가? 전지훈련 이야기라면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네. 패널티 내용은 제비뽑기로 결정되는 데다 소거식이거든. 전지훈련은 지나갔으니 남은 세 개의 선택지 중에서 그나마 나은 게 걸리길 빌면 돼. 사실 ATT에서 팀이 승리하도록 몸과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게 제일 낫기는 하지. 그러면 패널티를 수행할 필요가 없어지니 말일세.”
웨일즈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케일리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훈련을 성심성의껏 수행해 결코 패널티를 뽑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강렬한 목표가 생겨났다.
여전히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얼굴을 한 주제에, 눈만은 절벽에 매달려 구명줄이라도 얻은 양 반짝반짝 빛나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웨일즈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전지훈련이 그렇게 싫은 걸까.’
그래 봤자 패널티로 가는 훈련은 유격과 행군, 전략전술, 생존술을 비롯한 전투기술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실제 훈련 프로그램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지하시설 안에 조성된 훈련지는 필드요원이 조우할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만들어진 환경이었다. 심지어 케일리에게는 참으로 안된 일이었지만, 패널티가 훈련의 낙오팀에만 주어지는 것에 비해 실제 훈련 프로그램은 단 한 명의 예외가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헛소리에 익숙한 웨일즈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케일리의 환상을 굳이 부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제 몸무게의 반 정도 되는 완전 군장을 하고 기나긴 여정을 떠나야 했고, 하루 정도 단꿈을 꾸는 것까지 방해할 정도로 글러먹은 인간성은 아니라고 웨일즈는 스스로를 평가했다.
쯧쯧, 들리지 않게 혀를 찬 웨일즈는 패널티만 피하면 괜찮으리라는 허망한 꿈에 젖어 있는 어리석은 케일리의 질문 탓에 끊긴 강의를 계속했다.
“투입된 작전에서 각각의 주어진 임무에 맞는 전술을 짜기 위해서는 그 상황에 적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룰과 어떠한 예외가 적용되는지를 선두에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예를 들어 -B 지구의 임무 중 시가지에서 수행해야 하는 체포가 있다면 상대방을 먼저 인적이 없는 곳까지 유인하는 게 1순위여야 한다는 것이라네.
필드요원의 임무는 예외 없이 목격자를 최소화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며 임무를 성공시키는 것은 그 전제 위에서 성립해야 하지. 훈련기간 중의 태도에서도, 인간 세계에 융화되기 위한 최소한의 룰을 의식하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평가하니 기억해두도록. 이어서 이번 주에는 마법생명체와 대적할 때의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숙지해야 할 사항에 대해…….”
무거운 공기가 맴도는 라이칸들과 그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케일리는 눈앞에 닥친 강의에 집중했다.
◇ ◆ ◇
숙소에서의 트러블 탓에 늦춰진 시간만큼 연장된 전략전술 강의 탓에 쉬는 시간 없이 다음 강의가 이어졌다. 화기 이론, 생존술 이론까지 여섯 시간을 내리 강의실에 붙박인 케일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주어진 휴식시간을 틈타 숨을 돌리고 있었다.
전략전술은 그렇다 치고, 화기 이론과 생존술은 기본적으로 듣고 외우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집중해서 들어놓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는 한번 들은 것은 웬만하면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단지 아주 쓸모없는 것들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거나, 혹은 듣는 것조차 귀찮을 때 완전히 흘려버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정보를 기억하는 것에 한해서 불편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화기와 생존술을 적용해야 하는 주중의 실전훈련이었는데 오늘 지나간 화기 이론과 생존술의 내용을 칵테일 해서 나오는 내용은 암담하기만 했다.
특히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생존술 강의에서는 어째서인지 임무 도중에 마법 문을 사용할 수 없는-문과 같은 구조물이 없는 장소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며, 그 외에도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상황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강의의 배경이 된 조난장소부터가 케일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아열대 지방의 다우림 지방에서 적과 대치하며 생존하는 기술에 대한 내용이었다.
“대체 임무를 어디까지 가서 하는 거지?”
-B 지구의 모체이기도 한 MI6은 첩보기관이었고, 정보전은 본래 자국 내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국외 파견이 아예 없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으나, 그 장소가 한창 내전 중인 중동 등지나 열대 다우림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설마하니 훈련이랍시고 진짜 조난을 시킬 리는 없겠지……? 없을 거야.’
불안함을 감춘 채 배식을 받은 케일리가 빈 테이블에 앉아서 포크를 들었다.
“여기 앉아도 돼?”
막 마요네즈로 범벅이 된 마카로니를 입으로 옮기던 케일리를 향해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보이는 그들 중 가장 덩치가 작은 백인 남자는 케일리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식판을 내려놓고 털썩 그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이어 다른 일행들도 제각각 자리를 잡고 앉았고 처음 케일리에게 물음을 던진 사내가 이런, 혀를 차며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미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한 그의 일행은 사내가 곤란해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스티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씨익 웃어버렸고 케일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난 스티브. 저쪽 시계방향부터 로디, 쟝, 프레디, 클라이브, 킴벌리야.”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유난히 빛나는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인 스티브를 향해 케일리는 우물우물, 입에 들어 있던 마카로니를 삼킨 후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케일리입니다.”
마지막으로 빈자리의 의자를 끌어 앉은 스티브는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고기의 제일 위층을 덜어내 썰지도 않고 한입에 욱여넣었다.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것처럼 순식간에 줄어드는 식판 위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는 케일리를 힐끗 쳐다본 스티브가 꿀꺽, 입에 든 음식을 삼킨 후 물었다.
“넌 인간이지?”
그것 참 독특한 질문이라는 생각과-적어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종족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은 들은 역사가 없었다.- 이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나 싶은 납득이 함께 찾아왔다. 어느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섯 명의 사내가 모두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일리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나는 인간이지. 아주 평범하게 평화를 사랑하는 보통 인간.
“네.”
그의 자신감 가득한 대답에 스티브가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그것 참 인상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케일리는 얼마 남지 않은 마카로니 샐러드를 입으로 옮겼다.
“넌 그럴 것 같더라. 옆에 있는 개새끼들이 널 아주 뚫어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거든.”
“……정말요?”
“응, 강의 내내. 근데 꿈쩍 안 하기에 어지간히 배짱이 두둑하거나 아니면 그 노골적인 시선도 못 느낄 만큼 둔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내기가 걸렸지.”
“참고로 난 후자에 걸었는데, 어때?”
싱글싱글 웃으며 덧붙인 말에 케일리는 잠시간 침묵했다.
아, 그게 노려보는 시선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강의 내도록 묘한 기척이 느껴진다 했다. 별로 해를 끼칠 것 같은 기색은 없었기 때문에 무시했는데, 한 번쯤 돌아봐줬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용건이 있다면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 테니 부러 이쪽이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현명한 판단이었어.
“스티브, 아쉽지만 그쪽은 내기에서 진 것 같네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케일리에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이예! 내가 말했지? 아무리 둔해빠져도 그걸 모르는 놈이 어디 있냐! 저 개새끼들은 눈에서 진짜 빔을 쏘는 것 같아서 모를 수가 없다니까.”
“동의한다. 게다가 저 팔을 봐라. 저 꼴을 하고 이 훈련에 참가할 정도로 독한 녀석이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겠나? 누누이 말했지만 스티브, 넌 사람 보는 눈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러니 빨리 돈을 내놔라.”
순서대로 쟝과 프레디였다. 아직 식사를 시작한 지 오 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거의 바닥을 드러낸 접시가 인상적인 두 남자는 똥 씹은 얼굴을 한 스티브를 향해 두꺼비 같은 손을 내밀며 돈을 내놓으라 종용했다. 나머지 사내들 역시 똥 씹은 얼굴을 한 걸로 봐서는 쟝과 프레디를 제외한 이들 모두가 극단적 둔함에 돈을 건 모양이었다.
멍청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인데.
무일푼의 케일리는 생돈을 잃게 된 사내들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카지노에서 하룻밤 새, 연봉을 날린 머저리를 두엇 알고 있었다. 만약 집안이 번지르르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특히 그 머저리 중 하나인 렌필드는 저가 가진 부동산까지 저당 잡혔었다. 결국 되찾기는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 집안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는 소문은 들은 기억이 났다.
“여기 분들은 들어오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나 봐요?”
스티브를 향한 프레디의 말은 겨우 일주일 안면을 익힌 사이에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고, 삼삼오오 그룹을 만든 식사 풍경을 봐도 유달리 친근한 테이블과 그렇지 않은 테이블이 확연히 나뉘었다.
스티브를 비롯한 자신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섯 사내는 그중에서도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가까운 사이로 보였기 때문에 케일리는 어느새 지갑을 열어 쟝과 프레디에게 모이기 시작한 지폐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울상을 하고 텅 빈 지갑을 탈탈 털어내던 스티브가 남은 고기를 포크로 찍으며 대답했다.
“우린 다 같은 회사 출신이거든. 재직기간은 다르지만 다들 같은 시기에 계약이 끝난 것도 있고, 소속팀도 같아서 알아야 할 부분은 아는 사이지.”
다시 식사를 계속하는 스티브의 말과는 달리, 이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만 해도 겉보기에는 전에 종사하던 직업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각양각색이었다. 같은 회사 출신이라는 말에 바로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불길한 업종들뿐이라 케일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유심히 관찰했다.
먼저 스티브는 탄탄한 체구에 잘 그을린 피부가 몸을 쓰는 직종이라는 것을 과시했으며, 프레디와 클라이브, 킴벌리 또한 비슷한 부류로 보였다. 한편 쟝과 로디의 경우 그들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결코 만만히 보일 체구는 아니었다.
같은 회사, 같은 회사…….
“그 회사가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까요?”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을걸.”
“그렇죠, 역시…….”
주어 없이도 충분히 통하는 대화 속에서 케일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매튜와 시릴이 온몸에 상처를 달랑달랑 달고 다니고, 라이칸끼리의 사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현재 훈련생들은 라이칸과 인간으로 파벌이 나뉘어 있는 듯 보였고, 이 상황에서 라이칸을 공격할 만한 것은 같은 훈련생이며 인간이거나, 전략전술 강의의 영상에서 본 것처럼 외부훈련이라는 특수상황 정도였다.
그리고 케일리의 상식 안에서 라이칸의 신체능력을 상회하는 전투기술을 가진 자들이 무더기로 다닐 만한 회사는-그들은 분명 군부대가 아니라 회사라고 말했다.- 한 종류밖에 없었다.
PMC.
이들은 민간 군사 기업(Private Military Company)의 용병이었다.
“여기는 사람 뽑을 때 가리는 것도 없나 봐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케일리의 감탄에 쟝이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제 욕을 듣는데도 별달리 기분 나쁜 기색이 없는 것은 아마 그들에 대한 이미지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돈에 목숨을 판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3D 업종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에 제 발로 달려 들어가 거칠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는 것이 바로 PMC 용병이었다.
전쟁터를 놀이터 드나들듯 오가며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이는 데다 실질적인 치외법권에서 일하는 자들이 라이칸이라고 무서울 리가 있겠는가. 심지어 그들이 뛰어들었던 전쟁판에서 사설 용병은 제노바 협약의 보호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전쟁포로로 잡히든, 고문을 당하든,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가혹한 현장에서 뛰던 자들이니, 라이칸을 개새끼라 부르며-아무래도 비하의 의미보다는 말 그대로 새끼 늑대개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낄낄거릴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한참을 웃은 쟝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케일리에게 말했다.
“아하하, 우리도 그 이야기 몇 번이나 했는데 여긴 인선기준에 그런 거 없나 보던데. 적어도 인성이나 준법정신 같은 걸 안 본다는 건 확실했지, 안 그래?”
“음. 널 뽑은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프레디, 진실을 말하면 쟝이 상처받잖아.”
“스티브, 네가 뽑힌 걸 봤을 때도 생각했지.”
“나는 농담을 가지고는 상처받지 않아.”
그렇게 말한 스티브는 식판 위에 있던 고기를 프레디에게 던져버렸다. 상처를 받지 않은 것 같기는 했지만, 아주 속이 좁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여기 있는 인간은 다 용병 출신인가요?”
눈대중으로만 봐도 식당에 있는 사내들 대부분이-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운동 한두 가지쯤은 거뜬히 해낼 것처럼 보였고 그 안에는 라이칸을 비롯한 이종족들마저 섞여 있을 것이었다.
아직 구분하는 법을 모르는 케일리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대부분 훈련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씁쓸하기는 했다. 같은 편이라면 아주 편해지겠지만, 적대한다면 그만큼 까다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스타트 라인부터가 다르니 말이다.
침울한 케일리의 질문에 스티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진 않아. 저쪽 테이블, 보이지? 쟤들은 특수부대 전역자들. 나머지는 우리처럼 회사 관두고 이직한 애들도 있고 아예 인연 없다가 굴러들어 온 애들도 있고 그렇지.”
4주 연수만 제대로 끝내면 문제없을 거라던 페어리의 화사한 얼굴을 떠올리며 케일리는 애꿎은 파스타를 포크로 찔렀다. 그 4주간의 연수를 제대로 끝내는 게 문제라는 말은 왜 안 해줬을까. 요정이라는 종족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사기당한 기분이네요.”
꾸물꾸물 흘러나온 케일리의 목소리에 스티브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웬 사기? 아, 그러고 보니까 웨일즈 강의에서 뜬금없는 질문한 것도 너였지?”
“뜬금없이 시리아에 파견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보통? 군부대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정보기관인데 말이에요.”
“……? 입사할 때 계약서 안 읽었어? 거기 다 적혀 있었잖아.”
“계약서에요?”
“그래. MI6랑은 근본부터 다르다고 책자 소개에도 나와 있다고. 여긴 비밀보안국이 아니라 이종족 이민 관리국이야. 이종족 불법체류 및 이종족 특별법 위반자에 대한 입법, 행정, 사법권을 전부 가지고 있는 특수기관이라고.
이종족이 연관된 대규모 범죄행위 수사 및 처벌부터 시작해서 국경을 넘나드는 사건의 경우 국제 공조도 활발하다고. 필드요원은 더더욱 그렇지. 국적 제한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건데?”
스티브의 그 친절한 설명에 뻔뻔함으로라면 천하를 재패하고도 남을 케일리마저도 감히 돌려줄 말이 없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케일리의 머릿속에 고래고래 소리소리 지르는 에드워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맞아, 계약서는 읽어야 하는 거라고 했었지.
스티브가 말한 비슷한 것에 사인을 한 기억이 있기는 했다. 읽은 기억은 없었지만.
그렇구나, 그런 설명이 계약서에는 있었다면 하는 수 없지…….
아이튠즈 약관을 읽지 않고 동의했다가 아이패드에 읽기 기능을 붙인 인간 지네 패드의 부품이 되었던 열 살짜리 유대인 소년을 떠올리며 케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를 읽는 게 귀찮다면 그 정도 패널티는 감수할 수밖에. 어쩔 수 없네.
그는 스스로의 얼마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아주 빠른 순응력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올바른 자기평가였다.
또한 그의 가족들이 보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네 인생을 순순히 책임지려고만 하지 말고, 책임지기 전 단계부터 생각을 하고 살아줄 수는 없겠냐며 답답해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미성년자였다면 보호자의 권한으로 불공정 노동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 보호자-이 나이에 보호자를 대동하는 것부터가 문제라는 자각은 있었다.-가 끼어드는 순간 무시무시한 지옥문이 열리리라 확신한 케일리는 얌전히 훈련에 전념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근 한 달을 집에 연락하지 않았다. 뭐, 가출한다고 편지까지 남기고 나왔는데 큰일이야 일어나겠냐마는 저지른 일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끝난 일을 부러 되돌아보는 것은 물론이요, 후회라는 귀찮은 감정은 그의 생활수칙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지난 일은 하는 수 없으니 닥친 것만 처리하고 후회라는 단어를 깨끗하게 지운 케일리는 훌륭하리만치 무신경한 위장에다 남은 음식을 죄다 밀어 넣었다. 빨리 먹고 남은 강의가 끝나면 얼른 자야겠다.
아주 잠시간 침울했다가 금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식사를 재개하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스티브와 쟝이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얘, 괜찮은 건가?
아닌 거 같은데.
다년간 같은 직장에서 일하며 짬밥도 먹을 만큼 먹은 두 사람이 혹시 어쩌면 본인의 입으로 결코 둔하지 않다고 주장한 이 청년이 아주 독한 마음을 먹고 달랑달랑 부러진 팔을 끌고 훈련에 참가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뿐이지는 않을까 의심의 싹을 틔우고 있던 참이었다.
“너무 풀죽지 마. 어차피 훈련이 다 거기서 거긴데 뭘. 게다가 여기 임무는 좀 이상한 애들이 튀어나온다는 거 외에는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다더라. 누가 적인지도 구분 못하는 난장판에 뚝 떨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뭘. 우리 팀에서 마지막으로 계약했던 데가 리비아였거든. 카다피 죽을 때까지 거기 나가 있었는데 내 생각에 거기보다 끔찍한 데가 별로 없었던 것 같거든.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그다지 위로 같지 않은 위로에 케일리는 입에 담은 마지막 음식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스티브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반군과 정부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NATO군과 미군, 민간 군사업체의 용병들까지 섞여 개차반이 되었던 리비아 내전에 비하면 어딘들 괜찮지 않은 곳이 있으랴.
21세기 들어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내전과 비교해야만 하는 곳에 뚝 떨어진 것이 못내 서글프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한번 엎은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는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훈련이 힘들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라서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쨌든 너도 참 대단하다.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사인할 생각이 들기는 해?”
“사인이야 손가락만 성히 붙어 있으면 하는 건데요, 뭘.”
“그래 뭐……, 그렇기는 하지. 본인이 괜찮다면야 뭐…….”
어느새 침묵에 잠긴 사내들이 일사불란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야, 얘 좀 이상한 것 같아.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괜히 친해졌다가 봉변당하는 거 아니야?
쟤 좀 재밌을 것 같다고 말 걸어보자고 한 건 너잖아, 스티브 이 개자식아.
누가 이런 녀석일 줄 알았나 뭐.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심조차 없는 케일리는 깨끗하게 빈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로 돌아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남은 두 시간의 강의가 끝나면 재빨리 숙소로 돌아가 잘 수 있을 때 푹 자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에드워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끔찍하게 불만스러웠다. 언젠가는 그래야 할 날이 찾아오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심지어 거지같은 이빨 요정의 날갯짓과 함께 떨어진.- 새로운 파트너는 자신의 페이스를 완전히 망쳐놓고 있었다.
분명 처음 내걸었던 조건에 상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건 분명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으로 도무지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임무랍시고 어디 혼자 떨어뜨려놓고 오면 거기서 평생 눌러살 것처럼 불안한 새 파트너를 데리고, 제 나이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햇병아리들을 데리고 훈련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였다.
망할. 이래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인간 세계의 그럴듯한 격언 하나를 떠올리며 에드워드는 빠득, 이를 갈았다. 벌써 오후 내도록 지하시설 안을 돌아 다녔지만 평소 같았으면 빨빨대며 잘도 돌아다닐 상부의 머저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 한번 끝내주는 자리 비움은 자신의 항의를 무시하겠다는 완곡한 표현임에 틀림없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페어리를 시작해 직통번호가 있는 관리직 종사자들 전원이 내도록 전화통을 붙잡아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뻔할 뻔자였다.
개 같은 놈들. 이럴 때만 단합이 잘된다 그거지.
씩씩대며 지하기지 안의 행정업무 부서를 돌고 나온 에드워드가 캄캄 밤이 되어서야 숙소 건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건물 바깥의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던 아이작이 손을 흔들었다.
“한가한가 봐?”
씩 웃으며 담배 한 대를 건네는 손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본 에드워드가 칫, 혀를 차며 아이작에게서 한참 떨어진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 인생이 많이 심심하냐? 나한테 시비를 다 걸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행정부 갔다 왔나 보네? 거기 애들 지금 죄다 바캉스 가서 아무도 없었을 텐데.”
“엿 좀 먹어보라고 이딴 거지같은 훈련에 날 밀어 넣은 뒷감당이 무서워서 튄 게 아니라?”
“그럴 리가, 좀 있으면 발푸르기스의 밤이잖아.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는 거지. 게다가 거기 애들은 네가 임무 실패했다는 소식에 쌍수를 들고 좋아하면서 샴페인 터트려가며 축하파티까지 했는데 도망을 가기는 무슨. 걔들, 너 얼굴 비치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걸. 너도 참 나날이 의심만 많아지네. 그것도 병인 거 알지?”
아이작의 말대로 행정부를 장악한 사무직원들은 8할이 이종족이었고, 대부분이 장기 재직자로 에드워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애초에 에드워드는 -B 지구 안에서도 무소불위의 실적을 자랑하는 필드요원이라는 위치에서 각종 행정절차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굴어온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관리직치고 그와 사이가 좋은 직원이 없기는 했다.
그건 그렇고 일 한번 실패한 것 가지고 샴페인을 터트리다니. 녀석들을 위해 그 좋아하는 샴페인을 사와서 배가 터지도록 먹여주겠다고 다짐하며 에드워드는 짜증 섞인 숨을 내뱉었다.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반 이상 진심인 그 말이 튀어나오자, 아이작이 싱글싱글 기분 나쁜 웃음을 던졌다.
“왜, 때려치우기라도 하게?”
그 얄미운 물음에 울컥 분노가 치밀어 에드워드는 홱 고개를 돌리며 새빨간 눈으로 아이작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못할 것 같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어. 너 못 때려치우잖아. 여기 그만두면 갈 데는 있고? 아하, 오매불망 막내아들이 기나긴 반항을 끝내고 귀환하기만을 기다리는 애쉬포드 님의 품으로 돌아가시려고? 그런 거라면야 대환영이지. 우리도 애쉬포드 님께서 매번 왜 네가 직접 전화를 받지 않느냐며 묻는 통에 변명할 거리가 슬슬 떨어지던 중이거든. 왜, 너 돌아간다고 전보라도 넣어줄까?”
“……시발.”
비열한 인간 놈의 주둥아리에 코르크 마개를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며, 에드워드는 빠득 이를 갈았다. 이상하게 최근 들어 이 갈리는 일이 많았다. 이러다가는 치아가 남아나지를 않겠다는, 뱀파이어에게는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었다.
듣기만 해도 3년은 재수가 없을 것 같은 그 이름에 진절머리를 치며 에드워드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망할 노인네. 노망난 노인네.
‘왜 그 노인네 이름을 꺼내고 지랄이야.’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 아이작의 입에서 줄줄이 비엔나처럼 딸려 나올 애쉬포드 타령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짐작하지도 못할 그 노인네는 순혈 뱀파이어들의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원로 중 하나였다. 혹자의 말로는 영국이 아직 공룡들의 놀이터일 때부터 그 늙은이도 살아 있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는데,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고 그럴 리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올 정도로 무지막지한 시간을 살아온 것임은 틀림없었다.
나이를 먹었으면 곱게 늙어서 나잇값이나 할 것이지, 늘그막에 수치도 모르고 새로 얻은 새파랗게 어린 두 번째 와이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아들을 애지중지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 늙은이의 애지중지를 당했던 당사자 에드워드는 두 주먹 불끈 쥐고 가운뎃손가락으로 쌍탑을 쌓은 후 멀리멀리 도망치는 것만이 자신이 살아남을 길이라는 것을 애초에 파악한 바다.
자신이 끔찍한 식습관을 가지게 된 데에도 어렸을 때부터 영재교육을 한답시고 순혈 뱀파이어들의 고약한 피만 주구장창 먹여댔던 늙은이의 엽기적인 애정표현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오만함의 맛이라니…….
혀를 대는 것만으로도 내장이 봉기를 일으킬 것 같은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어린 시절 내내 입에 달고 살아야 했던 에드워드는 이 귀한 걸 토해낸다고 사지가 묶여 식사를 했던 기억까지 통틀어 그 집안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물론 뱀파이어라는 것이 인간 아이와는 달리 아주 튼튼하기는 했지만, 만일 자신이 인간이었다면 애쉬포드 늙은이의 내리사랑은 악질적인 아동학대로 종신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순혈 뱀파이어의 피가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별미 중의 별미로 손꼽히며, 그것을 통해 상대방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동족상잔의 터부인 동시에 그것을 허락하는 행위가 가장 궁극적인 사랑의 형태로 치부된다는 것을 떠올리면 에드워드의 특이한 입맛만 아니었더라면 애쉬포드는 아주 좋은 부모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 부자의 안타까운 점이었다.
한낱 미물도 제 새끼는 귀하다고 하지만, 낫살이나 먹은 까마득하게 높은 연배의 늙은이에게 고약한 식생활을 강요당하는 것은 산지옥이었다.
물론 흡혈에 대한 간섭을 제외하면 그는 에드워드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저택에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고 해도 우리 막내가 불을 쓸 줄 안다며 샴페인을 터트릴 팔불출이었다.- 두 팔 벌려 감싸 안을 포용력 있는 부모였지만, 이 경우 좋은 것을 먹이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이 부자간의 간극을 돌이킬 수 없이 넓혀버린 원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 그대로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주며 금이야 옥이야 키운 막내아들에게 철저히 미움받는 애쉬포드는, 심지어 자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성년이 되자마자 출가한-에드워드 스스로가 결코 가출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중이었다.- 에드워드의 뒤를 그림자처럼 파헤치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애쉬포드를 향한 에드워드의 평가는 단호했다.
소름 끼치는 스토커 영감탱이.
에드워드가 본인의 신선한 파트너가 그와 비슷한 영감탱이 하나를 달랑달랑 매달고 살았다는 것을 알면 동질감을 느낄지도 몰랐지만 서로에 대해 별달리 아는 것이 없는 두 사람의 거리감은 쉬이 좁혀지지 않을 터였다.
애쉬포드를 향한 에드워드의 평가를 동족들이 들었다면, 순혈 뱀파이어의 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있는 그들이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갈 일이었다.
남들은 없어서 못 마신다는 걸 싫다고 부득불 도망다니는 에드워드나, 낫살이나 먹어서 늘그막에 낳은 아들에게 좋은 걸 먹이겠다고 쫓아다니는 노인네나 그들의 눈에는 별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로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 짧지는 않았던 생에서 대부분이 암흑기로 기억된 이름을 툭 던져놓고서 아이작은 실실 웃으며 태평하게 담배나 태우고 있었다.
만약 안정적인 혈액 팩 공급을 해주고 뱀파이어를 고용하는 직장을 발견한다면 아이작 저 새끼부터 거꾸로 매달아놓고 때려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드워드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까.” 하며 아이작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운을 뗐다.
“네 파트너 말이야. 다른 훈련생들이랑 제대로 얼굴도 마주치기 전에 북부 라이칸 족장네 아들내미랑 거하게 한판 했다더라.”
오늘 점심 무렵 방에서 쫓아냈던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짧은 사이에 경이로운 속도로 사고를 치고 다닌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 숨을 뱉으며 아이작을 쳐다보자, 말을 꺼낸 본인도 웃긴지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케일리가 라이칸이랑?”
“걔 말고 또 있어? 웨일즈 말로는 그 팔을 하고서도 2대 1로 라이칸 두 마리랑 비등비등했다던데. 총도 없었던 모양이고……. 거참, 희한한 인간이야. 생긴 건 데스크잡 하면 딱 어울리게 순둥한데 말이야.”
이제 막 사십 대 초입에 들어간 아이작의 눈에는 물론, 에드워드의 눈으로 보기에도 한참은 어린 케일리였다. 두 남자는 겉가죽만큼은 신기하리만치 정상적인 신입요원을 떠올리며 그의 행동 양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이 나이를 먹은 탓인지, 아니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B 지구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종류의 이종이 모여들었고 다양한 사고방식을 경험했지만 케일리라는 인간에게는 단순히 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향은 아니었지만 말이었다.
“첫날부터 라이칸 애들한테 단단히 반감을 산 모양이던데, 안 그래도 인간들한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녀석들을 그렇게 불질러놨으니 볼 만하겠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막말하는 아이작을 보며, 인간이라는 족속의 습성을 다시금 되새기며 에드워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긴 건 말짱한 게 왜 눈을 떼자마자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그 괴상쩍은 성격을 가지고 어째서 분란을 일으키는 게 귀찮다는 생각은 못하는 걸까.
도무지 그 흐느적거리는 정신머리로 지나가는 라이칸과 시비가 붙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표정을 구기며 생각에 잠긴 에드워드를 향해 아이작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몇 시간 뒤면 행군인데 네 식량은 군장 안에 따로 챙겨뒀다고 에일이 전해달라던데. 괜히 굶었다가 옆에 있는 음식에 손 대고 그러지 말고.
뭐 너라면 별로 걱정할 것도 없기야 하겠다마는, 그래도 모든 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니까 훈련 나간 애들 걱정도 해야지, 명색이 책임잔데.”
말하는 아이작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드럼통에 쑤셔 넣어 콘크리트와 함께 바다에 던져버려도 입만 살아남아 대서양 한가운데를 표류할 놈과 입씨름을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에드워드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식생활 이야기까지 건들려서 이 이상 속을 뒤집고 싶지는 않았다. 애쉬포드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는데, 더럽게 맛없는 보급 혈액 팩을 떠올리면 안 그래도 바닥에 처박던 기분이 땅을 파고 내려가 지구 반대편으로 뚫고 나갈지도 몰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에드워드가 벤치에 앉아 몇 개비째인지 모를 줄담배를 무는 아이작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는 원래 향하던 연수용 건물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 훈련은 새벽부터 시작될 예정이었고 조금 있으면 자정이 다 되는 시간이었다. 밤마실을 나갔다 제시간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산책이라도 가게?”
뒤통수를 향해 날아온 아이작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사방에 똥개 누린내가 진동하는 판국에 잠이 올 것 같냐?”
어쨌든 훈련에는 참가해주시겠다는 뜻이라 고개를 끄덕인 아이작이 어느새 사라진 에드워드의 뒷모습에 대고 중얼거렸다.
“쟤는 어차피 시키면 다 할 거면서 꼭 입으로 매를 벌더라.”
그의 말이 매우 가까운 미래에 또다시 현실에서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