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3. Edward in wonderland (5)
이끼가 무성한 바위와 나무 틈에 자리를 잡고 각각 몸을 숨긴 채 상대방의 동향을 살피던 사내들은 하루 온종일 완전군장을 짊어지고 정글 탐험을 한 덕분에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신체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소와 다름없이, 혹은 그 이상으로 생생한 상태로 완벽히 야생에 적응한 사내들은 이미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밀림 한복판을 이 잡듯 뒤져 찾아낸 두 남자를 당장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사내들의 계획은 이 나흘간의 시간을 이용해 건방진 블론디를 한계까지 몰아넣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의 말에 따르면 나사를 두엇 풀어놓고 다니는 것 같다던 케일리라는 놈은 별달리 존재감이랄 것이 없었다. 불쌍하게도 팀을 잘못 짜 함께 당하게 된 것은 가여웠지만, 전장에서는 줄을 잘 서는 것도 운이요, 능력이며, 업이었다.
오늘 새벽 훈련장에 처음 얼굴을 내보인 블론디는 존재감 없는 제 팀원과는 상황이 달랐다. 훈련에 늦게 합류한 이유가 부상 때문이라는 것을 명백히 짐작하게 만드는 케일리와는 달리, 그와 면식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블론디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채용 시험 도중에 불쑥 튀어나온 놈은 번드르르한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깔아보는 건방진 눈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건방진 블론디는 팀 대항 훈련에서 타인과 공조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오만한 콧대를 세우며 다른 이들이 삼삼오오 패거리를 만드는 그 순간에도 팔짱 끼고 남 일처럼 구경만 했다. 거기서 이미 훈련생들 대부분이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결정타는 단연, 헬기에 올라타면서 내뱉은 혐오 어린 한마디였다.
“저런 쓰레기들을 누가…….”
거저 줘도 무르겠다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자신들을 쓰레기라 칭한 블론디의 발언은 불붙은 시한폭탄에 석유를 끼얹은 꼴이 되었다.
같은 헬기에 올라탄 두 개의 유닛은 전원 인간이었고, 그들은 안타깝게도 누구누구와는 달리 눈치가 매우 빠른 데다 분위기 파악도 잘했다.
블론디가 진심으로 자신들을 쓰레기 취급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두 개의 유닛이 한마음 한뜻으로 동맹을 맺은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기껏해야 두 명. 심지어 한 놈은 팔 하나를 덜렁거렸다. 그들은 케일리와 블론디가 설사 그린베레의 최정예 요원이라고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수의 차이란 압도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건방진 주둥이에 예의범절이라는 것을 아로새겨주리라. 사내들이 혹사시킨 몸을 이끌고 부득불 그들을 찾에 헤맨 데에는 그런 애틋한 이유가 있었다.
총 스물로 이루어진 동맹 유닛 안에서 열 명이 제비뽑기의 꽝을 뽑은 열이 팀을 나눠 정글을 뒤졌다. 셋, 셋, 넷으로 구성된 정찰팀이 놈들을 발견하면 그때부터 계획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밤에는 이쪽도 시야의 한계가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그것은 상대방에게도 마찬가지일 테였다. 수적 우세로 인해 이쪽은 기 싸움으로 하룻밤을 꼬박 세워도 다음 날 교대인원이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두 놈의 피를 말리는 데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네 명의 사내들은 적어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전투경험이 있다면 풋내기라 해도 알 수 있도록 멀리서부터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보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직접 대치할 상황이 생길 테니,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몸을 숨긴 채였다. 자신들이 떠나는 소리가 없는 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의 존재를 견제하느라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하고 밤을 지새울 것이었다.
흐흐. 한번 된통 당해보라지.
그 건방진 눈에서 눈물 콧물을 줄줄 뽑으며 더러운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꼴을 보고야 말 테니 기대하라고.
본래가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은 성정의 사내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그런 생각으로 밤을 새울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있었는데…….
“야, 그레이. 뭐가 오는 것 같은데?”
스물에 입대해 악명 높은 외인부대에서만 17년을 구르다 얼마 전 전역한 그레이는 근처의 바위 밑에 자리를 잡았던 허드슨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코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레이를 타박했다.
“뭐? 오기는 뭐가 온다는 거야. 야생동물이겠지.”
울창하게 우거진 숲에는 훈련생들의 기척 외에도 이곳의 원 주민인 동물과 벌레들이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레이는 허드슨이 들었다는 소리 또한 그런 것이라 가볍게 치부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애매한 시야를 가지고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잠복 중인 적에게 다짜고짜 달려들 멍청이가 세상천지에 존재하리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아니야, 우리 쟤들이랑 한 40미터 정도 거리를 뒀나? 분명 방금 전에 그 정도 너머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니까. 게다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
타타타타타타, 탓!
“……는 거 맞았잖아, 시발!”
부웅.
바위를 밟고 도약해 잠시간 허공에 떠오른 케일리는 달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망설임 없이 겨누었다.
“안녕하세요, 우리 협상하지 않을래요?”
탕, 탕!
그레이와 허드슨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허공으로부터 내려온 평온한 목소리를 이어 정글의 어둠을 찢어발긴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방아쇠에 겨눈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발포한 것 같기도 했다. 워낙 경황이 없어 그 발포음이 자신의 것인지, 상대방의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거의 동시에 바닥을 향해 몸을 굴린 둘이 정확히 가운데에서 부딪혔다. 같은 방향으로 몸을 던진 탓이었다.
“시발, 뭐 뵈는 게 있어야지!”
그레이가 소리쳤다.
“윽, 너 이 자식, 팔꿈치로 날 쳤어……!”
허드슨이 침음성을 내며 그레이와 거하게 부딪힌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달려든 놈이 총을 쐈지만 헛질이었다는 점이었다. 허드슨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헛웃음을 뱉었다.
“하하, 뭐야. 눈에 뵈는 것도 없는 주제에 잘도 여기까지 달려올 생각을…….”
“…….”
“…….”
주르륵.
귓불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요, 귀가 눈물 콧물을 흘릴 리도 없었다. 턱을 따라 툭 떨어진 그 액체를 엄지로 훔쳐낸 그레이가 젖은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지고 갔다. 흙내와 짭쪼름한 소금기가 섞인 비린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훅, 코를 찌르는 익숙한 냄새가 아니더라도 그것의 정체는 명백했다.
“피…….”
찍어 먹은 후에야 현실을 받아들인 그레이가 핏발 선 눈으로 비척비척 일어났다.
뭐, 협상? 혀업사앙?
협상을 운운한 건 자신들을 쓰레기 취급했던 블론디가 아니라, 존재감이 희박하던 허약한 외팔이 놈의 목소리였다.
밤산책에서 만난 이웃사촌을 대하듯 예의 바른 인사부터 시작된 그 제안은 재수가 옴 붙을 정도로 기분 나쁜 귀족영어였다. 그레이는 영국 놈들의 못 알아먹을 영어 중에서도 저 이죽거리는 억양을 가장 싫어했다. 협상. 그래 말 한번 잘 꺼냈다.
“협상, 조오치.”
캬악, 퉷.
피 섞인 가래침을 뱉은 그레이가 씹어 뱉듯 말했다. 허드슨이 이마를 짚었다.
저놈 저거 맛이 갔구먼.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을 텐데 쓸데없이 끼어들었다 피 볼 일도 없으니, 다른 애들 끌고 발 뻗고 잠이나 잘까…….
동료애라고는 눈을 씻고 뒤져도 찾을 수 없는 합리적인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 슬금슬금 엉덩이를 뺀 허드슨이 수 미터 떨어진 뒤편에 잠복하는 팀원 둘을 향해 말했다.
“조나단, 필, 여기는 그레이한테 맡기고 우린 베이스캠프로 복귀!”
바위틈에 몸을 숨겼던 조나단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눈에 뵈는 것도 없는데 여기 잠복해 있는 이유가 뭔지, 나는 누구요, 여기는 어디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에 들어갔던 참이었다.
“그레이가 남겠대요?”
그 아저씨가 그럴 리가 없는데.
같은 연대 소속으로 그의 밑에서 수년을 굴렀던 조나단의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이어, 역시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뿌리 등성이에 걸터앉은 필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잘됐네, 오늘 끝나면 사흘은 푹 잘 것 아냐. 난 불침번 서는 게 제일 싫어. 이게 싫어서 전역했는데 훈련에서 불침번을 서게 되다니 말도 안 되지.”
재수가 없게도 나흘 내도록 이어질 예정이었던 블론디와 케일리의 피 말리기 작전의 첫 주자를 맡게 된 필은 훈련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 외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는 중도파였다.
쓰레기 취급을 당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시선에서 보면 돈을 받고 무력을 제공하는 대부분의 프리랜서 용병들은 쓰레기였다. 너도 쓰레기, 나도 쓰레기. 다 비슷비슷한 것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부스럭부스럭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베이스캠프가 있는 쪽을 찾기 위해 손전등을 켠 필에 조나단도 냅다 그의 뒤를 따랐다.
어휴, 하마터면 여기서 하룻밤을 잠도 못 자고 지새울 줄 알았네.
불빛을 따라 정글 한복판을 향해 걸음을 내딛은 필은 안타깝게도 등 뒤에서 들린 끔찍한 비명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그레이 너 이 새끼!”
목소리는 허드슨의 것이었다. 그레이와 미국에 있던 시절부터 알던 사이이며 그린베레에서 복무하다 민간업체에서 용병 일을 하다 -B 지구의 입이 쩍 벌어지는 연봉에 이끌려 지원했다는 남자였다. 화려한 경력과는 달리 지나치게 나사가 빠진 모습이 신뢰를 더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주일간의 훈련에서 보여준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으흐흐, 허드슨. 그 새끼 지금 거기 있지? 꽉 붙잡아두라고!”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들리는 소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필과 한마음 한뜻이 된 조나단 역시 걸음을 멈추고 들고 있던 손전등을 소란스러운 쪽을 향해 돌렸고. 필과 조나단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냐, 저건?”
“글쎄……. 허드슨이라고 좋아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어딘지 우울한 표정을 한 사내, 케일리는 그 두 배는 될 법한 근육질의 허드슨에게 꼼짝달싹 못하게 속박당한 채였다. 문제는 허드슨이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필사적으로 케일리를 두 팔 가득 끌어안고 있다는 부분이었는데, 위험인물을 속박한 게 아니라 마치 저를 버리고 떠나는 이혼한 여편네를 잡아 가두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허드슨의 거대한 궁둥짝에 새겨진 흙투성이 군화자국이었다. 그 오묘한 광경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의기양양 지켜보는 그레이까지.
눈에 뵈는 게 없으니 허드슨을 방패로 썼군.
저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은 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료를 인간 방패로 쓸 생각을 다 하냐.
진짜 군대 있다 온 거 맞아?
필과 조나단의 사이에서 어떤 눈빛이 오가든 신경 쓸 바가 아닌 그레이는 크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손전등 덕분에 더 잘 보이게 된 자신의 동료와 적을 향해 말했다.
“어이, 비실이. 협상이라고 했나?”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악당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마음먹은 듯한 그레이가 철컥, 들고 있던 소총을 장전했다.
“야, 이 미친놈아! 거기서 쏘면 난 무사할 것 같냐?”
얼떨결에 케일리가 있는 방향에 내던져진 허드슨은 얼떨결에 케일리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말대로 이 거리에서 쏘면 둘 다 끝장이다. 들고 있던 권총은 예상치 못한 습격에 놓친 지 오래였다.
케일리는 역시 시야확보란 전투에 있어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기본요건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라고 했나. 아무래도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 네놈한테 무슨 카드가 있는지 말이나 해봐.”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시간 생각에 잠긴 케일리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과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등 뒤의 사내를 한 팔로 제압하고 총을 쥐러 가는 사이, 눈앞의 새끼 그리즐리 베어에게 당할 것 같았다. 적의 위치를 파악해 바위를 딛고 도약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거리감이 별로였다.
아무래도 시야가 짧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척을 따라 한 발을 쏘자 반대편에서도 총성이 들려오는 걸 보니 확실히 생각보다 인원이 많다는 사실은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에게 맞히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빨리 정리하기 위한 위협사격의 취지였지만 쏠 상대를 잘못 골랐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총을 맞은 새끼 곰이 생각 외로 흉폭해 보였으니 말이다.
혹시나 싶어 등 뒤에서부터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사내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움직여본 케일리는 빠르게 그 계획을 단념했다. 체급으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는데, 급소를 방어하며 자신을 제압하는 것이 영락없는 프로의 손길이었다.
“제 생각은 이래요.”
어쩔 수 없이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협상카드를 꺼내기로 한 케일리를 향해 그레이가 말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조나단과 필도 대체 무슨 카드를 가졌기에 저런 등신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에 케일리의 입을 주시했다.
“이쪽도 곱게 보내드릴 테니 그쪽도 저를 곱게 보내주세요. 그리고 훈련 내내 결승에 다다르는 데만 집중하는 거죠.”
아주 평화로운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결코 성사될 수가 없는 책이었다.
“……미쳤냐?”
만약 정말로 그런 것을 제안하려 했다면, 다짜고짜 달려들어서 총부터 쏘지는 말았어야 한다. 대부분의 안건에 대해 과격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편인 그레이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협상이라는 건 일단 대화로 시작하자는 의사표시였다. 그걸 알고 있는 놈이 협상을 하자며 총을 갈길 수는 없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되도 않는 요구를 하는 건가 싶어 그레이가 헛웃음만 짓는데 케일리가 갑자기 허공을 향해 제법 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에드워드, 저한테 빚졌잖아요.”
조나단도, 필도, 허드슨도, 그레이마저도 그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혹시 진짜 뇌에 살짝 문제 있는 놈 아닌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 얘 계속 잡고 있어야 해?’ 그레이를 쳐다본 허드슨이 울상을 지었다. ‘어, 잡고 있어.’ 단호한 그레이의 눈빛 덕분이었다.
케일리 정신 이상설은 바로 다음 순간 숲 너머에서 들려온 대답 덕분에 빠르게 막을 내렸다.
“누가 네놈한테 빚을 져?”
제법 떨어진 어둠 저편으로부터 불쾌감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혼자 달려가서 총부터 쏴 갈기더니 심지어 잡히기까지 한 케일리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어 욕부터 쏟아붓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대가리에 총을 맞은 것도 아닌 게 갑자기 뜬금없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모습에 부아가 날 법도 했다.
뜬금없이 무슨 빚 타령인가 싶어 스코프 너머로 케일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대답이 돌아왔다.
“한 번 구해드렸잖아요, 제가.”
“…….”
“갚으실 거죠?”
저 생각 없는 놈이 뭘 믿고 날뛰나 싶었는데…… 날 믿고 그런 거로구나.
어쩐지 속전속결이니 되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더라니. 밤새도록 대치하더라도 별달리 피곤해지지 않는 뱀파이어와, 밤새도록 대치하면 당연히 피로가 누적되는 인간의 입장이 다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본인이 죽을 위기를 감수해가면서 뛰어드는 게 보통 미쳐서 가능한 일이냐 그 말이다.
속전속결.
그러니까 지금 속전속결로 귀찮은 놈들 좀 끝장내 보라고 나한테 지랄하는 거 맞지, 저 새끼.
에드워드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울분인지 억울함인지, 그것도 아니면 마냥 흐느적거리며 사고만 칠 것 같던 파트너가 의외로 생각이라는 걸 한다는 부분에 대한 놀라움인지 판가름 내릴 수 없었다.
뭐가 정답이든, 그게 목숨빚까지는 아닐지언정 자신이 저 머저리한테 빚을 졌다는 말 자체가 틀리지 않았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시발…….”
자그마하게 돌아온 욕지거리에 케일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과연, 협상이라는 건 이렇게 하는 거였군요.
소년기의 자신에게 사격을 비롯해 살아가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다양한 기술을 전수해준 전직 군인 프리랜서 용병을 떠올리며 케일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도넬리. 다음에 우연히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꼭 보답할게요.
“제 생각에 그레이라는 친구가 절 잡은 분의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총을 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럼 정리 가능하겠죠?”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레이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에드워드가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내가 아무리 만성빈혈에 시달린다지만 이깟 걸 해결 못할 것 같냐?”
기척 하나 없이 지척에 다가온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총구를 겨눈 그레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건방진 블론디의 손 안에서 사랑스러운 제이니의 총구가 껌종이마냥 우그러지고 있었다.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제이니의 총구를 우그러뜨린 파렴치한 블론디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그레이를 무시한 채, 허드슨에게 잡혀 있던 케일리가 대답했다.
“뭐, 돌다리도 두들겨보라잖아요.”
“난 콘크리트 다리거든.”
“콘크리트가 시멘트 굳혀서 만든 돌 아니었던가요?”
“…….”
눈앞이 새빨갛게 변한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닐까. 오랜 기간 거친 외인부대를 구르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각종 특수상황과 한계치를 경험했다 생각해온 그레이였다.
자만이었다. 세상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미친놈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분노 조절 기능을 간단히 마비시켰다.
저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다.
씨익씨익, 제이니를 붙잡은 블론디를 총으로 갈겼다가는 내부에서 실탄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방아쇠에 건 손가락을 빼내는 그레이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가 곧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래, 무기가 제이니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야.
총구…… 총구 정도는 교환하면 되는 거라고. 내 제이니를 저 빌어먹을 블론디한테 강간당하도록 두 눈 멀쩡히 뜨고 내버려둔 것 같아 아주 시발스럽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벌어진 일이고……크흑.
울분을 삼킨 그레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힘껏 쥐고 있던 제이니, 그의 소총에서 손을 뗐고 에드워드는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을 보란 듯이 진흙 바닥에 처박았다.
“너, 너 이 잔인한 새끼!”
저도 모르게 흙바닥에 내팽개쳐진 제이니를 따라 무릎을 꿇고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는 그레이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아직 한 것도 없는데 잔인이고 자시고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제놈 목숨보다 총이 중요하다 뭐 그런 건가?
이 병신 같은 기관은 사람 뽑을 때 대가리에 뇌가 제대로 들었는지부터 체크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수십 년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주장하는 걸 무시하더니 결국은 이런 놈들까지 기어들어 오게 만들었군 그래.
스스로가 속한 조직에 대해 뼛속까지 스며든 깊은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며 에드워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네놈이 걱정해야 하는 건 총 따위가 아니라 네 목숨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한심하다는 듯 머리 위로 떨어지는 블론디의 목소리에 그레이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갔다.
목숨……. 그래, 목숨 좋지. 근데 사람이라는 게 가끔은 목숨보다 소중한 걸 지켜야 할 때가 있는 법이거든. 이 빌어처먹을 시발놈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제이니를 한 손으로 움켜쥔 그레이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넌 오늘 뒤졌다, 이 새끼야.
얼굴만 반반한 블론디 네놈의 그 잘난 쌍판부터 재수 없는 말을 씨불거리는 자랑스러운 주둥이까지 착실히 곤죽을 만들어주마.
자신의 사랑스러운 제이니에 의해 개차반이 될 미래의 블론디를 상상하자 1마이크로그램 정도 나아진 기분으로 그레이는 음습한 미소를 띠었다.
너 죽고 나 살자.
고개를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레이가 진창에 구른 제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방아쇠도 아니요 탄창도 아닌 개머리판을 움켜쥔 그가 손에 든 총을 처음 제조사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용도로 휘두른 것은 거의 같은 타이밍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웅!
순식간에 에드워드의 멱살을 휘어잡은 그레이가 놀란 기색 하나 없는 뻔뻔한 머리통을 향해 있는 힘껏 소총을 휘둘렀다. 한 여름 해안가의 수박 깨기처럼 산산조각 나기를 기도하며 내리찍은 일격을 에드워드는 피하지 않았다.
뻐억.
머리통에 꽂힌 소총을 바라보며 그레이가 크흐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흘려보냈다.
제대로 먹혔군, 제대로 들어갔어.
손맛으로 제이니의 복수를 이룩해낸 것을 자축하는데, 잡고 있는 멱살의 무게가 변함없었다.
‘어라? 기절이라도 했으면 좀 무거워져야 정상인데.’
환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들어 블론디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낌새가 영 이상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쪽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필과 조나단의 경악 어린 표정이었다.
“어, 니네는 왜 거기서 그러고 서 있냐?”
튀어나간 물음의 대답은 바로 코앞에서, 낯선 목소리로 돌아왔다.
“네놈의 안쓰러운 머리통에 제대로 된 뇌가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조언해주고 싶은 거 아닐까 싶은데?”
블론디!
이죽거리는 건방진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린 그레이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어라? 왜 목소리가 안 나가. 지금 저 블론디 자식한테 소리를 지르려고…….
“컥……!”
한 타이밍 늦게 복부를 강타한 엄청난 충격에 수 미터를 날았다. 말 그대로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그레이는 나무 한가운데에 꽂혀 컥컥, 기침도 나오지 않는 듯 걷어차인 복부를 감싸 쥐었다.
시발, 저 새끼 다리는 무슨 강철로 된 거냐? 대가리는 또 어떻고. 저게 무슨 어이없는 돌대가리가……, 쿨럭.
“그럼 하나는 처리했고.”
야, 그레이가 저렇게 닭털처럼 바람에 쓸려 날아갈 무게였냐……?
넌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저 덩치가 닭털이면 시발 내 여친은 초경량 오리털이겠다.
눈빛으로 오간 대화는 길지 않았다. 마치 개미새끼 하나를 밟아 죽였다는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뚝, 뚝, 목을 꺾은 에드워드가 등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손전등을 들고 선 필과 조나단이 그 새파란 시선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고, 에드워드는 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허드슨을 향해 말했다.
“어이, 인간.”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에 인질을 놓아줄 수도 없고, 그레이를 백업할 수도 없어 현상유지만 하던 허드슨이 별안간 돌아온 화살에 대답했다. 아무래도 케일리가 아니라 자신을 뜻하는 것 같았다.
“나…… 말인가?”
동료가 날아가는 꼴을 보면서도 케일리를 놓지는 않은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으나, 그 녀석에게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런 걸 인질이랍시고 잡고 안도했을 불쌍한 인간 놈을 바라보며 비죽 웃은 에드워드가 “그래, 네놈.” 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꾸라지 같은 새끼 안 놓치게 잘 좀 붙잡고 있어. 어디로 미끄러질지 모르니까.”
그것이 제 일행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허드슨이 케일리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 틀었다. 에드워드는 “엉?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개소리. 허튼짓을 하면 네 일행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사……?”
웃기지도 않는다는 양 코웃음을 친 그가 말했다.
“내가 언제 무사히 붙잡고 있으라든? 도망 못 치게 잘 붙잡고 있으랬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볍게 땅을 박찬 에드워드가 순식간에 필과 조나단의 코앞까지 달려갔다. 반사적으로 어깨에 멘 소총을 집은 것은 필의 행운이었다.
타앙!
조준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실탄이 발사되었다.
휴, 시발 간 덜어지는 줄 알았네.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 조나단은 그러나 정면으로 총에 맞고도 뛰어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 에드워드에 들고 있던 손전등을 툭, 떨어뜨렸다.
“아, 시발! 저거 인간 아니잖아!”
조나단으로부터 튀어나온 외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양 필의 입에서 컥, 유쾌한 돌림노래가 이어졌다. 블론디는 자비롭게도 필이 그레이처럼 날아가 처박히지 않도록 배려해주시어, 그의 팔뚝을 움켜쥐어 고정시킨 후 폐와 위장 사이를 정확히 노려 주먹을 꽂아주셨다.
부웅, 허공에 떠오르는 필을 블론디가 붙잡아 정확히 같은 곳을 노려 이번에는 무릎을 올렸다.
뻐억.
두 번째 타격에는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필의 벌어진 입에서 하얀 거품만이 올라왔다. 내장이 뒤섞이는 충격에 눈을 까뒤집은 그는 팔을 놓고 탈탈 손을 터는 블론디의 뒤에서 복부를 움켜쥔 채 무너져 내렸다.
그 딱한 모습을 바라보며 조나단은 으아악! 아악!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지난 한 주간의 훈련에서 겪은 바, 라이칸이 관통형 총상을 회복시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사십이 분. 그러나 거품을 물고 움칠거리는 것이 고작인 필을 정리한 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블론디는 총 맞은 어깨를 아무렇지 않게 휘휘 돌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닌 게 확실하고…… 저건 대체 정체가 뭔데?
애당초 라이칸이 라이칸이라는 걸 알게 된 경위는 그들이 시도 때도 없이 흉물스러운 귀며 꼬리털을 휘날리고 다녀준 덕분이었다.
인간 훈련생들 중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동물의 귀와 꼬리를 달고 다니는 모습을 유쾌하게 지켜볼 비정상적인 심미안의 소유자는 없었기 때문에 인간과 라이칸만이 철저히 분리되었을 뿐, 그들이 실제로 라이칸을 알아보는 법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귀나 꼬리를 숨긴 라이칸들은 다른 라이칸들의 배척을 받지 않았으니 아주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고로, 그들은 인간과 같은 외견의 상대를 종까지 알아볼 만큼 이종족에 박식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세발가락 나무늘보나 두발가락 나무늘보나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종이다. 놈들의 발가락이 두 개든 세 개든 나무늘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겠는가.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평균이라는 게 있는 손가락 숫자는 그렇다 치고, 황인종이나 백인종이나 흑인종까지 포함해 사소한 차이점이 있을지언정 종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다 같은 사람과 사람족 사람속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히 사람 꼴을 하고 있는 놈이 진짜 사람인지 아닌지를 뭐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블론디는 참으로 멀끔한 사람 꼬라지를 하고 필을 내팽개친 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시발…….”
대 이종족 전략전술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라 하였던가. 이미 일주일이 흐른 이 시점에서 다른 훈련생들을 의심할 필요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하필이면 엿 한번 먹여보잡시고 잠까지 포기한 상대가 이종족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필은 빠득 이를 갈았다. 그 망할 교관 놈들은 자신들이 라이칸과 패싸움을 할 때도 실실 웃으며 구경만 하더니 이젠 뭔지도 모를 괴물을 섞어놓은 모양이었다.
쓰레기라고 했나.
그래, 저 빌어먹을 블론디가 왜 쓰레기는 상대하지 않겠다 단언했는지 알겠다.
네놈처럼 온몸이 방탄조끼인 새끼한테-심지어 뚫린 조끼가 순식간에 회복되는 마법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같이 연약한 피와 거죽을 가진 인간은 입으나 마나 한 거적데기 조끼겠지. 그래, 그런 의미로 내뱉은 쓰레기라면 이해한다.
그러니까…… 우리 그만하지 않겠어?
머릿속을 맴도는 기나긴 문장이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입버릇 더러운 인간인 줄 알고 적당히 약이나 올리려던-말 한마디로 시작되었다기엔 지나치게 본격적인 괴롭힘이기는 했지만.- 필의 입장에서는 똥을 밟은 격이었다. 심지어 먼저 험한 말을 한 건 블론디 쪽이었다. 이 정도는 가벼운 장난으로 넘겨줘도 될 것 아닌가. 울컥 치미는 억울함에 조나단이 입을 연 순간.
“야, 너 지금 억울하지?”
몸이라도 풀듯 어깨를 돌리던 블론디가 주먹을 쥐며 그렇게 물았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두 개의 손전등에 호러영화를 연상시키는 음영이 진 번드르한 블론디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 같으면 안 억울하겠냐, 라는 말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삼켜내며.
“내가 딱 그 심정이거든.”
아니, 죄 없는 사람 쓰레기 취급한 걸로도 모자라 속 시원하게 쥐어 패놓고 뭐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리며 블론디를 쳐다보자 그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분노에 찬 서슬 퍼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뀐 놈이 성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해했어! 지금 내 앞에서 그런 얼척 없는 놈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네가 뭐가 억울한데……?”
안타깝게도 이를 악문 필의 입술 사이로 나간 말은 머릿속을 맴도는 험악한 것과는 다소 상반된 내용이었지만, 어찌됐건 그의 억울한 마음을 대변하기는 했다. 지금 억울해야 할 사람은 이쪽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필을 향해 블론디가 픽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생각을 해봐, 네놈들이 처음부터 쓸데없는 오해로, 쓸데없는 행동력을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네놈들도 아주 평화로운 밤을 보냈을 거라 그 말이지.”
“……오해?”
“내가 헬기에서 쓰레기라고 했다고 찌질하게 이 갈다 아무래도 빡이 치니 보복할 겸 쫓아온 거 아니냐? 저기 나무에 처박힌 놈이랑, 네놈 옆에 웅크린 놈까지 전부 헬기에서 본 놈들인데 아니라고 하게?”
이죽거리며 덧붙이는 말에 필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저 블론디 놈이 말하는 방식이 매우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틀린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 뭐 맞는 말이기야 하지. 물론 제비까지 뽑아서 편 짜고 수색반까지 꾸리는 건 나도 반대했다고. 난 옛날부터 야간행군이 제일 싫었단 말이야.
하지만 헬기에서 들었을 때는 나도 좀 울컥했다고. 진짜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도록 감정을 팍팍 담는 네놈의 얼굴을 보고 울컥 안 할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런 걸 보고 뭐라고 하더라……, 자업자득?”
“이 비겁한 새끼, 네놈이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으면 이런 쓸데없는 일로 개고생 할 일도 없었…… 헉!”
“개고생?”
누가? 네놈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묻는 블론디의 괴력에 의해 낫살이나 먹어 허공에 부유하는 새로운 감각을 느끼며 필은 숨을 들이켰다.
야, 시발! 나도 직업상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비롯한 상하체 단련까지 열과 성을 다하긴 했지만 다 큰 사내놈을 한 팔로 들어 올릴 자신은 없거든.
근데 넌 하는구나…….
멱살을 잡혔을 뿐인데 흡사 전신을 포박당한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 참 사내놈치고는 멀끔하니 예쁘장한 손이로구나 싶은 블론디의 손이 다가온다 싶더니 멱살을 휘어잡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자신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니겠는가.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무식한 힘이었다.
필은 6피트가 넘는 장신에 근육까지 알뜰하게 붙어 9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키는 비등해도 등발이 다른 블론디가 자신을 한 손으로 훌쩍 들어 올린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놈이 원자력을 동력원으로 한 괴력을 자랑하는 몸값 600만 불쯤 되는 인간이 아닌 이상, 그냥 괴물이다.
호러영화를 연출하듯 밑에서부터 비추는 조명 탓일까, 괜히 음침해 보이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필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쏟아냈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이런 괴물딱……이라는 걸 알았으면 우리도 부드럽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을 거라 그 말이지…….”
말이야 말이지, 이쪽도 구를 대로 구른 병사였다. 아무리 훈련이라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보지 않아도 안다 그 말이다. 총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한 손으로 성인 남자를 훌쩍훌쩍 들어 올리는 것들과 무슨 재미를 보자고 보복이니 뭐니 일을 꾸민단 말인가.
“그래, 뭐 나도 굳이 네놈들을 곤죽으로 만드는 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야.”
필의 말에 블론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반짝, 필의 눈이 빛났다.
“아…… 그래? 그럼 벌써 곤죽이 된 그레이랑 조나단은 어쩔 수 없으니 놔두고 난 좀 놔주면 안 될까?”
잽싸게 튀어나온 그 제안이 이미 곤죽이 된 동료들에게는 다소 냉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벌써 반 기절해서 거품을 문 조나단과 정신을 잃은 그레이가 당장 일어나서 자신을 처단하려 들 수도 없는 것을. 제 목숨 알기를 소중히 하는 필의 적극적인 제안에 블론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생각보다 순순히 돌아온 긍정에 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너 보기보다 좋은 놈이었네? 근데 헬기에서는 왜 그런 거냐? 짜식, 저 덜떨어진 깁스랑 딸랑 둘이 팀 짤 때부터 안 좋게 보는 놈들도 있었지만 난 안 그랬거든.
사람이 힘이 있으면 좀 거만할 수도 있는 거야, 안 그래? 내가 우리 유닛에는 가서 잘 말해둘게. 너네 이런 데 관심 없으니까 건들지 말고 훈련이나 열심히 하자고. 어때?”
동료애는 얼어 죽을.
찍소리 못하고 나가떨어진 그레이는 일주일간의 훈련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 정예 중의 정예였다. 조나단 또한 중간 이상은 갔는데, 주먹 한번 내질러보지 못하고 당했다. 여기서 대거리를 하는 건 죽자고 캠프파이어에 뛰어드는 나방보다 뇌가 작은 멍청이들이나 할 짓이었다.
“어이, 케일리. 너 똑똑히 봤지?”
자신을 곱게 보내주려는 것 같은 블론디를 향해 실실 웃으며 제안한 필은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왜 대화하다 말고 제 동료를 찾는 걸까. 그러고 보니 아직 허드슨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던가. 아, 혹시 인질교환 협상?
“아, 네. 보고 있기는 했는데……?”
그쪽의 인질 또한 갑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화살이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론디는 자신이 들고 있는 필을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게 바로 네놈이 말했던 평화로운 협상이라는 거다, 멍청아.”
“아하. 근데 제가 한 것도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요. 결론적으로 상황을 해결하기는 했잖아요.”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미친놈의 대화에 필의 어이가 하늘 높이 날아갔다.
평화로운 협상은 그레이와 조나단을 순식간에 묵사발로 만들고 자신의 목줄을 틀어쥐는 것이었으며, 나쁘지 않은 협상은 다짜고짜 보이지도 않는 적진에 달려 들어와 총을 쏘아 갈기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평화와 나쁘지 않다는 단어에 대한 사회적 약속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블론디가 인외 존재라면, 깁스 또한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기야 믿을 구석 하나 없이 이쪽이 몇 명인지, 무슨 의도인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판에 다짜고짜 뛰어들 리는 없겠지.
필이 두 무지막지한 놈들의 엇나간 사고방식과 행동력에 거나한 착각을 곁들이며 혀를 내두르는 사이 블론디는 위기감 없이 대답한 제 일행을 향해 이죽거렸다.
“네놈이 한 건 협상이 아니라 멍청한 협박이었지. 이놈들한테 한 짓이나, 날 끌어들인 것까지 합쳐서.”
본인의 일행에게 하는 것치고는 참으로 신랄한 평가였지만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협상을 하자며 총부터 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실패해서 잡혀놓고서는 그 상황에서 다짜고짜 빚을 갚으라니. 무슨 빚을 어떻게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깁스 놈에게는 은혜를 입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필은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협박이라니요. 그게 싫었으면 처음부터 빚을 질 만한 일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가진 카드를 적재적소에서 사용하는 것도 좋은 전략에 속한다고 배웠거든요.”
“그러니까 네가 던진 카드는 협상이 아니라 협박…… 됐다,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
협상과 협박의 어디가 다른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케일리의 순한 얼굴을 마주하며 에드워드는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한숨을 내쉬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에드워드가 대체로 비효율적인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아 실제로 전달되어야 할 주제를 헷갈리게 만드는 화법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대화의 아귀가 맞지 않았다. 자신이 한 것은 분명히 협상이었다.
“진짠데. 제가 배운 협상은 빠져나갈 구멍을 모조리 막아놓고 선택지를 하나만 남기는 거였는데요. 에드워드는 제가 아는 협상이랑 다른 걸 알고 있나 봐요?”
마치 내가 아는 협상이 진짜고 네가 아는 협상은 가짜라는 것처럼 돌아온 케일리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건 협박도 아니긴 하군.”
협박도, 협상도 저런 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굳이 비슷한 게 있다면 사냥 정도일까.
“하지만 에드워드, 저분들과 제가 테이블 가운데 끼고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제 협상을 하려면,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십사 대화를 하기 전에 먼저 그 대화를 들어줄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전에 들은 직장생활 이야기로는 회사에서도 꽤 높은 결재자였던 것 같았는데 어떻게 저런 마인드로 평범한 회사생활이 가능했던 걸까. 협상을 협박하듯 진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상대방을 사냥감 대하듯 하는 케일리의 발언에 에드워드가 할 말을 잃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회사 망했다고 했지.
그래……, 망할 만도 하다.
스스로 제기한 의문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찾은 에드워드가 물음을 바꿨다.
“너한테 협상이 그런 거라고 가르친 정신 나간 놈은 대체 누구냐?”
문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저 주먹만 한 대가리가 아니라, 저 안에 요상한 것들을 쑤셔 넣은 놈들일지도 몰랐다.
왜, 사람이 태어난 순간부터 뭘 알고 나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러니 저런 걸 키워내기까지 공헌한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제일 죄질이 나쁜 놈이 있을 게 분명하다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아, 그는 작은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던 우수한 사원이셨죠. 저에게 사격을 가르쳐주시기도 했어요. 덕분에 잠시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 오래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저 우수한 사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
“전직 특수부대 있다가 용병 하다 네 사격 선생으로 이직했다는 걔?”
케일리의 사격실력으로 봐서는 헛짓거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았고, 실력에도 문제가 없었을 것 같은데 멀쩡해 뵈지도 않는 애한테 뭘 어떻게 가르쳤던 걸까?
하기야, 특수부대 놈들도 그다지 정신상태가 멀쩡한 놈들을 모아놓은 걸로 유명한 건 아니었다. 심지어 용병까지 가면 놈들은 돈이면 사람도 죽인다며 온갖 인권단체의 원성을 모으는 집단이니 그런 놈한테 애를 맡겨서 교육이 잘되는 게 이상할 테지.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간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추억에 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맞아요, 그분이요. 쓸모없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죠. 언젠가는 제 목숨을 구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결코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연수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숙부께 그가 아직도 일하고 있다면 인센티브를 드리라고 해야겠네요.”
“……숙부?”
“네. 말 안 했던가요? 그는 숙부가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이셨어요. 저희 아버지는 특수부대나 용병 분들 같은 인맥은 거의 없었거든요.”
에드워드가 알기로 민간 군사업체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전 세계를 이 잡듯 뒤져도 백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일까. 활동상의 편의를 위해 그 이름을 숨기는 회사가 대부분이었지만-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쪽 세계에 몸을 담다 보면 자연히 흘러들어왔다.
특히 영국을 거점으로 둔 민간 군사업체는 손에 꼽았으며, 그들 대부분이 군수업체와 연관되어 있어 작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곳들이기도 했다. 그중에는 애쉬포드 가에서 출자한 군수업체도 포함되어 있다.
재수가 없으면 그가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자신의 혈연과 엮여 있을 가능성을 잠시간 머릿속에 떠올린 에드워드는, 그 소름 끼치는 추측을 잠시나마 고려한 스스로를 비웃었다.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쪽으로 연결점이 있는 놈이 -B 지구에 굴러들어올 리는 없었다.
그래, 생각을 해봐라. 케일리 저놈이 말하는 숙부라는 것도 아마 용병회사에서 일하는 뭐 중간 관리직쯤이나 되는 놈이겠지.
자신의 집안과 교류가 있을 만한 도련님들은 결코 -B 지구에 적을 둘 일이 없었기 때문에 괜한 걱정으로 심란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그 추측을 깔끔하게 접은 에드워드가 말했다.
“어이, 떡대. 넌 어떻게 생각하냐?”
케일리와 대화를 하던 방향에 그대로 날아든 그 목소리에, 허드슨은 그 호칭이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필의 제안 말인가?”
“곱게 보내줄 테니, 그쪽도 이번 훈련 동안 피차 귀찮은 일은 없도록 하자고.”
“동의한다. 나도 좋아서 한 건 아니라고. 그레이는 꽝을 뽑고도 신이 나서 정글을 헤집고 다녔지만, 난 훈련만으로도 충분히 등골이 휘는 입장이라 말이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허드슨은 에드워드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포박하고 있던 케일리를 놓아주었다. 그와 동시에 에드워드 또한 필의 멱살을 놓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구겨진 멱살을 슥슥 정리한 필이 배를 붙잡고 바닥에 쥐 죽은 듯 몸을 말고 있는 조나단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야, 죽은 척하지 말고 일어나. 너 연기 존나 못해.”
“아, 시발! 내가 엉덩이는 건들지 말랬지!”
“드러운 놈. 변비 아직도 안 나았냐?”
“만성이거든?”
언제 그랬냐는 양 바닥에 함께 뒹굴던 손전등까지 주워 든 조나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필을 향해 투덜거렸고, 감탄 어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본 케일리는 다음부터는 위험상황에서 죽은 척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허드슨은 진짜로 기절한 그레이의 뺨을 두어 번 갈겨보는가 싶더니 이내 포기하고 제 어깨에 둘러멨다.
“어이, 형씨. 곱게 보내줘서 고마워. 에드워드라고 했나? 적어도 우리 동맹에서는 형씨들한테 다시 시비 걸 일 없을 거야. 우리도 여기 놀러 온 건 아니라 굳이 안 될 거 알면서 달려들며 제 수명 깎는 짓은 안 하거든. 피차 합격하고 나면 같은 똥통에서 수영할 운명인데 잘 부탁한다고!”
그렇게 말한 필은 재촉하는 조나단과 허드슨들과 함께 숲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직도 훈련은 사흘이나 남아 있었다. 죄다 밟아놓으면 오늘 밤이야 평화로이 지나가겠지만 다시 내일의 적이 찾아오겠지.
비교적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일을 마무리한 에드워드는 허드슨에게 잡혀 있던 그 자리에 얌전히 서 있는 케일리에게 다가갔다.
“야, 너 손전등 없지?”
텐트까지는 십수 미터가 떨어진 위치였고, 정글은 여전히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밤새 대치하는 것보다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쉬겠다는 케일리의 의도대로 정리가 되었으니 이제 텐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앞이 안 보여서 가만히 있는 건가, 에드워드가 묻자 케일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에드워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
에드워드의 질문에 답하기보다 먼저, 케일리는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총 맞은 것 같아요.”
그를 텐트까지 끌고 가기 위해 마지막 남은 친절을 발휘하려 다가가던 에드워드가 걸음을 멈췄다. 퍽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청각에 문제를 느낀 적은 없었건만, 영 시원찮은 개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얘가 뭐라고 한 걸까?
맞았다고? 뭐에? 총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는-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케일리를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린 에드워드는 잠시간 침묵했다.
언제, 어디에 맞았다는 거야?
심지어 맞았다도 아니고 맞은 것 같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에 잠시간 의사소통이 원활히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 에드워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만성빈혈을 안고 살아가는 뱀파이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삶인데, 여기서 만성두통까지 얻었다는 소문이 돌면 최소한 100년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지끈거리는 골을 지압하며 에드워드가 물었다.
“어디에, 대가리에?”
상당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 내용이 어떻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케일리는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어차피 하나밖에 없는 몸뚱이 죽기 전까지 소모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가벼운 인생관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체력이 방전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케일리의 몸이 윽, 낮은 신음성과 동시에 서서히 기울어졌다. 정확히 자신이 서 있는 쪽으로 무너져 내리는 그의 어깨를 얼떨결에 받쳐 든 에드워드의 귓가에 뒤이어 꺼질 듯한 속삭임이 전달되었다.
“팔…… 아파요. 가능하면 다른 곳을 잡아주시지 않겠나요?”
이 와중에도 꼬박꼬박 다른 곳을 잡으라는 요구까지 하는 케일리에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게 요구받은 대로 깁스를 한 어깨를 쥔 손을 허리께로 옮겼다.
아니, 근데 난 왜 이 새끼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는 거야?
일순 머릿속을 지나간 생각을 멈춘 것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마를 타고 또르륵, 식은땀이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머리 아니고 허벅지거든요.”
불편한 자세 탓인지, 아니면 제 말대로 허벅지에 구멍이 뚫린 탓인지 이젠 아예 몸무게를 완전히 실어온다.
으으, 자그마한 신음과 함께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 자신의 어깨 위로 턱을 올리는 케일리의 몸에서부터 지금껏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진한 혈향이 풍겼다.
훅, 코를 가득 채우는 그 냄새에 에드워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앞도 안 보이고 오늘 하루 동안 넘치도록 몸을 움직였으니 다리도 파업을 해보겠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머리 한구석으로 의심하던 것에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올라올 것도 같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에드워드의 머릿속에는 인과응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떠올랐다. 그러게 평소에 잘했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할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
그런 것보다도, 허벅지든 옆구리든 총에 맞았으면 좀 더 총 맞은 놈처럼 굴어야 이쪽에서도 총 맞은 놈으로 대우를 할 텐데. 인질로 잡혔을 때도 아무 말이 없다 뜬금없이 총에 맞은 것 같다니. 총을 맞을 틈이나 있었나 의심스러운 판국이었다.
이놈은 혼자서 다른 평행세계를 뛰놀다 왔나 어이가 없어 기억을 더듬는데, 그러고 보니 다짜고짜 총을 쏴 갈겼을 때 들린 총성이 분명 두 발이었다. 거의 동시에 울렸기 때문에 두 발을 쐈나 보다 생각했건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순순히 잡혀 있더라니.
“관통은 아닌 것 같고 스친 것 같아요.”
“넌 왜 자꾸 추측형이야? 네 몸 상태도 제대로 파악 못하냐?”
심지어 제 다리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풀썩 체중을 죄 내맡기는 뻔뻔함에 에드워드가 황당함을 담아 묻자 케일리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우물우물 대답했다.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서 어디가 아픈 건지 잠깐 헷갈렸어요. 아까 잡혀 있을 때 봤잖아요. 그 사람, 저를 그 무식하게 튼튼한 팔로 옴짝달싹 못하게 잡고 있었다고요. 발이 들려서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그 상황에서 다리가 좀 아픈데, 보면 안 되냐고 하기도 그렇고. 근데 지금은 확실히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긴 하네요. 관통 아닌 것 같았는데…….”
“너…… 설마 통각도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아닌데요. 혹시 그런 사람 만난 적 있으면 가르쳐주시겠어요? 배우고 싶네요.”
“있겠냐.”
하는 수 없이 흐느적 늘어진 놈을 들어 올린 에드워드는 어두운 정글을 헤치며 망설임 없이 텐트를 향해 걸었다. 십수 미터쯤 되는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한쪽 팔로 자신의 목을 휘감고 들러붙은 생명체를 이동시키는 행위에 대한 고찰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그것 또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인용 텐트에 케일리를 내려놓고 군장 안에서 손전등을 꺼내 텐트에 매달았다. 비위생적인 우림 안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간단하게나마 처치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습도도 높았고 온도도 높은 환경에서는 상처가 곪는 속도가 빠르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대체로 살려내는 것이 -B 지구의 의료기술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덧나라고 놔둘 필요는 없었다.
손전등을 비추자 사이가 좋게도 이번에는 왼쪽 골반에서 허벅지를 잇는 중간 부분의 살이 움푹 찢어져 있었다. 확실히 관통하지도 않았고 혈관을 잘못 건드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꿀렁꿀렁 솟아 나오는 피와 선홍빛 살점이 너덜너덜 찢어진 옷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흙냄새에 섞여 후각을 자극하던 피 냄새가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진해졌다. 살아 있는 피 냄새를 맡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향에 에드워드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설마…….
“너…….”
점심 저녁에 각각 두 팩, -B 지구에서 지급하는 폐기 혈액을 섭취했으니 무리 없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할당량은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싹바싹 입안이 말랐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에드워드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응급처치를 위해 꺼내 든 군용 나이프가 지이익, 환부의 천을 잘라냈다.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 제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에 흠칫 정신을 차린 에드워드가 마른침을 삼켰고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너……, 지금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눈에 띄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텐트 입구에 등을 기대앉은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이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잠시간 그 질문을 곱씹었고 아, 생각. 다시 한 번 에드워드의 물음을 반복했다. 그러고도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후에야 케일리는 자신의 상처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에드워드에게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피 많이 나네?”
하, 정말이지 예측할 수 없을 뿐더러 상상을 뛰어넘는 사고방식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케일리의 머저리 같은 대답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에 에드워드는 그저 웃었다.
‘그럴 수밖에.’
자신이 지금껏 생피를 섭취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아주 지독하게, 역겨우리만치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종으로서의 능력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매번 속을 뒤집어놓는 음식을 꾸역꾸역 삼키느니 혀를 망치더라도 그나마 삼킬 수 있는 음식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썩은 음식물 쓰레기는 생피였고 맛이 더럽게 없을지언정 속을 뒤집어놓지는 않는 저급요리가 폐기 혈액이었다.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그가 느끼는 맛의 출처는 대부분이 그것의 주인이 풍기는 감정의 잔류였다. 채혈 후 시간이 흐를수록 선도가 낮아지는 동시에 감정의 잔류 또한 희미해졌다. 방부제를 쏟아부은 보존음식과 같았다. 맛은 없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분이 들었고, 그것 외에는 별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에드워드의 눈앞에는 역하지 않은 음식이 놓여 있었다. 어떤 인간 미식가가 말하기를, 요리의 가장 뛰어난 경지란 그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가장 훌륭히 살려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지금껏 그게 무슨 개소리냐 코웃음 치던 에드워드는 이제 와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하얀 허벅지를 물들인 선홍빛 액체에서는 본연의 냄새 이외의 것이 섞여 있지 않았다. 순수한 피. 감정의 잔류도, 역한 의도도 섞이지 않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만찬.
“……? 에드워드?”
나이프를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환부의 위까지 완전히 절단된 바지춤을 바라보며 케일리가 의아한 듯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점이 애매한 밤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깜빡 정신을 차리자 코를 찌르던 피 냄새가 더욱 강해졌다.
처음 느껴보는 달큰한 유혹에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게 살이 움푹 팬 허벅지를 향하는 손을 흠칫 멈춰 세웠고 한 타이밍 늦게 대답을 돌렸다.
“왜.”
아, 어째서 인간들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쓰는지 알 것 같았다. 배가 고프면 고픈 거지 죽고 싶을 건 또 뭐냐며 비웃었던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그들을 식욕에 절은 한심한 치로 여겼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이게 바로 허기라는 거로군.
입에 군침이 돌았다. 흙바닥을 뚝, 뚝, 적셔가는 케일리의 피 한 방울에 애가 달았다. 지금 저놈의 개소리를 들어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입을 대려니 알량한 자존심이 벽이 되어 막아섰다.
시발, 이렇게 맛있는 게 눈앞에 있는데 왜 못 먹는 거지? 난 병신인가?
아니, 그런데 아직 입도 못 대본 맛을 알기는 어떻게 알아. 냄새만 죽여주고 맛은 개떡같으면 차라리 영영 모른 채 남겨두는 게 나은 거 아닌가?
알 게 뭐야. 일단 맛부터 한번 보고……. 생각은 그 다음에 해도…….
“많이 피곤한가 봐요? 눈이 빨간데요.”
말을 듣지 않는 손이 상처 부위에 다다르기 직전, 자신의 눈을 가리킨 케일리의 지적에 에드워드가 깜짝 정신을 차렸다. 여상하게 튀어나온 케일리의 말은 인간들이 피로할 때 실핏줄이 터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구조였다.
붉게 변색된 홍채는 이성과 본성의 경계를 의미했다. 자신은 고작해야 머저리 같은 인간 하나에 이성을 잃고 덤벼들 참이었던 것이다.
그깟 피 몇 방울 때문에. 말도 안 돼. 저깟 게 뭐라고, 내가.
머릿속 한켠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다가도, 후각을 통해 뇌까지 침식하는 달콤한 향기가 순식간에 사고를 마비시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딘가에서 가느다랗게 이어진 끈 하나가 톡,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아무리 고결한 인간이라도 훌륭한 만찬을 앞에 두고 자존심을 세우지는 않잖아. 그런데 왜 내가 그놈들보다 고아해야 하냐 그 말이야. 안 그래?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거잖아.
험상궂게 다물려 있던 에드워드의 입가가 가늘게 경련했다. 천천히 열린 마른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도 모른 채 맑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음영 진 에드워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케일리에게 돌아온 것은 별안간 허벅지를 관통하는 고통이었다.
“흐, 읏!”
손가락.
허벅지를 움켜쥔 하얀 손에서 엄지손가락이 상처를 파고들어 무자비하게 쑤셔 박혔다. 케일리의 성한 왼팔이 그 행위를 저지하듯 에드워드의 팔뚝을 매달리듯 붙잡았다. 수맥을 찾듯 핏줄을 찾아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의 힘에 허리를 비틀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붉은 시선이 끈질기도록 상처를 좇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만큼 케일리는 멍청하지 않았다. 상대는 뱀파이어였고, 피 냄새를 맡고 말 그대로 눈 색이 변했는데 그걸 바탕으로 낼 수 있는 결론이 열이고 스물이고 있을 리도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일리는 꾸욱,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감내했다.
고통을 참는 것은 쉬웠다.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윽고 얌전해진 케일리에 새액새액 숨을 내뱉은 에드워드가 꿀렁꿀렁 새어나오는 달큰한 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다 말고, 핏빗으로 변색된 시선을 들어 칭찬하듯 가늘게 뜬 눈가를 찌푸렸다. 스스로의 행동에 대단한 불만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아, 예쁘다.
일순 머릿속을 스친 뜬금없는 생각은 참으로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을 맞은 얼굴은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어차피 먹을 거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인 케일리는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안 아프게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별안간 먹이가 된 입장에서 흘러나온 참으로 소박한 바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린다며 생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까지 잃은 그 발언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든 한마디는 쏘아붙였을 에드워드였다. 그러나 귓가를 파고드는 나른한 목소리가 담고 있는 기가 막힐 정도의 허술함이야말로 눈앞의 진미를 만들어낸 원인이라 생각하니 저 멍청한 개소리마저 지금은 괘씸하리만치 달콤하게 들리지 않겠는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훌륭한 명언을 남긴 종교 지도자를 떠올리며 에드워드는 손에 쥔 허벅다리를 먹기 편한 위치까지 들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의 상처 바로 위까지 고개를 내린 그가 느릿하게 숨을 들이켰다.
마치 미식가가 그것을 입에 대기 전 음미하는 향과 같이, 코를 타고 흘러들어와 진득하게 들러붙는 케일리의 피 냄새는 굳이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을 만큼 훌륭했다. 만약 이것이 음식이 아니라 약물의 일종이었다면 중독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머릿속 한켠으로 그런 생각을 한 에드워드는 주르륵, 하얀 살결 위로 흘러내리는 선홍빛 액체를 아쉬운 듯 눈으로 좇으며 재빨리 혀를 내밀었다. 중력의 저항을 이기지 못한 핏줄기를 느리게 핥아올렸다.
“……!”
후각을 마비시킬 듯 진득하게 들러붙은 피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혀를 타고 흘러들어가 입을 가득 채운 생피의 맛은 차라리 그것을 모른 채 사는 것이 나았겠다 싶을 만큼 일순 온 정신을 마비시킬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흘러내리는 피를 상처까지 거슬러 핥아올리자 머리 위에서 가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시발. 냄새만큼 맛있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그래, 냄새만 맡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분이기는 하다. 당장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긴 해.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 밑에서 쿵쿵, 맥박 치는 허벅지가 움찔 경련했다. 그럼에도 손을 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황홀한 맛에 잠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해 있던 에드워드의 목울대가 울렸다.
꿀꺽. 목구멍을 넘어간 한 모금의 피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른 순혈 뱀파이어들이 인간의 생피를 마시며 그것의 훌륭한 맛을 찬양할 때, 쓰레기 같은 혀를 달고 다니니 맛을 알아보지도 못한다며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던 과거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쓰레기 같은 혀를 가진 건 놈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지금껏 모른 채 살아왔다니……. 어린 계집아이의 피가 맛있다느니, 채식주의자의 피가 상큼하다느니, 늙은이의 피야말로 진국이라느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식성을 가지고 입씨름을 하던 멍청한 모습을 이해할 날이 올 줄이야.
빨갛게 물든 머릿속에 둑이 터진 것마냥 기억이 혼재했다. 어느새 허벅지의 상처에 코를 박아 매달리듯 송곳니를 세운 스스로의 모습을 허기진 짐승 같다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다는 욕구와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탐욕만이 그를 움직였다.
혀를 내밀어 상처를 헤집고, 입을 오므려 힘껏 빨아 올렸다. 감질나게 입안을 채우는 혈액의 맛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한입 가득 찬 혈액을 목구멍 너머로 흘려보내며, 그것을 남김없이 해치울 요량으로 이를 세우던 에드워드는 문득 제법 센 손놀림으로 자신의 머리채를 쥐는 손길에 시선을 올렸다.
새빨갛게 변색된 눈동자 한가운데에 짐승의 것처럼 세로로 열린 동공이 확장되었다 수축하기를 반복하고서야 초점이 돌아온 그것을 내려다본 케일리가 멍한 얼굴로 아……, 입술을 달싹였다. 손전등 아래에서도 하얗게 질린 얼굴이 위험천만해 보였기 때문에 그만 마시라는 건가, 생각한 에드워드가 흠칫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뱃속을 뜨겁게 채운 피의 양이 제법 되었다. 1리터…… 아니, 그보다는 많을지도 몰랐다. 보통 인간은 혈액의 30퍼센트를 손실하면 과다출혈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뱀파이어의 흡혈행위에서는 체액의 효과 덕분에 좀 더 버텼지만 아무래도 슬슬 위험한 수치였다.
한 모금만 더, 잠시 멈춘 것만으로도 애가 달아 다시금 입을 가져다 대려던 에드워드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힘없는 손가락에 멈칫했다.
정말로…… 그만 마셔야 하나?
어차피 상대는 인간이다. 고작 인간 하나를 어찌한다 해서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나-직장에서 약간의 패널티를 받기야 하겠지만.- 죽는 건 곤란하다. 이렇게 훌륭한 맛을 알게 되었는데 앞으로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다는 건 오히려 고문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일단 살아 숨 쉬도록 잘 쟁여둔 다음 앞으로도 꾸준히 섭취하는 것이 이득이다. 아무리 이성이 마비되었다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당장 갈라버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할짝, 혀를 내 상처를 핥은 에드워드의 얼굴에 못내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딱 한 모금만 더 마시고 그만 먹을까, 심각한 얼굴로 출혈이 거의 멎은 상처를 노려보는 에드워드의 머리 위로 당장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가느다란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뱀파이어의 생태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도 방영한 적 없겠죠……?”
우물우물 흘러나온 그 내용을 잠시간 머릿속으로 곱씹은 에드워드가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심일까? 그런 개소리를 꼭 지금 이 순간 해야만 했던 걸까?
하지만 케일리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진지하기 그지없었고 실컷 얻어먹어 약간의 빚과 같은 감정이 생긴 덕분에 에드워드는 일단 그 개소리에 맞장구를 쳐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겠지.”
머저리야, 병신아, 그럴 것 같냐, 제정신이냐 등의 험악한 말을 빼느라 고심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평범하게 흘러나간 목소리에 에드워드는 스스로의 인내심을 칭찬했다. 배가 불러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정신을 마비시키는 달큰한 피 냄새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걸 라이브로 관람하고 살아남는 건 제가 최초일까요, 아니면 의외로 흔히 있는 일일까요?”
“글쎄, 그거야 다른 뱀파이어들한테 물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 식습관은 제각각 다를 테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될 예정인가요? 혈액 팩 마시듯 바닥까지 쪽쪽 빨아먹으면 곧 끝장날 것 같은 기분이라서요.”
온순한 밤색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케일리가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안색이 창백한 것뿐만 아니라 슬슬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케일리의 시선에 에드워드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마음에 혀를 내 상처 주위를 두어 번 핥아내렸다.
흙바닥에 떨어진 검은 핏자국을 노려보며 저 아까운 걸 왜 가만히 흘려뒀을까 고민하는 에드워드에게 케일리가 뜬금없는 물음을 던져왔다.
“몇 개 정도예요?”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시선을 올리니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뭐가?”
이해할 수 없는 물음에 에드워드가 반문하자 멍하니 벌려진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로 맛있을 것도 없을 텐데 엄청 맛있게 먹기에 궁금해져서요. 별, 몇 개 정도예요?”
“무슨 별.”
“미슐랭 스타?”
얘는…… 진심으로 그런 게 궁금한 걸까?
잠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진지하게 맛을 평가하라면 별 세 개가 대수겠는가, 그놈의 별이 가지고 싶은 거라면 원하는 만큼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장에서 한참은 떨어진 다리에서 흐르는 피가 이렇게 맛있는데, 갓 심장을 통과한 동맥혈은 얼마나 훌륭하겠는가.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시점에 날아온 그 질문에 에드워드는 손에 쥔 허벅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비교대상이 있을 때나 매기는 거지.”
그래, 지금껏 맛을 따져가며 먹었던 적이 없는 음식에 점수를 매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등급을 매기기 위해서는 비교대상이 필요했다. 케일리의 피는 지금의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유일한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희소성이라는 가치가 붙었다. 흔하면 흔할수록 그 가치가 추락하며, 적으면 적을수록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런 의미에서 케일리의 피는, 적어도 에드워드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대체품도 찾을 수 없는 희소가치나 다름없었다. 단 하나밖에 없으므로 급을 매길 필요가 없다는 에드워드의 확언에 케일리의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 왜 웃나 싶어 쳐다보고 있자니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던 힘없는 손가락이 스르르 빠져나가더니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저 안 죽는 거네요.”
“언제 죽인다든?”
“좀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아픈 것도 슬슬 안 느껴지기 시작했고, 어지럽고, 열도 나고…….”
“그건 죽을 것 같은 게 아니라…….”
뱀파이어의 흡혈행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연 에드워드는 바로 다음 순간 툭, 바닥에 떨어진 케일리의 팔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제 엄지손가락에 묻은 피를 남김없이 핥아낸 그는 바닥에 떨어진 케일리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어이.”
축 늘어진 몸은 반응이 없었다.
“케일리.”
다시 한 번 불러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본연의 색으로 돌아온 파란 시선이 잠시간 눈 감은 케일리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용히 감긴 눈에 벌어진 입 사이에서 간간이 새어나오는 숨소리는 그가 기절했다기보다는 잠들었다는 쪽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약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으니 신체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리라. 부상으로 인한 쇼크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도 뱀파이어의 타액에는 고통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허벅지의 총상에 이를 박고 빨아댔으니 통각이 사라질 만도 했다.
기절한 듯 잠든 케일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소독약과 붕대를 비롯한 응급처치 용품을 꺼냈다. 상처가 덧나면 큰일이니 수통의 물을 거즈에 적셔 상처 주변을 깨끗하게 처리한 후, 소독까지 한 후에 약을 발라 꼼꼼히 붕대를 맸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케일리의 몸을 봉제인형 옮기듯 가볍게 텐트 안까지 들고 들어간 에드워드는 군장에서 꺼낸 제 몫의 모포까지 덮어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맛있는 것을 입에 댄 에드워드는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며 몸을 뉘었다. 입가로 비실비실 웃음이 비져나왔다. 답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을 보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다.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었지만, 꼭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손에 넣은 우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물론, 그 배를 갈라 영영 황금알을 손에 넣지 못하게 된 머저리 같은 노부부와 같은 결말을 맞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점이 우화의 주인공과 자신의 다른 점이었지만 말이었다.
-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