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3권) (12/41)

[BL]영국 비밀보안국의 비밀 3

#Mission3. Edward in wonderland (6)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둡고 낮은 천장이었다. 멍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키니 언덕에서 한바탕 온몸으로 굴러 내려온 것처럼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팔의 고통도 여전했고 다리도 아팠지만 아예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라 주섬주섬 한 팔로 기어 나가니 정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끔한 모습을 한 에드워드가 모닥불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철로 된 군용 반합 안 팔팔 끓고 있는 물속에서 미친 듯이 헤엄치는 푸른 솔잎을 바라보며 이끼 낀 돌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케일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물었다.

“채식주의자로 전향하게요?”

무심한 얼굴로 정체불명의 솔잎물을 끓이고 있던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뱀파이어한테 채식이니 육식이니를 따지는 게 말이 되는 것 같냐?”

잔뜩 헝클어진 케일리의 머리카락을 못마땅하게 바라본 그가 대충 끓은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모닥불 위에 올려져 있던 꼬챙이를 빙글 한 바퀴 돌렸다. 근처에서 적당히 주운 게 분명한 기다란 나뭇가지에는 정체불명의 연분홍빛 속살이 노릇노릇 보기 좋게 익어가고 있었다.

바비큐인가? 그런데 저건 무슨 고기지?

군장에 생고기가 들어 있을 리는 없으니, 아무래도 자신이 자는 사이에 잡아온 야생동물인 모양이었다. 어제 마신 자신의 피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나 생각하며 에드워드가 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잘 익은 꼬챙이 하나가 케일리의 눈앞에 툭 내밀어졌다.

“어?”

“뭘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어? 받아. 너 먹으라고.”

“저요? 저 지급식량 있는데요.”

“그것도 먹고 이것도 먹어. 군용식량은 칼로리 채우라고 있는 거지, 건강식은 아니야. 그 다리에 그 팔을 하고 체력소모만 대비하면 앞으로 사흘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에드워드의 말이 맞았다. 군용식량의 역할은 칼로리 보충이 주된 목적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꼬챙이를 받아든 케일리는 뒤이어 내밀어진 군용 반합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또 뭐지?

푸릇한 이파리가 둥둥 떠 있는 끓는 물을 내미는 에드워드를 마주한 채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못마땅하다는 듯 휙 올라간 눈썹으로 성난 목소리가 돌아왔다.

“차, 멍청아. 네가 차 마시고 싶다며.”

아니, 화가 났다기보다는 쑥스러움을 숨기는 것 같았다. 내밀어진 반합 안을 가만히 응시하며 케일리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차……?

차라는 것의 정의를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자신을 괴롭히려는 게 분명한 내용물이었다. 이걸 마시지 않으면 널 주먹으로 갈겨버리겠다는 굳센 의지가 보이는 푸른 눈동자에 케일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반합을 바라보며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을 하긴 했죠.”

그게 아무 이파리나 쑤셔 넣어서 끓인 차를 말한 건 아니었지만…….

팔팔 끓는 물 안의 뾰족한 풀 한 움큼을 바라보며 케일리가 미묘한 표정을 했다. 물론 동양 어딘가에 솔잎차를 즐기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은 케일리 또한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라고 나무에서 갓 딴 침엽수의 이파리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우려내지는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보고 우려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잠시간 고민한 케일리는 일단 받아든 반합을 바위 옆에 내려놓고 잘 익은 고기가 꿰인 꼬챙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결을 따라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는 너무 질기지도, 너무 물컹거리지도 않아 정글에서 구한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맛이었다. 게다가 간단한 소금간까지 되어 있어 본래 음식을 가리지 않는 케일리는 한 입, 두 입 순식간에 꼬챙이 하나를 먹어치웠다.

마침 노릇노릇 잘 구워진 다음 꼬챙이를 건네는 에드워드에게서 그것을 받아든 케일리가 문득 물음을 던졌다.

“근데 이거 무슨 고기예요?”

잘 손질된 살코기 부분만 남아 원형을 짐작할 수 없는 데다가, 주변에는 가죽을 벗긴 흔적이나 내장을 손질한 잔해도 없었다. 재료를 가지고 편식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궁금해졌다. 다우림에 사는 생물이야 한정되어 있으니 특별히 이상한 동물일 리가 없기는 했지만.

가만히 에드워드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손질한 생고기 하나를 꼬챙이에 꿰던 그가 힐끗 케일리를 쳐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뱀.”

아하, 뱀. 고개를 끄덕이며 새 꼬챙이를 입으로 가져가던 케일리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 기어다니는 파충류 뱀……?”

“그거 말고 다른 뱀이 있으면 나한테 가르쳐주면 좋겠군.”

“독…… 있는 건 아니죠?”

“없어. 내가 그것도 확인 안 하고 먹이겠냐?”

당당하게 돌아온 대답에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가 인간의 피는 먹을 만한 맛이 아니라고 딱 잘랐던 것과 상반되게 자신의 피를 썩 맛있게 마셨던 걸 보면 확실히 신뢰가 갔다. 무엇보다 자신이 뱀독에 된통 당하기라도 하면 에드워드가 마실 피도 오염될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새벽부터 일어나 뱀까지 잡아올 만큼 친절한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는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유 또한 지나치게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의도가 불분명한 친절보다야 알기 쉬운 친절이 쉬웠다.

이어서 두 번째 꼬챙이를 입으로 가져가며 케일리가 말했다.

“뭐, 그럼 됐어요. 처음 먹어보는데 뱀이 의외로 맛있네요.”

애당초 그는 맛으로 음식을 가리지도 않았고, 재료로 가리지도 않는 타입이었다. 먹고 죽지만 않으면 음식이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살아왔으니 이제 와서 뱀고기에 기겁할 이유는 없었다.

입 가득 구운 뱀고기를 오물거리던 케일리가 입가심 삼아 반합에 든 솔잎차까지 마시기 시작했다. 집에서 마시던 얼그레이에 비하면 너무 강한 솔잎향과 진한 맛이 차라기보다는 약물처럼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고 보니 솔잎에는 의외로 영양소가 풍부하다지. 생존술 강의에서 들었던 지식을 떠올리던 케일리의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젯밤 체감상으로도 제법 피를 흘린 것 같은데 의외로 몸이 멀쩡했다.

보통 전혈 수혈의 기준치가 수백 밀리리터 정도이니 그 두세 배를 흘린다고 해서 당장 몸에 무리가 오지는 않겠지만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걸까. 뿐만 아니라 요전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피를 마시는 건 어떠냐고 권했을 때, 그는 분명 인간이 뱀파이어에게 흡혈을 당하는 것은 피를 빼앗기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했었다.

뭐라고 했더라, 분명…….

“그런데 인간의 피를 마시면 권속이 된다는 이야기는 뭐였던 거예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지금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거든요.”

꼬챙이만 남은 나뭇가지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은 케일리가 문득 던진 물음에 에드워드가 마지막 뱀고기를 불 위에 올리다 말고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런 것도 기억하고 있었냐?

네발로 기어다니던 포유류 애완동물이 어느 날 갑자기 이족보행을 하는 진화의 장면을 목도한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이 담긴 에드워드의 눈을 잠시간 응시하며 케일리 역시 눈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는데요.

“저 웬만하면 한번 들은 건 안 잊어버리거든요. 별로 안 중요하면 아예 신경을 안 쓰기는 해도.”

솔잎차를 한 모금 마신 케일리가 덧붙였다.

“사실 권속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기도 하고, 몸도 가뿐하네요.”

확실히 에드워드가 보기에도 케일리의 상태는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자고 일어나 간밤에 비해 훨씬 회복된 듯 보이기까지 했다.

실상 그 점에 대해서는 에드워드도 퍽 놀란 참이었는데, 보통 뱀파이어에게 단순히 흡혈을 당한 인간은 그 양에 따라 보통의 출혈과 같은 부작용을 얻었다. 뱀파이어의 타액에는 마비효과가 있어 고통을 잠재웠고 가벼운 환각을 비롯해 흡혈 당시 쾌감을 느끼는 인간도 있다고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건강해진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었다.

얘가 정상은 아닌 게 분명하긴 해. 그런데 얜 평범한 인간이잖아. 아무리 정신에 사소한 결함이 있다지만 그게 보통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나?

인간 생태에 아는 게 있어야 뭘 의심이라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껏 살아 있는 인간을 주식으로 삼지 않았던 에드워드에게는 눈앞의 생물이 어째서 이렇게 멀쩡한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아! 혹시 권속이 되면 회복이 잘되고 그런 거예요? 편하고 좋네요.”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멋대로 결론을 내린 듯 납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실 때마다 미간을 좁히면서도 솔잎차를 꾸역꾸역 입으로 가져가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아니, 넌 권속이 돼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좀 이상한 체질인 것뿐이야.”

생각해보니 자신이 인간의 체질에 대해 고민해봤자 써먹을 곳도 없다. 지금부터 주식을 바꿀 것도 아니었고 케일리를 제외한 인간들은 여전히 음식물 쓰레기와 동급으로 역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정작 자신의 입맛을 통째로 흔들어놓은 케일리라는 녀석은 다른 인간들의 눈에서도 그다지 정상적인 개체는 아니었으니 이놈을 기준으로 삼는 것 자체가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요? 하기야 지금껏 크게 다쳐본 적이 없어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원래 튼튼한 체질이긴 했죠. 어린 시절부터 감기 한번 걸려본 기억이 없거든요. 형이 말하기를 더 어릴 때는 홍역도 앓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게 넘어가서 진짜 항체가 생겼는지 검사까지 했었다고 했고…….”

기억을 더듬는 케일리의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릴 적부터 그랬다면야 그건 체질이겠지.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실상 케일리의 건강은 체질보다는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어렸을 때부터 붙어 있던 각종 가정교사들, 요리사, 주치의의 꾸준한 관리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에드워드에게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답으로 보였다.

케일리 본인 또한 스스로가 매우 일반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크나큰 착각 속에 있었던 덕분에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스펙트럼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권속 이야기는 너랑 상관없는 거니 신경 쓰지 마.”

“죽지도 살지도 못한다는 그 이야기도요?”

“그렇다니까.”

분명 케일리가 제 피를 턱 내놓겠다 말했을 때 그 비슷한 설명을 하기는 했다. 뭐라고 했더라. 뱀파이어의 권속이 된다는 건 영생을 대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자아가 없는 존재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별달리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핵심이 다소 어긋나기는 했다.

순혈 뱀파이어의 권속이란 뱀파이어가 된다는 뜻이었으니 굳이 권속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다. 순혈의 권속은 자신을 권속으로 만든 숙주 뱀파이어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 외에는 보통의 뱀파이어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잡종 뱀파이어는 뱀파이어를 만들 수 없으며, 그들의 권속 또한 뱀파이어가 아니라 좀비에 가까운 존재로 평균보다 조금 더 튼튼하고 오래 사는 정도의 메리트밖에 없다. 그런 덕분에 순혈 뱀파이어의 권속, 즉 잡종 뱀파이어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잡종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흡혈을 당하고자 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이야 어느 시대에서든 나타났다만…….

“그럼 그때는 왜 안 마시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그때는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으니까. 게다가 순혈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어 뱀파이어의 삶을 살고 싶어 혈안이 된 인간들에게 시달려왔던 전적 탓도 있었다. 에드워드의 입장에서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그것을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케일리 네놈이 눈이 돌아가게 맛있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지금껏 지켜온 삶의 철칙마저 와르르 무너졌다는 서글픈 사실을 말해주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의 성격적 문제뿐만이 아닐 것이었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 번째 꼬챙이까지 반쯤 끝장낸 케일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말을 돌렸다.

“뭐, 어쨌든 한두 번 피 좀 빨았다고 죄다 권속이 되면 지금 지구상에 인간이 득실거리는 게 이상하지. 뱀파이어를 세 마리 정도 풀어놓고 하루 한 명씩만 권속으로 만들어도 100년이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겠냐? 계산을 해봐.”

“아하. 그것도 그러네요. 하기야 뱀파이어들도 식사는 해야 할 테니 매번 권속이 되면 결국 세상에는 뱀파이어만 남을 테고, 그렇지 않은 시점에서 에드워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다는 말이군요.”

“그런 셈이지.”

본인의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인정한 에드워드는 되레 케일리를 타박했다.

“게다가 생각을 해보라고, 뱀파이어에게 흡혈을 당한 인간이 모조리 영생을 얻게 됐다면 지금쯤 뱀파이어들은 죄다 인간한테 잡혀서 매일같이 맛대가리 없는 피를 빨아대고 있을걸. 뱀파이어와 인간이라는 종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결국 머릿수로 밀고 들어오면 이쪽이 불리한 싸움이라고.

순혈 뱀파이어는 수백 년에 하나가 늘어날까 말까 하는데 인간들은 하루에도 만 단위로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잖아. 그걸 어떻게 다 상대하느냐 그 말이지. 그러니 인간들이 죄 뱀파이어를 잡아들여서 뱀파이어를 불로초 취급하지 않는 걸 보면 그게 개소리라는 걸 알 수 있는 게 정상이야.”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뱀파이어한테 흡혈을 당한 것만으로 불로불사를 얻는다면 폭죽을 터트리며 뱀파이어 사냥에 나설 만한 단체를 케일리도 두엇 알았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뱀파이어의 존재가 공표되는 것만으로 등에는 십자가를, 양손에는 샷건을 들고 나설 과격단체가 가득한 정세니 말이다.

“뭐, 권속이라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매끼 식사 때마다 만들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거지. 그러니 너도 쓸데없는 걱정은 말라고. 솔직한 말로 권속을 만드는 게 그렇게 메리트만 가득한 것도 아니라 순혈 중에는 제가 만든 권속을 직접 없애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에드워드는 다 구워진 꼬챙이를 케일리에게 건넨 후 모닥불을 꺼트렸다. 그러고는 텐트와 지급품들을 정리해 군장 안에 갈무리해 넣었다. 식사를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일리가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에드워드를 향해 물었다.

“본인이 만든 권속을 직접 없앤다는 말인가요?”

그러려면 처음부터 안 만드는 게 낫지 않나.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케일리에게 에드워드는 백분 동의했다. 어차피 제 손으로 없애버릴 거라면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 게 나았지만, 겪어보지 않고는 학습하지 않는 머저리들은 결국 아무리 말로 해도 그 멍청한 짓을 반복했다. 에드워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권속을 만든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영생을 바라는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는 데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으며, 뱀파이어라는 종족을 늘리는 행위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아. 전에도 말했지만 권속이라는 건 철저한 종속관계를 말해. 아주 충실한 노예 하나를 만들어내는 거지. 문제는 그게 만든 입장에서도 아주 좆같은 상황을 만들 때가 있다는 거야.

일단 권속은 숙주가 어디 있는지 늘 느낄 수 있으니 꼬리 하나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꼴이라고.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하기야 한다만, 불편한 점을 따지라면 그 외에도 가득하지. 다른 뱀파이어들은 그 권속이 내 것이라는 걸 바로 알게 되니, 권속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그렇고 귀찮아.”

솔잎만 남은 반합에서 젖은 이파리를 탁탁 털어내며 설명을 끝마친 에드워드에 케일리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권속이라는 게 되면 자신을 권속으로 만든 뱀파이어가 어디 있는지를 언제나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로불사의 몸이 되며 사고를 치면 그 뱀파이어의 책임이 된다는 이야기 같았다.

그 외에도 불편한 점투성이라는 에드워드의 말을 종합하면 확실히 그다지 매력적인 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건 노예라기보다는 꼭…….

“결혼 같은데요?”

무심코 튀어나간 케일리의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대답했다.

“지금 말한 건 노예가 아니라 차라리 배우자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 같은데……. 아, 아니다. 배우자보다는 과보호 부모와 엇나간 자식의 관계 같기도 하고. 어쨌든 위치추적 기능을 붙인 배우자 관계는 소송이 걸리기 십상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죠. 프라이버시 침해기도 하고, 일종의 스토킹이잖아요.”

권속을 만드는 뱀파이어를 스토커라는 험악한 단어로 깔끔히 정의내린 케일리가 납득했다는 듯 말을 끝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간 그것을 고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 에드워드는 이내 자신은 권속을 만든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들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다 결론 내렸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자신의 동족들은 스토커라 불려도 그다지 억울할 게 없는 녀석들이 태반이었다. 반이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일 지경이니 말 다했다.

이제 와서 뱀파이어를 모독하지 말라 주장하기에는 과거의 전적이 그 주장을 반증했다.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확실히 위치추적 기능을 단 배우자 관계라는 것이 썩 매력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걔들 사회에서는 훌륭한 소송감이기까지 해, 고개를 끄덕이며 제 동족들을 함께 매도하면서도 에드워드는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다.

어차피 뱀파이어는 일부 순혈주의자를 제외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종족이었다. 뱀파이어라는 한 묶음으로 욕을 먹는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는 자들이 드물 정도였다. 오히려 하하하 웃으며 ‘맞아, 저 새끼들은 그렇지!’ 하며 자신을 쏙 뺀 나머지에 대해 함께 욕을 퍼부으면 모를까.

혈연주의가 생기기에는 워낙 족보가 꼬인 그들 사이에 배우자니 자식이니, 심지어 종의 일관성을 따지는 것조차도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 일부 순혈주의자에 자신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매우 슬픈 일이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어쨌든 그러니 넌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거다.”

에드워드를 필두로 권속을 만드는 것에 부정적인 뱀파이어들이 늘어나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종으로 써먹을 권속을 달고 다니지 않으면 이모저모 불편한 점이 많았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오히려 돈만 있으면 대부분의 불편이 해결되니 굳이 리스크를 지고 권속을 만들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다.

네 피를 마시더라도 권속으로 만들 일은 추호도 없을 테니 걱정 말라는 에드워드의 결론에 대해 잠시간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떤 논법으로 나온 결론인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좋은 일이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별로 걱정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럴 일이 없는 편이 좋거든요. 덜 귀찮기도 하고.”

어느새 자기 몫의 군장을 짊어진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슬슬 출발하지.”

나무 밑에 기대어놓은 군장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케일리가 발언권을 요청할 때처럼 멀쩡한 왼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 문제 말인데요.”

“……?”

“출발을 하려면 일단 목발이 필요할 것 같아요.”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며 주장하는 그 말에 에드워드의 시선이 그의 다리를 향했다.

‘아, 그래. 얘, 다쳤지. 어쩐지 거북이 기어가듯 움직이더라.’

◇ ◆ ◇

식이요법의 드라마틱한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는 눈에 불을 켜고 찾을 필요도 없이 범람했다. 당연하게도 인간의 식이요법을 연구한 것들이었지만 에드워드는 새삼 그런 것들에 건강을 맡기는 인간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메뉴를 바꾸는 것만으로 몸 상태가 몰라보게 좋아진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설사 그것을 유지하는 게 다소 자존심 상하거나 귀찮다고 해도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다 여겨지니 말이다.

이건 올바른 식이요법에 꼭 필요한 식량의 안전확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결코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등에는 두 사람 몫의 군장을 짊어지고 심지어는 그 군장의 주인을 공주님 안기로 옮기는 것이 겉보기에 매우 오해를 사기 쉬운 모습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절대로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속사정을 CCTV를 쳐다보며 배를 잡고 뒤집어질 동료 놈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이유를 모조리 알게 된 후에도 놈들은 녹화영상을 되감아 보며 낄낄거릴 족속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결백한 죄인들의 심정일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공주님 안기로 옮길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짚고 다닐 지팡이나 꺾어서 주는 것이 그의 최대한의 배려였다. 다리를 완전히 관통한 것도 아니었고, 총알이 살짝 스친 정도로 걸어다닐 수도 없다면 필드요원으로 뛸 자질 부족이었다. 문제는 케일리의 부상이 다리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제 몫의 군장을 짊어지고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다리를 감싼 붕대가 빨갛게 물들었다. 적당히 처치해놓은 상처가 터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종합검진에서도 채혈을 하고 나면 그날 하루는 그 팔로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총 맞은 다리로 제 몸무게의 삼분의 이는 될 법한 완전군장을 짊어진다는 것은 아주 튼튼한 인간의 육체로도 넘칠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를 악물고 걸음을 내딛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고뇌했다.

코를 찌르는 달콤한 피 냄새를 맡으며 느릿느릿 정글을 헤쳐나가는 고문과, 케일리를 짊어지고 빠르게 정글에서 벗어나는 수치스러운 그림 중 어느 것이 더 최악일까.

생각은 깊었지만 고민은 짧았다. 어제저녁 양껏 마셔 만족스레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터진 상처에 자꾸만 신경이 가는 것을 참아내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고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에드워드는 훈련상황을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의 양보로 케일리를 등에 업고 군장을 양팔에 들고 뛸 생각이었다. 문제는 케일리가 자신의 등에 업힐 만큼 성하지 못하다는 부분에 있었다. 한 팔은 깁스를 해서 제대로 매달리지도 못하는데 심지어 허벅지에는 총을 맞았다.

그나마 부담이 적은 자세를 찾다 보니 자연스레 나온 그 포즈에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절망했다. 이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걸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그것밖에 없었다.

“젠장맞을.”

어쩌다가 자신의 꼴이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하면서도 코끝을 간질이는 달큰한 향을 맡을 때마다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 점이 한층 그의 기분을 저하시킨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곳에서부터 꼬박 두어 시간을 달렸을까, 완전 군장 이인분과 사람 하나를 들고 뛰었음에도 몸은 가뿐했다. 인간에 비하면 체력적으로도 차이가 큰 육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몸이 가벼운 것은 아마 어제 마신 케일리의 피의 영향이 클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우울해진 에드워드는 스스로의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지. 달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이 비집는단 말이지.’

한편, 자신을 안고 달리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에드워드를 올려다보며 얌전히 안겨 있던 케일리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이게 뱀파이어와 인간의 차이로구나.’

그러고 보면 어제 반나절이나 정글을 헤치면서도 에드워드는 별달리 힘든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와 비교해서 노동량이 급격히 늘어난 것뿐만 아니라, 오늘은 심지어 뛰어다니고 있었는데도 훨씬 생생해 보였다.

부상을 당한 동료를 애틋하게 여겨 챙겨줄 만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었건만, 에드워드가 보여준 의외의 면모에 케일리는 감명을 받았다. 인간인 자신조차 박애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생을 걸어왔는데 뱀파이어인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모범적인 모습은 훌륭한 인격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에드워드.”

한참을 조용히 안겨 이동하던 케일리가 입을 열었다. 힐끗 그 얼굴을 내려다본 에드워드가 “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여전히 달리는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케일리가 말했다.

“우리 이 속도로 가면 1등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에드워드는 일순 균형을 잃을 뻔했다.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자세를 바로잡은 그가 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줄곧 조용해서 무슨 생각을 하나 했다. 이 와중에 승부까지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1등이라니, 별달리 등수에 집착할 것처럼 생기지도 않은 놈이 뭐하러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그런 게 하고 싶으냐?”

솔직한 말로 에드워드는 훈련의 순위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이 훈련을 통해 잃을 건 많아도-주로 시간이라든지 귀중한 시간과 같은 것.- 얻을 건 없는 입장이었으니 당연했다. 케일리 또한 아예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잘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뭐하러 결승에 집착을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렇게 묻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대답했다.

“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자신이 1등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말에 에드워드는 할 말을 잃었다. 결승점이 있는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던 에드워드가 정면에 고정한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케일리에게 물었다.

“넌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게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지금도 그랬다. 애먼 뱀파이어를 마차마냥 타고 다니지 않으면 시속 십 킬로미터도 내지 못할 게 입만 살았다. 심지어 고이 모셔다 날라지는 짐덩이 입장에서 1등까지 노리고 계신단다. 말이나 된단 말인가.

1등이고 뭐고, 본인의 튼튼한 양다리로 걸어다닐 때조차 팔 하나를 덜렁거리던 놈이었다. 지금 상황을 따질 것도 없이, 그때부터 이미 인간과 라이칸을 죄 이겨먹을 생각이었다는 것부터 크나큰 문제이기야 하다만.

기가 찬 에드워드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케일리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히려 되물었다.

“자신감이요? 당연히 처음부터 그러려고 마음먹었고, 지금도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요.”

자기평가가 높은 점이야 뭐,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줄 수 있었다.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일견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의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보통 인간의 것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치로 증명해 보였으니 말이다.

제 발 밑의 땅만 파는 게 아니라 내핵을 뚫고 지구 반대편에 다다를 만큼 자기평가가 낮은 놈들이야말로 귀찮기 짝이 없으니 그 점에 대해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았고 본인의 능력을 어느 정도 객관시하고 있었다-능력 밖의 일이라도 에너지 효율을 위해 덤벼들 때가 있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을 고려한 상태에서, 대체 케일리가 무슨 논리로 본인이 1등을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젯밤에 몰래 일어나 다른 훈련생들에게 죄 굼벵이를 삶아 먹이고 온 게 아니고서야 그따위 결론이 나올 길이 없었다.

“1등은 해서 뭐하게?”

문득 튀어나간 물음은 거기까지 생각한 에드워드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 때문이었다.

호승심이 강한 타입도 아니며 성취욕이 남다른 것도 아닌 주제에 1등에 집착하는 이유를 어딘지 간단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글프게도 대단히 정신건강에 나쁠 것 같은 이유였다.

만약 자신의 내장의 강도가 인간과 엇비슷했다면 위 언저리에 구멍이 나 있겠지,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예의상 케일리를 향해 질문했다.

“패널티도 안 받고, 남는 시간 쉬잖아요.”

싱긋 상쾌한 미소와 함께 돌아온 대답에 에드워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리의 대답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은 아니다. 저 새끼는 구제할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수가 없으리라는 체념의 몸짓이었다.

질린 얼굴로 말없이 뛰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썩 기분이 좋은지 희미한 미소까지 띤 채 말했다.

“게다가 총 맞은 덕분에 제 발로 안 뛰어도 되는 게 제일 좋죠.”

“그래…… 넌 총 맞고도 좋아할 수 있는 성격이니 어디에 떨궈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벌써 맞은 건 하는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의외로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요. 지금 아픈 건 오히려 팔인데…… 안 걸어도 되니까 다리 대신 아픈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요!”

모든 인류가 저렇게 훌륭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구상에는 전쟁도 기아도 폭력과 그 모든 투쟁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곧 모든 것에 순응한 인류가 멸망하겠지.

“결국은 네놈이 원하니 나더러 1등을 하라 그 말이군.”

뱀파이어는 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할지, 아니면 어제 얻어먹은 끝내주게 맛있는 피를 생각해서 이 정도는 귀엽게 봐줄 만한지를 재는 저울이 에드워드의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다소 침울하게 중얼거린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이미 그의 결론을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었다.

“내가 널 1등으로 결승점까지 데리고 가면 나한테는 무슨 이득이 생기는데?”

불쑥 튀어나온 에드워드의 물음에 케일리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패널티도 안 받고 남는 시간 쉴 수 있어요.”

“…….”

“아, 혹시 전략전술에서 저평가를 받아서 1등을 놓칠 수도 있다는 걸 지적하려고 한 건가요? 하기야 최종결과는 평가 종합치로 정해진다고 했으니 그것도 그러네요. 다른 유닛을 찾아서 싸움이라도 걸어야 하는 건가?”

다른 유닛을 일부러 쫓아다니면서 싸움을 거는 게 전략적으로 우수한 평가를 받을 리가 없다는 현실을 일깨우기 이전에, 에드워드는 저 사고의 단순무식함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저놈을 데리고 다니는 자신에게도 피해가 미칠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제 발로 걷지도 않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는 하지만…….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대체 사고가 어떻게 튀어야 1등을 하려고 다른 놈들을 쫓아다니면서 드잡이질을 할 마음이 들 수 있는 거지?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하나를 얻기 위해 열을 버리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케일리의 계산법을 지적하기보다 앞서 에드워드는 중요한 오류를 짚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너 설마 진심으로 그게 나한테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다 제쳐두고, 패널티를 받지 않아도 된다거나 남는 시간에 쉴 수 있다는 게 이득으로 느껴지는 건 그게 아주 싫은 것처럼 보이는 케일리 정도였다. 나머지 훈련생들이야 패널티보다는 연수에서의 성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테니 어떤 면에서 목표는 같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 동기가 정반대에 있는 셈이었다.

에드워드의 물음에 케일리가 대답했다.

“저는 보통 언제나 진심인데요.”

“그렇군. 나도 진심으로 궁금한 건데, 혹시 어릴 적에 실수로 표백제 같은 거 주워 마신 건 아니지?”

그게 아무리 강력해도 뇌의 주름까지 지울 수는 없을 텐데…….

여상하게 중얼거리는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케일리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없죠, 표백제는 음료가 아니니까요.”

“음, 그래. 다행이다. 표백제한테 다행이야. 괜한 소송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리고 네 부모한테는 안 된 일이다, 표백제를 마셔서 그렇게 된 거라면 그럴듯한 이유라도 있으니 표백제 회사와 싸우며 자기 합리화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어렵겠네.’라는 에드워드의 본심을 눈치챘는지 못했는지 케일리 또한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케일리에게는 일반적으로 비꼬기라고 불리는 화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제 불찰을 반성했다.

다음부터는 더 직설적으로 말해야겠군. 무슨 말로도 저 강철 같은 정신머리에는 스크래치 하나 새길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아니, 이 경우에는 강철이라기보다는 독일 놈들이 좋아하는 그 단단해서 뭐든 튕겨내는 그 곰처럼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젤리가 더 알맞을지도.

“그럼 에드워드, 잘 부탁드릴게요.”

자신의 이름과 잘 부탁한다는 인사 사이에 ‘제 편안한 미래를’이라는 뻔뻔한 말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솔직한 말로 어제 얻어먹은 만큼을 되갚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결승점까지 옮겨다 나르는 정도를 못 해줄 것도 없기는 했다. 인간의 생피가 이렇게나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답례라고 해도 뭐,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케일리 녀석의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온 저 말에 순순히 그러마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다는 사소한 성격적 문제가 에드워드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 맨입으로 해주는 건 앞으로 더 버릇이 나빠질 것을 염려해서라도 좋은 결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남한테 뭔가를 부탁할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이번 기회에 미리미리 교육시켜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까 말한 것처럼, 널 1등으로 만드는 건 가능하지만 나한테도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패널티 없이 쉴 수 있는 시간……?”

“그건 네가 원하는 거고.”

여전히 달리는 것은 멈추지 않은 채 에드워드가 하는 말에 케일리의 표정이 다소 침울해졌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지금 가진 것은 이곳저곳 누덕거리는 몸뚱이와 에드워드에게 맡겨둔 군장뿐이었다. 군장을 선물해야 하나. 그런데 군장을 준다고 에드워드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남는 건 몸뚱이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더…… 마실래요?”

여기서 더 혈액을 손실하면 다소 목숨에 지장이 올 것 같은 기분이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에드워드가 죽을 때까지 마시지는 않을 것이라 케일리는 생각했다.

일단 에드워드의 하는 양을 관찰한 결과 새 파트너라는 것 자체에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느끼는 모양이라, 기껏 어느 정도 적응한 자신이라는 파트너를 시체가 되도록 쪽쪽 빨아냈다가는 귀찮은 일이 잔뜩 늘어날 테니 말이다. 귀찮은 일은 죄악이었다. 그 점에 케일리는 백분 동의했다.

에드워드는 똑똑한 뱀파이어이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며, 그런 고로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마셔줄 것이다. 그렇게 결론 내리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니 말이다.

“아, 혹시 뱀파이어한테 피가 자동차의 휘발유 같은 건가요? 많이 마실수록 더 빨라지고 그런 거면 좀 많이 마셔도 괜찮아요!”

스윽, 에드워드의 입가로 왼손을 내밀며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 때문에 하마터면 발을 잘못 디딜 뻔했다. 휘청이는 몸을 바로 한 에드워드는 케일리의 한결같음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하는 것도 문제기는 하지.’

그런데 저 성격이 한결같은 게 과연 범인류적으로 이득을 가지고 올지는 의문이었다. 오히려 인류의 하향평준화를 가속시킬 뿐일 것이 분명한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케일리가 제 몸을 거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네 눈에는 내가 무슨 탈것으로 보이기라도 하는 거냐, 그걸 마신다고 더 빨라지게!”

에드워드 또한 대가를 말할 때 다른 것을 떠올리지 않기는 했다. 애당초 바다에 던져놓으면 해파리마냥 둥실둥실 떠다니기만 할 것 같은 저 케일리 놈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게 피 말고 있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좀 더, 그래, 방법이라는 걸 골라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마치 달달거리는 고물 스쿠터에 가솔린을 주유하듯 제놈의 손을 내미는 것에, 코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던 달큰한 피 냄새로 인한 흡혈욕구가 깨끗하게 가신 에드워드가 그렇게 소리치자 잠시간 눈을 깜빡인 케일리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고 이게 아닌가, 라며 중얼중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사람도 말도 배가 고프면 느려지잖아요. 그러니까 배부르면 빨라질……. 아, 배가 너무 불러도 느려지는구나. 역시 뭐든 넘치는 건 좋지 않죠. 그럼 피 말고 다른 걸로 할까요? 근데 제가 지금 별로 가진 게 없거든요. 혹시 첫 월급 나올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연수 끝나고 잠깐 집에 들러도 되는데…….”

가진 건 없지만 1등은 하고 싶다는 제법 강력한 의사표현에 에드워드가 달리던 것을 멈추고 정글 한복판에 우뚝 섰다.

“내 몸값 비싸다.”

별안간 멈춰 선 에드워드가 그렇게 대답하자 케일리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저 돈 많아요!”

집에 두고 온 수표책만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앞으로도 종종 이용하고 싶을 만큼 편리한 이동수단인 에드워드를 향해 그렇게 말했으나, 별달리 반응이 없었다. 자신을 안아 든 채 오른쪽, 왼쪽, 뒤쪽을 가늘게 뜬 눈으로 살피는 그를 올려다보며 혹시 화폐를 믿지 않는 현물주의자인가 생각한 케일리가 물음을 던졌다.

“저…… 돈이 별로면 주식이나 채권 같은 것도 있거든요.”

자신의 몫인 우량채권과 가문에서 경영하는 사업체의 지분을 시장가치로 환산하면 제법 큰 금액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케일리였다. 그것들의 가치를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대가로 내미는 것을 로체스터 가문의 사람들이 보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노릇이었지만 이 자리에는 에드워드와 케일리밖에 없었고, 천만다행히도 에드워드는 채권이나 주식에 관심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 노숙자였던 게 입만 살아서는. 내가 뭘 믿고 너랑 돈거래를 하겠냐.”

이죽거리는 에드워드의 말에는 일리가 있어서, 케일리는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곧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지금 가출을 나온 몸이었다. 쫄래쫄래 집에 돌아가 수표책만 들고 나온다면, 아마 중간에 잡혀서 석 달 열흘은 외출금지를 당하겠지.

잘은 몰라도 여섯 번째 사업을 말아먹었을 때보다는 더 큰 벌을 받을 거라는 확신은 들었다. 역시 연수를 다 끝내고 제대로 된 직장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때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더는 가진 게 없는걸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케일리를 에드워드는 가까운 나무뿌리에 내려놓았다.

얼떨결에 이끼 가득한 나무에 걸터앉은 케일리는 설마하니 대가로 지불할 게 없는 빈털터리라 이대로 버려지는 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에드워드는 짊어지고 있던 군장까지 쿵쿵,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짊어지고 있던 짐덩이를 모조리 던져버린 에드워드가 정글을 향해 걸음을 내딛은 순간, 케일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소맷부리를 잡아챘다.

“부동산으로도 안 되나요?”

에드워드에게 버림받는다고 해서 당장 쓰러져 죽지야 않겠지만, 총 맞은 다리를 하고 홀몸으로 정글을 빠져나가는 건 총 안 맞은 다리로 빠져나가는 것과 비교하면 노동량 자체가 달랐다.

가능하면 아까 하던 것처럼 저도 같이 옮겨주시면 안 되겠니? 어차피 가는 방향도 같은데 너무하신다.

그런 눈으로 울상을 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의 필사적인 눈빛에 서늘한 눈빛으로 숲 저편을 바라본 에드워드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말라고, 난 내가 원하는 걸 알아서 받아 챙길 테니까.”

제 소매를 움켜쥔 케일리의 손을 억지로 떼어놓은 에드워드는“아, 그래. 그럼 먼저 선금을 받아볼까.” 중얼거림과 동시에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에드워드의 손에 잡힌 자신의 왼손이 그의 입가에 닿는 것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곧 그가 말한 선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꾸욱, 검지 끄트머리의 연약한 살을 지긋이 눌러오는 단단한 감촉의 끄트머리로부터 보통 사람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날카로움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살을 파고든 뜨거운 감각이 열과 고통의 사이를 오갔다.

그래 봤자 기껏해야 손가락 끝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온몸의 신경세포가 몰린 것처럼 화끈거렸다. 어느새 붉게 물든 에드워드의 입술 사이로 서슬 퍼런 송곳니가 엿보였다. 그것의 끄트머리가 뚫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은 순식간에 지나가, 손가락 끝으로부터 온몸에 퍼지는 열기와 근질거리는 묘한 감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츄웁, 츕.

감질나게 떨어지는 핏물이 에드워드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뜨겁고 축축한 입안에서 빨아들여지는 그 감각에 이를 악물자 아랫입술이 터진 듯 입에서 비린 맛이 번졌다.

‘이런.’

낭패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에 에드워드는 할짝, 혀를 내 그의 손가락 끝을 핥아올렸다.

“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밤색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입안에서 향주머니를 터트린 것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달콤한 피 냄새는 어젯밤의 기억에서보다 농밀한 맛으로, 잘못하면 당장 혀가 마비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송곳니로 낸 손가락 끝의 작은 상처에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빨아올린 에드워드는 아쉬움에 하얀 손가락을 입안에서 굴리며 몇 번이고 혀를 댄 후에야 그것을 놓아주었다. 차라리 손목을 고를 걸 그랬다. 먹은 듯 만 듯 감질나는 입안에 달큰한 향취가 맴돌았다.

뭐, 오늘만 날도 아니기는 하지.

아쉬운 눈으로 피가 멎은 손가락 끝을 지긋이 바라본 에드워드의 눈에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깜빡이는 케일리의 얼굴이 들어왔다.

쟨 또 왜 저런다냐?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뺨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인 에드워드는 곧 피를 마시지도 않은 그의 입술이 붉게 부풀어 오른 것을 바라보며 쯧 혀를 찼다. 입술을 깨문 듯 잇자욱과 금방 생긴 선홍빛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은 에드워드는 보일 듯 말 듯 묻어난 그 핏물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음, 역시 나중에 제대로 받아야겠어.”

손가락에 묻은 핏자국까지 샅샅이 핥은 에드워드가 내려놓은 군장에 걸쳐 있던 소총을 집어 들었다.

“자, 그럼 가는 길 편하도록 가볍게 청소나 해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 저편에서 바스락,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주저 없이 걸어가는 에드워드의 뒷모습에 케일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 버리려고 한 게 아니었나 보네.

약간의 안도가 찾아왔다. 혹시 몰라 제 옆에 놓인 군장에서 에드워드에게서 잠시 빌린 글록을 꺼내 손에 쥔 케일리를 뒤로한 채 에드워드가 숲을 향해 말을 걸었다.

“어이, 숨바꼭질은 내 취미가 아니라고. 네 연령대에 맞는 놀이가 하고 싶으면 또래를 찾아가. 애먼 데서 꼬리 흔들지 말고.”

잠시간 정적이 감돌았고, 아니나 다를까 우거진 숲 저편에서 부산스러운 이파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곳곳에서 불쑥불쑥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먼 거리지만서도 케일리의 눈에 익은 얼굴 두 개가 보였다.

“아, 저분들…….”

분명 오른쪽에 있는 사내의 이름이 시릴이었던가. 그리고 왼쪽은 매튜였지. 전에 봤을 때는 머리에 털이 부숭부숭한 동물 귀를 달고 있었는데 오늘은 머리 양옆의 평범한 사람 귀뿐이었다. 아무래도 그사이 제대로 된 둔갑기술을 익힌 모양이었다.

시릴과 매튜를 제외하고도 셋, 아니 넷 정도가 이어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거지? 기척은 제대로 숨기고 있었을 텐데.”

“칫, 그러게나 말이야. 쥐새끼 주제에 눈치 하나는 기똥차게 빠른 모양이군.”

에드워드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애매한 그 말에 그의 동료가 맞장구쳤다.

“저 맹해 보이는 인간 녀석은 꼭 생포하도록 해. 난 저 새끼한테 볼일이 아주 많으니까. 이 건방진 금발 놈은 너희 마음대로 가지고 놀라고.”

여봐라, 내가 네놈의 욕을 할 테니 귀담아듣도록 하거라. 큼지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릴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제법 각이 잡혀 있는 것에 케일리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건방진 금발 놈은 자신이 아닐 테니, 시릴이 생포하고 싶어 하는 맹해 보이는 것이 바로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했다.

살아 있는 상태는 유지시켜준다니 고마워해야 하나. 태평히 떠올린 케일리는 천천히 무릎을 짚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성치 못하기는 했지만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는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새파란 새끼 라이칸들이 젖비린내를 풀풀 풍기며 조잘거리는 것에 에드워드는 잠시간 고뇌했다. 놈들은 집단생활을 하는 라이칸의 새끼였다. 여기서 저 머리 나쁜 새끼들을 조져놓으면 아무래도 그들의 부모로부터 항의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라이칸 자체는 위협적이진 않으나 그 집단을 상대해야 한다면 매우 귀찮아질 수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가볍게 손만 봐줄까?

그렇게 결론 내린 에드워드는 자신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보내는 라이칸 중 가장 덜떨어져 뱀파이어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쥐새끼 발언을 던진 파릇파릇한 개새끼를 향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글쎄, 대충 두어 시간 전부터 어디서 고약한 개똥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 언제 그 지저분한 꼬랑지를 드러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턱을 매만지며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가 아하,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기척을 숨겼다는 게 혹시 두 시간 전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그때는 확실히 못 느끼기는 했다만.”

물론 그는 라이칸들이 자신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 대략 두 시간 전부터이며, 그보다 전에는 최소한 기척을 느낄 만한 반경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짐승 새끼들의 으르렁거리는 가소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요즘 라이칸들은 뱀파이어 구분하는 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 자신을 인간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이 가엾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무리 에드워드의 성격이 비틀렸다고는 하나, 사자를 앞에 두고 엉덩이를 까며 오두방정을 떠는 페라리 독을 보며 분노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바람 앞의 촛불마냥 언제 꺼질지 모르는 그 생명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

“어이, 케일리. 1등을 하고 싶다면 일단 저 후각이 마비된 개새끼들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어?”

별안간 자신에게로 돌아온 화살에 케일리가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시릴의 발언으로 짐작하건대 저들의 목표는 자신인 것 같았다. 얼떨결에 말려들었을 뿐인 에드워드가 처리해준다면 대단히 감사한 일이었다.

“이건 결승점까지 널 옮겨다 놓는 것과는 별도요금으로 계산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에게 고개를 끄덕인 케일리가 문득 아! 탄성을 뱉어냈다. 왜 그러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는 에드워드를 향해 그는 답지 않은 엄한 표정으로 라이칸들을 흘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에드워드, 그런 식으로 부르면 저분들이 불쌍하잖아요.”

갑자기 무슨 말을 꺼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히자 “후각이 마비된 개새끼요.”라며 케일리가 설명했다. 지금 누가 누구 때문에 새파랗게 어린 짐승 새끼들이랑 대거리를 하는데, 네놈이 편을 들 손을 잘못 들었다고 신랄하게 받아치려던 에드워드는 곧바로 이어진 케일리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동물을 괴롭히면 못써요. PETA에서 화내요.”

동물.

넓은 의미에서 라이칸슬로프가 동물에 속하긴 하겠지만, 눈앞에 있는 놈들은 엄연히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들을 동물 취급하는 것이 훨씬 모욕적인 발언이라는 것을 에드워드는 케일리의 발언을 들은 라이칸들의 반응을 통해 확신했다.

미련한 개새끼나 가련한 동물이나 별달리 다른 부분도 없는데, 아무래도 라이칸의 입장에서는 후자가 훨씬 듣기 싫은 모양이다. 빠드득, 이를 갈며 포위망을 좁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다소 힘 빠진 목소리로 케일리를 향해 대답했다.

“어, 그래. 동물을 괴롭히면 안 되긴 하지. PETA 애들도 귀찮고 말이야.”

훌륭하게도 라이칸들의 사기를 북돋운 케일리의 유능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본래도 호전적인 그들이 털을 곤두세우고 서슬 퍼렇게 이를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경우, 비열한 인간들을 벤치마킹해 선방만 맞아준 후 정당방위로 죽사발을 만드는 전술로 나가면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참이었다.

슬금슬금 주위를 맴돌며 야생의 짐승이 무리지어 사냥하듯 에드워드를 둘러싼 상태에서, 일순 앞으로 튀어나온 시릴이 소리쳤다.

“매튜, 이그실, 안튼 너희 셋이 금발을 맡아. 나와 로드, 크렌벨이 멍한 놈을 맡을 테니까!”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 라이칸이 에드워드에게 동시에 달려들었고, 시릴을 포함한 나머지 세 마리가 에드워드를 지나쳐 케일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을 향해 순식간에 포위망을 좁혀오는 라이칸의 모습에 뚝, 뚜둑 고개를 꺾은 에드워드가 케일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육안으로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총알을 연사했다.

탕, 탕, 탕!

총소리에 놀라 케일리에게 달려들던 라이칸 세 마리가 멈칫 몸을 굳히는 틈을 타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손톱을 내리찍는 라이칸 한 마리를 향해 들고 있던 소총을 휘둘렀다. 뻐억. 라이칸의 팔뚝이 기형적으로 비틀렸고, 그가 둔기마냥 휘두른 소총의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몸체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뒤이어 라이칸의 단단한 육체에 뚝 부러진 소총의 끄트머리를 내리치는 동작은 케일리의 눈으로는 좇을 수 없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악!”

반대편으로 꺾인 자신의 팔과 어깨에 박힌 조각난 총기. 그것을 인식한 순간 노도처럼 밀려오는 고통에 선봉으로 달려든 라이칸, 이그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에드워드의 뒤를 노려 손톱을 휘두르려던 매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었던 에드워드가 감쪽같이 사라져 무릎을 꿇고 제 어깨를 감싸 쥔 이그실밖에 보이지 않는 것에 주춤했다.

“네놈들의 문제는 불쌍할 정도로 약해빠졌다는 것뿐만이 아니야.”

그리고 귓가에 흘러드는 목소리.

“니네 부족에 있을 때 아무도 안 가르쳐주든? 냄새로 상대를 구분하는 건 라이칸의 가장 기본적인 전투소양 중 하나라고.”

으르릉, 목을 울리며 그를 잡아채기 위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선 매튜의 눈앞이 별안간 캄캄하게 변했다. 쿵. 소리가 이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게 뭐지? 지금 뭐가 일어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만 것은 시야가 아니었다. 바닥을 빨갛게 물들이는 피가 눈앞에 흥건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무엇에 당한 건지도 모른 채 쓰러져 내린 매튜와는 달리, 에드워드가 그의 머리를 방울토마토마냥 가볍게 쥐더니 바닥을 향해 던지듯 내리찍는 일련의 과정을 목도한 라이칸들이 할 말을 잃었다.

한 손으로 라이칸을 머리째로 들어 올려 바닥에 메다꽂는 것은, 같은 라이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물며 그것을 한낱 인간이 해낸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에게 달려든 세 라이칸 중 둘을 처리한 에드워드는 남은 한 마리, 안튼에게 시선을 옮겼다. 서늘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그저 시선을 마주했을 뿐인데 주변의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미 쓰러진 두 동료에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안튼이 다리근육에 힘을 넣었다. 최대의 방어는 공격. 압도적인 실력 차가 있을 때 방어할 방도가 없다면 먼저 공격하는 것이 차라리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탓이다.

땅을 박차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안튼에 에드워드가 재빨리 제 발치를 훑었다. 맨손으로 상대했다가는 까딱 잘못하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적당히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없나, 살펴도 정글 한가운데에서 당장 무기로 쓸 것을 주울 확률은 낮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안튼이 반 이상 라이칸의 본래 모습으로 화(化)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에드워드는 빠른 속도로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매튜를 주워 들었다.

“안튼, 멈춰!”

케일리를 포위하다 말고 순식간에 추수당하는 제 동료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망설이던 시릴이 별안간 소리쳤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안튼이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에드워드의 손에 뒤통수를 잡혀 인형처럼 축 늘어진 매튜의 모습이었다.

“헉!”

에드워드에게 달려들다 말고 눈앞에 들이밀어진 동료의 얼굴에 안튼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전력을 다해 휘두르던 팔을 멈추기 위해 근육을 팽창시켰으나, 안타깝게도 휘둘러지던 팔을 멈추는 것은 관성이라는 물리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는 안튼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묘기였다. 또한 매튜의 뒤통수를 쥔 무지막지한 손에는 자비가 없었다.

뻑!

주르륵,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매튜의 것인지 결론을 내릴 틈도 없었다. 안튼은 흙바닥에 고꾸라진 자신의 몸 위를 덮는 무게감이 매튜라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세 마리 남았나?”

스윽, 창백한 뺨에 튄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쳐낸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둘러싼 세 마리의 라이칸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별달리 볼 것도 없던 평범한 인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던 사내였다.

어째서 이 위압적인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거지?

당황한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무리의 반을 잃은 시릴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과 매튜를 엿 먹였던 건방진 인간을 조금만 손봐주려 했던 것뿐인데 정신을 차리니 이쪽이 속절없이 손을 보여주고 있는 좆같은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멍한 놈을 생포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생으로 포가 될 것만 같았다.

대체 이 기구는 어떻게 생겨먹은 구석이란 말인가. -B 지구에서는 인간 놈들이 하나같이 라이칸을 뛰어넘는 전투력을 자랑했다. 지난 일주일간의 훈련에서도 인간 녀석들과 끊임없이 견제하며 때로는 주먹을, 때로는 무기를 주고받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던 인간의 보편적인 전투능력을 가볍게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기야 했다.

그놈들의 존재만 해도 충분히 눈엣가시인 판국에, 자신과 매튜를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보인 멍한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료들을 끌어 모은 것까지는 좋았다. 멍한 놈도 팔에 하자가 있는 상황에서 라이칸 둘을 상대하는데 고전했으니 여섯이면 충분하리라 판단했던 것이 희대의 실책이었다.

이런 괴물 놈이 있으리라 예상했었더라면 겨우 여섯을 데리고 오지는 않았을……. 잠깐만, 그런데 정말로 저 괴물 놈은 인간이 맞긴 한 건가?

라이칸 여섯을 맨손으로 상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문제라고.

하지만 금발 놈과 멍한 놈 둘에게서는 확연히 인간의 피 냄새가 났다. 개코는 속여도 라이칸의 코는 못 속인다고, 그들의 후각은 지구상의 짐승과 이종족을 통틀어 정점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 자신들이 냄새를 잘못 맡을 리는 없…….

그러고 보니 왜 금발 놈과 멍한 놈한테서 같은 피 냄새가 나는 거지?

어디 한 군데를 거나하게 다쳤는지 두 사람에게서 진동하던 피 냄새는 추적을 용이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확연히 구분했다. 문제는 그 피 냄새가 두 사람이 떨어진 지금도 각각에게서 진하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렬한 냄새가 섞이면 체취가 옅어지는 것은 후각이라는 감각의 단점이었다.

금발 놈이 멍한 놈을 안고 뛸 때는 밀착해 있으니 냄새를 구분하기 힘들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놈이 거리를 둔 상태에서까지 같은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 점을 뒤늦게 눈치챈 시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같은 피 냄새를 풍기며, 그 피의 주인은 멍한 놈. 또한 멍한 놈의 신체능력은 역시나 훈련으로 인한 피로와 부상이 있었던 자신과 매튜를 상대하며 고전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매우 훌륭한 인간 선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금발 놈은 달랐다. 금발 놈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최소한 인간이라는 종과 라이칸이라는 종이 맞붙었을 때 상식선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경지를 한참은 뛰어넘은 것이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제 발치에 쓰러져 있는 매튜, 안튼, 이그실에 무기질한 시선을 던진 에드워드가 케일리에게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향해 그렇게 묻는 시릴에게 대답했다.

“이제야 그게 신경 쓰였다니, 요즘 라이칸들은 가정교육이 글러먹었군 그래!”

에드워드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조롱하기 위한 놀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시릴을 비롯한 두 라이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런 시릴을 향해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멍청한 네놈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볼까.”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었지만 이미 패거리의 반을 잃은 상태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은 남은 동료들마저 위험에 빠트리는 멍청한 짓이었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시릴의 귓가에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 라이칸들이 영역에 민감한 것처럼, 뱀파이어 또한 소유물에 대한 확고한 철칙을 가지고 있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하나가 유난히 귀에 걸렸다.

지금 쟤가 뭐라고 했냐. 뱀…… 뭐라고 한 것 같은데. 하하. 아니겠지. 족장과 장로들이 말하길 놈들은 인간들 틈에 꽁꽁 숨어서 결코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오만방자한 것들이라고…….

하지만 금발 놈의 정체가 뱀파이어라면 그에게서 멍한 놈의 피 냄새가 나는 것이 설명되었다. 그러니까 두 놈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이다.

시발, 재수가 없어도 유분수지 일이 이렇게까지 좆같이 돌아갈 수도 있는 건가.

우거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착각이 일었다. 하필 고르고 골라 뱀파이어가 걸릴 게 뭐란 말인가. 라이칸 또한 이종들 중에서는 상위 포식자에 속했지만 뱀파이어와는 비견할 바가 못 됐다.

적어도 라이칸은 생명체였고 수명이 있는 포유류의 일종이었다. 뱀파이어처럼 종도, 목도 알 수 없는 불로불사의 괴물과는 태생부터가 달랐고, 가능하다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심지어 자신들은 막 성인식을 치른 라이칸 계의 햇병아리였다. 레벨 1부터 시작하는 RPG 게임에서 시작하자마자 막판 보스를 맞닥뜨린 것과 진배없는 이 상황이 한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걸음아 날 살려라 꼬리를 내빼기에도 한참은 늦은 타이밍이다. 어쩌면 좋을까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시릴은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주목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유물.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그렇다면 뱀파이어는 이 멍한 놈을 제법 아끼고 있다는 뜻일 테다.

판단은 빨랐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시릴은 자신을 바라보며 분수를 깨닫기를 종용하는 새파란 시선을 비껴낸 후 몇 발짝 떨어져 있던 케일리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커다란 손에 별안간 낚아채인 케일리가 눈을 크게 뜨고 끌려갔고, 예리한 라이칸의 발톱을 내어 그의 목에 가져다 댄 시릴이 비소를 머금었다.

“뱀파이어든 뭐든, 네놈이 손을 쓰기 전에 이 멍한 놈의 목을 뚫어버리는 것 정도는 가능하거든.”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던 만큼, 그가 보일 동요를 기대하며 한껏 비열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시릴은 그러나 시큰둥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의 시선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뱀파이어가 빠르다지만 이 거리에서 멍한 놈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할 거면 해보라는 듯 턱짓을 하는 것은 자신의 계산에 맞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질로 잡힌 멍한 놈 또한 인질 된 도리로 보여야 할 미덕을 무엇 하나 지키고 있지 않았다. 겁에 질리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린 멍한 놈이 입을 여는가 싶더니 “오, 왠지 이 구도 되게 익숙하네요.”라며 태평한 소리를 지껄였다.

시릴 뿐만 아니라 케일리 쪽을 맡기로 한 로드와 크렌벨 또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찰나 에드워드가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넌 인질 되는 게 취미냐? 어제도 그러더니, 하루라도 거르면 입안에 가시가 돋아?”

“그럴 리가요. 제 취미는 명상인데요. 인질같이 귀찮은 포지션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평이하게 대답하자, 에드워드가 시릴을 향해 말했다.

“어이, 젖비린내들. 그쪽은 생포하겠다며?”

“상황이 바뀌었다. 인질의 안전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분명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상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에 와서는, 생포고 뭐고 이 상황을 최소한의 피해로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인질교환을 조건으로 자신들의 신병을 요구하려 했던 시릴은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초조했다. 그런 상황에서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기라도 하듯 멍한 놈이 말했다.

“파이팅, 파이팅, 에드워드! 이겨라, 이겨라, 에드워드!”

물론 뱀파이어와 자신들이 대치상태였으며 멍한 놈은 뱀파이어 편이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응원을 하기에는 본인의 상황이 매우 불안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은 발언이었다.

제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화를 돋우고 싶다는 완곡한 표현인 걸까.

하지만 시릴의 눈에 들어온 멍한 놈의 표정은 정말이지 멍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걸까. 하지만 멍한 놈에게도 뇌가 있을 텐데.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시릴의 귓가에 역시나 허탈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지금 여기서 위험한 건 너뿐이거든? 긴장감이라도 좀 가져라. 동물을 소중히 여기느니 뭐니 해놓고 네놈이 제일 문제라니까.”

그 말에 시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가장 위협을 받는 유일한 존재가 제일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니 눈을 뜬 채 질 나쁜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평생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지독한 악몽이었겠지. 생각하며 시릴은 멍한 놈의 팔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보통 긴장을 하면 실패하기 쉽다고들 하지 않나요?”

고개를 갸웃거린 멍한 놈이 그렇게 묻자, 뱀파이어가 말했다.

“적당한 긴장은 도움이 된다는 말은 못 들어봤고?”

“하지만 적당함의 기준이 너무 모호해요. 그냥 긴장을 안 하는 게 제일 낫겠네요.”

“네 경우에는 태어나기도 전에 긴장을 어디다 두고 나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는 한다.”

역시나 긴장감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고, 이윽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시릴은 시시껄렁한 개소리나 주고받는 뱀파이어를 향해 보란 듯이 발톱을 세웠다. 발톱 끝에 닿은 하얀 목덜미에 주르륵, 선홍빛 선혈이 줄을 그었다.

“뱀파이어, 다시 한 번 경고하지. 네놈의 소유물을 산 채로 돌려받고 싶다면 나와 동료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해.”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꿰뚫을 것처럼 서서히 파고드는 날카로운 발톱에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피의 양이 늘어났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워드의 시선이 케일리의 허리춤을 스쳤다.

다른 두 라이칸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의 왼쪽 손의 손가락 하나가 허리춤에서 고민하듯 톡톡 움직였다. 왜 저러나, 의아함을 담고 있던 눈이 아하, 무언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달리했고 이어서 케일리를 향해 영문 모를 말을 던졌다.

“라이칸은 그 정도로는 안 죽을걸?”

일 센티미터가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목덜미에 박힌 시릴의 발톱 덕분에 미간을 찌푸리며 얌전히 서 있던 케일리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응했다.

“뭐야, 걱정해서 손해 봤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시릴은 자신의 발톱에 쑤욱 박혀 들어오는 살덩이의 감촉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작을 멈췄다.

‘시발, 대체 이게 무슨……?’

분명 자신은 위협만 할 요량으로 발톱을 밀어 넣고 있었을 뿐인데, 눈앞에 보이는 목덜미에는 드러난 발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쑤셔 박힌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이 멍한 인간은 자신의 발톱을 뽑아내는 순간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동맥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수 분 안에 죽는다. 심지어 이 상황은 그 목덜미의 주인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손을 봐주겠다고 패거리까지 끌고 오기는 했지만 시릴은 처음부터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생포를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라이칸들이었고 인간을 죽여본 적도 없었다. 먹기 위한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탓이었다-물론 폭력과 살생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시릴을 비롯한 라이칸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제 목에 라이칸의 발톱이 박히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돌린 케일리의 손에 뚝, 뚝, 검붉은 피가 묻어났다. 저 피는 어디서 난 것인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옆구리를 뜨겁게 적시는 감촉에 시릴이 시선을 내렸다.

케일리가 손을 뗀 그 자리에는 나이프의 자루가 보였다. 칼에 찔렸다. 그것을 깨달은 시릴이 저도 모르게 옆구리를 감싸 쥐듯 손을 가져갔고 동시에 케일리의 목덜미에 박힌 발톱이 빠져나갔다.

“윽, 그렇게 갑자기 빼면…….”

목을 꿰뚫은 단단한 흉기가 빠져나가는 소름 끼치는 감촉보다도 본능이 보내는 경고가 먼저 케일리의 손을 움직였다. 피가 쏟아지기 전에 재빠른 동작으로 제 목을 압박한 케일리가 비틀비틀 나무에 기대앉았다. 손도 하나밖에 없는데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목에 생긴 구멍을 손바닥으로 힘주어 눌렀지만,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제법 되었다.

아, 요즘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큰일이다. 철분제를 사 먹어야지.

서서히 무뎌져가는 의식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시릴이 펄펄 뛰며 미친 것마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 가죽, 내 훌륭한 가죽에 구멍이 났잖아!”

제 옆구리에 박힌 나이프를 재빨리 뽑아냈지만 뱃가죽에 뚫린 구멍까지 순식간에 메워지는 건 아니었다. 퐁퐁퐁 샘솟는 피를 지혈한다기보다는 구멍난 가죽을 이어붙이기라도 하려는 듯 두 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릴을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코웃음을 쳤다.

개새끼 개새끼 거렸던 걸 진짜 개새끼한테 미안하게 생각해야 하겠네. 개보다 못한 놈이잖아, 저건.

본인의 목숨보다 가죽의 질을 중요시 여기는 듯한 로드의 모습은 같은 라이칸인 로드와 크렌벨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부끄러운 모습인 모양이었다.

옆구리를 붙잡고 가죽, 가죽을 외치는 시릴의 뒤에 몰래 다가간 로드가 그의 뒤통수를 팔꿈치로 내리쳤다. 기절한 시릴의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대신 손으로 막으며 로드가 그를 부축했다. 케일리를 향해 느긋하게 걸어가는 에드워드를 향해 로드가 말했다.

“저, 솔직히 우린 멍한 애한테도 별로 유감없거든요. 쟤한테 감정 있는 건 얘랑 매튜뿐이라서요.”

자신의 동료가 넷이나 쓰러진 상태에서-그중 하나는 같은 팀한테 당한 것이기야 했다.- 비교적 온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로드에게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습격을 강행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러니 서로 더 피해 볼 것 없이 갈 길 가는 게 어떻습니까?”

로드의 말에 에드워드가 피식 웃었다.

“내가 피해 볼 게 있나?”

“당신 소유물이 좀 있으면 스틱스 강을 건널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다면야…….”

“뭐, 좋아. 저 널브러진 떨거지들도 잘 챙겨 가라고. 여기 독뱀 산다.”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흔든 에드워드는 라이칸에게서 완전히 관심이 사라진 눈치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드와 크렌벨이 흙바닥을 뒹구는 동료를 바라보며 무거운 표정을 했다. 멀쩡한 게 두 마리, 의식이 없는 게 네 마리. 각각 두 마리씩 이고 갈 수밖에 없었다. 우울한 공기가 그들의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런 라이칸들을 뒤로한 채 에드워드는 나무에 기대앉은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넌 진짜 케이먼 제도에 있는 은행 비밀금고에 목숨 몇 개 킵해두고 다니고 그런 건 아니지?”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목의 상처는 멀리서 보기에도 심각한 것이었다. 허리춤에 군용 나이프까지 차고 있기에 그거 좀 맞는다고 라이칸이 죽지는 않는다고 가르쳐줬더니, 정말 기가 막히는 자충수를 보여준다. 확실히 라이칸의 동체반사를 이기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저건 위험을 감수한다는 말로 설명될 게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물음에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케일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글쎄요……. 평균적으로 목숨은 하나니까 저도 하나뿐일 거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아직 두 번째 목숨이 있는지 시험해본 적은 없으니 제 두 번째 목숨은 슈뢰딩거의 목숨인 셈이네요.”

“안 웃기거든? 여기서 십 분만 가만히 두면 너 죽어.”

“뭐, 그래도 어차피 에드워드가 이길 거였잖아요. 그러니 별로 죽는 걱정이 들지는 않았는데요. 가능하면 어제 했던 것처럼 다친 곳 안 아프게 하는 것도 해주면 고맙고요.”

서서히 작아지는 케일리의 목소리의 음량에 에드워드는 그가 실제로 제법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제 동료를 챙겨든 라이칸들이 멀어져갔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케일리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자신이 속전속결로 상황을 정리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조차 어이가 없었다.

“너 눈치 없는 척 지껄이는 것도 실은 다 알고 하는 거지?”

이거 진짜 웃기는 놈 아니야? 중얼거리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요.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주의거든요. 차라리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누구한테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일일이 기억하는 것도 귀찮고, 그냥 말을 안 하면 편한데 뭐하러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나요.”

힘없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주장하는 케일리의 말에 묻어나는 진심에 에드워드는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알겠다. 얘는 정말 겉과 속이 똑같다 못해 아예 속을 뒤집어서 다 보여주면서 사는 거로군.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 시간낭비겠어.

“요금, 받는다면서요.”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말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밤색 눈동자에 에드워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렇게 순순히 말을 들어주면 버릇 나빠지는데.

오래간만에 연장자다운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가지고 갔다. 지독하게 코를 간질이던 피 냄새에 목이 탔다.

어째서일까, 지금까지 짧지 않은 생을 지냈지만 살아 있는 것에 대해 흡혈욕구를 느낀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닷물을 마신 표류자마냥 끝없이 갈구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이 요상한 인간의 피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구석이 있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목덜미를 감춘 붉게 물든 손가락 위를 느릿하게 핥아내리자 잡맛이 섞인 피가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개 냄새가 나는 다소 역한 맛은 라이칸의 것이었지만, 뒤를 잇는 케일리의 피가 그것을 상쇄시켰다.

단단히 제 목을 압박하던 손을 서서히 비켜내자 살이 패인 목덜미의 구멍을 통해 검붉은 피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져 나왔다. 그 상처 위로 에드워드는 주저 없이 자신의 이를 박아 넣었다.

“읏…….”

꿀꺽꿀꺽.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케일리의 피가 뱃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상처 주위를 혀로 핥으며 흘러나오는 피를 남김없이 마셨다. 간간이 억눌린 신음이 바로 귀 옆에서 들려왔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맛으로 인해 몽롱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정신으로 에드워드는 후욱 숨을 들이켰다.

코를 타고 올라오는 혈향뿐만 아니라 케일리의 체취가 섞여들었다. 어느 것이든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자신의 감각이 미쳐 날뛰는 탓인지, 그저 그 자체가 아주 맛있는 먹잇감이라는 방증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잠시간 피를 마시는 것을 멈춘 채 간간이 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에드워드의 머리 위로 미약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하아. 아까보다는 훨씬 덜 아픈 것 같아요.”

확실히 아까에 비하면 고른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자신의 입안에서 뛰는 것만 같은 케일리의 고동을 느끼며 에드워드는 다시금 그의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입안으로 톡 터지듯 퍼져가는 피맛은 그 어떤 산해진미와도 비교할 수 없을 극상의 맛이었다.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 싶은 것은 과연 식욕의 일종일까. 먹음직스러운 토끼를 눈앞에 둔 사자는 과연 이런 기분으로 그것을 포식하는 걸까.

사자가 될 수 없는 한 영영 이해하지 못할 난제였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의 설명할 수 없는 포식욕구를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 손에 쥔 목덜미가 파드득 경련했다. 끝을 앞둔 연약한 생명의 알림이었다.

이런,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허용량을 초과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더 이상 마시면 안 된다는 자기억제와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서 잠시간 갈등한 에드워드는 이내 초인과 같은 인내심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아쉬운 마음에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는 목덜미를 할짝거리다 힐끗 케일리의 얼굴을 훔쳐보니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다. 게다가 목의 구멍을 지혈하는 것보다 빨리 수혈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얼굴색이다.

고민은 짧았다. 에드워드는 제 입안을 깨물어 피를 냈다. 혀를 이용해 그것을 케일리의 목에 생긴 상처에 가지고 가자 라이칸의 발톱에 뚫린 구멍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의 피의 몇 가지 효능 중 하나였다. 상처가 제법 아문 것을 확인한 에드워드가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데 다소 편안해진 표정으로 케일리가 숨을 뱉듯 말했다.

“저…… 잠시만 기절할게요.”

친절한 예고에 마침표가 찍힘과 동시에, 케일리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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