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41)

#Mission4. Drink him! (1)

주륵, 처음 몇 방울로 시작된 그것은 에드워드가 주먹을 그러쥐어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케일리의 입안을 가득 채운 것뿐만 아니라 채 삼키지 못해 볼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로 밀려들어왔다.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뱀파이어의 회복속도를 감안해 필요양을 되도록이면 빠른 시간 내에 먹이려 한 고육지책이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입에 가득 차는 혈액을 겨우겨우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키는 것이 고작인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는 쯧, 혀를 찼다.

멍청한 게, 아까운 피를 다 쏟고 있어.

마시기 편하라고 욕조에 등을 받친 상태에서 입에 밀어 넣어주는데도 줄줄 입가로 흘러내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한심함을 금치 못했다. 물가에 데리고 가준 것만 아니라 아예 물을 떠먹여주는데도 마시질 못하니 이 얼마나 미련한 노릇인가.

다른 이들은 천금을 주고서라도 얻으려 혈안이 된 귀한 피다. 순혈 뱀파이어의 혈액은 그 가치를 아는 자들 사이에서는 금보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케일리가 미처 삼키지 못해 흘려보내는 것을 바라보며 아까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목에서 나오는 피를 먹이기 위해 케일리의 얼굴을 잡아 고정한 것은 좋았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양보다 넘치는 양이 많으니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숨을 쉬어가며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자신의 실책이었다. 앞으로 길어야 일 분. 거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벤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어가고 있었고,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자해하는 취미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한 번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싶었다. 마시기 쉽도록 그의 얼굴을 잡아들어 고개를 뒤로 꺾게 만든 그가 엄지를 내밀어 보드라운 볼을 더듬어 내려갔다. 숨이 막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처음 약속한 것처럼 미동이 없이 잘 참고 있는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더 크게.”

……?

쉴 틈을 주지 않고 밀려들어오는 혈액을 삼키는 것이 고작인 케일리는 그것이 에드워드의 목소리라는 것 외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뜨거운 것이 몸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기묘한 감각과 입안을 가득 채우는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맛에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는데, 에드워드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새파란 그의 눈동자가 눈꺼풀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선홍빛으로 잠식되어갔다.

“벌려.”

얼굴 위로 내리꽂힌 붉은 시선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 같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볼을 타고 내려와 입가를 몇 번이고 매만지던 손가락이 불쑥, 입안을 파고들었다.

목적이 분명한 뜨거운 살덩이의 감촉에 케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뒤이어 압박하듯 얼굴을 쥔 손에서 엄지손가락이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에 케일리는 머리 위에서 떨어진 나지막한 명령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입을 크게 벌리라는 거였구나.

연약한 입안을 무자비하게 침범해 온 그의 손가락이 저항을 거부하듯 조용히 누워 있는 케일리의 혀 위에 멈춰 꾸욱, 힘을 넣었다. 턱이 아플 정도로 입을 벌린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아귀힘에 의해 고개를 치켜든 채 열린 식도 안으로 꾸역꾸역 들어오는 그의 혈액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뜨거운 액체가 입술을 타고 안으로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코로 숨을 쉬며 입으로는 그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고개를 틀고 혀를 내리누르는 손길 덕분에 한결 수월히 목울대를 움직이던 케일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드워드를 올려다보았다. 손목을 통해 흘러나오는 진득한 피가 한 방울 남김없이 입안으로 들어가는지를 감시하기라도 하듯 날이 선 붉은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혀를 누른 손가락과 입안을 채운 혈액 중 어느 것이 더 뜨거운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 입을 통해 목구멍으로 넘어가 뱃속을 채우고 있을 혈액이 뇌 속까지 흘러들어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녹여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끈적하게 들러붙는 기묘한 감각의 정체를 케일리는 좀체 잡아낼 수 없었다. 피부 위를 자그마한 벌레가 수도 없이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열이 오르고 있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뱃가죽 안쪽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몸 안에서부터 채 방출하지 못한 열기가 못내 답답해 케일리는 저도 모르게 이를 세웠고, 입에 들어온 에드워드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것은 그의 인내심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각을 잠재우기 위한 미약한 발버둥이나 다름없었다.

손가락을 깨무는 연약한 움직임에 에드워드는 살짝 미간을 좁혔을 뿐, 이렇다 할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얌전히 피를 받아먹기나 하라는 양 혀를 누른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입안을 가득 채운 피비린내는 걱정했던 것보다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 이런 맛이었던가? 이렇게 달콤할 수가 있는 건가? 손가락이 베어 반사적으로 입에 옮겼을 때나, 혹은 입안을 깨물어 쇠 맛이 번졌던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에드워드의 맛은 자신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이 뱀파이어의 혈액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에드워드의 것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어 한참을 생각에 잠겼지만, 케일리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계속해서 흘러들어오는 혈액에 생리적인 거부반응을 보인 그가, 혀를 누르고 있는 살덩이를 무심결에 밀어낸 순간 날카로운 시선이 내리꽂혔기 때문이었다.

얌전히.

말 못하는 어린아이를 어르기라도 하는 양 미간을 좁히며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 때문에 케일리가 가만히 힘을 뺐다.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마냥 입을 벌린 채 속절없이 에드워드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케일리는 입안에 넘치는 그의 피를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삼켰다.

그리 오랜 시간은 흐르지 않았을 테다. 꿀꺽꿀꺽, 몇 모금을 그렇게 삼키자 입안으로 들어오는 혈액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이프에 의해 살이 쩌억 벌어져 피를 쏟아내던 에드워드의 손목이 어느새 회복된 것이었다.

“젠장, 벌써 아물었잖아.”

요 며칠 생피를 마셨기 때문일까. 지금까지의 경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아물어버린 손목의 상처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에게 피를 먹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를 내어주어야 원하는 만큼 회복이 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이건 좀 모자랄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에드워드를 상념에서 건져낸 것은 엄지손가락에 닿는 뜨겁고 까끌한 살덩이의 감촉이었다.

츕, 츄웁.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케일리의 혀가 그의 손가락에 묻은 혈액을 핥아올렸다. 멍하게 초점이 흐려진 달뜬 눈으로 몇 번이나 그 동작을 반복하는 모습은 갓 태어난 포유류 새끼가 어미의 젖을 찾아 헤매듯 본능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이봐, 케일리.”

짧게, 반복해서 손가락 끄트머리를 핥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낸 케일리가 느릿하게 제 입에서 빠져나가는 에드워드의 손가락을 붙잡기 위해 손을 들었다. 에드워드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입가로 가지고 간 케일리가 무언가를 억누르듯 잠시간 동작을 멈췄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양 얌전히 딸려 가준 에드워드의 손이 그의 볼을 쓸어내렸다. 짙게 가라앉은 밤색 눈동자에서 또르르 눈물방울이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왜, 오른손이 움직이니까 좋아 죽겠냐?”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드워드의 손목을 붙잡은 자신의 손은 분명 한번 으스러졌던 오른손이었다.

“아……?”

깜빡깜빡. 눈꺼풀에 움직임에 맞춰 기다란 속눈썹이 몇 번이고 상하운동을 했다. 그럴 때마다 눈꼬리에 맺힌 맑은 눈물방울이 또르르, 또르르, 볼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고통 탓은 아니었다. 멍하니 오른팔을 움직여보았지만 고통은커녕 으스러지기 전과 비교해도 오히려 가뿐했고 힘이 넘쳐났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자꾸만 눈물이 밀려나왔다. 제어할 수 없는 눈물샘에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입안을 채우던 만족감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에 이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다시금 그 뜨겁고 달콤한 것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와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기묘한 열기에 머릿속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답답해.

무엇이 그리 자신을 답답하게 만드는지 확연한 실체를 잡을 수 없어 짜증이 치밀었다. 감정변화가 무딘 편이라고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던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말처럼 목적했던 회복이 완전히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채워지다 만 것처럼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이 섧었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케일리의 눈물을 두어 번 훔쳐준 에드워드는 이내 포옥 한숨을 내쉬었고, 자신의 피와 스스로의 눈물로 엉망이 된 케일리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너, 눈 풀렸다.”

깜빡, 눈물 맺힌 눈을 깜빡인 케일리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속삭이는 에드워드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서럽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도 모르며 서러워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그는 커다란 손을 제 뺨에 가지고 가 표현에 서툰 동물이 애원을 하듯 비볐다. 물기 어린 뺨이 열을 머금고 자신의 손 안을 채웠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열기를 띤 밤색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붉은 시선을 올려다보며 케일리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배가 뜨거워요. 몸 안에 이상한 게 들어 있는 것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처음 겪는 몸의 변화에 답답함과 짜증을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서러운 얼굴을 하고 우는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는 결국 바람 빠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라는 듯 자신의 손에 계속해서 볼이며 이마를 비벼 오는 가련한 몸짓은 실제 행위의 주체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와는 관계없이 충분한 유혹으로 비쳤다.

과연, 인간이 뱀파이어의 혈액을 소화시킨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

실제로 접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론으로는 충분히 숙지했고 케일리가 보일 반응 또한 예상범위 안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대단히 의외로, 그 모습을 보며 회가 동하는 자신 쪽이었다.

발갛게 열기가 오른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한껏 찌푸려진 하얀 이마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게 쯧, 혀를 찼다.

뭣도 모르는 어린애 같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괴로운 표정으로 도리질치는 모습을 자신이 아니라 다른 뱀파이어 앞에서 보였다면, 지금쯤 이렇게 멀쩡한 꼴로 앉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온몸을 썩 유쾌하지 않은 액체로 적시며 숨만 헐떡이는 게 고작이었겠지.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에나.

흔히 인간의 삼대 욕구라 불리는 것에 대단히 솔직한 것이 뱀파이어라는 종의 특성이었다. 그에 속하는 에드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특성마저 뛰어넘는 독보적인 인내심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무엇보다 번식욕이랄 게 없는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식욕에 대한 에드워드의 태도가 대단히 스토익했던 덕분에 별종 취급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족들 사이에서 독종도 저런 독종이 없다며 혀를 내두르는 말을 들으며 살아온 에드워드는 자신의 식성이 아주 특이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붙잡힌 손을 부러 빼낼 생각도 하지 않고 잠시간 그 모습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생각이었지만, 길거리에 지나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먹이를 품평하듯 침을 줄줄 흘리는 동족들을 머저리라 비웃었던 게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마저 들 정도였다

만약 그게 케일리로 가득한 길거리였다면, 자신이라고 침 흘리는 녀석들과 한패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애초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들은 윤리 도덕을 신경 쓰지 않았다.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환상적인 밤을 바라고서 졸래졸래 따라온 인간들을 죄책감 하나 없이 꾀어내 식욕과 색욕을 동시에 채우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지만. 서넛도 모자라 대여섯의 인간을 데리고 신나게 붙어먹는 꼴을 구경하며 저렇게 지독한 악취를 풍기면 애써 세운 것도 식을 것 같다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던 에드워드였다. 당연하게도, 에드워드가 문제 삼은 것은 비정상적으로 많은 인원수가 아니라 악취 쪽이었다.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실상 인간과 인간형 이종족이 아니라도 다양한 성벽의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뱀파이어들의 사이에서는 금욕이라는 말 자체가 개그 소재로나 이용되는 단어였다.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뱀파이어들은 짐승과도 즐겼다. 굳이 짐승으로 변할 필요가 없기는 했다. 그들은 본체로도 잘만 했다.

자신의 종족이 매우 활동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또한 이견이 없었다. 그는 분명 식욕에 한해 탈 종족적 의견을 피력하는 편이었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혀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자각한 위에서 하는 행동이었다.

성욕에 대해서는 오히려 동족들이 정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굳이 뱀파이어라는 특성을 따지지 않아도 대부분의 생물의 본성은 그러했다.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에드워드의 경우, 식욕을 저하시키는 것과 같은 원인으로 인간에게 별달리 성욕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다른 이종족에 비해 인간은 감정이나 욕구의 표출이 노골적이었고 그것이 에드워드의 능력과 상극으로 작용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치고는 기본욕구가 옅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종의 특성을 앞서는 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능력 때문에 얻은 패널티에 가까웠다.

다 썩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를 풀풀 풍기는 상대를 두고 색욕이 일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건 성적 취향이나 이상형을 가르기 이전의 문제로, 크나큰 장벽이었다.

덕분에 그는 같은 뱀파이어나 비교적 감정의 체취가 옅은 이종이 아니면 하룻밤 잠자리 상대로도 고르지 않았다. 이종은 인간보다는 비위의 문제를 덜 건드렸으나, 다른 이유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순혈 뱀파이어는 애초 이종들과의 사이가 안 좋으니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이종 중에서도 스테디한 상대를 두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더니 다음 날 아침 다리 하나가 잘려 있었다거나 온몸의 혈액을 빼앗겼다는 식의 도시전설의 피해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따지는 것이 많다 보니 자연히 금욕이 길어졌던 에드워드의 육체가 이상적인 상대를 앞에 두고 열렬히 반응했다. 악취는커녕 굳건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내심을 모래성마냥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그것은, 흡혈욕과 성욕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대단히 자극적인 체취였다.

자신의 밑에서 바릊거리는 하얀 몸은 몸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기 탓인지 은은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애써 먹인 피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과 자신의 손바닥에 닿는 뜨거운 체온을 잠시간 가만히 내버려둔 에드워드는 어쩌면 케일리는 자신에게 있어서 애물단지가 아니라 보물단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피를 맛봤을 때만 해도 여기까지 올 거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애당초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인간을 상대로 성욕을 느낀 적이 없으니, 고려대상에 포함할 수도 없는 게 당연했다. 당연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작은 짐승처럼 소리 없이 흐느끼는 몸짓에 생각을 중단한 에드워드는 어느새 자신의 손을 놓아준 케일리가 답답하다는 듯 제 오른팔을 싸맨 붕대를 낑낑 뜯어내는 꼴을 보다 못해 손을 뻗었다.

찌이익, 날카롭게 세운 뱀파이어의 손톱에 의해 간단히 조각난 붕대가 욕조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해방감에 울음 섞인 케일리의 눈이 달처럼 휘었다. 그 단순함을 가만히 응시하던 에드워드 또한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이빨 요정이 확실히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했군 그래.”

말갛게 눈으로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본 케일리가 물기 어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요정?”

“그래, 너 같은 걸 찾아오면 데리고 다녀주겠다고 말했지. 물론 그때는 그런 이상한 녀석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게다가 실제로 데려온 것이 자신의 요구를 상회하는 묘한 인간이었으니, 페어리의 마법능력 하나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페어리가 일을 잘해도 칭찬은커녕 비아냥밖에 나오지 않았을 테다.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기본욕구가 충족되어야 예의도 차리고 위선도 행할 마음이 드는 거로군.

에드워드가 새삼 스스로의 관대함에 대해 생각하던 참이었다.

“저는, 평, 범한…… 하아, ……녀석인데요.”

간간이 눈살을 찌푸리며 뜨거운 숨을 뱉은 케일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을 언제나와 같이 농담으로 받아들인 에드워드가 피식 웃어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수많은 인간을 보아왔지만 케일리만큼 평범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녀석은 없다. 그런 에드워드를 가늘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며 케일리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평범한 게 재밌, 흐……나요?”

아, 그러고 보니 거짓말을 하느니 말을 안 한다고 했던가. 그럼 본인이 평범하다는 말도 진심이었겠군.

훈련지에서 케일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에드워드 새삼 어떤 환경에서 자라면 저런 게 평범함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다음에 한번 물어나 봐야겠군. 그러고 보니 아직 성이 뭔지도 못 들었고, 사내자식 이름을 계집애처럼 지어놓은 그 부모들의 꼬라지도 상당히 궁금했다.

“하, 더워.”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중얼거린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이미 욕실을 가득 채운 케일리의 체취에 오히려 자신이 정신을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상념이 끼어드는 것도 그 탓일는지도 몰랐다.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욕실에 기대 누운 케일리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간간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뱃속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날뛰는 뱀파이어의 피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기력을 소모하는 것 같았다.

열이 오르는 몸이 무겁게 가라앉아 팔 하나를 가누는 것조차 안간힘을 써야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오히려 힘이 넘쳤다. 힘이 없어서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이 쉽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몸 상태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데 얼마만큼의 힘이 드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눈을 깜빡이며, 케일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눈꺼풀이 무거운 게 아니라 너무 가벼워서, 어떻게 깜빡여야 할지 모르겠다.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은 그것보다는 기대감에 가까웠다.

“에드워드…….”

고개를 젖히며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이제는 부상을 당했다는 기억조차 흐려질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움직인 팔이 바로 앞에 있는 에드워드의 멱살을 잡았다.

가볍게 움켜쥐었을 뿐인데 인상을 찌푸리며 딸려 내려오는 것에 케일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숨이 맞닿는 거리에서 에드워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케일리는 킥킥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너 지금 힘 엄청 세거든. 게다가 제어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군.”

순혈 뱀파이어를 다소 거칠게 대한다고 해서 인간처럼 간단히 망가지지야 않겠지만, 보통의 뱀파이어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본인이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행동하는 케일리는 확실히 위험했다. 에드워드가 처음 경고한 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섭식한 인간이 가장 먼저 겪는 것은 뱃속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세포 단위의 침투였다. 뱀파이어의 피가 소화되면서 노화한 세포가 회복작용으로 인해 젊어지기도 했고, 상처 입은 부위는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그것이 완전히 소화된 후, 그 인간은 당분간 피를 제공한 순혈 뱀파이어와 같은 신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 봤자 길면 일주일, 짧으면 그보다 적게 지속되는 효과였다. 그리고 그 피를 소화시키는 과정은 순혈 뱀파이어가 갓 태어났을 때와 같은 양상을 띠었다.

신체와 정신의 균형이 맞지 않아 지극히 연약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혈의 능력을 지닌 그들은 아주 쉽게 상처 입는 주제에 주체할 수 없이 강한 힘을 휘두르는 대단히 귀찮은 존재였다.

갓 태어난 뱀파이어와 순혈의 피를 섭식한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하면, 뱀파이어가 제일 먼저 느끼는 욕구가 흡혈을 향한 것이라면 인간이 느끼는 것은 성욕이라는 것쯤일까.

“아파요?”

깜빡깜빡, 느릿하게 눈꺼풀을 움직이며 그렇게 묻는 케일리에게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아니.”

멱살을 잡혔다고 아플 건 또 어딨겠나. 하지만 그 말에 다행이라는 듯 화사하게 웃는 얼굴은 확실히 기대 이상이었다. 평소에도 웃음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좀 더 감정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애초 단정한 생김새에 이목구비는 나쁘지 않았으니 웃는 얼굴이 예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케일리가 썩 나쁘지 않은 외모를 했다는 것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잠시간 응시한 에드워드가 손을 들었다.

하얀 뺨을 감싸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얼굴을 볼을 쓰다듬은 후 턱을 쥐었다. 고개를 젖히라는 듯 손에 힘을 준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얌전히 고개를 들었다. 밤색 시선이 가만히 에드워드를 올려다보았다.

에드워드가 작게 벌려진 촉촉한 입술에 자신의 것을 마주 대자,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감촉이 전달되었다. 후각을 타고 짙은 케일리의 체향이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크게 입을 열어 눈앞의 상대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욕구가, 식욕과 성욕 중 어느 쪽에 기울여져 있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판단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주 댄 입술 사이에서 작게 숨이 흘렀다.

에드워드가 혀를 내어 노크하듯 케일리의 아랫입술을 핥아올렸다. 아껴둔 별미를 먹어치우는 것이 아까워 고민하는 맹수처럼, 느릿하게 입술 위를 배회하는 에드워드의 선홍빛 눈동자에 아쉬움이 어렸다. 어째서일까. 입을 맞춘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닐 텐데,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마냥 비웃을 수만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워드가 고개를 모로 비틀었고, 두 사람의 입술이 정확히 맞물렸다. 어린아이의 체온처럼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케일리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단단하게 힘을 싣고 들어온 살덩이가 케일리의 치열을 훑었다. 이에는 감각세포가 없을 텐데, 간질간질 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케일리가 바르르, 어깨를 떨었다. 입천장을 가볍게 훑어내린 에드워드의 혀가 움칠, 간간이 반응을 돌리는 케일리의 혀를 잡아챘다. 뜨겁게 얽혀드는 살덩이의 움직임과 입을 다물 수 없도록 턱을 쥔 손아귀의 힘에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맞물린 입술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아, 가는 숨이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속절없이 삼켜졌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와 시선을 마주한 채 에드워드는 츄웁,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아쉬운 입술을 떼어내며 움직일 수 없도록 잡고 있던 턱을 놓아주었다.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로 촉, 초옥, 새가 모이를 쪼듯 가벼운 입맞춤을 내린 에드워드는 여전히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케일리의 손을 떼어내었고, 촉촉이 젖은 입술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아랫입술 밑, 턱, 그리고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목덜미를 핥아올리는 까슬한 감촉에 케일리가 흐으, 밭은 숨소리를 냈다. 쇄골과 목덜미 사이의 움푹 팬 홈에 코를 묻은 채 길게 숨을 들이켠 에드워드가, 그 위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세워 몇 번이나 연약한 살에 붉은 흔적만 남기는 것은, 그가 상당히 인내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거야 원, 차례를 지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키스하고, 애무하고, 삽입하기까지의 과정이 이렇게나 길게 느껴지는 날은 처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하얀 엉덩이를 움켜쥐고 도망칠 수 없도록 속박한 후, 뜨겁고 부드러운 음부에 자신의 것을 밀어 넣고 싶었다.

아마 지금의 케일리라면 다소 상처를 입더라도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몸이 회복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피를 제공한 덕분에 케일리는 부상을 당하기 전보다 훨씬 건강한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그 정도라면, 자신에게는 충분히 받아낼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에드워드는 입안에 번지는 옅은 피맛에 화들짝 놀라 케일리의 목덜미를 뱉어냈다. 하얀 목덜미 위의 붉은 잇자국 사이로 옅게 피가 배어나왔다.

“망할, 자제가 안 되는 게 어느 쪽인지 모르겠군.”

이 상황에서 피까지 더해지는 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정말로 그를 뒤집어 자신의 욕구만 충족시킬지도 모른다는 강한 확신으로, 에드워드는 깊은 한숨과 함께 터질 것처럼 팽팽히 부풀어 오른 제 아랫도리를 무시한 채 케일리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잠깐, 잠깐만 진정을 한 다음……. 그런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을 하지?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이내 코를 찌르는 달큰한 향취에 아스라해졌다. 말없이 자신의 어깨 위에서 간간이 숨을 내쉬거나, 들이마시는 에드워드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케일리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얽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던 케일리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기서 숨 쉬면 간지러워요.”

욕실 안을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웅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에드워드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소리에까지 발정하는군. 대단해.

그렇게 생각한 에드워드가 느릿한 동작으로 시선을 들어 올려다보자, 욕망에 젖어 짙게 가라앉은 밤색 눈동자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간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 말고, 에드워드가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넣고 싶어.”

줄곧 억눌러왔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한 꺼풀 밑에서 날뛰던 욕망을 막아내던 둑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폭력적인 충동에 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핏빛으로 물든 눈을 한 채 멍하니 그 말만 내뱉은 에드워드가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케일리와는 달리 여전히 훈련복을 차려입은 채였던 에드워드가 제 상의를 벗어 욕조 바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이어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어 속옷까지 단숨에 벗어내린 그는 불뚝 선 채 튕겨 나온 자신의 성기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욕조 안에 얌전히 기대 누운 케일리의 나신에다 제 몸을 밀착시켰다.

어린 짐승의 목덜미를 잡아채듯 케일리의 목 뒤로 손을 넣은 에드워드가 그의 귓가에 코를 가져다 댔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맛있는 냄새가 나.”

그래서, 기껏해야 케일리의 몸이 자신의 혈액에 적응하는 시간을 참아내는 게 이렇게나 고역인 것이다.

나머지 한 손을 뻗어 샤워기를 틀자, 머리 위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떨어졌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에드워드의 모양 좋은 손이 그대로 케일리의 납작한 배, 얄팍한 허리, 그리고 탄탄한 엉덩이를 순서대로 더듬어 내려갔다. 곧 꽉 다물린 엉덩이 사이로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 하나가 파고들었다.

“씹…….”

겨우 손가락 한 마디를 밀어 넣었을 뿐인데, 뜨겁고 부드럽게 그것을 죄어 오는 촉촉한 내벽의 감촉이 끝내주게 자극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좁은 구멍에 자신의 성기를 쑤셔 박아, 인정사정없이 허리를 흔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흉포한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폭력적으로마저 느껴지는 욕구 자체가 달콤하기 짝이 없는 독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부숴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치미는 한편, 소중히 대해 더 오랫동안 이 기분을 맛보고 싶다는 쪽도 지지 않았다.

모든 생물에게는 생존본능이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나 날카롭게 실감시켜주는 감각 또한 일종의 생존본능일지 모른다는 기묘한 납득이 찾아왔다.

입을 벌려 말랑한 귓불에 혀를 내어 핥는가 하면, 이를 세워 짓씹고, 귓구멍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에드워드는 노골적인 동작으로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틈 하나 없이 맞닿은 두 사람의 성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 사이에서 아무렇게나 비벼졌다.

케일리의 것 또한 여실히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차라리 손을 뻗어 두 개의 성기를 틀어쥐고 짐승처럼 흔들어대는 것도 끝내주게 유혹적이었지만, 손가락을 있는 대로 빨아들이는 구멍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좁은 케일리의 구멍은 자신의 성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를 겨우 삼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기랄.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며 에드워드가 손가락 하나를 늘렸다. 힘겹게 두 번째 손가락까지 울컥 삼킨 구멍 안의 압박이 한층 강해졌다. 머리가 어떻게 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촉촉하고, 놀라우리만치 부드러운 구멍 안의 감촉에 뇌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살갗이 마찰하는 느릿한 소리와 함께 점막을 조심스럽게 넓히는 에드워드의 귓가와 목덜미 사이로 자그맣게 케일리의 신음이 떨어졌다.

“흐읏…….”

눈살을 찌푸리며 도리질을 치는 케일리는 자신의 인내심을 유지하는 데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잔뜩 젖은 머리카락 위로 코를 묻은 채 에드워드가 숨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케일리의 내벽을 손가락 하나가 더 파고들었다. 이걸로 세 개째. 꽉꽉 죄여오는 내벽의 압박감을 무시한 채 뼈마디가 도드라진 긴 손가락이 서서히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구멍 안쪽을 넓히듯 더듬어 들어가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쑤욱 빼냈다가, 다시 안으로 쑤셔 넣었다. 쿨쩍쿨쩍, 꽉 맞물린 구멍 사이를 드나드는 물기 어린 소리만이 욕실 안을 채워갔다.

에드워드가 인내심 있게 그 행위를 반복하는 사이, 체온보다 약간 높은 습기와 서서히 넓혀간 구멍 사이로 제법 수월하게 손가락이 오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행위에 열중하던 에드워드에게, 케일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짜부라져서, 터질 것 같아요…….”

어쩔 줄 모르고 울상을 짓는 달뜬 얼굴을 한 채 낑낑, 허리를 들썩이는 말에는 에드워드 또한 동의했다. 납작한 케일리의 배와 에드워드의 단단한 복근 사이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두 개의 성기는 당장이라도 욕망을 분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채였다.

“하아……. 너……, 섹스, 해본 적은 있지?”

여기까지 와서 처음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해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지만, 노파심에 물음이 먼저 튀어나갔다. 설마하니 이 나이 먹도록 성경험 하나 없을 리가 없다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케일리가 지금껏 부숴버린 일반상식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쾌감에 절어 눈살을 찌푸린 채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케일리가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뱀파이어랑은, 없어요. 남자랑도…….”

요전 케일리의 질문에 답했던 것처럼, 뱀파이어는 처녀를 가리지 않았다.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걸 데려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색으로 물들이는 게 취미라는 변태 취향이 아닌 한 보통의 뱀파이어는 능숙한 이를 선호했다. 그것이 상호간의 쾌락을 추구하기에 알맞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변태들의 심경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슬그머니 발을 디밀었다.

뒤로 하는 것도, 남자와 하는 것도, 뱀파이어와 하는 것도 처음.

그렇게 대답한 케일리가 물음을 던져놓고 별달리 반응이 없는 에드워드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얀 욕조 위에 들러붙어 물을 머금은 짙은 밀빛 머리칼이 같이 움직였다.

“그런 걸, 흣, 왜…… 물어봐요?”

“그냥. 물어보면 안 되냐?”

“그런 건 아니지만…… 읏!”

우물우물 대답하는 케일리의 구멍을 넓히던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갔다. 동시에 낮게 터져 나온 케일리의 신음이 청각을 자극했다. 고막마저도 성감의 일부가 된 것처럼, 쿵, 쿵, 흥분해 날뛰는 두 사람 분의 맥박 소리까지 예민하게 잡아내 쾌감으로 환원되었다.

처음 에드워드의 혈액을 삼킨 순간으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초 피부 밑을 간질이듯 시작된 감각은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에스컬레이트 되었다. 고조되기만 하는 성감을 억누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음 에드워드에게 약속한 것처럼, 그를 상처 입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만히 몸을 맡기기만 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밀착된 몸을 느릿하게 떼어낸 에드워드가 하얗게 드러난 케일리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허벅지 밑의 연한 살을 파고든 손가락의 끄트머리가 믿을 수 없게 부드러운 피부를 미끄러졌다. 이 방에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살이 움푹 패어 있던 부위가 간데없이, 깨끗한 피부만이 자리한 그 위를 자리한 커다란 손이 케일리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훤히 드러난 고간 사이로 머리칼과 같은 색의 짙은 밀색의 음모를 가르고 선홍빛으로 물든 성기가 꼿꼿이 존재를 주장했다. 파랗게 실핏줄이 도드라진 선단 끄트머리를 가르고, 방울방울 맺혀 있던 투명한 액체가 또르르, 기둥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흣……!”

허리를 뒤튼 케일리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제 성기를 문질렀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에드워드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혼자 욕망을 해소할 때와 같이 제 것을 쥐고 흔들려던 손놀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처럼 쉽사리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갈라진 선단 끄트머리를 흘러내리는 맑은 액체에 손아귀에 쥔 성기가 미끄러졌다. 온몸을 뜨겁게 달구는 지독한 감각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몇 번이나 손에서 미끄러뜨린 제 성기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케일리의 눈가로 쉴 새 없이 맑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에드워드는 말없이 그 모습을 잠시간 감상했다. 아니, 감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핏빛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아 검붉게 변색한 짐승의 눈이 완전히 드러난 성기와 팽팽하게 올려 붙은 불알, 그리고 회음부를 지나 간간이 뻐끔거리며 제 존재를 주장하는 애널을 핥아내리듯 시선으로 범한다는 것이 훨씬 근접한 표현이었다.

가만히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에드워드가 혈관이 불거진 제 성기를 손으로 잡았다. 케일리의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드워드의 악력에 의해 올려진 케일리의 한쪽 다리가 허공을 휘저었다.

그것을 내버려둔 채 에드워드는 빠끔빠끔 개폐를 반복하는 붉게 부풀어 오른 주름진 구멍 앞에 미적지근한 샤워기의 물과 선단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으로 번들거리는 선단을 가져다 댔다.

한 번도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용도로 쓰인 적이 없는 구멍에 닿는 뜨거운 살덩이의 감촉은 생경함에 대한 위화감이나 거부감보다도 먼저, 몸 안을 날뛰는 성감을 해소해줄 유일한 구원으로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예민한 성기 끄트머리에 느껴지는 주름진 입구의 개폐에 에드워드가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시간은 많으니 급할 필요 없이.

그런 것들을 되뇌는 에드워드가 문득 흐려진 시선을 들었다.

“……?”

단단한 팔뚝을 사정없이 파고든 손가락의 감각이, 에드워드의 신경을 거슬렀다. 뭐지? 부옇게 변한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는데, 그것을 움켜쥔 케일리의 손이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얼, 른…… 넣…… 주…….”

제 의사대로 힘 조절조차 되지 않는 육체를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한 듯, 필사적으로 매달린 손가락 끄트머리를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케일리의 것이 아닌, 자신의 피. 팔뚝을 파고든 케일리의 손은 그의 인내심 또한 한계에 다다랐음을 시사했다.

“……시발.”

푸욱!

에드워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욕지거리는 케일리의 고막을 두드리지 못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케일리가 입을 벌린 채 숨을 멈췄다. 입구 근처를 감질나게 문지르던 뜨거운 살덩이가 온몸을 둘로 가르는 충격과 함께 단번에 파고들었다.

“하아, 케일리, 케일리……. 힘을, 빼!”

내장을 꿰뚫을 기세로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살덩이의 압박감에 잠시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동그랗게 치켜뜬 밤색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가 꿈틀, 경련했다.

“흐……, 아, 아아…… 아아아!”

쑤욱, 쥐어짜듯 강하게 죄어드는 뜨거운 내부가 내장째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감각에 케일리가 목을 울리며 줄줄 눈물만 흘렸다.

연약한 내장 안을 쳐올리는 살덩이의 광포한 움직임이 뱃속을 헤집는 것만 같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압박감을 견디자 쑤욱, 이번에는 뿌리 끝까지 처박힌 성기가 느긋하게 빠져나갔다. 내벽을 모조리 끌고 나가는 기묘한 감각과 함께 내장 안의 민감한 살을 노골적으로 문지르며 빠져나가던 그것이 선단 끄트머리의 굴곡만을 남긴 채 잠시간 동작을 멈췄다.

“흐으……?”

후드득,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열기 어린 밤색 홍채 위로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 붉은 색소가 서서히 번져나갔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에드워드는 욕조를 짚고 있던 손을 떼고 무릎을 세운 후 케일리의 목덜미와 귀 사이로 손을 뻗었다.

욕조에 등을 대고 속절없이 흔들리던 상체를 제 쪽으로 끌고 온 커다란 손이 귀 뒤편의 약한 피부를 간질였다. 파르르, 옅은 밀빛 속눈썹이 가련하게 경련했다. 그것을 굶주린 맹수와 같이 허기진 눈으로 잠시간 응시한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였다.

“……!”

자상하게 맞닿은 입술이 크게 벌려지는가 싶더니, 난폭하게 파고 들어온 혀가 입안을 헤집었다. 그와 동시에, 퍽, 퍼억! 사정없이 쳐올리는 뜨거운 살덩이에 속절없이 흔들리며, 케일리는 그저 목 안을 울리며 줄줄 눈물만 흘렸다. 아프고, 뜨겁고, 당장이라도 내장이 찢어질 것처럼 한계를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입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뜨거운 타액마저도 감로수를 마시는 양 달게 느껴지는 것은 미각마저 쾌감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방증일까. 완전히 맞물린 입술 틈으로 흐르는 한 방울마저 아깝게 느껴져, 케일리는 정복자의 그것마냥 자신의 입안을 헤집고 들어온 에드워드의 혀를 빨아 올렸다.

퍽, 철퍽, 철퍽, 물기 어린 살갗 소리와 함께 뭉툭한 살덩이가 쳐올리는 부위를 타고 잔혹하리만치 진득한 쾌감이 척추를 따라 뇌수를 헤집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심지어는 입안과 뱃속, 몸 안의 어느 한구석을 빼놓지 않고 성기가 된 것처럼 닿는 손길과 피부의 감촉, 뜨거운 공기마저도 지독한 쾌락 이외의 무엇도 되지 못했다.

단순히 입을 맞춘다는 행위보다는 본능에 기인한 욕망의 분출과도 같던 잡아먹힐 듯한 키스가 아쉬운 입맞춤과 함께 떨어져나갔다.

“케……일리……!”

퍽! 구멍 안을 깊게 찔러 올린 뜨거운 살덩이가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철퍽, 엉덩이에 짓눌린 살덩이는 마찰로 인해 뜨겁게 달아오른 고환의 감촉이었다. 내장의 가장 안쪽까지 치고 들어온 성기가 잠시간 머물렀고, 이번에는 은근한 동작으로 뜨겁게 죄여오는 쫀득한 내벽 안쪽을 문질렀다. 굴곡진 성기의 융기가 선연히 전달되었다.

내벽 안을 드나들던 폭력적인 쾌감과는 또 다른, 내장 안쪽으로부터 불을 붙인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두터운 살덩이가 비벼지는 선뜻한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하, 으, 앗……에, 드워, ……읏!”

고조되는 성감에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성기 끄트머리에서 줄줄,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가늘게 뜬 눈은 더 이상 초점이 없었다. 그저 이 지독한 쾌감을 끝내고 싶어 스스로의 성기를 향해 손을 뻗은 케일리는 자신의 것을 낚아채는 뜨거운 체온에 선수를 빼앗겼다.

“하앗, 앗, 아아!”

난폭한 손길이 성기를 쥐어짜듯 훑어내렸고, 철퍽철퍽, 내벽을 치고 올라오는 폭력적인 감각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척추를 강타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간헐적인 신음마저 멈춘 케일리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퍼억! 에드워드의 것이 케일리의 내벽을 강하게 찔러 올렸다.

에드워드의 손 안에서 그의 성기가 움칠 경련했다. 덜덜, 에드워드의 팔뚝을 쥔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과 동시에 케일리가 사정했다. 머릿속을 완전히 뒤흔드는 격렬한 해방감과 함께, 뜨겁게 달아오른 케일리의 내벽이 에드워드의 성기에 들러붙어 일순 강하게 조여들었다.

“핫……, 큿!”

울컥, 깊게 처박힌 살덩이의 꽉 맞물린 틈 사이로 진한 점액질의 액체가 비져나왔다. 자신의 것을 뜨겁게 감싸 조이는 내벽 안에 성기를 묻은 채, 에드워드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여자의 몸에 몸을 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쾌감에 케일리는 간간이 숨을 헐떡이며 눈물만 흘렸다.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였다.

‘이건, 생각했던 거랑 상당히 다른…….’

뜨끈하게 전달되는 케일리의 체온을 느끼며, 이마를 마주 댄 에드워드의 어깨가 거칠어진 숨에 맞춰 오르내렸다. 예리하게 벼려진 맹수의 것처럼 사나운 기색을 띤 시선이, 케일리의 붉게 물든 눈동자를 온전히 담았다.

“하, 하하. 시발……, 미치겠네.”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얻는다고 했던가.

문득 그 짧은 격언이 뇌리를 스쳤다.

◇ ◆ ◇

뚝뚝, 제대로 닦지 않아 지나가는 길을 온통 물바다로 만든 케일리가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걱정했던 것만큼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훈련에서 깎인 체력부터 시작해, 에드워드와의 육체노동을 끝낸 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훈련에 나가 혹사당한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부서진 팔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총상을 비롯한 자잘한 상처까지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심지어 욕실을 나오며 지나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10년가량 젊어 보였다. 이 나이에서 10년을 거스르면 젊음보다는 어리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이였다.

아무래도 자신은 사업 아이템을 잘못 골랐던 것 같다. 뼈가 바스러지고 총에 패인 상처마저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치료효과를 가진 기적의 약을 팔았더라면 오일 머니가 다 뭔가, 블러드 머니로 세계를 정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치료효과가 아니더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젊어지는 효과는 각국의 성형외과에서 양팔을 걷어붙이고 억만금을 내놓아서라도 사들이려 할 것이었다.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가 용이라는 말을 듣고도 별달리 놀라지 않았던 케일리가 스스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뱀파이어의 혈액이 주는 엄청난 안티에이징에 감탄하는 사이, 뒤이어 에드워드가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분명 수 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욕실이었으나 지금은 십수 년을 방치한 폐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그 장소에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 타월 하나를 겨우 건져 나온 에드워드를 올려다보며 케일리가 말했다.

“혹시 저는 동성애자였던 걸까요?”

“네 성지향을 왜 나한테 물어. 내가 맞다고 하면 오늘부터 그런 걸로 치고 살 거냐?”

“지금까지랑 달라질 것도 없기는 하죠. 아, 그러고 보면 굳이 성별로 사람을 가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러면 양성애자인가? 그런데…… 뱀파이어는 성별로 구분하면 되는 거 맞나요? 수간이나 뭐 그런 특수 성벽은 아니죠?”

남들과는 걱정의 포인트가 살짝 엇나간 케일리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잠시간 타월을 든 채 멈춰 섰다. 손수 씻기고 먼저 내보내놨더니 욕실 문짝까지 다 부숴놨다. 침대에 걸터앉은 케일리에게로 다가간 에드워드가 타월을 들어 푹 젖은 짙은 밀빛의 머리통을 덮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음식에 대고 섹스하는 이상한 꼴이 되긴 하지. 그렇다고 동족만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니 별로 신경 쓴 적은 없지만. 근데 우린 동물로 변할 수도 있으니 그걸 두고 수간이라고 하지는 않기는 해.”

뱀파이어간의 성관계만 따져봐도 그것은 애당초 종족 번식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보통의 뱀파이어는 애초에 번식능력이 없으며, 권속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순혈 뱀파이어는 같은 순혈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것은 교미를 통한 번식이 아니라 물리적인, 말 그대로 아이를 만드는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 섹스라는 것은 오로지 쾌락을 위한 유희였으며, 성욕 해소의 도구일 뿐이었다. 인간의 기준에서 생각했을 때 그 상대의 성별이나 종의 분류가 고민거리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런 감성을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확실히 케일리가 일반적인 이성애자 인간으로 살아왔다면 동성의 뱀파이어와 섹스했다는 것이 성벽과 성지향의 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와 비교하면 대단히 상식적인 고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에드워드가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데, 타월에 감싸인 머리통에서 웅얼웅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랑 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어요. 아니, 사실 섹스가 이렇게 좋았던 적이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지만 제가 동성애자였던 걸지도 몰라요.

게다가 대학 동기의 말로는 동성 간의 관계에서는 받아들이는 쪽은 상당히 몸에 부담이 된다고 했는데 별로 불편한 것도 없는 데다, 오히려 몸이 가뿐해요.”

적당히 물기를 말린 후 젖은 타월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에드워드는 대단히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케일리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하늘이 내린 게이라 그런 게 아니라, 하기 전에 마신 내 귀한 피 덕분이다, 멍청아. 아까 말한 두 번째 효과가 일종의 흥분제 역할을 하고, 회복까지 시켜주는 거다.”

그 말에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의 눈동자가 완전히 선홍색으로 변색된 것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아주 조금 후회했다. 데리고 다니기 귀찮아 당장 상처부터 해결하자는 요량이었으나 예상외로 반작용이 컸다. 처참한 꼴의 망가진 욕실을 한번,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케일리를 한번 쳐다본 에드워드가 고민에 빠졌다.

한바탕 정사가 끝난 후 일단 몸을 씻으려 일어난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현재 자신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도 가늠하지 못하는 갓난 순혈 뱀파이어와 같은 상태라는 것을 잊고 샤워기를 건넸다. 그리고 케일리의 손에 넘어간 샤워기의 대가리가 깔끔하게 으스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두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잠시간 침묵했다.

망가진 샤워기를 욕조 바깥으로 던져놓고 멀쩡한 수도를 이용해 물을 받아 몸을 씻었다. 그 와중에도 욕조와 세면대, 그리고 타월이 들어 있는 수납장까지 깨끗하게 부순 케일리의 괴력은 에드워드의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부작용이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도 요원한데, 인간에게 아까운 자신의 피를 건네준 적이 없었던 에드워드의 계산착오였다.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마신 인간은 아주 귀찮았다. 제어할 수 없는 괴력을 자각 없이 휘두르는 건 세간살림의 안전에도 위협이었지만, 무엇보다 케일리 자신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이야 자신과 거의 동등한 회복력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며칠이 흐르면 힘과 회복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힘보다는 회복이 먼저 사라지기 때문에 자칫하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지금만 해도 욕실을 다 부술 작정이냐며 먼저 내보낸 케일리에 의해 욕실 문이 뜯어져 벽에 기대 세운 상태였다.

제 손으로 머리를 말리라고 타월을 건네면 제 머리를 으깨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팔다리 멀쩡하게 회복된 녀석의 머리를 손수 말려줄 에드워드가 아니었다.

심지어 제 입으로 어디 하나 불편한 곳 없이 멀쩡한 걸 보니 자신은 게이였던 게 분명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놈이었다. 확실히 컨디션이 좋은 모양으로, 발갛게 열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평소와 비교해 무방비하게 풀려 있었다.

그 평화롭기 그지없는 표정을 내려다보며 짜증보다 먼저 그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은 확실히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피를 먹인 부작용인 것 같다.

어째서인지 대단히 관대한 기분으로 케일리의 시중을 들며 에드워드는 자신이 이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케일리가 현재 제 손으로 무언가를 해내기에는 매우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탓이라 되뇌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지금 뱀파이어와 비슷한 거라고 했죠? 뱀파이어들은 늘 이런 기분으로 사나요?”

눈을 가늘게 접고 기분 좋게 웃은 케일리가 에드워드에게 건네받은 새 훈련복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꿰입으려는 순간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진 천 조각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말없이 숙소에 구비된 클로젯을 향해 걸어갔다.

새 훈련복을 꺼낸 에드워드는 손을 내미는 케일리를 무시한 채 어린아이의 옷을 입혀주듯 그의 머리 위로 상의를 꿰어 넣었다. 인간과 비교하면 넘칠 만큼 가진 게 시간이었지만, 두 번, 세 번 같은 짓을 반복하며 옷 찢어먹는 꼴을 구경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는 그 상태일 테니까 넌 되도록이면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대답했다.

“저, 지금이라면 뭘 해도 귀찮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인데요. 몇 년간 미뤄온 동창회에도 기쁜 마음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뱀파이어들은 늘 이렇게 의욕적으로 사나 봐요? 의욕적이라는 게 이런 기분을 말하는 거 맞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것 같아요. 정말 좋네요.”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의 안색에서 지금까지의 묘한 나른함이 사라져 있어 에드워드는 자신도 몰랐던 피의 효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순혈의 피에 대단히 놀라운 몇 가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의욕 없는 놈의 의욕까지 만드는 게 가능한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욕이 가득하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모습을 내려다본 에드워드는 이어진 케일리의 감탄사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냥 손만 가져다 대도 문이 열리다니, 이렇게 효율적일 수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활짝 펼친 제 손을 이모저모 유심히 살피는 꼴이라니.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무수한 오류들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알기 쉬운 것을 짚기 위해 에드워드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의욕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괴력……. 아니, 됐다. 어쨌든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놈의 동창회인지 뭔지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일주일은 지나서 가라. 네가 지금까지 동창이라는 녀석들을 죄다 몰살시키고 싶었고 그걸 이루기 위해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과 의욕적임이라는 근본부터 다른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인간에게 그게 어떻게 다른지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그저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대체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라면 태어나서 한 번도 의욕적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걸까. 약간의 의문이 고개를 들었지만 남의 가정환경을 먼저 건드리기는 자신의 가정환경에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탓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모든 사람이 매사에 의욕적이었다면 지금쯤 지구는 칠십억 쪽 정도로 쪼개졌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따지면 소수의 의욕 있는 놈들이 정상 자리에 모여서 멍멍 왈왈 열불 나게 짖어대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수십억의 의욕 없는 인간들을 제쳐두고 몸소 선봉에 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수고를 도맡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이 도맡아 하는 짓거리가 발전에 한정되지는 않는다는 사소한 문제점이 있기야 했지만서도.

“아, 그렇구나. 지금 만나서 악수하면 큰일이겠네요. 동창들 손은 문손잡이보다 약할 테니까 말이에요.”

분명 맞는 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가능하다면 저놈과 동창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물씬 들게 만드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케일리에게 옷을 꼼꼼히 챙겨 입힌 에드워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넌 실험대상이 돼서 NASA에 끌려가겠지.”

그러니 일주일은 꼼짝 말고 내 옆에 붙어 있기나 하라며 덧붙이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인가 싶어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가 붉게 변색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반박했다.

“제 동창들은 그런 짓을 할 만큼 미국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아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을 보낼 수 있는 동창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 믿음이 우정을 기반으로 한 게 아니라는 걸 제외하고 보면, 그랬다.

“그러니 걔들이 절 신고한다면 NASA가 아니라 ESA(유럽 우주국)이 아닐까요. 근데 생각해보면 EU(유럽 연합)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다 보니…… ATI(영국 우주 항공기술 연구소)가 정식 발족할 때까지 기다려줄 거예요. 애국심은 없지만 배타심 하나만큼은 대단한 녀석들이라서요.”

“그거 진짜 동창모임은 맞는 거냐?”

“네, 다 같은 학교 출신이에요. 전공은 제각각이었으니 정확히 따지면 동창모임이라기보다는 사교클럽 같은 거였지만요. 사실 저도 제가 왜 뽑혔는지는 몰라요. 반 정도는 어릴 적부터 집안끼리 교류가 있던 사이다 보니…….”

잠시간 추억에 잠겼던 케일리는 곧 그들 대부분이 사교클럽에 들어가기 전부터 면식이 있던 사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집안 사이의 교류를 생각하면 같은 학교에 들어가기까지 했는데 자신을 빼놓는 건 모양새가 별로였을 테다.

수년이 흐른 지금에야 별달리 사교적이지 않았던 자신이 비밀 사교클럽에 초대되었던 이유를 납득한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대체 거긴 뭘 하는 학교기에 꼭 모아도 그런 것들만 모아놓은 거냐. 친구를 사귀어도 꼭 정신 나간 것 같은 놈들만 골라서…… 하기야, 너라면 제대로 된 놈을 찾아다 먼저 친구하자고 다가갈 것 같지는 않다마는.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다가온 것들이랑 어울렸겠지. 거절하는 것도 귀찮았을 테니.”

어느새 자신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감탄한 것도 잠시, 힐끗 시계를 올려다본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건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 위에 제 손을 올려놓은 케일리를 에드워드가 당겨 일으켰다.

바지만 꿰어 입고 있던 에드워드는 그제야 침대 위에 던져놓은 타월을 들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반신을 아무렇게나 닦아냈고, 제 몫으로 가지고 온 상의를 걸쳤다.

“너 몸 상태 문제없댔지? 하기야 아까 문까지 부수면서 걸어다니는 걸 보니 문제없어 보이긴 하더라.”

내 피까지 마셔놓고 비실거렸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긴 해. 확실히 상당히 과격했던 욕실에서의 행위를 떠올리면 지나치게 팔팔해 보이기는 했기 때문에, 얌전히 침대 맡에 걸터앉은 케일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말했다.

이른 저녁을 지난 시간이었으니 움직이기에 너무 늦은 것도 아니기는 했지만, 갑자기 옷을 챙겨 입고 문을 향하는 것에 케일리가 뒤를 따르며 물었다.

“네, 몸은 괜찮은데…… 어디에 가는 건가요?”

“계약서 쓰러.”

“계약서……?”

별달리 가져온 짐도 없었던 터라 케일리의 옷을 벗기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글록을 주워 든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훈련 뺐다고 했잖아, 너. 합격했으니 정식계약서에 사인하라고 사무실로 데리고 오라더라. 일주일은 몸 사려야 할 테니 지금 들르는 게 나아. 어차피 슬슬 내 쪽으로 임무가 떨어질 때도 됐고, 딱 일주일 후쯤이면 타이밍도 괜찮겠군.

게다가 지금 상태로 숙소에 가면 세간살림만 초토화시킬 테니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어. 호텔은 더 위험할 테니 인간들 눈을 피해서 잠깐 몸을 숨길 만한 적당한 곳이…….”

손만 뻗어도 인간 흉기가 되는 놈을 일주일이나 챙겨야 한다는 것이 다소 막막하기는 했지만, 일단 위험한 짓을 저지르고 다니지 않도록 제대로 감시하기만 하면 되겠지. 안일하게 생각하며 잠깐 동안 머무를 장소를 고르던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놀랍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저 합격했어요?”

“애초에 널 훈련에 처박은 이유가 날 설득시키려는 거였는데, 내가 데리고 다닌다고 하면 합격인 거지.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그렇군요, 절 데리고 다니기로 결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가늘게 접고 정말로 고맙다는 듯 미소 짓는 케일리에 에드워드의 입매가 실룩 비틀렸다.

저런 식으로 순수한 감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에드워드는 감사인사를 받을 만한 일보다 그 반대의 경우를 자주 벌이는 편이었고, 가뭄에 콩 나듯 좋은 일을 한 후에도 입으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뭐라는 거야. 누가 너 좋아서 그런 줄 알아? 네가 마음에 들어서 합격시킨 게 아니라, 이빨 요정 그 새끼가 데리고 올 다음 머저리를 상대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니 오해 말라고.”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내용과는 달리, 글록을 주워 든 에드워드는 피식 웃으며 덜 마른 케일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피의 효과로 잠깐 어려진 상태이기는 했지만, 본래의 외모를 따지면 겉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상대에게 머리가 쓰다듬어진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눈을 깜빡인 케일리는 곧 그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조상의 조상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생명체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유야 어땠든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게 해주셔서 감사한걸요. 저희 부모님이 그런 데 대단히 민감하셔서……. 휴, 이제야 안심하고 집에 들어갈 수 있겠네요.”

조상님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제법 긴 시간 집을 떠나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한 달을 채우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길었다.

가족들은 잘 지낼까. 매일 아침저녁을 함께 들던 얼굴을 떠올리다 말고 케일리는 자신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일상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으리라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그 집에서 바빠 얼굴을 보기도 힘든 것이 다른 가족들이었지, 자신은 별달리 하는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봤을 때도 가족 이야기를 했었지. 멀쩡한 집이랑 가족을 놔두고 대체 왜 길바닥을 굴러다닌 거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어요. 근데 취직하면 해결되는 일이라 지금은 문제없어요. 계약서에 사인하면 잠깐 집에 들를 수 있을까요?”

“가족을 몰살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일주일 뒤에 가지 그래?”

실수로 끌어안기라도 하면 엄청난 꼴을 보게 될 텐데?

친절하게 조언까지 덧붙이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아, 그랬죠 참.” 하며 납득했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직장을 얻었으며 심지어 가업을 이은 공무원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은 일주일 뒤에나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대학시절 아버지가 은근히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며 이런저런 행사에 자신을 데리고 다녔던 것이 떠올랐다. 공무원이 됐다고 하면 기뻐하시지 않을까?

평범한 집의 평범한 아들 정도로는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며 자란 케일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워드와 나란히 문을 향해 나섰고.

콰직, 쿠웅!

“아.”

케일리가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고 힘을 준 순간, 단단히 잠겨 있던 숙소의 출입문이 거대한 소리와 함께 복도로 무너졌다.

잠시간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에드워드는 복도를 장식한 문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밟고 나가다 케일리를 향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니까.”

◇ ◆ ◇

그러고 보면 얼마 전 비슷한 일을 겪은 것 같다. 4주 뒤에 만나자던 페어리의 얼굴을 반의 반의 반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오늘 다시 마주한 케일리는 생각했다.

역시 세상일이라는 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아.

바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사장실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서류에 사인을 하고 전화를 받는 것이 고작인 대단히 편안한 생을 즐기고 있었다-심지어 그 업무마저 반 이상을 비서 레이튼이 처리해주었다.-. 그래 봤자 한 달 전 일이건만, 아주 먼 옛날의 추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지금까지의 삶을 살아오며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길만을 골라서 걸어가던 자신의 인생에 용과 요정, 뱀파이어와 같은 것들이 끼어들 것을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케일리는 지금의 상황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자리에는 첫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 같은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맞은편의 페어리, 옆자리의 에드워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페어리와 에드워드의 태도가 정반대라는 것 정도일까.

어째서인지 슬금슬금 자신을 피하며 손끝 하나 닿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거리를 두는 페어리에게 건네받은 계약서를 제일 뒷장까지 단번에 넘긴 케일리가 펜을 들었다.

“이런.”

두 동강도 아니고 산산조각이 난 펜을 바라보며 페어리가 잠시간 침묵했다. 다행스럽게도 페어리의 사무실에는 아직 인간들의 물건에 익숙하지 않은 이종을 위한 특별 제작품이 많았다.

어쩌다 저런 괴력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주문 제작한 철제 펜을 건네며 페어리는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에드워드와 케일리의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의 내막을 알고 싶지 않다는 필사적인 본능이었다.

테이블 위에 내밀어진 정식 근로계약서에 유려한 필체로 사인을 휘갈기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은 끝났다는 듯 고개를 든 케일리가 맞은편에 앉은 페어리를 향해 제법 두께가 되는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그 흔한 연봉협상과 근로조건에 대한 조정 하나 없이, 한 인간과 한 뱀파이어가 사무실에 들어온 지 채 오 분이 지나지 않아 끝난 계약서를 바라보는 페어리의 표정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묘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케일리. 이걸로 MI6-B의 정식 필드요원 자격을 얻게 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몸에 배인 예의로 손을 내민 케일리는 자신의 손을 혐오스러운 생물이라도 보는 듯 쳐다보는 페어리에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다가, 칫, 혀를 차며 아쉬워하는 에드워드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하여튼 눈치 하고는.”

등 뒤로 손을 감춘 숨긴 페어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하자, 냉큼 계약서부터 갈무리한 그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반박했다.

“눈치가 아니라, 벌써 소문 다 퍼졌습니다. 훈련소의 문이란 문을 전부 초토화시켰다는 인간과 그걸 보며 즐겼다는 배배 꼬인 뱀파이어에 대한 소문에 발만 달리겠습니까? 날개까지 달아서 훨훨 다 퍼졌다고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에드워드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은 케일리를 힐끗 쳐다본 페어리의 구겨진 인상의 골이 한층 깊어졌다. 엿이나 한번 먹어보라고 에드워드의 요상한 조건에 맞는 인간을 냉큼 낚아 왔건만, 이래서야 오히려 저 망할 뱀파이어 좋을 일만 해준 꼴이 되었다.

물론 구인마법 조건에 필드요원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은 넘기도록 제한을 건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게 구울을 맨몸으로 상대하는 괴물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데리고 다니면서 쓸 만하다는 기준이 지나치게 높았을 뿐.

그 짧은 시간 동안 경악스러운 기록 몇 가지를 세운 인간, 케일리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페어리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에드워드에게 파트너를 붙이겠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쪽이 손해만 본 것도 아니기야 했다.

물론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생각 외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는 아주 배알이 틀리는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서도.-그 마음에 듦을 표현하는 방식이 훈련원 문을 죄다 부수는 걸 즐겁게 관람하는 것이라는 부분이 상당히 꺼림칙했지만 어쨌든.-

“계약기간은 계약서 표기대로 3년이며, 갱신기간은 3년째 마지막 달의 30일입니다. 계약의 중도파기는 일부 예외조항에 해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하며, 이 계약은 마법계약서에 의해 성립되었기 때문에 소송을 거셔도 파기할 수 없습니다.”

4주간의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도 비슷한 취지의 설명을 들은 것 같았다. 어쨌든 다른 직장을 찾을 생각이 없어 가능한 한 오랫동안 공무원 철밥통에 기대고 싶은 케일리는 당연히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사항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실 때는 인사 채용과가 아니라 인사 총무과를 찾아주세요. 내부고발이나 사내분쟁 관련 업무도 그쪽에서 접수받고 있으니 이쪽 사무실에는 두 번 다시 얼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의 할 일은 다 끝났다는 양 말을 끝마친 페어리가 출구를 가리켰다. 안 나가고 뭐 합니까? 흡사 에드워드와 악의 무리를 취급하듯 한 세트로 묶인 케일리는 이게 바로 파트너십으로 묶인다는 것이로군, 가볍게 납득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일리를 따라 소파에서 일어난 에드워드가 문을 향해 걸어 나가다 말고 문득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너야말로 일 좀 제대로 하는 게 어때?”

“그건 또 무슨 트집입니까?”

“그 병신 같은 신입들 말이야. 인간 놈들은 그렇다 치고, 털도 덜 난 새끼 라이칸을 잔뜩 데려다가 개 시장이라도 열 속셈인가? 걔들 성인식은 치른 거 맞지? 아직 개 냄새도 제대로 못 숨기더만. 저런 것들한테 임무를 맡기면 일이 늘어나지 줄어들겠냐?”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라며 입매를 비트는 에드워드에 페어리가 울컥 입술만 뻐끔거렸다. 말이야 말이지, 에드워드의 평가에는 크게 틀린 부분이 없었던 것이다. 애당초 갓 성인식을 치른 라이칸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쪽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

“줄곧 우리 기관에 협력하던 라이칸의 족장에게 청탁을 어떻게 거절합니까. 하필이면 베이비붐 세대라 개체수도 많은데,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놓고 인간 세상을 가르칠 마땅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자칫 정체를 드러내기라도 하면 퍼지는 속도를 감당하기가 힘드니 이쪽에서도 모른 체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 세상을 잘 모르는 라이칸들이 섞여 들어가서 사고라도 치면 그 수습을 누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신체능력이 뛰어난 라이칸들이니 만큼 필드요원으로 뛰기에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임무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지 애매한 신입들을 떠올리며 페어리가 말했다. 망할 놈의 베이비 붐. 라이칸 부족에 베이비붐만 없었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량의 라이칸을 떠맡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짜증 섞인 페어리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걔들 뒤를 닦는 게 난 아니겠지. 난 필드요원이니까.”

분쟁조정은 행정요원이 해결하기 때문에 필드요원이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에드워드의 자신만만한 비웃음은 걔들이 잘못하면 너만 엿을 먹는다는 명확한 사실관계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페어리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볼일 다 보셨으면 꺼져주시죠.”

에드워드뿐만 아니라 케일리에게도 공평히 사나운 시선을 보낸 페어리는 어서 나가기나 하라는 듯 책상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전투적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에드워드가 거나하게 엿이나 먹기를 바랐던 것이 완전히 엇나간 서글픈 현실을 저주하며, 근로기준법을 한참이나 위반한 철야업무를 준비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수고가 많으시네요, 페어리.”

그나마 상식과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케일리의 인사에 페어리는 다소 속이 가라앉아 잘 가보라며 인사를 건네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끼이익, 쾅!

“이런.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꾸 까먹네요.”

미안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정중한 사과를 건네는 케일리와 보란 듯이 배를 잡고 웃으며 손잡이가 완전히 박살난 채 바닥에 무너져 내린 문을 밟고 지나가는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페어리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 저, 저 망할 모기새끼! 알면서 내버려둔 거지! 네놈의 망할 파트너가 문을 날려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 내버려둔 게 분명해!

이미 두 사람의 뒷모습은 간데없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는 가엾은 부하직원들만이 남은 그 공간에서 페어리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기어코 폭발했다.

“으아아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