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4. Drink him! (2)
“좋은 아침이에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잠기운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에드워드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좋은 아침.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본 사람한테 하는 무난한 인사 중 하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 인사를 건넨 사람과 상황에는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먼저 케일리에게 양심이 있다면 자신을 향해 좋은 아침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어젯밤, 페어리의 사무실 문을 부수고 나와 일단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으로 갈라졌다.
뱀파이어의 생체리듬은 인간처럼 수면과 활동시간을 철저히 나누어 챙기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지만, 에드워드는 지난 100여 년을 흡혈을 하지 않는 대신 육체를 쉬는 것으로 연명해왔던 터라 습관이 되었다.
방으로 돌아와 잠기운은커녕 오히려 팔팔하기만 한 몸 상태에 당황했으나 어차피 인간인 케일리는 잠을 자야 했다. 아침까지 시간도 넉넉한 김에, 때마침 내려온 다음 임무에 대한 자료를 눈으로 훑어내리던 참이었다.
맞은편 방에서 들린 우당탕, 쿵! 소란스러운 소리에 에드워드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방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떨어져나간 문짝 너머에서 내려앉은 침대에 파묻힌 케일리의 처참한 꼴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말없이 그를 들어 올려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하룻밤을 보낸 후 적당한 장소를 물색할 요량이었으나, 그 짧은 하룻밤을 채 버티지 못할 줄이야. 손만 대면 모조리 산산조각을 내놓는 케일리를 향해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하고, 절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 다시 한 번 엄포를 놓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는 얌전히 에드워드의 침대로 옮겨져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 잠에 빠졌다. 잠버릇이 고약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룻밤 내내 케일리가 자신의 침대마저 무너뜨리지는 않을까 감시를 하다가, 다음 임무고 뭐고 신경이 쓰여 눈에 들어오지 않는 통에 결국에는 그의 옆에 누워 선잠을 청한 에드워드였다.
좋은 아침.
그것 참, 빌어먹게도 좋은 아침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나 웃기려고 한 소리냐?”
“아니요, 오늘 아침 날씨가 참 좋다는 소린데요. 그 말이 웃길 수도 있나요?”
오늘도 변함없이 진심인 모양이다.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에드워드가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깜빡이는 케일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얌전히 자신의 손을 올리는 케일리를 잡아끌자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가벼운 몸이 딸려 올라왔다.
시선의 조금 밑에 있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위로 손을 옮긴 에드워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특정 조직을 떠올릴 건덕지도 없을 만큼 밋밋한 -B 지구의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기분 나쁜 옷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일단 그 꼴 보기 싫은 옷부터 좀 어떻게 해야겠군.”
혼잣말처럼 튀어나온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케일리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집을 나올 때 입고 있던 옷은 페어리의 사무실에 구비된 샤워부스에 벗어둔 채였다. 다음에 만나면 돌려달라고 해야 하나, 잠시간 고민한 그는 별달리 애착이 있는 옷도 아니라 돌려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살아오며 옷에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기도 했다. 케일리에게 있어서 옷이란 시간과 장소와 용무에 따라 적당히 골라 입고 나가는 것이었다. 패션 철학이니 취향이랄 게 없는 그는 지금 입고 있는 훈련복에 별달리 불만이 없었다.
“옷이 왜요? 이거 보기보다 편한데요.”
입고 다니기에 불편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며, 미관상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파자마와 외출복이 같다는 건 다소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잔소리를 늘어놓을 레이튼이 없었다.
꼭 감옥에서 방금 탈출한 죄수마냥 폼이 맞지 않는 훈련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케일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윽 훑어내린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미의식에 어긋나거든. 그 꼴을 봐야 하는 것도 나고, 그 꼴을 한 널 끼고 다녀야 하는 것도 난데 네가 편하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야.”
가차 없는 평가에 케일리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저 아직 월급 안 받아서 돈 없어요.”
“사줄 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주는 대로 입어. 너 이빨이 주워 오기 전까지 홈리스였다며. 어차피 가진 옷도 없을 거 아니야? 그리고 아침도 먹어야 하니까 어차피 밖에 나가야 해.”
잠귀는 밝은 편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예의 검은 라이딩 재킷에 블랙진을 차려입은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케일리는 자신의 꼴이 그리 보기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넘긴 금발과 다소 창백한 피부색으로 묻어나는 나른한 분위기는 십 대 소녀들의 우상으로 숭배되었던 동명의 뱀파이어를 가볍게 뛰어넘는 훌륭한 것이었으며, 당장 패션화보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에드워드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그 꼴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생겨먹은 게 달라지지는 않을 텐데…….
매우 합리적인 의문을 떠올린 케일리는 성큼 방을 나서는 에드워드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식사는 집요정 분이 만들어주시는 거 아니었나요?”
짧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 거실에 다다른 케일리가 이어진 주방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고, 에드워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걔 아까 집 나갔어.”
“집요정도 가출을 해요?”
“아니, 오늘 집에 갈 거라고 하니까 살림살이 챙겨서 먼저 달려 나가던데. 걔는 원래 나랑 있는 거 싫어했어. 억지로 끌려나온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집……? 여기가 집인데요.”
영문 모를 에드워드의 설명에 케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부모의 집.”
아하, 그 집.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가 자신을 집요정에게 떠넘기려고 했을 때 그런 대화가 오간 걸 들은 기억이 있다. 비몽사몽한 와중이었지만 분명 그의 집요정은 사실 그의 집요정이 아니며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는 내용이었지. 그 주인은 에드워드의 혈육이라고 했으니 집요정이 달려 나갔다는 장소가 에드워드의 부모의 집이라는 맥락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집에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다 큰 성인이 일, 이주 집을 떠나 있는 정도로 별달리 문제야 생기겠냐마는 가문의 사정상 유난히 정치적 위협이 많아 가족들의 안전에 다소 예민하게 구는 사람들 몇을 떠올리며 생각을 바꿨다.
역시 연락을 넣어두는 편이 좋겠지.
“그럼 집에 잘 다녀오세요. 저, 그런데 가기 전에 휴대전화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공중전화까지 나갔다가 공공기물을 파손하는 건 내키지 않아서…….
전화 한 통 끝내는 동안만 잡고 있어주시면 더 감사할 것 같아요. 아니면 스피커폰으로 걸어도 괜찮고요.”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손을 내미는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누가 누구 때문에 그 빌어먹을 집에 돌아가게 생겼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말똥말똥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빨리 휴대전화 안 내놓고 뭘 하냐는 듯 말이 없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너도 가는 거거든?”
“거기를 제가 왜요?”
“그 집은 튼튼하니까.”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양 미간을 찌푸린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순혈 뱀파이어들은 생후 수십 년 정도를 영아기로 규정해. 그동안은 거의 아무것도 조절할 수 없는, 말하자면 짐승 새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 짐승 새끼에 비해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집을 부수다 못해 무너뜨리고도 남으니 웬만해서는 안 부서지는 집을 만들어야 하지.”
아무래도 에드워드가 말하는 부모의 집이라는 것이 매우 튼튼한 집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크나큰 헛점이 있었다. 뱀파이어, 아마도 에드워드 본인이 영아기를 보냈다는 그 집에 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지만 저는 영아가 아닌데요. 대체로 사이즈가.”
아기 침대에 누운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잠시간 침묵했다. 물론 영아기에 빗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애쉬포드 가의 저택이 아주 튼튼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 순혈의 힘을 가지게 된 케일리 한두 명이 맨발로 뛰어다녀도 문제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 사실을 정정하는 것도 귀찮아 멋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한 에드워드가 거실의 벽면 하나를 완전히 가린 암막 커튼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보다, 에드워드는 집에 가기 싫은 거 아니었어요?”
“뭐, 썩 가고 싶은 곳이 아닌 건 확실하지. 가기 싫은 이유가 있었으니까.”
“……? 지금은 없나 봐요?”
“뭐…… 반쯤은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널 데리고 가서 깔끔하게 나머지 반도 해결하면 더 좋고.”
그 집에 돌아가기 싫었던 대부분의 이유가 자신의 식습관에 있었기 때문에 케일리를 데리고 가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이들이 몇 있다. 그중에서도 건강을 들먹이며 자신의 피라도 마시라며 칼을 들고 쫓아오던 부친의 징글징글한 몰골을 떠올리며 에드워드가 가볍게 인상을 썼다.
차라리 밀실에 갇혀 B급 호러영화 감상 릴레이를 하고 말지, 그 지독한 영감탱이는 심지어 꼬리를 내빼고 도망을 쳐도 끈질기기가 여간 독한 게 아니라 질이 나쁘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꼼짝없이 잡혀 그 지독한 피를 마셔야만 했다.
집을 나가면서도 따라오기라도 해봐라,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라는 극단적인 선언까지 해가며 겨우 해낸 독립이었다. 찰거머리가 따로 없는 극성 부모로는 영국이 다 뭔가, 전 세계를 뒤집어도 상위권에 랭크 될 위엄 있는 뱀파이어들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B 지구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은근슬쩍 가문의 힘을 빌려 손을 뻗어오는 데다, 애쉬포드 가의 집요정 중 가장 강력한 마법을 가진 로라까지 딸려 보냈으니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어찌됐건 그 찰거머리들과 같은 집에 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에드워드에게는 장족의 발전으로 느껴지기야 했다.
“일단 밖에 나가서 입을 만한 옷부터 몇 벌 사자.”
케일리가 입고 있는 훈련복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으로-옷 자체보다는 -B 지구의 로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옷은 어디서 사나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옷을 사기 위해 밖에 나간 적이 거의 없다. 옷을 밖에 나가서 산다는 개념이 케일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즌별로 저택에 구비되어 있는 각종 브랜드의 카탈로그 안에서 원하는 옷을 고르면 며칠 후 드레스 룸에 새 옷이 들어왔다. 카탈로그 외의 방법으로는 형과 아버지의 재단사에게 맡기는 정도였는데, 옷에 까다로운 두 사람과는 달리 케일리는 기성복으로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 전자에서 만족했다.
해서 옷을 사기 위해 바깥에 나간다는 에드워드의 말에 의문을 표했지만 아무래도 의도가 잘못 전달된 모양이었다. 자신의 물음에 이중으로 된 암막 커튼을 활짝 걷어낸 에드워드가 밝게 들어오는 아침 햇살 사이로 펼쳐진 거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뭐 선호하는 브랜드라도 있으면 골라봐. 없으면 내가 고르고.”
깔끔하게 정돈된 거리의 정경을 내려다보던 케일리는 마침 눈에 들어온 표지판에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첼시의 킹스로드.
자신을 런던 거리까지 옮겨다 준 렌필드가 도박으로 날려먹은 고가의 부동산이 있는 영국에서 집값이 비싸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꼬박꼬박 들어가는 그 장소였다.
과연, 집이 부서지는 걸 싫어할 만하구나 생각하며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뒤를 따랐다.
◇ ◆ ◇
“저 바이크 처음 타봐요.”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한 후 눈을 끔뻑이며 잠시간 멍하니 서 있는 케일리의 손에서 헬맷을 건네받았다. 14만 달러-약 1억 4천만 원.-짜리의 예술작을 바이크라는 단어로 폄하하는 것이 대단히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바이크는커녕 자동차 운전면허도 없을 것 같은 녀석을 두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NCR leggera 1200 titanium special. 수퍼카를 모으던 에드워드가 처음으로 구매한 바이크가 티타늄 바디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나도 내 소중한 그레이스를 딴 놈한테 허락한 건 네가 처음이거든.”
바이크가 나란히 줄지어 선 곳에 ‘자신의 그레이스’를 주차한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분명 바이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마치 애인을 공유하기라도 한 것 같은 어법이었다.
보통 탈 것에 사람 이름을 붙이나……?
잠시간 묘한 표정을 한 케일리는 그러고 보니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인간들은 배를 여인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으니 바이크를 애인처럼 다루는 뱀파이어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결론과 함께 그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너 면허는 있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렇게 묻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크는 처음이지만 면허는 있었다.
“네, 일단은요. 직접 운전할 일은 거의 없기는 했지만요. 제 차도 없었고.”
자신의 차는 없었지만 사유지 안에 차만 수십 대를 모아놓은 차고가 따로 있었다. 그중 아무거나 골라서 타고 나갈 수 있었으나 소유주는 분명 자신이 아니었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게다가 케일리는 직접 운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을 업으로 삼는 운전사가 있는데 굳이 자신이 그의 일을 빼앗아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굳이 따지면 자동차를 운전한 경험보다 말을 이끌었던 경험이 더 많았다. 자신의 명의로 된 차는 없지만 자신의 앞으로 된 경주마는 있었으니 말이다.
“뭐, 운전은 내가 하면 되니까 상관없나. 멀리 가기도 귀찮으니까 옷은 이 근처에서 대충 사도록 하지. 웬만한 매장은 다 있으니까 적당히 골라. 네가 안 고르면 내가 골라도 상관없고.
끝나면 대충 아침을 먹고…… 아니, 그냥 사가는 게 낫겠군. 초능력 사기꾼도 아니고 아침부터 런던 한복판에서 포크며 나이프를 구부러뜨리는 진기명기를 펼칠 수는 없으니 말이야.”
대화의 핀트가 다소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비단 어느 한쪽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별달리 옷 취향이랄 게 없는 케일리가 지나가는 가게마다 제일 먼저 보이는 옷을 가리키는 통에 결국은 몇 벌 구입하는 동안 에드워드의 취향만이 반영되어가던 참이었다.
제법 유명한 브랜드부터 시작해 아는 사람만 아는 디자이너즈 브랜드까지, 다양한 로고의 종이가방으로 양손이 넘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현명하게도 케일리에게는 일절 짐을 맡기지 않고 저 혼자 요령 좋게 들고 걷던 에드워드가 낭패한 얼굴을 했다.
“이거…… 바이크로 옮길 수 있나?”
느려진 걸음의 에드워드와 나란히 걸으며 케일리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다 날아가지 않을까요?”
그 말이 맞다. 굼벵이 속도로 털털거리며 가다가는 하루를 꼬박 써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은 그레이스를 길거리에 방치해둔 채 택시라도 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번 주 내내 애쉬포드의 저택에 처박힐 예정이니 적당히 한가한 놈한테 픽업해두라고 말해둬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가까운 카페테리아의 테라스석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기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뭐 먹고 싶은 건 있고?”
“음, 커피보다는 밀크티가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케일리가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스윽 훑어보며 그렇게 말하자, 종이가방을 테이블 밑에 내려놓은 에드워드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동안 택시가 무사할까 모르겠군. 어차피 애쉬포드의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니 그쪽에 연락을 넣어봐야겠다. 휴대전화를 찾아 주머니를 뒤지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이런, 낭패다. 그러고 보니 훈련소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휴대전화 챙기는 걸 잊었다. 그쪽에 연락을 해 건네받든, 직접 찾아가든 왕복 반나절은 걸리는 거리다. 한번 아파트에 돌아가면 문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애쉬포드의 저택과 훈련소는 문으로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다. 역시 차를 보내라고 하는 게 빠를 것 같다.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주문을 마친 에드워드가 10파운드짜리 지폐를 두 장 내밀며 그렇게 말하자, 점원이 잠시간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스름돈 없이 아침식사가 준비되는 사이 에드워드는 카운터 구석의 수화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오늘 아침 로라를 먼저 보낸다는 연락을 하기 위해 저택에 전화를 걸었다.
100년 전과 같은 번호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모양으로, -B 지구를 거쳐 번호를 알아냈던 것이 천운이었다. 아침에 한번 눌렀던 번호를 다시 누르자 콜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애쉬포드 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침과는 또 다른,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다. 저택의 사용인은 모조리 뱀파이어였다. 에드워드가 용건을 간단히 전달했다.
“에드워드다. 오늘 점심 무렵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작은 트러블이 생겼어. 지금부터 말하는 주소로 차를 보내줘. 음, 되도록이면 튼튼한 걸로.”
그러고 보면 케일리가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했었던가. 하도 오랜만에 돌아가는 것이다 보니 전화기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분명 자신의 기억으로는 애쉬포드의 저택 서재에 분명 유선 전화기가 있었다. 100년 전의 기억이다 보니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가게의 주소를 읊어주고 전화를 끊은 에드워드가 밀크티와 브런치 세트를 테이크아웃 해 테라스 석으로 향했다. 애쉬포드 가에서 차가 도착할 때까지 영락없이 묶여 있게 생겼으니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 애쉬포드 가에 연락을 넣어놓고 아침식사도 그쪽에 부탁하는 게 편했을 텐데 생각을 잘못했다. 기껏 포장해 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풀어놓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케일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들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바이크를 타고 갈 수도 없으니 차 보내라고 연락해뒀어. 기다리는 동안 먹고 가는 게 낫지. 다 식잖아.”
“아하. 하기야 샌드위치 좀 세게 잡는다고 크게 문제가 생길 일도 없을 것 같기는 해요.”
그렇게 말한 케일리가 손을 내밀어 샌드위치를 잡은 순간.
“…….”
“너……, 내가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고 했지?”
“그러게나 말이에요…….”
깔끔하게 손가락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샌드위치를 바라보며 케일리가 얌전히 손을 거둬들였다.
얇게 구운 팬케이크 두 장, 샌드위치 하나, 껍질이 붙은 채 커팅된 오렌지가 담긴 투명한 팩과 밀크티. 제법 그럴듯한 메뉴를 바라보면서도 케일리는 신기하게도 별달리 식욕이 일지 않았다. 배가 고픈 것은 분명한데 눈앞의 식사에 군침이 돌지는 않는 것도 뱀파이어의 피가 주는 효과 중 하나일까.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케일리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플라스틱 나이프로 먹기 좋게 자른 팬케이크를 포크에 찍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주는 에드워드를 향해 입을 벌렸다.
“개 키울 때도 이렇게까지 해준 적은 없었는데.”
물론 그 개는 가문에서 키우던 품종견이었으며 자신의 애완동물은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남이 식사를 하든 쫄쫄 굶고 돌아다니든 신경 써본 역사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개 키우는 사람들은 그 개를 먹거나 개랑 섹스하지 않으니까요.”
하하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긴 했다. 분명 맞는 말이었는데, 저런 식으로 말하면 마치 자신이 고이 키우던 애완동물을 잡아먹는 것뿐만 아니라 수간까지 일삼는 말종 같지 않는가-심지어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닥치고 먹기나 해.”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우물우물 팬케이크를 삼킨 케일리의 시선이 밀크티에 고정된 것을 보며 그것을 입가에 대준 에드워드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팬케이크 두 장과, 구멍난 샌드위치까지 깨끗하게 비운 케일리에게 껍질을 깐 오렌지까지 먹여주며 스스로의 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던 에드워드를 향해 별안간 물음이 날아왔다.
“에드워드는 식사 안 해요? 그, 냉장고에 가득한 주스 팩 같은 거라든지…….”
“그 맛없는 걸 내가 왜 먹어?”
“지금까지는 먹었잖아요?”
마지막 남은 오렌지를 든 채 멈칫한 에드워드가 좀 닥치라는 듯 케일리의 입술 사이로 오렌지를 꾸욱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잖아. 그것밖에 선택권이 없으니 먹었던 거지, 그런 쓰레기를 누가 좋다고 주워 먹냐.”
틱틱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꼬박꼬박 대답이 돌아온다. 제법 익숙해진 에드워드의 화법에 케일리가 어딘지 걱정 어린 얼굴이 됐다.
“그렇게 굶었다가 한 번에 먹고 그러면 배 안 고파요?”
어렸을 때부터 식사관리와 체력관리만큼은 남들의 몇 배로 철저히 받아온 케일리에게는 그의 식습관이 대단히 문제 있게 느껴졌다. 굳이 나서가며 타인의 건강을 챙길 만큼 부지런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새 직장은 에드워드의 파트너였다. 그가 건강하지 못하면 직장의 안녕에 문제가 생겼다.
케일리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다소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돌렸다.
“원래 뱀파이어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흡혈해도 살 만해. 더 많이 마셔도 상관없지만 매일같이 마셔댔다가는 아무리 머리 나쁜 인간들이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테니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리는 놈들은 거의 없지. 재주껏 마셔대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 말이야.”
그 말에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대답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화제를 바꿨다.
“제가 그렇게 맛있어요?”
다소 거슬리는 표현이 들어 있는 물음에, 맛있는 건 네놈이 아니라 네 피뿐이라는 걸 지적해야 하나 잠시간 고민한 에드워드가 질문을 질문으로 맞받아쳤다.
“왜 그런 게 궁금한데?”
자신이 눈 돌아가게 맛있다는 대답을 한다면 스스로의 피를 마시기라도 할 요량이란 말인가. 그런 게 아니고서야 맛을 궁금해할 이유가 에드워드에게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껏 살아 있는 인간의 피를 흡혈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인간은 케일리가 처음이었다.- 그게 인간들의 특징인지, 아니면 케일리의 특징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냥요. 맛있게 먹기에……. 전 음식이 맛있어서 먹는다는 말은 별로 이해가 안 가는 편이거든요. 물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목적은 달성하는 거잖아요. 배를 채운다는.”
“뭐, 나도 그 비슷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네 논리로 말하자면 나한테 있어서 다른 인간들의 피는 대부분이 못 먹을 음식이니 맛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가 있지. 음식으로서의 최소한의 조건도 달성하지 못한 걸 가지고 맛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다른 모든 인간들의 피를 음식도 아니라며 폄하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했다.
“음식 투정은 안 좋은 버릇이에요.”
“……삼시 세끼를 샐러리로만 채워주랴?”
“저 샐러리 안 싫어하는데요.”
“브로콜리?”
“그럭저럭 먹을 만하죠.”
“당근, 피망, 양파, 양배추.”
“왜 그걸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왜 그런 걸 싫어할 필요가 있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에드워드가 말을 잃었다.
무엇 하나 걸리는 게 없는 케일리에 더 이상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싫어하는 음식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은 에드워드가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늘어놓은 것들이 심지어는 음식도 아니라 인간 아이들이 싫어하는 음식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가게 앞에 소리 없이 멈춰 선 검은 리무진을 보고선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마중 왔다.”
◇ ◆ ◇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눈을 뜨자 두 번 접힌 종이 한 장이 얼굴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펼치자 ‘책상에 전화기 있으니까 그걸로 전화하고 얌전히 기다려. 일 좀 보고 올 테니까.’라는 휘갈긴 메모가 있었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양쪽 벽면 가득 가지런히 책이 꽂혀 있는 널찍한 서재다. 창문가의 책상에는 에드워드의 메모 내용대로 전화기가 있었다. 책상 앞에 멈춰 선 케일리가 잠시간 고민하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오…….”
에드워드의 말처럼 이 저택은 대단히 튼튼하게 지어진 모양이었다. 수화기가 저택의 일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직통번호로 걸면 아버지가 받으려나? 직접 걸어본 적은 거의 없는 전화번호를 차례대로 눌러가던 찰나, 끼이익.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까지 누른 번호 탓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입력하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케일리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화려한 허니 블론드에 지중해의 바다를 그대로 담아 만든 듯 아름다운 사파이어빛 눈동자. 어디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이 완벽한 조각 같은 이목구비의 사내가 서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려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별달리 표정의 변화가 없는 케일리가 눈을 크게 뜨고 명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외형에 시선을 고정했고, 그 또한 깜짝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케일리를 바라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두 남자의 사이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사내의 이름을 혀 위로 굴려본 케일리였다.
“로저?”
잠시간 멍하니 서 있던 사내가 부드럽게 호명된 자신의 이름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달리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는 않는 그를 향해 케일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가장 최근의 기억을 더듬으면 작년 연말의 자선행사에서도 얼굴을 마주한 로저였다. 케일리 자신은 로체스터의 가업인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았지만, 가문의 직계였기 때문에 집안행사에는 반드시 얼굴을 비쳐야 했다.
해서 다른 일족들과 함께 로체스터의 이름을 걸고 주최하는 행사에는 꼬박꼬박 참석했기 때문에 대를 이어 가문간의 교류가 깊은 애쉬포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중에서도 직계의 손이 적은 애쉬포드 가의 차기 가주인 로저 애쉬포드와는 같은 학교에 같은 해에 입학해 같은 학부를 전공한 터라 개인적으로도 교류가 제법 되었다. 나이대가 비슷한 데다 같은 사교클럽 출신이라는 점까지 더해 졸업 후에도 각종 행사에서 얼굴 부딪쳐왔던 터라 케일리의 좁은 교류관계 안에서 그나마 친구라고 부를 만한 상대 중 하나가 로저 애쉬포드였다.
이런 곳에서 얼굴을 마주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을 깜빡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로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케일리……? 너야말로, 너 집을 나가서 행방불명이 됐다고……, 네가 왜 여기에…….”
“집……. 맞아, 슬슬 돌아가보려고 했어. 안 그래도 지금 집에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횡설수설하는 로저에게 손에 든 수화기를 보여준 케일리가 말을 멈췄다. 로저의 뒤에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에드워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로저를 저능아 바라보듯 흘낏 쳐다본 에드워드가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비키라는 듯 밀쳐내고는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전화는?”
눈을 치켜뜨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로저를 방치한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흘러나오던 기계음마저 끊긴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은 케일리가 대답했다.
“아, 지금 하려던 참이었어요.”
“빨리 끝내. 자꾸 꾸물거리니까 사방에서 귀찮은 게 몰려오잖아.”
정확히 로저를 가리키는 노골적인 배척에 케일리는 다시 수화기를 들기 전에 먼저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친구인 로저를 대단히 싫어하는 것 같은 에드워드에게, 그가 보이는 것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소개할게요. 이쪽이 전에 제가 말한 같은 사교클럽 출신 동창인 로저 애쉬포드예요.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두 사람 아는 사이인가요?”
그러고 보니 생긴 것도 좀 비슷한 것 같네요. 머리색이랑 눈 색도 같고…… 친척인가요?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 덧붙이는 케일리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로저가 황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드워드를 한 번, 케일리를 한 번, 집을 나갈 때와 별달리 달라진 구석이 없는 차가운 에드워드의 얼굴을 한 번,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무사태평한 케일리의 얼굴을 또 한 번.
그렇게 몇 번을 확인했지만 로저의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에드워드와 케일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실인 모양이었다.
“혹시 벌써 아는 사이?”
케일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은 내용이었다.
둘이 아는 사이? 어떻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도 믿을 수 없는 조합에, 심지어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받는 그 모습에 로저 애쉬포드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고 가만히 입을 열었다.
“에디? 네가 왜 케일리를 데리고……?”
“걔랑 네가 같이 있으면 안 되잖아? 왜 에디 네가 케일리 걔를 데리고 있는 거지? 나이를 먹다 보니 헛게 다 보이네. 그럴 리가 없지. 에디 네가 케일리랑 같이…… 있네?”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과 케일리를 번갈아 보는 로저를 향해 에드워드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한 타이밍 늦은 대답을 되돌렸다.
“아버지, 댁이야말로 대체 왜 이 시간에 일은 안 하고 이런 데 자빠져 있는 겁니까?”
대답이라기보다는, 9할 정도가 폭언으로 구성된 비꼼이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냉담한 에드워드의 표정에 ‘응, 맞아 넌 진짜 에드워드가 맞는 것 같고…….’ 자신의 아들내미가 진품이라는 것을 납득한 로저의 시선이 이번에는 요 며칠 로체스터 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장본인을 향했다. 어쩌면 저쪽이 진짜 케일리가 아닌 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로저 애쉬포드가 알기로 자신의 막내아들인 에드워드는 인간을, 그것도 케일리와 같은 규격외의 인간을 결코 호의로 대하지 않는 뱀파이어였기 때문이다. 또한 케일리는 뱀파이어는커녕 산타클로스나 부기맨 같은 일반상식선의 이종에게조차 관심이 없다.
케일리와 에드워드에게는 접점이 없었다. 적어도, 로저 애쉬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
케일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드워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케일리가 에드워드와 로저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버지라는 단어의 뜻이 바뀐 걸까?
확실히 두 사람이 닮기는 했다. 외견상 차라리 나이 터울이 적은 형제라고 하는 것이 어울리기는 했지만.
나란히 세워놓으면 흠잡을 구석이 없이 아름답다는 점에서 대단히 닮은꼴이기는 했지만, 로저 쪽이 훨씬 남성미가 옅은 미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일리가 알기로 로저는 운동을 대단히 싫어했기 때문에 뼈대가 가는 것도 아니었는데 전체적으로 상당히 슬랜더한 체형을 유지해 얼핏 유약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에 반해, 에드워드는 화려한 이목구비를 배반하듯 옷 위로도 확연히 드러나는 근육이 건장한 남성미를 주장했다. 차라리 에드워드가 로저의 형이라고 하는 게 납득이 갈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케일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간단히 두 사람의 관계를 납득했다.
어찌됐건, 자신의 소꿉친구인 로저와 새 직장의 파트너인 에드워드는 이견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닮아 있었으며, 에드워드는 또래의 청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농담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 다시 유전자의 힘을 얕보면 안 되겠네요.”
케일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에, 로저와 에드워드가 동시에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두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부자관계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기가 막히도록 닮아 있었기 때문에 케일리는 로저와 에드워드를 번갈아 보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집요정이 목이 터져라 불러댔던 가문이 이 애쉬포드였구나. 어쩐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더라니.
세상에 애쉬포드라는 성을 쓰는 가문이 하나뿐이지는 않을 것이라 가볍게 넘겼던 케일리는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세상이 좁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러다가 런던 시내를 100미터 걸을 때마다 아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
여상하게 생각한 그의 사고는 스스로의 교유관계가 대단히 협소하다는 현실과 런던이라는 도시의 규모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나 일단 집에 잠깐 전화 좀 해도 될까?”
스물 몇 해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이 그나마 가장 어울리는 사이로 지냈으나, 파자마 파티에 초대할 정도까지 친하지는 않은-애초에 그런 파티를 연 적도 없기는 했다.- 로저를 향해 케일리가 물었다.
에드워드가 로저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이곳은 애쉬포드 가의 저택이니 주인인 로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놓인 수화기를 가리키는 케일리의 물음에 먼저 대답을 돌린 것은 로저가 아니라 에드워드였다.
“넌 홈리스면 집도 나왔을 거고, 미성년자도 아닌 주제에 뭘 그렇게 전화에 집착하는 거냐? 너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스물다섯? 여섯? 그 정도면 슬슬 부모한테서 독립할 때도 됐다고. 네 부모도 귀찮아할걸?”
부모에게서 제대로 독립하지 못한 전형적인 최근의 젊은이를 바라보듯 한심함을 담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워드를 마주한 케일리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말처럼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다는 게 자랑이 되는 사회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음, 그런가요? 일주일 이상 집을 떠난 게 처음인 데다 부모님이 모르는 직장을 구한 것도 처음이라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 했어요. 일단은 어린 시절부터 안전과 연락에 대한 교육은 철저히 받았거든요. 그때야 미성년에 납치 위험도 종종 있었으니 그런 거긴 하지만…… 확실히 지금은 별로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하네요. 에드워드의 말대로 성인이고…….”
형제들이야 가업을 이어 정치판에서 구르다 보니 아버지와 비슷한 행보를 걸어 자주 얼굴을 보고 안부도 물었지만, 자신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차피 매일 같은 집에서 생활하니 굳이 연락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야 했지만서도. 그 형제들조차 어머니와는 달에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기껏해야 명절의 안부전화 정도일까.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자신이라고 해서 부러 꼬박꼬박 부모님께 연락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저택의 본채에서 독립하지 않은 것은 자신과 그 밑의 여동생뿐이었다.
다른 손위형제들과 자신은 가족행사가 있을 때에나 얼굴을 보는 사이였다. 물론 명절의 안부전화 같은 것도 주고받지 않았다. 서로의 비서를 통해 명절이나 생일 때 선물을 보내기야 했지만……. 그 정도는 가족이 아니라 거래처를 대상으로도 하는 것이다.
손위형제들은 아버지와 일 관계로 제법 교류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자신은 아침저녁으로 시간이 맞아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아니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역시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게 되면 부모에게서도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독립을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껏 별달리 고려해본 적 없는 독립이라는 명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쨌든 전화가 하고 싶은 거면 얼른 끝내. 오래 걸리진 않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죠. 새 직장에 취직했다고 연락하려는 것뿐이니까요. 공무원이 됐다고 하면 기뻐하실 것 같아서요.”
평범한 사람 정도의 감성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는 케일리가 가볍게 대답하자 에드워드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케일리가 숫자 패널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안 돼!”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처음 보는 금붕어한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로 에드워드와 케일리를 바라보던 로저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허나 정신을 차렸다기보다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수화기를 향하던 케일리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에드워드는 저 뱀파이어가 드디어 맛이 갔나 싶은 기묘하게 찌푸려진 표정을, 케일리는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남자의 입에서 각각 다른 물음이 튀어나왔다.
“아버지, 노망이라도 들었습니까?”
“로저, 전화비 필요해?”
뒷골을 띵하게 만드는 언어의 폭력과, 뒤이어 날아온 핀트가 엇나간 물음에 로저가 잠시간 침묵했다. 자신이 낳아 키웠지만 성격부터 시작해 식성까지 종족의 표준라인을 삐죽삐죽 무시하는 막내아들을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애지중지 키워온 로저는 자신의 것을 쏙 빼닮은 새파란 눈동자에 가벼운 경멸을 담은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했다.
“에디, 그렇게 부르면 거리감이 느껴지잖니!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 아빠라고 부르라니까.”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오래된 성의 나이를 거뜬히 뛰어넘은 것뿐만 아니라, 뱀파이어의 나이로도 이미 성년은 훌쩍 넘긴 막내아들을 향해 그렇게 주장하는 로저의 표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어째서 아빠를 아빠라고 불러주지 않는 거니 에디!
그렇게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호소하는 1,000년 묵은 뱀파이어를 향해 에드워드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싫습니다만?”
어린 시절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만들기 위해 모든 형제들에게 아버지 금지령을 내렸던 로저의 멍청함이 새삼 떠올라 이가 갈렸다. 덕분에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서야 세상에는 아버지라는 매우 편리하고 덜 기분 나쁜 호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에드워드는 존재 자체로는 죄가 없을 그 호칭에 매우 유감이 많았다.
약 100년 만에 조우한 막내아들의 차가운 태도보다 더 이상 아빠라고 불러주지 않는 호칭에만 대단히 슬픈 표정을 지은 로저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막내의 옆구리에 붙어 있는 생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시신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이 상황 자체가 크나큰 문제였다. 대체 런던 바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에드워드와 케일리가 자신의 저택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수 있는 걸까.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 조합을 눈앞에 한 채 로저는 먼저 급한 불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케일리…….”
왜 부르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며 지난 20년간과 다를 바가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는 그를 향해 로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 설마, 지금 여기서 너희 집에 전화 걸려는 건 아니지?”
“안 돼?”
“여기서 발신한 전화는 보안문제로 역추적이 안 되거든?”
“우리 집도 그런데? 도청도 안 되잖아.”
공화당 경선 최우선 후보로 전미를 들썩이며 전방위 어그로를 끌어대던 도널드 트럼프가 종내에는 무슬림의 미국 입국금지를 주장하는 정신 나간 모습을 바라보는 J.K 롤링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케일리에 로저가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트위터에 적었던 너무나 끔찍한 나머지 차라리 볼트모트가 나아 보일 정도의 상황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절절히 이해한 로저는 SNS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언젠가 그것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것을 리트윗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너희 집 사람들, 가족문제만 얽히면 진짜 귀찮아지는 거 너도 알지?”
“음……, 다소 가족을 지나치게 감싸고 드는 경향이 있긴 해.”
확실히 로체스터 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회 전반적인 도덕상에 반하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만 아니라면 일족의 일원이 실수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끌어안아주는 편이었다.
다만, 어떻게 해도 덮을 수 없을 정도로 가문에 먹칠을 할 정도로 심각한 사고를 쳤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기는 했다. 그런 때에는 가족이고 뭐고 가차 없이 내쳐져 로체스터의 성조차 쓸 수 없어지며 두 번 다시 가족과 만날 수 없고, 절연당한 이와 교류하는 자에게도 같은 벌이 내려졌다.
까딱 발을 잘못 디디면 끝장이지만 거기까지 가지만 않는다면 철저한 우군인, 다소 극단적인 가족임에는 틀림없었다.
“난 가능하면 너희 집이랑은 우호적으로만 엮이고 싶어. 지금도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잖아. 작년 선거 때 일로 꽁해서는 아직도 나만 보면……. 어쨌든, 적어도 우리 가문에서 하필이면 케일리 널 가지고 정치공작을 펼치려고 했다는 개도 안 믿을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널 데리고 그런 짓을 하겠어? 너희 집에 너 말고 쓸 만한 애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널 가지고 말이야!”
로체스터 가에 비하면 정치적 영향력은 적은 편에, 정치력 자체도 짧은 애쉬포드 가문이었으나 전체 풀 안에서는 상위 10퍼센트 안에 드는 정치 명가였다. 게다가 로저의 말대로 작년 선거에서 로체스터 가와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을 몇 번이나 일으켰던 통에 최근에는 대단히 사이가 소원해진 참이다.
물론 그래 봤자 감자 싹에서 고구마가 나는 것도 아니니 구성원 자체는 비슷비슷했다. 다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더할 나위없는 우군이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랬다.
로체스터 가와 냉전을 유지한 상태에서 잘못 꼬리가 잡히면 일이 매우 귀찮아진다. 무엇보다 대대적으로 손을 쓰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최근 케일리가 가출 후 행방불명 상태라는 이야기는 먼 귀로 들었던 로저였다.
그 머저리 같은 맥코이 백작가의 렌필드가 가출한 녀석을 주워다 런던 시내에 내려줬다는 이야기와 로체스터 가에서 사적인 루트로 사람을 풀고 있다는 소식이 섞이면 그럴듯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 케일리 로체스터가 ‘또’ 사고를 쳤군.
거기까지는 별달리 특별할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케일리 로체스터는 그가 태어난 후 매해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와 스케일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고를 쳐댔고 심지어 그것은 그가 살아 있는 한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고를 치기 전까지만 떼어놓고 보면 오히려 인간의 평균을 높이높이 끌어올리는 대단히 유능한 개체였다. 문제는 그 유능함이 실용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 정도일까.
어찌됐건 케일리가 사고를 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으니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고에 자신의 막내아들이 엮이는 건 아니다. 그건 아주, 심각하게, 안 좋은 방향의 서프라이즈였다.
“추적 안 된다며? 그럼 어차피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를 거니까 상관없지 않아?”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주장하는 케일리를 향해 로저는 답답한 심경을 숨기지 않고 토로했다.
“추적이 안 된다는 거랑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건 다른 말이라고! 물론 추적 안 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기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네가 추적 불가능한 어딘가에 납치돼서 범인들한테 감화되었다는 미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정신 나간 애들이 드글드글하다는 게 문제잖아. 심지어 너네 집 애들은 쓸데없이 부와 권력까지 가졌다고…….”
인간이 돈과 힘을 가지면 무슨 짓을 할 수 있을지 빈약한 뱀파이어의 상상력으로는 차마 추측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로저를 향해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은데, 생각했지만 굳이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다는 것은 로저의 과장된 말에 어느 정도 진실이 섞여 있기는 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네 집 애들은 평소에는 이성적인 주제에 가족 이야기만 얽히면 무슨 이슬람 극단주의자 뺨치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온다고. 그거 좀 어떻게 안 돼? 가족력이야?”
확실히 로체스터 가의 가족사랑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과격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서너 번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 할머니 중 악취가 심하다는 이유로 약혼자에게 파혼을 당한 것을 원한 삼아 한 대가 끝날 때까지 내도록 상대방 가문의 사람을 만나러 갈 때마다 지독한 향수를 뿌리고 나갔다는 쪼잔한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파혼당한 할머니뿐 아니라, 전 가문의 일원이.
로체스터 가의 쪼잔한 면모를 떠올린 케일리는 비교적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옅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의 비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 채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돌렸다.
“음……, 그렇지. 그러니까 아마 어렵지 않을까. 그런 가풍이니까.”
물론 거기에 자신이 참전할 생각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막을 만큼 열정적으로 가풍에 문제를 느끼지도 않는 그다운 대답이었다.
“넌 양심도 없냐?! 너 때문에 그 쪼잔한 가문에 빌미를 잡힐 불쌍한 내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거냐고?!”
여전히 케일리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애쉬포드 가 서재의 보안이 철저한 수화기를 가리키며 열변을 토하는 로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버지야말로 양심이 좀 있어보시죠. 그 나이를 먹고 새파랗게 어린애랑 친구놀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인간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살기 위해 성장을 가장하며 뱀파이어의 능력을 유용해 몇 번이고 새 삶을 사는 것은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특히 순혈 뱀파이어의 경우, 같은 순혈 뱀파이어의 사이에서만 순혈을 낳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은 탄생이라기보다는 창조에 가까웠고 두 순혈 뱀파이어가 낳은 아이의 피를 순혈의 것으로 완전히 교체하는 상당히 소모적인 작업이었다.
순혈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이를 낳을 뿐이라면, 뱀파이어에게서도 평범한 인간과 비슷한 개체가 태어났기 때문에 뱀파이어들 중에서는 인간과 결혼을 해 인간의 아이를 낳는 일도 흔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는 대부분 보통 인간에 비해 뛰어난 신체능력과 평균보다 긴 수명을 가졌지만 나머지는 보통의 인간과 같았다. 그 혼혈의 특징조차도 평균에서 조금 뛰어난 수준인 정도라 별달리 메리트가 되지는 못했으며 대부분의 혼혈은 자신이 혼혈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일생을 살다 갔다.
그런 고로, 로저 애쉬포드와 같이 종족과 나이를 속이고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사는 뱀파이어는 오히려 사회에 잘 섞여든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보통의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인간 세계에서 이종족 관리라는 특수한 방향으로 본성을 숨기지 않은 채 섞여든 에드워드의 눈에는 그 모습이 가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부친이 눈앞에서 자신보다 어린 청년의 노릇을 하는 광경을 보고 적어도 자랑스럽다고 느낄 만큼 엇나간 신경의 소유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 자신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느낀다는 말에 로저가 눈을 크게 뜨고 반박했다.
“에디, 넌 지금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단다. 일단 걔 나이는 스물다섯 아니고, 보이는 것처럼 무해하지도 않아. 물론 그냥 보기에는 다른 인간들처럼 굴지 않으니 신기할 수도 있어.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니 말이야. 구경하는 재미도 있겠지.
근데 문제는 걔 옆에 붙어 있다 보면 절대 구경만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고. 거기에 말려들면 끝장이야. 그럴 때는 아무리 에디 너라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게다가 쟤네 집은 또 어떻고. 로체스터네 인간들이 얼마나 귀찮은지 알기나 해? 에디 넌 지금 단단히 속고 있는 거라고!”
로저는 마치 순진한 아들내미가 세기의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문제는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은 언제나 로저였으며, 반대로 케일리는 대단히 실용적인 부분과 보고 있으면 질릴 일은 없다는 몇 가지 확고한 장점을 가진 상대라는 현실이었다.
로저가 뭘 착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케일리는 애초에 자신의 이름밖에 밝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기보다는 페어리에 의해 주워진 것이라는 표현이 옳았으니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다.
그의 집안이 어떻든 에드워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말마따나 케일리는 성인이었고 그 귀찮다는 집안에 일일이 허락을 구해가며 데리고 다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경험상 에드워드는 로저의 반응이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 봤자 우리가 인간 나이 따지는 것만큼 양심 없는 짓이 더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걔 내년이면 스물여덟이야! 좀 있으면 서른이라고! 그리고 양심이라니, 말 한번 잘했다. 애초에 케일리 쟤한테 양심이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이런 데 있지도 않았겠지!”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쟤가 여기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데리고 온 건데.”
에드워드가 황당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로저가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디, 너 쟤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구나……. 지금 쟤네 집에서 스물일곱이나 먹고 시원하게 사업 일곱 개를 말아먹은 후 편지 하나만 남기고 실종된 아들을 찾겠다고 사설 용병을 얼마나 풀고 있는지 알아? 심지어 가만히 내버려두면 런던 시내에서 굴러다니다 굶어 죽을 게 분명하던 애가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으니 반대파의 수작이 분명하다며 쓸데없는 망상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줄줄이 튀어나오는 케일리의 화려한 이력에는 로저를 향한 반감으로 똘똘 뭉친 에드워드조차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대화 도중에 튀어나오는 이상한 상식의 출처가 그의 태생부터 이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좋았으나……. 아무래도 케일리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상한 인간이라는 것만은 분명해졌다. 본인에게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집안에도 문제가 많아 보였다.
애초에 사업을 일곱 번이나 말아먹을 정도면 그런 애한테는 사업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게 아니라 사설 용병을 푼다는 부분까지 무엇 하나 정상적인 구석이 없었다.
100년 전쯤의 기억만 되짚어도 당시 사업에 열을 올렸던 로저가 제법 괜찮은 위치까지 올라갔던 것을 생각하면 가문간의 교류가 있는 케일리 쪽도 인간 사회에서는 제법 상류층에 속하는 편일 것이다. 사격을 위한 개인교사 이야기나 용병업체의 인센티브 이야기, 시종일관 비굴해지는 법이 없는 묘한 태도까지 생각하면 그의 태생이 여태까지의 태도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류 사회의 인간이라지만, 로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야기는 심각하게 평범을 벗어나는 내용뿐이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와중에 케일리가 런던 시내에 굴러다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모습을 감추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는 부분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해도 그다지 상식적인 가족은 아니었다.
하기야, 그러니까 케일리 같은 걸 만들어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묘하게 납득한 얼굴을 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로저가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 집에서 전화를 해봐. 걔들은 분명 케일리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리고 반대파 무리에게 세뇌당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거라고. 반대파 부분만 빼면 내가 생각해도 케일리 쟤가 갑자기 모습을 숨기는 건 자의가 아닐 게 뻔하니까 말이야!
게다가 쟤 성격으로는 자기를 납치 감금한 놈하고도 태평하게 티타임이나 즐기고 나중에는 아마 납치범 편까지 들어줄걸? 그게 제일 덜 귀찮으니까! 그리고 쟤네 가족들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아! 그게 문제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종된 지 날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로체스터 가에서도 아직 공권력에까지 손을 뻗지는 않았다는 것과 사라진 것이 케일리라는 특수상황 정도일까.
어쩐지, 몸을 숨기는 데도 그리 열성적이지는 않을 케일리가 겨우 사업 하나를 말아먹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양심적인 짓을 할 것 같지 않다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로저였다. 게다가 말이야 말이지, 로체스터의 정치노선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던 케일리에게는 별달리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을 가치도 없다.
그런 케일리 로체스터의 감쪽같은 실종 미스터리에 자신의 막내아들이 얽혀 있었다는 슬픈 현실을 앞에 두고 로저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떻게 감쪽같이 몸을 숨겼는지는-물론 그럴 의도가 있었을 리는 없었겠지만.- 이해했지만,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 둘은 어디서 어떻게 엮인 거지?’
케일리가 런던 시내에서 잠시간 홈리스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근래 동기들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소문이 흘러나오는 데는 대부분 렌필드 맥코이였다. 대단히 입이 싼 것으로도 유명한 렌필드의 가문은, 로체스터 가와 대단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케일리를 이동시켰다는 이유로 단단히 미움을 사 로체스터 가에 따로 호출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 또한 아무렇지 않게 떠벌리고 다니는 부류의 사내다. 애초에 렌필드는 맥코이 가에서도 내놓은 자식이었던 터라 별달리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케일리를 바깥에 풀어놓은 데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은 느끼는 모양이었다.
렌필드가 자신의 도박빚을 해결할 때 도움이 되었던 유능한 사설탐정을 고용해 케일리의 행방을 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게 진심 어린 걱정인지 그저 이 상황 자체를 흥미로워하는 건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렌필드의 이야기와 로체스터 가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소문을 조합하면 케일리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증권거래소 근처의 페이터노스터 스퀘어의 길거리였다. 그리고 ‘그’ 케일리가 길거리에서 갑자기 몸을 숨겼다는 것은 로저가 생각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일단 케일리는 사업을 말아먹은 정도로 잠수를 탈 만큼 양심 있는 종자가 아니다. 그는 몸을 숨겨야 한다는 당위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로체스터 가의 눈을 피할 만큼 대단히 열성적인 도피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자신의 막내아들인 에드워드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인간을 막 주워서 데리고 다닐 만큼 인간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았고, 인간을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신원불명의 인간을 아무나 주워 올 이유는 대체로 식사와 관련이 있는 경우 정도였는데, 에드워드는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는 극소수의-아마도 유일한.- 뱀파이어였다.
“저기, 로저. 난 꼭 여기서 전화를 해야 할 필요는 없거든. 아니면 네가 우리 집에 좀 전해줄래? 나 새로 직장 얻어서 지금 공무원 한다고.”
에드워드와 로저의 대화를 잠시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케일리가 그렇게 말하자, 로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공직자는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체스터의 본가 출신 중 유일하게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았던 게 케일리 로체스터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 케일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단지 사람들 앞에 나서는 대단한 귀찮음을 무릅쓰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했었지만 말이었다.
어찌됐든 케일리는 공무를 보는 데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가업을 이어 정치계에 뛰어들어 심지어 의석까지 차지했다면 자신을 귀찮게 하는 모든 이들을 만족시켜 퇴치해버리기 위해 일을 한다는, 영국 의회에 한 획을 그을 어처구니없는 인물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공무…… 뭐? 공무원이라고? 네가?”
물론 공무원에도 종류는 많았고 그중에서는 케일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게 단 일주일 만에 구해질 만한 것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로저가 그렇게 되물었고, 케일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응. 에드워드랑 같이.”
근데 에드워드가 네 아들이라는 건 좀 이상한 것 같다. 너랑 내가 친구인데 내가 친구 아들이랑 같이 일하는 거잖아? 물론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좀 더 세월이 지난 후라고 생각했지, 난.
그렇게 덧붙이는 케일리에게 로저는 돌려줄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와 함께하는 공무원. 그거라면 로저도 익히 알고 있는 공무이기는 했다. 역시나 도무지 어떻게 그런 연결점이 생겼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빌어먹을 이종족 관리국에서 케일리를 받아줬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저 종자의 뭘 보고……?
이종족에게 관심이 없다 못해 그런 것들이 인간 사이에 섞여 돌아다닌다고 해도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게 분명한 케일리였다.
로저의 의문은 대단히 적절한 것이었는데, 애당초 케일리를 픽업해 왔던 페어리는 그의 요원으로서의 능력을 보고 고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에드워드가 제시한 파트너의 조건을 충족하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이 없었고 거기에 케일리가 걸려든 것뿐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일이 그렇게 된 건데? 그리고 네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한다는 거야? 너 이종족이 뭔지는 알기나 해?”
“슬슬 사업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 새 직장을 찾아보려고 했던 참이었어. 너도 우리 아버지가 어떤지 알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는다고 하면 절대로 허락 안 하실걸? 뭐라도 해야 한다면 그나마 할 수 있을 것 같은 걸 골라야 하니까.”
“그래서 고르고 고른 게 관리국이라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덴 줄은 몰랐지만, 다른 구인광고 중에 지원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고 지금 당장 날 원한다고 적혀 있기에…….”
그렇다고 내가 레스토랑이나 공사장 같은 데 취직할 수는 없잖아? 내 일자리만큼이나 그 사람들 목숨도 중요하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나도 주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고른 것뿐이라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대답하는 무서울 정도로 케일리스러운 이유에 로저는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 케일리 너, 변호사 자격증도 있잖아. 학생 때 땄던 거. 한 해를 생으로 들여서 LPC(법무 실습과정)까지 끝내놓고 왜 그걸 살려보겠다는 생각은 안 한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지만 로저는 절실했다. 이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한 출구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케일리가 뭘 위해서 이종족 관리국을 고른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이야 말이지, 케일리가 케일리 같은 성격만 아니었다면 사업을 일곱 개나 말아먹을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는 무수히 많은 선택권이 주어져 있었으며 대부분이 보통 사람이 평생을 노력해야 얻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청소년기의 케일리는 승마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필적하는 실력을 자랑했으며, 사격으로는 동년배에서 견줄 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냈다. 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아 사립학교 시절 내내 전 과목 톱을 찍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성적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받아냈다.
본인이 나서서 하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뭘 시켜도 최고의 결과만 받아 오는 주제에, 치명적일 정도로 의욕이 없었다. 결국에는 성적이나 실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않는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어 연달아 물을 먹었지만 그의 사업은 늘 규모가 고만고만했고 크게 타격을 입지 않는 선에서 정리되었다.
애초 그는 욕심이 없었고 가업을 잇지 않겠다는 반대급부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그 단적인 예로 세 번째인가, 아니 네 번째로 일으킨 사업이 어린이를 위한 북극 탐험 학습 키트를 개발하는 회사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에게 정말로 사업을 성공시킬 생각이 있는 건지부터 의심이 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화려한 과거 전력을 더듬으며 어째서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자격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로저가 목소리를 높이자, 케일리는 눈을 깜빡이며 지극히 당연하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난 적극적으로 남을 변호할 의욕이 없는걸. 실습 하면서 든 생각인데, 자기변호도 하기 귀찮아서 안 하는 내가 심지어는 남을 변호해야 한다니……. 그건 너무 잔인한 일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안 하기로 했어.”
궤변이었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납득할 수밖에 없는 답변이기도 했다. 울컥 화가 치민 로저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케일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 놈이 애초에 변호사 자격증은 왜 따는데!”
“그때는 그게 제일 간단해 보였으니까. 근데 자격증만 따면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뭐 어쨌든 그래서 결국 관두고 사업으로 전향했잖아. 썩 잘되지는 않았지만.”
“알겠어. 너한테도 이유는 있었겠지. 물론 보통 신경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어쨌든 네 인생이고 네 선택이니까 존중은 해. 그래, 다 좋아. 다 좋은데, 왜 하필이면 네 그 요상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에디까지 끌어들이느냐 그 말이야.”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멀쩡하다 못해, 심지어는 저 케일리의 편까지 드는 모습을 보면 아직 자신의 막내아들이 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를 말하는 거라면 내가 끌어들이지는 않았는데? 일단 연차로 따지면-몇 년이나 일했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가 나보다 선배기도 하고.
로저,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너무 과보호하면 미움받아. 자식에게도 자식의 인생이 있는 법이잖아. 존중해줘야지.”
“지금 네가 과보호를 논할 입장이야?! 너희 집 부모를 생각해보라고! 아니, 게다가 물론 그 빌어먹을 직장도 상당히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건 너라고. 왜 하필이면 너랑 같이 다니냐 그 말이야.”
로저가 알기로 에드워드는 그쪽 기관에서 제법 신임 받는 실력자였다. 확실히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던 아이였으니 필드요원으로 뛰는 게 썩 적성에 맞았을 것이다. 게다가 순혈 뱀파이어라는 막강한 재원을 졸지에 손에 넣은 관리국에서도 가능하면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겠지.
아무리 에드워드가 잘못된 식습관으로 동족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신체능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 사자의 새끼는 아무리 허약한 새끼라도 사자였다. 에드워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순혈들이 관리국에 적대적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에드워드는 대단히 먹음직스러운 먹이였고, 에드워드 본인도 그 일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로저는 섣불리 손을 뻗기가 어려운 입장이었다.
인간 사회에서의 신분은 그럭저럭 상류층에 발을 끼워 넣은 정도였지만, 이종족의 사회에서는 압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로저 애쉬포드는 순혈 뱀파이어의 장로라는 위치를 이용해 관리국에 몇 번인가 직접적인 압력을 넣은 적도 있었다. 대체로 우리 막내를 얼른 잘라버리라는 대단히 특이한 압력이었으나, 그것이 먹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관리국에서는 에드워드와 로저의 싸움에 끼어들 하등의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에 부자간의 일은 두 사람 사이에서 해결해달라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저는 에드워드에게 이겨먹기에는 지나치게 팔불출인 아들 바보였고, 사태는 평행선만 그었다. 슬픈 일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직장을 다니는 막내아들이 자나 깨나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던 로저였다. 그 망할 직장에 심지어는 케일리까지 더해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허나 장본인인 케일리는 잔뜩 인상을 쓴 채 그렇게 말하는 로저를 향해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 그건 내가 에드워드와 파트너가 됐기 때문이야.”
믿을 수 없는 그 말에 로저가 소리쳤다.
“에디, 너 하다 하다 이런 애한테 네 목숨을 맡기는 거니?”
“여기 내 목숨만큼 안전한 게 없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 노인네가 진짜 노망이라도 난 건가.”
본인도 순혈 뱀파이어인 주제에 같은 순혈의 목숨 걱정을 하는 꼴이 가관이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로저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로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에드워드의 목숨이 위험해질 만한 상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걱정하는 부모를 향해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살짝 억울함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험한 일을 하필이면 케일리 같은 거랑 같이 해야 한다니, 그쪽 애들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니 무엇보다 대체 무슨 근거로 케일리를 고용하겠다고 결정한 건지도 이해가 안 된다 그 말이야!”
이런저런 사소한 이유는 넘겨두고서라도 무엇보다 로저가 관리국을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곳이 에드워드가 가문의 힘없이도 인간 사회에 섞여 살 수 있도록 막강한 뒷배가 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간 뱀파이어가 돈과 기반 하나 없이 인간사회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당시의 에드워드에게는 로저가 만들어준 완벽한 신분이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5, 60년 정도였으며 한곳에 길게 머무르기 위해서는 상당히 교묘한 변신술이 필요했다.
인간과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연출해내는 건 나이를 먹은 뱀파이어에게도 힘든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다. 그런 점에서 따지면 에드워드가 이종족 관리국을 선택한 것은 상당히 옳은 방향이기는 했다.
이종족 관리국은 인간 세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대로 거슬러서는 안 되는 대단히 귀찮으며 유일한 기관이었다. 순혈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로저라고 해도, 기껏해야 연줄을 이용해 에드워드의 근황을 캐내거나, 관리국의 개개인을 집적거려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뱀파이어의 경우 그다지 협조적인 자세는 아니라도 이종족 관리법에 따라 이종족 보장 번호를 받고 거주지 이전 시 반드시 신고를 하는 의무 정도는 지켰다.
뱀파이어가 아니더라도 이종족들 중에는 관리국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많았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 기관은 지나친 간섭을 피하는 편이다.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인간의 눈에 띄는 사고를 치지만 않는다면 그들도 부러 유혈사태를 일으켜가며까지 잡아대지는 않았다. 덕분에 뱀파이어와 관리국은 암묵적인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런 묘한 줄다리기로 유지되는 평화 속에서, 로저가 직접 이민국에 대고 내 아들에게 새로 붙여준 파트너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당장 어떻게든 해보라고 쳐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이쪽에서 그쪽을 건드리지 않는 대신 그쪽도 이쪽을 건드리지 말라는 상호간의 합의가 깨어지니 말이다.
결국 로저 자신은 손을 쓸 수 있는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는 암담한 결론만이 도출되었다. 지금 케일리가 뭣 모르고 로체스터 가에 연락을 넣었다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간의 행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에드워드와 이종족 관리국이 줄줄이 엮여 들어갔다.
이 저택에서 전화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에드워드가 연관된 시점에서 로저는 마냥 발을 빼고 방관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못해 자신의 피까지 뽑아 먹여가며 고이 키운 막내아들을 그런 상어떼 같은 집안에 던져놓고 물리고 뜯기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반대로 에드워드가 그 집안의 지긋지긋한 인간들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참상을 일으킬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인간 사회에서 대놓고 대형살상을 일으키면 아무래도 앞으로의 뱀파이어생에 대단히 지장을 초래하게 될 테니 부모 된 입장에서 그 또한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고 관리국 쪽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요원했다. 그쪽이 단체로 로체스터 가 전원의 기억을 말끔히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별달리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에드워드가 엮인 이상 나 몰라라 내팽개칠 수도 없으니 로저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정말 돌아가시겠네.”
총체적 난국이다. 어떻게 손을 써도 올바른 방향으로 굴러갈 것 같지가 않아 결국 이마를 짚은 채 한숨만 푹푹 내쉬는 로저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일주일만 있다 나갈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죠. 나도 썩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서 이 집으로 기어들어 온 건 아니라 말입니다.”
“아니아니,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에디. 그 일주일간 우리 집에서 케일리를 목격할 사람들을 생각해봐. 이건 진짜 심각한 상황이야. 심지어 일주일이나 쟬 여기 둘 거라면 진짜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라고.
잠깐만…… 에디, 그런데 네가 왜 하필이면 케일리를 데리고 여기로 온 거지? 네 말대로라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온 거라는 뜻이 되잖아, 대체 그 이유가 뭔데……?”
말이야 말이지 에드워드는 장장 100년을 가출했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탕아였다. 본인의 말마따나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닌데 심지어는 길바닥에서 실종되었던 정치적 반대파 집안의 아들내미를 주워다 집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지만 로저는 일단 막내아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다.
“그거야…… 이 집이 튼튼하니까?”
“알겠어, 에디. 이 집이 튼튼한 건 나도 잘 알지. 자, 이번에는 아빠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해줘.”
“그 기분 나쁜 호칭 좀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얘가 내 피를 마셔서 지금 손만 뻗었다 하면 죄다 부숴버리니 효력이 가실 때까지 잠깐 여기서 지낼까 했습니다. 안 됩니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그 더러운 현실이라는 이름의 법칙을 로저 애쉬포드는 오래간만에 절절하게 통감했다.
꿀꺽,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마른침을 삼킨 로저의 눈동자에 채 숨기지 못한 불안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지금 아주 엄청나게, 자신들의 존재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 약간 독특한 식성을 제외하면 순혈 뱀파이어계의 서러브레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완벽한 막내아들이, 지금껏 인간을 음식물 쓰레기의 일부로만 여기던 막내아들의 입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차라리 순혈 뱀파이어도 나이를 먹으면 노인성 난청이 올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게 기쁠 정도로 우울한 그 내용에 로저는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피하기만 한다고 현실에 떨어진 폭탄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입술만 달싹이던 로저는 결국 아무렇지 않은, 아니, 약간의 짜증을 담은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는 만년 반항기의 막내를 향해 말했다.
“에디, 에디……. 아빠가 정말로 아무런 사감 없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대체 네 그 소중한 피를 왜 저런 케일리 같은 놈한테 먹인 걸까? 내 똑똑한 아들이 어떤 이유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차라리 오늘 서재에 들어선 순간부터 벌어진 모든 일이 지독한 악몽이었으면 좋겠다는 로저의 절절한 심정을 배반한 채,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에드워드가 역시나 대단히 삐딱한 태도로 대답했다.
“다른 동족이라면 몰라도, 어린 시절부터 싫다는 나한테 꾸역꾸역 그걸 먹였던 아버지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거랑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잖니, 에디! 순혈이 순혈의 피를 마시는 거랑 인간에게 그걸 먹이는 건 차원이 다른 위험……!”
“필요해서 했습니다. 내 피 내 마음대로 하는데도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너도 엄연히 성체이니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지. 하지만 몸도 약한 애가 그 아까운 걸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 케일리 같은 애한테……. 그 말을 듣는 아빠 심정이 어떻겠어?”
로저의 입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미숙아라 인큐베이터에 넣어 고이 살려냈더니 태생이 채식주의자라, 허약한 몸을 보하기 위해 애를 잡아가며 말 그대로 피와 살을 떼어 먹여가며 키운 금지옥엽이 바로 에드워드다.
그런 막내가, 날 때부터 약간의 하자를 가져 늘 눈에 밟히기만 하던 허약하고 가엾은 막내가, 하필이면 구제의 여지가 없는 인간 하나를 데려다가 제 몸보다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본 꼴이니 마음에 들 턱이 없다. 차라리 길거리에 버려진 박스 속의 강아지를 주워 왔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주운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케일리 로체스터였다. 그냥 케일리라고 해도 문제투성이인데, 그 와중에 케일리는 로체스터이기까지 했다.
이건 악몽이었다. 눈을 뜨고 꾸는 악몽. 그러니 눈을 감으면 분명 깨어날…… 리가 없었다. 의미 없이 눈을 꾸욱 감았다 뜬 로저는 삼 초 전과 변함없는 서재 안의 광경이 참담하기만 했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주일만 있다 갈 테니 신경 끄시라고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로저. 너무 걱정하지 마. 일주일이면 집에 직접 갈 수도 있을 테니까 내가 잘 설명할게. 아버지가 안전문제에 다소 민감하시기는 하지만 잘 말하면 들어주신다는 거 알잖아. 네 말처럼 쓸데없는 오해를 사서 귀찮아지는 것도 사양이긴 해. 그리고 에드워드 피 말인데,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마신 거였어.”
“인간이 뱀파이어의 피를 마셔야 할 만큼 피치 못할 사정이 대체 뭔데?”
“내가 총에 맞아서 그걸 치료하려고……, 게다가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였으니까 문제없어.”
“아, 그래? 넌 총에 맞아놓고도 그렇게 멀쩡한 걸 보면 천운의 별 밑에서 태어난 것 같다. 진짜 지긋지긋하게 끈질긴…… 잠깐만,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케일리의 말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지금까지의 경험상 그의 잘 설명한 내용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집의 귀찮은 사람들은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허나 이어진 말에는 문제가 있었다. 치료를 위해서 선뜻 건네주기에 순혈 뱀파이어의 피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했다. 짧은 기간 동안이라고는 하나 순혈의 피를 얻은 인간은 순혈과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피를 제공한 순혈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를 제 손으로 만들어낸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였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에드워드가 인간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으나.
“에드워드도 내 피를 마셨으니까, 내가 에드워드의 피를 마셔도 결국 총량은 같았을 거라는 뜻?”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 대답한 케일리의 말에 이번에야말로 로저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채 차마 떨어지지도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단단히 굳은 혀를 움직였다.
“그,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하는 말은 에디가……? 네 피를, 마셨……다고?”
고이 키운 막내아들이 농축된 우라늄-235를 주워먹었다고 해도 이것보다는 덜 놀랐을 것이다. 평생을 채식주의자로 살아온 아들의 건강을 위해 강제로라도 고기를 먹이려다 화려한 실패만 남긴 가엾은 인간 부모처럼, 에드워드에게 생피 먹이기를 실패한 결과 가출한 아들이라는 결과를 낳았던 로저였다.
그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뿐만 아니라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케일리를 바라보며 로저는 그저 망연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에디, 거짓말이지? 네가 인간의 피를 마시다니……, 믿을 수 없어.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고 입에 댄 순간 토악질이 난다고 그렇게 피해 다녔잖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른 인간도 아니고 케일리의 피를…….”
수백 년을 염원해왔던 막내아들의 건강한 식습관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케일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에 지독한 패배감을 느끼며 중얼거리는 로저를 향해, 에드워드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구역질도 토악질도 안 나니 마셨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 맛을 몰랐던 게 천추의 한으로 느껴질 만큼 끝내주는 맛이기는 하더군요. 왜, 그러면 안 됩니까?”
아버지야말로 나한테 생피를 먹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던 주제에 왜 그따위 반응이냐며 어이없어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로저가 소리쳤다.
“인간의 생피가 아니라 케일리의 피잖아!”
“쟤도 인간입니다. 그게 그거죠.”
“아냐, 달라, 엄청나게 다르다고. 넌 어릴 적부터 다 좋은데 그놈의 식성이 문제였어. 언젠가는 그 망할 식성 때문에 망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내가 전심전력을 다해 케어해주리라고 다짐해왔다고. 난 아빠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야. 내가 줄곧 상상했던 거랑은 두 차원 정도 다른 그로테스크한 그림이라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뭔지 말하지 말아주세요. 아버지의 그 기분 나쁜 상상에 날 끌어들이는 건 사양입니다.”
대체 누가 누구를 보고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 싶어 에드워드는 할 말이 없었다. 애당초 로저는 다른 가족의 극성맞음을 지적할 자격도 없는 인물이다. 본인부터가 순혈 뱀파이어의 지독한 개인주의를 무시한 채 가족 가족, 그 말밖에 못하는 앵무새처럼 챙기고 다니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생피가 케일리, 이 녀석의 것이니 이 망할 식성 때문에 망하는 날이 오더라도 내 건 내가 알아서 챙길 예정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제발 나한테서 그만 신경 끄세요.”
잔인한 확인사살까지 더한 완벽한 마무리였다.
반항기 청소년 아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따듯한 눈으로 언젠가는 그 시기가 너의 깊고 어두워 묻어버리고 싶은 역사가 되리라는 심정으로 지켜보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에드워드는 이미 독립된 개체였다.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법 외에는 말릴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로저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에게 그런 짓까지 해가며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그런 슬픈 현실은 둘째치고서라도, 에드워드의 말에는 아주 대단히 기분 나쁜 단어가 몇 번이나 튀어나왔다.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내 것.
오늘만 해도 불길한 예감은 거의 100퍼센트의 확률로 맞아떨어졌다.
“에디, 너 안 어울리게 왜 그렇게까지 케일리 걔를 챙기는 거야?”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인간은 포식대상에 불과했다. 종종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고 가끔은 본인이 인간이 된 것처럼 그들 사이에 완전히 섞여들기도 했지만 그래 봤자 기껏해야 반백년의 유희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뱀파이어에게는 그러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인간을 포식하지 않는-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던.- 유일한 뱀파이어였다. 그것이 로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문득 생각이 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부모의 감.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잤니?”
생각을 하기보다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간 물음에 에드워드가 곧장 대답을 돌렸다.
“아버지, 그런 질문을 하는 부모가 대단히 소름 끼친다는 거 압니까?”
그 말이 질문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섯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알 정도로 명백했다. 만약 답이 부정이었더라면, 에드워드는 성격상 결코 저런 식의 애매한 대답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밀려드는 절망감을 숨길 생각도 없이 만면에 드러낸 채, 로저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케일리를 노려보며 울컥 소리쳤다.
“하지만, 난 네 아빠야!”
마치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듯, 그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음절 하나하나를 끊어서 강조하는 로저를 향해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헛웃음을 내뱉었다.
“언제부터 아버지 아들 중에 루크가 있었습니까? 전 아닙니다만, 그새 새로 낳았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 지껄이라는 에드워드의 비꼼에 로저가 울상을 했다.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설픈 비유로 취급당한 것 같아 서러웠다. 아빠가 맞아서 아빠라고 했는데 부모 자격도 없는 까만 베이더 놈팡이와 같은 레벨로 매도되는 건 너무했다.
“내 말은, 지금 네가 가려고 하는 곳은 다크 사이드라고! 세상에나, 반이 다 뭐겠어. 널리고 널린 게 인간인데 이 중에 아무 거나 골라잡아도 난 환영하면 환영했지, 반대는 안 했을 거야. 그런데 그 유일한 예외를 데리고 오는 건 아니야, 에디. 쟤는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는 100년 만에 자신과 대화를 나눠주는 막내를 향해 처음부터 그런 의도였던 것처럼 우주 전쟁의 맥락으로 항의를 시도했다.
상황의 심각성과는 별개로, 케일리를 떼어놓고 보면 지금껏 채식만 해서 걱정이던 허약한 막내가 제대로 된 영양소가 포함된 식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100년 만에 집에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그 점은 기뻤다. 기쁜 것과 비등한 크기의 문제가 닥쳐 있기는 했지만.
“우리가 언제 라이트 사이드에 살았던 적이 있기는 했답니까?”
코웃음을 치며 반박하는 에드워드의 말은 옳았다. 뱀파이어가 사는 곳이야말로 다크 사이드인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지금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에디, 들어봐. 케일리 걔가 어떤 앤지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거라니까.”
“알아야 하는 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막돼먹은 놈팡이를 남편이랍시고 데리고 온 고명딸을 뜯어말리는 광경이 이러할까, 겉보기에는 오히려 에드워드의 동생이라도 믿을 법한 외관을 한 로저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케일리에 대한 험담을 쏟아냈다.
“너 쟤네 집 애들이 어떤지는 알아? 저 집의 제일 무서운 점은, 분명히 가족에 대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데도 서로 안 그런 척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저런 인류의 돌연변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봐, 얼마나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자랐으면 사업 일곱 개를 말아먹을 때까지 아무도 말리지를 않냐 그 말이야! 그런데도 본인은 거기서부터 이미 충분히 문제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른다니까?
그게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 저 집의 어른이라는 것들이 쟤가 예뻐 죽겠다는 걸 근엄한 척하면서 숨기고, 그런 주제에 해달라는 건 또 전부 오냐오냐해줘서라는 거지. 그게 얼마나 애를 망치는 지름길인지 알아?”
숨 한번 쉬지 않고 쏘아붙이는 그 말을 마친 로저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흘러나온 적나라한 비난에 케일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와우, 로저. 너 우리 집에 되게 관심 많았구나.”
약간의 놀라움과 통찰력 있는 분석에 대한 찬사 섞인 목소리가 케일리로부터 흘러나왔고, 로저는 그저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버지가 가족애와 편애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아이러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것 같군요.”
무슨 말을 들어도 케일리를 포기할 것 같지 않은 막내아들의 태도에 로저는 침울한 얼굴로 입을 쩍 벌린 채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어디 다른데서 케일리 대체품을 구해올 수 있는 게 아닌 한 지금 당장은 손을 쓸 수가 없잖아.
그냥 질병 같은 거라고 생각하자. 목숨을 위협하지도 않을 거고, 다소 삶을 귀찮게 만들기는 하겠지만 에디가 괜찮다잖아.
암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부정, 분노, 타협, 우울에 이어 수용의 단계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온 로저는 곱지 않은 눈으로 케일리를 흘겨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그래. 알겠어, 이해했다고. 에디 네가 쟤를, 케일리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한다면 나도…… 받아들이도록 노력은 할게. 하면 되잖아.”
드문드문 끊어지는 말 사이로 한숨과 분노가 섞였다.
결국에는 로저 또한 평범한-팔불출.- 부모였고 생때같은 자식이 좋다고 데리고 온 상대를 강제로 뜯어놓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패배선언을 한 로저를 바라보며 잠시간 눈을 깜빡인 케일리가 성큼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치 위로하기라도 하는 듯 자신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지나간 케일리를 원망 어린 눈으로 쳐다본 로저를 더욱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조심스러운 위로의 말이었다.
“저, 로저……? 내가 에드워드랑 결혼을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심각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닐까? 네가 뭘 받아들이려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우린 그냥 직장동료일 뿐이거든?”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철벽같던 막내를 꼬드긴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본인은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니 걱정 말라는 것에 로저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심술 섞인 목소리로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케일리와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막내에게 네가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일지라도 빨리 눈치채고 쟬 버리는 게 좋을 거라는 작은 심술이었다.
“아 참, 에디 네가 아직도 눈치 못 챈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걔 성은 로체스터야. 알겠어? 걔는 그냥 케일리가 아니라-물론 그냥 케일리라고 해도 엄청 싫지만.- 케일리…… 로체스터라고!”
로저가 케일리를 질색하는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는 로체스터라는 가문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도 한몫 크게 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알아오며, 같은 사립학교, 같은 대학을 나온 덕분에 언제나 본인만 평화로운 허리케일리-케일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허리케인이라는 것을 사립학교 시절 그렇게 불렀다.-의 비극에 말려들었던 것이 한두 번이었던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로체스터 가 자체에도 유감이 많은 로저다. 결국 정치판이라는 것이 같은 얼굴들을 가지고 오늘 손을 잡는가 하면 내일은 등을 돌리는 냉혹한 게임이었다. 그러니 현재 정치적 이유로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로체스터 가와 애쉬포드 가 사이의 문제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로체스터가 무슨 상관입니까?”
갑자기 가문은 왜 끼어드느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에드워드에 로저는 주먹 쥔 손으로 답답한 가슴을 쳤다.
“에디 너……! 가출하기 전에 한바탕 집을 뒤집어놓고 나갔으면서 그 원인을 잊어버린다는 게 말이 돼?! 네가 그 집 딸내미한테 냄새 난다고 해놓고 그 뒤로 바로 가출하는 바람에, 쟤네 집안 사람들이 한 30년은 우리 집안 애들 만날 때마다 향수범벅을 하고 왔었다고!”
약 100년 전 에드워드가 인간 애쉬포드 가의 차남 역할을 맡았을 때 벌어진 그 일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니 울분이 터졌다. 물론 당시의 에드워드의 가출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지만-그는 식생활에 대한 지나친 간섭에 염증이 나 있었기 때문에 줄곧 성체가 되면 집을 나가리라 이를 갈아댔다.-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했다.
만약 에드워드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더라면 로저는 그게 막내아들의 반항심이 정점을 찍어 일부러 던지고 간 폭탄이라 생각했을 정도로는, 절묘했다.
당시 에드워드의 약혼녀였던 레이첼 로체스터는 좋게도 나쁘게도 대단히 여성스러운 소녀였으며, 외견만큼은 동화 속 왕자 같은 에드워드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유리처럼 섬세한 소녀의 감성을 ‘너 냄새나니까 좀 떨어져.’라는 무신경한 말 한마디로 산산조각 낸 에드워드는 심지어 그 일을 벌여놓고 훌훌 집을 나가버렸고, 두말할 것도 없이 로체스터 가와 애쉬포드 가의 사이는 끔찍하리만치 험악해졌다.
100년 전 정계보다는 재계에서 영향력을 떨쳤던 애쉬포드 가에서는 마침 새로운 영역으로 가업을 확장하려던 참이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정치 거물인 로체스터 가와 정략적인 결합을 원하던 아쉬운 입장에서, 그 파혼이 가지고 온 결과는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전적으로 에드워드만의 잘못이었던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애쉬포드 가에서는 에드워드와 꼭 닮은 장남을 데려다 레이첼 로체스터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천생 소녀다운 외견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로체스터 가의 일원에 어울리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완고하기가 엘프를 능가하는 그 소녀를 결국에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이, 애쉬포드 가는 정계 진출에서 한 발짝 물러난 채, 한 세대 내도록 로체스터 가의 지독한 향수폭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뱀파이어의 후각으로 반백년을 당했던 로저는, 뒤끝 가득한 그 집안과는 두 번 다시 그런 방향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지독한 시기였는지 지금도 종종 악몽을 꿀 지경이었다.
그게 얼마나 쪼잔하고 끔찍한 복수였는지 되돌아보자면 할 말은 많았지만, 당시 런던 사교계를 들썩이게 만든 스캔들의 종말에 대해 유명 타블로이드지에서 몇 번이나 대서특필했던 그 사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미 100년이 지난 이야기다 보니 케일리가 모른다 해도 에드워드가 모를 리는 없었다. 심지어 본인이 흘린 말이 원인이었으니 말이다.
“아……, ‘그’ 로체스터?”
로저의 울분 섞인 설명을 듣고서야 떠올랐다는 듯 새삼스럽게 케일리를 바라본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부러 케일리의 성을 물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풀네임이 케일리 로체스터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셈이었다.
로체스터라고 하면 에드워드의 기억 속에도 제법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성이었다. 100년 전쯤 로저가 한창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사업을 기반으로 정계에도 손을 뻗으려 수를 쓰던 상대였지. 지금도 종종 신문에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그 집은 아직도 건재한 모양이다.
하기야, 건재하니 실종된 아들을 찾으려 사설 용병을 푸는 거겠지. 옛날부터 스케일 하나는 범지구적인 면모를 보이는 독특한 집안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케일리라는 형태로 직접 겪어본 근래의 경험까지 더해 에드워드는 로체스타가의 일원들이 정말 순수한 인간은 맞는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마 에드워드가 말하는 ‘그’ 로체스터가 내 집이 맞는 것 같아요. 향수 이야기는 저도 어릴 적에 어른들께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그 상대 가문이 애쉬포드였다는 건 처음 듣지만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리 되게 인연이 깊은 집안이었네요.
덧붙이며 마치 훈훈한 미담이라도 되는 듯 회상하는 케일리와 에드워드의 모습에 로저는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었다. 그때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일을 저지르고 튄 막내와 그 끔찍한 복수의 후손인 케일리에게는 그저 지나간 과거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아버지는 얘랑 친구라면서, 말만 들으면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마치 케일리의 욕을 하는 게 못마땅하기라도 하다는 양 튀어나온 에드워드의 시비조의 말에 로저가 더 이상 지킬 체통도 없는 김에 대놓고 손가락질까지 해 가며 자신의 정당함을 토로했다.
“그거야말로 내가 쟤 친구니까 하는 말이지! 잘 아니까! 내가 쟤를 20년이나 봤어. 쟤 인생의 삼분의 이는 옆에서 지켜봤다고. 저런 질병 같은 걸 내 막내아들 옆에 붙여둘 부모가 있을 것 같아? 만약 그런 부모가 있다고 해도 CPS(아동 보호국)에서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게다가 쟨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전부 합쳐서 다시 틀어줘 봤자 상처받기는커녕 귓등으로도 안 들을 위인이라 그 말이야!
억울함이 철철 흘러나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로저는 1,000년을 넘게 산 뱀파이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에드워드를 향해 네가 내 편을 들어야지 쟤 편을 드는 게 말이나 되냐는 듯 질투 어린 시선까지 곁들여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부친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에드워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아버지는 내가 아동 보호국의 보호대상이 아니라는 것부터 제대로 인식하시죠. 멘털 케어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지금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라지만, 그걸 당사자 앞에서 말하는 건 예의의 문제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그 예의 말입니다.”
지금껏 애쉬포드 가에서 가장 예의범절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망나니 아들에게 그런 말까지 듣자 로저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지금껏 잠자코 있던 케일리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워드를 거드는 것이 아닌가.
“맞아, 로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도 보통 사람 정도로는 상처받는다고.”
상처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나 알고 하는 말인지 궁금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로저에게 그렇게 말한 케일리의 밤색 눈동자가 뿌듯하게 빛났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에디와 얽힌 덕분에 말을 다소 직설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로저는 자신이 오늘 한 이야기에 한 점 거짓이 없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아들에 이어 별로 소중히 여긴 기억은 없지만 비교적 가까운 친구에게 동시에 버림받은 로저가 의미 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케일리 너마저……!”
별로 신뢰가 가득한 친구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한 시저라도 되는 양 절망적인 표정을 한 로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이는 적어도 이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아들의 싸늘한 시선과 친구의 말똥말똥한 눈을 견디지 못한 로저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바꿨다.
“근데 케일리, 넌 대체 어떤 부분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거야? 너 그런 거 받는 애 아니었잖아. 그리고 쓸데없는 말도 안 한다는 주의고. 왜 안 하던 농담을 하려고 해, 소름 끼치게.”
“그냥……, 받았다는 건 아니고 희망사항?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닌데. 평범한 게 제일 좋은 거잖아. 편하고.”
“그래, 네가 대체 뭘 목표로 그런 짓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정진해봐. 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게. 내 아들내미 너무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이직도 좀 해.”
은근슬쩍 자신의 희망사항까지 꼼꼼하게 끼워 넣은 로저는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이유도, 막을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새삼 에드워드와 케일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집안의 과거사와 껄끄러운 로체스터 가의 가족들만 빼놓고 보면 그리 나쁜 조합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케일리는 혀에 바늘을 세우고 다니는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 돋친 에드워드의 말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었고-거의 감각이 없다시피 한 그 감성을 무던함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지금까지 고전해왔던 식생활을 단번에 고쳐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문이었지만, 에드워드가 생피를 마시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맛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맛이라는 것은 감정과 욕구에서 발현되는 에드워드에게만 적용되는 룰이었다. 그리고 케일리는 지난 20년간의 경험상 감정과 욕구가 거의 없다시피 한, 말 그대로 그 순간순간의, 믿을 수 없이 단순한 논리로만 살아가는 탈 인류적 생명체였다.
어떻게든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옆에 붙어 있음으로 인해 좋은 점이 있지는 않을까 찾아보던 로저는 그가 케일리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좋은 점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쟤가 전부 다 똑같은 인간이면서 케일리만 아니었다면 최고였을 텐데!
로저가 근본부터가 어긋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에드워드가 서재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일주일간 전화하기를 미룬 케일리 또한 에드워드의 뒤를 따랐다. 대화가 끝났기 때문에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내버려둔 로저가 화들짝 몸을 틀어 케일리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너희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대답은 먼저 나간 에드워드에게서 돌아왔다.
“그럼 하루 종일 서재에 처박혀 있습니까?”
“그러니까! 너희가, 케일리 쟤가 여기서 막 목격되고 그럼 안 된다고 아까부터 말하고 있잖아.”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온 내용에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가지도 말라, 전화도 안 된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뭘 원하는지 말이나 해보라는 양 로저를 바라보며 삐딱한 자세로 선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래서 그 귀찮은 집안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 말인데, 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저, 우리 집 일은 역시 그냥 내가 직접…….”
“아니,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좋은’이라는 말의 뜻이 ‘악랄한’으로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한 로저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에드워드와 케일리가 서로를 바라보았고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믿어도 될까요?
뭐, 너한테라면 몰라도 나한테 해가 될 짓은 안할 노인네니까.
그렇게 무언으로 합의를 끝낸 두 남자가 동시에 로저를 쳐다보았다.
“뭡니까, 그 좋은 생각이란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