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41)

#Mission4. Drink him! (3)

순혈 뱀파이어의 피가 효력을 발휘하는 기간은 약 일주일이라고 했다. 그 일주일 중 반절 하고도 반나절을 막 지나보낸 케일리는 적어도 문손잡이를 잡자마자 문을 뜯어내지 않을 정도로는 힘의 제어가 가능해진 참이었다.

사실 힘의 제어가 가능해진 건지, 아니면 힘이 반감된 건지 확실하지 않기는 했지만 어쨌든 더 이상 문을 부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애쉬포드 저택의 문은 대단히 튼튼했기 때문에 그리 쉽게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문만큼 튼튼하지는 않았던 문고리와의 접합 부분이 문제였다.

100년 전 에드워드가 사용했다는 방의 바로 옆방을 빌려 쓰며 케일리는 몇 번이나 문과 손잡이를 분리시켰고, 결국 이튿날 점심 무렵 매번 사람을 부르기도 귀찮았기 때문에 나사와 드라이버, 그리고 새 문손잡이를 방 안에 구비하고 직접 수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어찌됐건 다행인 것은 결과적으로 더 이상 구비한 수리키트를 쓰지 않아도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오늘을 위해 에드워드의 서포트를 받으며 밤낮으로 손 근육의 힘 조절을 훈련한 케일리가 자신만만하게 손을 뻗어 리무진의 뒷좌석 문을 직접 열었다. 자동차의 문손잡이를 흡사 꽃잎 다루듯 섬세한 손놀림으로 연 케일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리무진의 뒷좌석 문손잡이에는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우그러진 자욱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침울한 얼굴을 한 케일리는 뒤따라 들어오며 힐끗 그것을 쳐다본 에드워드의 “그 정도면 선방했네.”라는 평에 다시 한 번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어쩌면 처음 느낀 것만큼 손자국이 깊게 남은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애쉬포드 저택에 머무른 지 꼭 사흘이 지난 저녁, 케일리와 로저, 그리고 에드워드는 널찍한 리무진 뒷좌석 안에 마주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주로 로저가.- 이야기를 맞추고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고 오늘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험난한 영국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굵직하게 굴러온 로체스터 가의 직계 일가였다.

한 사람과 두 뱀파이어가 머리를 맞댄 계획의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가, 그들의 거짓말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지, 혹은 날카로운 로체스터에 의해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또 다른 50년 향수전쟁을 일으킬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긴장이 감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사이 몇 번이나 반복한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듯, 로저가 손에 든 파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좋았어, 이거라면 그 로체스터의 늙은 너구리라도 급조한 거짓말이란 걸 꿰뚫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변명이 될 거야.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 에디, 네가 누구라고?”

무릎 위에 올린 서류철로부터 자신을 향해 시선을 옮긴 로저에, 에드워드가 삼일 전 급조해온 자신의 새로운 신분을 읊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린델. 애쉬포드의 무역 계열사에서 영업 고위직으로 주로 신생 거래처의 해외 바이어를 만나고 계약을 따는 업무를 담당함. 해외출장이 잦으며, 이달 초 의료기기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영국에 방문했음.

런던에 머무는 동안 애쉬포드 가의 본채에 신세를 지고 있으며 로저 애쉬포드와는 나이가 비슷한 친척지간으로 어린 시절부터 간간이 교류가 있었지만 대단히 가까운 사이는 아님. 회사의 자세한 업무사항에 대해서는 기밀유지 조항에 위배되기 때문에 언급 불가능. 이 뒤도 전부 합니까?”

그 외 자잘한 설정으로는 실제로 로저가 유럽 일주를 떠났던 14년 전 프랑스에서 일주일간 바캉스를 함께 보냈다는 등의 누구도 궁금해할 것 같지 않은 것들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디테일한 거짓말이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로저의 인생 뚝딱 만들어내기에 감탄을 금치 못한 새삼스러운 얼굴로 에드워드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케일리가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런 케일리를 가볍게 무시한 로저가 감격에 차 고개를 가로저으며 에드워드에게 대답했다.

“아니, 그 정도면 됐어. 완벽해, 역시 내 아들이야!”

팔불출 부모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로저를 한심한 눈빛으로 깔아본 에드워드가 삐딱한 자세로 푹신한 시트에 깊게 기대어 앉았다.

100년 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자신과 비교해도 젊어 보이는 게 다소 언짢게 느껴지는 건 지나치게 인간 사회에 적응을 한 탓일까.

그게 아니면 상대가 로저이기 때문에 기분이 더러운 것뿐일까.

잠시간 머릿속을 스친 그 생각에는 사실 결론이 필요하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로저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기분이 더러운 원인이 로저라는 결론으로 일단락내린 에드워드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로저, 아까부터 내 신분만 몇 번을 확인하고 있는데 그것보다 우선 당신이야말로 그 재앙 같은 입을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밖에서도 그 망할 아들 타령을 했다가는 애쉬포드 가의 차기 가주에게 정신이상이 왔다며 대서특필될 거고, 물론 그걸 지켜보는 나는 대단히 즐겁겠지만, 정신 이상자의 망상 속 아들로 묶이는 건 딱 질색이라서요.”

느긋하게 흘러나온 에드워드의 말에는 별달리 틀린 구석이 없었지만,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대화의 일부였다면 아마도 본래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온한 대화로 이어질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에드워드 특유의 독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대부분의 경우 그의 일방통행으로 끝이 나고는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지나칠 정도의 신랄함에 학을 떼도 시원찮을 발언이었으나, 그의 혈육인 로저는 입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애완 고슴도치라도 바라보는 양 애정 가득한 시선을 보냄으로 인해 천하의 에드워드마저 질려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에디 네 독설을 100년 만에 직접 들으니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어……! 옆에 있는 게 케일리만 아니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뭐 어쨌든. 에디 너는 생긴 것도 나랑 닮은 데다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니까 섣불리 의심하는 사람이 나오진 않을 거야.

그리고 혹시 몰라서 사업체 별로 몇 가지 확실한 위조신분을 만들어뒀으니 여차하면 그걸 증거로 가지고 올 수도 있어. 간간이 실적을 만들어두기도 했으니 유령 신분이라고는 해도 본격적으로 파내지 않는 한 들킬 염려는 없으니 이쪽은 해결이고…… 남은 문제는 케일리, 바로 너야.”

별안간 자신에게로 돌아온 화살에 케일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내 거 다 외웠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케일리는 로저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싫으나 좋으나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동기였기 때문에 최소한 암기력에 있어서 자신이 빈틈을 보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나 기억력 되게 좋은데?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주장하는 케일리를 향해 로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의심을 섞어 요구했다.

“한번 읊어봐.”

“음, 이름은 케일리 로체스터. 이건 당연하고. 집을 나온 후 페이터노스터 스퀘어에서 잠깐 홈리스로 있다가 지나가던 로저의 도움으로 애쉬포드 가에 잠깐 신세 짐.

집에 연락하기 전에 다음 직장을 구해야 할 것 같아서 로저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 비서가 갑작스러운 조부의 병환으로 장기휴직에 들어가 당장 쓸 만한 사람을 구하는 친척과 연결해줌. 그리고 이주 전부터 로저 애쉬포드의 친척인 에드워드 린델의 비서로 취직해 현재 직업은 수행비서.”

별달리 긴 내용은 아니었지만 로저가 급조한 지난 2주간의 행적을 그대로 외워낸 케일리를 에드워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사흘간 저 정도의 내용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다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지난 사흘의 대부분을 문을 고치거나 문고리를 부수거나 힘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데 투자했던 것을 상기하면 케일리의 기억력이 좋다는 주장은 사실이었다.

로저가 말한 것처럼, 그가 케일리만 아니었더라면 저 넘쳐나는 재능으로 뭘 해도 한몫해서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이름 정도는 남길 수는 있었을 것 같았는데, 그것 참 아쉬운 일이다. 물론 뱀파이어인 에드워드가 인류의 대단한 손해를 걱정할 입장은 아니었지만서도.

줄줄줄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케일리의 대답을 팔짱을 낀 채 대단히 못마땅한 얼굴로 듣고만 있던 로저가 툭 던지듯 물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네가 하는 일이 뭔데?”

“……어?”

“에디의 수행비서가 하는 일 말이야.”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저를 향해 케일리는 어제저녁 마지막으로 확인한 서류의 내용을 찬찬히 되짚었다. 그러니까 수행비서의 업무는 분명…….

“이동수단 및 숙박업소 수배, 스케줄 관리, 전화 받기, 전화 분류하기, 바이어 접대, 그 외 기타 잡무?”

“거기까지는 맞았어.”

“나 기억력 좋다니까.”

눈을 깜빡이며 귀찮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에 로저의 표정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그의 말대로 기억력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이쪽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저는 케일리의 문제가 기억력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 영업직이 하는 접대가 뭔지는 아냐?”

이번에야말로 정확히 문제가 되는 부분만을 짚어 묻자, 케일리가 잠시간 침묵했다. 밤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두어 번 깜빡였다. 로저는 확신했다. 저건 케일리가 모르는 데다 생각하기도 귀찮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표정이 틀림없다.

잠시간 말이 없던 케일리가 곧 답을 알아냈다는 듯 반짝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걔 데리고 같이 레스토랑 가서 식사하는 거?”

“네가 사장일 때는 그랬겠지!”

“하지만 난 늘 레이튼도 같이 앉아서 먹었는데?”

“그건 걔가 사장 비서라서 그런 거고!”

비서를 데리고 다녀본 적은 있어도 비서가 되어본 적은커녕 비서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도 없을 케일리를 향해 로저가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너 너희 가족 아닌 사람들이랑은 대화하지 마. 차라리 에디한테 전부 맡겨. 너 때문에 우리 막내아들이 비서가 아니라 금붕어 똥을 달고 다닌다고 생각할 것 아니야. 그리고 그 금붕어 똥을 내가 소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은 내가 에디를 싫어한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고. 심지어 케일리 널 다른 것도 아니고 비서로 추천했다는 걸 그 녀석들이 알게 되면…….”

일단 그 녀석들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에스컬레이터식 사립학교부터 쭉 함께 지냈던 동창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지만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케일리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긴 사이, 에드워드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케일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로저, 당신이야말로 쓸데없이 입 잘못 놀리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그 로체스터의 사람들만 잘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쓸데없는 인간들하고 엮일 생각 없으니 용건만 해결하는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목적지에 다다른 리무진이 멈춰 섰다. 제일 먼저 내린 케일리가 탁 트인 가든형 파티장 입구에 적힌 플래카드를 읽어내렸다.

“알츠하이머 연구를 위한 기금 모금 자선행사…….”

뒤따라 들어온 로저와 에드워드가 뭘 하냐는 듯 가만히 서 있는 케일리를 종용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케일리가 말했다.

“로저, 뱀파이어도 알츠하이머 걸려?”

“그건 왜 물어? 너 뱀파이어 아니잖아.”

“아니 너 나이 많다기에, 미리 준비하려는가 싶어서. 나도 월급 받으면 좀 기부할까?”

언제든 좋으니, 생에 단 한 번만 케일리를 마음껏 두들겨 팰 권리를 얻고 싶다고 로저는 믿지도 않는 아들 크라이스트에게 간절히 빌어보았다.

◇ ◆ ◇

“난 사람들이 이렇게 알츠하이머에 관심이 많은 줄은 꿈에도 몰랐어.”

스탠딩 파티의 형식으로 준비된 자선행사의 익숙한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한 케일리가 감탄 어린 시선으로 파티장 안을 가볍게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알츠하이머 연구를 위한 기금 모금 자선행사의 주최는 구블러 공작가에서 후원하는 연구시설이었고 로체스터와도 집안 사이의 교류가 깊었다. 케일리는 대단히 기묘한 방식으로 단명하는 구블러 공작가의 현 구성원을 떠올리며 새삼 고개를 갸웃했다.

그 집에 알츠하이머를 걱정할 만한 나이대의 사람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고령인 본가 형제의 작은 당숙이 곧 오십 대를 넘기는 정도였다. 현 구블러 공작인 차남은 아직 이십 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으며, 거의 절연당하다시피한 장남이 서른의 초입에 그들의 양친, 그리고 조부모가 모조리 불의의 사고로-양쪽 모두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세상을 뜬 지 오래다.

어찌됐건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아는 사람이 주최하는 파티에서 케일리는 현재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정원 한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주장에 따라 쓸데없는 인간들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다소 쌀쌀한 날씨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내에 있었고 덕분에 한적한 정원에서 세 남자는 로체스터 일가가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며 파티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난 새삼 인간들이 뭐에 관심을 가지는지는 놀랍지도 않던데. 너희는 1미터로 세운 모히칸 머리나 변기에 똥을 얼마나 많이 쌌는지에까지 상을 주잖아. 그런 거에 비하면 인지증 연구를 위한 기금 모금은 대단히 평범한 데다 미래 지향적이기까지 하다고. 불치병 정복은 총칼 들고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동족상잔을 벌이는 게 유행하던 때에 비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취미지, 안 그래?”

느긋한 케일리의 말에 심드렁한 어조로 로저가 답했다. 그런 로저를 어째서인지 놀라움 섞인 눈으로 바라본 케일리가 약간의 침묵 후, 떨떠름함을 숨기는 것만 같은 묘한 표정으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로저, 너 언제 변기에 똥 싸는 걸 가지고 상을 받은 거야?”

“아니, 니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

넌 인류라는 게 동족들이 뭘 하고 사는지 관심도 없냐, 꽥 소리를 지른 로저가 기네스북이라는 대체로 무의미하고 그렇다고 썩 무해하지도 않은 기묘한 기록을 줄줄 읊었다. 그에 케일리는 그제야 “아하, 기네스북.”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런데 넌 뭘 그렇게 자세히 기억해? 혹시 취미가 그거야?”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 질문하는 케일리를 향해 로저가 짜증스럽게 입을 다물었고, 그 모습을 기묘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신 대답했다.

“뱀파이어에게는 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로저는 취미가 이상하기로 소문이 나기는 했지. 굳이 쓸데없는 걸 기억하는 것 정도는 우습지도 않을 정도로는.”

도대체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에드워드의 말에 로저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네놈들이 지난여름에 한 일뿐이겠냐, 난 네 조상의 조상의 조상이 몇 살까지 똥오줌을 못 가렸는지도 기억한다…….”

다소 침울한 안색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로저가 결국에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에드워드만 해도 말로 이기기는 힘든 상대였지만-여러 가지 이유로-, 그보다는 케일리와 쓸데없이 말을 섞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케일리는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적은 주제에, 말싸움으로 지는 법이 없는 짜증스러운 녀석이다. 아마 무슨 말을 들어도 타격을 입지 않는 무쇠와 같은 정신머리…… 아니, 그렇게 단단한 종류까지는 아니지만 뭐로 찔러도 통통 튕겨내는 고탄력 젤리와 같은 정신머리를 지닌 탓이 분명했다.

어찌됐건 논리로도 일방적인 공격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를 가지고 계속해서 짜증을 내는 건 전적으로 이쪽만 손해를 보는 안타까운 짓이다.

로저가 케일리의 상대를 포기한 순간 그의 시야에 파티장을 가로지르는 세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로저가 뱀파이어의 대단히 뛰어난 시력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제일 앞에 있는 노중년의 사내는 케일리 로체스터의 부친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평소 언론에 노출될 때 보이는 자애로운 이미지를 완전히 던져버린 엄격한-그리고 아마도 대단히 분노한 것이 분명한.- 얼굴을 한 채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쪽에는 로체스터 가의 장남인 스탠 로체스터, 그리고 왼쪽에는 공작의 비서인 화이트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로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올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말이 퍼지는 속도가 로저의 상상을 가볍게 초월했다.

로저가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오늘 로체스터 공작은 스케줄상 파티의 참석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했었다. 하지만 케일리를 데리고 파티에 온 지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아무래도 그를 알아본 이들을 통해 말이 전해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파티장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케일리를 찾아낼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야, 케일리. 저기 네 가족 왔다. 근데 너네 아버지, 저거 화난 얼굴 맞지?”

막 실내와 정원의 경계를 지난 조명 밑의 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케일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대답했다.

“음. 저건 확실히 화난 얼굴이네.”

평소와 다름없이 평이한 어조로 그렇게 대답한 케일리의 앞까지 성큼성큼, 데리고 온 아들과 비서가 헐레벌떡 쫓아와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케일리 너 이 녀석……!”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미미한 분노를 담아 터져 나왔다. 연설에서의 연출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로체스터 공작의 드문 노성에 케일리가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게 두렵다기보다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순수한 의문이었다.

자신은 성인이었고 보통의 경우 훨씬 전에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지금껏 독립을 하겠다는 의지를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으니 갑작스러울 수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을 일인가 생각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립이라는 것을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으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그건 옛날부터 아버지가 은연중에 자신에게 바라던 것이 아니었던가.

케일리가 의문에 찬 눈으로 로체스터 공작을 멀뚱멀뚱 마주 보고 있는 사이 곧이어 공작을 따라잡은 스탠 로체스터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잠시간 지구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동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K, 살아 있으면 그렇다고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어머니 아버지가 네 걱정을 얼마나 해댔는지, 그놈의 케일리 소리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라니까. 하도 소식이 없기에 어디 하수구에 잘못 빠지기라도 한 줄 알고 다음주부터는 하수구도 뒤져야 하나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안도한 기색을 비치는 것에 케일리는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미안, 그렇게 걱정할 줄은 몰랐어. 이번에는 나도 많이 반성하느라…… 사실 나, 새 직장을 얻었거든. 새로 일을 배우느라 연락할 정신이 없었어. 알고 보니까 세상에는 내가 할 줄 모르는 직업이 정말로 많더라고. 레스토랑의 웨이터라든지 공사장의 미장이라든지……. 어쨌든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평화로운 일을 골랐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장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이쪽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잔뼈 굵은 정치가는 차남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단어에 화를 내는 것도 잊고 불쑥 물음을 던졌다.

“케일리 네가 새 직장을 얻었다고? 네 힘으로?”

“네, 아버지. 로저 아시죠? 애쉬포드 가의. 그가 추천서를 써줬거든요.”

케일리의 말을 들은 로체스터 공작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이 나이에 드디어 보통 사람 정도의 삶의 의욕-이라고 불러도 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을 가진 차남을 향한 뿌리 깊은 의심이었다.

세상에는 케일리와 같은 경력을 지닌 이를 쉽사리 고용해줄 만한 직장이 적었다. 사업을 일곱 개나 말아먹은 비양심적인 인력을 덜컥 고용하는 곳이 있다면 그 직장은 사회에 빚을 져도 거하게 져서, 세상을 향해 빚을 갚고자 자선사업을 벌이는 고마운 곳이거나 그게 아니면 사기꾼뿐이었다. 그리고 로체스터 공작의 의심은 대체로 후자에 기울어 있었다.

게다가 로저 애쉬포드가 누구던가. 현재 로체스터 가와 공식적으로-주로 미디어를 통해.- 적대선언을 한 강경파의 핵심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런 로저가 뭘 위해서 로체스터 가의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단 말인가. 차라리 사자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사바나를 산책한다는 말이 믿음직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네가 취직했다는 직장이 어디라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렇게 묻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애쉬포드 가에서 유럽을 전역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첨단 의료기기 업체의 영업 4과 실장인 에드워드 씨의 비서예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아는 회사 아닌가요? 블루 씨라고, 분명 몇 년 전 런던에 지사를 세울 때 시공식에 참가했던 것 같은데…….”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서류에 적혀 있었던 사항을 아무렇지 않게 읊은 케일리에 로체스터 공작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비서?”

네가? 비서를? 그게 뭘 하는 직업인지 알기나 하는지 의심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부를 향해 케일리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서요. 화이트나 레이튼처럼요.”

또박또박 흘러나온 그 말에 이번에는 장난스러움이 깔끔하게 사라진 심각한 얼굴을 한, 그의 친형 스탠이 다소 언짢음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K, 너 혹시 로저한테 거짓말해주는 대신 건물이라도 넘겨주기로 했어? 왜 생전 안 하던 거짓말을, 그것도 먹히지도 않을 내용으로 하는 거야? 물론 가족들도 네가 연락 하나 없이 사라져서 많이 화가 나긴 했어. 하지만 그건 널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내가 말했지? 사업은 네가 워낙 가업을 잇는 게 싫다고 하니까 시작하게 내버려둔 거지, 우린 그냥 네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만 하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다른 게 하고 싶다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네가 만약 정원사나 수족관 주인이 되고 싶다고 해도-물론 그렇게 귀찮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겠지만.- 우린 모두 널 지지해줄 거야.”

대단히 진지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로 다정한 설교를 들으며 케일리가 잠시간 눈을 깜빡였다. 바로 옆에서 로저의 헛웃음이 들린 것 같았다. 아마 착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그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지금 형이랑 아버지가 내 말을 안 믿는 거 같은데, 보통 이럴 때의 자신은 가족들이 얼마나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는지를 고려해 대화를 종결시켰다. 그들의 말대로 가족들은 딱히 자신을 귀찮게 만들고 싶어서 닦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경우 까딱 잘못하면 로저를 귀찮게 만들 가능성이 컸고, 이미 로저에게 약속을 한 후니 그가 말려들지 않도록 잘 해결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못 믿겠으면 내가 얼마나 비서를 잘하는지 직접 확인하는 건 어때요? 여기 있는 이분이 내 상사인 에드워드 린튼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로저에게 소개받은 일자리이고, 그 또한 애쉬포드 가의 사람이죠.”

불쑥, 그렇게 제안한 것은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 이야기가 빠를 것이라 판단한 탓이었다.

케일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점 부끄럼 없어 보이는 그 말에, 로체스터 공작과 스탠이 시선을 교환했다. 불신과 의심이 가득한 부자의 얼굴 위로 쥐똥만 한 ‘설마’가 떠올랐다.

설마, 케일리가 정말로 비서로 취직을……?

지난 28년간의 케일리 로체스터를 낱낱이 알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명제였다. 평소와 같이 표정만으로는 심중을 읽을 수 없는 케일리의 평이한 얼굴을 의심 서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비단 로체스터 공작과 스탠뿐만이 아니었다.

로체스터 공작의 비서인 화이트는 물론, 같은 편인 에드워드와 로저마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케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큼 케일리의 발언이 믿기 어렵다는 것만은-그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없으리란 것 또한.- 명백했다.

이유는 달랐지만 제각각 불신을 담고 케일리를 바라보던 사내들 중, 가장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스탠이었다.

“좋아, K.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넌 옛날부터 거짓말을 하느니 입을 다물어버리는 곤란한 녀석이었고, 난 그 점에 있어서는 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 말에 케일리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물론 지금까지 스탠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원칙을 고수하기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짓말을 하는 게 훨씬 귀찮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금과 같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훨씬 인생을 귀찮게 만드는 것이 분명할 경우, 케일리는 거짓말이 아주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사람의 입장이란 시시각각 변하게 마련이니 어제 한 말을 바로 오늘 뒤집는다고 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점을 따지면 케일리가 정치를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은 영국에게 있어서 대단히 긍정적인 방향이었을지도 몰랐다.

하루아침에 발언을 뒤집으며 죄책감 하나 없는 훌륭하기 그지없는 인성을 한 정치가가 나라를 어떻게 굴려먹을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케일리 네가 뭘 어떻게 보여주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려무나.”

스탠에 이어 로체스터 공작의 허락까지 떨어진 시점에서 케일리는 에드워드와 로저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자신이 훌륭한 타개책을 찾아내기라도 했다는 양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는 것과는 달리, 두 뱀파이어의 눈에는 마치 사자의 아가리를 벌리고 꾸역꾸역 기어들어 가는 멍청한 초식동물로만 보였다.

특히 케일리가 비서를 가져보기만 했지, 그게 뭘 하는 일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로저의 가슴 한켠에 불안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나 역으로 생각하면, 다행히도 그 정도는 로체스터 일가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사실일 테니, 케일리는 대충 일주일 경력의 비서 정도만 해내면 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상황 안에서는 그나마 건질 만한 점이었다.

같은 편인 로저와 에드워드까지도 케일리가 대관절 무엇을 가지고 자신의 결백-그런 게 있다면.-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이, 타이밍 좋게 앞으로 나선 에드워드가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상사인 에드워드 린델 입니다. 로저를 통해서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둑어둑한 정원의 조명 밑에서도 훤칠하게 빛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로체스터 공작은 에드워드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케일리가 솔선수범해 구직을 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의심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맞았다. 로저는 어린 시절부터 케일리와 썩 가까웠고, 최근의 정치적 대립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로체스터와 애쉬포드는 좋게도 나쁘게도 인연이 깊었으니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이상할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사실 이 바닥에는 본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로저가 케일리를 우연히 발견해 도와줬다는 이야기는 듣고 보면 상당히 그럴듯했다. 그 도움을 케일리가 요청했는지 아닌지는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로저 애쉬포드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로체스터 공작은 생긴 것과는 달리 대단히 성실하며 신뢰할 만한 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로저가 직접 보장하는 친척에 대해서도 큰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게다가 첨단 의료기기를 연구, 개발, 유통하는 블루 씨는 애쉬포드 가문의 주력사업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에드워드의 기분 나쁘도록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채, 공작은 눈앞에 있는 사내가 확실히 애쉬포드 가의 혈통이 맞기는 한 모양이라 납득했다. 저 집안의 혈통은 겉가죽으로 유전자를 주장하기라도 하듯 대부분이 화려한 외견을 자랑했다.

하나같이 눈이 높아 예쁘고 잘생긴 배우자를 맞아들이다 보니 대대손손 우수한 유전자만 살아남은 건 아닐까 종종 사교계의 화제가 되기도 할 정도로는, 외모의 평균치가 높은 편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찌됐건 지금까지는 그다지 흠잡을 구석이 없는 에드워드를 향해 공작이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주로 자신의 아들을 향한.-를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부족한 자식 놈이 신세 지고 있소, 리암 로체스터요. 로저, 자네도 오래간만이군 그래.”

법안 하나를 가지고 피터지게 싸우다 종내에는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1년을 질질 끌고 있던 사이이니 이렇게 면대면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오래간만일 수밖에 없기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는 능구렁이같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역시나 구렁이 몇 마리를 잡아먹은 유들유들한 얼굴을 한 로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요, 이렇게 따로 뵙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요, 리암. 스탠, 너도 오랜만. 넌 요즘 바빠서 승마클럽 다닐 시간도 없다면서? 레이니가 너 보고 싶다고 얼굴 좀 비치라고 전해달라더라. 화이트도 잘 지냈어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화이트를 이어, 로저와 같은 승마클럽의 회원인 스탠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레이니? 걔가 왜 날? 난 걔 너무 들이대서 별로라고. 난 여자가 좋단 말이야.”

“글쎄……, 내가 걔 마음을 읽는 건 아니니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라고. 어쨌든 난 전해달랬으니 전해준 것뿐이야.”

별달리 사이가 나쁠 일이 없는 스탠과 로저의 사이에서 가벼운 안부가 오갔다. 곤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탠을 가볍게 무시한 로저가 로체스터 공작을 향해 케일리를 은근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리암, 근데 난 여기서 좀 빼줘요. 불쌍한 댁 아들이 길거리에 나앉은 게 안쓰러워서 도와준 것뿐인데 좋은 일 해놓고 괜한 가족사에까지 끼어들어서 등 터지고 싶지는 않다고요. 에디도 뜬금없이 써먹지도 못할 애 떠맡아서 힘들 텐데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시면 고맙고요. 쟤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알뜰하게 제 아들까지 챙기면서 본인은 쏙 빠진 뒤, 케일리만을 사지에 밀어 넣는 훌륭한 전법이 아닐 수 없었다. 뼈가 있는 로저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꼭 내가 자네를 괴롭힌 것처럼 말하는군 그래.”

“작년 내도록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습니까?”

“글쎄, 자네 말대로 호의를 베풀어준 상대에게는 그만한 보답을 해야 하는 게 옳지. 케일리의 말만 확인하도록 하겠네.”

애매모호한 로체스터 공작의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만큼은 지난 1년간의 전쟁을 떠올릴 필요가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 기나긴 로체스터 가문의 새로운 저주를 피한 로저가 쾌재를 불렀다.

“아직 경매 시작까지 시간이 꽤 있는데, 저녁식사는 하셨습니까?”

신이 난 얼굴로 그렇게 묻는 로저를 향해 로체스터 공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아,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아직 들지 못했네. 그런데 자네 오늘은 끼어들기 싫은 거 아니었나? 자네도 일 보러 온 거면 갈 길 가게나. 난 케일리가 뭘 어떻게 잘하는지 지켜볼 테니.”

공작의 대답에 로저는 잠시간 계산하듯 에드워드와 케일리를 번갈아 바라보는가 싶더니,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뭐……, 그건 그렇죠. 그럼 저는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디, 물론 리암과 스탠의 앞에서 케일리를 부려먹는 게 예의 바른 너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쟤가 본인 입으로 증명하겠다고 하니까 마음껏 부려먹도록 해. 평소처럼, 평소처럼만 하면 돼. 쟤는 네 비서니까 말이야.”

별달리 거리낄 것이 없어진 로저는 본인이 벌여놓은 판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혼자서만 발을 뺐고, 그 비겁한 부친의 모습을 에드워드는 경멸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소 상처받은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판에 다시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로저는 실내로 되돌아가는 일행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지며 케일리의 뒷모습을 향해 건투를 빌었다.

내 아들만 곱게 잘 되돌려보내고, 너는 뼈나 추리도록 하거라.

-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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