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영국 비밀보안국의 비밀 4
#Mission4. Drink him! (4)
한창 스탠딩 파티가 진행 중인 실내로 돌아가자, 로체스터 공작 일행을 주목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애당초 케일리 로체스터의 실종부터가 아는 사람들만 아는 마이너한 소문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그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가출 자체를 믿지 않는 이들이 반수였다. 오히려 케일리와는 상관없이, 행사 명단에 참가 확정자로 올라오지 않았던 로체스터 공작의 갑작스러운 등장 자체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 중 몇몇만이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정도였다.
파티장에 들어오자마자 낯익은 얼굴을 무시한 채 정원으로 곧장 달려간 공작의 행보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마저 그들이 실내로 돌아오며 늘어난 일행을 바라보며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으니, 공작 일행에게서 그들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작이 급하게 달려오느라 식사를 걸렀다고 했던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스탠과 화이트는 에드워드와 케일리, 그리고 로체스터 공작에게서 흥미진진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도 건너편 테이블에서 후다닥 집어 온 스시를 입에 욱여넣고 있었다.
그 게걸스러운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로체스터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비서와 장남에 비할 수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간간이 샴페인 잔만 입가에 가지고 가는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에드워드라고 하셨소? 로저에게 청탁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네만, 어쩌다 케일리를 비서로 쓸 생각을 다 한 건지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물론 케일리 저애가 기본적으로 똑똑하고 몇 가지 특출 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비서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오.”
다 큰 아들을 찾기 위해 사설 용병까지 풀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는 이성적인 주제였다. 게다가 자신의 둘째 아들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객관성을 둘째 아들의 고용주 앞에서 늘어놓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구구절절 공감하는 에드워드가 잠시간 말을 고르는 사이, 바로 옆에서 입안을 가득 채웠던 스시를 꿀꺽 삼킨 스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음,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죠. 아버지 말씀대로 우리 K가 어릴 때부터 수재 소리를 달고 다닐 만큼 똑똑하긴 했는데, 그 머리가 한 번도 실제로 도움이 됐던 적은 없으니 말입니다. 요즘 세상은 지능지수가 높다고 어떻게든 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저도 좀 궁금하긴 하네요.”
케일리와, 로체스터 공작을 반씩 섞어놓은 생김새의 스탠이 그렇게 말하자 샴페인 한 모금을 넘긴 공작의 비서 화이트 또한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무엇보다 케일리가 로저에게 직업 알선을 요구했다는 게 제일 믿기지 않습니다. 상대가 로저였다는 거야 뭐, 케일리라면 우연히 마주친 게 로저든 렌필드든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서 넘어갈 만하지만 직업 알선이라니요. 차라리 로저에게 빈대를 붙어 있었다고 했다면 이해가 됐을 텐데요. 케일리가 취업 알선 요구…….”
차라리 스티브 잡스에게 블랙베리를 정가에 팔았다고 말했다면 훨씬 납득이 갈 지경이라며 단호한 표정으로 덧붙이는 화이트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나쁠 것도 없습니다. 뭐, 케일리의 성격 때문에 종종 답답할 때가 있기야 하지만 같이 일하는 데 있어서 크게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비서 하나 없이 출장을 다니는 것과 비교하면 케일리라도 있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답하는 에드워드에 세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로체스터 공작과 스탠, 그리고 화이트 중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이튼이 아내의 병환으로 잠깐 휴직에 들어갔던 당시 잠시간 케일리를 도왔던 전적이 있는 프로 비서 화이트였다.
“하지만 케일리는 제 손으로 자동차 리스도 해본 적도 없는 녀석인데요. 아니, 애초에 세상에 그런 시스템이 있다는 것도 모를걸요. 차고에 들어가면 차가 있는데 리스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호텔 예약도 직접 해본 적 없고 일단 본인이 직접 전화를 받아서 일정을 조정하는 상황 자체를 겪은 적이 없을 텐데 저런 애를 비서로 데리고 무슨 일을 시킨다는 건지…….”
에드워드 또한 화이트의 그 말에는 상당히 공감이 갔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 귀찮은 가족을 납득시키는 게 먼저였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 혼자 스윽 발을 뺀 로저는 한참 떨어진 파티장 한켠에서 아는 얼굴이라도 만났는지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입이 어디까지 찢어지는지 물리력을 동원해 확인해주겠다고 다짐한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화이트의 장설을 일축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니까요.”
“쟤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쉬잖아요. 세 번째였나, 네 번째 회사에서는 주말에 전화 안 받아서 공장에서 물건 잘못 찍은 거 그대로 유통시킬 뻔한 적도 있는 앤데……?”
“저도 주말에는 쉬니까 괜찮습니다. 주말에까지 끌고 나와서 일을 시키는 회사는 당장 그만둬야죠. 그런 블랙 기업들이 모여서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거 아니겠습니까. 노동법은 만인을 평등하게 보호합니다.”
주말만 없겠는가, 밤낮마저 가리지 않는 데다 인간이 아니니 인권도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B 지구의 창립 멤버가 꺼낼 말은 아니었다. 의외로 선전하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케일리 또한 놀랍다는 듯 그를 쳐다보는데, 스탠이 말했다.
“하기야, 그러고 보면 K가 또 시키는 건 잘하잖아요. 안 그래요, 아버지?”
“음. 제대로만 시키면 그렇기도 하지.”
보통 사람 정도의 양심이 있는 로체스터 공작이 둘째 아들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며 떨떠름하게 긍정하자, 동생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스탠이 고개를 끄덕이며 열변을 토했다.
“맞아요, 제대로 시키기만 하면 상상 외의 결과를 가지고 오기도 하잖아요. 왜, K 어릴 때 아버지가 크림슨 의원댁 막내가 사격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클럽에서 주최한 일반인 대상 대회 우승했다는 말 듣고 K한테 사격 시켰던 거 기억나세요?”
당시에만 해도 케일리는 로체스터의 본가 직계들이 걷는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고 있었다. 하루를 분으로 쪼갠 스케줄을 소화하며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던 그에게 사격을 권한 사람은 로체스터 공작 본인이었으며, 그 이유는 대단히 치졸한 것이었다.
지금도 사사건건 부딪히기만 하는 크림슨 의원의 얄미운 얼굴을 회상하며 로체스터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골프장에서 만난 크림슨 영감쟁이가 얼마나 눈꼴시게 자랑질을 해대는지, 그날 귀갓길에 당장 군수업체를 가지고 있는 동생에게 연락을 넣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용병 하나를 고용해 어마어마한 연봉을 제시한 공작은 그를 사격 교사로 무엇이든 곧잘 해내는 둘째에게 붙여주었다.
공작부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행한 그 일은 공작이 생각하는 케일리에게 잘 가르친 일 중 손에 꼽는 훌륭한 결과를 냈다.
“아버지가 크림슨네 막내보다만 잘하라고 개인교습사까지 구해다 붙여주고, K도 시키는 건 꼬박꼬박 하니까 정해진 날에는 꼭 연습 나가는 걸 한 1년 했나? 다음 해에 국가대표로 뽑혀서 기어코 세계 선수권 주니어로 금메달까지 따 왔었죠. 그 집 막내는 그렇게 로비를 해도 아예 대표에 뽑히지도 못했었는데 말이에요.”
스탠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상상 외의 결과가 아니라 상상을 초월한 결과에 가까웠다. 허나 이미 케일리 본인의 입을 통해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 에드워드는 별달리 놀라는 기색 없이 맞장구를 쳤다.
“뭐, 이쪽 일도 대충 그런 셈이었죠. 어느 쪽이냐고 하면 기본적으로 유능한 편인 데다, 상상 불가능한 영역에서 결과를 내기도 하더군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구울을 상대할 때 보여준 그 파격적으로 유능한 모습이라든지.
이어지는 말을 삼킨 에드워드는 굳이 수고로이 속여 넘길 필요도 없이 줄줄 알아서 일을 풀어주는 스탠을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케일리가 내보이는 상상 불가능한 영역은 대부분 비서의 업무가 아니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필드요원의 파트너십은 어떤 면에서 서로를 서포트하는 비서와 비슷한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게다가 바깥에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다지만 영국 정부 산하의 번듯한 직장에 취직한 것 또한 사실이니, 엄밀히 말하면 케일리가 지금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직종과 직업을 알선해준 대상뿐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스탠의 말처럼 옛날부터 케일리는 시키는 건 곧잘 했죠. 그저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문제였을 뿐……. 전 무엇보다 궁금한 게, 대체 어쩌다가 케일리가 취직을 해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취직과 극단적이라는 단어의 상관관계에 대해 잠시간 고민한 에드워드가 느릿한 어조로, 그러나 별달리 반박하는 기색은 없이 평이하게 대답했다.
“보통은 무직이 되어 집을 나간 뒤 영원히 길거리에서 홈리스로 살아가는 게 훨씬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물론 보통 사람한테는 그렇겠죠! 하지만 상대는 케일리라고요. 사업을 하겠다고 한 것도 선택지가 얼마 없어서 차악을 고른 것에 불과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뭐라도 해야 먹고살 수 있겠다고 깨닫는 건 말이 안 되죠. 심지어 그게 케일리라면 더더욱. 차라리 굶어 죽었다는 설이 신빙성 있었을걸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흘러나오는 신랄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반박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케일리 본인마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야, 그를 감싸주기 위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에드워드마저 도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케일리, 정말로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겁니까? 차라리 집으로 그냥 돌아왔으면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사실 리암이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케일리에게 억지로 뭘 시키려고 한 적은 없었죠.”
애당초 가출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나이도 아닐 뿐더러, 그 말을 실행으로 옮길 정도의 의욕과 행동력, 반항심마저 지니지 않은 케일리가 어째서 집을 나갔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것은 화이트뿐만이 아니었다. 터울이 있는 동생을 썩 잘 안다고 자부하는 스탠 또한 궁금함을 담은 눈으로 케일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스탠은 그가 남기고 나간 편지에서 아주 약간의 죄책감을 읽어냈지만,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뿐이었다. 사업 여섯 개를 말아먹고도 눈썹 하나 꿈쩍 앉던 동생이 일곱 개째에 뜬금없이 녀석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양심이라는 개념을 창조해내리라 믿기에, 스탠은 케일리를 너무 잘 알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가 안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잠깐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는 것 정도로 케일리의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을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콧김을 뿜어내며 저돌적으로 묻는 화이트의 기세에 무심결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케일리가 어깨를 움츠렸고, 동감한다는 듯 자신에게 주목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후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화이트의 말대로 뭐라도 해야 먹고살겠다고 생각한 건 아닌데, 어머니께서 한 번만 더 말아먹고 백수가 되면 이번에야말로 선보고 결혼하라고 하셨거든요. 제가 원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블라인드 데이트를 시킬 거라고 하셨는데, 그건 절대 편한 삶은 아니죠. 그걸 견딜 정도라면 차라리 런던 한복판에 서서 제가 원하는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어머니가 아끼는 구두굽에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게 나을 정도라고요…….”
블라인드 데이트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눈에 띄게 침울해지는 케일리의 표정을 바라보며 스탠과 리암, 화이트뿐만 아니라 에드워드마저도 돌려줄 말을 잃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 참 납득이 가는 이유라고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좀 더 나이에 걸맞은 데다 평범한 선택지가 있었을 거라는 충고를 해야 할지 애매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 K. 날 보라고. 나도 너처럼 독신이 최고라고 떠들고 질색팔색 피해 다녔지만, 해보니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니까. 한 사람에게 충실한 삶이 이렇게 충족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리라고 상상이나 해봤겠어?
머레이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네 조각이 나서 마리아나 해구에 처박혀 있었을 거라고. 오른쪽 궁둥짝에 ‘나는 좆대가리 간수도 못하는 머저리입니다.’ 같은 창피한 타투가 새겨진 채로.”
대단히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스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반 이상은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을 케일리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만 되짚어도, 그가 갈아치운 여자의 얼굴과 이름을 맞히는 놀이를 만들면 사흘 밤낮을 놀아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전적의 소유자인 스탠이다. 심지어는 로체스터 가의 주치의에게 지나치게 난잡한 성생활에 대한 주의권고까지 들을 정도로 난잡했던 과거의 그는, 한 달에 한 번 명백히 의도 실린 정기검진을 받지 않으면 유서를 다시 쓰겠다는 다분히 진심 섞인 경고를 로체스터 공작의 입에서 끌어냈을 정도였다.
로체스터 공작의 교육방침이 최대한의 존중과 최소한의 통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행적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우스꽝스러운 말은 농담이나 웃긴 비유가 아니었으며, 대학시절의 스탠이 네다리를 걸치다 그중 두 명에게 발각됐을 때 이마에 새기고 들어온 문구를 그대로 읊은 것뿐이었다.
형광 초록색의 유성 마커로 쓰인, ‘나는 좆대가리로 생각하는 머저리입니다.’ 왼쪽 볼에서 시작해 이마를 거쳐 오른쪽 볼까지 이어진 휘황찬란한 훈장 덕분에 약 2주를 사유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스탠을 떠올리며 케일리는 과연 그에게 결혼을 찬양할 자격이 있을지 잠시간 고민했다.
뿐만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사유지를 뛰며 셀프 마라톤을 하다 웃통을 벗어 던진 스탠의 등허리에는 ‘머릿속에는 뇌 대신 정액이 가득합니다.’라는 초록색 글씨가 장식하고 있었다.
상쾌한 얼굴로 땀을 흘리며 달리는 스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8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강렬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어찌됐건 지금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유일무이하며 마지막을 장식할 것이라 떠벌리고 다니는 스탠 로체스터의, 머레이 로체스터를 향한 충실함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현재의 충실함이 난잡하다 못해 일부 가족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주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을 뿐.
“스탠의 말이 맞습니다, 케일리. 결혼은 좋은 거예요. 게다가 케일리가 결혼하고 가정을 가지게 되면, 물론 배우자 될 분과 상의가 필요하겠지만, 케일리도 지금보다 편하게 살 수 있지 않나요? 결혼 후 받게 될 신탁만으로도 평생은 놀고먹을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이쪽 사람들은 그 신탁을 요상한 사업으로 깎아먹다가 빈털터리가 되는 걸 더 걱정할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하나하나 말아먹다 보면, 아무리 돈이 돈을 모으는 21세기의 이상하고 신비한 금융체계라고 해도 그 화수분이 바닥을 드러낼 게 뻔하니까요.
스탠을 이은 화이트의 진심 어린 충고에 케일리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화이트, 결혼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세요. 하고 나서 벌어질 일들도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요?”
모르는 사람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까지 무엇 하나 편한 일이 없다며 진저리를 치는 케일리의 모습은 자유로운 독신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는 세간의 뭇 독신남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내들은 그가 말하는 끔찍함이 보통 사내들의 끔찍함과 궤도를 달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혼은 무덤이라는 보편적인 관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적응과정을 끔찍하게 귀찮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라는 현실을 말이었다.
“그 말은 꼭, 케일리 네게 평생 결혼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리암 로체스터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 말은, 케일리를 스물여덟 해나 키운 장본인다운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특히나 과거 인류의 반절을 적으로 만들고 다녔던 스탠의 화려한 전적을 고스란히 지켜본 공작은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로, 자식들의 미래보다는 그 동반자의 미래를 걱정할 만큼은 좋은 사람이었다.
바람둥이라는 말로 정의를 내리면 뭇 바람둥이들의 지탄이 터져 나올 정도로 난잡했던 장남 스탠의 과거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차남 케일리 또한 어디를 어떻게 뜯어봐도 일등 신랑감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최소한 케일리의 배우자가 될 가련한 그녀-혹은 그.-가 대단히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 사기결혼을 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으니 그가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해도 난관만 가득한 현실이었는데, 그럴 생각마저 없다는 건 나름대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아니, 사실은 사안의 문제보다도 지나치게 의욕 없는 차남이 남은 평생을 홀로 고독하게 살다가 굶어 죽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 부모의 마음 같은 것들이 리암으로 하여금 상황을 실제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못난 자식 놈 굶어 죽을까 걱정이 되니 결혼을 강요하는 것 또한 애먼 배우자를 희생시키는 것 같아 찝찝한 심경이기는 했지만-공작이 케일리에게 결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던 가장 핵심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싫다는 걸 강제로 보낼 수도 없으니 이거야말로 첩첩산중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한 심경을 담은 리암의 말에, 실제로 결혼 생각이 없던 케일리의 눈가가 움칠 경련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별달리 정곡을 찔린 내색 없이 그저 다소 우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한 케일리가 우물우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꼭 해야만 한다고 해도 블라인드 데이트는 싫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모르는 사람을 계속해서 만나야 한다는 건 고문이라고요. 게다가 결국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블라인드 데이트만 하다 죽는 거잖아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요.”
아내, 데이나가 블라인드 데이트까지 들먹이며 케일리를 협박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차남의 호소에 로체스터 공작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확실히 케일리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날 때까지 죽자고 블라인드 데이트만 시키겠다는 것도 비현실적인 방법이기는 했다. 상대가 스탠이라면 모를까, 케일리인 참에야 차라리 사람 하나를 딱 정해서 옆에 붙여두고 세뇌를 시키는 게 빠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블라인드 데이트로 만나서 뭘 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결정하기까지는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결국 어떤 수를 써도 안 맞는 상대일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게다가 그 일을 결혼상대를 정할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니, 그건 저뿐만 아니라 상대 분에게도 실례잖아요.”
자신의 결혼상대가 될 그녀-혹은 그.-를 배려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실상 케일리가 누구도 배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또한 이 자리에는 없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누가 봐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을 만큼 노골적으로 스스로의 안위만을 챙기는 극단적인 실용주의자였다.
당연스럽게도 케일리는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는 사조의 철학자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방향에서만, 훌륭하리만치 실용적이었다.
만약 대낮에 데스크에 앉아 일을 하다 말고 옆자리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해도 자신에게 피해가 없다면 그대로 앉아서 일이나 계속 하는 것이 케일리 로체스터라는 남자의 실용적인 부분이다.
그런 태도로 인생을 살면서 예의를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예의에 대한 실례가 아닐 수 없었다.
“근데 K, 너 마지막으로 누굴 만났던 게 언제였지?”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스탠이 그렇게 말했다. 연애를 할 때면 100퍼센트의 확률로-현대의 유전자 검사 기술보다 확실한 수치였다.- 상대방의 요구를 수용하기만 하는 패턴 덕분에, 로체스터 일가에서는 케일리가 연애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 바로, 케일리의 외출이었다.
집안행사, 패거리들-주로 대학 사교클럽 출신의.-과의 모임이 없는 날 케일리가 외출을 한다면, 오차 없이 100퍼센트의 확률로 데이트 상대에게 강제징집을 당한 날이었다.
스탠과는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케일리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는 불성실함을 자랑했으며 대신 그 어떤 요구도 거절하지 않는 훌륭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아, 한두 번 만났던 애들은 빼고 정식으로 데이트 했던 애들만.”
로체스터의 직계라는 것과, 대부분의 경우 한 사업체의 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나름대로 사람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 관계가 연애로 이어졌던 적은 드물었다. 당연하게도 결코 먼저 연락하지는 않지만 연락이 오면 무조건 받는 케일리의 독특한 실용주의 때문이었다.
“그러면 스테이시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오래 사귀었던 상대임과 동시에, 최악의 방법으로 헤어졌던 그 이름을 들으며 스탠이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동생이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한 것이 5년 전이며, 그 상대와 결별한 방식 또한 대단히 비정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유쾌한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제를 깐 상태에서도 스탠의 절망감은 상당했는데, 스테이시는 케일리를 납치한 것뿐만 아니라 그녀가 소유하고 있던 남국의 무인도에 가둬 소중한 애완동물마냥 고이 보살피려 했던 화려한 전적의 범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테이시는 잘 지내나 모르겠네. 한동안 연락을 안 해서.”
그러나 정작 범죄의 피해자였던 케일리는 로체스터 가에서 화제로 올리는 것조차 끔찍해하는 과거사를 마지막 연애라고 담담하게 반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하기까지 했다.
“그랬겠지……, 걔 결국 감옥 갔잖아.”
몇 달 살다 금방 나오기는 했지만.
불만스럽게 덧붙인 스탠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케일리를 바라보았다. 연애를 하는 와중에도 오는 연락을 받기만 해서 스테이시를 미치게 만들었던 주제에, 마치 활발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스테이시가 범죄자이며 지나치게 사람을 옭아매는 타입이었다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케일리가 연인으로 두기에 그리 이상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먼저 전화 한 통 하는 법이 없으니 스테이시처럼 연애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타입과는 처음부터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가끔 전화는 왔었는데,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
“케일리 너, 설마 걔 전화를 받았다는 말이야?!”
“전화가 왔는데 예의 없게 바로 끊어버릴 수는 없잖아?”
로체스터 가의 훌륭한 변호사들이 스테이시 측의 변호인단과 10개월에 걸친 투쟁으로 얻어낸 접근금지 법원명령이 허무한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걔 건 끊어도 돼! 걔랑 너 사이에 차릴 예의 같은 건 없어! 걘 널 무슨 가축처럼 끌고 가서 가둬두려고 했던 또라이였잖아!
물론 스테이시에게도 좋은 점은 있었겠지! 근데 마지막이 문제잖아. 끝이 납치, 감금, 체포, 소송이었는데 뭐 좋은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회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라니까!”
대형 로펌을 운영하는 스테이시의 집안에서는 금지옥엽 외동딸을 범죄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로펌의 스타 변호단을 총 동원했다. 사실 범죄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은 스타 변호단이 아니라 유니버스 변호단이 나타나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적은 어떻게든 그녀의 형량을 깎아보겠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있지도 않은 케일리 측의 과실을 어떻게든 만들어내려는 스테이시측에서는 스토커에 가까운 사설탐정을 있는 대로 붙여댔다.
피해 당사자였던 케일리뿐만 아니라, 로체스터 가의 직계 전원의 약점을 캐기라도 하겠다는 양 대놓고 사람을 붙였기 때문에 스탠은 재판이 진행되던 10개월 내도록 강제금욕 수행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당시 문어다리를 넘어서 오징어다리도 우스울 정도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그를 고소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만 해도 한 더즌을 넘겼기 때문에 스탠에게 있어서는 넘치도록 끔찍한 기억이었다.
당시의 부당함에 대해 논하라고 하면 사흘 밤낮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떠들 자신이 있는 스탠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스토커로 신고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법도 존중해주는 사생활을 있는 대로 침해하는 주제에, 법의 보호 안에서 스토커 짓으로 돈을 벌어먹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스탠은 제법 진지하게 생각했다.
“스테이시도 처음부터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게다가 내가 그 섬까지 억지로 끌려간 것도 아니었고……. 그녀는 무인도에 있는 별장으로 여행을 갈 거라고 제대로 설명했었는걸. 바캉스 기간 내내 있을 거라고도 말했고.
물론 거짓말이 섞여 있기는 했고, 끝이 다소 험악하기야 했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잖아.”
“그 거짓말이 바캉스 기간 내내가 아니라 평생이라는 데 걸쳐 있는 게 제일 문제잖아?!”
“형도 연애하면서 매번 거짓말했으면서 스테이시의 거짓말은 비난하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향해 그렇게 묻는 케일리에 스탠이 주먹 쥔 손으로 애꿎은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물론 살면서 거짓말 한번 안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 또한 케일리의 말대로 과거의 여자친구-들.-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범죄로 이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하필이면 스테이시와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옛날 일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 다 지나간 일인데 뭘.”
실제로 짐을 챙겨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테이시의 콘도에서 바캉스를 보낼 계획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케일리에게 있어서, 도착지가 무인도였다는 점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었다. 문제는 그 무인도에서 외부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위성전화를 써야만 했고, 케일리는 그 전화기에 일절 접근할 수 없었다는데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한 채 본인의 명의도 아닌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차명으로 산 무인도에 케일리를 영영 가둬둘 요량으로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였다.
물론 케일리 또한 스테이시가 자신과 상의 한마디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나쁜 일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대단히 좋은 사람이었고 여행 내도록-그 시간이 나중에 납치 감금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사실, 스테이시는 사귀는 내내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해주었던 좋은 연인이었다. 다소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단점만 제외한다면 말이었다.
“아니, K 넌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어. 연인간의 밀월여행이 무인도 납치 감금으로 끝나는 건 아주 드문 경우야. 할리우드에서 알면 당장이라도 각본 쓰고 영화화 하자고 달려들 만큼 이상한 일이라니까!”
눈을 부릅뜬 스탠은 할 말이 많았기 때문에,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그게 해외토픽이 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스테이시 걔네 집안에서 국제 변호사 몇을 들여서라도 거덜이 날 때까지 싸움개처럼 달려들 게 뻔하기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스테이시의 유죄를 주장하는-이미 법원에서 유죄 판결까지 받았지만.- 스탠의 옆에서, 스테이시 일가와의 소송을 일임받았던 화이트가 악몽과 같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탠의 말이 맞습니다. 케일리, 스테이시는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충분히 미친년이었어요.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더 머리가 좋았더라면 그 여행은 분명 완전 범죄로 끝났을 겁니다.
우리는 케일리가 바캉스를 떠나는 줄만 알았지, 그 목적지가 스테이시가 차명으로 사서 추적도 안 되는 무인도인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만약 스테이시의 위성전화를 제시간에 추적하지 못했더라면 케일리는 말 그대로 지구상에서 종적을 감췄을 겁니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그러니 K, 제발 스테이시 걔랑 있었던 일을 로맨스 코미디인 것처럼 슬쩍 넘기려고 하지 마. 그건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호러 서스펜스 미저리였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스테이시의 이름을 부르짖는 스탠과 화이트를 바라보며 케일리는 두 사람의 기억이 자신의 것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탠, 미저리는 장르 아니야.”
“지금 그게 중요해?”
“하지만 스테이시가 나한테 크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는걸. 그녀는 애정표현이 좀 과격했던 것뿐이었다고. ……마지막에 저지른 일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라면 나도 동의하지만, 스테이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잖아.”
“K, 넌 정말이지…….”
그 난리를 겪고도 스테이시를 옹호하는 케일리에 스탠이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분명 사귀는 내도록 케일리에게 간도 쓸개도 빼줄 것처럼 잘해줬다. 실제로 로체스터 가뿐만 아니라 스테이시의 집안에서도 두 사람을 거의 약혼 직전까지 인정했고 집안 사이의 교류도 활발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테이시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과, 그녀의 범죄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만약 스테이시가 케일리를 독점하겠다는 인권을 무시한 포부를 가지고 그를 무인도까지 끌고 가지만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어쩌면 지금쯤 사랑스러운 해파리 부부가 되어 천년만년 잘 살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케일리를 미래의 배우자가 아니라 마치 애완 해파리 대하듯 세상에서 동떨어진 바다 한가운데까지 끌고 가 화려한 별장에 가둬두었고, 그 시점에서 나름대로 사랑스러웠던 두 사람의 로맨틱 코미디는 훌륭한 미스터리 서스펜스극으로 장르를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런던 최대 규모의 로펌과 로체스터 가가 척을 지게 된 케일리와 스테이시의 무인도 납치감금사건 이후로, 로체스터 가에서는 그의 연애사에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가 생길 정도였다-그들은 가능하면 케일리가 쓸데없이 권력 있고 성격 이상한 상대에게 잘못 걸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어쨌든 스탠,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모인 게 아니잖아. 사람을 세워놓고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건 실례야.”
불퉁한 얼굴로 스탠과 화이트를 타박하는 케일리의 옆에 서서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잠자코 듣기만 하던 에드워드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저 화제를 바꾸고 싶은 것뿐이라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이미 들을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았으니 모른 척 넘어가줘도 상관없겠지.
리암과 스탠, 화이트가 미안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에드워드는 괜찮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아들과 비서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리암이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이런, 미처 신경을 못 써 미안하네. 케일리 저 녀석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가출한 뒤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보니 가족 된 입장에서 할 말이 적지 않아 결례를 저질렀구먼 그래.”
“이해합니다. 저라도 행방불명됐던 가족이 무사히 돌아왔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에드워드 본인이 행방불명되었던-어차피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는 감시당하고 있었겠지만.- 입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본다면 대단히 신사적인 대처였다. 로저 애쉬포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상식인 에드워드가 마음에 든 로체스터 공작이 제법 풀린 얼굴로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허허허, 이거 원 케일리 이 녀석이 좋은 상사를 만났어.”
스물여덟 먹은 집 나간 아들을 위해서 사설 용병까지 고용한 과보호 부모에 대한 편견을 깔끔하게 버리게 만드는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별달리 지루하지도 않았다.
자신 또한 동족들 사이에서는 팔불출로 이름 날리는 부모를 가져 케일리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팔불출 부모는 불운의 별 밑에서 태어난 업보였으나, 케일리의 팔불출 부모는 자업자득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로저 그 녀석의 친척 분답지 않게 신사적이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로체스터 공작에 이어 스탠이 정말로 놀랍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것에, 에드워드는 로저가 대체 이번 생을 어떻게 살고 있기에 이런 취급을 받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하지만 굳이 이 상황에서 로저의 편을 들 정도로 자신과 그는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K, 네가 일하는 모습은 대체 어떻게 보여주려는 거야? 사실 네가 취직하려고 한 진짜 이유도 알았으니까 굳이 거기까지 증명할 필요가 없기는 한데……. 게다가 이런 행사에서 기업가 비서가 딱히 할 만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떡할래?”
케일리의 의도대로 결혼과 연애에서 한 발짝 멀어진 스탠이 원래의 화제로 돌아가 그렇게 말하며 힐끗 리암의 눈치를 봤다. 공작 또한 비슷한 생각인 모양으로, 끝이 없을 블라인드 데이트를 피하기 위해 취직이라는 강수를 둔 차남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눈으로 보고 직접 보고 판단해달라고 했었지.
자신이 꺼냈던 해결책을 새삼 떠올린 케일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일단은 시작한 일이었으니 뭐라도 해볼까 싶었다. 지금의 자신은 반인 반 뱀파이어였기 때문에 과거의 순수 인간이었을 때보다 훨씬 의욕이 충만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님 말고.
“아, 에드워드. 혹시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요?”
“……?”
“좀 있으면 경매 시작할 것 같은데요.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주세요, 대신 갔다 올게요.”
마치 ‘이런 게 비서가 하는 일 아닌가요? 뭐든 말만 하세요!’라고 눈으로 말하기라도 하는 양 자신만만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케일리를 마주한 채 에드워드는 잠시간 침묵했다.
크게 잘못된 방향은 아니었지만 케일리는 자신의 진짜 비서가 아니었고, 돈 한 푼 없어 자신의 돈으로 먹이고 입혔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케일리는 한번 오케이를 받은 것을 두 번 세 번 고민하지 않는 타입이 분명했고, 자신은 이미 그를 먹이고 입혔기 때문에 물주 비슷한 존재로 각인된 것 같다. 게다가 별달리 돈에 궁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도 않으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뿐이겠지.
가족들에게서 떨어지면서 그들을 납득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나름대로 머리를 잘 쓰기는 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 저택에 돌아가면 마사지라도 받아야 할 것 같다. 평소 쓰지 않는 안면근육을 하도 움직여 댔더니 볼이며 입가가 당기는 것만 같았다.
“괜찮은 와인이 있으면 몇 병 부탁하지.”
그렇게 대답한 에드워드가 빈 샴페인 잔을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건넸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경매가 시작된 무대 쪽을 향해 걸어가는 케일리를 잠시간 지켜보던 에드워드가 어쩐지 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체스터 일가를 잠시간 마주 보며 저 시선은 뭘 바라는 걸까 생각했다. 혹시 곱게 키운 아들-과 동생.-을 부려먹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케일리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던 에드워드가 문득 눈을 가늘게 뜨고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 가지 않은 케일리의 손목을 낚아채자, 눈을 깜빡이며 더 시킬 일이라도 있냐는 듯 밤색 눈이 의아함을 담고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경매장을 향하던 케일리를 별안간 잡아 세운 에드워드가 리암과 스탠, 그리고 화이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몇 가지 흥미 있는 품목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경매에 참가할까 하는데, 어떻게들 하시겠습니까?”
케일리가 자신의 돈으로 뭘 사재끼든 상관없었고, 그가 경매에서 와인을 고르는 동안 혼자서 로체스터 가를 상대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로체스터 일가는 로저의 과장된 말만큼 귀찮은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면 가족에 대한 다소 어긋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야 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초면인 자신에게 크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을 지키고 있었다-적어도 지키려고 노력은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로저와 비교하면 됨됨이가 괜찮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에드워드가 케일리와 함께 경매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로체스터 일가에게서 떨어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저 혼자 발을 빼고 도망친 로저가 경매장 한가운데에서 희희낙락 신이 나서 숫자를 부르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배알이 뒤틀렸기 때문이었다.
“아, 전 아직 배가 고파서 식사나 할까 하는데 아버지는 어떡하실래요?”
케일리가 비서 일을 잘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 통에야, 굳이 동생의 상사와 나눌 이야기도 없다는 것이 스탠의 생각이었다. 화이트는 어차피 리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테니 따로 물을 필요도 없어 리암의 의사를 묻자, 잠시간 생각에 잠겨 턱을 만지작거린 후 그가 말했다.
“듣고 보니 나도 허기가 지는군. 게다가 케일리 저 녀석이 가출이며 취직까지 답지 않은 짓을 벌인 이유도 확실해졌고, 괜히 졸졸 따라다니면 동행이 불편할 테니 이쪽은 따로 움직이도록 하지. 에드워드, 초면에 실례가 많았소.”
“아닙니다. 이쪽이야말로 갑작스럽게 결정된 출장길에, 사람이 급해 그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가족 분들께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허허, 사람 참 말을 듣기 좋게 하는구먼 그래. 로저가 아니라 에드워드 자네가 애쉬포드 가를 이끄는 게 훨씬 낫겠어. 로저는 아닌 척하면서 결국은 제멋대로 굴다 여기저기 적을 만들고 다니니 정치랑은 영 안 맞아. 적성에 맞지도 않는 정치는 그만두고 사업이나 하러 가라고 꼭 전해주게나.”
확실히 로저는 호불호가 확실하고 그것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에, 정치판에서 시시때때로 손바닥을 뒤집는 너구리들에게 미움을 사기 딱 좋은 성격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로저가 뭐 때문에 어울리지도 않는 정치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건지는 에드워드 또한 의문스러운 점이었기 때문에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말하는 리암을 향해 픽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저가 로체스터 일가를 질색하는 것에 비해, 이쪽 사람들은 의외로 로저를 악우 정도로는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케일리 이 녀석이 워낙 제 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설 만한 녀석이 아니다 보니 이렇게 결례를 범하게 되었네만, 내 그쪽을 시험하려 한 건 아니었으니 너그럽게 이해해줬으면 하네.
염치 불고하고 애비로서 한 가지 부탁을 하자면, 가끔 집에도 들르라고 이 녀석 등도 좀 떠밀어주면 고맙겠네.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집에 있으면 집에 있는 대로 두문불출이고, 나가면 나가는 대로 영 돌아오질 않으니 원…….”
“안 그래도 집에 들르려고 했었어요. 깜빡 수표책도 없이 나와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다음부터 외출할 때는 꼭 카드와 수표책을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니까요.”
에드워드에게 손목이 잡혀 걸어간 만큼 다시 되돌아온 케일리가 리암의 에두른 타박에 정색을 하고 그렇게 대답했다. 결국 돈이 떨어져서 고생을 한 게 아니었더라면 그에게는 굳이 집에 들러야 할 실용적인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곰곰이 되짚으면 페어리의 계약서에 사인을 했을 때부터 시작해,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하려고 했었으니 가족들을 싫어하거나, 아무래도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싫으면 싫은 대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집을 뛰쳐나가 완전히 독립을 하든지, 그게 아니면 등 따시고 배부르게 눌러살면 편할 텐데 그것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다 저렇게 극단적인 성격으로 자랐는지 제 자식이지만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내젓는 리암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케일리가 어쩌다 저런 어른이 됐는지는 그 가족과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빤히 견적이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당사자인 그의 가족들만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심지어는 과보호와 잘못된 육아의 정석을 걷는 로저마저 질색팔색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말이었다.-.
인간들의 기준으로 따지면 상위 0.1퍼센트의 로열 블러드에 속하는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제법 똑똑한 머리와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집안을 이을 필요도 없이 사랑과 존중만 받고 자랐으니 케일리 같은 게 나올 만도 했다.
굳이 무언가에 의욕적으로 도전할 필요가 없는 데다, 가만히 서서 주는 것만 잘 받아먹어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엘리스 코스의 탄탄대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케일리의 선택은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주어진 탄탄대로를 소리 없이 벗어나 굳이 그러고자 한 것도 아닌데 어디 가져다 쓰지도 못할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고 보면 로체스터 가는 자신조차 기억하고 있을 정도의 정치 명문이었는데 케일리가 말한 과거 행적은 회사가 망했거나, 회사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리 오래 겪은 건 아니었지만 그가 정말 사업을 할 의지가 있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운 시점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그에게는 종종 집에도 들를 수 있도록 휴가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해외출장이 잦다 보니 장담드릴 수는 없지만, 저는 그와 일을 하려는 거지 가족에게서 그를 뺏으려는 게 아니니까요.”
반쯤 농담조로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에 리암이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 자신의 차남이 다니게 될 해외출장의 내용이 결코 비즈니스라는 말로 분류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웃음이었지만, 어찌됐건 네 명의 인간과 한 뱀파이어는 화기애애한 웃음꽃을 피웠다.
“이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그래. 경매가 끝나기 전에 얼른 가보게나. 모자란 녀석이지만, 모쪼록 케일리 이 녀석을 잘 부탁하네.”
어린애를 맡기듯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렇게 말하는 리암을 바라보며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찌됐건 가족들에게 연락해 자신의 무사함과 재취직 사실을 알리고 어머니의 블라인드 데이트 러쉬를 피한다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의미의 제스처였다.
“저야말로 좋은 인재를 얻게 되어 행운이었지요.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지나치게 수월하게 풀린 로체스터 일가 처리에 에드워드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경매장 쪽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경매장 쪽에서는 연이어 로저의 낙찰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옛날부터 욕심이 많았고 왜 그런 것까지 끌어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잡동사니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별달리 취미랄 것이 없는 로저의 즐거움이 바로 그의 다양한 컬렉션이다.
새로 얻은 인재(人材)를 이용해 로저의 즐거움을 인재(人災)로 망쳐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의지가 담긴 눈을 한 채, 에드워드는 케일리라는 제법 쓸 만한 바람잡이를 끌고 경매장을 향했다.
◇ ◆ ◇
경매의 결과는 처참했다. 순혈 뱀파이어로 끔찍하게 지루한 세월을 살아온 로저는 그 긴 시간 동안 차곡차곡 재물을 쌓아왔고, 지금껏 돈에 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땅바닥에 메다꽂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째서인지 오늘 하룻밤 자신의 파트너가 된 30만 달러의 여배우-아마 50년 전쯤에는 훨씬 젊고 화려한 미녀였을 것이 분명한.-를 바라보며 울상을 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감명 깊게 봤던 기억이 있기야 했지만, 75세의 인간 여배우와 하룻밤 데이트를 즐기는 데 30만 달러를 턱하니 내놓을 만큼 취미가 고약하지는 않다고 로저는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었다. 심지어 30만 달러를 내봤자 그녀와 잘 수도, 그녀의 피를 빨 수도 없었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점이라고 하면, 콸콸 쏟아져 나간 자신의 생돈이 알츠하이머의 미래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며 주변 사람들이 당연스럽게 그 돈을 기부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주고 있다는 정도다.
그래, 돈만 생으로 날리는 것보다는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낫기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로저는 참으로 억울하고 답답하기가 짝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경매에서 원하는 물건 몇 가지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심지어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은 것들도 아니었다.
오래 산 늙은이의 소일거리처럼 소소한 취미로 모으고 있던 컬렉션에 추가하고 싶어 눈독 들여뒀던 품목의 반을 손에 넣은 참에, 역시나 가벼운 마음으로 임한 다음 품목의 가격경쟁에서 덤덤하게 팻말을 들어 올리는 케일리를 발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싫으나 좋으나 기나긴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덕분에 로저는 케일리가 얼마나 물욕이 없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 주제에 어째서인지 자신이 입찰을 했다 하면 무조건 그보다 정확히 1.3배 비싼 가격을 부르는 모습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알츠하이머도 아니고 루게릭 병으로 유명한 스티븐 호킹이 기증한 개인소장품에 다다라서는, ‘Grayson Tighe’의 한정판 만년필을 원래 가치의 열 배는 넘는 25만 달러에 낙찰받아 가는 게 아니겠는가.
자신이 입찰하는 것만 얄밉게 낚아채 가는 케일리에 불이 붙은 로저는 앞뒤 분간을 못하고 케일리가 뛰어드는 입찰에 죄다 끼어들어 최고가를 불러제꼈고, 종내에는 노년의 여배우와 하룻밤 데이트에 30만 달러를 지불하게 생긴 것이다.
더욱 최악인 것은 눈에 불을 켜고 케일리에게 이기려고 숫자를 외치다 자신이 뭘 낙찰받았는지 깨달은 시점에서, 샴페인 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온 에드워드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미녀 배우와의 하룻밤이라니, 너무 감격한 나머지 집에 돌아가서 집에 돌아가 눈물로 베갯잇을 죄다 적셔놓지는 않을까 걱정이군요.”
물론 절대적인 숫자로만 따지면 새파랗게 젊은 배우이기는 했지만, 물론 미녀이기는 했지만-나이와 상관없이 미인은 미인이었다.- 일흔다섯 살 여배우와의 저녁 데이트를 마치 페도필리아의 소아 성범죄처럼 말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반세기를 풍미한 아이콘이자 마돈나에게 당신이 가당키나 하겠냐며 픽 코웃음을 친 막내아드님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식힐 샴페인 한잔 내어주지 않고 적진을 향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곱게 키운 기억밖에 없었건만, 어째서 이렇게 반항적인 아이로 자라버린 걸까. 심지어는 완벽하게 빚어놨더니 하필이면! 하필이면, 케일리 같은 게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라니…….
울컥 치밀어 오르는 케일리를 향한 분노와 억울함에 로저는 끝물에 접어 들어가는 경매를 내버려둔 채 비척비척 에드워드의 뒤를 따라갔다. 경매장 끝과 끝에 자리한 테이블에서 열 터지게 경쟁을 했건만, 마지막으로 입찰한 여배우와의 데이트권을 빼앗긴 케일리는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로저의 속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썩어 들어갔다.
“아, 에드워드. 그거 가지러 갔던 거예요?”
테이블 위에 내밀어진 샴페인을 바라보며 케일리가 말했다. 에드워드는 제 뒤에 모습을 감춘-감춰지는 덩치도 아닌 주제에.- 로저를 힐끗 쳐다보는가 싶더니 노골적으로 그에게서 떨어져 케일리의 옆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테이블에는 아직 세 자리나 남아 있었지만 앉아 있는 케일리와 에드워드 중 누구도 자신에게 의자를 권하지 않았다.
잠시간 씩씩 콧김을 내뿜은 로저가 짜증 섞인 동작으로 거칠게 의자를 잡아 빼 털썩 주저앉는데, 마침 눈높이가 같아진 순간 그의 눈에 매우 기묘한 광경이 들어왔다.
……내가 진짜로 나이를 먹었나?
외견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노화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순혈 뱀파이어가 노안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이상한 모습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대체 무슨 개 같은…….
하도 어이가 없으니 말도 나오지 않아 입만 쩍 벌리는 로저에게는 다행으로, 케일리 또한 드물게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반응을 돌려줘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별세계로 떠났던 로저의 정신이 지상 위로 돌아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빨대……네요.”
“잘 아네.”
“이거 샴페인은 맞죠?”
“그럼 내가 너 마시라고 진저에일을 가지고 오겠냐?”
별 웃기는 걸 다 묻는다는 양 눈살을 찌푸린 에드워드는 샴페인 안의 탄산방울이 달라붙어 슬금슬금 떠오르기 시작하는 빨대를 쑤욱 눌러 꽂으며 케일리가 편하게 그것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가까운 곳까지 밀어주었다.
일단은 상사였고-오늘 밤만이라고는 하지만.-, 상사가 주는 샴페인이니 받아 마셔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케일리는 아리송한 얼굴을 한 채 잔으로 손을 뻗었다.
“손대지 말고 그걸로 마셔. 그러라고 시끄러운 애새끼들이 있는 데까지 갔다 온 거라고.”
이유가 뭘까. 애새끼들처럼 칠칠하지 못하니 빨대나 쓰라는 완곡적인 표현인 걸까?
하지만 이건 지금까지 에드워드가 보여준 그 어떤 비꼼보다도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완전히 절망한 기색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테이블에 얼굴을 박는 로저를 무시한 채 케일리가 말했다.
“왜요?”
왜 갑자기 샴페인을 가지고 온 건가요, 왜 빨대를 꽂는 건가요, 왜 손을 대면 안 되나요 등등의 수많은 의문을 함축한 간결한 물음이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몫으로 가지고 온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목마를 거 아냐. 그리고 너 아까도 차 문에 손자국 냈잖아. 여기서 잔 깨면 꽤나 귀찮아질걸?”
저 멀리서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 리암 로체스터를 시선으로 가리킨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그의 심오한 뜻을 이해한 케일리는 자신의 갈증까지 세심하게 챙겨주는 에드워드에게 “그러고 보니 목이 마른 것 같네요.”라고 대답하며 빨대로 입을 가지고 갔다.
“시킨 건 다 했고?”
“아, 네. 에드워드 말대로 로저가 입찰하는 것만 전부 1.3배로 부르니까 나중에는 제가 입찰하는 것도 전부 낙찰해 가더라고요.”
더 완벽하게 로저를 엿 먹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케일리에게 적대적인 로저를 보며 저걸 이용해볼까 착안했던 자신의 선견지명에 스스로 감탄하며 에드워드는 빨대로 샴페인을 마시는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파트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밀빛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바라보며 로저는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집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쟤들 지금 뭐 하냐? 왜 저 상사라는 놈이 K한테 빨대를 꽂아줘? 무슨 메시지인가? 얘한테 빨대 꽂았다는? 근데 K 쟤는 수표책도 두고 갔다며. 쟤한테 빨대 꽂고 빨아도 아무것도 안 나올 텐데?”
어느새 놈으로 격하된 에드워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스탠이 경악 섞인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넉넉히 배를 채운 후 디저트로 목표를 옮긴 그가 들고 있던 카나페를 툭, 떨어뜨린 것을 타박하는 이는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낫살 못하는 스탠의 예의범절을 지적했을 리암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카나페의 행방을 목격하지 못했고, 손사래를 치며 하던 식사나 계속 하라던 공작의 호의를 받아들여 스탠과 함께 디저트를 탐닉하던 화이트는 스탠의 경악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저도 저게 뭐 하는 짓거린지 보기만 해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스탠이야말로 나보다 케일리를 오래 봤으니 알아서 생각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스탠의 손에서 떨어져 자신의 발치에 멈춰 선 카나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화이트가 그렇게 말했다. 리암 로체스터의 보좌관으로 일한 지 벌써 10년이 지나갔고, 로체스터 가의 자식들을 청소년기부터 지켜봐온 그의 입장에서도 눈앞에 펼쳐진 것이 대단히 받아들이기 난해한 광경이라는 것만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화이트가 웬만해서는 당황하거나 동요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스탠은 어딘지 균열이 간 그의 무표정을 바라보며,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게 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조금 안심했다.
자신의 눈에야 언제까지고 어린 남동생이었으며, 어딘지 나사가 빠진 구석이 있어 늘 걱정이 되는 녀석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탠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만약 케일리가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였다면 저 모습은 평범한 배려이며 호의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차라리 백발 성성한 노인이라 샴페인 잔을 들지도 못할 만큼 노쇠했다면 참으로 배려심 깊은 청년이로구나, 감탄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케일리는 곧 서른을 목전에 둔 청년이었고, 심지어는 빨대를 가져다준 것이 부하가 아니라 그의 상사이기까지 했다. 이상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가려고 해서 물어본 거거든? 나는 블라인드 데이트가 싫었다는 K의 말은 믿지만, 로저는 반 정도밖에 안 믿고 무엇보다 내 눈에 보이는 장면이 너무 이상하다고. 근데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는 생각하기 싫은 이상함이야. 화이트 넌 어떻게 생각해?”
일반적인 로체스터 가의 일원 정도로 가족을 아끼는 스탠의 물음에 화이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역시나 다 큰 성인 남성의 샴페인 잔에 빨대를 꽂아주는 건 확실히 이상한 장면이 맞았다. 그 두 사람의 관계에 무엇을 대입하든 그 이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동감입니다. 저래서야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니라 마치 연이…….”
스탠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정확히 짚어낸 듯 화이트가 미간을 좁히며 그렇게 말했고, “안 돼, 그 이상 말하지 마.” 하는 어딘지 겁에 질린 목소리가 단어를 완성하기 직전에 끼어들었다.
심지어는 화이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려던 순간, 덥석 빨대로 샴페인을 마시기 시작한 케일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그를 향해 손을 뻗는 게 아니겠는가. 마치 참 잘했다고 칭찬을 하기라도 하는 양 먼발치에서 보기에도 대단히 다정한 손놀림으로 그는 케일리의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사람이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별달리 막을 생각도, 잡을 생각도 하지 않는 케일리에게는 익숙했다. 하지만 케일리가 이상한 것과 에드워드의 이상함은 별개의 문제다. 케일리는 원래 이상했지만, 에드워드는 그렇지 않았다. 어디를 어떻게 뜯어봐도 두 사람의 모습은 일반적인 상사와 부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분명 경매장으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지극히 상식인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이 빨대를 이은, 쓰다듬기로 완전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머리를 부여 쥐고 괴로워하는 로저의 이상 행동은 거의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같은 생각 중일 거 아닙니까? 왜 막고 그럽니까?”
두 사람의 사이를 거의 확정지은 화이트의 핀잔에 스탠이 으으, 침음성을 냈다.
“말로 꺼내면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어지잖아! 난 옛날부터 좀 의심하고 있었다고. 애초에 K가 라일라를-그의 첫 여자친구였다.- 집에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걸?”
“뭐, 그렇기야 합니다만 지금 그 말은 좀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거부감도 없지 않았습니까? 왜 갑자기 그런 반응인지 이해가 안 되네요.”
“거부감은 없어! 내 문제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상대가 K라는 것뿐이라고. 잘 생각해봐, 화이트. K 쟤는 여자랑 만날 때도 늘 끝이 안 좋았다 그 말이야.-그렇다고 해서 사귀는 동안은 괜찮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심지어는 꼭 범죄나 폭력이 관련된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전적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연애사였는데, 거기에 남자까지 참전을 한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안 되고 배겨?”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최소한 여자애들은 좆방망이를 이용해서 쟬 학대하지는 못할 것 아니야? 안 그래?” 하며 동의를 구하는 스탠을 향해 화이트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성차별에 기반한 편견이라는 것을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잠시간 고민했다.
물론 스탠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여자들이 케일리에게 그런 걸 휘두르고 싶어 하더라도 신체구조상 불가능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방망이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케일리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건 섣불렀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훌륭한 시스템 안에서라면, 손으로 잡고 휘두를 수 있는 것들도 얼마든지 손에 들어온다.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케일리에게 휘두를 수 없으리라 단언하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충격적이다……. 우리 K는 여태껏 거짓말 한번 안 하는 착하고 곧은 애였다고. 화이트, 넌 어떻게 생각해? 쟤가 취직했다고 한 것도 다 거짓말이었을까?”
스탠이 도끼눈을 뜨고 케일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용태를 살피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남자의 모습은 노골적이기 짝이 없었는데, 마치 로저와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사실 그 삼각관계는 언뜻 보기에 로저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결과로 때마침 결말을 맞은 것처럼 보였는데, 오래전 잠시간 케일리를 클로짓 게이로 의심한 적이 있었던 스탠의 눈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냈다.
손발 멀쩡히 달린 다 큰 케일리에게 손수 샴페인을 가져다 바치는 걸로도 모자라서, 편하게 마시라고 빨대를 대령하고 그걸 마시는 웃기지도 않는 꼴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일련의 광경에서 스탠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쟤 대학 들어가기 전에 잠깐 사귄 애도 저 남자랑 비슷한 짓 했던 거 기억나?”
“라일리 햄슨이요?”
“맞아, 걔. 왜, 라일리 걔도 막 옷까지 지가 입혀주려고 했다잖아. 밥 먹을 때도 K는 손 하나 까딱 못하게 하고 휴가 가서는 아예 호텔에만 처박아놓고 인형놀이를 했다며? 근데 K 쟤는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고 가만히 내버려뒀었잖아. 내 생각에는 걔가 스테이시의 알파 버전이었던 것 같아.”
“알파 버전은 뭡니까?”
“라일리와 헤어지고 나서 K가 옛날 일들을 말해주기 전까지 우린 라일리가 그런 애였다는 걸 까맣게 몰랐잖아. 라일리 걔가 알파 버전이었다면, 스테이시는 업그레이드형 베타 버전이었지. 걔는 자기가 그렇다는 걸 대놓고 보여줬으니까 말이야. 덕분에 우리가 미리 조심할 수 있었던 거라고.”
심지어 라일라랑 헤어지고 나서 걔의 실체를 알게 된 것도 거의 우연이었어. 그 말이 나왔을 때, K가 우리한테 처음부터 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거든. K 쟤는 자기가 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도 모른 채 당하니까 문제인 거야.
스테이시보다 전에 사귀었던 수줍은 인상의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를 떠올린 스탠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라일리 햄슨은 겉모습은 장미꽃 하나 꺾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힐 것처럼 가녀린 주제에, 속은 시커매 모든 사람에게 평등히 주어지는 인권마저 간단하게 유린하던 대범함을 완벽하게 숨기는 재주까지 가진 대단한 여자였다.
“난 가끔 라일리가 우리 애 끌고 도망가서 평생 감금해놓고 피둥피둥 살만 찌워놓고 보기 싫어지면 어디 하수구에 가져다 버리는 건 아닌지 악몽까지 꿨다니까!”
“선례가 있으니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케일리도 성인이고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연애사야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인데, 문어다리 오징어다리를 뻗치고 다녔던 스탠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영 모양이……. 게다가 저 남자는 라일리나 스테이시랑은 다른 것 같은데요?”
“빨대 꽂아주는 게? 머리 쓰다듬는 게? 헉, 지금 쟤 샴페인 잔도 못 잡게 우리 K 손 붙잡은 거 보여? 왜 저러는 거지? 샴페인 잔 드는 것도 마음에 안 들 정도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야? 그게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일단 좀 진정하시죠. 잘 보면 그냥 귀여운 연인 같아 보이기도 하잖습니까?”
“넌 내 마음을 이해 못해! 로저를 보고 좀 배워보라고, 저렇게 괴로워하잖아! 아니…… 근데 로저 쟤는 뭐가 마음에 안 들기에 저렇게 온몸으로 싫어하는 거지? 쟤 진짜 우리 K 좋아했던 거 아니야?”
이미 스탠의 머릿속에서는 기나긴 치정극이 시작되고 끝나 대단원의 막을 내린 모양이었다. 혼자서 멀리도 나간 스탠을 바라보며 화이트는 테이블 위의 카나페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빨대와 머리 쓰다듬기, 공중의 면전에서 애정을 과시하는 손잡기가 다소 눈꼴시기는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모시는 상사의 아들이 사귀는 상대의 성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케일리에 한해서 관심이 있는 부분을 들자면, 화이트는 그가 가능하면 스토커나 납치범과 사귀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다. 그건 리암 로체스터를 보좌하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껄끄러운 스캔들이었으며 공작의 이미지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도 확실치 않은 이레귤러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K는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어. 그리고 쟨 꼭 어디 하나 나사가 빠진 이상한 애들한테만 사랑받는다고. 우리가 조심해야 해.”
“거, 케일리도 다 큰 성인인데 사생활은 존중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여동생이 라일리 같은 놈팡이한테 걸려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라일리 같은 남자를 말하는 거라면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 같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테이블 위에서 꼭 잡은 두 사람의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기 때문에 스탠은 빠득빠득 이를 갈며 눈에 불을 켜고 그 모습을 집착적으로 쳐다보며 끝없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대단히 피곤하고 긴 밤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화이트는 새 샴페인 잔을 들었다.
◇ ◆ ◇
“다 좋으니까 제발 내 눈앞에서만은 그러지 말아줄래?”
내가 끼어들어봤자 너희가 내 말을 들어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제로 뜯어놓을 수도 없으니까 거기까지는 이해한다고 쳐. 근데 굳이 내 눈앞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케일리 로체스터, 넌 그러면 안 되지. 에디는 막 성년이 된 어린애라 어쩔 수 없지만, 넌 다 큰 어른이잖아. 그러니 네가 앞장서서 나잇값을 해 보이란 말이야.
우울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비 맞은 땡중마냥 끝도 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로저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케일리는 자신이 시키는 대로 기가 막히게 로저의 경매를 방해했고, 그는 원하던 물건을 죄 놓친 것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을 여배우와의 데이트까지 낙찰받아 생돈을 날렸다. 이런 걸 보고 훌륭한 파트너십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에드워드는 로저가 들으면 게거품을 물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며 싱글싱글 오랜만에 기분 좋은 기색을 만면에 드러낸 채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자선경매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희생한 이타적인 여배우는 오늘 경매에 시간을 기부한 셀러브리티 중 구매자와 가장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진기록을 달성했다-물론 실제로도 나이 차는 많이 났다. 로저가 훨씬 많다는 점에서.-.
경매가 끝나고 낙찰받은 물건에 대한 대금한 후 케일리가 오기 전 낙찰받은 컬렉션 몇 가지와 여배우를 데리고 테이블로 돌아온 로저는 자신이 그녀의 시간을 산 이유는 자선행사에 기부를 하기 위함이었지, 데이트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며 예의 바르게 설명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십이 넘게 차이가 났고, 흑심을 가지고 참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배우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로저가 낙찰한 금액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콧대 높은 과거의 스타 배우는 자신의 시급이 너무 비싸서 미안하다며 윙크를 하며 위트 있게 웃어 보였고 작별인사로 로저의 볼에 가볍게 키스한 후, 별달리 불쾌한 기색 없이 동행을 찾아 멀어져갔다.
케일리가 도착하기 전 경매에서 사들인 제법 마실 만한 와인의 코르크를 그 자리에서 딴 로저는 빈 샴페인 잔에 연거푸 따라 마셨다.
혼자 와인 두 병을 다 비운 후에도 취한 기색이 없었기 때문에-애초에 뱀파이어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테이블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끔씩 고개를 갸웃하며 로저와 그가 딴 병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와인이 아니라 포도 주스를 마시는 건지 겉으로 보기에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짱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저 혼자 자작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대단히 우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로저를 케일리가 딱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울컥 알코올의 힘을 빌려 테이블을 뒤집고 달려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그랬다가는 가출했다 돌아온 아들의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을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마음을 접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저는 에드워드가 평범한 뱀파이어 정도로 인간의 피를 마시게 된 것만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상대가 케일리라는 게 유일무이한, 혹은 대부분의 문제였지만.-.
그사이 로저는 세 번째 코르크를 땄고-심지어 맨손으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로저의 손에서 와인병을 빼앗았다.
다시 잔을 채우려다 말고 들고 있던 와인을 병째로 빼앗긴 로저가 범인을 쳐다보았다.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와인 병을 쥔 에드워드를 향해 로저는 울먹울먹 말했다.
“에디…… 날 걱정해주는 거야?”
그런 로저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웃은 에드워드는 와인 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케일리의 빈 샴페인 잔에 그것을 따라주었다. 심지어는 정말로 와인을 탐내고 있었던 건지, 눈을 크게 뜬 케일리가 이내 에드워드를 향해 조금 풀린 얼굴로 웃어 보였다. 다 큰 남자가 빨대로 와인을 마시는 볼썽사나운 꼴을 바라보며, 로저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는데 어쩐지 기분 나쁜 대화가 흘러간 것처럼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도원결의를 맺은 수염 장군에게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것처럼 충격에 빠진 영혼 없는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로저를 향해 에드워드가 쯧쯧, 혀를 찼다.
“착각도 병이라던데……, 말술을 들이켜도 멀쩡할 몸을 가지고 왜 걱정을 바랍니까? 그런 걸 원하면 요양원에나 들어가시죠. 거기서라면 최고령자로 원하는 만큼 걱정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왜 내 술을 걔한테 줘?”
“얘가 마시고 싶어 하는 것처럼 쳐다보는데, 친구씩이나 되면서 그것도 못 나눠줍니까?”
“쟤는 친구가 아니라 웬수야, 웬수!”
“돈도 많으면서 쩨쩨하게 굴지 마시죠.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나누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케일리에게 자, 얼른 마시라며 잔을 밀어주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로저는 온몸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쟤도 돈 많은데! 왜 나한테만! 나이 가지고는 뭐라고 하면 안 되지! 같이 먹어가는 사이에!”
할 말은 많았지만 기껏 돌아온 막내아들에게 괜한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로저는 케일리의 몫만큼 가벼워진 와인 병을 붙잡고 눈물을 삼켰다. 세상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었다.
“케일리 쟤도 좀 있으면 서른이라고…….”
어림잡아도 케일리의 다섯 배는 살았을 막내아들을 갓 성년이 된 어린애 취급까지 해가며 부당함을 호소하는 로저를 향해 에드워드가 하, 헛숨을 내뱉었다. 사람이든 뱀파이어든 염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자신의 부친에게는 그게 없었다.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나이는 절대치로 따지는 겁니다.”
“개도 여덟아홉 살 먹으면 노인 취급하잖아. 그런데 왜 우린 그러면 안 돼?”
“개랑 같은 수준이라고 인정하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
힘없이 소리를 지른 로저에게서 흥미를 잃은 에드워드가 흥, 코웃음을 쳤다. 쪼로록, 빨대를 이용해 몇 모금 와인을 마신 케일리가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다 말고 로저를 향해 말했다.
“로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잖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거 마셔봐. 향도 괜찮고 뒤끝도 깔끔하네. 어디 농장 거야?”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을 한 로저가 대답했다.
“난 네가 정말로 싫어.”
“그렇게 꼴 보기가 싫으면 데이트나 가지 왜 남아서 그럽니까? 고작 한 세기 사이에 새로운 길에 눈뜨기라도 했습니까? 왜 사서 스트레스 받을 짓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에드워드의 말은 백번 옳았다.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막내를 바라보며 로저는 억울함을 금치 못했다. 사실 자신을 향한 에드워드의 태도는 실상 50년 전과 100년 전을 되짚어봐도 지금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로저가 억울함을 느끼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지금까지 막내아들의 귀여운 반항과 무시와 경멸과 사춘기적 까칠함을 자식과 부모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올바른 육아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그에게는 이 상황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케일리라는 외부요인 때문에 에드워드가 자신을 박대하는 건 억울했다. 일단 자신은 이번 로저 애쉬포드로서의 삶을 살며 흐물흐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케일리 로체스터를 무려 친구로 대하는 엄청난 호의를 베풀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았으니 이 분노는 정당했다. 적어도 로저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난 매저가 아니라고! 게다가 너희 둘만 놔두고 갔다가는 하룻밤 내내 나 없는 데서 무슨 짓을 할지 자꾸 생각날 것 아냐! 그게 더 끔찍해. 차라리 나 보는 데서 사고를 치는 게 훨씬 낫지, 암.”
일단은 에드워드의 안에서 자신이 변태적인 길에 잘못 들어섰다는 오해가 확립되지 않도록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별달리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에드워드는 한심하다는 양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고 케일리 또한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에 로저의 분노는 거세지기만 했다.
“그거 안 마실 거면 나 더 마셔도 돼?”
케일리는 로저가 경매에서 낙찰받은 와인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새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우고 이미 딴 병을 노리고 있었다. 로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병을 숨기려는데, 에드워드가 먼저 손을 뻗어 저지했다.
결국 남은 와인마저 케일리에게 빼앗긴 로저는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끔찍한 바다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처참한 얼굴로 자신의 와인을 빼앗아 케일리에게 퍼주는 눈꼴신 장면을 끝까지 목격해야만 했다.
“에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물론 지금까지도 막내아들과의 사이는 비 온 뒤 장마, 때때로 태풍이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에드워드는 자신과 연관되는 것 자체를 상당히 귀찮아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일은 거의 없었다-사실 지금까지는 거의 반대의 입장이었다.-.
설마하니 케일리를 이용하면 자신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걸 이용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고 로저는 생각했다. 소중한 막내가 케일리에게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야, 반항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게 로저에게는 훨씬 행복한 결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면 혼자 살자고 도망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오늘의 에디가 돌도 갈아내는 다이아몬드 사포처럼 까칠하게 구는 이유를 알아낸 로저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변명할 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디, 너만 남기고 갔다고 해서 쟤들이 널 잡아먹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저래 봬도 인간치고는 교육을 잘 받아서 초면인 상대한테는 엄청 내숭 떨거든.”
본인이야말로 순혈 뱀파이어인 주제에 인간을 상대로 ‘잡아먹히는’ 것이 정말로 무섭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떠는 로저에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었다. 확실히 한 세기가 지나면 아무리 오래 사는 종이라도 변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인간 세계에 지나치게 적응한 로저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들이 당신은 잡아먹는답니까?”
그게 정신 좀 차리라는 비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로저는 애써 모른 척 너스레를 떨었다.
“으으, 뼈라도 추리면 다행이지. 저 집안이랑은 엮여서 일이 잘된 역사가 없다니까. 게다가 이번 일에서는 너도 그 원인 중 하나니까 이 정도는 봐달라고.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제 쓸데없이 날 세우고 싸우는 건 귀찮단 말이야. 안정이 최고야, 안정이. 까딱 잘못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면 얼마나 일이 귀찮아져? 그러니 지금 포지션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로저에 흥미가 떨어진 에드워드는 더 이상 그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꿀꺽꿀꺽 제법 빠른 속도로 와인잔을 비워가는 케일리가 마치 제법 아끼는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양, 잔에 와인을 채워주는 아들내미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인간들 중에도 이런 경험을 하는 부모는 얼마든지 있잖아. 베이컨을 만들기 위해 사온 아기 돼지를 소중히 아끼고 돌보는 자식 놈을 보면서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심지어 어차피 베이컨인 주제에 아빠인 나보다 소중한 것처럼 다뤄지는 걸 보면 짜증나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다시 한 번 에드워드와 케일리를 바라보자 어차피 먹이밖에 못 될 걸 가지고 옆구리에 끼고 아끼는 것 같아 어딘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정 주다 나중에 쟤 죽으면 어쩌려고…….
처음으로 제 것이 된 가축을 지나치게 아껴 키우는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축산업자와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며 로저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우리 막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에드워드가 같은 순간, 로저에 대해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모르는 안타까운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