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41)

#Mission5. Passion Week in NYC (1)

“곧 착륙이다.”

뉴욕의 항공에 접어들자마자 귀신처럼 눈을 뜬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다.

뱀파이어는 수면으로 체력을 회복하지는 않는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시간 맞춰 자는 걸 좋아했다. 보통의 인류가 ‘내 취미는 잠이야.’라고 하면 그건 취미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라는 타박이 돌아가겠지만, 뱀파이어들의 ‘내 취미는 잠이야.’는 어딘지 진짜 취미처럼 즐길 만한 것이 아닐까 케일리는 생각했다.

비행시간 내내 푹신한 좌석에 드러누워 눈을 붙인 에드워드와는 달리,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어린이를 위한 세계의 신화&몬스터 백과사전’을 정독한 케일리는 이렇게 다양한 이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모른 채 살아왔는지를 반성했다. 그 책의 반절 이상이 픽션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에드워드가 깜빡 잊고 전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모르는 덕분이었다.

열 시간이 넘도록 사건파일과 백과사전을 읽느라 눈이 뻑뻑했다. 게다가 계속 한 자세로 앉아 있었던 탓에 케일리는 찌뿌듯한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뱀파이어 화의 좋은 점 중 하나에는 어지간해서는 몸이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에도 찌뿌듯하지 않은 몸이라니……. 자신과 같이 욕심이랄 게 없는 사람마저 매혹시킬 만큼 대단한 뱀파이어의 매력이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그는 보통 사람들이 찌뿌듯하지 않은 몸보다는 영생에 더 매력을 느낀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종들은 전부 진짜 있는 건가요?”

건물 몇 채를 합친 것보다 커다란 크툴루의 삽화를 펼쳐든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잠시간 침묵했다.

용은 있지만 크툴루는 없다는 이야기는 이빨 요정은 있지만 산타는 없다는 것을 어린아이에게 납득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크툴루는 없는 것보다 좀 더 심오한 경지에 있었지만 어쨌든 케일리가 뱀파이어만큼 산다고 해도 만날 일이 없을 테니 그게 그거다.

심지어 인간 아이들은 결국 이빨 요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에 어른을 향한 원대한 실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어차피 그 녀석들 또한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 이빨 요정은 없다는 거짓부렁을 퍼트리고 다닐 테니 실망하거나 말거나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지만.

“그 책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상상 속의 생물을 모아놓은 거지, 실존하는 이종을 정리한 게 아니야. 하지만 그중에서 실존하는 것들도 꽤 있으니 적당히 파악해두는 건 앞으로의 업무에 도움이 되니 읽어보라고 한 것뿐이라고.”

“그럼 저는 앞으로 이 중에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 건가요?”

“지금 나더러 천 페이지가 넘는 책에 있는 거랑 없는 걸 표시해놓으라고 하는 거냐?”

“그건 좀 귀찮을 것 같네요. 그냥 이대로 살게요.”

어차피 실존하는지 아닌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기는 해요.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슈뢰딩거의 종족으로 남겨놓는 거랑 별반 다를 바도 없겠고…… 문제없네요.

중얼거리며 덧붙인 케일리가 두꺼운 몬스터 백과사전을 덮어 빈 옆 좌석에 내려놓았다.

기장의 안내가 흘러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에 착륙한 비행기의 동체가 제법 흔들렸다. 완전히 멈춰 선 비행기의 좌석에서 일어선 케일리와 에드워드는 로저가 고용한 그의 취향이 전적으로 반영된 단정한 금발을 틀어 올린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출구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그 문으로 왔으면 더 편하고 빠르지 않았을까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렇게 물은 케일리를 돌아보며 에드워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문은 국경 밖으로는 못 나가. 그런 제약이 걸린 마법이라.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지.”

“국제법…….”

에드워드의 입에서 나온 국제법은 아무래도 자신이 아는 국제법과는 다른 물건인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상식선에서 국제법 안에 마법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뒷세계에는 뒷세계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라고. 게다가 이동마법은 설사 시전자가 용이라고 해도 공간왜곡의 여파를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들켜. 그러니 등록된 이종들은 무허가로 이동마법을 쓰지 않고, 등록되지 않은 이종들은 이동마법을 쓴 시점에서 정체를 발각당할 테니 안 쓰겠지.”

그럴듯하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상상력으로 쓰인 SF 작품에서도 공간이동-워프라든지.-은 언제나 상당한 리스크를 품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가령 브라질에서 런던으로 공간이동을 하려던 사람의 대장이 위치한 자리에 책상이 있었다든지……. 마법이라고 해서 그런 위험성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말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은 다 읽었고?”

“네. 상당히 특이한 사건이네요.”

“이종이 연관된 사건은 다 그래. 그것 때문에 이종이 엮였다고 특정 지을 수 없는 이상한 사건들도 보통 우리 쪽으로 떨어지지. 어쨌든 이번 사건은 용의선상에 오른 게 둘뿐이라 우리는 라이칸 쪽을 맡을 거고, 현지요원이 인간 마법사를 쫓을 예정이야.”

라이칸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과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는 에드워드의 반응에 케일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라이칸은 간단한 상대 아니었나요?”

“연수 때 본 걔들? 그건 갓 알 깐 피라미 새끼떼라 그런 거고. 뱀파이어인지 인간인지도 구분 못하는 거랑 뭘 비교해. 라이칸도 오래 산 것들은 안 그래. 아주 영악하고, 상대하기 귀찮지.”

“늑대는 알 안 까는데요.”

“어쨌든, 이번에 상대할 라이칸은 귀찮은 놈이라고.”

“어떻게 귀찮기에 그래요?”

“러시아의 제일 큰 부족 족장 외동아들.”

그러니까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것은 유럽 등지에서 내장을 깨끗하게 빼 가는 대량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이자 러시아에서 가장 큰 라이칸 부족의 외동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케일리는 그게 어떻게 귀찮은 일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연수에서 만난 라이칸 중 시릴이라는 녀석도 북부 라이칸 족장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에드워드는 흡사 뒷마당 똥개를 대하듯 처리했었다.

같은 부족 족장이라도 중요도가 다를 수 있는 건가.

하기야, 북아일랜드와 러시아의 늑대는 생태가 다를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름대로 납득한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연수에서 본 녀석들이랑은 비교 못해. 이번에 상대할 놈은 굳이 따지면 왕자. 너희들의 개념으로 따지면 정통 라이칸 계보에서 두 번째로 귀한 신분이시지. 좀 족장이 죽으면 첫 번째가 될 테고.”

아하.

아무래도 라이칸들은 러시아 혈통을 높게 쳐주는 모양이었다. 인류의 흐름과는 상반되는 흥미로운 평가가 아닐 수 없었다.

“그거로도 모자라서 걔들의 문제는 부족 전체가 레드 마피아라는 데 있지.”

이어진 에드워드의 말에 케일리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라이칸 계보 중 가장 귀한 신분은 러시아 출신이고 그 부족의 정체는 레드 마피아……. 그것 참 무시무시한 집단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에드워드가 짜증을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건 참……, 이종들도 두 집 살림 하느라 바쁘겠네요.”

“다른 이종들은 무리 짓는 습성이 없어서 그렇지만도 않아. 하지만 라이칸은 진짜로 귀찮다고. 어려운 상대라는 게 아니라 귀찮은 애들이지.”

확실히 그의 말대로 요정이나 용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은 별로 상상이 되지 않았다. 유니콘이라든지 구울 같은 이종도 떼를 지어 생활하는 이미지는 없으니 부족 단위로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다는 라이칸이 이종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것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귀한 왕자님이 왜 범죄를 저지르는 걸까요?”

라이칸 사이에서 귀한 혈족인 것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정부보다 큰 힘을 지녔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레드 마피아의 본거지라면 굳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장기를 척출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장기가 모일 텐데.

의아한 얼굴을 하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걸 알면 내가 개지, 뱀파이어겠냐?”

“늑대는 개가 아닌데요.”

“개과 개속이잖아. 그게 개지.”

어지간히 라이칸이 싫은 모양이었다.

설치된 계단을 내려가자 공항 건물 쪽에서부터 비행기를 향해 검은 세단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금세 에드워드들의 앞까지 도달한 세단의 조수석에서 짙은 초콜릿색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장신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헤이, 난 NYC 특설지부 필드 총 책임자 데이브 샌델이야. 그쪽이 에드워드?”

그가 가리킨 쪽은 케일리였다.

“케일리입니다.”

가볍게 오른손을 들며 그렇게 말한 케일리를 이어, 에드워드가 말했다.

“내가 에드워드.”

케일리로 착각당한 것에 불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가벼운 데이브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 에드워드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서로 정체를 아는 사이였으니 인간을 상대로 예의를 차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의 낮고 느릿한 목소리에서 불쾌감을 읽어낸 것인지, 데이브가 미안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일정이 바뀌어서 두 명 보낸다고 했지. 미안, 얼굴 때문에 잠깐 헷갈렸지 뭐야. 난 또, 어디서 그럴듯한 모델을 구해온 건가 했지.”

그 말에 에드워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모델?”

“이번 임무, 잠입해야 하잖아. 편하게 끼어들어 가려고 모델 하나 고용해 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그쪽은 모처럼 잘빠진 얼굴 아깝게 필드 뛰어? 차라리 이번 기회에 모델이나 해보는 게……. 아, 그러고 보니 그쪽이 에드워드라면 필드도 뛸 만하겠네. 뱀파이어라며? 그것도 순혈? 옆에 있는 동료도 뱀파이어야? 되게, 묘하게 생기긴 했다.”

칭찬인지 욕일지 모를 그 말을 들으며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묘하게 생겼다는 건 어떤 생김새일까? 에드워드와 비교하면 그렇게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지금껏 살아오며 생김새에 대한 지적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평가였다.

“너야말로 입이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 보통 인간은 목숨이 하나뿐일 텐데, 이 바닥에서 그런 식으로 굴었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걸.”

마치 제명에 죽고 싶지 않은 것이냐는 협박처럼 들리는 그 말에도 불구하고 데이브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에드워드에게 다가가 팡팡, 그의 등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마치 십년지기나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구는 그에게서 노골적으로 떨어져 선 에드워드가 스윽 케일리의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흡사 더러운 것으로부터 그를 피신시키기라도 하는 그 동작에 데이브가 파하하, 박장대소했다.

“아, 소개가 늦었네. 나는 이번 작전에서 마법사 쪽을 담당할 평범한 인간 요원이고 나는 다섯 명으로 된 팀으로 움직여. 사실 내가 직접 나서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번에는 범인들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슬슬 바깥으로도 말이 새어나가기 시작했거든. 위에서도 빨리 해결하라고 난리라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인원은 총 일곱 명인 셈이지. 아, 다섯 명과 두 마리? 뱀파이어를 세는 단위는 잘 모르는데 혹시 괜찮은 말 있으면 가르쳐달라고!

활기차게 덧붙인 데이브가 미친놈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타고 온 차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일단 타도록 해. 모처럼 먼 길 와줬으니 본부까지 모셔서 제대로 설명할 테니.”

어쩔 수 없이 뒷좌석에 올라타며 한껏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 에드워드와 달리, 케일리는 데이브 샌델에게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무엇보다 에드워드가 순혈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목숨이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이 상당히 독특하게 느껴지기는 했다-연수에서 만난 전직 특수부대였다는 인간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데이브는 인간인가요?”

차가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케일리가 데이브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사실 데이브 샌델에게 썩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과 에드워드를 둘 다 뱀파이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가 뱀파이어는 아닐 테고, 막 덮고 내린 백과사전을 읽은 보람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 참, 소개가 늦었네. 네 말대로 난 평범한 인간이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멩이랑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거야.”

뉴욕의 필드를 책임지는 총 책임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자기소개였다.

케일리와 에드워드가 동시에 그렇게 생각한 순간, 광고 모델처럼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은 데이브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약간의 초능력을 쓸 줄 알지!”

◇ ◆ ◇

좋게도 나쁘게도 타인에게 별반 관심이 없는 에드워드와 케일리는 스스로를 약간의 초능력을 쓰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표현한 자의 능력이 어쩌면 침샘이 마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JFK 공항으로부터 차를 달려 맨해튼으로 들어온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미드타운에 접어들기까지 약 한 시간이 되지 않을 애매모호한 시간 내도록 데이브는 단 한 순간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자잘하게는 순혈 뱀파이어에 대한 질문공세부터 시작해 에드워드의 외모에 대한 놀라움, 복잡한 사건을 맡게 된 귀찮음부터 시작해 굵직하게는 자신이 소속된 기관에 대한 적나라한 뒷담화까지 화제도 다양했다.

심지어는 어느 누구도 묻지 않은 삭막한 뉴욕 생활의 서글픔과-그의 출신지는 D.C.라고.- 두 달에 걸쳐 여자친구한테 차이는 스스로의 처참한 연애생활까지를 떠들어댄 후에야 그들이 탄 세단이 멈췄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놀랍게도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겉으로 보기에 별반 특별한 구석이 없는 비즈니스 빌딩 중 하나였다. 런던의 지저분한 슬럼가 한구석 숨어 있는 -B 지구와 비교하면 대단히 멀끔한 입구였다.

케일리와 에드워드가 데이브의 안내에 엘리베이터를 세 번 갈아타고 몇 번의 보안절차를 거치자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과연, 미합중국의 비밀기지다운 훌륭한 외관이네요.”

눈앞에 펼쳐진 내부를 가만히 훑어보며 어딘지 납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케일리의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좋게도 나쁘게도 대단히 미국스러운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말에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뉴욕 한복판에 이런 데가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가는 정신병원에 갇힐 게 분명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탁 트인 공간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모니터, 모니터, 그리고 모니터가 늘어서 있었다.

근 미래 영화의 정부기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홀로그램식 지도를 비롯해 무언가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실시간 적외선 카메라로부터 송출된 영상까지 모니터에 띄워진 내용도 가지각색이다.

영화와 이 장소의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가끔 물건이 중력을 거부하고 허공에 떠다닌다든지-아마도 마법 같았다.- 눈앞에 있던 평범한 사람이 몇 발짝 멀어진 순간 뾰족한 귀를 한 요정으로 변하는 광경 정도일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사실 인간들은 과학 같은 게 없어도 충분히 마법과 이종족을 이용해 지금과 비슷한 문명을 꾸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베타β 테스크 포스 팀, 전원 컨퍼런스 룸에 집합!”

짝짝, 시끄럽게 손뼉을 친 데이브가 그렇게 외치자 놀랍게도 멀뚱멀뚱 허공을 떠다니던 빨래집게 몇 개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선 빨래집게의 물리력으로는 결코 버틸 수 없을 중량의 인류 몇 체를 달랑달랑 매달아 오는 게 아니겠는가.

이미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데이브의 뒤를 따르며 케일리와 에드워드는 점점 모여드는 빨래집게 인간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컨퍼런스 룸 C라는 삭막한 문구가 적힌 문을 통과하자 제법 너른 공간이 펼쳐졌다.

두 사람과 한 뱀파이어의 뒤를 이어 빨래집게에 잡혀온 인류는-일단 겉보기에는 전원 인류였다.- 총 네 명이었다. 빨래집게에 의해 운반되는 와중에도 태블릿 PC를 손에서 놓지 않고 무언가를 입력하는 대단한 집중력의 여자 요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조리 남자였고, 필드요원보다는 사무직에 어울리는 외견의 데이브와는 달리 우락부락한 빡빡이들뿐이었다.

덕분에 그들을 죄다 모아놓고 보니 집합이라기보다는 강제징용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노골적인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채 살벌한 표정으로 빨래집게에서 떨어져 내린 세 명의 남자와 한 여자에게서 감도는 흉흉한 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한 데이브가 여전히 가볍고 유쾌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쪽은 케일리와 에드워드. 이번에 런던, 파리,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쇄사건에 협력하기 위해 런던 지부에서 파견 나온 우수한 요원들이지. 알파α 팀은 이 둘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짜서 움직이고, 목표는 유력 용의자인 러시안 라이칸이야.

우리 베타β 팀에서는 이종의 협력단체로 보이는 인간 마법사 집단을 쫓을 예정이지만 수사 결과에 따라 유동적으로 표적이 변경 될 가능성이 높으니 클라라는 살만 태블릿 고장 내지 말고 돌려주고, 살만은 정보수집 계속해줘.”

살벌한 표정으로 태블릿 PC에 집착하던 여자, 클라라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칫, 혀를 찼다. 슬쩍 데이브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들고 있던 기계를 7피트에 가까운 거구의 사내에게 던졌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허둥대며 태블릿을 무사히 받아든 사내, 살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만의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근육질의 백인 사내가 건들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왜 저쪽은 달랑 둘이서 움직인답니까?”

이종 중에서도 라이칸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부류에 속했다. 무리지어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혈족에 대한 집착이 끝내줘서 한 마리를 잘못 건드리면 벌집을 잘못 건드린 양, 대 참사가 벌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대부분의 라이칸들이 인간 사회에 잘 섞여 별다른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이번에는 운 나쁘게 라이칸 사이에서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로열 블러드가 용의자다.

혈족에 대한 집착은커녕 동족끼리도 아무렇지 않게 죽고 죽이는 인류에 속한 필드요원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짜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됐건 건드리기 싫은 라이칸을 맡아준다니 고맙기야 했는데 단둘이 팀을 짜 움직인다는 말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온갖 이종이 모여드는 뉴욕은 이종족 이민 관리국 중에서도 업무 난이도가 높다. 기관 안에서는 뉴욕에서 얼마나 버티는지를 유능함의 척도로 보기도 했다. 그런 뉴욕에서 잔뼈가 굵은 필드요원을 모아 테스크 포스를 꾸렸는데, 그들이 베타 팀으로 빠지고 단 둘로 구성된 외부파견들이 메인 디쉬를 맡는다니.

네놈들은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들어나 보자며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자신의 부하를 향해 데이브가 말했다.

“드류, 쟤들 순혈 뱀파이어야.”

“……농담이죠?”

“런던에서는 진짜라던데.”

“아니, 순혈이 할 일이 없어서 공무원 나부랭이나 합니까? 헛소리 말고 진짜 정체나 불어봐요. 뭐가 튀어나와도 안 놀랄 자신 있으니까.”

당사자를 앞에 두고 오가는 의심 가득한 대화를 듣다가 말고 케일리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가만히 자신에게 발언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에게 데이브가 말하라는 듯 드류를 막아섰다.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웃은 케일리가 자신을 둘러싼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 뱀파이어 아닌데요.”

“거봐. 본인 입으로 아니라,”

“에드워드가 뱀파이어죠.”

“……는 게 아니네.”

별안간 주목을 받은 에드워드의 얼굴에 노골적인 짜증이 어렸다. 케일리가 순혈이라는 쓸데없는 오해도 귀찮았지만 순혈 뱀파이어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 예의와 존중을 모르는 무례한 미국 놈들에 대한 새로운 편견을 쌓으며 에드워드는 데이브의 팀원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쪽에서 준비하기로 한 건 전부 끝났나?”

공동작전이기는 했지만 케일리와 에드워드의 알파 팀 작전과 데이브와 부하들이 투입되는 베타 팀의 작전은 완전히 별개였다. 총 책임자인 데이브는 작전 내용을 모두 꿰고 있었으나 부하들은 아니었다.

데이브의 팀원들은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 모를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가 자신의 대장을 수하 부리듯 하는 것이 불쾌한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에드워드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아, 그거. 응, 뭐 별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어. 원래 우리 팀원들을 투입하려고 했었으니까 이미 판은 다 깔아놨거든. 문제는 거기 분위기가 우리 애들이랑 좀 안 어울린다는 것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한 데이브는 컨퍼런스 룸의 앞쪽으로 걸어가 스크린을 내렸다. 프로젝터의 전원을 켠 후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살만을 향해 “알파 팀 작전개요 부탁해.”라고 말했다. 무어라 입안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살만이 프로젝터를 통해 케이스 넘버가 찍힌 사건파일을 띄웠다.

곧 벽 하나를 차지한 커다란 스크린 위에 알파팀의 작전개요 중 가장 중요한 대상인 ‘용의자’ 사진이 몇 장인가 떠올랐다. 그중 얼굴이 클로즈업 된 고화질의 정면사진에는 유명한 브랜드의 로고가 찍혀 있는 전문가의 작품이었다. 들었던 대로 용의자는 썩 훌륭한, 아니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뛰어난 모델이 맞는 모양이다.

“와, 진짜 잘생겼네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것은 케일리였다. 마치 예술품을 보는 듯한 순수한 감탄에 에드워드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찌푸려졌다.

사심이 들어갈 여지가 없을 만큼 기분 나쁜 생김새를 한 라이칸이라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네 눈은 미의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냐는 투로 던지기도 힘들었다-게다가 에드워드는 케일리와 처음 만났던 -B지구 페어리 사무실에서 자신을 향해 잘생겼다는 칭찬을 한 것을 기억했고, 덕분에 이제 와서 그의 미의식을 지적했다가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된다.-.

하필이면 상대가 라이칸이라는 것까지 포함해, 이번 임무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탐탁찮은 시선으로 스크린에 뜬 제법 잘생긴 라이칸의 사진을 쳐다보는 에드워드의 옆에서 케일리가 말했다.

“저 사람 눈 색, 진짜예요?”

사진마다 다른 빛을 띤 눈을 순서대로 가리키며 궁금한 표정을 하는 그를 향해 데이브가 대답했다.

“글쎄,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어서. 포토샵 한 거 아니면 진짜겠지? 듣기로는 사진마다 다 다르게 나오는 것 같더라고. 우리 쪽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장소나 조명에 따라 달라져서 직접 보고 확인하는 게 빠를걸.”

어두운 조명 밑에서 깊게 음영 진 눈매 안에는 달빛을 받은 설원의 밤처럼 기묘한 색의 시선이 물끄러미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의 색이 사진마다 다르다는 것은 말끄러미 빛나는 은빛 홍채가 조명의 색에 따라 붉은빛을 띠거나 푸른빛을 띠는 것처럼 때때로 변화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어찌됐건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신비로운 색이었다. 이목구비 자체도 흠잡을 구석이 없이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눈이 시선을 끌었다.

타인의 외모가 미색이든 박색이든 자신과는 별달리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온 케일리는 요즘 들어 어쩌면 자신이 의외로 시각적 효과에 약한 속물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모델이라는 건 저런 사람들이 하는 거로군.

지금껏 옷이나 시계를 팔기 위해 꼭 사람을 내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품어왔던 케일리는 어딘지 납득한 얼굴로 가만히 스크린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유리 아킨시나. 요 몇 년 맨즈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잘나가는 러시아 출신 모델이지. 운 없게 올해부터 패션위크의 맨즈 부문이 완전히 갈라진 바람에 이번 시즌에는 뉴욕에 오지 않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쇼에 안 올라가도 초대손님으로 와 있기는 해.”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을 데이브가 간단히 요약했다.

“워낙 바쁘신 몸이라 초대된 쇼 외에도 개인 촬영 스케줄이 장난 아닌 모양이라 열흘 동안 체류할 예정이지만 내내 초대받은 쇼 참가에, 촬영일정까지 빡빡하게 잡혀 있어. 덕분에 우리는 다른 데 신경 쓸 필요 없이 스케줄만 꼬박꼬박 따라다니면 되니 일이 편하게 됐지.”

그러고 보면 에드워드에게 건네받아 뉴욕까지 오는 도중 읽은 사건파일의 작전개요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패션위크를 전후로 포함한 짧은 시간이 유리 아킨시나가 뉴욕에 머무는 기간이다. 그 후에는 당분간 본국에 돌아가 휴식을 취할 예정이며, 그가 러시아 땅을 밟는 순간부터 관리국 중에서도 타국과 공조하지 않는 나라인 탓에 관할 문제로 수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고작해야 열흘 안팎의 짧은 시간 안에 그가 진짜 범인인지, 아니면 그렇게 보인 선량한 이종족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에드워드와 케일리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근처에 잠입해 있으면서 얌전히 따라다니다가 범인 같은 행동을 하면 증거를 잡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처럼 들렸기 때문에, 베타 팀에서 달랑 둘로 그게 될 것 같으냐고 비꼬는 이유를 케일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브가 설명을 계속했다.

“스케줄만 보면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란 것 같은데 대체 어느 틈에 사람을 잡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 단위로 잡혀 있으니 따라다니다 힘들 수는 있어도, 감시하기 어렵지는 않을 거야.

뭐, 굳이 단점을 말하자면 몸이 좀 힘들 수도 있겠지만 뱀파이어라고 하니까 그런 걱정도 없을 테고.”

분 단위로 잡힌 스케줄이라는 말에 케일리가 자신의 부친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바쁜 시기의 로체스터 공작도 몸이 하나라 아쉽다는 뉘앙스의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를 되짚어보다가, 문득 케일리가 질문을 던졌다.

“스케줄이 끝난 뒤에는 어떻게 하나요? 호텔 같은 데서 머무르면 감시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대중문화에 박식한 편은 아닌 케일리의 머릿속에서 미행의 이미지는 상당히 빈약했다.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핫도그 같은 것을 먹으며 신문에 얼굴을 가리는 정도였다. 그런 허술한 감시로 과연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뉴욕 시내에서 썩 괜찮은 규모의 호텔에 사람이 드나드는 걸 완벽하게 쫓아갈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런 케일리를 향해 데이브가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아. 유리 아킨시나는 어퍼 이스트사이드와 웨스트사이드, 그리고 첼시에 각각 하나씩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보통 그날 스케줄이 끝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아파트에서 잔다니 우리 쪽에서는 미리 각 아파트의 바로 밑층을 매입해뒀지.”

“아, 그럼 도청 같은 걸 하나요? 감시카메라 같은 걸 설치해놓는다든지?”

“아니. 라이칸들은 예민해서 집이 빈틈을 타 카메라나 도청기를 설치하면 결국 기계도 들키겠지만 먼저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 바로 눈치챌 테니까 그런 건 없지. 둘이니까 번갈아 불침번 서면 되겠네.”

어깨를 으쓱하며 “뱀파이어는 굳이 잠을 잘 필요가 없을 테니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기는 하지만.” 하고 데이브가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는 데이브를 향해 케일리가 다소 우울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불침번이라니, 혹시 밤에도 잠 안 자고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저, 케일리? 너 불침번 뜻은 알아? 혹시 그 단어 영국에서는 다른 뜻이야?”

“미국의 노동법도 처참하다는 뜻이라면 같은 뜻일 것 같네요.”

“세상에 처참하지 않은 노동법이 있는 나라도 있어?”

“…….”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묻는 데이브에 케일리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쩐지 이 비슷한 대화를 요전에 페어리와 나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라 훈련 내용과 초과업무를 노동법 위반으로 고소하고 싶다고 했을 때, 페어리는 분명, 계약서에 사인했으니 못한다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자국이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에 케일리는 낮에도 밤에도 개처럼 일하라는 데이브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참, 그리고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유리 아킨시나는 등록된 라이칸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관리국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어.”

“어떻게요? 인공위성 같은 건가요?”

“그런 과학적인 건 아니고. 등록된 이종족들은 모두 마법으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일종의 금제가 걸려 있거든. 위치추적밖에 할 수 없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번에 그가 용의자로 떠오른 것도 바로 일정한 주기로 기록되는 위치추적 로그 때문이었어. 유럽에서 북미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시기와 장소에 겹쳐서 그가 출몰했으니까. 다만 그 기록이 전부 모델활동과 겹친다는 것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고. 이번에 너희가 제대로 된 증거를 잡기만 한다면……, 아무리 라이칸의 왕자님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걸.”

은밀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데이브가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앞에 둔 것처럼 눈을 빛냈다. 유독 ‘왕자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넣는 것에 케일리는 어딘지 시대착오적인 계급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대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상대방의 의견은 존중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진짜’ 귀족이라는 것을 웬만해서는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서서히 줄어들어가는 현대의 영국귀족 자제의 매우 소박한 감상이었다.

“사실 유리 아킨시나 자체는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라이칸인 데다가, 좀 오랫동안 거기 처박혀 살기는 했지만 전과도 없고 라이칸치고는 야생성이나 눈에 띄는 폭력 성향도 없이 이력 자체가 상당히 깔끔해. 그냥 적혀 있는 게 거의 없었지. 러시아에서 나온 기록도 거의 없었고. 성격에 대한 증언은 거의 없고.”

아예 문제가 없거나, 문제가 있지만 주변인을 입막음 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데이브가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유리 아킨시나에게 사감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케일리는 생각했다.

“그런 놈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요 몇 년 러시아를 나와서 외유를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모델 일이었어. 그것 참 눈에 확 띄는 직업을 구하셨다 보니 처음에는 각국의 관리국이 주목했는데 별다른 사고 없이 모델만 열심히 하기에 그냥 그 일이 마음에 든 줄 알았던 사람이 한둘이 아닐걸?”

데이브의 이야기를 들으며 케일리는 유리 아킨시나에 대한 그의 평이 어딘지 -B 지구의 사람들의 에드워드를 향한 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혈 뱀파이어 계의 이단아, 본인에게는 문제가 없지만-특이한 식성을 제외하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귀찮은 일에 발을 담그고 양측에서 견제를 당하는 상황까지.

게다가 유리 아킨시나가 라이칸 계의 로열 블러드라는 것과, 에드워드가 순혈 뱀파이어 계의 로열 블러드라는 것까지 비슷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이종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인텔리한 지식인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속으로는 결단코 이루어지지 않을 뱀파이어의 왕자와 라이칸의 왕자가 베스트 프렌드가 된 금단의 투샷을 떠올리던 케일리를 향해 데이브가 이야기를 계속 했다.

“만약 놈이 진짜 범인이라면 상당히 일이 귀찮아질 거야. 저 무시무시하게 잘난 얼굴은 그냥 나온 게 아니라고. 잘못하면 러시아뿐만 아니라 라이칸 전체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으니 너희가 맡을 임무는 증거를 잡는 것까지야. 물론 범인이 아닐 수도 있으니, 우리는 가능하면 놈이 엮이지 않은 여섯 번째 사건이 벌어지기를 빌어야겠지.”

“최소한 라이칸 계의 로열 블러드를 범인으로 연행해야 하는 일은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니까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하는 데이브에게 동의한다는 듯 그의 팀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고로 유리 아킨시나의 행보와 연쇄사건의 연관성은 지금까지의 스코어만 따지면 알려진 다섯 건의 사건 중 다섯 건이야.”

“100퍼센트네요.”

“뭐, 그렇다고는 해도 이종족 사생활 침해법 때문에 위치추적 마법의 범위가 그렇게 확실한 건 아니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야. 매번 우연히 그 근처에 있었다고 변명하면 더럽고 치사해도 믿어줘야 할 정도로는?”

백이면 백 사건이 벌어진 장소에 있었는데도 변명이 통할 정도로 무의미한 위치추적이 뭘 위한 건지 궁금해지는 건 비단 케일리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데이브의 팀원들 또한 이번 사건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연쇄살인마이자 장기 수탈자일지도 모를 라이칸을 감시해야 하는 케일리가 데이브를 향해 물었다.

“확실하지 않다는 건 정확히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요?”

“그러니까, 대충 도시 하나 정도의 오차가 있다고 보면 돼.”

“정말 엄청나게 애매한 범위기는 하네요.”

그 정도면 용의자로 지목된 라이칸도 억울할 것 같기는 했다.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나는 족족 같은 도시에 있기는 했지만 그게 도시라는 것 외의 정확도는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일련의 사건은 런던, 파리, 베를린에서 벌어졌다. 라이칸의 직업이 모델이라면 제집처럼 드나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들이다.

“맞아.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를 범인으로 몰기에도 애매하지. 게다가 지금까지 사건이 벌어진 도시가 런던에서 한 건, 파리에서 두 건, 베를린에서 한 건, 이태리에서 한 건이다 보니 장소 관련해 문제가 있지. 아무래도 패션모델의 동선이랄 게 거기서 거기인데, 이쪽에서 엄한 라이칸을 잡는 모양이 되면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고 그러면 우리 같은 말단은 꼼짝없이 희생양이 될 거라고.”

서글픈 미래를 상상하기라도 하듯 데이브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을 따라가듯 이어지는 이야기도 점점 비관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라이칸들과의 사이에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면 일단 용의선상에 유리 아킨시나를 올린 놈부터 색출하고 시작하겠지? 결국 범인을 잡아내도 어떤 처벌이 내려지는지 정하는 건 현장업무가 아니니까 높으신 분들은 괜히 우리를 털고 볼 거야.

우리 요원들은 박봉에, 험한 일만 맡아 하고 마지막에는 정치판에 희생되어 쓸쓸히 사라지는 게 정해진 결말인 셈이지. 애국하고 충성했더니 돌아오는 게 그따위 결말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이 나라의 국민들은 군인만 공경하지 말고 우리같이 가엾은 공무원들도 좀 챙겨야 할 필요가 있어.”

케일리는 자신의 부친도 본국에서 공무원을 업으로 삼고 계신다며 그를 위로할까 하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데이브와 같은 공무원이 아니라 데이브를 경질하는 쪽의 공무원인 것 같다는 결론이 나 입을 다물기로 했다.

게다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꾸만 등장하는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케일리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고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이렇게 말했다.

“아, 유리 아킨시나를 용의선상에 올린 놈이 데이브인가 봐요?”

움찔, 정곡에 찔린 얼굴을 한 데이브가 변명했다.

“아니, 생각을 해봐. 100퍼센트라고. 일치율 100퍼센트인 용의자를 어떻게 무시해? 게다가 하필이면 다음 스케줄이 우리 관할이잖아. 이건 운명이라고!”

“운명이라는 말을 그런 곳에 쓰는 사람은 처음 보지만, 어쨌든 운명이라고 하니 그 운명 덕분에 행복해질 수 있기를 빌게요.”

“비꼬는 거냐?”

“데이브, 그렇게 꼬인 생각을 하면 잘될 일도 안 돼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렸다 라든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는 케일리에 데이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말로 얻어맞은 것 같았는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야비한 영국 놈들이랑은 말을 섞으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거라고. 대단히 국가 차별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데이브가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맡은 일만 제대로 수행하면 평범하게 회사에서 일하는 거랑 크게 다를 바 없이 열흘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뉴욕에는 오가는 이종이 많다 보니 인간들 틈에 뱀파이어가 섞인 정도로 아킨시나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도 없을 테니까. 물론 순혈쯤 되면 상당히 드문 일이긴 한데,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에드워드만 조심하면 되겠네요.”

“둘 다 조심해달라고. 게다가 라이칸 중에는 순혈 뱀파이어와 잡종의 차이를 모르는 놈들도 많으니 감시만 잘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기도 하지. 관건은 아킨시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면 안 된다는 거야.

중간에 놓치면 우리 쪽에서 추가인원을 붙여도 쫓기 힘들어. 인간으로 구성된 정예팀을 가지고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게 라이칸의 왕족이거든. 사실 그건 이종 요원들도 마찬가지인데, 그쪽은 종족간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더 끼어들기가 어려울 때가 있어.”

그러고 보니 확실히 케일리가 읽은 파일에도 라이칸 용의자인 유리 아킨시나를 맡는 것은 자신과 에드워드뿐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통 인간으로선 라이칸을 상대하기가 어려워서였군. 이 임무는 자신이 에드워드의 파트너로 내정되기 전부터 잡혀 있었다고 하니 순혈 뱀파이어 정도는 되어야 유리 아킨시나에게 걸려도 버틸 만한 인물인가 싶었다.

데이브의 말대로 별다른 트러블이 없다면 실제로 그가 범인이라도 이쪽의 임무는 증거를 잡는 것이지 체포나 직접적인 격돌이 일어날 만한 상황은 없을 것 같기는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케일리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했고 그 의미는 대체로 평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귀찮음으로 최대한을 얻어내는 것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시와 증거확보만이 목적인 임무는 그의 평화주의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비행기 안에서 읽은 내용에 따르면, 기간 중 초반에 잡혀 있는 몇몇 프로모션 스케줄에서는 유리 아킨시나를 모델로 고용한 광고주 회사의 인물로 위장한 잠입수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이종족 이민 관리국에서 준비한 페이퍼 컴퍼니의-그런 것치고는 제대로 된 사업이었다.- 신제품 모델로 유리 아킨시나를 고용했으며, 실제 촬영현장에 케일리 자신과 에드워드가 프로젝트의 책임자와 그 비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수사를 위해 꾸며진 일치고는 거액이 투입된 멀쩡한 회사의 신제품 프로모션인 덕분에 총 사흘의 촬영일정에 밀착하면서도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그 사흘을 제외한 나머지 일정에서도 약간의 변장이 필요하겠지만, 유리 아킨시나가 초대된 쇼의 초대객, 촬영의 스태프 등으로 제대로 된 신분을 내세울 수 있는 잠입일정이 잡혀 있었다.

데이브가 판은 다 깔아놨지만 자신의 팀원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은, 아마 그의 팀원 중 셋이 어딜 봐도 공사장이나 군대에 어울릴 법한 거구를 자랑해 패션업계는 물론 평범한 회사에서도 이질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케일리는 생각했다.

물론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누가 봐도 군인 같은 사람이 꽃집에서 등장하면 위화감을 느끼는 건 시각의 동물인 인간된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케일리 자신만 해도 평범한 영업 일에 지원한 사람이 온몸을 근육으로 치장한 데다 경력 화려한 전직 군인이라면 진지하게 무슨 이유로 PMC 같은 업종이 아니라 영업 일을 하길 바라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물어보지도 않을 테고, 그가 영업원으로 훌륭한 능력을 지녔다면 고용도 하겠지만 어찌됐건 궁금한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패션계는커녕 평범한 회사에서도 위화감을 느낄 만한 데이브의 부하들이 잠입에 적합하지 않을 수밖에.

“아 참. 그러고 보니 소개가 아직이었네. 별로 부딪힐 일은 없겠지만 베타 팀 팀원은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 왼쪽부터 드류, 살만, 클라라, 아르고야. 살만이 정보요원이라 연락망이 될 예정이고, 나머지는 전부 현장에서 뛸 테니 오늘 이후로 얼굴을 마주할 일도 없기는 할 테지만 일단 같은 편이니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지?”

컨퍼런스 룸에 모인 지 반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팀원들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짝 손뼉을 치며 데이브가 말했다.

클라라에게 태블릿 PC를 빼앗겼던 정보 담당 살만은 그녀의 두 배는 되는 덩치로 불신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쉴 새 없이 에드워드를 훔쳐봤고, 뭐가 불만인지 얼굴 가득 짜증을 담은 클라라 또한 별달리 즐거운 기색은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정체를 들은 뒤부터 신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드류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존재감이 없는 아르고만이 “아르고 개그넌입니다.”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대단히 정상적인 인사를 건넸다.

“케일리 로체……, 로체니입니다.”

그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흔든 케일리가 자연스레 자신의 이름을 대다가 말고, 멈칫 성의 끝부분을 비틀었다. 가명을 써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본명을 대는 것도 껄끄러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계급제에 불만을 가진 데이브가 껄끄러워지겠지.

케일리와 인사를 나눈 아르고는 에드워드에게도 똑같은 인사를 청했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그가 내밀어진 손을 무시한 채 “에드워드 밀러.” 간단히 제 가명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는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가명을 썼다. 하기야, 애쉬포드라는 성을 그대로 쓰면 같은 순혈 뱀파이어인 로저와의 연결점이 드러날 테고 에드워드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드류, 클라라, 살만. 너희도 그렇게 뚱한 얼굴만 하지 말고 고작 열흘이라지만 같이 일하게 될 사이인데 통성명 정도는 해두는 게 어때? 아르고를 본받아보라고. 니들이 그렇게 사교성 없이 구니까 사람들이 죄다 우리 팀을 싫어하는 거잖아.”

쯧쯧 혀를 차며 자신의 팀원들을 향해 데이브가 말했다. 그런 데이브를 돌아보며 아르고와 비교를 당한 세 팀원 중 가장 험악한 표정을 한 클라라가 대답했다.

“보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우리 팀을 싫어하는 건 네놈이 자꾸 빨래집게로 사람을 집고 다니니까 그런 거야.”

“하지만 평범하게 부르면 다들 들은 척도 안 하고, 들었다고 해도 반응이 너무 느리잖아? 시간낭비를 덜 하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 아냐.”

“아니, 난 시간을 좀 낭비하더라도 인권을 챙길래.”

“편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 좋은 거지, 뭘 인권 이야기까지……. 넌 무슨 일에서든 과장이 너무 심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보스뿐이라는 걸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너무 충격받진 마. 보스 네가 멍청한 것까지 포함해서 그게 바로 현실이거든.”

아무래도 데이브는 자신의 팀원들에게도 별달리 존중받는 입장은 아닌 모양이다.

“다행이지 않아? 너희는 얘들이랑 팀플레이를 안 해도 되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딱히 기가 죽지도 않은 데이브가 활짝 웃곤 자신의 팀원들을 손가락질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 옆에서 싱긋 짙은 웃음을 띤 클라라가 높다란 힐 굽으로 데이브의 발을 밟았고 “끄아악!” 괴상한 비명을 올리며 튀어 오른 데이브의 주변에 얌전히 붙어 있던 의자가 함께 날았다.

물론 그 중심에 있는 데이브 또한 중력을 무시하고 허공에서 발을 부여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과연 초능력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며 케일리가 신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바닥에 내려온 데이브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공에 휘휘 손을 젓자, 의자들이 제자리에 돌아갔다.

“윽, 나 발등에 구멍 났을지도 몰라. 산재로 보고해서 병원비 열 배로 뜯어내야지. 난 진짜 상사를 향한 존중 같은 걸 입사조건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 죄다 클라라 같은 애들만 들어오다 보면 내 수명이 반으로 줄어들 거라고.”

“보스야말로 정부기관을 향한 존중이 없다고 인사평가에서 매번 떨어지잖아.”

“난 여기가 좋아서 승진하기 싫은 것뿐이라고!”

“고과에서 떨어진 놈들은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그게 허풍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자존심을 세워봤자 더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처참한 기분인 걸까? 나는 늘 궁금했어.”

눈을 가늘게 뜨고 평이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클라라의 표정은 진심 어린 의문을 담고 있었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드류와 아르고를 번갈아서 본 데이브가 매달리듯 살만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비스듬히 시선을 피한 살만에게까지 배신당한 그는 결국 울상을 한 채 클라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보스 네가 올해 열두 살이 될 예정이었다면 심한 말이었겠지.”

“이것 보라고, 너희는 팀을 이렇게 짠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얘들이랑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데. 몸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도 아주 힘들다고. 이런 직장에도 사람들이 들어온다는데 놈들은 감사해야 해. 미국의, 나아가서는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공무원들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국민들 말이야.”

주먹을 불끈 쥐고 그렇게 말하는 데이브를 향해 케일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 원래는 에드워드 혼자 움직이는 것 아니었나요? 게다가 그는 혼자서도 전력이 되니까. 라이칸을 상대하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알파 팀을 피한 것 같은데 어째서 저희가 고마워해야 하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데이브의 입에서 “망할 영국 놈.”이라거나 “이래서 영국 놈들은 안 돼. 신사적인 얼굴을 하고 입으로는 악마 같은 소리를 지껄이잖아.”라는 등의 불평이 새어나왔지만 누구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보스, 할 말 끝났으면 우린 일하러 갈게. 그리고 쓸데없는 일로 부르지 마. 여기가 사교클럽도 아닌데 고작 인사 한번 시키려고 바쁜 사람 건드릴 시간 있으면 밀린 업무나 보라고. 나중에 서류에 파묻혀서 우리한테 떠넘기려 들지 말고.”

“내가 언제 일을 떠넘…… 야, 야 너희 어디 가?”

억울한 얼굴을 한 데이브가 무어라 항변하는데, 제일 먼저 등을 돌린 클라라를 따라 드류와 아르고가 컨퍼런스 룸을 벗어났다. 제일 뒤에서 그들을 쫓아가던 살만이 데이브의 처절한 부름에 흠칫 뒤를 돌았고 뒤이어 눈썹을 치켜세운 클라라도 걸음을 멈췄다.

“네가 떠넘긴 일 처리하러.”

단호하게 대답을 돌리는 클라라에 뉴욕 지부의 총 책임자라는 평범한 초능력자 데이브가 움찔 시선을 피했다.

“그, 그렇구나.”

네 사람이 컨퍼런스 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팔짱 끼고 구경하던 에드워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뉴욕의 미래를 알 만하군.”

침묵에 잠긴 컨퍼런스 룸에서 그 말을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내일 새벽 비행기로 뉴욕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유리 아킨시나는 현재 절찬리 대서양 상공을 횡단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유리 아킨시나의 첫 스케줄은 다음 날 아침부터라, 아직 정오를 막 지난 시간인 케일리와 에드워드에게는 만 하루의 자유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아킨시나의 스케줄에 맞춰 움직여야 하니 내일 아침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지만 오늘 하루는 느긋하게 뉴욕을 즐기라고 말하는 데이브에게 에드워드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양 “뉴욕에 대체 즐길 만한 게 뭐가 있다는 뜻이지?” 되물었다.

아파트 세 곳의 열쇠와 지도와 지도를 내민 데이브는 위장신분에 필요한 것들은 각각의 장소에 구비되어 있으니 어디를 가든 상관없을 거라고 설명했다. 아킨시나가 어디에 머무를지 예상할 수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준비였다.

또한 케일리와 에드워드는 각각 살만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블랙베리였는데, 실제로도 평범해 전화와 메시지 외의 기능은 없는 모양이었다.

블랙베리 안에는 서로의 번호와 베타 팀의 팀원들, 그리고 이곳 본부로 연결되는 것까지가 순서대로 등록되어 있었다. 위장신분 탓인지 본사, 마케팅 1팀 클라라, 재무기획 부장 데이브와 같은 식으로 저장된 이름을 슥 훑어보며 에드워드가 코웃음을 쳤다. 임무 중 어떤 이레귤러가 발생하든 그들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가 영국에서 맡는 임무는 대체로 과격한 이종족들을 사냥하러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순혈 뱀파이어처럼 전투력이 뛰어난 요원이 드물다는 이유로 궂고 험한 일에만 돌려졌던 에드워드에게는 고작해야 평범한 인간들 틈에 섞여서 라이칸 한 마리를 감시하기만 하면 끝나는 이번 일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2인 1조, 혹은 그 이상의 팀으로 움직이는 게 보통인 관리국 필드 임무였다. 그런 마당에 동양의 어떤 종교 지도자를 본받아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야당안지’를 좌우명으로 나 알아서 할 테니 니들은 꺼져라 하는 태도로 혼자 움직여 -B 지구 상위 실적자 자리를 유지해온 그에게는 스스로의 회생 불가능한 입맛 정도를 제외하면 세상에 어려울 일이 하나 없었다.

이번 임무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쓸데없이 엮이면 귀찮아지기 십상인 라이칸의 왕족이라는 것 외에는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케일리라면 모를까, 에드워드는 열흘 밤낮을 꼬박 아킨시나의 뒤만 쫓아다닌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신체능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쓰레기 같은 수혈 팩만 마시고도 그 정도는 손쉽게 해냈는데,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있는 지금이라면 케일리를 업고 다니면서도 수행할 자신이 있었다.

“차는 이쪽에서 무난한 걸로 준비했는데 마음에 안 들면 알아서 리스하고 비용은 이쪽에 청구해. 어차피 열흘 내내 스튜디오 촬영일정이 꽉 잡혀 있어서 뉴욕 시티에서 나갈 일도 없을 테지만,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 따라다니기는 어려울 거야. 어쨌든 너무 눈에 띄어서 괜히 아킨시나에게 의심을 사지만 않으면 되니까 적당히 선만 지켜줘.”

뉴욕으로 건너오는 비행기에서 에드워드가 준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으나, 위장신분과 역할에 대한 상세내용이 추가된 파일을 마지막으로 건넨 데이브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마주 잡고 새삼 악수를 나눈 케일리는 문득 그가 뉴욕 지부를 책임질 만큼의 어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부하들의 취급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었는데, 본인의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초능력을 사용한다거나 뉴욕 지부의 필드 임무를 책임지고 있다는 소개 같은 것들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팀원들이 어딘지 에드워드를 꺼렸던 것에 반해 데이브는 그런 게 없었다.

순혈 뱀파이어의 앞에서도 개의치 않는 담대함 같은 것이 그의 장점인 걸까. 라이칸의 왕자를 용의자 선상에 올리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못하는 뭔가가 데이브에게는 있는 걸지도 몰랐다.

데이브가 케일리와 에드워드를 향해 임무에 들어가기 전에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라고 말한 순간, 컨퍼런스 룸에 그의 부하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데이브, 캐트시 사건 때문에 급하게 확인할 게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아요?”

꽤나 다급한 어조로 묻는 울상을 한 사내의 얼굴에 데이브는 케일리와 에드워드에게 “심심하면 아까 지나온 본부라도 구경하고 있어. 거긴 어차피 오픈된 공간이라 돌아다녀도 상관없거든. 대신 문 달린 곳에는 들어가지 말고.”라고 했고 두 남자가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제 부하를 따라나섰다.

“구경…….”

데이브의 말을 반복하며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였고, 에드워드 또한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도며 휴대전화와 열쇠를 챙겼다.

“여기 죽치고 있어도 시간만 낭비하는 셈이니 일단 나가는 게 어때? 어차피 더 들을 것도 없으니 그냥 나가는 길이나 가르쳐주고 갔으면 더 좋았을 뻔했어.”

“그러게요. 내일부터 일해야 한다면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어딘지 업무 같아서 별로이기는 해요.”

“난 말이지, 가끔 네가 대체 왜 직업을 찾으려고 했던 건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 차라리 집에서 주는 걸 그대로 받아먹으면서 가만히 있는 게 제일 적성에 맞았을 텐데 말이야.”

컨퍼런스 룸을 나서며 힐끗 케일리를 돌아본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몫으로 건네받은 휴대전화를 안주머니에 갈무리한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했고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이 다른 집 애들만큼은 하기를 바라니까요. 그렇다고 정말로 다른 집 애들처럼 열심히 할 생각까지는 들지 않지만, 그분들의 기대에 귀찮지 않은 정도로는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음,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보통 사람들은 다 그렇지 않나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법이니 이 경우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내치지 않을 정도로는 뭔가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으니까요.”

말하고 보니까 별로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기는 하네요.”

덧붙이는 케일리의 말에 에드워드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케일리 저놈이 그러면 그렇지.

만약 그가 대단히 의욕적인 대답을 돌렸더라면 그게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제 입으로 딱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 만큼만 시늉을 하겠다는 굳건한 나태함에는 오히려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다. 그러니 저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도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 테지.

어쩌면 케일리 로체스터의 재능은 훌륭한 재능을 사정없이 묻어버리는 재능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빨래집게 인간들과 함께 지나온 복도를 되돌아갔다.

◇ ◆ ◇

“진짜로 임무를 맡게 되니 어딘지 묘한 기분이네요. 지금까지 한 일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목적이 다르니까 신선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일을 맡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고 어슬렁거리는 에드워드와 케일리에게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남의 직장에서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니면서 떠들어도 되는 걸까 아주 잠깐 대단히 정상적이고 예의 바른 생각을 떠올렸던 케일리는 어느새 마치 맨해튼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에드워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가끔 근처를 지나가는 땅딸막한 요정을 바라보며 신기한 양 시선을 보내는 케일리와는 달리, 시종일관 심드렁한 얼굴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에드워드가 그를 향해 말했다.

“누굴 감시하고 따라다니는 건 재밌는 일이 아니야. 오히려 성가신 일이지.”

“성가셔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가고 싶지도 않은 곳을 쫓아다녀야 하잖아. 게다가 뉴욕이라니, 여기를 어슬렁거리는 이상한 것들과 마주치지 않기만을 빌어야겠군.”

“뉴욕이 왜요? 그렇게까지 이상한 게 돌아다닌다는 이미지는 없었는데.”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 묻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말도 안 된다는 양, 픽 코웃음을 쳤다.

“뉴욕은 세계에서 손꼽는 정신병자들이 드글거리는 미친 도시라고. 특히 음모론과 괴상한 전설 같은 거에 심취한 놈들이 모여서 땅굴을 파고 틀어박혀 해괴한 종교의식을 벌이는 걸로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걸 부활시키겠답시고 갓 태어난 양과 처녀의 피를 모으는 짓을 하고 있지.”

“뭐를 부활시키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참 시대착오적인 재료네요. 인류가 이렇게 발전을 거듭했는데 여전히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보면 상상력은 그때 이후로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어쨌든 이 빌어먹을 도시에는 풍부하게 미친놈들이 가득하니 너도 조심하는 게 좋아. 여기 지하에서 돌아다니는 놈들은 순혈 뱀파이어도 잡아다가 정신 나간 의식에 써먹으려고 들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따지지도 않고 덤벼드는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제일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뭘 부활시키고 싶을 때는 그게 진짜로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정신병자들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건지부터 확인해야 할 테지.

어딘지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얼굴에는 농담을 하는 기색이 없었다.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도 안 되는 것’이 뭘까, 진지하게 고민에 잠긴 틈이다. 불쑥, 순한 인상을 한 사내가 기이하리만치 흥분에 찬 눈을 빛내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용건이라도?”

둘 중에서는 조금 더 사교적인 케일리가 그렇게 묻자, 남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기다렸다는 듯 잔뜩 힘이 실린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저, 혹시…… 순혈 뱀파이어세요?”

바로 수십 초 전 에드워드의 입에서 나온 ‘순혈 뱀파이어라도 잡아다가 정신 나간 의식에 써먹으려고 들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이라는 수식어에 대단히 들어맞는 번들거리는 눈빛에, 케일리가 가만히 고개를 돌렸고 에드워드를 쳐다보았다.

아주 잠시간 고민한 케일리는 자신을 향해 기대인지 살심인지 모를 어떠한 감정을 쏘아붙이는 사내를 향해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후 이렇게 대답했다.

“그……을쎄요?”

케일리 로체스터의 스물여덟 인생에서 가장 타인을 배려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런던에서 순혈 뱀파이어가 온다고 들었는데, 그쪽이 아니면 이쪽인가요? 저, 정말로 나쁜 사람 아닌데 솔직하게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숫제 디즈니랜드의 입구에 선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마냥 눈을 빛내며 간절히 매달리는 사내의 애원조에 케일리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굳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받았던 교육 중 그런 게 있었다.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이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었지.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미국에서라고 크게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좀 바빠서요…….”

갓 태어난 양과 처녀와 에드워드의 가엾은 희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케일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으나…….

“내가 순혈 뱀파이어다.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사내와 케일리의 사이에 교묘하게 끼어들어 상대방의 시야에서 케일리를 차단한 에드워드가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멸종위기의 이종인 에드워드를 지켜주려 한 케일리의 기특한 시도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와우!”

사내가 두 손을 불쑥 내밀어 에드워드의 손을 낚아챘다. 옅은 애쉬그린의 눈동자는 마치 로키산맥의 한가운데에서 빅풋과 조우한 음모론자마냥 감격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천하의 에드워드마저 멈칫 손을 뿌리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찰나, 사내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팬이에요!”

그거로도 모자란지 사내는 힘이 실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렸을 적부터 쭉 팬이었어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 말에는 공격성은커녕 분부만 한다면 구두라도 핥겠다는 어마어마한 호의가 담겨 있었고, 졸지에 에드워드의 뒤에 숨은 꼴이 된 케일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다행이라는 듯 싱긋 눈으로 웃었다. 자신을 향한 케일리의 미소에 퍼뜩 정신이 든 에드워드가 제 손을 움켜쥔 사내를 사납게 뿌리쳤다.

에드워드가 불쾌감을 가득 담은 얼굴로 무어라 입을 열려던 것과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어린 시절 교육을 헛받은 케일리가 환한 얼굴로 선수를 쳤다.

“팬이래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사내의 말을 의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파트너가 특정 부분에 있어서 아주 못 써먹을 나사 빠진 인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바꿀 수 없는 걸 가지고 화를 내는 건 에너지 낭비다. 게다가 네놈의 상황파악 능력은 유치원생보다 못하냐는 식으로 비꼬았다가는 자신도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케일리-해밀턴의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에드워드는 케일리에게 제 입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제 입으로 순혈 뱀파이어의 팬이라고 주장하는 놈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실상 이런 식의 반갑지 않은 호기심은 에드워드가 -B 지구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꾸준히 있어왔다. 순혈 뱀파이어는 타 종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고 그들만의 사회를 구축했기 때문에, 그곳을 뛰쳐나온 에드워드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덕분에 에드워드는 영국을 벗어나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에 바로 이런 멍청이들이 포함되었다. 미국에는 순혈 뱀파이어가 없었다. 단 한 마리도.

가끔 권속이나 잡종이 돌아다녔고 여행을 온 순혈이 잠깐 머물다 가는 경우는 있어도 자리를 잡지는 않았다. 그래서 미국의 이족 관계자들은 순혈 뱀파이어에게 노골적인 호기심이나, 아니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그래 봤자 100년을 살다 죽으면 오래 사는 인간 나부랭이였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만 이번처럼 귀찮은 호의를 드러내는 건 오히려 처치하기가 곤란했다. 악의를 내치는 것보다 호의를 내치는 게 훨씬 성가셨다.

“그래, 나쁜 사람이 아니라 팬이라니 그것 참 다행인 일이로군. 네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걷는 데 방해되니까 착한 사람답게 꺼져주겠나? 난 헛소리에 어울리는 취미도, 시간을 낭비하는 취미도 없어서 말이야.”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케일리와 사내의 중간에서 장단을 맞추며 제 하고 싶은 말을 신랄하게 쏟아내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사람이-물론 사람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냐는 양 시선으로 그를 타박하며 케일리가 눈앞의 사내를 동정했다.

“에드워드, 팬한테 그런 식으로 굴면 어떡해요. 저, 혹시 종이랑 펜 같은 거 있으세요? 가지고 오시면 에드워드가 사인해줄 거예요. 아, 이름은 뭐라고 하면 될까요?”

그 말에 정말로 종이와 펜을 가지러 달려가는 사내나, 좋은 일이라도 한 것처럼 뿌듯한 얼굴을 하는 케일리나 에드워드의 눈에는 그놈이 그놈처럼 멍청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케일리는 맛있기 때문에 그래도 나름대로 귀여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머지 한 놈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에드워드는 정체도 모르는 인간 사내와 하하호호 수다를 떨어줄 만큼 한가하지도, 너그럽지도 못했다.

사내가 종이, 종이를 외치며 우다다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재빨리 케일리의 팔을 잡았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질질 끌고 갔다. 주차장에서부터 본부까지 들어오는 길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으니 나가는 길은 반대로 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어, 데이브한테 말도 안 하고 그냥 나가도 되는 거예요?”

“걔가 내 상사도 아닌데 일일이 허락받고 움직여야 할 이유가 어딨어.”

“그건 그렇지만……, 아까 그 팬이라는 사람도 가엾잖아요.”

“가여운 건 상대가 용인 줄도 모르고 달려들었다가 뿔 잘린 수말한테 쓰는 거고. 아니, 그 경우에도 별로 가엾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어. 암컷이라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지만 않았더라면 그놈의 뿔은 멀쩡했을 테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도착하지 않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몇 번이나 신경질적으로 누르던 에드워드에게 근처를 지나가던 말쑥한 정장의 사무직원이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건넸다.

“저……, 버튼을 누르기 전에 보안카드를 찍지 않으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친절한 사무직원의 보안카드를 강탈해서라도 여기서 벗어나야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에드워드의 시야에 데이브가 들어왔다.

왜 그런 곳에 있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한 채 성큼성큼 다가온 데이브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준비한 차가 있는 곳까지 얘가 대신 안내해줄 거야. 그리고 본부까지 들어올 수 있는 식별카드는 내일 관리부서에서 전달받기로 했으니까 정말로 급한 일이 있을 때는 그걸 쓰도록 해. 작전에 대해 궁금한 거나 더 필요한 게 생기면 휴대전화로 살만에게 연락해!” 하고 숨도 쉬지 않고 쏟아부은 후 폭풍처럼 사라졌다.

데이브가 끌고 온 그를 대신할 안내원은 에드워드의 도주가 무색하게도, 어릴 적부터 그의-아마도 에드워드라기보다는 순혈 뱀파이어의.- 팬이었다는 종이와 펜을 든 수줍은 사내였다.

◇ ◆ ◇

“마크 그린이라고 합니다. 아까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서 실례를 저지른 점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레플리컨이나 빅풋을 발견한 너드와 같았던 방금 전과 비교하면 대단히 이성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소개한 사내가 내민 손을 케일리가 가볍게 마주 잡았다.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으니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체구 탓인지 왜소해 보이는 데다 순한 인상을 한 남자였다.

“케일리 로체니입니다.”

뒤이어 에드워드를 향해 똑같은 인사를 건넸지만, 장렬히 무시당했다. 그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마크의 얼굴에서는 어딘지 흥분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어지간히 뱀파이어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간단히 통성명을 끝낸 후 케일리와 에드워드의 앞장을 서 출실한 안내역을 맡은 마크가 자신을 향해 대단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뭔가 크게 오해하신 것 같아서 설명하자면 저는 국토안보부 이종족 이민 관리국의 제1연구실 실장입니다. 현재 이종의 생태와 고유능력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인데, 워낙 표본이 없다 보니 순혈 뱀파이어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딱히 연구대상이 되어달라는 건 아니고, 한번 대화라도 나눠보고 싶었던 것뿐이니 너무 경계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본인이 매우 선량하며 결코 너희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안심이라도 시키듯 그렇게 말하는 마크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하……, 경계?”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드워드의 옆에서 케일리는 자신이 생각해왔던 연구자의 이미지와 마크 그린은 별로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고 연구실에 처박히는 너드가 아니라, 평범하게 사교성 있는-사실 그의 것은 사교성보다는 다른 영역인 것 같기는 했지만.- 연구자 마크는 자신을 향한 에드워드의 적대감을 무시한 채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한 채 말을 계속했다.

“게다가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드라큘라나 로스트 보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같은 걸 보고 자랐다고요. 물론 다크 쉐도우나 트와일라잇 같은 망작은 취급하지 않지만, 어쨌든 고스와 펑크 문화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고스란히 보고 자란 세대에게 있어서 당신 같은 순혈 뱀파이어는 일종의 종교 같은 거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수십 년 전의 뱀파이어 영화를 줄줄 읊었으나 케일리는 그 말의 반의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나마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에드워드와 벨라의 종족을 넘나드는 로맨스가 마크 그린의 심금을 울렸던 모양이로구나, 생각하는 게 고작일까.

“순혈 뱀파이어에 대한 정보는 정말로 희소성이 높아서 지폐를 가방에 채우고 사려고 해도 판다는 사람이 없는 정도거든요. 유럽의 관리국에 순혈이 있다는 소문은 몇 번인가 들었지만 진짜였다니! 게다가 그 순혈을 미국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10년이 넘도록 휴가 때마다 유럽의 고성을 돌아다녔지만 허탕만 쳤는데 정말로 감격이에요.”

아무래도 껄끄러워할 필요도 없을 만큼 순수한 너드인 모양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순혈이 가진 불사의 힘을 원하는 머저리들보다도 귀찮았지만, 이쪽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나마 낫기는 했다. 그래 봤자 패스트푸드와 레토르트 푸드 정도의 차이였기 때문에 에드워드에게는 양쪽 다 귀찮은 존재이기는 했지만서도.

“유럽의 고성에는 뱀파이어가 사나요?”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 묻는 케일리는 마크를 귀찮아하는 에드워드에 비해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애초 타인을 의심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케일리는 어째서 에드워드의 팬을 자청했는지 해명한 마크에게 별달리 악감정이 없었다. 게다가 말 몇 마디를 주고받는 정도는 그렇게 귀찮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묻는 케일리를 향해 마크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제 생각에는 만약에 순혈 뱀파이어가 산다면 그런 곳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일단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는 없었어요. 다른 유럽은 아직 다 못 돌아봤지만 그렇게 수가 많은 것도 아니니 서식지를 잘못 짚은 것 같기는 했죠. 지금까지 없었는데 더 찾아다닌다고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 만나게 되어서 정말로 기쁩니다.”

“서식지…….”

“앗, 실례! 연구자의 입장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가네요. 순혈 뱀파이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보니 그들이 어떤 형태로 살아가는지 정보기관에서도 파악을 못한 상태입니다. 이민국으로 건너오기 전에는 국외 정보기관에 있었지만 거기에도 순혈 뱀파이어의 정보는 없었어요. 국내라고 해서 다른 것도 없었고……. 아마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제대로 연구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들으면 에드워드가 순혈 뱀파이어치고는 참으로 특이한 경우라는 게 새삼 와 닿았다.

확실히 케일리는 거의 평생을 친구로 자라온 로저가 순혈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고 다른 순혈도 비슷한 상황일 테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쫓을 수 없는 건 그만큼 순혈 뱀파이어들이 인간들 사이에 교묘히 숨어들어 있다는 뜻이겠지.

그걸 흥미본위로 파헤치는 것도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크는 연구자로서라고 말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성역을 향한 찬양 비스무리한 감정이 앞서 있었던 탓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물론 에드워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인간인 자신이 짐작할 수 없겠지만, 이 정도면 귀엽게 봐줄 만하지 않을까 케일리는 막연히 생각했다.

“정보기관이라면, CIA 같은 건가요?”

타국의 정보기관에 정통한 것은 아니지만 음모론의 주체로 종종 등장하는 그 조직을 모를 수는 없었다. 케일리의 물음에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법 순순히 대답을 돌렸다.

“네. 911 전에는 CIA 산하에 있었죠. 이민국 자체도 외풍을 많이 맞은편이라 제가 알기로 초창기에는 펜타곤 산하에 있었고 그 후에 잠깐 CIA에 흡수되었다가, 지금은 국토안보부(Homeland Security) 산하기구로 안정됐어요. 지금은 정식 예산도 전부 거기서 나옵니다.

예산도 많이 들어가는데 실질적으로 위에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적다 보니 여기저기 옮겨 다녔고 정치적 문제도 많았죠. 게다가 유럽에 비하면 역사도 짧아서 일하기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에요. 데이터도 없고, 별로 일하기 편한 직장은 아니죠.”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하는 마크는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와중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선망 어린 눈으로 에드워드를 힐끔거렸다.

에드워드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대단히 성가셔 하면서도 케일리가 하나하나 받아주고 있는 탓에 별다른 불평 없이 나란히 보조를 맞춰 걷기만 했다. 어차피 차를 얻으면 헤어질 사이였다.

게다가 에드워드로서는 아직 이종족이나 관리국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케일리가 일반상식을 익히는 것 또한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 상대가 컬트를 신봉하는 괴짜라는 문제는 있었지만 어찌됐건.

“그러면 이민국은 정보부 밑에 있는 게 낫지 않나요? 순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도 정보력 부족 때문이라면 통합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미국의 국토안보부가 9.11 이후의 대테러 안보기구로 설립되었다는 것 외에는 그렇다 할 정보가 없는 탓에 의문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케일리를 향해 마크가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며 부연설명 했다.

“그런 것보다는, 그냥 관할문제예요. 어차피 그 정보는 다른 기관에도 없는 거고, 국토안보부는 국내외 정보를 전부 다루니까 데이터 부족이 국외 정보기관이냐 국내 기관이냐의 문제는 아닌 셈이죠.

게다가 국토안보부는 예산이 잘 나와요. 지금처럼 전국의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울 만한 저력이 생긴 건 국토안보부 산하로 들어간 최근 10년 사이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다른 기관은 생긴 지 오래돼서 알력싸움도 성가시고 내부정치도…….”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는 마크를 향해 케일리는 다 안다는 양 위로하듯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마크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고 확신했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인간과 공감할 의지는 없지만 맞춰는 주는 사람의 차이가 뭔지에 대해 잠시간 생각해본 에드워드는 케일리는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냈다.

아직 저 머릿속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모조리 파악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데리고 다니다 보면 이해하는 날이 찾아오기는 할까 사소한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기는 했다.

어차피 같은 종 사이에서도 개체와 개체 사이의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인간과 뱀파이어라는 종의 차이까지 둔 자신과 케일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처음부터 오만한 시도였다. 그 점에 있어서 에드워드는 제법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타인과 함께하기 위해 필요한 건 알량한 이해 같은 게 아니다. 그냥 같이 있으면서 저 새끼가 나와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정 못 참으면 때려치우는 거고, 참을 만하면 계속 살 테지.

그 외에 뾰족한 수가 있었더라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평화로운 낙원이었을 게 분명하다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어쨌든 혹시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주세요. 임무와 관련된 게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힘이 닿는 거라면 뭐든 도와드릴게요. 본국에 돌아간 후에도, 연락을 주시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갈 테니…….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제 개인번호를 가르쳐드리고 싶은데 어디 메모지가…….”

거기까지 말한 마크가 에드워드의 사인을 받기 위해 들고 온 종이와 펜에 제 휴대전화 번호를 적었다.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되는 번호를 줄줄 적어 내려간 그는 영악하게도 탐탁찮은 얼굴을 한 에드워드가 아니라 자신에게 호의적인 케일리의 주머니에 곱게 접은 메모지를 직접 넣어주기까지 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에는 뱀파이어에 대한 데이터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순혈 뱀파이어 같은 건 한평생 구경할까 말까 할 정도로 드뭅니다. 저도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의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심이 섞인 호의라도 괜찮다면 부탁드릴게요.

이래 봬도 뉴욕은 미국의 관리국 지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고 제가 맡은 연구시설은 그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성과를 내는 곳이니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예요. 언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순수한 호의는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하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마크에 케일리는 어딘지 감동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에게 연락을 하게 될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마크의 소개대로 그가 뉴욕 지부의 연구실장이라는 것은 사실일 테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런 사람과 알아둬서 나쁠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이브에게 얻은 휴대전화에 마크의 번호도 등록해둬야지, 생각하던 케일리가 문득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온 내용에 사소한 의문을 제기했다.

“아, 그럼 지금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미국에는 왜 뱀파이어가 없는 건가요? 에드워드는 확실히 뉴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다른 뱀파이어들도 다 그런 거예요?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녀서?”

그 물음에 마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일리와 에드워드를 몇 번인가 번갈아 보았다.

“세상에, 케일리! 혹시 필드 임무를 맡은 지 얼마 안 됐거나 뭐 그런 건가요?”

“그런 것도 티가 나요?”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자라는 것만큼 기본적인 상식 같은 거니까요. 게다가 필드요원에게 있어서 이종 이론은 목숨과 직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보통 입사하기 전 연수에서 그 정도는 숙지하고 시작하는데 그렇게 상식적인 걸 모르면서 어떻게 필드요원 시험에 통과를……?”

혹시 그쪽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종이냐는 궁금증을 담은 마크의 시선에 케일리가 “저는 평범한 인간인데요, 구인광고 조건에 우연히 들어맞아서 시험이 간단했던 것 같기는 해요.” 하며 자신이 아는 한도의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하던 마크가 아!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케일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혹시 거기서 상사한테 밉보이고 그랬던 건 아니죠?”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튀나요?”

“평범한 인간을 라이칸한테 보내는 건 나가 죽으라는 소리니까요. 뭐, 파트너가 순혈 뱀파이어 정도 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좀 악의가 느껴지는 인선이긴 하죠.”

케일리가 알고 있는 라이칸은 좀 더 미숙한 햇병아리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데이브를 비롯한 미국의 요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라이칸이라는 게 지나치게 강하게 들려 설마 자신이 훈련에서 겪은 것과 다른 종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봤자 라이칸이잖아요. 전에도 싸운 적 있어서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요. 다소 거친 분들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상대하기 껄끄러운 점이 있나요?”

그런 케일리의 반응에 더더욱 알쏭달쏭한 얼굴을 한 마크가 물었다.

“혹시 초능력이나 마법 같은 거 쓸 줄 압니까?”

“아뇨, 평범한 사람인데요.”

“특수부대 출신이라든지? SAS처럼 괴물부대 같은 데서 왔어요?”

“사무직 회사원 출신입니다만.”

사무직 회사원 출신에 마법과 초능력조차 쓸 수 없는데 이종에 대한 상식조차 없는 한없이 일반인에 가까운 케일리의 스펙에 마크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순혈 뱀파이어와 팀을 짰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낸 마크는 어찌됐건 그 순혈에게 대단히 편애를 받고 있는 것 같은 평범한 인간 동지에게 잘 보여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계산적인 판단에서 조언을 내뱉었다.

“그, 뭐 어쨌든 일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괜히 다른 분들한테 물어보지 말고 나중에 파트너한테 물어보세요. 여기 사는 이종들은 모른다고 봐주고 그런 게 없거든요. 애초에 말이 안 통하는 놈들도 많고…….

어쨌든 미국에는 순혈 뱀파이어가 없어요. 순혈을 따지기 이전에 미국에는 뱀파이어 자체도 적고 있어봤자 전부 잡종이죠. 라이칸들이 유럽을 별로 안 좋아하고, 미국에 모이는 이유도 그거예요. 잡종 정도는 라이칸도 상대할 만하니까.”

“같은 질문이라 미안한데, 결국 미국에는 왜 순혈 뱀파이어가 없는 건가요?”

“그들은 거의 유럽에 몰려 있으니까요. 개체수도 적고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더라고요. 사실 우리 관리국 입장에서는 유럽에 있어주면 고맙기는 하죠. 개인적인 흥미를 제외하면 순혈들은 골치가 아프거든요. 인간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을 만큼 강하니까.”

그렇다고 라이칸이 뱀파이어를 싫어하는 이유가 상전 모시기 싫어서는 아니고, 원래 사이 안 좋은 애들인데 쪽수로도 라이칸이 훨씬 우세하지만 몇 안 되는 순혈을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으니까 서로 마주치기 싫어해요. 사실 순혈 뱀파이어 입장에서도 라이칸이랑 맞붙어서 잘된 역사가 없으니 그럴 만도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덧붙인 마크의 말에 케일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사이 미국의 관리국 측에서 준비했다는 차가 대기하던 주차장에 도착한 덕분에 아쉬운 얼굴을 한 마크가 케일리에게 은빛 마세라티의 차 키를 건넸다. 뉴욕의 사업가가 타고 다니기에 나쁘지 않은 차종이다.

그리고 케일리가 손에 쥔 차 키를 낚아챈 에드워드는 주차장까지 친절히 안내를 해준 마크를 향해 감사인사 하나 없이 운전석에 올라탔고, 얼른 타지 않고 뭘 하냐는 양 케일리를 재촉했다.

“그럼 마크, 다음에 또 봬요.”

싱긋 웃으며 예의상의 인사를 건넨 케일리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런 케일리를 향해 쓰게 웃은 마크가 대답했다.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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