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41)

#Mission5. Passion Week in NYC (2)

맨해튼 미드타운으로부터 4번가의 서쪽 워싱턴 스퀘어까지를 잇는 거리는 전통적으로 포토 스튜디오의 분포도가 높은 편이었다. 뉴욕 시티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부동산 시세를 생각하면 그게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는 대단히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어찌됐건 전 세계의 예술인들이 뉴욕으로, 더 정확히는 맨해튼으로 모이는 바에야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는 했다.

거기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간 소호에도 개인 스튜디오를 비롯해 렌탈 스튜디오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오늘 에드워드와 케일리가 찾아가는 곳은 유니온 스퀘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범한 뉴욕의 빌딩 중 하나였다.

뉴욕-유럽 지사의 콜라보레이션 기획상품의 프로모션 모델인 유리 아킨시나를 촬영이라는 명목으로 잡아둔 채, 대놓고 감시한다는 매우 단순한 작전이었다.

위장신분으로 잠입할 페이퍼 컴퍼니의 뉴욕 지사가 입주해 있는 빌딩의 5층부터 7층은 몇 개의 파티션으로 나뉜 거대한 포토 스튜디오였다.

자사 상품의 프로모션, 카탈로그를 위한 촬영을 위해 사용되는 그 장소는 일정이 없을 때 좁디좁은 뉴욕에서 촬영장소를 찾는 포토그래퍼들을 위해 스튜디오 렌탈 사업까지 병행하고 있는 알뜰한 전략으로 부수입을 쏠쏠히 올리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페이퍼 컴퍼니 주제에 쓸데없이 열심히 사업을 한다고 코웃음을 치는 에드워드의 의견에 케일리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었다. 이거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의 대표격인 미합중국 정부의 현 주소라고 감탄하기까지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자본주의나 산업혁명 같은 단어는 안타깝게도 그들의 모국에 더 어울렸다.

미국의 이민국이-더 정확히는 국토안보부가.- 2000년대 초반 설립해 현재는 그럴듯한 패스트 패션 브랜드로 포장된 페이퍼 컴퍼니는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 시티에 발 빠르게 자리를 잡아 꾸준히 그 몸집을 불려나가는 중이었다. 본사는 샌프란시스코였으나 뉴욕 지사의 규모도 만만찮았고, 런던과 파리, 스웨덴을 위시한 유럽 지사도 빠른 성장률을 보이는 썩 나쁘지 않았다.

국토안보부에서도 수사를 위해서 종종 경력을 위장한 인사발령을 내리는 것 외에는 별달리 손을 대지 않았고 사업 자체는 전문 경영자를 고용해 평범하게 운영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민국에서는 이번 유리 아킨시나의 뉴욕 방문에서 감시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그가 이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 잡을 수 있는 최대한 일정을 확보했다.

거기에 든 마케팅 비용이 상상을 초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회사 측에서는 오히려 전 세계의 브랜드에서 잡지 못해 안달인 유리 아킨시나를 데리고 온 수완을 높게 평가했다. 덕분에 이번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포장된 에드워드를 향한 기대가 대단하다고 위장신분의 설명에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 아킨시나의 뉴욕 입성을 전달받은 후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온 페이커 컴퍼니의 마케팅 부서 총 책임자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건물 로비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비서로 보이는 단정한 정장의 여자와 함께 막 건물에 들어온 케일리와 에드워드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해밀턴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허허,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 가득 담은 채 두 팔을 벌린 살집 있는 남자는 전화 속 목소리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대로의 풍채를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y축은 에드워드와 거의 동일했지만, x축이 1.5배 정도로 비대했다.

그 탓인지 기껏해야 삼십 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는 어딘지 연륜이 느껴지는 대단히 푸근한 인상을 한 채, 온몸으로 환영을 표현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두 팔이 끌어안을 수 있는 범위에서 슬쩍 벗어난 에드워드가 기계적인 미소를 만들었다.

깔끔하게 넘긴 금발과 다소 답답한 차림의 슈트, 그리고 도수가 없는 뿔테안경은 평소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다소 완화시켰고 에드워드를 젊고 유능한 신진 사업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별달리 민망한 기색도 없이 포옹을 포기한 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 남자가 말했다.

“아침에 연락드린 뉴욕 지사 프로모션 부서 총 책임자인 제프 하버입니다. 이쪽은 제 비서 한나 로빈슨이죠.

해밀턴 씨의 유럽 지사에서의 성공신화는 익히 들었습니다. 이번 시즌 신제품도 기획단계부터 개발, 마케팅까지 해밀턴 씨의 손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더군요.

그 콧대 높은 유리 아킨시나를 단기간에 섭외해낸 놀라운 영업력까지, 같은 마케팅 종사자로서 성공 비결을 꼭 배우고 싶군요.”

그렇게 말하며 하하하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싱긋,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번 NY 지사와의 콜라보 기획 총 책임자인 에드워드 해밀턴입니다. 이쪽이야말로 NY 지사의 훌륭한 실적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짧은 기간입니다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환하게 밝아지는 남자의 표정을 보건대 아무래도 에드워드는 전설적인 성공신화 같은 걸 가진 마케팅맨이라는 설정인 모양이다.

케일리와 에드워드는 이미 위장신분에 대해 숙지해야 할 부분은 머릿속에 수납한 상태였다.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 런던에 거점을 둔 영국 지사에서 몇몇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수완가.

하지만 이력으로 나열되어 있는 몇 줄의 문장과 실제로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을 대면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생경했다. 잠입수사라는 건 수사행위보다는 조금 더, 그래, 오히려 배우와 같은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케일리는 오늘의 자신이 유럽 지사의 콜라보레이션 기획을 담당한 총 책임자 에드워드 해밀턴의 비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간단히 악수를 마친 후 제프가 케일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케일리 로체니입니다.”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는 케일리를 향해 제프가 호탕하게 웃으며 커다란 동작으로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두터운 손바닥은 조금 축축했고, 손을 놓고 보니 금세 붉게 손자국이 생겨 있었다.

“촬영 시작까지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깐 사무실에 올라가시겠습니까? 마침 최근에 좋은 차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분명 영국 분들의 입맛에도 맞을 겁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그렇게 말하는 제프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프로젝트의 방향은 미리 보낸 기획서 그대로입니다만,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부정의 의사를 표현한 제프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기획은 흠잡을 구석 없이 훌륭했습니다! 이번 기획이 아니라 현재 다음 시즌 프로젝트로 준비하고 있는 신상품 프로모션에 대해 해밀턴 씨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흠……, 아무래도 가능한 한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기 때문에 먼저 스튜디오에 가고 싶습니다만.”

“물론 촬영 시작 전에는 스튜디오에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본사에서 걸고 있는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니 저라도 모든 과정을 꼼꼼히 체크하고 싶었을 테니, 길게 시간을 내시기 힘든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거절할 방법이 없다. 애매한 침묵이 네 사람의 사이를 가르는 사이, 에드워드가 곤란해함을 눈치챘는지 케일리가 대단히 무해한 미소를 지었고 두 사람을 향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정 걱정이 된다면 제가 먼저 스튜디오에 가 있을까요? 해밀턴 씨의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케일리로서는 에드워드의 상황을 고려해 자신이 해야 할 타당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으나,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데다 그들의 실제 임무와도 동떨어진 의견이 아닐 수 없었다.

관리국에서 케일리와 자신을 2인 1조로 보낸 것은 대체로 뱀파이어인 자신에게 라이칸을 감시하라는 뜻이지, 인간인 데다 이종에 대한 경험도 적고 전력으로 계산하기에도 애매한-아예 못 써먹는 것도, 아주 쓸 만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케일리를 달랑 보내라는 뜻은 아니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인 케일리가 이민국의 요원이라는 걸 상대 라이칸이 알아낼 방법은 없었지만, 흉흉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라이칸에게 혼자 보내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일이 귀찮아지는 것보다도, 에드워드 자신이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제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케일리와 함께 사무실까지 올라가는 방향으로 대답을 하려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니 그도 함께 사무실에,”

“그거 좋은 방법이로군요! 로체니 씨, 그러면 먼저 스튜디오에 가서 해밀턴 씨를 대신해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기획서대로 준비되어 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 부족하거나 잘못된 게 있다면 바로 연락을 주시면 저도 함께 내려가면 되겠네요. 한나, 로체니 씨를 3번 스튜디오에 안내해주게.”

활짝 웃으며 썩 좋은 해결방법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말하는 제프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잊지는 않았는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아니, 저는 뉴욕 측에서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굳이 그를 먼저 보낼 필요는 없…….”이라고 재차 케일리의 뒷덜미를 잡았지만 제프가 한 수 빨랐다.

땡.

어느새 눌렀는지 6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제프는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케일리의 등을 떠밀었다. 제프의 비서 한나 또한 그를 안내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에드워드가 뭐라고 항변할 틈도 없이 문이 닫혔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제프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잠시간 침묵했다. 대개 대화를 비유해 캐치볼이라고들 하는데, 가끔 이런 놈들이 있었다. 저 하고 싶은 말만 벽에다 주구장창 던져대는 스쿼시 파. 그리고 에드워드는 그런 놈들을 질색했다.

그 자신이 캐치볼에 지극히 무관심한 스쿼시 파라고 해도, 다른 놈들이 그러는 꼴은 못 봐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악질적인 남자가 아닐 수 없다.

눈앞의 후덕한 남자를 바라보며 네놈의 다음 프로젝트를 화려하게 망칠 수 있도록 성심성의를 다한 조언을 해주겠다고 다짐하며, 에드워드는 독을 품은 꽃과 같이 화려한 미소로 화답했다.

◇ ◆ ◇

어차피 자신의 사업도 아니니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가벼운 마음에 표현한 선의였다. 깃털 같은 가벼움으로 에드워드를 거하게 물먹인 케일리는 오래간만에 착한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얼굴 가득 담은 채 한나의 안내를 따랐다.

1번과 2번 스튜디오를 지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3번 스튜디오에 발을 들이자마자, “제프 그 새끼는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하는 노성이 터져 나왔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높은 천장에 울려 퍼졌고 그에 못지않게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휴대전화를 붙잡은 채 무언가를 향해 사정사정 매달리고 있었다.

제프, 바로 방금 전까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고 있었던 뉴욕 지사의 프로모션 담당자였다.

별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촬영장의 분위기에 케일리가 가만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어도 있는 것 같다. 에드워드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걸까.

만약 프로젝트가 잘못된다고 해서 진짜 회사원이 아닌 그들에게 별다른 문제가 벌어지는 건 아닐 테다. 그래도 지금 주어진 위장신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에드워드의 비서처럼 굴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케일리가 에드워드 당사자는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케일리와 함께 막 스튜디오에 들어선 한나 역시 무슨 일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런 그녀를 향해 타이밍 좋게 고개를 돌린 남자가 화난 걸음으로 달려왔다.

“한나, 왜 사무실에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휴대전화도, 내선도, 아무것도 안 받았다고!”

오늘 촬영현장의 총 책임자인 브리안 오라일리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고함을 쏟아냈다. 아직 본 촬영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본 촬영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도 다 끝내지 못한 내부가 빤히 보였다. 그런데도 스태프들은 촬영 준비보다도 제 휴대전화에 매달려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차분히 확인한 한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오늘 촬영에는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됐다. 3개월 뒤 크리스마스 시즌을 위한 가장 큰 기획이었고, 유럽 지사와 뉴욕 지사에서 가장 힘을 넣고 있는 프로모션이었다.

의류, 향수, 시계로 구성된 총 일곱 개의 기획상품을 대표할 메인 모델인 유리 아킨시나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톱모델이었고 그에게서 받아낸 시간은 기껏해야 사흘뿐이었다. 이틀간의 촬영과 하루의 예비일. 그것도 사흘째의 예비일은 반나절뿐이었다.

하루를 공치면 날아가는 금액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메인 모델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상품 기획단계부터 유리 아킨시나를 이미지한 겨울 라인업으로 대대적인 광고를 때린 후였으니 말이다.

차분히 질문하는 한나를 향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 숨을 내뱉던 오라일리가 사나운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꽥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그래! 지금 링컨 터널에서 다중 추돌사고가 나서 출근길이 완전히 마비됐다잖아!”

“그, 링컨 터널 말인가요?”

“그것도 중앙 터널에서! 어떤 멍청이가 앞차를 추월하려다 실수로 박았는데, 그 뒤로 줄줄이 비엔나로 엮여서 개판이 났다잖아. 근처 병원도 미어터지고, 교통은 통제되고, 지금 완전히 개판이라고! 텔레비전이며 라디오며 그 속보뿐이야.”

허드슨 강 아래에 설치된 링컨 터널은 주변 도시와 맨해튼 섬을 잇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과거에도 몇 번인가 사고로 인한 교통통제가 있었지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한나의 얼굴이 흙색으로 물들었다.

“제기랄. 당장 연락 들어온 건 저지 시티에서 출근하는 촬영 보조 셋이 제시간에는 못 온다는 거고, 유니온 시티에 사는 모델 둘도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대.”

절망적인 것은 오라일리도 마찬가지였다.

뉴욕 지사 프로모션 부서의 헤드 기획자인 그는 이번 기획이 대박을 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부하직원들에게 통제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에 열정적인 브리안 오라일리는 근 한 달을 집에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에 처박혀 오늘만을 준비했다.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유리 아킨시나의 사흘. 그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을 얻기 위해 그 자신과 부하직원들을 혹사시켜왔다.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를 눈앞에 둔 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서 있던 한나가 꾸욱,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레귤러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였고,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교통사고는 천재지변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처지를 유리 아킨시나가 배려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킨시나의 스케줄은 향후 1년간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올여름 발안한 기획에 그를 끌어들인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패션위크를 맞은 뉴욕에 머무는 톱모델 아킨시나의 시간을 더 얻어내는 건 모세를 데리고 와도 불가능할 일임에 틀림없었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오라일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아직 다 도착한 게 아니라서 사고에 휘말린 애들이 있으면 연락도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우린 망했다고 복창해야 해.

한나 너 유리 아킨시나가 한 시간에 얼마를 받아 가는지 알기나 해? 걔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도, 걔들 없이 찍어도, 이번 프로젝트는 완전히 망한 거나 다름없다고.”

“대타는요? 모델이라면 패션위크에 초대된 맨즈 중에 일찍 도착한 사람이 있을 테니 전화 돌려요. 유리 아킨시나랑 같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겠어요? 스태프들도 주변 스튜디오에 전화 돌려서 구하면…….”

“지금 쟤들이 휴대전화 들고 장난전화라도 하는 것처럼 보여?”

“제프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제프 그 자식은 말이야,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당장 그 새끼 멱살 잡고 끌고 내려와! 그놈한테도 휴대전화 쥐어주고 대타 찾으러 뛰어다니게 만들란 말이야!”

한나는 휴대전화를 붙잡고 몇 번인가 버릇처럼 입술을 짓씹는가 싶더니, 전화를 받지 않는 제프를 데리러 가겠다고 케일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라졌다.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자신을 두고 떠나는 한나의 뒷모습에 케일리는 조금 당황했다. 이 경우 자신은 에드워드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걸까. 상당히 애매했다.

에드워드가 온다고 해서 링컨 터널의 사고가 해결되지도, 뉴욕에 연고가 없는 그들이 필요한 스태프를 모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도 기획의 책임자니까 문제가 생겼다는 건 전달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혼돈에 빠진 스튜디오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에드워드의 번호를 찾던 케일리의 귀에 절망한 오라일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놈들은 이 좋은 맨해튼을 두고 죄다 교외에 사는 건데?! 세 시간이나 걸린다고? 말도 안 돼! 삼십 분 안에 올 수 있는 놈 없어? ……없다고? 여긴 뉴욕이라고! 그런데 대타 뛸 모델 하나가 없다는 게 말이나 돼?”

전화기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오라일리의 기세에 휴대전화를 쥔 채 잠시간 동작을 멈춘 케일리의 눈에 동정이 담겼다.

사고 때문에 뉴욕에 출퇴근 하는 주변 스튜디오의 스태프들도 당장 촬영에 부르기가 요원한 모양이었다. 그런 오라일리를 향해 케일리가 툭툭,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팔뚝을 가볍게 두드렸고 험상궂은 얼굴이 홱 뒤돌았다.

“저, 심각한 이야기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별달리 기죽은 기색 없이 케일리가 그렇게 말했다. 3번 스튜디오에서 유일하게 폭풍에 휘말리지 않고 있는 것처럼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에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오라일리가 무어라 입을 벌리다 말고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았다.

모르는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한나가 들어올 때 옆에 서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있는 둥 없는 둥 존재감이 옅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고, 신경 쓸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통성명도 하지 않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오라일리가 케일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었다. 뉴욕에서 패스트 패션 회사의 프로모션 담당자로 일하며 생긴 버릇이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제일 먼저 외견을 보게 되는 것은 거의 직업병이었다.

남자의 프로포션은 썩 괜찮았다. 키가 좀 작기는 했지만 비율도 좋았고 정장을 입은 태도 훌륭했다. 표정이 옅었으나 메인으로 내세울 게 아니라면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급한 대로 데려다 쓰기에는 나쁘지 않은…… 아니, 퍽 괜찮은 소재다.

도착 못한 모델 둘은 여자였지만 어차피 맨즈 상품의 프로모션이다. 여자 모델을 대신해 남자를 집어넣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 테지. 시대는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켰고 유니섹스다, 메트로 섹슈얼이다를 외치고 있었다. 남자 모델이 여자 모델을 대신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대단한 억지라는 걸 오라일리 자신도 자각하고 있었지만 어찌됐건 그에게는 다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그를 쓸지 말지 정하는 건 오라일리 자신이 아니다. 어차피 당장 끌고 올 수 있는 모델에는 한계가 있었고 최소 두 명은 비는 자리에 누구라도 채워야 했다. 어차피 유리 아킨시나의 들러리 역할이니 그와 같은 급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포토그래퍼는 건너편에서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었으니 지금 당장 물어보면 될 테고, 나머지는 최종 결정권자인 런던 책임자뿐이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텐데…….

“그런데…… 넌 누구야?”

일단 신상명세서나 받아보자 싶어 툭 던진 오라일리를 향해 케일리가 대답했다.

“케일리 로체니. 런던 지사에서 온 에드워드 해밀턴 씨의 비서입니다. 제프 하버 씨가 해밀턴 씨에게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 해서, 촬영 준비가 잘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가 먼저 내려왔습니다.”

아무래도 벌써 도착해 있었는데 멍청한 제프가 중간에 낚아챈 모양이다.

한나가 어서 빨리 그 둘을 끌고 와야 할 텐데. 런던 책임자의 비서라면 이번 프로젝트에 책임이 있으니 일이 쉬워질지도 몰랐다.

잔뜩 성이 나 있던 오라일리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케일리를 향해 불쑥 손을 내민 그가 싱긋 웃었다. 오늘 스튜디오에 도착해 처음 짓는 미소였다.

“그렇군. 난 브리안 오라일리, 뉴욕 지사 마케팅부 기획부장이야. 그쪽 상사가 도착하면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니야. 일단 나랑 같이 좀 가지.”

대관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며, 나한테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양 의문 섞인 표정을 돌리는 케일리의 팔을 불쑥 잡아챈 오라일리는 제법 힘이 셌다.

“네? 그, 저야말로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에드워드의 비서로 위장하고 있기는 했지만 패션업계에 대해 쥐뿔도 모르니 문제가 생겼다는 것 외에는 전달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건지나 물어보고 유리 아킨시나의 감시가 가능하다면 모르는 척 구석에 의자라도 빌려 앉아 있으려고 했다. 케일리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도움도 못 될 거라면 방해하지 않는 게 그들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케일리의 생각과는 달리 오라일리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지금 막 떠오른 플랜 B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으로. 지금 터널 사고 때문에 사람이 도착 못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상품 콘셉트에 사진구도까지 다 정해져 있는데 여기서 사람이 빠지면 제시간에 촬영 못 끝내. 스태프가 부족한 건 어떻게든 채워 넣을 수 있지만 모델은 힘들지.”

“……?”

그래서 나한테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양 의문 섞인 표정을 돌리는 케일리의 팔을 불쑥 잡아챈 오라일리는 제법 힘이 셌다. 그에게 질질 끌려가며 케일리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파악하기 위해 오라일리의 말을 되짚었다.

스태프가 부족한 건 채울 수 있지만 모델은 못 채운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일까?

그렇게 생각에 잠긴 케일리는 어느새 머리통보다 커다란 카메라에 들러붙은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오라일리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남자는 대단히 사나운 인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델은?”

“린다와 마리안은 제시간에 못 올 거라고 연락이 왔고, 스칼렛, 니나, 진이 아직이야. 십 분 뒤면 타임 리밋이니 나중에 도착하더라도 지금은 빼고 가는 걸 고려해야 해.”

결국 지금 스튜디오에 제대로 도착한 건 오늘 촬영에 필요한 총 여덟 명의 모델 중 반절도 안 되는 셋뿐이라는 뜻이었다. 유리 아킨시나, 발렌티나, 아나이스.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프로모션의 얼굴인 유리 아킨시나가 문제없이 도착했다는 것 정도일까.

“스태프는?”

“여섯 명이 아직. 사고에 휘말려서 늦을 것 같다고 연락 온 건 셋.”

“망했군.”

“스태프는 이쪽에서 어떻게든 해결할게. 지금 기획팀이라 마케팅팀 애들 전부 소호에 보냈어. 아마추어라도 괜찮으니까 실무 경력 있는 애들이 보이면 다 잡아오라고. 한 시간이면 다섯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거야.”

“돈은 좀 들겠지만, 지금 문제는 그깟 알바비 푼돈이 아니니까.”

제법 차분한 어조로 덧붙이는 오라일리의 대답에 남자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투박하고 커다란 손은 카메라보다는 총이나 망치 같은 것이 더 어울렸지만 저래 봬도 남자의 손은 패션업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불릴 만큼 실력이 대단했다.

“모델은 어떻게 할 건데? 지금 와서 콘셉트를 바꿀 수는 없어. 소품 배치부터 시작해서 구도까지 여덟 명 분을 계산한 거라고. 아무리 유리 아킨시나가 메인이라지만 최소한 넷은 필요해. 셋 가지고는 못 찍어.”

아무리 자신이라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고 딱 잘라 말하는 남자에게 오라일리가 불쑥 케일리를 내밀었다.

“그래서 하나 데려왔잖아. 지금 다른 애들도 전화 돌리고 있어. 일단 사십 분 뒤면 본 촬영 들어가야 하니까 지금 있는 인원으로 찍을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줘.”

“……남자잖아?”

“어차피 중요한 건 아킨시나야. 남자든 여자든 머릿수만 채우면 될 것 아냐?”

“지금 나랑 장난쳐?”

어이가 없다는 양 자신과 케일리를 번갈아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오라일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진심이야. 우리가 유리 아킨시나한테 한 시간에 얼마를 지불하는지 알기나 해? 게다가 돈이 있다고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고. 아킨시나의 시간은 농담이 아니라 금보다 귀해. 남자든 여자든 트랜스젠더든 놈의 들러리가 누구든 상관없어. 너도 알잖아. 이번 프로모션에서 중요한 건 유리 아킨시나지, 들러리가 아니야. 어차피 보는 사람들도 옆에 선 게 남자든 여자든 신경 안 쓸걸?”

억지에 가까운 오라일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게다가 그가 데리고 온 사내, 케일리는 남자가 고심해서 고른 모델들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유리 아킨시나에게 압도되지 않으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정적이고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외견.

그래 뭐, 이 정도면 급하게 구해온 것치고는 쓸 만했다. 마음에 차는 건 아니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니 하는 수 없지.

의외로 간단히 케일리의 난입을 허락한 남자에 오라일리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일단 적은 인원으로 진행할 수 있는 촬영을 앞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대타 모델을 구하고 생각해야겠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긴 오라일리가 휴대전화를 붙잡고 모델을 수배하던 부하직원 하나를 붙잡았다.

“촬영 순서를 바꿀 거야. 넷으로 찍는 게 시계고, 둘이 찍는 게 향수였나? 일단 시계를 첫 촬영으로 바꿔. 향수는 아킨시나랑 마리안이 찍기로 했으니까 최대한 기다려보겠지만, 마리안이 오늘 안에 못 온다면 내일로 미룰 수는 없어. 지금 온 애들 중에 대역을 넣든지, 최악의 경우에는 혼자 찍거나…….”

거기까지 말한 오라일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일리를 훑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린 신제품 향수는 유니섹스도, 남녀 세트도 아니었다. 어차피 맨즈 향수니 여자 모델을 빼고 남자 모델만 둘을 넣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럴 바에야 유리 아킨시나 한 사람만 넣는 게 나을지도 몰랐지만 이미 정해놓은 콘셉트를 포기하는 것도 아까웠다.

향수 광고는 유리 아킨시나와 제법 잘나가는 하이 브랜드 모델 마리안의 투샷을 예정하고 있었다.

몽환적이고 우울한 퇴폐미로 대표되는 헤로인 시크 계열에서 수년간 높은 지명도를 자랑하는 마리안 모레아누의 분위기는 유리 아킨시나의 신비로운 매력에 시너지를 더해줄 훌륭한 소재였다.

극한을 넘나드는 러시아의 설원에서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고고한 은빛 짐승, 그리고 그의 향기에 중독되어 언제 무너질지 모를 하얀 털옷을 껴입은 위태로운 미인.

하지만 마리안에게 공간이동이라는 신박한 능력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그녀가 제시간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다. 남자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시계라면 몰라도, 향수는 아킨시나 혼자 못 세워.”

유리 아킨시나를 눈 덮인 세트장에 혼자 세워놓고 향수 광고를 찍으려면 콘셉트부터 갈아엎어야 했다.

광고할 상품이 향수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향에 취한다는 콘셉트를 세우고 파트너 모델을 기용한 것이었다. 아무리 유리 아킨시나의 파급력이 대단하다지만 상품을 대표하지 못하면 비싼 돈을 내는 의미가 없는 예술사진이 된다. 포토그래퍼에게는 좋은 일일지 몰라도 광고주는 그 결과를 썩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걔 세우자.”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여자 모델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다.

맨즈 향수의 광고 포스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치명적인 남자 모델의 향에 취한 여자 모델’의 구도는 말 그대로 클래식일 뿐, 완벽한 가이드라인은 아니었다. 다만 유리 아킨시나 자체의 이름값과 굳이 다른 잔재주를 부릴 필요 없이 먹히는 이미지 덕분에 클래식으로 가자는 의견이 이견 없이 통과되었을 뿐.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한 채 속전속결로 끝난 새 모델의 캐스팅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당사자, 케일리가 가만히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지금쯤 끼어들지 않으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았다.

“저, 이야기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케일리는 아직도 제 팔을 붙잡고 있는 오라일리의 손을 떼어냈다. 그런 케일리를 향해 오라일리가 말했다.

“응? 왜? 뭐 할 말 있어?”

“네. 아까부터 할 말이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요. 일단 저는 오버워크를 상당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제 일은 여러분이 안고 있는 문제를 에드워……, 해밀턴 씨가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전화를 하거나 하지 않는 걸 정하는 것뿐이라서요. 말씀하신 모델이 되는 일 같은 건 제 업무가 아니죠.”

전 회사나 전전 회사에 비해 의욕적인 기분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 중 책임감을 느낄 만한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데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서였다. 거기에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닌 일을 푹푹 퍼 담는 것을 가만히 구경하기만 할 케일리가 아니었다.

그는 매우 정중한 어조로 ‘나는 내 할 일만 한다’는 그의 직업적 신념을 전달했고, 오라일리와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간 눈빛을 교환했다.

“그냥 인형놀이의 인형이 됐다고 생각하면 돼. 아무도 그쪽한테 어려운 연기를 바라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원래 콘셉트도 별거 없었어. 좀 병약해 보이게 메이크업 하고 아킨시나가 광고하는 향수 냄새를 맡는 척만 하면 끝이야. 술 마셔봤지? 술 취한 것처럼 해롱거리면 된다고. 그것만 해내면 시간당 2천 달러 쳐줄게.”

오라일리가 말했다. 원래 모델인 마리안은 그것보다 더 받았지만, 일반인에게는 제법 괜찮은 금액일 것이다. 어차피 향수 광고 하나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반나절이었다.

여섯 시간을 풀로 쓴다고 해도 기껏해야 1만 2천. 마리안의 몸값을 생각하면 오히려 전체 예산은 줄어드는 셈이니 투샷을 망치면 유리만 남기거나, 아니면 투샷을 찍어놓고 케일리의 뒤통수만 내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잘됐네요.”

오라일리는 자신의 열변에 싱긋 미소와 함께 되돌아온 케일리의 답변을 들으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활짝 편 얼굴로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은 오라일리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렇지?! 게다가 대박 나면 광고주가 인센티브 줄…….”

“네, 그러니까 저기 계시는 남자 분을 대신 써주세요. 저랑 체격도 비슷하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니 분명 문제없을 겁니다.”

“……어?”

“아, 여섯 시간에 1만 2천이라는 것도 꼭 말해주세요. 그래야 저분도 귀찮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니까요.”

“…….”

그렇게 귀찮고 재미없는 일이라면 1만 2천이라는 보수를 꼭 이야기 해야만 할 거라는 뉘앙스로 튀어나온 케일리의 말에 오라일리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보통 회사원들은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에 만 달러를 번다고 하면 눈이 뒤집히는 게 정상이다. 마리안의 보수에 비하면 상당히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반인을 쓰는 것치고는 상당한 금액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설마 몸값을 올리려는 수작인가?’

저도 모르게 상상력을 발휘해 케일리의 의도를 캐내려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을 담은 오라일리는 “아, 그러고 보니까…….” 하고 무언가를 덧붙이려 입을 여는 케일리에 그럼 그렇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가 상상하지 못한 대각선 위를 뻗어가고 있었다.

“이걸로 문제는 해결된 거니까 해밀턴 씨에게 연락할 필요 없겠네요. 저는 방해가 안 되도록 앉아서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의자 같은 걸 빌릴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시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몸값을 올리기는커녕 문제가 생긴 현장을 확인하고서 제 상사에게 전화 한통 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 케일리 로체니 씨?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쪽이랑 같이 찍힐 유리 아킨시나는 지금 내로라하는 브랜드에서 끌어당기고 싶어서 환장한 거물이야. 그리고 이쪽은 포토그래퍼인 알렌 샤프인데 얘한테 찍히고 싶어 하는 모델을 줄 세우면 센트럴 파크를 두 바퀴는 돌려야 할걸?”

“저는 유리 아킨시나 씨를 끌어당기고 싶어 하는 브랜드가 아니고, 알렌 샤프 씨에게 찍히고 싶어 하는 모델도 아닌데요.”

따박따박 흘러나오는 반박에 오라일리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몰이해와 어떻게 저런 관점이 존재할 수 있냐는 진심 어린 의문, 그리고 당황이 섞인 얼굴을 한 채 오라일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그런 식으로……, 광고가 대박 나서 모델로 데뷔할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저한테 있어서 유리 아킨시나 씨와 사진을 찍는 게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

이번에야말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양 경악과 함께 벌어진 입을 한 오라일리를 향해 케일리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글쎄요, 그가 대단히 잘생겼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저한테 뭔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유리 아킨시나 씨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잘생긴 사람은 많을 테고 그런 사람들이 있거나 없거나 저는 아마 신경 안 쓰고 살아갈 테고…….”

거기까지 말한 케일리는 어째서인지 알렌과 오라일리가 말이 이어지는 것과 함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뒤로 시선을 옮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진짜였다. 바로 뒤에 기척이 느껴졌다. 갑자기 무겁게 끼쳐온 것과는 달리, 바로 뒤까지 다가오기 전까지 느끼지 못할 만큼 희미한 기척이었다.

제삼자의 출현에 자연스럽게 말을 멈춘 케일리는 오라일리와 알렌이 쳐다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리 아킨시나가 서 있었다.

자신이 모델이 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거절의 말을 늘어놓던 와중, 당사자가 나타난 것에 케일리는 다소 낭패감을 느꼈다. 먼저 유리 아킨시나는 앞으로 열흘간 감시해야 할 대상이었고 가능하면 직접 엮이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못할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모델이라고 했나? 그런 사람들은 아무래도 외모에 대한 이야기에 민감하겠지. 오해를 사기 전에 사과를 하는 게 좋을까?

그의 영향력을 폄하하려 한 것보다는, 자신에게 있어서 그와 함께 사진을 찍히는 것이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를 알렌과 오라일리에게 납득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 하나가 훤칠하게 큰 유리 아킨시나는 감정을 잡아내기가 어려운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아킨시나 씨…….”

케일리가 순순히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까?”

짐승의 목울림처럼 거친 음색이 섞인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직시해 오는 눈동자는 하얀 달의 표면처럼 기묘하게 주변의 색을 흡수했다.

진짜 색은 이쪽이었구나. 그래서 조명마다 색이 달라지는 거였어.

약간의 호기심이 해결되는 것과 동시에 별달리 변화가 없는 케일리의 표정을 물끄러미 탐색한 아킨시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죠.”

어딘지 고집 섞인 시선은 케일리가 아니라, 알렌과 오라일리를 향해 있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알렌과 오라일리는 유리 아킨시나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해냈다.

순서가 바뀌었다. 첫 촬영은 시계가 아니라, 향수 광고였다.

◇ ◆ ◇

에드워드는 언제쯤 스튜디오에 내려올까?

빨대를 입에 물고 아이스티를 쭈욱 빨아올리며 케일리는 제가 판 무덤에 가만히 들어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에드워드가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는데, 한나가 나간 지 십 분이 지나도록 내려올 기미가 없다. 전화를 해볼까, 잠시간 고민했지만 어차피 올 테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현재 케일리는 얼굴 위를 간질이는 붓이며 연필에 간간이 눈을 감거나 입술을 내밀어보라는 대단히 성가신 지시들에 순순히 응하고 있었다. 유리 아킨시나의 등장으로 자신의 미약한 반항은 일단락되었으며 알렌과 오라일리에게 끌려오다시피 한 분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까지 당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쑥 내밀어진 아이스티는 맛있었기 때문이다.

라즈베리 향이 따라오는 떫은맛을 혀에서 굴리며 케일리는 어쩌면 자신이 유리 아킨시나의 자존심을 상당히 귀찮은 방향으로 건드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뉴욕까지 오는 전용기 안에서 읽은 라이칸은 대체로 이족보행을 하는 늑대 비슷한 생물이었다. 늑대는 대개 고고한 성정에 자존심이 높은 동물이라 묘사되곤 하는데, 그게 라이칸에게도 적용될지는 의문이었다. 생태학적인 특징을 읊어봤자 그를 대하는 데 있어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결국 남는 것은 유리 아킨시나라는 개인뿐이다.

기껏해야 옆에 서서 사진을 같이 찍는 것 정도로 문제가 생기지야 않겠지만……역시 어째서 그런 짓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소한 의문과 성가심이 기분을 가라앉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한창 생각에 잠겨 스스로의 처지에 침울함을 느끼던 케일리는, 그나마 기분을 낫게 만들던 아이스티를 빼앗아 드는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에 매달리듯 시선을 움직였다. 아이스티에 따라붙는 순한 밤색 눈동자에 억울함이 담기자,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스타일리스트가 변명하듯 말했다.

“빨대 물고 있으면 립 번져요. 다 찍고 나면 또 만들어드릴게요.”

친절하게 웃는 스타일리스트에 케일리는 별말 없이 아이스티를 포기했다. 어차피 거의 다 마셔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갈증도 해소된 참이었다.

분장실에 끌려 들어와 갈아입게 된 옷은 원래 입고 있던 차콜 그레이의 비즈니스 슈트와 비교해 몸의 굴곡을 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올 블랙의 슈트였다.

케일리는 자신이 입고 다니는 옷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고 선호하는 브랜드도 없었지만 이 옷이 모델 사이즈로 나온 것이라면 자신에게 들어맞은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깝다는 사실은 알았다. 대학시절의 동기 중 하나가 이 브랜드에 미쳐서 단지 ‘옷을 제대로 입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는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올 옴므.

실제로 매장까지 함께 갔을 때, 바싹 마른 건어물 같은 다리를 준비하지 않아도 입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사이즈가 있다는데 놀랐었다. 당시 동기가 이 브랜드의 옷을 제대로 입으려면 피트 도허티처럼 빼빼 말라야 한다고 광기 어린 눈을 한 채 삼시 세끼 무식하게 야채만 씹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운동을 해서 빼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붙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의 학업수준이 영국 상위 3퍼센트에 속한다는 걸 떠올리면 좋은 머리를 낭비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인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집념 강한 멍청이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디자인과 사이즈의 옷을 입게 되었고, 영양실조로 쓰러져 2주간 병원 신세를 졌다.

덕분에 케일리와 동기가 함께 속해 있던 사교클럽에서는 세상에는 L과 XL이라는 사이즈가 있었는데 어째서 사람의 몸에 맞는 옷을 사는 게 아니라 XS와 S라는 무식한 옷의 사이즈에 사람을 맞춰야 하는지에 대한 영양가 없는 담론이 반짝 유행했었다.

저택을 나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까. 식사 관리를 해주던 사람들이 없어지니 확실히 부실하게 먹기는 했지만, 생각 외로 체중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대체 그 옷이 얼마나 대단한 옷이기에 건강을 버려가며 입고 싶어 하나 궁금해 다리를 꿰어보던 케일리는 허벅지쯤에서 끼어 들어가지도 않는 바질 보고 대번에 포기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타이트했지만 평범하게 입을 수 있었다. 자신의 살이 빠졌거나, 아니면 그 정신 나간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거나 둘 중 하나겠지.

옷매무새를 만져준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의해 제법 그럴듯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케일리는 곧 등 뒤에서 덮쳐오는 묵직한 감촉에 흠칫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털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도무지 어떤 동물의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모피의 새하얀 반코트가 코끝을 간질였다.

문득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자 낯선 얼굴이 다소 우울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비해 눈매가 깊게 패여 있었고 그림자 진 이목구비는 어딘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런던의 정경을 연상시켰다.

입술은 창백한 피부색에 맞춰 혈색을 죽이는 옅은 살구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탓에 하마터면 거울 속의 남자가 자신이 아닌 줄 착각할 만큼 인상이 달라 보였다.

로체스터 공작도 텔레비전 인터뷰 전에는 간단한 메이크업을 했지만 이런 방향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새삼 자신의 가족들이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궁금해졌지만 별달리 싫어하거나 반대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핫도그 트럭에서 핫도그를 팔아도 자의로 팔고 있다면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는 언제나 통한다며 할렐루야를 외칠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남의 인형놀이에 희생된 꼴인 가엾은 사내를 잠시간 응시한 케일리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덥네요.”

코트를 입혀준 스타일리스트가 미안함 섞인 변명조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요. 크리스마스 시즌에 출시될 제품이니까요.”

하필 그 타이밍에 남의 이야기를 엿들은 유리 아킨시나가 멋대로 자존심을 상해한 덕분에 케일리는 앞으로의 열흘을 편하게 지내기 위해 그까짓 사진 몇 장 정도는 찍어주지 뭐,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어야 한다면 차라리 열흘의 귀찮음을 감수하는 게 낫다는 저울질만큼은 끝낸 후였다. 케일리가 단호한 표정으로 옷은 한 번만 갈아입어야 한다고 강조한 덕분에 똥 씹은 얼굴을 한 알렌이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이 거래에서 케일리가 얻은 것은 옷을 한 번만 갈아입어도 된다는 아주 사소한 양보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아무래도 겹겹이 껴입혀놓고 한 꺼풀씩 벗겨가며 찍으면 된다는 수작에 걸린 것 같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직 9월의 초입이었는데 한겨울 한파에서도 끄떡없을 모피코트를 걸친 케일리가 제 손으로 판 우울의 무덤에 잠겨 있는 사이, 마음이 급한 알렌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마친 케일리의 축 처진 얼굴을 마주한 그는 아주 잠깐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고, 곧 별다른 말 없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마침 분장실 앞에 붙은 유리 아킨시나의 이름을 확인한 케일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 ◆ ◇

아직 원래의 촬영 시작까지 삼십 분가량 여유가 있었지만 모처럼 일찍 도착한 유리 아킨시나가 시작 시간을 당겨도 상관없다고 선뜻 나서주었기 때문에 첫 촬영인 향수 광고의 사진을 먼저 찍기로 했다. 에드워드가 도착해 이 귀찮은 상황을 정리해주기를 내심 바랐던 케일리로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본 촬영에 들어가기 전 향수 광고의 두 모델인 아킨시나와 케일리를 불러 모은 알렌이 간단히 콘셉트와 구도에 대해 설명했다.

여자 모델이었을 때는 좀 더 유리 아킨시나와의 접점에 섹스어필을 강조한 분위기였지만 모델의 성별이 바뀌었으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모양이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심지어는 인간도 아닌 남자와 묶여 섹스어필을 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케일리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향수 광고다 보니 광고의 얼굴인 유리 아킨시나의 향에 취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알렌의 설명을 들으며 케일리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후각이 예민한 편도 아니라 식사를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것만 아니라면 무슨 냄새를 풍기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수컷 라이칸을 상대로 취한 척까지 해야 하다니. 차라리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잔뜩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케일리의 맞은편에서 아킨시나 또한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기분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완성된 기획서를 받아보았기 때문에 그로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상대 모델이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래도 광고해야 하는 상품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는데, 상대 모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썩은 시금치라도 입에 넣은 것처럼 싫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으니, 졸지에 썩은 시금치가 된 유리 아킨시나로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런 주제에 하얀 털에 파묻힌 남자는 가끔 눈이 마주치면 대단히 무해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친한 척을 했다. 케일리 로체니라고 했던가. 직업 모델도 아니고, 링컨 터널의 사고 때문에 끌려온 대타 주제에 스스로가 얼마나 큰 행운을 거머쥐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멍청이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모델이든 영향을 끼칠 수는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는 이야기에 악의가 없었다는 점까지 포함해, 자존심 높은 아킨시나의 신경을 교묘하게 긁어댔다.

가만히 설명을 듣고만 있는 아킨시나와 케일리 사이의 묘한 신경전에 답지 않게 눈치를 보던 알렌이 초짜인 케일리에게 그의 역할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시를 들었다.

“케일리, 혹시 아르마니 코드 광고 본 적 있어? 이번에 할 게 그거랑 좀 비슷한 구도인데.”

“없는데요.”

“잠깐 기다려봐, 검색하면 바로 나오니까……. 이런 느낌이야.”

알렌이 내민 휴대전화 액정에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파묻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여자 모델 한 쌍이 흑백으로 된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투박한 디자인의 짙은 감청색 향수병과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타이포그래피.

“아자로 뿌르 옴므의 나이트 타임이나, 리한나가 론칭했던 로그 맨 같은 분위기도 근접해.”

케일리가 생초짜라는 사실을 눈치 빠르게 캐치한 알렌은 뒤이어 두 장의 사진을 더 보여주었다. 두 가지 다 정면, 사진을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잘생긴 남자 모델과 그런 남자 모델의 목덜미에-아마도 향기에.- 취한 것처럼 늘어진 여자 모델의 구도였다. 알렌이 보여준 사진을 순서대로 확인한 케일리의 감상은 단순했다.

그것 참 취향 한번 확고한 포토그래퍼로군.

“흑백까지는 아니지만 색을 적게 쓸 거야. 배경은 합성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설원 위라고 생각하면 돼. 아킨시나한테 안 어울리는 걸 찾는 게 더 빠르기는 하지만, 하얗게 내린 눈밭에 세워두면 정말 끝내주는 그림이 나오거든.”

게다가 알렌은 유리 아킨시나를 거의 숭배하는 것 같았다. 삼십 대에서 사십 대 사이로 추정되는 애매모호한 나이의 수염 숭숭 난 중년의 사내로부터 꿈꾸는 소녀와 같은 묘한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유리 아킨시나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끼며 케일리는 대강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척을 했다.

그가 말하는 끝내주는 그림이 뭔지는 결과를 봐야 알 것 같았지만, 어쨌든 알렌에게는 유리 아킨시나를 가지고 찍고 싶은 사진이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순순히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일을 빨리 끝내는 길이라고 판단한 케일리는 방금 본 몇 장의 사진을 꼼꼼하게 기억에 수납했다.

‘그 사진처럼만 하면 된다는 뜻이지? 별로 어렵지도 않네.’라는 케일리 로체스터의 생각이 적고, 극단적일 만큼 현실 순응적인 성격이 몰고 올 파란을 예상한 자는 현 시점에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 ◇

같은 시각, 에드워드는 오피스 에리어의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브리핑 룸에서 제프가 직접 우린 차의 향을 맡고 있었다.

두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마케팅 본부는 텅 비어 인기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도착한 때가 막 8시를 넘긴 참이었는데 마케팅팀의 출근시간은 9시였기 때문이었다.

제프와 한나는 런던에서 출장을 온 에드워드를 마중하기 위해 먼저 나왔을 뿐 평소 같았으면 두 사람도 9시 무렵에 회사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마케팅팀 직원 중에도 9시부터 잡혀 있는 촬영일정에 맞춰서 스튜디오에 미리 출근한 이가 몇 있었지만 사무실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텅 빈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프로젝터와 스크린이 있는 곳에서 본격적으로 기획을 소개하고 어드바이스를 받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한 제프가 에드워드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직 시작단계인 다음 시즌의 캠페인은 벌써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있었기 때문에, 구원투수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틈에 재주 좋게 바구니에 든 스콘까지 공수해 대령한 제프는, 커다란 스크린을 내려 프로젝트를 켠 후 본격적으로 봄 시즌 기획을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 캠페인이 끝나면, 두 달 뒤 봄 시즌을 노린 하이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캠페인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H&M의 지속적인 콜라보레이션 캠페인을 벤치마킹한 다음 시즌의 기획은…….”

제프는 먼저 패스트 패션 브랜드인 H&M이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살아 있는 전설 칼 라거펠트로 스타트를 끊어 현재까지도 아르마니, 베르사체, 지미 추와 같은 유명 브랜드와 꾸준히 지속하고 있는 콜라보레이션 캠페인이 얼마나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름 하나로 천조가리 하나에 수백, 수천 달러의 값어치를 붙이는 유명 디자이너와 하이패션 브랜드, 그리고 빠른 회전과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삼은 패스트 패션.

극과 극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두 가지를 접목시켜 대박을 친 H&M의 콜라보레이션 캠페인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제프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무난하기 짝이 없는 안전한 기획에 무슨 양념을 치면 이 기획이 잘 구워진 정어리 파이마냥 역겹게 완성될까. 한 세기 하고도 조금을 더 산 에드워드의 싱싱한 두뇌가 몇 가지 괜찮은 계획이 떠올랐다.

유럽의 하이 브랜드에는 순혈 뱀파이어의 영향력이 쉽게 닿았다. 사실 개중에는 순혈 뱀파이어가 직접 키워낸 곳도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제프가 솔깃할 만한 유명 디자이너 중 온건한 축에 속하는 에드워드조차 상종하기를 꺼리는 괴짜가 몇 있다.

그중 하나를 제프의 캠페인에 연결시키면 거물을 물어다 주는 생색은 생색대로 다 내면서, 프로젝트를 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방법은 에드워드가 불러올 수 있는 수많은 개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자신의 눈앞에 멀쩡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앉은 잘생긴 금발의 영국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제프는, 미래 역겨운 정어리 파이가 되어 전 세계 패션 피플에게 외면받을지도 모를 가엾은 기획을 열정적으로 소개해갔다.

“……해서, 현재 콜라보레이션을 검토 중인 브랜드는 파리의 주요 패션 하우스들 중에서도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중반의 직장인 여성들에게 선호도가 높은…….”

에드워드에게도 익숙한 브랜드명이 언급되었고 만약 계약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웬만해서는 망하기도 힘들 만큼 나쁘지 않은 상대들이기는 했다. 아니, 사실상 패션업계에서는 그 이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브랜드뿐이었으나 제프가 직면한 문제는 실상 기획의 성공 여부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 대단한 브랜드들이 뭐하러 10년을 조금 살아남은 패스트 패션업체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려고 들겠는가. 이번 기획에 하이 브랜드를 끌어들이기 위해 드는 금액이 얼마나 될 것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을 수익은 얼마나 될 것인지. 마지막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끔찍하게 챙기는 그네들이 실질적으로 이 기획에 응답할 확률은 있는지.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에드워드가 떠올린 세 가지 의문은 패션업계의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짚어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막 개요 설명을 마친 제프가 넘긴 다음 슬라이드에는 ‘오뜨 꾸뛰르 콜라보레이션 캠페인 검토 브랜드’라는 소제목으로 브랜드 리스트가 나열되어 있었다.

허나 대부분의 브랜드명 옆의 글자는 ‘보류’, ‘검토 중’, ‘협상결렬’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으며, 에드워드가 보기에 그의 기획은 순풍에 돛을 단 배보다는 좀 더 암초를 박게 되는 살벌한 종류인 것 같았다. 어쩐지, 조언이 필요하다고 매달릴 때의 눈빛이 지나치게 절박하더라니.

하지만 제프에게는 대단히 불행스럽게도, 이 상황에서 에드워드는 결코 해양 경찰이나 구명보트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좌초시키려 드는 살아 숨 쉬고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암초 그 자체라고 하면 어울릴까.

그런 계획을 몇 개나 곱씹던 에드워드는 굳이 자신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좌초되고 있는 제프의 슬라이드를 바라보며 두꺼운 렌즈 뒤에 숨은 눈 안에 만족 가득한 심술을 띠었다.

“이미 중저가의 콜라보레이션 상품을 발매한 브랜드에서는 이미지 소비를 피하기 위해 다른 패스트 패션 브랜드와의 캠페인에 부정적으로 나올 겁니다.”

이어지는 제프의 설명은 에드워드 또한 그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것처럼 침울하게 흘러나왔다.

“H&M뿐만 아니라 타깃과 같은 월마트형 대형 할인매장에서도 디자이너 콜라보레이션을 공격적으로 쏟아내고 있죠. 게다가 대부분의 캠페인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다른 업체에서 뛰어드는 것도 시간문제지만, 눈치만 보는 건 아무래도 초기자금 문제가 큽니다.”

실제로 그의 슬라이드에는 ‘보류’의 이유로 ‘예산 초과’가 드문드문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이미 하이 클래스 커스터머를 고정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오뜨 꾸뛰르 하우스에서 이제 슬슬 기지개를 펴는 패스트 패션업체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것 자체가 네임 밸류, 그리고 이미지의 소모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저예산 고효율 대량생산이라는 것 자체가 그들 업계와는 동떨어진 얘기였다. 제프 하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하이 브랜드가 콜라보레이션 캠페인을 하는 데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었다. 가령 지미 추의 경우 구두에서 여성복으로 상품라인을 확장하는 데에 H&M과의 협력으로 리스크를 줄이겠다는 이익이 상충했을 뿐이다. 이 기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양쪽 업체에 구체적이며 확실하게 구미가 당길 만한 양념이 필요했다.

제프가 에드워드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양념이었다. 향후 몇 시즌이나 꽉 차 있는 타이트한 스케줄의 톱모델을 구워삶은 것처럼, 그 못지않게 콧대 높은 하이 브랜드와 오뜨 꾸뛰르 하우스를 함락시켜줄 묘안을 바라는 제프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예산도 애매한 데다, 기획 자체도 다른 회사에서 수도 없이 시도했을 만큼 흔하기 짝이 없군요. 그런데도 다들 성사 못 시켰던 이유가 뭐였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돈다발을 들고 찾아가도 어려울 텐데 이 예산을 누구 코에 붙이려는 건지,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제 성격이 그대로 튀어나갔다. 어이가 없다는 듯 터져 나온 에드워드의 물음은 이 기획 자체가 상대측 브랜드에서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는 가혹한 평가였다.

하지만 고작해야 단발성 시즌의 콜라보 기획에 이 이상의 예산을 책정할 수 없다는 경영 기획실과의 살벌한 3차 대전을 목하 진행 중인 제프는 동의한다는 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제프의 특기 분야는 마케팅이지 협상이 아니었다. 이번 기획을 최초로 발족했다는 이유로 기획실의 업무까지 떠맡았지만-사실 H&M의 성공신화에 눈이 돌아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으리라 혹한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역시 성미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세계적인 불황을 딛고 슬슬 회복추세를 보이는 이 시기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치면 기다리는 건 현상유지가 아니라 퇴보였다. 기회가 찾아올 때 잡는 게 아니라, 없는 기회를 창조해내서라도 잡는 게 맞았다. 그렇게 확신한 제프는 에드워드의 지적에 대해 약간의 변명조를 섞어 대답했다.

“그래서 지금 협상 중인 브랜드에 지급할 로열티를 줄이고 브랜드 네임을 빌릴 수 있도록 주력라인 외의-예를 들어 여성복 브랜드의 디자이너에게 구두를 맡긴다든지.- 상품의 기획단계에만 참가하는 ‘챌린지’ 형식의 테마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브랜드명을 빌리고, 디자인이 아니라 기획에만 참가하는 식이라면 지불할 로열티를 아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쪽이 로열티를 아끼는 것 외의 아무런 장점이 없는 얄팍한 계획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생길지언정, 새로운 프로젝트의 발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산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새로운 해결방식의 문제점을 뉴욕 지점의 마케팅 책임자인 제프가 모를 리가 없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열정적인 프레젠테이션과는 달리 어딘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늘어놓는 제프를 향해 에드워드가 콧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가볍게 치켜 올리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 계획이 먹히던가요?”

런던의 억양이 그대로 담긴 다소 거만한 투가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우아한 목소리였다. 에드워드의 물음은 실제로 그가 말하지도 않은 ‘알량한’과 같이, 대단히 노골적인 수식어를 붙인 것처럼 사납게 날아와 제프의 고막에 비수처럼 꽂혔다. 부정할 수도 없이 쓴웃음을 건 제프의 입술이 우울하게 움직였다.

“……그럴 리가요. 제일 처음 기획안을 보냈던 여성복 디자이너에게는 당신들 회사는 구두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냐는 회신을 받았죠. 그녀에게는 신상품 구두의 기획을 부탁할 예정이었거든요.”

여성복 디자이너에게 구두의 디자인도 아닌, 기획을 맡기려 했다는 제프의 말에 에드워드가 실소했다. 이건 굳이 자신이 손을 대지 않아도 조금만 기다리면 시간의 흐름에 절로 무너질 것이었다. 만약 이 남자가 정말로 이번 기획을 진지하게 해볼 생각이라면, 유럽의 콧대 높은 얼간이들을 상대한다는 게 어떤 건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단 한 군데라도, 긍정적인 대답을 돌린 곳이 있었습니까?”

사실 궁금하다기보다는 확인사살이나 다름없는 질문이었다.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은 곳은 몇 군데 있습니다만.”

제프의 씁쓸한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미국의 마케팅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제프가 거쳐온 경력의 대부분이 미국의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광고공세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지금 회사에서도 기껏해야 전국방송의 커머셜을 기획했던 것이 가장 큰 규모의 일이었다.

제프는 뉴욕 지사의 마케팅 부서를 총괄했지만 본사의 마케팅팀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글로벌 마케팅팀이 있으니 그가 직접 유럽과 소통할 기회 자체가 드물었다.

심지어 지금 회사로 이직하기 전까지 그가 몸담았던 곳은 패션업계가 아니었다. 하물며 하이 패션계에는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는데, 사업에는 쥐뿔도 관심이 없을 게 분명한 온갖 괴짜 디자이너들과 협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난제로만 느껴졌다. 최소한 상대가 미국인이기만 해도 이것보다는 쉽게 의사소통이 될 것 같았다.

그가 일하는 미국의 포토그래퍼나 자사 디자이너들은 그들만큼 콧대가 높지도, 그들만큼 숫자놀음을 못하지도, 그들만큼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제프의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그는 오뜨 꾸뛰르 하우스와 사업을 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포인트를 잡을 수 없었고, 기획을 발족한 지 두 달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뜬구름만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본격적으로 예산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크리스마스 후발 시즌의 기획 자체를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기획이 나쁜 건 아니었다. 실제로 타깃도, H&M도, 다른 회사의 이름값을 지불하고 쪽쪽 빨아먹는다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법으로 떼돈을 벌어들였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계약을 따낸 건지, 그것만 알면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제프는 생각했다.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프로젝트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속이 쓰리다는 감정적인 문제만 해결한다면, 회사의 입장에서는 분기 수익만 제대로 올려 주주들을 만족시키기만 한다면 뭘 팔아먹든 상관없을 것이다.

제프는 이 기획을 어떻게든 성공시키고 싶었다. 다른 패스트 패션업체에서 어째서 H&M의 성공신화를 쫓아가지 않았는지 통감하는 동시에, 고려 브랜드 중 단 한 곳만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잭팟이 터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는 불가능이라 불리던 유리 아킨시나와의 계약을 성사시킨 것처럼, 에드워드의 수완을 빌려 리스트에 올라간 브랜드 중 단 한 곳만, 단 하나의 계약만 따내면 그걸로 충분했다. 복권을 사는 것보다, 다음 시즌에 이길 풋볼팀을 맞히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을 두고 등을 돌리는 멍청이는 없었다. 최소한 제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밀턴 씨, 나는 평생 미국에서만 살았고 미국인들만 상대했습니다. 지금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나, 포토그래퍼들도 미국인이에요. 우리 옷을 협찬받아 가는 셀러브리티들도 죄다 미국인입니다. 그래서 망할 유럽 놈들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지 감이 안 잡힙니다. 당신 같은 수완가라면 분명 뭔가 방법이 있겠죠? 뭐라도 좋으니 어떻게 하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가르쳐주세요.”

만약 에드워드가 진짜 런던 지사의 마케팅 담당자였다면 그의 열정에 감동해 그럴듯한 어드바이스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진짜 마케팅 담당자도 아니었고, 제프의 열정이 성가시게만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인간도 아니었다. 뱀파이어에게서 인간미를 찾는 것처럼 웃긴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제프의 청을 들은 에드워드가 제법 너그러운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데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괴롭히지 않아도 충분히 괴로워하는 상대이니 너그럽게 불살라지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자는 대단히 악의 섞인 결과였을 뿐.

“나라면 처음부터 그런 멍청한 기획을 안 했겠죠.”

딱 잘라 대답한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한 줄기 희망을 찾던 제프의 얼굴에 낙담이 번졌다.

“그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제프의 등에 어떤 비수를 꽂아볼까 턱을 문지르며 즐거운 고민에 빠진 에드워드가 가만히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쾅!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브리핑 룸의 문이 열렸다. 별안간 들이닥친 요란한 소음에 저도 모르게 문 쪽으로 시선을 옮긴 에드워드와 제프는 노크 하나 없이 박차고 들어온 이가 수십 분 전 헤어진 한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프, 맙소사! 이런 곳에 처박혀 있으면 어떡합니까! 건물을 죄다 뒤지고 오는 길이라고요!”

거의 비명과 같은 새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별안간 비난의 화살을 맞은 제프가 황당한 얼굴을 했고, 에드워드 또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건물을 다 뒤졌다는 한나의 말은 과장이나 허풍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무실과 스튜디오로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깔끔하게 넘어가 있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몇 가닥 흘러내려 있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 보니 한나에게는 사무실에 갈 것이라 이야기했으니 브리핑 룸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다.

확실히 심각해 보이는 한나의 모습에, 제프는 그녀가 헥헥 숨을 고르는 사이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제 몫의 찻잔을 내밀었다. 미지근한 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한나는 그제야 살겠다는 양 길게 숨을 내뱉었고, 그런 그녀를 향해 제프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큰일이요!”

“무슨 큰일? 스튜디오에 문제도 있는 거야? 유리 아킨시나가 못 온대?”

덩달아 다급해지기 시작한 제프를 향해 한나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킨시나는 한참 전에 도착했어요.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라고요!”

“다른 사람들 누구?”

“링컨 터널에서 사고가 나서 모델과 스태프들이 못 왔어요. 이대로는 촬영이 파투 나게 생겼다고요! 맙소사, 브리안이 사무실에 연락했다는데 아무도 말 안 해줬어요?”

“이 시간에 누가 남아 있겠어?!”

“맙소사……!”

하기야, 제프에게까지 사고 이야기가 전달됐다면 스튜디오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미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죄다 소호에 달려 나가 쓸 만한 스태프를 끌어 모으고 있다고 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고나 재해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야 없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일단 총 책임자나 다름없는 제프를 찾았으니 한시름 놨다. 제프가 있다고 해서 터널이 뚫리고 모델과 스태프들이 당장 스튜디오에 도착하지는 않겠지만, 뭐라도 수를 내기 위해서는 책임자가 필요했다.

“일단 스튜디오에 내려가요! 스태프는 브리안이 어떻게든 구할 것 같은데, 모델은 어렵대요. 제프, 모델 에이전시에 인맥 있었죠? 거기 지금 당장 보내줄 수 있는 여자 모델이 있는지부터 확인을…….”

“모델 중에 빠진 게 누구야? 대체 가능한 애들이야?”

“거기까지는 확인 못했어요. 제프가 연락을 안 받는다고 브리안이 미칠 것처럼 굴었다고요!”

“젠장, 누가 빠졌는지를 알아야 대타를 구하지! 일단 가서 상황부터 파악해야……, 해밀턴 씨, 정말로 죄송합니다. 들으신 대로 교통사고 때문에 일정이 틀어지게 생겼습니다. 일단 이쪽에서도 최대한 백업요원을 구해보겠지만 상황이 나쁘면 최악의 경우 콘셉트를 바꾸는 한이 있어도 유리 아킨시나는 써야 할 겁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메인 기획을 이대로 망칠 수는 없으니까요.”

그제야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드워드의 존재를 깨달은 제프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 제프라는 남자는 지지리 일복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소리 하나 세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급한 상황과는 별달리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몸짓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에드워드가 싱긋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일단 스튜디오로 내려가죠. 뭘 할 수 있는지, 뭘 할 수 없을지는 거기서 판가름 날 겁니다.”

그 여유가 자신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제프와 한나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엘리트는 다르다는 감탄을 금치 못한 채 든든한 아군을 얻은 기분으로 스튜디오를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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