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5권) (22/41)

[BL]영국 비밀보안국의 비밀 5

#Mission5. Passion Week in NYC (4)

‘이건 대체 뭐 하자는 개판일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문장은, 평상시의 그가 잘생긴 이마를 찌푸리며 지껄일 만한 농담이나 비유와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평소와 같이 농담을 지껄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놀랍게도 에드워드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점령한 것은 섬뜩하리만치 강렬한 불쾌감이었다.

그 감정은 평소 에드워드 애쉬포드가 얼마나 이성적인 뱀파이어인가를 떠올렸을 때,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대체로 모든 것에 대해 사정없이 삐뚤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다른 순혈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에드워드는 오히려 너무 어린 시절에 인간 사회에 뛰쳐나가 지나치게 사회화가 되었다는 걱정 어린 평을 들었다.

그것은 걱정을 빙자하고 있었으나 직설적으로 말하면 뱀파이어인 주제에 너무 인간같이 군다는 상당히 모욕적인 폭언의 일종이었다.

워낙 순혈 뱀파이어의 개체수가 적다 보니, 수백 년을 두고도 아주 드물게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아이를 향한 주목은 언제나 열렬했다. 에드워드는 동족들의 귀찮은 주목까지 포함해, 그들에게도 대단히 삐뚤어진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순혈 뱀파이어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에드워드의 동족혐오를 철없는 어린애의 반항기라고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사실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유능력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이 판명 난 이후, 맛이 간 식성으로 뭇 순혈들의 비웃음을 산 것도 에드워드의 성격을 삐뚤어지게 만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렇게 성체가 되자마자 집을 나간 에드워드는 뱀파이어들과 적당한 선을 지키는 안에서 퍽 성가신 존재로 자리한 이민 관리국의 직원이 되었다. 순혈 뱀파이어들 사이에 그 소문이 퍼졌을 때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그 훌륭한 혈통과 불사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뭘 해도 성공했을 텐데 하필 고른다는 게 찌질한 공무원이라는 사실에 종내에는 에드워드를 향한 비웃음만이 남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순혈들의 사이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를-성체가 된 후에도 에드워드는 아이라고 불렸으며, 아마 수백 년간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굳이 찾아가 뜯어말릴 만한 이는 없었다.

결국 에드워드는 종종 순혈 뱀파이어들에게 너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는 염려 섞인 불평을 듣기는 했지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로저의 스토킹에 가까운 감시가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자유는 자유였다.

어찌됐건, 에드워드는 비위를 맞추기가 까다롭고 수가 틀리면 곧장 본성을 드러내기로 정평이 난 순혈 뱀파이어들 중에서는 비교적 평화롭게 인간들 틈에 섞여 있는 별종이었다.

어디까지나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에드워드는 인간들 틈에 곧잘 섞여 생활하면서도 사고를 치지 않는 훌륭한 개체이니 -B 지구에서는 놓치기 아까운 재원이다. 필드 업무 중 다소-이 수식어에 페어리는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과격하고 작전상 불필요했던 부차적 피해를 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임무 자체는 성공시켰다.

그 부차적 피해가 예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데다, 임무가 성공하는 과정을 전적으로 에드워드의 증언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은 -B 지구가 끌어안은 고질적인 문제였다.

원래 필드요원은 안전문제로 2인 1 유닛 체제로 운영되었고, 에드워드에게 꼬리를 붙일 명목은 충분했다. 그 꼬리가 브레이크까지는 못 되더라도, 살아 움직이는 CCTV 정도로는 기능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용된 것이 바로 케일리였다.

-B 지구에서는 에드워드에게 꼬리를 붙이고 싶어 했고, 에드워드는 타인-혹은 이종.-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질색했다. 그래도 -B 지구는 끈질기게 꼬리를 달았고, 에드워드는 그들을 쫓아냈다. 그러다 페어리의 그물망에 케일리가 걸려들었다.

그라고 해서 에드워드의 괜찮은 꼬리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아무렇게나 내뱉은 조건에 맞는 인간이니 당분간 붙여둘 수는 있으리라 생각했던 정도였다. 허나 놀랍게도, 그는 에드워드의 까다로운 선 안에 발을 들였다. 지금껏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던 기발한 방법인 동시에, 케일리 로체스터가 아니면 성립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이상한 식성의 뱀파이어와 이상한 성격의 인간이 어쩌다 보니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 것뿐이었다. 심지어는 제 몸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이곳에서 그 사실을 문제라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사자인 케일리조차 그랬는데, 다른 이들이 섣불리 끼어들어 일을 망칠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케일리는 직업을, 에드워드는 희망조차 가진 적이 없던 제대로 된 먹이를, -B 지구는 염원하던 에드워드의 꼬리를 붙였다.

그러니 그의 고용주인 -B 지구에서는 물론, 파트너인 에드워드조차도 그가 정말로 필드요원으로서 기능하리라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에드워드의 지랄맞은 성격으로 파트너 고용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걸려 있었다.

그 안에는 에드워드의 손이 가지 않는 유능함이 포함되어 있었고 케일리는 거기에 부합하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가 객관적으로 유능하다고 해봤자,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어 있었다.

케일리는 그냥 에드워드의 옆에 붙어서 가끔 제대로 된 보고서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넘치도록 훌륭한 요원이 될 예정이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에드워드는 대단히 개인적인 이유로, 케일리를 단순히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끌고 다녀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

아니, 아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하다. 뱀파이어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섭식행위를 필요로 했지만, 인간처럼 당장 생존에 직결되는 절박한 행위는 아니었다.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혈액을 섭취하는 것은 음식보다는 먹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일정한 주기로 주어지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껏 끔찍한 음식물 쓰레기만 섭취해온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맛이 있는’ 케일리는 좀 더 특별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 그래. 그 정도면 들어맞는 것 같다.

‘유일한 음식’.

그래, 그거면 지금 에드워드 자신에게 있어서 케일리 로체스터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인식되었다. 케일리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유일한 먹이인가 하면 생존을 위해 그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없어지는 것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그런 상상을 해본다고 가정하면, 스스로도 놀라우리만치 기분이 하강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사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빈민가의 꼬마에게서, 영영 그것을 빼앗아버리는 것처럼 끔찍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에드워드는 가능하면 케일리 로체스터를 되도록이면 오래도록 즐기고 싶었다. 자신의 ‘음식’에 다른 이들이 손을 대는 것도 싫었다. 굳이 뱀파이어라서가 아니라, 다른 짐승이나 심지어는 인간들마저도 먹을 것에 손을 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케일리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상한 것은, 그를 영원히 손에 넣기 위해 권속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하면 이 유일한 음식은 자신이 살아 숨 쉬는 한 영영 손아귀에 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를 감지했다.

만약 케일리 로체스터가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어, 자신에게 절대복종 하는 종이 된다면, 그래도 여전히 지금의 맛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는 그 점을 장담할 수 없었다. 케일리 로체스터가 자신에게 있어서 특별히 미식일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요상하기 짝이 없는 퍼스널리티에 있었다.

인간들이 말하는 사이코메트리나 생각을 그대로 읽어내는 것과는 본질부터 달랐지만, 에드워드가 순혈로서 가진 고유능력은 타인의 감정을 맡는 것이었다. 오늘 3시에 버킹엄 궁전을 테러하러 가야겠다는 디테일까지는 추측할 수 없었지만,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나쁜 짓을 저지르리라는 악의를 맡았다.

기쁨, 슬픔, 분노, 증오, 탐욕, 욕정……, 에드워드는 존재하는 모든 감정의 냄새를 맡았고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향이, 그의 혀가 느끼는 맛을 방해했다.

케일리로 말할 것 같으면 가끔 짜증스러우리만치 무덤덤해 냄새에 특색이랄 게 없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늘어진 해산물처럼 감정도 지독시리 옅었다. 그런 주제에 의외로 할 줄 아는 건 많았고 거기에 대해 별다른 생각도 없었다.

그 정도의 재능을 가졌다면 자만을 할 법도 했지만 그에게는 호흡을 하는 것처럼 당연했다. 그건 자만이 아니었고 오만도 아니었다. 그냥 팔 두 개가 달리고 다리 두 개로 뛰는 게 당연한 것처럼 특별한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맛있었다. 방해가 되는 냄새 없이 그저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에드워드가 원하는 것은 그런 케일리 로체스터였다. 살아남는 것보다 덜 성가신 일을 우선하는 정신 나간 저울질을 하고 득실의 계산법이 요상한, 케일리 로체스터여야 했다.

한번 권속으로 만든 인간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방법 같은 건 없다. 결과를 읽을 수 없는 모험을 하기에 케일리는 하나밖에 없었고, 애매모호한 결과에 도박을 걸 만큼 에드워드는 미련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권속이 된 자들은 그가 인간이었던 때와 정확히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종이 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성격이 변하지 않을 리가 없다.

에드워드는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감정의 냄새도 아주 싫어했지만, 같은 뱀파이어나 그들의 권속은 더 싫었다. 그들의 것은 오만하고 교만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속이 뒤집어졌다. 그러니 에드워드가 지켜야 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케일리 로체스터의 정체성이었다.

뭐 그딴 좆같은 걸 지켜야 하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맛있는 점심을 위해 고기의 신선도를 유지하려 한다면 최소한 냉장고의 온도를 일정 수치로 유지해야 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 경우 에드워드가 해야 하는 일은 명백했다.

어차피 자신은 오래 살 예정이었고, 그 안에서 케일리 로체스터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그리 넓지도 않았다. 만약 그를 잃는다고 하면 대단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고 불쾌한 나날을 보내게 되겠지만, 권속으로 만들어 잃든, 수명을 다해 잃든 결과는 같았다.

그러니 에드워드에게 남은 것은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후 행복한 식생활을 즐기는 부지런한 냉장고 관리인이 되는 것 정도였다.

별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그냥 그가 계속 그따위로 살 수 있도록 그의 삶을, 성격을, 선택을 바꾸려고 하는 것들을 차단해 케일리 로체스터가 변하지 않도록 지키면 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답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꼴을 목격한 순간, 에드워드는 자신이 지금껏 완전히 잘못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나와 제프의 뒤를 따라 스튜디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였고 본능의 경고를 믿는 편이었다. 아니, 사실은 스튜디오 안을 가득 채운 끔찍한 냄새에서 본능의 경고 같은 애매한 것보다 훨씬 확실한 불쾌감을 느꼈다.

라이칸의 냄새.

그것도 제대로 마음을 먹고 흘려보낸 페로몬의 냄새였다. 코를 마비시키는 라이칸의 페로몬에 저도 모르게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던 에드워드가 시선을 올렸다. 그 순간,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스컹크마냥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라이칸과, 그런 라이칸의 팔에 안겨 올려진 케일리의 모습이었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없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검게 물든 머릿속으로 정신을 차린 순간 에드워드의 눈앞에는 불쑥 가까워진 라이칸이 있었다. 하얀 은처럼 기분 나쁜 금속 빛이 나는 짐승의 눈이 힐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페로몬이 무엇을 매혹하려 드는지는 에드워드가 정확히 짚어낼 방법은 없었지만, 그 팔에 안겨 있는 인간 남자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세 번째. 그제야 제대로 돌아가는 머리로 에드워드는, 자신이 수 미터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스튜디오 가운데의 세트장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은 드문 경험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자신을 그렇게 움직이게 만들 만한 커다란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뱀파이어의 본능도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처럼 목구멍 뒤에 불쾌한 감각이 올라왔는데, 머릿속은 놀라우리만치 냉정했다. 적어도 에드워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뒤에서 따라오던 에드워드가 어느새 세트장까지 앞질러 간 것에, 제프와 한나가 놀란 눈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워드는 폭신하게 눈이 쌓인 바닥을 짓밟고 들어갔다. 케일리를 한 팔로 안아 든 아킨시나의 정면에 서자, 그의 엉덩이를 받친 커다란 손이 보였다.

페로몬을 질질 흘려대는 짐승 새끼의 버릇없는 손을 당장이라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에드워드는 그저 한 발짝 더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코끝을 턱에 맞댄 채 포즈를 취하고 있던 아킨시나가 자신의 등 뒤를 향해 시선을 보내는 것에, 케일리 또한 고개를 돌렸다.

곧장 에드워드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 미미한 반가움이 번졌다. 헤어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로하더라도 케일리는 자신을 보고 저렇게 반가워할 만한 놈이 아니었다. 때문에 일순 멈칫한 에드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일리의 반가움에 자신의 입매가 비죽 올라갔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케일리에게서는 언제나와 같이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맡아낸 에드워드는 뱃속을 헤집던 기분 나쁜 감각이 다소 가라앉았다.

저 멍청한 라이칸이 아무리 페로몬을 흘려봤자, 케일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케일리가 놈에게 안겨 있는 건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래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은 고소했다. 아킨시나와 마주 선 채, 케일리를 가운데에 둔 에드워드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느린 동작으로 올라간 커다란 손이 케일리의 뺨을 감쌌다. 아니, 감쌌다기보다는 쥐었다는 말이 어울렸다. 하얗게 머리카락 사이에 튀어나온 귀까지를 움켜쥔 에드워드가 그의 머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여전히 유리 아킨시나에게 안겨 있던 케일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몸을 숙였고, 그런 케일리를 에드워드가 시선으로 샅샅이 훑었다.

그는 오늘 아침에 입혀놨던 비즈니스 슈트가 아니라, 몸의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는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케일리의 넥타이를 손수 매어주었던 에드워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감촉을 보니 화장까지 한 모양이다. 남이 입혀주는 옷에, 화장을 하고 라이칸의 품에 안긴 꼴이라니.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뭐가 어떻게 굴러야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지 에드워드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쫓아갈 수가 없었다.

뺨을 쥔 손길은 보기보다 거친 동작이 아니었지만, 에드워드의 시선은 유리 아킨시나가 그에게 해를 끼쳤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노골적이었다.

스윽, 곧이어 할 일을 끝낸 그의 시선이 아킨시나에게로 옮겨갔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푸른 눈동자의 위에는 투명한 얼음막이 붙어 있는 것처럼 차갑게 빛이 났다. 자신을 향한 에드워드의 명백한 적의를 마주한 채, 아킨시나는 픽 바람 빠진 웃음을 웃었다.

하얀 짐승의 눈동자에 강렬한 불쾌감이 어렸고, 질질 흘려대던 페로몬이 순식간에 갈무리되었다.

에드워드는 그가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별로 어려운 짐작도 아니었다. 유리 아킨시나 정도의 라이칸이라면 순혈 뱀파이어를 알아보는 법 정도를 모르기가 더 힘들었다. 얼마 전 -B 지구에서 만난 스코틀랜드의 시골뜨기 새끼 라이칸과 유리 아킨시나는 급이 달랐다.

달랐지만, 순혈 뱀파이어에 비하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는 라이칸은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그래 봤자 한낱 짐승 새끼다. 러시아의 고귀한 라이칸 왕자님은 라이칸들이 어째서 순혈 뱀파이어를 꺼리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악의를 마주한 채, 에드워드는 비틀린 입매에 비웃음을 담았다.

“남의 비서를 성희롱 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지?”

이죽거리며 튀어나간 목소리는 차갑게 날이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와 구분이 가지 않는 설원 위에 참으로 어울리는 싸늘함이었다.

이성과 본성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극을 잊지 않았다. 허나 빌어먹을 감시역을 떠맡았다고 해서 눈앞의 어이없는 광경을 참아야 하는 건 아니다. 임무를 망치지 않는 동시에, 손버릇 나쁜 라이칸이 감히 무엇에 손을 대려 했는지 경고해야 했다. 그건 케일리를 지금 상태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냉장고 관리인의 의무이자 임무였다.

당사자인 케일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케일리를 사이에 둔 허공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사납게 부딪혔다. 에드워드와 아킨시나 어느 누구도 먼저 물러나는 법을 모르는 맹수처럼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찰칵.

이 상황에서 다른 소리라고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셔터음이 들렸다. 그래도 에드워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라이칸은 기본적으로 맹수의 일종이었다. 먼저 눈을 피하면 지는 싸움이었다. 유치하고 더럽고 재수도 없었지만, 놈이 자신에게 이겼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에드워드의 오기를 멈춘 것은 하얀 얼굴에 또렷이 그려진 입술이 두어 번 달싹이는가 싶더니, 잔잔히 흘러나온 케일리의 목소리였다.

“에드워……, 해밀턴 씨. 목이 아픈데 대화는 내려가서 계속하는 게 어떨까요?”

아킨시나에게 안긴 채 에드워드를 돌아보는 자세는 목도 아팠지만 허리에도 무리가 갔다. 뿐만 아니라 머리 위에는 바퀴가 달린 촬영용 조명 두어 개가 자리 잡아 여름 볕마냥 쨍쨍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얀 백열등의 온도가 예상외로 강렬해, 피부의 표면에 열이 올랐다.

땀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계속 이 자리에 서 있다가는 핀란드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푹 젖을 게 분명했다. 케일리는 온도를 가지고 불평을 할 만큼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리쬐는 조명 밑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행인 점은 스튜디오 내부를 식히는 에어컨 바람이 끊임없이 쏟아진다는 것이었고, 불행은 그래 봤자 조명의 뜨거움이 상쇄되기는커녕 불지옥과 얼음지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버라이어티한 환경이 되었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아직 9월의 초입인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한겨울 차림이었다. 가능하면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에드워드가 그 구원의 손길이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디.”

구원의 손길이 그렇게 말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호칭은, 에드워드 그 자신의 애칭이었다. 갑자기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나 싶어 눈만 끔뻑이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눈으로 웃었다.

연수원에서 나온 후로 에드워드는 가끔 그렇게 눈으로 웃었다. 케일리는 대단히 개인적인 시점에서, 그가 웃는 모습이 눈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왔다.

바로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죽거리거나, 뭔가를 비웃는 게 아니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금빛 속눈썹 사이로 사라지는 푸른 눈동자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아무리 케일리가 게으르다지만, 아름다운걸 보고 감탄하는 것까지 방기할 정도로 게으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평균적인 미의식을 가진 덕분에 심장을 귀찮게 만드는 에드워드의 웃음을 케일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지금 그렇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꿀을 바른 것처럼 끈적한 달큰함이 묻어 있었다.

“늘 에디라고 불렀잖아. 왜 갑자기 데면데면하게 구는 거지? 게다가 왜 네가 이런 차림을 하고 여기에 서 있는 건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어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는 힐끗, 자신의 오른쪽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듣고서야 드디어, 케일리는 이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처음 본 인간도 아닌 수컷 라이칸에게 안겨 있는 것은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스튜디오의 세트장 위였고 패션사진이라는 것은 언제나 보통의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뜬금없이 스스로의 애칭을 부르며, 지금까지 자신이 그것을 불렀다는 양 구는 건 이상한 일이 맞았다.

케일리가 생각하기에 에드워드는 그런 장난을 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를 애칭으로 부르는 건 쉬웠다.

뭐라고 부르든 에드워드의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케일리는 이름은 짧게 부를수록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단순 무식한 남자였으니 오히려 그 편이 편하고 좋았다.

“저, 에드워…… 에디. 자세한 이야기는 내려가서 할 테니까 일단…….”

“쉿, 혼자 내려오기 무서우면 이쪽으로 팔을 뻗어. 내려줄 테니까.”

에드워드는 자신이 굳이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내려갈 만큼의 신체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케일리는 낙법을 아주 잘했다. 자신의 낙법은 용병으로 10년을 넘게 구르던 개인교습사조차 깜짝 놀랄 만큼 완벽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들을 정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케일리는 얌전히 에드워드의 목에 팔을 둘렀고, 유리 아킨시나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싸늘하게 식었다. 케일리가 누군가 자신을 편하게 해준다는 걸 거절할 만큼 염치 있는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이 자리에서 에드워드 애쉬포드 단 한 명뿐이다.

에드워드는 거부감 하나 내비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두 팔을 뻗어온 케일리를 다섯 살배기 어린애를 대하듯 마주 안았고, 친절하게도 바닥까지 안착시켜주었다. 누가 봐도 비서와 상사의 관계로는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은 당사자인 두 남자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누구도 입을 댈 수가 없었다.

경악까지는 아니라도 갑작스러운 에드워드의 등장과 케일리 강탈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사고 때문에 오지 못한 모델을 대신한 대타가 아닌가 묘한 납득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갑자기 아킨시나의 상대역이 된 케일리보다도 세트 안에 뛰어든 에드워드가 훨씬 모델이라는 직업에는 어울리는 외견이었기 때문이다.

세트를 둘러싼 사람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한가운데에서 에드워드는 잠시간 케일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언가 거슬리는 것처럼 잠시간 그를 응시하던 에드워드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고, “왜 더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털옷을 껴입고 있어?” 하며 황당함을 담아 툭 내뱉었다.

여상하게 튀어나온 그 말에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케일리가 그제야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팔에 걸쳤다. 그러고 보니 줄곧 더위를 참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티를 낸 것 같지는 않은데. 의문스럽게 생각하며 나머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만진다고 표정이 보이나 싶어 픽 웃은 에드워드가 슥 고개를 돌려 아킨시나를 쳐다보았다.

비죽, 얄밉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에드워드의 얼굴엔 누가 봐도 비웃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 의기양양한 얼굴을 마주한 아킨시나의 눈가가 가늘게 경련했다.

눈앞의 사내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금세 눈치챘지만, 어떤 뱀파이어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유리 아킨시나는 태어난 지 100년이 조금 지난 라이칸이었다. 라이칸의 수명을 생각하면 반려를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도 남을 어엿한 성체였으나, 고귀한 혈통 탓에 세상경험이 적었다. 요 몇 년 인간들 틈에 섞여 생활한 것이 다인 아킨시나는 당연하게도 순혈은커녕 잡종 뱀파이어와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뱀파이어든, 그 족속들과는 최악의 상황이 아닌 한 대치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교육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다.

최악의 상황.

분명 뱀파이어는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낸 채 자신에게 이죽거렸지만, 그게 커리어를 희생하고 발톱을 드러내야 할 정도로 최악 같지는 않았다. 최소한 상대방 또한 멀끔하게 차려입은 슈트에 예의를 운운하고 있었으니 인간놀음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유리 아킨시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저 뱀파이어가 뭘 상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킨시나는 맹세컨대 그가 소중하게 다루는 인간 남자에게 단 한 톨의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사심은 결코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었다.

아킨시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화 중 몇몇 평가해줄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틈에 섞여 이렇게 모델 일을 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얕잡아 봤다. 신체능력부터 시작해 수명과 타고난 기질까지 라이칸과 비교해 보잘것없기 짝이 없는 하등생물이라 안타까이 여기기도 했다.

태어나기를 지배자로 태어난 아킨시나는 감히 자신을 깔보는 멍청한 자들을 깔아뭉개, 비참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하등생물을 짓밟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눈앞의 별 볼 일 없는 사내가 처참하게 꺾어버릴 만큼 높게 세운 콧대가 없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어디서 기분을 망쳤는지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기야, 이렇게 알기 쉬운 심술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면 인간을 그만두는 게 낫다.

인간이 고릴라보다 나은 유일한 점은 눈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고릴라에게도 눈치는 있지만 비굴함은 인간보다 덜했다. 그러니 케일리 로체니가 인간답게 비굴한 태도로 설설 기며 납작 엎드리기라도 하면 적당히 봐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킨시나는 지금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상대는 자신을 고용한 자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본인의 잘못을 알고 있는 주제에, 미안함은커녕 약간의 귀찮음과 포기를 담고 순순히 자신이 하는 대로 따르는 케일리는 아킨시나가 알고 있는 인간의 상식을 미묘하게 비트는 존재였다.

보통 인간들은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을 인지하면 미안해하거나, 혹은 뻔뻔해진다. 하지만 케일리 로체니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안해하지는 않았지만, 뻔뻔하지도 않았다. 아킨시나가 케일리 로체니와의 촬영을 끝까지 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사심.

분명 아킨시나는 케일리에게 사심을 품고 있었다. 기껏해야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 나부랭이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양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었으니 사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킨시나가 품은 사심의 내용이, 주제와 분수를 모르고 자신을 평가절하 한 인간 남자의 콧대를 꺾어주겠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뱀파이어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케일리 로체니를 가운데 한 채 뱀파이어와 대립하는 구도는 꼭 싸구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삼각관계 같았다. 그것도 삼류 호모 치정극에서나 등장할 법한 질척한 그림이었다. 대체 자신이 뭐가 부족해서 인간 여자도 아니고, 인간 남자에게 흑심을 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킨시나는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걸레가 되어 너덜너덜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네놈의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자신의 눈을 마주한 순간 무언가 반응이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케일리 로체니에게서는 그런 게 없었다. 매혹되기는커녕, 별달리 경이롭지도 않은 뒤뜰의 풍경을 바라보듯 잔잔한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아니, 받아친다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마주 쳐다봤다. 그게 끝이었다.

아킨시나가 페로몬을 흘린 것은 케일리 로체니라는 인간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눈의 매혹이 통하지 않는다면 페로몬도 통하지 않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케일리 로체니는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걸까, 사소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인간이든 아니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종이라고 해도 어차피 인간들 틈에 살아가는 이종은 상대의 정체를 까발려 기껏 만들어놓은 신분을 망치는 짓은 웬만해서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케일리 로체니가 인간이 아니라면, 자신이 들은 말은 하등한 인간이 지껄인 게 아닌 것이 되니 더 이상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아킨시나가 인간 사내를 상대로 페로몬을 흘린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뱀파이어가 하필이면 성희롱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를 곧장 눈치챈 아킨시나는 변명을 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네가 본 게 사실은 그런 장면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 자체가 구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케일리 로체니가 뱀파이어의 종속이라면, 그 남자를 안아 들고 몸을 맞댄 채 페로몬을 흘리던 자신은 확실히 인간들의 기준으로 성희롱 비슷한 걸 한 게 된다. 뱀파이어가 자신의 피를 이용해 다른 종을 권속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케일리 로체니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킨시나가 페로몬까지 흘려가며 확인하려고 했을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냥 인간.

그러니 그는 뱀파이어의 권속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권속이 아니라도 그에게 속해 있는 주종관계이거나, 종속과 같은 것이겠지. 이렇든 저렇든 결론적으로 자신은 임자 있는 물건에 손을 댄 꼴이 됐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 그래도 더러웠던 아킨시나의 기분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더럽고 치사하고 억울했지만, 아킨시나는 무슨 변명을 해야 자신의 명예가 회복될지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빠득, 분함을 숨기지 못하고 이를 가는 아킨시나를 비웃음 담긴 차가운 시선이 지그시 응시했다.

에드워드의 푸른 눈이 마치 너는 남의 것에 마음대로 손을 댄 짐승이라 매도하는 것 같다고 아킨시나는 생각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워도, 저 눈빛을 받는 것보다는 변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난 그쪽이 말한 것처럼 그를 ……한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나니, 훨씬 기분이 더러워졌다. 게다가 가장 기분 나쁜 단어는 입에 담는 것도 끔찍해 대충 얼버무렸다. 거의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아킨시나는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꺼내는 말이라고 해도, 인간 남자를 ……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변명을 듣자마자 웃기지도 않는다는 양 코웃음을 치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며 아킨시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채 이를 악물었다. 자신에게 모인 인간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기껏해야 앞으로 반백년을 더 살면 끝날 파리 목숨들이다. 아무리 퍼트려봤자 반백년이면 잠깐 러시아에 처박혀 있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존재조차 잊혀져 있을 테다.

그러니 아킨시나는 앞으로 몇 세기는 더 살아가며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인간 사내에게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기억할-기억만 할 거라고 믿을 만큼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뱀파이어를 향해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나는 촬영의 콘셉트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알렌에게 물어봐도 좋습니다. 애초에 그를 대타로 고른 것도 내가 아니고, 나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남자를 대상으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아킨시나가 하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 되는 부분 하나 없이 옳았다. 스튜디오를 둘러싼 스태프들과 제프, 한나, 그리고 브리안 또한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아킨시나가 자신의 오명을 풀고 싶은 단 한 명, 뱀파이어만은 눈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딱 잘라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는 아킨시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냐는 의견을 완곡하게 표명하는 것처럼,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마치 아킨시나라는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어깨를 감싸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는 게 아니겠는가.

아킨시나와 에드워드의 중간에 어중간하게 서 있던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고, 아킨시나는 자신을 발정 난 잠재적 우범자 취급하는 뱀파이어를 믿을 수 없어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케일리. 어쩌다 그런 꼴이 된 건지 설명해주겠어?”

기껏 변명해줬더니 돌아오는 것은 무시였다. 아킨시나의 변명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양 케일리를 향해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 신랄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던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다정했다.

순식간에 봄날의 볕처럼 따스해진 에드워드와 눈을 마주한 채, 케일리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진 후로부터 지금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걸까. 자신은 설마 정신이 살짝 이상해진 파트너를 걱정해야 하는 입장인 걸까.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해야 믿을……!”

“케일리, 설명.”

“하! 가지가지 하는군요.”

결국 아킨시나는 화가 잔뜩 실린 걸음으로 쿵쿵 세트에서 내려갔다. 스튜디오에 마련된 간이 테이블에는 간단히 집어 먹을 수 있는 과자며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서 물병 하나를 집어 든 아킨시나는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뚜껑을 따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에드워드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촬영을 하다 말고 어이없는 폭언을 들어 황당함을 삭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전해진다기보다는 분노와 억울함을 맡을 수 있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찌됐건 아킨시나의 반응에 다소 만족한 건 사실이었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상황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훨씬 마이너스라는 걸 눈치챘을 텐데, 아무래도 유리 아킨시나는 머리가 나쁜 모양이었다.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려 한 라이칸을 머저리로 정의내린 에드워드는 “어쩌다가 이렇게…….” 하고 뜬금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케일리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킨시나를 누르기 위해 적당히 던진 말이기는 했지만, 케일리의 입으로 설명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리 아킨시나의 분노 섞인 변명으로 추측하건대 결원이 생긴 모델을 대신해 어떤 멍청이가 케일리의 등을 떠밀었겠지.

유리 아킨시나가 남자에게, 그보다는 인간의 수컷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에드워드가 알 바 아니다. 본인의 입으로 아니라고 주장한들 케일리를 안아 들고 천박한 페로몬을 흘려댄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모델이 해보고 싶었어?”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픽 웃으며 물음을 던지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법 붙어 지내다 보니 그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건지 정도는 구분이 됐다.

“침대가 얼마나 푹신한지 광고하는 모델이라면 법정 최저임금만 받아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 있긴 해요.”

제 방 침대에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케일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쉽게 상상이 되었다. 농담처럼 싱긋 웃으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저 말의 8할 정도는 진심일 거라고 에드워드는 확신했다. 어찌됐건 너무나 당연스럽게도 케일리가 원해서 벌어진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에드워드는 자신과 케일리를 향해 무식하게 큰 렌즈를 들이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비죽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처리해야겠군. 안 그래도 아킨시나와의 대치 도중 귀를 거슬리는 셔터음에 황당함을 느끼기는 했다.

프로답다면 프로다운 행동이었고, 반대로 아마추어를 데리고 제대로 된 절차도 밟지 않고 냅다 카메라부터 들이댄 시점에서 문제가 산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케일리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벌어질 일은 없을 테다. 기껏해야 초상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돈을 좀 쥐여주는 정도면 정리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는 -B 지구의 필드요원이었고 쓸데없이 얼굴을 알리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업무에도 방해가 될 뿐더러 어느 정도 그의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에드워드는 케일리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는 게 싫었다. 그런 밝힐 수 없는 이유를 제외해도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케일리 로체스터는 로체스터 공작가의 차남이었다. 그 집안에서도 차남의 모델 데뷔를 그리 유쾌하게 여기지는 않을 테고, 의료 사업가의 비서라던 차남이 뜬금없이 광고판에 나타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에드워드의 시선을 느끼고 슬그머니 카메라를 내린 알렌은 그래 봤자 도망갈 구석도 없었다. 게다가 에드워드는 지금 이 광고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였다. 자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찍은 사진을 폐기할 수 있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것보다도 에드워드는 아까부터 거슬렸던 걸 먼저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케일리의 짙은 밀빛 머리카락에는 왁스니 젤 같은 것을 발라넘긴 흔적이 보였다. 남의 손이 닿은 흔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에드워드가 손을 뻗어 케일리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순식간에 지저분해진 케일리의 머리에서 타인의 흔적을 지운 에드워드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케일리의 얼굴을 만족스레 마주한 채 에드워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고, 이렇게 말했다.

“넌 말이다,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남의 부탁 거절하면서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왜 가끔씩 귀찮은 일을 사서 떠맡는 거냐?”

사실 케일리 로체스터는 매사가 나른하고 의욕이 없기는 했지만 그게 타인의 요구를 수용하기만 하는 순종적인 성격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케일리는 때때로 주변인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행동을 저지르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을 끝낸 후의 결과 값이었다.

즉, 그의 행동은 대부분이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단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가치중심을 가지고 계산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뜻이었다. 예측하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예상을 빗나가기 일쑤인 그가 이번에는 무슨 생각으로 덥석 귀찮기 짝이 없는 모델 대타로 나섰는지 에드워드는 궁금했다.

그러고도 잠시간 살살 정리하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당당히 대답했다.

“거절을 열심히 해야만 그 거절이 먹힐 경우엔, 그냥 해치우는 게 덜 귀찮으니까요.”

그 말에 제일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묘하게 납득한 얼굴을 한 것은 에드워드가 아니라 알렌이었다.

케일리가 브리안에 의해 끌려왔을 때, 분명 그는 오버워크가 싫기 때문에 다른 스태프를 시키라고 여유롭게 웃으며 모델 일을 거절했다. 심지어는 아킨시나와의 촬영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다고 말했고, 알렌은 그때의 케일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킨시나가 싸움을 걸자마자 피할 생각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갈아입었다. 평범한 남자 회사원이라면 거부감이 있을 법도 한 메이크업까지 별다른 반감 없이 순응했다. 그건 상당히 독특한 반응이었다.

물론 그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은 듯 보였던 아킨시나의 기세가 보통 담으로는 딱 잘라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흉흉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게 아니라, 엉덩이를 빼고 슬금슬금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너무도 쉽게 아킨시나의 ‘길고 짧은 걸 대보기 위한 촬영’에 수긍한 케일리가 말은 그렇게 해도 모델 일에 어떤 매력은 느낀 게 아닐까.

머릿속 한켠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알렌은 자신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모델이 되는 것에 매력을 느낀 게 아니었다. 그저 벌써 기분이 상한 아킨시나의 결정을 뒤집는 게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빠르게 캐치한 것이었다.

확실히 유리 아킨시나는 자존심이 센 걸로 유명했고 그 탓에 크고 작은 트러블이 잦은 남자였다. 그래도 아킨시나가 각광받는 이유는 그가 뛰어난 모델이며, 콧대를 세우는 만큼 훌륭한 결과를 내기 때문이었다.

아킨시나를 거절하려면 아주 열심히 거절해야 하니, 그냥 거절을 포기했단다. 논리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납득이 가는 설명이라 알렌은 조금 감탄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케일리는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한 게 됐다. 만약 아킨시나와의 촬영을 그의 앞에서 재차 거절했더라면 일이 정말로 귀찮아졌을 테니 말이다.

케일리의 재빠른 판단력과 기가 막힌 결단력에 눈을 빛내며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지 않는 알렌의 시야에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손을 거두어들이는 에드워드가 들어왔다. 렌즈 너머에 깔끔하게 잡히는 에드워드는 아킨시나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흠잡을 구석이 없는 외견의 사내였다.

모델을 하면 대성할 텐데. 아니면 배우라도.

저런 외모를 타고났으면 응당 스크린이며 지면에 얼굴을 내밀어 널리 인류의 시신경을 이롭게 하는 게 맞았다. 아름답게 태어난 자들의 의무였다.

알렌은 조물주가 사람의 외모에 차등을 두어 빚어내는 이유는 공들여 아름답게 조형한 자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일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까, 인류의 시신경을 이롭게 하는 등의 역할 말이다.

에드워드가 모델도 배우도 아니라는 사실에 아쉬움을 담고 입맛을 다시는 알렌의 집요한 시선을 무시한 채, 잠시간 말이 없던 에드워드가 이윽고 자신의 발언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케일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넌 그렇게 귀찮아서 숨은 어떻게 쉬냐?”

낮은 목소리에는 약간의 체념과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되지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비웃는 게 아니라, 이 웃긴 머저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두 손 두 발 다 든 삐뚤어진 자식새끼보다는 가끔 사고를 치긴 하지만 그래도 예쁜 애완동물을 쳐다볼 때나 어울릴 법한 눈으로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그냥 동료인 동시에, 다 큰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라고 알렌은 생각했다.

“무조건 반사는 제 의지랑 상관없이 일어나니까 어떻게 하는 건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이런 것도 일종의 생존본능이 아닐까요? 아무래도 호흡을 귀찮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호흡정지로 죽으면 곤란하니까 신경 안 써도 되도록 연수반사로 만들어놓은 거죠.”

진화는 참 위대한 것 같아요, 하며 다윈이 관에서 벌떡 일어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이는 케일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흡이 무조건 반사인 것과 진화론에는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그걸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을 만큼 어이가 없었다. 이놈은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편인 것 같은데 어째서 괜찮은 지능을 저런 식으로만 써먹을까. 케일리를 대하다 보면 진심으로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넌 혼자 빨빨거리다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다음부터는 내 옆에 붙어 있기나 해.”

결국 픽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늘따라 처음 해보는 잠입임무에 몰입한 나머지, 답지 않게 의욕적인 척을 해보려다 안 해도 될 일까지 떠맡았다.

다음부터는 그냥 에드워드가 시키는 대로 귀찮은 일은 그에게 떠넘기고 대가로 피나 좀 나눠주면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의외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결론을 내린 케일리가 문득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그럼 저 촬영 그만해도 되나요?”

알렌을 힐끔, 아킨시나를 힐끔 쳐다본 케일리는 아직 자신이 찍기로 한 다섯 장 중 반을 덜 찍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도중에 에드워드가 파투를 낸 덕분에 세트장에서 이탈한 아킨시나는 여전히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낸 채 반쯤 빈 물병을 손에 쥐고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 마. 네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모델이 하고 싶다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절대 안 시킬 생각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뺨을 툭 건드리는 에드워드에 케일리는“그런 무시무시한 가정을 꼭 해야 하나요?” 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상상하는 것조차 싫다는 것처럼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는 케일리에, 결국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웃은 에드워드가 알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어느새 카메라를 내린 채 자신과 케일리를 구경하고 있던 남자를 향해 긴 다리를 움직여 일직선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케일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성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드워드의 모습에 알렌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워드는 카메라의 렌즈를 한 손으로 붙잡아 고정해 상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움직임을 제지했다.

“저…… 이 렌즈 엄청 비싼 데다 구하기도 힘든데, 일단 좀 놓고 할 말이 있으면 문명인답게 대화로 해결하는 건 어때?”

가까이서 보니 그것 참 기분 나쁠 정도로 멀끔한 에드워드의 얼굴이 비죽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통성명을 한 건 아니었지만 알렌은 이미 상대가 에드워드 해밀턴이며 이번 프로젝트에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브리안이 대타라며 데리고 온 케일리를 그가 오늘 촬영을 참관하기로 한 영국 지사의 프로모션 책임자 에드워드 해밀턴의 비서라고 소개했었다. 게다가 케일리는 세트장에 뜬금없이 뛰어든 그를 에디라는 애칭으로 친근하게 불렀다. 그러니 케일리의 에디가 ‘그’ 에드워드 해밀턴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젊은 데다 잘생긴 남자일 거라는 예상은 못했지만, 어찌됐건 그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였고 자신의 비서가 모델을 한다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대화, 좋지. 그럼 문명인답게 좋은 말로 할 때 필름을 내놔. 아, 혹시 메모리 카드인가? 뭐든 상관없으니까 그 빌어먹을 카메라가 찍은 걸 토해내.”

“사진을 뺏어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폐기. 난 저 녀석을 중국 기예단의 춤추는 판다로 만들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어.”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의 눈이 진한 불쾌감을 담은 채 카메라를 향했다. 영 좋지 않은 징조였다.

알렌은 오늘 찍은 사진이 자신의 커리어에서 향후 10년은 대표작으로 남을 만큼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생 최고의 역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근처에는 갔다. 아마 이 사진으로 광고를 하면 신제품 향수는 대박을 칠 게 분명했다.

“그쪽 비서를 허락도 없이 데려다 쓴 건 사과할게. 하지만 그쪽 비서, 케일리도 성인이고 자기 일은 자기 의지로 정할 권리가 있다고. 만약 그가 원한다면 원래 모델에게 지불하기로 한 개런티를 그대로 지불해도 좋아.

대신 오늘 찍은 사진은 광고에 쓰는 게 맞다고 봐. 해밀턴 씨, 이 프로모션은 그쪽이 기획한 거잖아? 그쪽 비서는 진짜 끝내줬다고. 다른 제품에도 같이 쓰고 싶을 지경인데 이걸 그냥 폐기 한다는 건 말도 안…….”

자신이 찍은 사진을, 그 안의 예술을 중국 기예단의 대나무나 타고 다니는 게으른 동물과 같은 레벨이라 폄하하는 에드워드의 폭언에 알렌이 울컥 반박했다.

물론 브리안도 그도 당사자의 거절을 한 번 무시하기는 했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재차 증언하는 케일리의 의사를 존중해 사진을 폐기하려 드는 에드워드에게 그럴 수 없다 우길 명분은 없었다.

그래도 알렌은 순순히 카메라를 내줄 수 없었다. 주로 커머셜 캠페인에서 프리랜서 포토그래퍼로 일하는 알렌은 결국 팔리는 사진을 찍는 게 제일 중요했고, 그건 포토그래퍼라는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끄럽게 여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상업예술의 ‘예술’에 걸리는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찍은 사진은 상업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고, 예술적으로도 흠잡을 구석이 없는 완벽한 물건이었다. 그걸 폐기하겠다니. 말도 안 됐다.

알렌은 자신이 에드워드의 손에서 사진을 지킬 방법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발상이었지만, 카메라를 쥔 손에 힘을 준 알렌은 활짝 열린 스튜디오의 출구를 힐끗 훔쳐보았다.

지금 카메라를 들고 냅다 도망을 가면 사진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한 상사와 비서의 관계 외에도 뭔가 구린 걸 숨기고 있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사이에 뭐가 있든,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사진만 지킬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역작이 될 향수 광고를 내보낼 수만 있다면 고용주에게 업무 불이행으로 고소를 당하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찍어야 할 사진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으나 알렌은 이미 아킨시나와 케일리의 완벽한 작품을 완성시킨 것만으로 만족했다.

일단 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사진을 살릴 수 있겠지.

일 분도 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결론 내린 알렌이 에드워드를 향해 씩 웃었다. 에드워드가 그런 알렌을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그렇게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며 애매모호한 웃음만 띠고 있던 두 남자 중, 먼저 발을 움직인 것은 알렌이었다. 에드워드에게 카메라를 넘겨주는 것처럼 시늉을 하는가 싶더니, 냅다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아 다리를 박찼다.

스튜디오의 출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알렌의 다리에 묵직한 것이 걸렸다. 미처 균형을 잡을 틈도 없이 어, 어,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몸은 부웅 허공에 날고 있었다.

“으악!”

철퍼덕.

카메라를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몸을 비튼 덕분에 바닥에 부딪힌 팔과 등짝이 말도 못하게 아팠다. 그래도 카메라는 무사했다. 사실 데이터만 무사하면 상관없었지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저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대체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무엇에 걸려 넘어진 건가.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킨 알렌은 빛과 같은 속도로 튀었는데도 자신을 앞선 것뿐만 아니라, 발까지 건 장본인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온몸으로 카메라를 지키며 바닥을 구른 알렌을 향해, 에드워드가 싱긋 웃었다. 서로를 마주하고 있던 방금 전과 정확히 같은 웃음이었다.

“우리, 상황 정리를 좀 해볼까?”

상황이 아니라 자신이 정리될 것 같다는 현실감 있는 생각이 알렌의 머릿속을 스쳤다.

◇ ◆ ◇

알렌은 두 손 두 발 두 눈이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두 눈을 부릅뜬 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내 다음으로 소중한 카메라를 빼앗겼다. 포토그래퍼에게서 카메라를 빼앗아가다니. 다른 카메라도 아니고, 일생의 역작이 담긴 카메라였다. 인간이 이보다 더 잔인하기도 힘들 거라고 알렌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주를 감행하다 잡혀 돌아온 알렌은 열 손가락을 쪽쪽 빨며 괴로운 얼굴을 한 채 약탈자를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

사내의 것치고는 지나치게 희고 모양 좋은 에드워드의 손가락에 의해 자식새끼 같은 카렌 3호의-알렌이 즐겨 쓰는 카메라는 캐논에서 나온 카렌 3호와 소니에서 나온 카렌 7호였다.- 온 구멍이 개방되었다. 다소곳이 모습을 감추고 있던 SD 카드며, 배터리가 분리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알렌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냥 저장된 데이터를 전부 삭제하기만 해도 될 텐데, 에드워드는 손바닥 위에 얹은 엄지 한 마디만 한 SD 카드를 반으로 접었다. 단말마 하나 없이 뚝 부러진 연약한 SD 카드는 그렇게 두어 번을 더 에드워드의 손 안에서 조각이 나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제 복구할 데이터도 없었다. 기껏해야 몇 그램밖에 되지 않는 메모리 카드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내장 메모리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고, 그래도 무게에 변화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가볍게만 느껴지는 카메라를 돌려받은 알렌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딱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리안이 다가와 알렌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고, 내장 메모리에 저장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라며 농담을 담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랬다면 카메라를 통째로 부숴버렸을지도 몰랐으니 그나마 돌려받은 게 어디냐는 브리안의 말에 알렌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축 늘어진 알렌의 어깨를 바라보며 브리안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일리를 대타로 쓰자고 제안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아직 촬영은 한 시간도 채 진행하지 않았고, 새로 찍으면 일정은 맞출 수 있을 것이었다. 케일리를 찍은 사진은 이미 못 쓰게 되었지만 제프가 도착했으니 천하의 맨해튼 바닥에서 아킨시나의 옆에 세울 모델 하나를 데리고 오지 못할 리도 없었다.

그래서 알렌이 지나치게 상심하지 않도록 기운을 북돋아주려 농담을 건넸는데, 아무래도 의도한 바가 엇나간 모양이었다. 확실히 브리안이 보기에도 케일리와 아킨시나의 케미스트리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저 아킨시나에게 잡아먹히지만 않으면 선방한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케일리는 어쩌면 비서보다 모델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그의 상사에게 말을 건네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 상사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대타로 쓰려고 한 것이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참으로 난감했다. 자신의 안일한 대처 때문에 기껏 찍은 알렌의 사진을 못 쓰게 된 것뿐만 아니라, 아킨시나까지 완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스튜디오를 열대성 저기압으로 채우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허리케인이 불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안에서 브리안이 잔뜩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 알렌……, 미안해. 난 당연히 지사 사람이니까 모델로 써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결국은 원망의 화살을 에드워드에게 돌린 브리안이 흘낏 그의 모습을 시선으로 찾았다.

남의 물건을 당당하게 파손한 에드워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케일리를 꼼꼼하게 챙겨 스튜디오 한켠에 구비되어 있던 의자에 나란히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내 할 일은 끝났으니 너희 할 일을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당당한 그 모습에 브리안은 할 말이 없어 헛숨만 쉬었다.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 에드워드의 태도에 제프는 차마 직접 묻지도 못한 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했고, 눈치가 빠른 한나조차도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알렌과 브리안이 생각하기에도 에드워드의 반응은 지나쳤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설마 저 두 사람은 평범한 상사와 비서가 아니라,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걸까?

그들은 영국인이니 그런 걸지도 몰랐다. 물론 그들이 동성연애를 즐기든 양성연애를 즐기든 브리안이 신경 쓸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연애가 업무에 지장을 가지고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뉴욕 지사 마케팅 부서의 팀장 브리안은 영국 지사의 부서장인 에드워드보다 직급도 낮았고 심지어는 법인도 달라 불평을 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이쪽에서도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고 케일리를 끌어들이기는 했으니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나와 함께 휴대전화를 붙잡고 친분이 있는 모델 에이전시에 전화를 돌리는 제프가 에드워드를 탓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테다. 사고는 사고였고 모델이 도착하지 못한 건 에드워드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었다. 케일리를 말없이 대타로 쓰려 한 것도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언짢을 만한 일이다.

에드워드가 과민반응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쪽도 잘못을 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리안은 에드워드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런 것이, 에드워드는 이 프로젝트의 기안자이자 총 책임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한 치의 거리낌 없이 SD 카드를 부숴 오전 중의 촬영을 완전히 망쳤고, 뿐만 아니라 이번 프로모션의 꽃이나 다름없는 아킨시나와 대거리를 해 그의 기분을 완전히 잡쳐놓기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완전히 파투가 난 스튜디오 안에서 알렌이 다시 사진을 찍게 만들어야 하는 브리안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무슨 카드를 내밀 수 있을까 고민했다.

별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사실 아킨시나를 다시 세트장 안으로 되돌리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막막했다.

그런 브리안에게는 다행으로, 한참을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던 알렌이 짧게 숨을 내쉬었고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멀쩡한 표정을 한 알렌은 조바심이 담긴 브리안을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툭 마주 쳤고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없어진 데이터를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부서졌으니까 지금까지 찍은 건 포기할 수밖에. 게다가 나한테는 아직 아킨시나가 남아 있으니까. 어차피 오늘의 주인공은 아킨시나잖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든 할 테니까.”

……라는 것은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다가온 브리안에게 들킬까 분한 척을 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실상은 터져 나오는 기쁨의 환호성을 숨기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표정을 숨긴 것뿐이었다.

그는 오늘 찍은 사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포토그래퍼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진을 포기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알렌의 카렌 3호는 넘버링만 보면 사진을 찍기 시작해 세 번째쯤이 될 초짜시절 구입한 구형처럼 들렸지만, 사실 원래의 카렌 3호가 고장난 후 새로 들인 비교적 신형 모델이었다.

그는 소니와 캐논 양 사의 카메라를 번갈아 사용해왔는데, 사실 소니는 인물 사진을 찍기에는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을 찍을 때는 캐논 사에서 나온 카렌 1호, 3호, 5호를 주로 썼고 운 좋게도 오늘 가지고 온 3호는 개중 가장 최근에 구입한 모델이었다.

10년 전의 포토그래퍼들에게 말하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비웃음이 돌아올 말이었지만, 대단히 놀랍게도 최근의 카메라에는 와이파이 기능이 딸려 있었다.

사실 그 기능은 카메라에 딸린 게 아니라 SD 카드에 딸려 있었지만 모든 카메라에서 쓸 수 있는 건 아닌 탓에 알렌은 2011년 이후의 모델을 새로 구입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카렌 3호를 새로 들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그거였다.

알렌은 보통 야외에서 찍은 사진을 실시간으로 노트북에 전송하기 위해 카렌 3호를 썼다. 덕택에 알렌은 스튜디오보다 훨씬 다양한 위험이 도사리는 바깥세상에서 더 이상 불의의 사고-카메라를 호수에 빠트린다거나 하는 류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오늘은 스튜디오 촬영이었고 기껏해야 지나가는 스태프에게 부딪혀 카메라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알렌은 카렌 3호를 썼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아킨시나를 찍기에 가장 어울리는 색감을 담아내는 카메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후보정이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첫인상은 중요했다.

결론적으로 알렌의 선택은 대성공이었다. 에드워드에 의해 산산조각난 SD 카드는 기껏해야 30달러짜리였다. 그는 30달러짜리 카드 하나를 부숴 사진을 없앴다고 만족하고 있었지만, 케일리가 담긴 사진의 데이터는 온전히 알렌의 노트북에 남아 있었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고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는 영국 놈에게 그 사실을 말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알렌은 만약 이 사진을 광고에 사용함으로 인해 고소를 당하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감수할 참이었다.

사진을 보면 뉴욕 지사에서는 분명 리스크를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향수 광고에 케일리를 내보낼 것이었다. 알렌은 자신이 찍은 사진이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에드워드가 고소를 하려면 먼저 사진을 광고에 쓰도록 허락한 뉴욕 지사가 타깃이 될 것이다. 사진을 빼돌린 자신에게도 화살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지만, 만약에 개인적으로 고소를 당한다고 해도 최악의 경우 처벌은 초상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정도다.

저쪽에서 아주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면 좀 더 일이 귀찮아질 수 있겠지만, 다행히도 알렌은 미국과 프랑스의 이중국적자였다. 여차하면 이 회사의 지사가 없는 프랑스로 튀어 고소하기 귀찮게 만들면 끝이었다.

어차피 알렌은 보통 유럽을 돌아다니며 프리랜서로 사진을 찍었고 미국에 머무르는 건 한 해에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아내와 살고 있는 집은 파리였고 그로서는 별로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잠깐 영국이나 미국에 오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었고 아내에게 등짝을 몇 대 얻어맞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 정도면 치를 만했다.

행복한 연인과의 크리스마스에, 어디 한번 거나하게 엿이나 먹어보라지.

크리스마스 시즌의 대규모 신제품 프로모션은 총 12개국의 주요도시에 대형 광고판을 설치해 대대적인 광고를 예정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런던도 포함되어 있었고, 에드워드와 케일리가 근무하는 영국 지사의 소재지는 런던이다.

자신의 연인의 사진이-아니면 남의 물건을 부숴서라도 공개하는 걸 막고 싶었던.- 전 세계에 전시되는 걸 보면 적잖이 화가 나겠지.

앞으로 석 달 뒤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실감하게 될 에드워드를 향해 마음속으로 통렬한 비웃음을 날리며 알렌은 와이파이 SD 카드라는 신문물을 발 빠르게 받아들인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렇게 알렌은 에드워드를 물먹이는 동시에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발표해 인류의 상업예술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혹시라도 에드워드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사진을 빼앗겨 상심한 포토그래퍼를 열연한 알렌을 의심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스튜디오 안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 ◆ ◇

때마침 소호에 스태프를 구하러 나갔던 마케팅부 직원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나갈 때는 혼자였던 이들이 제각각 한두 명씩 대타를 데리고 와 제프, 브리안, 그리고 한나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새로 추가된 인원이 두 번째 촬영을 위해 향수 세트장 뒤에 새 세트를 꾸몄다. 이미 찍은 향수 사진을 에드워드가 폐기한 탓에 결국 재촬영이 필요해 당장 세트를 철거할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다소 기운이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알렌은 카메라에 새 SD 카드를 넣고 다음 촬영을 해내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평소 운동 하나 하지 않던 남자가 그렇게 뛰쳐나가다 거나하게 넘어지기까지 했으니 기운이 없는 것도 당연했지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멋대로 가져다 쓴 것에 대한 항의인지 촬영에 대해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 책임자인 제프가 향수 촬영을 오후로 미루고 오후의 일정을 오전으로 교체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덕분에 제시간에 도착해 대기해 있던 세 명의 여자 모델이 다음 촬영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세트장에 섰다. 소호에서 잔뼈가 굵은 새 스태프들과 원래의 스태프들 또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촬영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남은 것은 겉으로 보기에도 기분이 바닥을 치다 못해 대지를 뚫고 들어가는 게 명백한 오늘의 주인공 유리 아킨시나뿐이었다.

물병을 쥔 채 간이 테이블에 기대서 잔뜩 굳은 얼굴로 에드워드를 노려보는 데 여념이 없는 맨즈 모델의 꼭대기를 바라보며 브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유리 아킨시나와 프로모션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영국 지사에서 전해 들었을 때의 기대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암울한 미래만이 남았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아킨시나를 어떻게 하면 촬영장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일단 아킨시나가 그대로 뛰쳐나가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선방한 것이라고 브리안은 생각했다. 아킨시나는 갑자기 뛰어든 에드워드가 지나치게 고자세로 나와 미처 반박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세트장에서 일어났던 짧은 대치를 곰곰이 되짚으면, 이번 일은 여차하면 아킨시나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뉴욕 지사의 독단으로 영국 지사의 직원을 모델 대타로 추천했고 아킨시나는 그것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 상황에서 알렌이 시키는 대로 콘셉트에 맞춰 포즈를 취한 결과, 황당하기 짝이 없게도 추행범 취급을 당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가십을 좋아하는 기자 하나에게라도 잘못 걸려, 오늘의 해프닝이 새어나간다면 정말로 귀찮은 일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케일리와 에드워드의 일이야 지사와 법인은 다르지만 모회사가 같았고 회사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아킨시나는 아니었다.

직원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해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며 브리안은 고민에 빠졌다.

뒤처리도 뒤처리대로 문제였지만, 당장 닥친 일이 급했다. 촬영기간은 사흘 반나절뿐인데 벌써 첫날의 오전이 수확 하나 없이 흘러가게 생겼다. 일정을 타이트하게 조여도 가능할까 말까인데, 잔뜩 화가 난 아킨시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아킨시나에게 다가가 슬쩍 과일주스 병을 건네며 브리안이 말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해. 해밀턴 씨한테까지 대타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아서 오해가 생겼지 뭐야. 성희롱 이야기에 대해서는 네가 원한다면 해밀턴 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하도록 할게. 아마 해밀턴 씨도 네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제대로 해명하면 오해에 대해서는 사과해줄 거야.”

딱딱한 표정으로 케일리와 에드워드를 노려보던 아킨시나는 허공에 뜬 브리안의 손을 무시한 채 잠시간 말이 없었다. 잔뜩 독이 오른 얼굴이 어딘지 섬뜩하다고 생각하며, 브리안은 잘생긴 얼굴을 보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인간미 없는 아킨시나의 얼굴이 지금은 흡사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인외의 존재처럼 보였다.

저 얼굴을 밤거리에서 봤으면 방광이 임무를 방기해 추태를 보여, 기껏 손에 넣은 인간의 존엄성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살벌했다.

어정쩡하게 주스를 거두어들인 브리안은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몇 번째일지 모를 한탄을 하면서도 그의 입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지금이라도 내가 사정을 설명하고, 넌 결백하다고 해명하고 오는 건 어때? 게다가 해밀턴 씨는 우리가 억지로 로체니 씨를 끌어들인 것처럼 몰아갔지만,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성인이 자기 의지로 하겠다고 한 건데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이상하잖아. 구두계약도 계약이라고. 그가 오케이 했으면 성립된 거지. 넌 잘못 없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브리안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고, 아킨시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게 맞았다. 다만 아킨시나 본인이 에드워드에게 필사적으로 해명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원하는 걸 쥐어주면 설득할 수 있을까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아킨시나는 브리안이 해명을 해봤자 에드워드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뀔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눈의 힘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든 뭐든,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페로몬을 흘리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테다.

망할 놈의 페로몬. 그놈의 페로몬만 아니었다면 추행범 취급에 당당하게 맞섰을 텐데.

브리안이 넌 잘못이 없다고 세뇌하듯 말을 반복할수록, 아킨시나는 자신의 멍청함이 불러온 뱀파이어의 오해를 풀 방법 같은 건 없다는 현실을 반복해서 인식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보통의 경우 다른 의도로 사용하는 페로몬을 케일리를 상대로 흘렸다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아킨시나 자신마저도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킨시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저, 아킨시나. 다른 모델들은 준비가 끝났는데 다음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할…….” 하고 슬그머니 본심을 드러내는 브리안을 무시한 채, 억울함을 삼키던 아킨시나가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에드워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세트가 훤히 보이는 곳에 의자를 가져다 케일리까지 나란히 앉혀놓았던 에드워드의 시선이 정확히 아킨시나를 향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양 휘휘 손을 저었다. 고개를 갸웃한 케일리는 따라 일어서지 않았고, 혼자 일어선 에드워드가 성큼성큼 일직선으로 도착한 것은 당연하게도 아킨시나의 눈앞이었다.

저가 앉은 간이의자가 왕좌라도 되는 양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에드워드의 뜬금없는 행동에 아킨시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별로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고 촬영을 계속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원흉이 직접 걸어와주시니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에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기분문제로 촬영을 방기하다니 프로의식은 개 사료로 주고 온 겁니까?’ 하며 이죽거렸을 아킨시나였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프로의식이고 뭐고, 기껏해야 몇십 년을 즐기면 끝일 일에 평생 갈 평판을 망쳤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건 당연했다. 그런 아킨시나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오늘 여기에 일하러 온 거 아니었나?”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였고 아킨시나가 라이칸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네 기분이 더럽든 말든 일하러 온 거면 일이나 하라는 노골적인 태도에 아킨시나가 울컥 반박했다.

“그쪽이 과잉반응 한 저 남자와의 접촉도 일이었습니다만? 또 그따위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당할까 무서워서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뾰족하게 날아온 아킨시나의 말은 에드워드가 완전히 잘못 짚어 자신에게 모욕을 줬다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기껏해야 몇 년 살지도 않았을 왕자님의 말에 담긴 가시를 눈치채지 못할 에드워드가 아니었다. 그는 이해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고,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매달았다.

아킨시나가 왜 화를 내는지 납득한 것처럼 부드럽게 돌변한 에드워드의 표정에 브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브리안은 방금 전의 안이한 안도를 후회했다.

“아하, 계집애처럼 삐치기라도 했나 보지? 모셔 받들어야 하는 귀하신 몸이다 보니 맞는 말 좀 들은 것 정도로 기분이 더러워져서 촬영도 못할 만큼 억울하고 그래?”

“해밀턴 씨!”

“지금 때려치우고 집에 가서 핑크색 키티 커튼이 달린 창문가에 쪼그려 앉아 찔찔 짜려고 그러는 거라면 우리도 안 잡아. 아무리 사업이 중요하다지만, 그래도 사람보다는 덜 중요하지. 암.”

사람이라는 단어에서 유독 강세를 넣는 에드워드의 의도를 눈치챈 것은 당사자 유리 아킨시나와 턱을 괴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케일리뿐이었다.

콰직.

아킨시나의 손에서 페트병이 어그러졌다. 가해지는 힘을 견디지 못한 플라스틱 뚜껑이 툭, 데구르르 스튜디오의 바닥을 굴렀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킨시나를 향해 에드워드가 싱긋 웃었다.

“성추행범. 찍을 거야, 말 거야? 네가 안 찍을 거면 내가 대신 해줄 의향도 있는데, 나 정도면 회사에서도 팡파르를 불면서 좋아할걸?”

잔뜩 비웃음을 담아 던진 에드워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인간들 틈에 섞여 살며 가장 자주 받는 권유가 바로 쇼 비즈니스에 종사할 생각이 없느냐는 뱀들의 속삭임이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팔아먹을 생각이 없었고, 그래야 할 만큼 절박한 이유도 없었지만 유리 아킨시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 한 번쯤은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케일리의 일로 화를 낸 건 남의 것을 전 세계에 돌리려 드는 멍청이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은 어딜 장식하든 사실 아무래도 좋다는 게 에드워드의 입장이었다.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 아니라 -B 지구였고 놈들은 마법이니 세뇌니 쓸 수 있는 방법도 많았다. 그들에게 불리할 만한 일이 되면 알아서 처리할 게 뻔했고 사실 그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에드워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더 이상 -B 지구에서 쓰레기 같은 혈액 팩을 공급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이참에 직장을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흠, 그건 새로운 관점이군 그래.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성을 떠올린 에드워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다음 직업은 저 동물의 왕국 왕자님처럼 모델이나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성격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자신이 못할 리가 없었다.

동물 왕자의 높은 콧대를 꺾기 위해서는 그가 잘하는 걸로 밟아주는 게 가장 효과적일 것 같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에드워드는 진심이었다.

아킨시나가 촬영을 계속하든, 자신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든 에드워드에게는 득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 같은 건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고 덧붙이는 에드워드의 말을 들으며, 아킨시나는 자신에게 선택지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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