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5. Passion Week in NYC (6)
미행 엿새째.
쇼는 언제나처럼 지루했다. 아킨시나를 쫓아다니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여성복 브랜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케일리는 평생 구경할 옷을 다 본 것처럼 심신이 지쳐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9월이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부는 9월의 뉴욕에서, 내년 봄과 여름에 유행할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가 케일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로 다가왔다.
종종 저도 모르게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모델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만큼 눈에 독으로 다가오는 화려한 외모가 드물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아킨시나도 흠잡을 구석이 없이 완벽한 외모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원래의 모습이 털이 북숭한 짐승이란 걸 생각하면 감흥이 덜했다.
그런 걸 보면 뱀파이어는 인간들의 상상력에 꽤 수혜를 받는 편이 아닐까 케일리는 생각했다. 라이칸과 뱀파이어를 비교하면 역시 비주얼적으로도 뱀파이어가 훨씬 인간에 가까웠고 심지어는 아름답게 묘사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자신은 생각보다 외모에 약한 게 아닐까, 제법 진지한 고찰에 빠져 있던 케일리를 상념에서 건져낸 것은 아킨시나의 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흘간의 촬영을 끝낸 후에도 같은 쇼, 같은 파티에서 얼굴을 마주하면 의심이 싹트는 건 당연한 수순일 테다.
문제는 아킨시나 쪽에서 스토킹-혹은 미행이나 감시.-을 의심하는 건 별로 현명하지 못한 선택일 것이라는 점 정도일까. 에드워드가 말한 것처럼 어차피 아킨시나는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고, 그렇다면 그보다 한발 앞서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작전이 의외로 먹혀 들어갔다.
어디를 가도 먼저 도착해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때마다 아킨시나의 표정이 나날이 험악해졌다. 에드워드는 그 모습에 매우 기뻐했지만, 케일리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비유를 빌리자면 아킨시나는 사자였다. 굳이 맹수의 앞에서 얼쩡거리며 약을 올리는 건 자신들의 임무와 별로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아킨시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지긋지긋한 표정을 한 채 에드워드에게 다가왔다. 케일리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막아서는 에드워드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지만, 사실 그가 말하는 해결은 해결보다는 좀 더 상황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것에 가깝다는 걸 학습한 후라 다소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에드워드를 대신해 아킨시나의 의심을 중재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물러나 끼어들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에드워드의 말은 어떤 면에서 보면 틀린 건 아니었는데, 혹시 자신을 스토킹 하는 거냐는 아킨시나의 가시 돋친 물음에 에드워드는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배를 부여잡고 아주 호탕하게 웃어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이 나갔냐고 묻는 아킨시나에게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웃기려고 한 말 같아서 친절함을 발휘해 웃어본 것뿐이야. 사실 하나도 안 웃겼거든.
내가? 널? 스토킹 한다고? 하하하. 난 오히려 네가 날 스토킹 하는 줄 알았는데?
뇌가 작으면 인과관계를 생각할 논리력도 없어지는 모양인데, 잘 되새겨봐. 내가 먼저 도착한 곳에 네가 나타난 게 한두 번이었어? 왜, 내가 재주를 부려 시간도 뛰어넘고 널 쫓아다닐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망상이라도 하고 있었나?”
사실 이쪽에서 그를 스토킹 하고 있는 건 엄밀하게 따지면 사실이었으니-미행과 감시였지만, 하는 짓은 스토킹과 비슷했다.- 아킨시나가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언제나 정의롭고 합리적으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거기까지 말한 시점에서 이미 아킨시나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지만, 에드워드의 폭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 얼음나라 동굴에 돌아가서 유머감각을 키우고 다시 오는 게 어때? 아니, 그것보다는 먼저 자아도취에 빠진 편집적 망상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일 것 같기는 하지만, 여기에 너를 받아주는 병원이 있을지는 모르겠군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아킨시나가 라이칸이라는 것을 비웃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었다.
그 일련의 대화 이후로, 아킨시나는 에드워드가 있는 쪽으로는 눈알도 돌리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에드워드가 먼저 도착해 있는 것에 대해서도 완전히 신경을 끈 것 같았다.
사실 그 편이 현명한 선택이기는 했다. 에드워드에게 말로 이기는 건 어려워 보였으니 차라리 상종을 안 하는 게 그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라이칸을 대하는 에드워드의 태도를 보면 아마 순혈 뱀파이어보다는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밑층 주민인 것 같으니 그렇게 걱정 할 필요야 없겠지만서도, 지금처럼 에드워드가 잠깐 자리를 비워 혼자가 된 시간에는 다소 불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에드워드의 말을 다시 빌려보자면, 아킨시나는 사자였고 자신은 토끼였는데 평소 자신을 지켜주던 사자 에디가 없는 틈에 사자 아킨시나의 앞발에 당할 수도 있을 테다.
물론 그렇게 쉽게 당해줄 생각이 없었고, 케일리는 스스로가 토끼보다는 좀 더 공격적인 동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동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썩 괜찮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전투 토끼쯤으로 해두면 어울릴까.
아니, 생각해보면 토끼는 총을 쓰지 않으니 아무래도 그냥 인간이면 될 것 같다.
쓸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케일리는 영화에 나오는 비밀요원들처럼 허리춤에 손바닥만 한 총 한 자루를, 발목에도 한 자루, 나머지 발목에는 나이프를 차고 있었다.
그 사건 후로 아킨시나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적대감보다는 그다지 기쁘지 않은 관찰의 시선에 가까웠다. 그는 타인의 시선에 둔감한 게 아니라 무시를 잘하는 성격일 뿐이다.
케일리가 최근 들어 느끼고 있던 아킨시나의 시선이 기분 탓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듯, 다급한 어조로 걸려온 데이브의 전화를 받은 에드워드는 듣는 귀가 많은 자리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인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절대로 아킨시나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했다.
짜증스럽게 멀어지는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얼음이 담긴 잔을 가지고 테라스에 기대섰다. 어차피 아킨시나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남자였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다른 사람의 내장을 빼 가는지 아닌지를 감시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워드를 향한 적의가 어느새 자신을 관찰하는 것으로 바뀐 건 별로 유쾌한 징조는 아닐 것이다.
아킨시나가 자신을 너무 자주 쳐다보는 탓에 반대로 케일리는 그를 쳐다보기가 어려워졌다. 에드워드였다면 그러든지 말든지 대놓고 감시했겠지만 케일리는 그와 직접적으로 트러블을 일으킨 당사자도 아닌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의심을 살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킨시나의 적대감은 에드워드를 향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지켜봤지만, 지금은 글쎄. 테라스의 커튼 틈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가끔 확인하며 아킨시나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에드워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테라스에 가볍게 걸터앉아 물잔을 비우던 케일리가 곤란한 얼굴로 몸을 세웠다. 아킨시나가 움직였다. 하필이면 에드워드가 없는 틈에, 파티장 출구를 향하고 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여자와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에드워드에게 건네받은 백과사전에 따르면 라이칸은 일부일처제인 데다 반려를 얻으면 평생 그 상대만 바라본다고 했다. 그런 아킨시나에게 있어서 하룻밤 불장난이라는 말은 정갈한 가톨릭 신부와 고모라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러니 여자 때문에 옆길로 새는 것도 아닐 테다. 심지어는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파티 도중에 갑자기 모습을 감출 남는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던 케일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이 파티가 오늘 아킨시나의 마지막 스케줄이었고, 아직 9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적어도 서너 시간은 더 머물러야 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피곤해서 몸을 쉬기 위해 돌아간다는 것도 라이칸인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케일리는 들고 있던 물잔을 테라스 난간에 내려놓은 뒤 파티장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가끔 그에게 말을 거는 이들을 적당히 물리며 출구의 문손잡이를 잡는 아킨시나를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한 케일리가 힐끔 에드워드가 사라진 복도를 돌아보았다. 안타깝게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엿새간 감시한 결과 유리 아킨시나에게는 사람의 내장을 빼먹어야 할 이유도, 그걸 장식품으로 쓰는 취미도,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아직 나흘을 더 쫓아다녀야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새로운 게 나올 확률은 적었다.
적어도 리퍼가 아킨시나이기는 어려울 테니, 혼자서 그를 쫓아가도 내장은 무사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케일리가 출구를 빠져나가 차에 올라탄 아킨시나의 뒤를 따르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줄곧 에드워드에게 운전을 맡겨왔기 때문에 차 키가 없었다.
서글서글한 라티노 청년이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목적지를 물었다. 케일리는 그를 향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저 차를 쫓아가주세요.”
◇ ◆ ◇
유리 아킨시나는 감이 좋았다. 인간들과는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훌륭한 감이라는 것은 당연했으며, 다른 라이칸과 비교해도 평균을 웃돌았다.
감이라는 것이 말로 늘어놓으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미신처럼 느껴졌지만 그 실체를 살피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태생이 야성인 라이칸들에게 있어서 감이라는 것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 중 하나다. 커다란 지진이 오기 전에 도망을 치는 새떼들이나, 단체로 폐사한 해양생물을 보고 위기를 감지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짐승에게 있어서 감이란 콕 집어 실체를 설명하기는 어려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거나 혹은 위험을 피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킨시나의 감은, 뱀파이어인 에드워드 해밀턴이 자신을 상대로 대단한 악의를 품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 악의에는 아킨시나가 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을 만큼 명확한 증거가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어디까지나 실수로, 아킨시나는 그의 비서인 동시에 애인 비슷한 사이로 보이는 남자에게 페로몬을 흘렸다. 하필이면 그 장면을 목격한 뱀파이어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아킨시나도 할 말이 많았는데, 만약 그가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상대였다면 최소한 다른 이종들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냄새를 묻혀놓거나, 아니면 권속으로 만들어놓았어야 했다.
뱀파이어에게도 냄새를 묻힌다는 게 통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칸들은 반려를 얻으면 그 상대에게 일정 주기로 페로몬을 묻혀 영역표시를 했다. 다른 이에게 종속된 이를 유혹하지 않는 것은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뱀파이어들의 예의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것이라는 표시를 해두지 않은 뱀파이어에게도 과실은 있다고 아킨시나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킨시나는 처음부터 그 남자를 유혹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가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리 라이칸의 눈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체질만 아니었더라도, 굳이 유혹할 생각도 없는 상대에게 페로몬을 흘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킨시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뱀파이어는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타이트한 뉴욕에서의 스케줄 대부분에 따라왔다. 따라왔다는 표현 자체에는 어폐가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자신의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따라간 것처럼 보이는 게 자신이라는 문제점까지 있었다.
하지만 아킨시나는 근 일주일을 계속된 우연이 우연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분명 자신이 어디에 갈지 알고 있으면서, 한발 앞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이유가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것뿐인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바로 어제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면 후자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깔아보는 뱀파이어의 눈빛에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지만, 남은 것은 후회뿐이었다. 그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킨시나는 자신에게 뱀파이어와의 접점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 그들이 정말로 자신을 스토킹 하는 거라면 그 이유 또한 짐작할 길이 없었다. 정말로 성격이 지나치게 더러운 나머지 어떻게든 자신에게 복수를 하려는 셈이라면, 그는 방법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었다.
만약 뱀파이어가 그의 것에 손을 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보복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다 못해 아예 나라와 도시도 잘못 찾아간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전부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이 인간 사내에게 마음이 있다는 착각을 한 채, 자신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과시한다는 어이없는 의도. 사실 아킨시나가 거기까지 어이없는 가정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망할 뱀파이어는 아킨시나의 스케줄을 졸졸 쫓아다니며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번, 보란 듯이 인간 애인을 대동하고 나타나 애정을 과시했던 것이다.
오만하기로는 견줄 종족이 없다는 뱀파이어가 친히 인간 사내에게 샴페인을 대령하지를 않나, 파티장의 드레스 코드에 걸맞게 깔끔히 넘긴 머리가 흐트러졌다 싶으면 제 손으로 만져주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스토킹 하는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뱀파이어를 가끔 확인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인간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자신이 눈빛으로 그를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려는 파렴치한처럼 느껴지는 방어적인 태도였다.
그 뱀파이어가 인간 남자를 흡사 애인 대하듯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인간 남자에게서 뱀파이어의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줄곧 붙어 다니다 보니 체향이 섞일 때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라이칸은 후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이 인간의 수십 배로 예민했다. 특히나 뉴욕처럼 인간을 비롯한 온갖 종족이 드글거리는 곳에서는 적당히 감각을 닫아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코를 찌르는 온갖 냄새와, 귀에 파고드는 잡다한 소음에 하루도 견디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인간들 틈에서 오래 지내며 감각을 닫아둔 탓에 잘못 판단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한 번은 지나가는 척 후각을 열고 인간 사내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갔다. 그리고 아킨시나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둘은 애인 사이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근래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는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만약 그랬더라면 인간 사내에게서 뱀파이어의 냄새가 났을 테니 말이다. 아킨시나는 그저 일 관계로 오랜 시간을 붙어 있는 사이와, 육체관계를 나누는 사이 정도는 간단히 구분해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현재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면 이야기가 더 이상해졌다. 뱀파이어는 인간 사내와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를 권속으로 만든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애인 사이도 아닌데 자신을 상대로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뱀파이어가 일방적으로 인간 사내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킨시나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란 족속은 설령 그 철의 심장을 짓밟고 들어간 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마음을 내어줄 만큼 순순한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에 든 인간을 독사와 같은 혀로 교묘히 속여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애정이었고, 그 잔혹한 족속들의 자비였다.
에드워드 해밀턴이 정말로 뱀파이어라면, 그의 애정공세를 마치 당연한 권리라는 양 받아들이며 그만한 애정으로 되돌리지도 않는 인간 사내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들이 자신의 눈을 흐리기 위해 연극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 뱀파이어는 정말로 이상한 뱀파이어라는 뜻이었고, 아킨시나는 전자를 짚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낼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어제처럼 직접 물어보는 걸로는 알아내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자신이 뱀파이어에게 싸움을 건 격이었으니 그런 의심을 하는 것 자체가 편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아킨시나는 이 모든 생각이 자신의 편집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그들이 만약 정말로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의도가 있을 테다.
뉴욕에 도착한 후로 아킨시나는 줄곧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자신의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가 스케줄을 유출했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세상에 완벽한 보안이라는 건 없었다. 뱀파이어쯤 되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정보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가는 길목마다 먼저 도착할 리가 없었으니 아마 스케줄에 접근한 것까지는 확실할 테다.
만약 자신이 스케줄에 들어 있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그때도 뱀파이어와 인간 사내가 자신을 쫓아온다면 그들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렇게 생각한 아킨시나는 스케줄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렸다.
오전에 있었던 쇼는 제일 앞자리에 배정받았기 때문에 중간에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다. 내년 하반기에 잡힌 캠페인의 주관 기업에서 주최한 식사회 또한 주역인 자신이 빠질 수가 없었다. 저녁의 파티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매니저 그레고리와 스타일리스트 리사가 문제였다.
둘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사실 정체를 숨긴 이종이었다. 혼자서 인간들 틈에 섞이는 것을 찬성할 리 없는 부친에 의해 딸려온 감시인이자 보디가드였다. 다른 업종도 아니고 패션업계에 종사하면서 자신에게 물리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킨시나는 그들을 딸려 보내지 않으면 유희도 없다는 부친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원래 고집이 셌고 자신을 바깥세상에 풀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양보를 한 셈이었으니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아마도 부친에게 자신의 동향을 보고하거나, 그 비슷한 일을 위해 종종 자리를 비우는 그렉과 리사는 요즘 들어 외유가 잦았다. 부친의 부하인 두 이종이 뭘 하고 다니는지 관심이 없는 아킨시나는 그들이 위장신분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한다면 자리를 비우든 자리를 치우든 아무래도 좋았다.
둘의 진짜 임무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뱀파이어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스케줄을 이탈하려 한다는 사실을 들키면 모르긴 몰라도 반대할 게 뻔했다. 그러니 그렉과 리사가 자신의 곁을 떠난 틈을 노려서, 뱀파이어와 인간 사내를 유인해야 했다.
어찌됐건 그들에게도 인간 세계에 숨어 있기 위한 일 외에, 그들을 부리는 자신의 부친에게서 받은 명령이 있을 테니 제때 돌아오기만 한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둘이 사라지는 빈도를 생각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만 남는 시간이 생길 테고, 아킨시나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페라리의 운전석에서 창문을 활짝 연 채 아슬아슬한 속도로 액셀을 밟으며, 아킨시나는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어퍼 웨스트사이드와 센트럴 파크 사이의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려, 머지않아 개발이 진행 중인 슬럼가에 접어들었다. 파티장에서부터 따라붙은 택시는 제법 교묘하게 블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행이 아닌 척 움직였지만 이미 아킨시나에게 발각된 후였다.
후미진 골목에 차를 세운 아킨시나가 문을 열고 내렸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시야에 바로 들어올 만큼 가깝지도 않은 어두운 거리에 택시가 멈춰 섰다. 인간의 시야로는 이쪽이 거의 보이지 않겠지만, 라이칸의 시력으로는 택시에서 내리는 인간 사내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택시는 곧 그들이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사라졌다.
늘 타고 다니던 마세라티가 아니라 택시가 따라붙던 것부터 의아하게 생각했던 이유를 바로 다음 순간 아킨시나는 알 수 있었다. 텅 빈 슬럼가의 거리에는 깨진 가로등 뒤에 몸을 숨기는 인간 사내가 홀로 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 ◆ ◇
“이런…….”
들릴 듯 말 듯 혀를 차며 중얼거린 케일리가 다소 곤란한 얼굴을 했다. 어쩌면 자신은 함정에 빠진 걸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택시 기사에게 근처에서 기다려달라고 말을 해놓았을 텐데. 얼마 없던 현금을 탈탈 털어 차비와 팁으로 건네받자마자 도망치듯 차를 달려 사라져버린 뒤꽁무니를 아쉽게 바라보며 케일리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자신과 아킨시나, 단 둘밖에 없는 어두운 거리에서 발소리가 났다. 산산조각 나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가로등 밑에서 다 숨겨지지도 않을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의 것일 리는 없다. 그러니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게도 아킨시나일 테다.
안타깝게도 점점 가까워지기만 하는 발소리를 들으며 케일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아마 에드워드일 테다. 하지만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미행하는 입장이었고 미행당하는 자에게 완전히 들키기 전까지 숨어 있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케일리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소리 없이 걸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소리 내 걸은 아킨시나가 가로등 앞에 멈춰 섰다.
큼, 가볍게 헛기침을 한 그가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뱀파이어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혼자서 자신을 쫓아온 모양이다.
“케일리.”
아킨시나는 첫 촬영현장에서 들은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레일리, 헤일리, 에일리, 케일리. 뭐 그 비슷한 뉘앙스였다.
운 좋게도 첫 번에 내뱉은 이름이 맞아떨어진 모양인지, 가만히 가로등 뒤에 몸을 기대고 있던 그가 한 걸음 내딛었다. 가로등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채 아킨시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킨시나는 에드워드라는 이름의 뱀파이어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극이든 진짜든 그가 아끼는 척을 하는 인간 사내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그 눈꼴신 광경이 연극이 아니라고 한다면, 인간 사내, 케일리가 자신에게 반하게 만드는 게 빌어먹을 뱀파이어를 골탕 먹이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라고 했던가요.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지 모르겠네요.”
맞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킨시나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깊은 의미는 없었지만 어딘지 경계를 담아 거리를 두는 상대에게 너무 친밀하게 구는 것도 별로 좋은 작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잉지잉. 사내의 주머니 속에서 옅은 진동음이 울렸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전화가 아니거나, 자신의 앞에서 받고 싶지 않은 거겠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주머니를 응시하고 있자니 한 타이밍 늦게 케일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침묵시위는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상황판단이 빠른 남자다.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킨시나 씨. 또 뵙네요.”
마치 대단한 우연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에 아킨시나가 조금 웃었다. 그 또한 미행이 들켰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참으로 뻔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킨시나는 곧장 그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은 자신에게 있어서 호조였다. 붕어와 똥이라도 되는 양 케일리를 꿍무니에 달고 떼어놓을 줄을 모르던 뱀파이어가 없이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말이다.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요? 전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킨시나 씨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 같은 말을 하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킨시나가 그런 것처럼, 케일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 또한 자신의 인사말이 별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들은 줄곧 아킨시나를 미행하고 있었고 촬영장 이후로 두 번째로 만나는 건 절대로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킨시나 쪽에서 접촉해 온 건 엄밀히 따지면 첫날의 촬영 후 처음이었으니 그리 틀린 인사는 아니라고 케일리는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미행을 하다 들킨 꼴이었지만, 일단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어찌됐건 에드워드가 없는 지금, 적어도 자신이 관리국에서 나온 인간이라는 사실은 들킬 일은 없을 테니 케일리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게다가 어제의 일 이후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킨시나는 이미 자신들의 스토킹을 의심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미행을 들켰으니 뭐라고 추궁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그러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킨시나가 말했다. 어제 에드워드에게 칼날을 세웠던 것과는 달리, 대단히 정중한 어조였다. 처음 촬영장에서 자신을 향해 적대적이었던 것과도 또 다른 태도였기 때문에 케일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한 타이밍 늦게 흘러나온 나직한 대답에 아킨시나가 질문했다.
“케일리, 당신과 에드워드 해밀턴은 어떤 관계입니까?”
유리 아킨시나가 자신과 에드워드가 이종족 관리국의 요원이며, 파트너 사이라는 것을 알고 물어볼 리는 없었다. 케일리는 일단 시침을 떼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대답하는 케일리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표정이 옅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대답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상대를 향해 아킨시나가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부연설명 했다.
“말 그대로, 내가 궁금한 건 두 사람의 관계입니다. 며칠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평범한 상사와 부하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당신과 에드워드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설마 자각이 없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무래도 아킨시나의 질문은 미행이나 관리국과는 상관없는 내용인 것 같았다. 잠시간 생각에 잠긴 케일리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답해도 문제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그와 나를 지켜보고 평범한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게 맞는 거겠죠. 확실히 비즈니스뿐이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저에게 아주 잘해주고, 저는 그게 싫지 않으니까요.”
아킨시나의 말을 받아친 건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었지만, 지금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케일리는 엄밀히 말해 자신에게 직업을 준 장본인인 에드워드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작해야 피 몇 모금을 대가로 자신의 일까지 모조리 대신 해주려 드는 것도 편하고 좋았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훨씬 오래 산 뱀파이어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신을 빨리 파악했고 그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체로 이해해주었다.
가족들조차 가끔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는데, 에드워드는 종종 넌 정말 이상한 인간이라며 불평을 할지언정 결국 자신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 에드워드를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케일리는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함께 있는 것 자체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에드워드가 자신과의 관계를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저 걸어다니는 피크닉 도시락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취급에 대해 실망하거나 상처를 받을 만큼 케일리는 섬세하지 않다. 사실 그는 자신이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걸어다니는 피크닉 도시락이 될 수 있다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잘해준다라……. 그건, 당신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말인가요?”
잠시간 말이 없던 아킨시나가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케일리는 일련의 질문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아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 아킨시나는 미행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의도 없이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판단한 케일리는 선문답을 주고받는 것을 관두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킨시나 씨, 왜 그런 게 궁금한 겁니까?”
자신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을 돌리던 케일리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에 아킨시나가 턱을 만졌다. 촬영장에서부터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과연 뱀파이어가 달고 다닐 정도의 가치는 있는 인간인 모양이다.
그는 자신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꿰뚫은 것 같았고, 아킨시나는 개중 가장 덜 복잡한 말을 골랐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뱀파이어를 물먹이기 위해, 너를 이용해먹는 방향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자세한 설명이 빠졌을 뿐.
밤이 내린 뉴욕의 슬럼가에 아킨시나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케일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배를 가렸다. 생존본능보다는 좀 더 저차원적인 반사로, 내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아킨시나는 리퍼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근거가 참으로 얄팍하다 보니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지나갔다.
배 위를 가리듯 얹었던 손을 슬그머니 허리춤으로 가지고 간 케일리를 향해 아킨시나가 조금 웃었다. 온화한 외견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과격한 생각을 하고 있던 케일리의 의도를 완전히 곡해한 탓이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마치 너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듯,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치는 아킨시나에 케일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서, 어째서 미행에 대한 추궁을 하지 않는지부터 시작해 그의 의중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대부분이 개소리뿐이었다.
물론 아킨시나는 실제로 라이칸이었고 인간보다는 개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짐승처럼 짖어야 한다는 건 아니었으니 케일리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노릇이었다.
총을 쓸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케일리는 라이칸에게 총이 쓸 만한 무기인지 시험해본 적이 없었고, 그가 숨기고 있는 총기는 인간에게도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운 소구경이었다. 파티에 참가하는데 나 무기 들고 있소 대놓고 광고를 할 것도 아니니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작은 것을 챙길 수밖에 없었지만, 막상 위험한 상황이 닥치니 좀 더 센 걸 챙길 걸 아쉬움이 지나갔다.
“겁……먹은 건 아니지만, 사실 별로 달가운 관심은 아닙니다. 조금 곤란하기도 하고요. 아킨시나 씨가 말한 것처럼 에디와 내가 그런 관계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행동을 해서 화나게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여차하면 달음박질칠 수 있도록 힐끔 주변을 살피며 퇴로를 확보한 케일리가 다소 침울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겁을 먹지 않았다는 말도, 에드워드를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도 케일리의 진심이었다.
그는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자신이 말을 잘못해서 상황을 더 귀찮게 만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게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에드워드에 대한 것인지는 케일리 스스로도 바로 답을 낼 수 없을 만큼 애매했다.
어쨌든 에드워드는 아킨시나를 싫어했고, 자신에게 그의 곁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의외로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는 에드워드의 몇 안 되는 충고를 죄다 어기고 있는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케일리는 조금 우울해졌다.
자신은 처음부터 아킨시나를 쫓아오지 말았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에드워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쫓았어야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주의였지만, 그래도 속이 쓰리기는 했다. 설마하니 아킨시나가 자신을 유인해내기 위한 이유 하나로 파티장을 빠져나가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했나요? 그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관심입니까?”
빤히 보이는 수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한 케일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킨시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의아함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아킨시나 씨가 게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나도 내가 그렇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케일리, 당신이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알기 쉬운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사와 부하로 남아 있을 리가 없겠죠. 그러니 ‘아무 사이도 아닌’ 그와 당신의 틈에 내가 끼어드는 게 그렇게까지 무례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 참 말 한번 더럽게 귀찮게 하는 남자였다. 검은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고 피력하듯 그렇게 대답하는 아킨시나에 케일리의 밤색 눈동자에 미미한 성가심이 스며들었다. 이런 식으로 논점을 피하며 빙빙 맴돌기만 하는 겉핥기식 대화는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국 아킨시나는 거짓말을 최대한 적게 하면서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것이고, 케일리는 그렇게 단순한 의도를 꿰뚫지 못할 만큼 어수룩하지 않다.
못해도 반평생을 능구렁이 같은 정치가들 사이에 엉덩이를 비빈 케일리였다. 그 늙은이들 사이에서 승마를 하고, 골프를 치고, 사격을 하며 한입에 홀랑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섞일 자신이 있는 케일리에게 아킨시나의 화법은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비해 별로 먹히지도 않는 시간낭비로만 느껴졌다.
케일리는 에드워드와 같이 쓸데없이 길고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화법도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좀 더 직설적으로 용건만 주고받는 게 좋았다.
인류는 더 정확하게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매 시간 매 분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면서, 정작 만들어진 말은 진짜 의도를 숨기는 데에만 사용했다.
정말이지 비효율적인 종족이 아닐 수 없다고 케일리는 늘 생각해왔는데,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 이종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없다는 점은 그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문제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래서야 차라리 말을 줄이고 몸짓과 행동으로 주고받는 게 훨씬 편했다. 헷갈리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니라, 널 죽여버리겠다와 네가 좋다는 노골적인 몸짓을 잘못 알아들을 멍청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케일리가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얼마나 더 시간을 끌어야 할까, 에드워드가 자신을 찾아낼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잘 모르겠다. 이대로 아킨시나와 날이 새도록 선문답만 주고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혼자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시도 정도는 해봐야 할 것 같다.
어차피 그의 의도는 빤했다. 자신을 이용해 에드워드를 엿 먹이려는 속셈이겠지.
만약 자신이 정말로 에드워드의 부하거나, 애인이었다면 나쁘지 않은 시도였을 테다. 혹은 아킨시나가 라이칸이고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자신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킨시나는 제 손으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재주가 없지만, 아킨시나 씨가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날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아킨시나는 자신이 에드워드나,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말에 따르면 그가 뱀파이어라는 건 눈치챘다고 하는데, 그 옆에 붙어 다니는 인간이 그 사실을 모르리라고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종들은 대체로 정체를 숨긴 채 인간들 틈에 섞여 산다고 하니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게 훨씬 자연스럽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케일리가 생각하기에 아킨시나는 자신에 대해 좀 더 신중한 판단을 내렸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케일리는 현재 자신이 처한 입장을 이용해먹기로 결정했다.
“아킨시나 씨가 나뿐만 아니라 에디에게도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눈치챘을 겁니다. 그랬던 사람이 일주일 만에 손바닥 뒤집듯 내게 관심이 생겼다고 하면, 그 말을 덥석 믿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완전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아킨시나의 은빛 눈동자가 들어왔다. 케일리는 그것을 빤히 마주한 채 정말로 궁금하다는 양 고개를 기울이며 물음을 던졌다.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케일리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고, 이내 결심한 듯 단호한 어조로 대답을 돌렸다.
“나는 당신에게 무작정 그를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지금 그가 당신의 연인이 아니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게다가…….”
거기까지 말한 아킨시나가 일순 말을 멈췄다. 잠시간 입을 다물었던 그의 얼굴에 꾸며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진심 어린 동정이 번졌다.
어째서 자신이 그에게 동정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케일리는 자신이 그의 표정을 잘못 읽은 건 아닌가 당황해야만 했다.
그런 케일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킨시나는 마치 정말로 케일리를 생각하는 것처럼 연민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에드워드 그 남자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평범한 회사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만약 그와 연인이 될 생각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그의 곁을 떠나는 게 좋아요. 이건 내가 당신에게 가지고 있는 관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에게 속고만 있는 게 가엾어서 드리는 충고입니다.”
아무래도 아킨시나는 진심인 것 같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에드워드의 정체를 모른 채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표면만 읽으면 아킨시나의 충고는 에드워드에게 제2의 숨겨진 신분 같은 게 있고, 현재 평범한 회사원인 척을 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으며 언젠가는 뒤통수를 맞을 것이라는 소리로 들렸다.
속이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과, 뒤통수를 맞을 거라는 부분만 빼면 대체로 맞는 말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아킨시나의 선의에 천하의 케일리도 잠시간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케일리는 그가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함께 정체를 숨기고 있기까지 했다. 또한 에드워드가 별로 좋은 성격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에게 잘해줬고 성격이 좀 나쁜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킨시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에드워드가 마냥 악당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고민에 빠진 케일리의 반응을 그는 완전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충격에 빠진 비련의 여주인공을 대하듯 아킨시나가 커다란 손을 들어 그의 뺨에 가지고 왔다.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케일리의 창백한 뺨에 단정하게 정리된 손가락 끄트머리가 닿았다. 언제나 얼굴을 감싸 쥐어 자신의 쪽으로 끌고 가는 에드워드와 상반되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케일리가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지금은 그의 부하직원으로 있으니 그를 거절하는 것도,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어려우리라는 건 이해합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을 믿고 회사를 그만두는 게 어려운 선택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 아킨시나 씨……? 지금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
“만약 당신이 그러겠다고만 한다면, 지금보다 나은 일자리를 얻어드리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향력을 행사하기 쉬운 위치에 있어요. 만족할 만한 자리가 날 때까지는 그를 피해서 나와 함께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남자니까요.”
“위험…….”
“그렇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잘해줘서 싫지 않다고 했던가요? 만약 그 남자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면. 지금껏 정체를 속이고, 당신을 기만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줄 텝니까?”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위험이 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케일리에게 아킨시나의 말이 정말로 이상하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에드워드가 자신을 속이고 기만한다니. 차라리 그의 입맛이 돌변해서 자신의 피를 음식물 쓰레기로 여기고 계약을 파기한다는 게 훨씬 현실적으로 들렸다.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멍한 얼굴을 한 채 할 말을 잃고 굳은 케일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아킨시나가 말을 이었다.
“물론 대가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내가, 당신이 그 남자에게 속아 넘어가는 꼴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것뿐이니까요.”
아무래도 아킨시나는 어지간히 에드워드가 싫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의 안에서 자신은 정체를 숨긴 뱀파이어에게 홀라당 속아 넘어간 순진한 인간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그렇게 부지런하게 인간을 속이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었고, 자신이 그렇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어린애도 아니라는 사실만 빼고 본다면 아킨시나의 선의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그 선의가 받는 당사자인 케일리에게 있어서 하등의 쓸모가 없는 참견이라는 점 정도일까. 그렇다고 이 시점에서 사실은 네가 라이칸이고,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걸 모조리 알고 있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흘을 더 뉴욕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이 번호로 연락하세요. 업무연락은 매니저를 통하고 있으니 이 번호를 아는 건 내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가족, 그리고 당신뿐입니다.”
안주머니에서 꺼낸 명함 케이스에 빳빳한 명함 한 장을 꺼낸 아킨시나가 만년필로 전화번호 하나를 휘갈겼다. 얼떨결에 내밀어진 명함을 건네받은 케일리는 순수하게 자신을 돕고자 하는 아킨시나를 향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할 뿐이었다.
어쩌면 이 상황은 자신에게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알아서 착각을 해주니, 굳이 노력해 말을 꾸밀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화제를 잘못 바꿨다가 상대편에서 미행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 이쪽도 귀찮아지니 케일리가 꺼낼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킨시나가 원하는 대로 지껄이도록 들어주기나 하기로 결정한 케일리가 힐끗 제 손목을 쳐다봤다.
에드워드에게도 넌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냐며 칭찬을 받았던 시력은 어둠이 익숙해지자 가는 시계침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마침 자신이 파티장을 빠져나온 지 반시간이 경과한 참이었다.
더 이상 주머니속의 전화기는 진동하지 않았다. 대신, 수십 초의 텀을 두고 희미하게 액정이 점멸했다. 누군가가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임무에서 지급받은 번호를 알고 있는 건 에드워드와 데이브뿐이었고, 아마 줄곧 자신에게 전화를 건 것은 에드워드 쪽일 테다. 에드워드가 통화를 포기한 건 자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고 판단했거나, 혹은 직접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는 방증이겠지.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는 건 에드워드보다는 데이브일 확률이 높았다. 처음 에드워드가 자리를 비운 이유가 데이브의 긴급연락이었으니 그들은 이미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미행을 의심해 자신을 유인했던 아킨시나가 멋대로 착각을 해준 덕분에 변명도 알아서 해결이 됐다. 이제 에드워드와 합류해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만 하면 무사히 침대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단꿈에 빠져 있던 케일리의 등에 환한 빛이 비췄다.
자동차의 전조등이었다. 뉴욕의 이민국은 생각했던 것보다 유능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린 케일리는, 택시에서 뛰쳐나오는 혈색이 죽은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에드워드도 아니고, 데이브도 아니었다. 저 남자는 분명…….
“아킨시나, 너 제정신이야?”
“그렉, 시끄럽습니다.”
“너……! 이런 식으로 말도 없이 멋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달린 목숨이 한둘이 아니라고!”
아킨시나의 매니저였다. 언제나 다크 서클이 바닥에 내려올 만큼 피로에 절어 있던 남자는 오늘도 여전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는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미리 말하지 않고 단독행동을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렉, 내가 솔직하게 함정을 파서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지 확인할 거라고 말했다면 반대했을 것 아닌가요? 당신은 내가 그 남자와 엮이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세르게이한테 그대로 보고하면 그 알량한 자유도 끝이라는 건 알고나 지껄이는 거냐?”
“압니다. 그리고 당신이 날 협박할 만큼 떳떳하지도 않다는 것도 알고 있죠. 소란 피우지 말고 운전이나 하세요. 그를 파티장까지 데려다 주고, 우리도 숙소에 돌아갈 겁니다. 아, 그리고 만약 내 안전이 그렇게 걱정됐다면, 처음부터 내 옆에 제대로 붙어 있었어야죠. 먼저 자리를 비운 게 누군데 뻔뻔하게 내 탓을 하려 드는 건지 모르겠군요.”
매니저로 위장하고 있는 보디가드인 주제에 지켜야 하는 대상을 홀로 내버려둔 게 누군데, 감히 협박이라니.
어이가 없다는 양 튀어나온 아킨시나의 비아냥거림에 그레고리가 빠득, 이를 갈았다.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라이칸 왕자의 가드를 맡고 싶어서 맡은 것도 아닌데, 이따위 모욕적인 대우를 참아야 한다니. 말도 안 됐다.
하지만 그를 고용한 것은 아킨시나가 아니라 러시아의 라이칸 왕이었고, 그를 상대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게 맞다. 그렉이 소속된 집단에게 있어서는 라이칸의 왕이라는 지위보다는 레드 마피아 쪽이 훨씬 중요한 비즈니스 상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아킨시나에게 입장이 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렉은 아킨시나의 요구대로 운전대를 잡았다.
아킨시나와 함께 페라리의 뒷좌석에 올라타며 케일리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는 휴대전화를 꺼내 텍스트 메시지를 확인했다. 확인하지 않은 십수 건의 메시지는 대부분의 발신자는 데이브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에드워드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시간 순으로 메시지를 읽어내려가는 케일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너 지금 어디야?! - 10:23 pm]
[전화 받아! - 10:24 pm]
[케일리, 전화. - 10:24 pm]
[왜 전화를 안 받아!!! - 10:25 pm]
[젠장,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 10:27 pm]
[아킨시나 거기 있어? - 10:30 pm]
[그 망할 짐승 새끼, 잡히면 가죽을 벗겨서 겨울 코트를 만들어버릴 테다. - 10:34 pm]
[케일리. - 10:45 pm]
[살아 있지? - 10:46 pm]
[전화 좀 받아. - 10:47 pm]
[부탁이야. - 10:48 pm]
그리고 가장 최근에 도착한 메시지는, 에드워드가 아니라 데이브로부터 발신된 것이었다.
[리퍼는 한 명이 아님. 리퍼 중 하나는 아킨시나의 매니저. - 10:50 pm]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게 다반사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시원스럽게 꼬이기만 하는 것도 일종의 운에 속하는 건 아닐까 케일리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