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1)

#Mission5. Passion Week in NYC (7)

파티장을 벗어나며 에드워드는 데이브에게서 지급받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파티장이 워낙 시끄러워서 미처 눈치채지 못한 두 통의 부재중 전화와 텍스트 메시지 한 건이 남겨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에드워드는 감각을 완전히 개방할 필요가 없는 임무에서는 지나치게 예민한 신경을 차단해놓는 편이었다.

특히나 파티장처럼 인구 밀도가 높고 소란스러운 데서는 평범한 인간보다 조금 나은 정도면 충분했다. 피학성애자도 아닌데 굳이 자신의 오감을 완전히 개방해 자학을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뱀파이어가 모든 감각을 열어둔 채 인간들 틈에 섞이는 건, 하루 내도록 헤드셋을 뒤집어쓰고 최대 볼륨으로 맞춰놓는 것과 진배없다.

며칠 그런다고 해서 당장 청각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 테고, 실제로 이상이 생겨도 금방 회복된다. 그래도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을 하루 온종일 듣는 것만으로도 심정적으로 예민해지고 짜증이 났다.

아킨시나를 감시하는 건 눈만으로도 충분했고, 굳이 그가 나누는 시답잖은 대화까지 모조리 엿들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 에드워드의 선택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

이렇게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전화기도 알아채지 못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허용범위 안이었다.

[긴급. 표적이 없는 장소로 이동 후 회신 요망. - 10:09 pm]

그 메시지를 확인한 에드워드가 아킨시나에게서 제법 떨어진 테라스에 케일리를 내버려둔 채, 홀로 파티장을 나섰다. 복도를 돌아 아무도 없는 뒷문 앞에서 휴대전화를 든 그는, 대체 무슨 대단한 이야기이기에 아킨시나의 시야에서 멀어지라고 강요씩이나 하는지 들어보자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어제의 불유쾌한 대화 이후, 아킨시나 또한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의심을 드러내는 게 별로 현명한 생각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테다. 뿐만 아니라 고작해야 전화 한 통을 나눌 그 짧은 시간에 케일리에게 큰 일이 일어날 리도 없었다. 더 정확히는, 그 짧은 시간을 가지고 케일리를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리가 없다는 의미기는 했지만.

그는 보통 인간들의 평균보다 훨씬 우수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껏해야 패션 디자이너와 모델, 그리고 배가 부를 대로 부른 돈 많은 돼지들이 모인 파티장에서 그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으려면 순혈에, 왕족이기까지 한 우수한 라이칸 아킨시나가 정체가 밝혀지는 걸 무시한 채 진심으로 달려드는 정도는 되어야 했다.

아킨시나가 몇 년이나 공들여 만든 위장신분을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날려버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을 테니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케일리를 향한 ‘걱정’은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았다.

- 표적은?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데이브가 물었다. 어이가 없어 잠깐 휴대전화를 귀에서 뗀 에드워드가 곧장 대답했다.

“혼자야. 게다가 그놈도 귀먹기 싫으면 파티장 통화 소리까지 다 엿듣고 있지는 않을 텐데 왜 귀찮게 오라 가라야. 특별히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재밌는 일도 없는데 자신을 불러낸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인간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청력으로 감각을 조절하고 있던 에드워드는, 데이브가 있는 휴대전화 너머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단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귀에조차 아무런 소리가 잡히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그건 좀 이상했다.

통신상태에 따라 섞이는 통화 노이즈와 데이브의 목소리만이 휴대전화 너머로 전달되었다. 세상에 소음이 없는 장소는 없다. 에드워드가 거기에 대해 질문하려던 순간, 데이브가 선수를 쳤다.

- 재밌는 일……이라고 하면 좀 자신이 없어지기는 하네. 그래도 아예 재미가 없는 이야기는 아닐걸.

“그래서, 용건은?”

- 리퍼를 찾았어.

보물찾기에 성공한 어린애처럼 데이브의 목소리는 흥분에 젖어 있었다. 에드워드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소식에 심드렁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툭 내뱉을 뿐이었다.

“뭐야, 결국 다른 놈이 범인이었나? 시간낭비만 했군.”

아킨시나는 줄곧 자신의 감시하에 있었으니 그는 혐의를 벗은 게 된다. 리퍼였으면 좀 더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를 괴롭힐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케일리가 아킨시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니 그 점은 좋았다. 라이칸을 보고 좋은 라이칸 같다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면서 놈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해로운 짐승 새끼인지를 강의해야 하는 수고도 덜었고.

- 아니야. 오히려 그쪽에서 아킨시나를 감시해준 덕분에 일이 편해졌다고. 시간낭비는커녕 오히려 너희가 그를 잡고 있어준 덕분에 시간을 벌어줬어. 뭐, 엄밀히 말하자면 잡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가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게 만든 건 사실이니까.

아킨시나는 범인이 아닌데, 아킨시나를 감시한 게 리퍼의 검거에 도움이 됐다는 말은 인과관계가 묘했다. 에드워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어째서지? 놈은 리퍼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 아닌가?” 하고 물음을 던지자 데이브의 흥분했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 우리는 리퍼를 찾았다고 했지, 잡았다고는 안 했어.

아무래도 놈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능한 모양이다.

“리퍼의 정체는 밝혀냈지만 잡지는 못하셨다?”

- 맞아.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라고. 우리도 잡기 싫어서 안 잡은 건 아니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뿐이지.

“입이 뚫렸다고 아무렇게나 지껄여도 되는 거라면, 나도 다음번에 입을 두어 개 더 뚫어볼까 하는데 괜찮은 시술업자가 있으면 소개시켜주겠나?”

뉴욕의 관리국 필드 책임자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수많은 입만 산 정치가를 상대해온 데이브조차도 에드워드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는 무어라 되돌릴 말이 없었다. 지금껏 그가 상대한 자들은 최소한 그들의 발언에 따른 실리를 따졌고, 서로의 입장을 고려했다.

정치판에는 영원한 적이 없다. 어제의 숙적도 오늘의 아군이 될 수 있다는 건 비단 정치가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는 대체로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에드워드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가 실리를 따졌더라면 순혈 뱀파이어씩이나 되는 자가 이민국에서 필드요원으로 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그는 뭐가 됐든 하고 싶은 말을 원 없이 지껄이겠지. 데이브에게 있어서는 별로 즐거운 결론이 아니었다.

-B 지구의 순혈 뱀파이어에 대한 차출요청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확실히 유리 아킨시나쯤 되는 로열 블러드 라이칸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원이 필요했지만, 그게 꼭 뱀파이어였어야 하냐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데이브 자신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의 라이칸이라면 초능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었다. 이민국에서 그를 감시했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 정치적으로 묶이면 힘없이 날아갈 가능성이 있었지만, 어쨌든 능력으로만 따지면 이번 감시역에 에드워드를 대신할 재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리퍼 사건은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용의선상에 오른 것이 아킨시나뿐이니 유럽 이민국의 공조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게 에드워드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지만, 그가 선택된 명백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순혈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 외에도 연구팀의 열렬한 지지와 더불어 몇몇 요정의 뱀파이어 반대를 외치는 피켓 시위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데이브는 일에 사적인 호기심을 끌고 와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판 지금의 상황을 아주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궁금해했던 순혈 뱀파이어가 입을 열 때마다 듣는 이의 신경줄로 줄넘기를 하는 비틀린 성격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만약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호기심을 뒤로한 채 좀 더 신중하게 고려했을 텐데. 아마도.

- ……순혈 뱀파이어라고 다 너 같은 건 아닐 거야, 그렇지?

그는 이번 사건에 꽤 공을 들이고 있었고, 그런 만큼 에드워드의 지적이 따가웠다. 한숨 섞인 데이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전화에 대고, 에드워드는 그의 지대한 착각에 확인사살을 하듯 나이프를 꽂았다.

“안타깝게도, 놈들과 비교하면 나는 인류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뱀파이어지.”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옥스퍼드 사전의 다정과 친절 항목이 개정된 게 틀림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비교적 익숙해진 에드워드의 비아냥거림을 배경음악 삼아 데이브는 자신이 그에게 전화를 건 처음 용건을 떠올렸다. 말장난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체에서 반경 15센티미터의 공기막을 만들어 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채 지저분한 하수도 구멍에 몸을 딱 붙인 데이브가 휴대전화를 고쳐 쥐었다. 메시지를 보낸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전화가 빠르고 편했다.

데이브는 자신이 발견한 장면에 대해 에드워드에게 몇 가지 질문할 것이 있었고, 가능하면 바로 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어쨌든 변명이 아니라, 정말로 잡지 않은 이유가 있기는 해. 지금 리퍼가 내장을 적출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구경하는 중이거든.

D.C. 출신인 데이브는 뉴욕의 지하수로 안에 이렇게 멀끔한 수술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첫째로 그에게는 하수도를 산책하는 취미가 없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이미 폐쇄된 구역의 숨겨진 비밀 문만이 사람이 드나들 만한 유일한 출입구인 탓이다.

아마도 위생적으로 내장을 적출하기 위해 최소한의 기구를 구비한 내부에서는 벌써 세 번째 예비 시체가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다.

약인지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내장을 모조리 빼앗긴 인간은 즉사하지 않았다. 막 뱃속에 남은 마지막 신장 하나까지 적출당한 남자를 쓰레기 치우듯 수술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뜨린 건 유리 아킨시나의 매니저인 그레고리 이바노프였다.

쿵,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먼저 떨어진 여자 위를 덮친 남자가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레고리는 철창을 열어 몽롱하게 취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다음 인간을 잡아 수술대에 올린 참이었다.

잠시간 말이 없던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취미 한번 고약하군.”

데이브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이종이 관련된 범죄뿐만 아니라, 관리국에 들어오기 전 수사기관에서 일할 때 목격했던 웬만한 강력범죄보다도 질이 나쁜 끔찍한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공을 들여 빼낸 장기를 어디에 쓸 건지도 의문이었는데, 블랙마켓에 팔아넘겨 돈을 버는 게 목적이거나 장기가 손상된 가엾은 인류를 위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 과찬을.

어딘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데이브에게 에드워드가 물었다.

“손가락을 빨면서 구경만 하는 이유는?”

손가락을 빨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부분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막 개복을 시작한 그레고리의 네 번째 수술을 지켜보며 인상을 찌푸린 데이브가 말을 계속했다.

- 잡으려고 하면 못 잡을 것 같지는 않지만 당장 그러기는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먼저 제일 중요한 건데, 내가 구경하고 있는 리퍼는 ‘리퍼들’ 중에 하나일 뿐, 리퍼 그 자체는 아니니까 잡아봤자 장기실종사건을 해결하지는 못할 거라는 거지.

리퍼가 복수. 그건 새로운 정보였다. 리퍼를 찾아냈지만, 리퍼를 잡지 않는 이유가 리퍼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라. 만약 그게 무능함을 감추기 위한 데이브의 변명이라면, 자신으로서는 미처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창의적이라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아니면, 변명이 아니라 진짜로 리퍼가 하나가 아닌 것이겠지.

그 경우 일이 좀 더 성가셔졌다. 범인이 이종이고, 리퍼가 단수가 아닌 복수라면 누군가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말이 되니 사건의 본질이 완전히 뒤집혔다.

“리퍼가 하나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확신해?”

파리를 쫓듯 성가신 기색이 여실히 드러나는 에드워드의 물음에 데이브가 대답했다.

- 마법사를 쫓다가, 그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모아둔 트럭을 발견했어. 마법을 걸어둔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핫도그 트럭으로 보였지만 내 팀의 우수한 요원인 클라라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바로 정체를 눈치챘지. 그건 새로운 거야. 캐트시 납치가 멈춘 이후로 거의 움직임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타깃도 바뀌었지. 캐트시가 아니라, 인간으로.

“그리고?”

- 어쨌든, 트럭이 위장이라는 걸 눈치채고 팀을 소집해서 뒤를 따랐어.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핫도그 재료 창고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고, 납치한 인간을 옮기는 걸 따라갔더니 지하로 이어지는 길이 있더라고. 본거지가 틀림없는데, 그걸 놓칠 수는 없잖아?

“따라갔더니 리퍼가 한 더즌쯤 대기하고 있기라도 했나 보지?”

- 더즌까지는 아니고. 지하수로를 따라서 납치한 사람들을 어디로 옮기는지 따라갔는데, 갈림길이 나왔어. 핫도그 재료가 두 갈래로 갈라지니 우리도 선택을 해야 했지. 전력 분배상 내가 혼자 빠지는 게 효율적이라 오른쪽, 나머지 부하들은 왼쪽으로.

“그것 참 고결한 희생정신이로군.”

- 과찬이라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오른쪽에서 리퍼와 그들이 장기적출을 하는 수술실을 발견했어. 사실 이게 중요한 부분인데, 리퍼의 정체는 유리 아킨시나의 매니저인 그레고리 이바노프와 그의 스타일리스트인 리사 페티소프였어. 이게 내가 너희 팀에 긴급 메시지를 보낸 이유 중 하나야.

유리 아킨시나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라……. 그게 우연의 일치이기는 어려울 테다. 그리고 데이브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통화를 파티장 밖에서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 그들은 등록된 이종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다고. 아무리 관리국 직원이라도 인간으로 꾸미고 있는 이종이 뭔지 알아내는 건 어려워.

그건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정체를 꿰뚫을 수 있는 건 같은 순혈 뱀파이어뿐이다. 아마 다른 종족들도 사정은 비슷할 터. 동족을 알아보는 것 외에 이종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본인의 입으로 듣거나, 아니면 죽여서 부검을 해 신체적 특징으로 유추하는 것 정도일까.

“리퍼가 복수라는 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는 뜻은 아니겠지?”

잠자코 데이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드워드가 처음의 화제를 되돌렸다. 데이브의 이야기에서는 아직 다른 리퍼가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구경하고 있는 리퍼와 다른 리퍼를 언급했고, 지금 구경하는 리퍼는 둘이 한 팀이라고 하니 다른 리퍼가 존재해야 아귀가 들어맞았다. 크게 빗나가지 않은 에드워드의 예상에 데이브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 맞아. 리퍼를 발견하고 부하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답을 받았어. ‘여기에도 리퍼가 있다’. 이걸로 우리가 쫓던 두 개의 사건이, 공식적으로 하나였다는 게 밝혀졌지 뭐야.

데이브가 발견한 리퍼인 유리 아킨시나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데이브의 부하가 발견한 또 다른 리퍼. 그들이 쫓아간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집단.

게다가 집단은 이종보다는 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러다니는 자갈돌보다는 희귀한 인간 마법사를 일회용 폰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상부에 있는 것도 인간이라고 예상하기보다는, 이종이 연루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오랜 러시아 생활을 관두고 인간 세계에 나온 유리 아킨시나의 행보와도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확실히, 평생을 그 외모로 살았을 라이칸이 뜬금없이 패션계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보다는 훨씬 들어맞는 설명이기도 했다.

음모론자들이 침을 흘리며 달려들 만한 이야기인 동시에, 리퍼의 체포로 끝나리라 예상했던 뉴욕 출장일정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짜증스러운 전개였다.

- 아, 지금 그레고리가 네 번째 심장을 꺼내고 있어. 이걸로 평생 볼 스너프는 다 본 것 같아.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집으로 달려가서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숨 섞인 데이브의 투덜거림에 힐끔 파티장 쪽을 쳐다본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렇게 장기를 끌어 모아서 뭘 하려는 거래? 장기 엑스포? 인체의 신비?”

- 네 입에서 나오니까 진짜 그럴까 봐 무섭다 야……. 어디에 쓸 건지는 아직 모르지. 일단 오늘 끝까지 미행해보고 그래도 밝혀내지 못한다면 다시 시도할 생각이야. 그들이 뉴욕에 머무는 기간은 기껏해야 나흘이니, 그사이 분명 움직임이 있을 테니까.

유리 아킨시나가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케일리를 내버려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해둔 주제에 먼저 자리를 뜬 것도 그랬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전화 한 통이라도 옆구리에 달고 나오는 건데. 기껏해야 전화 한 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벌써 십 분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파티장에는 백 명이 넘는 참석객이 있었고, 그 안에서 아킨시나가 직접 달려들어 케일리의 내장을 쏙 빼 가지야 않겠지만 역시 찝찝한 건 사실이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리퍼 보스가 있는 파티장에 파트너를 두고 와서, 내 걸 챙기러 돌아가고 싶은데 말이야.”

몇 번인가 파티장 쪽을 쳐다보며 쯧, 혀를 찬 에드워드가 결국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자신이 들어야 할 정보는 여기까지일 테다. 베타 님은 현재 리퍼를 쫓고 있는 도중이었고 더 알아낸 게 있었더라면 저 수다스러운 입이 벌써 토해냈겠지.

전화를 끊고 파티장으로 돌아가려는 에드워드를 데이브가 붙잡았다.

- 잠깐만, 가는 건 좋은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사실 이걸 물어보려고 통화하고 싶다고 한 거기도 하고.

“뭔데? 빨리 끝내.”

- 지난 일주일간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뭔가 눈치챈 게 있으면 가르쳐줘. 그레고리와 리사가 라이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러시안 라이칸은 전부 등록된 라이칸이고, 그들은 명단에 없으니까. 그 둘이 뭔지, 아킨시나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지,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어.

지난 일주일간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알게 된 것이라고는 유리 아킨시나가 아직 덜 자란 라이칸인 동시에 인간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별로 성숙한 인격은 아니라는 점 정도였다.

아직 케일리에게 페로몬을 흘린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유혹을 위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케일리가 마음에 들어 유혹하려 한 것이라면 아킨시나는 좀 더 구애다운 행동을 했을 텐데, 쫓아다니는 내도록 단순하기 짝이 없는 적의만을 드러냈다. 그게 연기라고 한다면 정말로 뛰어난 연기자겠지만, 안타깝게도 아킨시나가 연기를 하는 냄새는 없었다.

그가 주장했던 대로 촬영장에서는 촬영을 했던 것뿐일 가능성이 높은 데다, 페로몬은 글쎄…… 그게 뭔지도 모르고 질질 흘리고 다닐 만큼 멍청하다고밖에는 떠오르는 가설이 없었다.

한창 외과수술을 진행 중이시라는 아킨시나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더욱 묘했다. 라이칸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는데, 그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지금껏 만나왔던 이종은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를 넘을 만큼 다양했지만 그 안에서 겹치는 특징이 하나도 없었다.

매니저의 경우 언제나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별달리 의심할 점은 아니다. 유리 아킨시나의 괴물 같은 일정을 따라다니다 보면 평범한 인간의 체력으로는 피곤한 게 정상이다. 그가 리퍼라면 평범한 인간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스타일리스트도 마찬가지다. 에드워드는 그녀가 말을 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소심한 표정에 작은 체구로 아킨시나와 매니저 사이에 끼여서 낑낑대는 정도가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있는 스타일리스트의 인상이었다.

가끔 그녀의 주위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진짜 냄새인지 그녀가 품고 있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조금 헷갈렸다.

별달리 들려줄 말이 없었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들고 파티장 쪽으로 걷기 시작한 에드워드가 데이브에게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확인되지 않은 이종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 순혈 뱀파이어라도?

“그런 맥락이라면, 그들이 나와 같은 순혈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겠군.”

건너편에서 데이브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저도 의사놀이를 하는 아킨시나의 부하라는 것밖에 모르는 주제에 뻔뻔하기가 짝이 없는 인간이다.

뒷문에서 파티장까지 이어지는 복도를 단번에 가로지른 에드워드가 출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티장 한켠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실력이 괜찮은 현악단이 바흐를 연주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장식 시계를 확인하니, 자리를 비운 지 막 이십 분이 지난 참이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그를 남겨뒀을 때, 케일리는 테라스에 있었다. 물잔을 들고 있었으니 술도 마시지 않았을 테고 이대로 회수해 일단 숙소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 끊기지 않은 휴대전화에 대고 “더 할 말 없으면 끊…….”라고 말하던 에드워드가 고개를 들었고, 이변을 눈치챘다.

아킨시나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의 스케줄은 이 파티가 마지막이었고, 아직 파티는 네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을 헤치고 에드워드는 곧장 테라스에 달려갔다.

케일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차단했던 감각을 완전히 개방하고,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고, 기척을 헤집었지만 적어도 이 파티장 안에서 케일리와 아킨시나 어느 쪽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아킨시나가 혼자서 사라졌다면, 그가 모종의 의식에 써먹을 싱싱한 장기를 모아 온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나섰다고 추리했을 테다.

케일리가 혼자서 사라졌다면, 그 멍청이가 또 자신의 당부를 어기고 자리를 이탈한 이유가 뭔지 궁금해하는 동시에 그를 찾아 나섰을 테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무엇보다 유리 아킨시나의 부하 둘이 리퍼라는 게 밝혀진 이 시점에서는, 안 좋은 방향으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무슨 일 있어?

아직 전화를 끊지 않았는지 데이브가 물었다. 감각을 완전히 개방한 덕분에 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휴대전화 너머의 목소리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든 에드워드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케일리가 사라졌어. 아킨시나도 같이.”

- 너희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네놈이 혼자 받으라고 했잖아!”

- 그건 목표물이 없는 데서 받으라는 뜻이었다고! 걔가 우리 생각보다 귀가 좋아서 엿들으면 큰일이니까!

“하, 어떤 멍청이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귀를 열어두고 다닐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 그거야 모르지! 난 평범한 인간이니까!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책임한 데이브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빠득, 이를 갈았다. 자신의 추궁이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데이브가 케일리를 두고 혼자서 받으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근 일주일간 아킨시나를 쫓으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방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자리를 비운 그 짧은 사이 일이 틀어졌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방금 유리 아킨시나의 부하들이 리퍼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용주인 아킨시나와, 케일리가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지나치게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촬영장에서 벌어진 일 이후로, 에드워드는 단 한 번도 케일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쫓고 있는 대상의 위험성을 고려한 탓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시야에 넣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킨시나는 지금껏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나기만을 노렸던 걸까? 하지만 어째서? 케일리의 장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뭐가 그렇게 특별하기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에는 그럴싸한 대답이 없었다.

케일리가 자신에게 있어서 특별한 이유는 그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그건 육체적인 부분보다는 성격이나, 정신, 본질적인 성질에 기인하고 있었다.

아킨시나에게는 그 차이를 구분해낼 방법이 없었고 그러니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케일리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저 자신의 모욕에 화가 나서 복수를 하기 위해 일을 꾸민 걸까. 그건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에드워드는 스토킹을 의심하는 아킨시나를 대판 모욕했다. 자존심 강한 라이칸 왕자가 그 일에 악의를 품은 것이라면, 자신은 당장 케일리를 찾아내야 했다. 적어도 그가 장기를 죄다 빼앗겨 어이없이 목숨을 잃기 전에, 찾아야만 했다.

“끊어. 난 그를 찾으러 가야겠어.”

- 잠깐만, 에드워드! 아킨시나를 쫓아가겠다는 말이야? 그건 너무 위험……!

“누가, 누구에게 위험하다는 소리지? 네 작전을 망치려는 작정이냐고 묻는 거라면, 그딴 거 알 게 뭐야. 귀찮게 굴지 말고 끊……, 아니, 데이브. 너희가 케일리에게 지급한 휴대전화의 위치를 추적해. 어딨는지 알아내면, 바로 내 휴대전화에 연결시켜.”

- 알았어, 알았다고! 다 좋으니까 지금까지 공들인 우리 수사를 물거품으로 만들지만 말아줘. 치정싸움이든 뭐든,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둘러대서 네 파트너를 구해서 무사히 돌아오라고! 아직 정체를 들킨 건 아니잖아?

이 와중에도 작전을 망치지 말라고 매달리는 데이브의 말에 에드워드의 손에 쥐여 있던 휴대전화가 꽈득, 이상한 소리를 냈다. 케일리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을 망가뜨릴 수는 없어 곧장 힘을 뺀 에드워드가 휴대전화 반대편을 향해 씹어 뱉었다.

“시끄러워, 같은 편인 척하지 마.”

전화를 끊자마자 케일리의 번호에 통화를 시도하며 에드워드는 곧장 파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차장에 대놓은 차에 키를 꽂았지만, 목적지가 없다. 운전대를 잡은 채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통화 마크를 누르고, 또 누르던 에드워드가 쾅, 클랙슨을 내리쳤다.

빠앙!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케일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을 울리다 사서함으로 넘어가는 기계음이 에드워드의 인내심을 망쳐놓았다. 아니, 사실 그에게는 망쳐놓을 만큼 인내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케일리 그 멍청이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다섯 살배기도 아닌데 아킨시나가 대체 어떻게 꼬드겼기에 쫄래쫄래 그를 쫓아간 걸까.

에드워드의 머릿속에는 데이브가 묘사한 ‘눈을 똑바로 뜨고 배가 갈리는데도 반항 한번 못하는’ 케일리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를 섬뜩하게 만드는 건 그 상상 자체보다도, 상상이 가지는 현실성에 있었다.

케일리 그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마법에 걸리지 않고, 약에 취하지 않아도 반항 한번 하지 않고 내장을 꺼내줄 멍청이가 있다면 전 인류를 뒤져도 케일리만큼 그럴 만한 녀석이 없을 거다.

게다가 케일리는 전적도 있었다.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자신의 섭식장애 이야기를 듣자마자 피를 주겠다고 나서지를 않나, 등 좀 떠밀렸다고 곧장 유리 아킨시나의 상대역이 되지를 않나. 조금만 한눈을 팔면 금세 이상한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날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받지 않는 전화는 포기하고, 텍스트 메시지를 눌렀다. 꾹꾹, 액정이 부서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힘을 준 손가락 끄트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그것을 알면서도 힘을 뺄 수 없었다.

[너 지금 어디야?!]

메시지를 보낸 지 일 분이 채 되지 않아 두 번째, 세 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 받아!]

[케일리, 전화.]

다시 일 분이 지났고 네 번째 메시지, 그리고 다섯, 여섯, 일곱 번째 메시지를 보낼 때까지도 에드워드의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런던도 아니고, 지원을 요청할 본부도 없는 뉴욕 한복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 하하……. 미치겠군.”

지나치게 힘을 줘 질린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이가 없고 말도 나오지 않았는데, 자신의 몸은 착실하게 케일리의 실종에 반응하고 있었다. 초조했다.

아, 그래. 이걸 초조함이라고 하는 것 같군.

머릿속 한켠이 냉정하게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했다. 깊은 생각 없이 아킨시나를 따라나섰을 케일리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자신의 것에 두 번이나 손을 댄 아킨시나는 눈앞에 나타난다면 찢어 죽여도 시원찮았다.

하지만 그 격렬한 분노의 이면에서 에드워드는 자신이 생존 본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위험천만한 인간 남자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해야 인간 하나였다.

고작해야…… 조금 맛이 있을 뿐인 음식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나, 혹은 뱀파이어는 식사가 망가지면 다시 차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웃기지도 않은 섭식장애를 가진 에드워드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껏 없이도 잘 살아왔던 식생활을 개선해준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감정을 지배당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하지만 케일리가 인간이고, 그는 아주 쉽게 죽는 데다, 아마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 같은 건 대번에 잊어버리고 저세상 여행을 떠날 위인이라는 걸 하나씩 되새길 때마다 말도 못할 불쾌감이 머릿속에 불을 질렀다.

그를 굳이 권속으로 만들지 않아도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케일리는 자신이 만들어준 상황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순식간에 불살라졌다.

착각, 착각, 착각. 온통 멍청한 오산뿐이었다.

케일리는 자신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가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상대라면 누구든 받아들일 테다. 그게 우연히 자신이었던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이제 와서 깨달았다는 게 어이가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케일리가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러니 이건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자신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케일리 로체스터가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인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좋아, 인정했어. 난 그 녀석이 없어지는 게 싫어. 끔찍하게 싫다고.”

하지만 새삼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쓴 여덟 번째 메시지는 조금 더 솔직했다.

[케일리]

[살아 있지?]

[전화 좀 받아.]

[부탁이야.]

거기까지 짧게 끊어 쓴 메시지를 모조리 보낸 뒤, 에드워드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생각해.

방법을 찾아, 에드워드 애쉬포드.

머리를 감싸고 어째서 더 빨리 그를 권속으로 만들지 않았는지 후회하던 에드워드의 귓가에 휴대전화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케일리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데이브의 메시지였다.

◇ ◆ ◇

- 지도 모양 앱에서 리스트 아이콘을…… 카페테리아 메뉴같이 생긴 그림을 만지면 숨어 있던 버튼이 나오고요. 거기 있는 사람 얼굴을 누르면 케일리 이름이 달린 사람 모양이 추가되어 있을 거예요. 그걸 터치하면 옵션이 뜨니까 ‘지도에 표시’, ‘실시간 추적’ 항목에 체크한 다음 적용을 누르세요. 그리고 원래 화면으로 돌아가면 그의 현재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차 키를 돌리고 시동을 건 에드워드는 스피커폰 너머의 지시에 따라 휴대전화를 조작했다.

데이브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걸려온 전화에는 자신이 등록한 기억이 없는 발신자명이 떠 있었다. 뉴욕 본부.

전화를 받으니 상대는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래도 좋은 인간이었다. 연구원이니 뭐니 하얀 가운을 입고 있던 마이크……, 마이클……, 뭐 그런 종류의 너드.

어찌됐건 전화를 하는 동시에 화면을 만지는 게 가능하다니, 아무래도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자신뿐인 것 같았다. 마이크는 벌써 두 번째로 같은 설명을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집 모양이 그려져 있지 않은 원형의 ‘홈 버튼’과 두 번째 페이지로 플립하지 않으면 등장하지 않는 ‘지도 모양 앱’을 찾는 데 약 오 분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도 ‘앱’이 화면에 떠 있는 동그란 그림을 말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먼저 화면을 터치한다는 것 자체가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별로 익숙한 감각이 아니었다. 새삼, 시대는 스마트니 뭐니 떠들어대던 페어리에게 닥치고 버튼이 달린 휴대전화를 지급하라고 협박했던 비교적 최근의 기억이 떠올랐다.

현재 에드워드의 뒷주머니에 고이 모셔져 있는 -B 지구 지급 휴대전화에는 여전히 버튼이 달려 있었다. 너 하나 때문에 지급품에 개조 피처폰을 추가해야 하냐는 페어리의 울분 섞인 외침에서 ‘피처’가 뜻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지금만 해도, 대체 뭐로 홈 버튼이라는 걸 구분해야 할지 이해할 수 없는 동그라미 하나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던가.

40년 전까지만 해도 휴대전화라고 하면 워키토키 같은 걸 떠올렸다. 대체로 머리통만 한 크기를 자랑했으며 효율도 나빴다. 하지만 당시의 휴대전화에는 공간이 넘쳐났기 때문에 개조해 피스톨을 숨길 수도 있는 쿨한 장치였다. 트리거가 되는 번호만 알고 있으면 전화기라고 방심한 상대에게 총알을 먹여줄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되기도…….

- 저, 천천히 하셔도 괜찮거든요. 잘 모르겠으면 어디까지 했는지 말해주시면 거기서부터 다시 설명할게요.

마이크의 설명을 따라 지도앱에서 막 케일리를 찾은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시끄러워, 집중력 흩어지잖아.”

- 미안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조용히 해볼게요. 아, 그리고 정 힘들면 이쪽 스크린에 그의 위치를 띄워두고 스피커폰을 켜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그의 현재 위치는 웨스트 할렘의…….

“나왔어. 지금 그 녀석이 이 지도랑 같은 장소에 있다는 뜻인가?”

- 네, 그리고 에드워드 씨의 현재 위치를 비교해서 거기까지 가는 루트와 시간도 자동으로 계산해줄 겁니다. 차의 내비게이션과도 연동되어 있으니 팝업이…… 내비게이션에 루트를 띄우겠냐고 물어보는 네모난 박스가 뜨면 OK를 누르세요.

마이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스가 생겼다. OK를 누르니 케일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는 가장 빠른 루트가 내비게이션에 표시되었다.

시간만 따지면 꽤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뉴욕, 그것도 맨해튼의 지리가 생소한 에드워드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지난 일주일동안 운전은 직접 했지만 길을 찾는 건 거의 케일리였다.

그는 벌써 뉴욕의 지도를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처럼 자신을 안내했고 에드워드는 전적으로 그에게 안내를 맡겼다. 조수석에서 다음 블록에서 우회전, 신호에 걸리고, 학교가 있으니 감속하고 뭐 그런 시답잖은 말을 새끼 새마냥 조잘조잘 바지런히 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임이 없는 건 거기 멈춰 있다는 뜻인가?”

-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추적마법과는 달리, GPS의 오차율은 제로에 가까워요. 그리고 지금은 휴대전화를 추적하고 있지만 일정 시간 이상 움직임이 사라지면 바로 추적대상을 바꾸니까 타깃을 놓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타깃이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케일리가 멈춰 있다는 사실을 제 휴대기기로도 확인한 마이크, 아니, 마크가 가장 중요한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쓸데없이 그런 말을 덧붙였다가는, 안 그래도 불편한 순혈 뱀파이어의 심기에 석유를 들이붓는 것뿐만 아니라 활활 잘 타오르라고 북을 치고 하와이안 댄스를 추는 꼴이다.

캔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판기가 있는 메인 오퍼레이션 룸까지 나오기를 잘했다. 그는 최근 연구 중인 캐트시 연구에 진척이 더뎌 벌써 며칠간 본부에 처박혀 퇴근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 두세 시간 선잠을 자면 괜찮은 날이었고 그마저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끝날 때가 많았다. 상부에서 떨어진 긴급안건만 아니었더라면 오늘은 19세기 스팀 펑크 문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테마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정말이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직장이었다.

마크가 현재 매달리고 있는 연구는 데이브가 투입된 작전에서 하필이면 ‘캐트시의 내장’이 밝혀지지 않은 비밀조직의 타깃이 된 이유였다. 아직 그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내장이라고 하니 마크의 머릿속에 그리 유쾌하지 않은 몇몇 연관 지식이 떠오르기는 했다.

주로 반종교적이고 현실성 없는 도시전설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온갖 정신병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돌아다녔고 그중에는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산양의 피를 바치는 또라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캐트시의 내장에 얽힌 도시전설은 들어본 역사가 없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벌써 한두 개쯤 만들어져도 이상할 건 없었다.

“추적대상을 바꾼다는 건?”

-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휴대전화의 위치를 추적하는 게 아니라, 안면인식 알고리즘을 이용한 검색 프로그램에 케일리의 얼굴을 입력하고 인터넷에 연결된 모든 카메라로 그를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B 지구에서는 필드요원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종 요원의 수가 적은 편이기 때문에 안전장치가 필요하거든요.

역시나 두 번째 추적방법 또한, 타깃이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방편이었다. 에드워드와는 달리 평범한 인간인 케일리가 내장 도둑질을 지휘한 걸로 보이는 라이칸에게 잡혀가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수학에 강한 마크가 대단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드리는데, 지도 위에서 에드워드의 위치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접 속도계를 본 것은 아니지만, 삼십 초간의 이동 거리로 간단히 계산해보아도 두말없이 규정속도 위반이었다.

“그거 일종의 불법정보수집 아닌가?”

스피커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마크는 그게 그의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방증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데이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당직자가 죽을상을 한 채 자신은 화가 난 뱀파이어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 않다고 울먹거리기에 이때다 싶어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자신이 대신 해주겠다며 나선 마크였다. 그는 이종 연구학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구자였고 아직 표본을 얻은 적이 없음에도 뱀파이어가 얼마나 상대하기 귀찮은 종족인지는 익히 들어왔다.

특히나 그들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은 비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성가시기까지 했는데, 자아를 가진 모든 대상을 정신적인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 즉 권속으로 만드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면 숙주 뱀파이어에게 버림받지 않는 한 그와 같은 수명을 누릴 수 있는 데다, 병에 걸리지 않고 웬만해서는 고장나지도 않는 육체를 손에 넣게 된다. 그 탓에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마크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 또한 인간이다 보니 가능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전제하의 바람이었다. 이종을 대하다 보면 잘못된 길로 빠지는 자들이 언제나 생겨났다. 손만 뻗으면 환상 속에나 존재하던 것들이 잡히니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심정을 이해하는 것과 룰 위반을 용납하는 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벌써 한 세기가 넘게 필드요원으로 일했다는 순혈 뱀파이어는 평판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게 쉽게 흘러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크도 에드워드에 대한 몇 가지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탐욕적이고 오만한 순혈 뱀파이어치고는 의외로 상부의 명령에도 잘 따르고, 필드 임무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성공률을 자랑하는 우수한 요원이라고.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매료된 마크의 귀에도, 케일리의 존재는 생소했다. 마크가 알기로 영국 이민국의 순혈 뱀파이어는 오만한 성정보다는 좀 더 쪼잔하고 까다로운 데다 사소한 결점도 용납하지 못하는 특이한 방향성에서 파트너십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목격한 파트너와의 관계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빠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빵, 빠앙! 끼이익!

- 저, 지금 엄청 위험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

“착각이야. 길이 막히기에 살짝 역주행을 한 것뿐이라고.”

- 그, 지금 지나가는 길이 중간에 나무 때문에 역주행 하기 쉬운 도로는 아니었을 텐데…….

“하려고만 하면 다 해.”

아무래도 전화기 너머의 뱀파이어가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아니, 뱀파이어의 제정신을 측정하는 기준 같은 게 없으니 저게 정상인 걸지도 몰랐다.

몇 년 전 연구 목적으로 반년을 함께 지냈던 나이 든 라이칸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순혈 뱀파이어 요원을 가진 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영국 이민국뿐이며, 그는 동족들 사이에서도 손쓸 도리가 없는 별종으로 유명하다는 내용이었다. 별종이 어떤 부분을 짚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뱀파이어 사이에서도 별종으로 불릴 정도라면 나사 한두 개쯤이 빠져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불법수집한 정보를 국외요원에게 제공하면 반역자 되고 뭐 그런 건 아니지?”

- 그럴 리가요. 이민국은 치외법권인 데다, 위치정보를 불법 수집한 게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왜, 너희도 아무도 안 읽는 약관 같은 걸 설치하고 동의 안 하면 다음으로 버튼이 안 나오게 수작을 부려놓기라도 했나 보지?”

- 이래 봬도 정부기관인데 그런 꼼수는 안 부리지만, 뭐 대충 비슷하긴 합니다. 어쨌든 이 시스템에 들어가는 예산도, 정보수집 내용도 전부 백악관의 승인을 얻은 프로젝트니, 맞아요, 우린 수집할 수 있어요!

Yes, We Scan!

희끗하게 머리가 새어버린 연임 대통령의 선거 캠프 구호를 외치는 마크의 목소리를 들으며 케일리에게 도착하기까지 남은 거리를 막 반으로 줄인 에드워드가 생각했다.

인종의 벽을 뛰어넘고 미합중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 남자가 지난 7년을 70년처럼 보낸 것처럼 늙어 보이는 건 그의 정부에 저런 정신 나간 놈들만 가득한 탓인 게 분명해. 그런 자리에 좋다고 덤벼드는 도널드 덕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놈은 없을 테고, 이 나라의 미래가 알 만하군.

그 교묘하게 바뀐 캠프 구호가 사실은 미합중국 정부가 주도해 전 세계 국민들의 개인통신을 감청하고 있었다는 프리즘 폭로 사건 이후 인터넷에서 한창 유행했던 밈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 레딧과 9GAG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에드워드뿐이다.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 에드워드 씨? 열심히 달리는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지금 케일리 씨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은데요.

웃음기 하나 없는 성마른 목소리와 농담을 주고받는 게 상상 이상으로 자신의 간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마크가 그렇게 말했다. 사실 케일리의 화제를 꺼내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눈에 보이는 걸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만약 에드워드가 인간이고, 뉴욕 이민국의 필드요원이었더라면 파트너가 라이칸과 함께 실종된 것에 대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아니었고 인간의 목숨 정도는 일회용 티슈마냥 코 한번 풀고 던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파트너십도 썩 잘 풀린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상기하면, 역시 저 남자에게 이번 파트너가 그저 필드 임무를 함께하기 위한 파트너뿐만은 아니라는 의미겠지.

“나도 눈 있어.”

잠시간 말이 없던 에드워드가 그렇게 대답했다. 텅 빈 커피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마크는 커다란 모니터에 뜬 뉴욕의 지도 안에서 케일리와 에드워드의 아이콘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 루트로 추측하건대, 파티장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의 파트너는 에드워드에게 있어서 ‘어떻게’ 특별한 걸까. 연구자의 호기심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관심으로 지도를 보고 있었다면 이미 눈치챘을 빤한 물음을 던지는 마크에게 날이 선 에드워드의 대답이 돌아왔다.

“눈 있다고.”

그걸로 끝이었다. 마크는 끊는다는 말 한마디 없이 멋대로 끝난 통화에 조금 당황했지만, 마치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듯 줄곧 억양 없이 이어지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쓸데없는 불똥을 맞지도 않았고, 그가 원하는 걸 충분히 제공해주었으니 한 번쯤 자신의 연구에 피실험자로 참여해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허황된 꿈을 꾸며 마크는 커다란 모니터에서 칠 분 후로 예정된 한 인간과 한 뱀파이어의 만남을 상상했다.

◇ ◆ ◇

케일리의 현재 위치까지 칠 분 거리. 좀 더 속도를 높이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겠지만, 이 이상 액셀을 밟았다가는 아마 케일리에게 도착하기보다 먼저 충돌사고에 휘말릴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액셀을 밟은 발끝에 힘을 실었다. 무심코 쳐다본 백미러에서 초조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난 자신의 얼굴이 보여 에드워드의 기분은 더 내려갈 구석도 없이 바닥을 쳤다.

그래도 케일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렴, 실종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내장을 빼내는 것도 어려웠을 테니 아직 살려두기는 했겠지.

그러면 녀석은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운전대를 잡은 에드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의 사고가 부정적이라는 생각은 별로 해본 일이 없었는데, 자꾸만 나쁜 가정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케일리의 마지막이 제멋대로 헤집고 들어오는 통에, 마이크인지 마크인지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놈을 상대로 시답잖은 농을 주고받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아니, 어찌됐건 케일리는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내장 한두 개가 사라져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보통 인간들은 죽겠지만 케일리라면 멍한 얼굴로 뱃속이 허전하다는 어이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사고회로가 조금 특이하고, 할 줄 아는 게 많아봤자 그의 육체는 연약한 인간의 것 그대로였다. 결국 그가 웬만해서는 죽지 않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조차도, 자신의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만약 인간이었더라면 벌써 위에 구멍이 숭숭 뚫려 거미집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남은 시간 삼 분.

저쪽에서도 차로 움직이고 있는지 가까워지는 속도가 빨랐다. 케일리의 얼굴이 자신의 것과 점점 거리를 좁혀가는 내비게이션 화면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달리는 차에서 사람을 구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이쪽은 한 명밖에 없으니 운전은 포기해야 했다.

에드워드는 달리는 차에서 옆 차로 옮겨 타는 방법을 열 가지 정도는 알았고, 따로 운전수가 없는 상황이니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 번뿐일 확률이 높았지만 자신은 원래 실패라는 말이 더 먼 종류의 삶을 살아왔다. 이번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는 없다.

달리는 차에 억지로 침입했다가는 잘못해서 타고 있던 케일리가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치는 정도라면 자신의 힘으로 고쳐줄 수 있다. 게다가 좁은 차 안에서 접전이 벌어지면 위험한 건 케일리뿐만이 아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쳐들어가서, 케일리를 데리고 나오면 그걸로 충분했다.

남은 시간 일 분.

세 블록을 더 가서 우회전하면 케일리가 탄 차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가 타고 있는 차의 뒤로 돌아간 다음, 속도를 맞춰 차를 붙이고 창문을 깨 침입하겠다는 단순 무식한 계획을 세우던 에드워드의 귓가에 지잉지잉, 진동음이 들렸다. 조수석에 던져놨던 휴대전화를 향해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자신에게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 이십오 초. 곧 케일리의 차가 지나간다. 전화를 받을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이 번호를 아는 건 뉴욕 이민국뿐이었으니 당장 받아야 할 만큼 중요한 용건은 없었다.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케일리보다 급하지는 않았다. 울리는 휴대전화를 무시한 채 정면을 향하던 에드워드의 시선이 문득 조수석으로 돌아갔다.

“……!”

액정에 떠 있는 발신자 명은 케일리였다.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댄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에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케일리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평온했다. 방금 전까지 그를 구하기 위해 할리우드 액션에 버금가는 무모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던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게 하, 헛숨을 내뱉었다.

“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에드워드가 바람난 애인을 잡는 의부증 환자의 단골 대사를 입에 올리는데, 좀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끊는 법이 없는 케일리가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대답했다.

- 말없이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에디가 보낸 메시지와, 데이브에게서 온 것도 전부 읽었어요. 지금은 아킨시나 씨의 매니저 분이 파티장까지 태워주겠다고 해서 돌아가는 중이에요. 금방 도착할 것 같은데 아직 거기 있죠?

평소와 다름없이 감정이 희미한 목소리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가 무사하다는 건 충분히 전달되었지만, 이상한 말이 섞여 있었다. 케일리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뿐만 아니라 데이브의 것을 언급했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나뉜다면, 케일리는 대체로 효율을 중시하는 타입이다. 묻지도 않은 데이브를 언급하는 동시에, 아킨시나의 매니저까지 들먹인다는 건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케일리를 태워주고 있다는 아킨시나의 매니저는, 분명 수십 분 전 뉴욕의 지하수로에서 의사놀이를 하고 있던 그놈과 동일 인물이었다. 어느 틈에 거기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타일리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아마 매니저만 따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데이브가 케일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냈을지는 예상이 갔다.

자신의 파트너는 언뜻 둔하고 무능해 보이기 쉽지만, 그 머릿속까지 백지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두뇌회전이 빨랐으며 한발 앞서서 생각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케일리는 지금 자신에게 ‘나는 리퍼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뉴욕 지리도 모르는 게 뭘 믿고 빨빨거리는 거야? 내가 네 보모도 아니고, 출장 다닐 때마다 이렇게 찾아 헤매고 다녀야 해? 그래서, 지금 어디까지 왔는데? 뻔뻔하게 날 얼마나 더 기다리게 만들 속셈이지?”

화가 난 것을 숨기지도 않은 채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케일리가 잠시간 침묵했다. 지도상으로는 막 케일리가 탄 차와 자신이 탄 차가 스쳐 지나간 순간이었다. 타이밍을 맞춰 유턴을 한 에드워드는 지도 위에서 자신과 케일리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11시가 조금 넘은 뉴욕의 도로에는 아직 제법 차가 있었다. 케일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어떤 차에 타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차에 타고 있는 건 케일리와 아킨시나, 그리고 그의 매니저일 테고 그 좁은 공간에서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놓칠 만한 놈은 없었다. 그러니 다짜고짜 무슨 차에 탔고 어디를 달리고 있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일련의 물음을 통해 자신이 뭘 알고 싶어 하는지 금세 알아챌 테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전화에서 조금 멀어진 케일리의 목소리가 “저,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말없이 파티장을 빠져나온 바람에 보스가 화가 난 것 같네요. 언제 도착하냐고 묻는데요.” 누군가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아킨시나든, 아킨시나의 매니저든 케일리가 자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타당했으니 그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 케일리는 어디까지나 영국에서 출장을 온 뉴욕이 초행인 비서를 연기하고 있었다. 뱀파이어와도, 라이칸과도, 그리고 이민국과도 연결시킬 수 없을 만큼 노련한 대처다.

- 지금 막 110번가의 캐시드럴 파크웨이를 지나가고 있어요. 센트럴 파크를 곧장 따라가면 십오 분 뒤에 파티장에 도착한다고 하네요.

케일리는 무사했다. 그리고 아킨시나와 그의 매니저 또한 케일리의 내장을 노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케일리를 끌고 갔던 아킨시나는 그를 무사히 돌려보내려 했고, 어느 틈엔가 아킨시나와 합류한 매니저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어떤 목적으로 케일리를 데리고 간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아킨시나의 매니저가 끼어든 이유도 짐작할 수 없었다.

케일리의 말대로 그가 파티장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십오 분 뒤에 만날 수 있겠지만, 에드워드는 일분일초도 더 그를 기다리며 애태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 십오 분이라……. 그 십오 분 동안 전화 끊지 말고 이야기 계속 해. 전화 한 통 하고 돌아오니까 사라진 멍청한 부하를 한 시간이 넘도록 찾아 헤맨 불쌍한 상관을 생각해서, 재밌는 걸로 부탁하지.”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그 목소리에 케일리는 다시 침묵했다. 에드워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그가 걱정되어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끊지 말라는 의도라기에는 좀 더 질척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케일리의 목소리를 듣는 게 지금의 에드워드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고, 그가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고르느라 머리가 터져라 고민해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 휴대전화를 통해 그의 무사를 확인한 순간부터, 에드워드는 지독한 안도감과 함께 뱃속을 엉망으로 헤집는 불쾌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목숨이 간당거릴 때는 살아만 있으라고 생각했지만, 살아 있는 데다 심지어 멀쩡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니 또 다른 마음이 들었다. 이 멍청한 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사자 주둥이에 대가리를 집어넣었나 싶었던 것이다.

좋은 라이칸이니, 나쁜 라이칸이니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일 때 놈들의 본성을 제대로 인식시켰어야 했다. 세상에 피식자에게 좋은 포식자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으며, 넌 이미 제일 떨궈내기 귀찮은 나와 얽혔으니 인생을 더 귀찮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놈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충고하리라 마음먹었다.

“말, 멈추지 마.”

서늘하게 흘러나간 목소리에 휴대전화 너머에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 케일리가 말했다.

- 그냥, 통화는 용건만 하는 버릇이 들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 있는 것들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이야기해.”

- 에디는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요? 나 별로 재밌는 이야기 없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놔두고 다른 놈을 따라갔는지 이유부터 듣고 싶은데……. 아니, 그건 전화로 들으면 더 화가 날 것 같으니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가 앞서 달리던 빨간 페라리와 나란히 섰다. 비슷한 속도로 아슬아슬한 거리를 둔 채 타이밍을 가늠했다. 당분간 센트럴 파크와 웨스트 이스트사이드를 따라가는 직선 도로가 이어졌다.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차를 뛰어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생각이 났다.

“안전벨트는 맸고?”

문득 떠올랐다는 것처럼 에드워드가 물었다.

- 네. 일단은?

“좋아, 그 매니저라는 놈의 운전실력을 믿을 수 없으니까 문손잡이를 꼭 붙잡고 있도록 해. 그 멍청한 놈들이 잘못해서 충돌사고라도 내면 제일 위험한 건 뒷좌석에 탄 사람이니까.”

- 그럴게요. 어……, 그런데 제가 뒷좌석에 탔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의외의 부분에서 의표를 찔러든 케일리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조금 웃었다. 그가 안전벨트를 매고 손잡이를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에드워드는 대답을 돌리는 것보다도 먼저, 액셀을 밟아 페라리의 앞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어 잡고 있던 운전대를 있는 힘껏 꺾었다.

끼이익…… 쾅!

화려하게 충돌한 페라리와 마세라티에서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충돌현장 안에서 제일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당연하게도,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인 에드워드였다.

◇ ◆ ◇

도로 사정이 어떻든 거리낌 없이 역주행을 감행했던 에드워드가 이제 와서 교통법을 준수할 리는 없었다. 운전대를 꽉 붙잡고 충격에 대비한 덕분에 에어백을 물리친 후 빠르게 차 문을 열고 튀어나간 그가 문득 페라리의 앞에 멈춰 섰다.

어퍼 웨스트사이드는 치안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래 봤자 뉴욕이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뉴욕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건 멍청한 짓인데, 그 몇 안 되는 멍청이들이 슬금슬금 호기심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에드워드는 겁 없이 휴대전화 사진을 찍으려 들던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훑은 후, 연기를 피우는 페라리를 힘껏 걷어찼다. 믿을 수 없게도, 에드워드의 발길질 한 번에 전조등이 깨지는 동시에 앞 범퍼가 철골에 얻어맞은 양 푹 꺼졌다.

시끄러운 충돌사고에 호기심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한 타이밍 늦게 꽥꽥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보통 사람은 발길질로 차를 어그러뜨릴 수 없으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생물은 말보다 행동으로 설득하는 게 최고라는 지론을 확고히 했다.

뒤이어 그는 손에 쥔 휴대전화로 자신에게 지도에서 케일리 찾기를 가르쳐주었던 마크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것만 확인한 에드워드가 상대방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센트럴 파크 쪽으로 던졌다. 잔디에 떨어졌으니 고장이 나지는 않았을 테다.

일정 시간 신호가 없으면 안면인식이라고 했던가. 듣는 것만으로는 어떤 구조인지 이해할 수 없으니 적당히 보험을 들어놓으려는 계산이었다.

마크는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으니 귀찮은 절차를 생략하는 데 도움이 될 터다. 뉴욕 이민국과 뉴욕 경찰이 어디까지 공조하는지까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국토안보부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다는 사실은 알았다.

자신이 쫓아낸 인간들은 별로 걱정되지도 않았다. 적당히 겁을 줘 쫓아 보낸 놈들이 인터넷이니 뭐니에 접속해 이상한 글을 올려봤자, 정신병자에 거짓말쟁이 취급만 받고 끝날 것이다. 뉴욕은 그런 도시였다.

어울리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에드워드가 페라리를 한 번 더 걷어차자 앞좌석에서 정신을 못 차리던 운전수, 그레고리가 허우적허우적 에어백을 치웠다. 선팅된 차창 너머로 에드워드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빙고.

일순 눈이 마주친 그레고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씩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놈 또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페라리를 걷어찬 건 케일리를 구출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화풀이였다. 차창 너머의 운전수가 이마에서 검은 피를 흘리는 것을 목격한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혔다. 피가 검은색이라니, 재수 없는 사인이다.

화풀이는 이 정도면 됐고, 이제 자신의 특별식을-여러 가지 의미로.- 회수하러 가야 했다. 운전석의 잠금 부분을 꾸욱 눌러 어그러뜨린 에드워드가 버릇처럼 손목시계를 쳐다보았고 곧 페라리를 한 바퀴 빙 돌아 뒷좌석에 멈춰 섰다.

모르긴 몰라도 망가진 잠금쇠를 뜯고 나오려면 힘깨나 써야 할 거다. 라이칸이 아니라도, 얼마나 빨리 빠져나오는지로 운전수의 물리력을 추정할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허리를 숙여 굳게 닫힌 창문에 대고 가볍게 노크했다.

검게 선팅된 차창 너머로 어딘지 멍한 표정을 한 케일리의 얼굴이 보였다. 제법 화려한 충돌사고를 겪은 것치고는 멀쩡한 꼴이다. 하기야, 친절하게 안전벨트도 매고 문도 부여잡으라고 충고했는데 멀쩡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비교적 멀쩡한 뒷좌석의 문을 뜯어내듯 강제로 열자 우지끈, 잠금장치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케일리는 착실하게도 자신이 시킨 대로 뒷좌석의 문손잡이를 꼭 부여잡은 채다. 페라리의 문 한 짝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뜯어낸 에드워드가 어깨를 으쓱하는가 싶더니, 분리된 뒷좌석의 문을 통째로 집어 들었다.

마침 문짝에 매달려 있던 캐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려 올라오는 것을 노린 수였다.

주욱, 따라서 늘어나는 안전벨트가 케일리의 몸통을 잡아채기에 그 위로 손톱을 세워 툭 끊어낸 에드워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흐릿한 달빛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희게 빛났다.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낸 그 웃음은, 케일리의 옆자리에 앉아서 황당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칸을 향한 것이었다.

“좋은 밤이지?”

싱글싱글 웃음을 매단 표정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서늘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희게 질린 케일리의 손은 여전히 페라리의 문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문에 매달려 있는 케일리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떼어준 에드워드가 다소 성가신 얼굴로 떼어낸 문짝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휘잉, 살벌한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른 문짝이 센트럴 파크의 나무 위에 안착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 혼자 0.8배속의 세상을 살아가는 양 느리게 눈을 끔뻑인 케일리가 연기를 피우는 차 두 대를 힐끗 눈짓하며 대답했다.

“NYPD가 악몽을 꿀 것 같은 밤이기는 하네요.”

그에게 건넨 인사말은 아니었지만, 착실히 대답이 돌아오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킨시나가 아무리 멍청한 라이칸이라도 자신이 그와의 정면충돌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 또한 비슷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에드워드는 아킨시나를 깔끔하게 처리한 뒤가 귀찮을 뿐이며, 아킨시나는 에드워드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사소한 차이가 있었다. 어찌됐건 순혈 뱀파이어와 순혈 라이칸의 사이에는 함부로 넘기 껄끄러운 선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는지, 케일리는 확실히 다친 곳도 없어보였고 평소처럼 입도 잘 돌아갔다. 방금 전의 통화에서도 별로 위험에 처한 것 같은 분위기는 없었으니 실제로도 의외로 목숨에 위협을 받고 있던 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래도 상대는 케일리다. 총에 맞고 기절할 지경이 되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 녀석이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걱정 마. 걔들은 출동도 안 할 테니까. 그것보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에드워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케일리의 감상에 짧게 대답하는 동시에, 물음을 던졌다.

“네, 시키는 대로 안전벨트도 매고 문도 잡고 있었더니. 골이 좀 울리긴 하지만, 갑자기 흔들려서 그런 것뿐이고…… 그런데 경찰은 어떻게 한 거예요?”

충돌사고 정도로 죽는 것도 아니면서 빠득빠득 이를 가는 짐승을 무시한 채,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얼굴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돌렸다. 뼈도 괜찮고, 머리나 목에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피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니 아마 정말로 괜찮은 거겠지.

“너드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너드?”

“네 휴대전화 위치추적 하는 데 도움을 받았거든. 나중에 답례를 해야겠군.”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대답하는 에드워드에 고개를 기울인 케일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통화에서부터 줄곧 에드워드는 관리국과 관련된 화제를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고, 케일리 또한 아킨시나와 그의 매니저에게 쓸데없는 정보를 흘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택시를 잡아야 할 것 같군 그래. 아, 혹시 그쪽도 택시 필요해? 택시보다는 구급차가 필요할 것 같긴 하지만, 원한다면 양보해줄 수도 있어. 내가 마음이 좀 급해서 말이야, 그쪽 사정을 생각 못하고 사고를 냈으니 그 정도 책임은 지게 해달라고.”

문득 고개를 들어 케일리의 어깨 너머를 향한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케일리는 차 안에 갇혀 있던 그레고리가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문짝을 발로 차고 비틀거리며 가까워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들어도 비아냥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그레고리가 입을 쩍 벌린 채 잠시간 말을 잃었다.

“이,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에드워드의 수작 덕분에 제대로 열리지 않는 운전석 문을 뜯어내다시피 해 탈출한 그레고리가 검게 물든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소리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친 에드워드가 힐끗,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탈출에 걸린 시간은 삼 분 안팎. 검은 피에, 어그러진 차 문을 뜯고 탈출한 괴물 같은 악력을 더하면 확실히 인간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별로 새로운 정보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재료였다.

“흠, 확실히 별로 머리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밤이라 망정이지, 검은 피를 질질 흘리면서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모습은 별로 현명하지 못했다. 그가 구경꾼들을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요즘 유행하는 십 대 SNS의 좋아요 감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레고리를 바라보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싸는가 싶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설마하니 그런 식으로 차를 세우지는 않을 거라고 에드워드를 비호하던 케일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나직하게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생각을 바꿨다.

아무래도 에드워드는 좌측에 라이칸, 전방에 리퍼로 위험천만한 동반 드라이브를 하던 자신을 위해 ‘그런’ 식으로 차를 세운 모양이었다.

“너, 너 이 새끼! 사람을 쳐놓고 그따위 말이 입에서 튀어나와?”

빙금 전까지 멀쩡한 사람들 배를 갈라 내장을 적출하던 놈도 입이 달렸다고 냅다 지껄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친 에드워드가 별반 어렵지 않게 뒷좌석 문을 열고 아킨시나를 끌어내는 그레고리를 향해 말했다.

“너 사람 아니잖아? 아, 일행 중에 사람이 섞여 있긴 했지. 납치당한 불쌍한 사람 말이야. 그래서 피해자가 다치지 않도록 미리 경고도 했고, 보다시피 유일한 사람은 이렇게 멀쩡하잖아? 게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일 텐데?”

머리를 다쳤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는 아킨시나가 뒤이어 페라리에서 내렸다.

운전석에 있던 그레고리는 에어백 덕분에 충격이 적었고, 케일리는 안전벨트에 충격에 대한 대비까지 하고 있었으니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비도, 안전장치도 없이 충격을 맞이한 아킨시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라이칸이라도 예고 없는 충돌에 대비할 수는 없었다. 호되게 부딪힌 등도 욱신거렸고, 무엇보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꺾인 목이 더럽게 아팠다. 만약 그가 인간이었다면 못해도 뼈 몇 대는 나갔을 테다.

아니, 아무래도 확실히 뼈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에드워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에드워드가 무식한 방법으로 구경꾼을 쫓아준 덕분에 보는 눈이 없다.

아킨시나는 몇 겹으로 흐려진 시야를 되돌리고 미친 뱀파이어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믿을 수 없는 방향으로 고정된 목을 양손으로 고정해 있는 힘껏 돌렸다. 일단 꺾인 목뼈 탓에 정면을 쳐다볼 수 없었고, 목소리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두둑, 살벌한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 돌아간 목이 빠르게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는 자체치유를 시작한 목을 몇 번인가 주물러 제대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케일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낭패한 얼굴을 했다.

아킨시나는 아직 모델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평범한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일은 되도록이면 다른 인간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하거나, 재수가 없어 목격을 당했다면 목격자를 처분해야 했다. 이번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목격자의 배후에 있는 뱀파이어였다.

“봐, 아무도 안 다치고 내가 원하는 건 얻었잖아. 이게 바로 전술이라는 거야.”

목이 제 위치로 돌아온 아킨시나를 턱짓하며 에드워드가 그렇게 말했다. 케일리가 생각하기에 에드워드의 행동은 전술적(Art of war) 판단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에 가까운 데다, 자신을 제외한 두 탑승객이 다쳤기 때문에 그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별달리 반박을 할 마음도 들지 않아 케일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내장을 지켜준 에드워드에게 고마워하기로 결정했다.

“그럼 교통정리를 해볼까?”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가 자신의 슈트 재킷을 벗어 케일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9월에 접어든 뉴욕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뱀파이어보다 체력이 약한 인간이 계속해서 추위에 노출되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대단히 평범한 걱정과 함께, 직접 말한 것처럼 교통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케일리는 어째서 옷을 빌려주는 것이냐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기는 했지만, 굳이 에드워드의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은 채 옷깃을 여몄다. 확실히 좀 추운 것 같기도 했다.

툭툭, 잘했다고 칭찬하듯 케일리의 어깨를 두드린 에드워드가 곧장 아킨시나에게로 걸어갔다. 시원스럽게 움직인 긴 다리는 몇 발짝 걷지 않아 아킨시나의 앞에 도착했다. 모델인 아킨시나와 거의 차이가 없는 장신의 에드워드는,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레고리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걸. 지금은 네 주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지만, 네가 귀찮게 굴면 자비로웠던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말이야.”

에드워드가 정말로 마음을 먹고 아킨시나를 해치려 든다면, 어차피 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늙은 세르게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간 고민에 빠졌던 그레고리가 에드워드를 향해 그러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한 방해꾼이 사라진 덕분에 한결 움직이기가 편해진 에드워드가 아킨시나의 멱살을 가볍게 틀어잡았다.

“이번에도 오해라고 둘러대고 싶으면 한번 해봐. 짧게 끝낸다면 들어줄 마음도 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케일리를 유인했던-사실은 둘 다 유인해, 자신을 스토킹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려던 게 본 목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에드워드의 뒤통수를 치려는 꼴이 됐다.- 아킨시나는 돌려줄 말이 없었다. 서슬 퍼렇게 빛나는 파란 눈동자를 마주한 채 굴욕에 젖은 하얀 시선을 내리까는 자존심 상한 늑대를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말했다.

“할 말 없어? 그러면 내가 말할 차례네?”

마치 공정하게 발언권을 주고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누가 봐도 에드워드가 우위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킨시나와 그레고리, 그리고 에드워드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힘의 구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건 케일리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데이브가 작전을 망치지 말아달라고 했던가. 사실 데이브의 그 웃기지도 않는 요구를 에드워드가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다. 리퍼 건을 말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번 공동작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밀조직 수사까지 지켜줄 의리는 없다. 그러니 에드워드가 비열한 웃음을 매단 채 아킨시나의 멱살을 잡아챈 데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유리 아킨시나쯤 되는 라이칸에게 손을 대려면 각오가 필요했다. 최소한 러시아의 라이칸 일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한 세대 정도는 그들의 추적과 보복을 감수해야 했다. 생각만큼 힘든 일은 아니겠지만, 귀찮았다. 그리고 케일리를 달고 다니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니 에드워드는 자신이 손을 대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는 묘안을 떠올렸다. 자신이 움직일 수 없다면, 아킨시나를 도발해 제법 신중해 보이는 그가 실수를 하게 만들면 되는 게 아니겠는가.

아킨시나는 그저 옷깃을 잡혔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목숨줄을 틀어잡힌 것처럼 목덜미가 서늘했다. 뱀파이어에게는 라이칸과 비슷한 눈의 힘이 있다고 했던가. 어쩌면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그 힘을 사용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옴짝달싹 못한 채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는 아킨시나가 이를 악물었다.

“잘 들어, 꼬마 늑대.”

“그런, 식으로 부르지……!”

“남의 식탁 앞에서 침 흘리지 마. 손을 대는 건 물론이고, 쳐다보지도 마. 아무리 식사 예절을 모르는 짐승이라고 해도 뭐가 지저분하고 역겨운 짓인지는 구분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귓구멍에 대고 액체질소를 흘려 넣는 것처럼 섬뜩한 감각이 아킨시나를 위협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음색은 봄바람처럼 나긋했다. 연인에게 속삭이듯 부드러웠으며, 더할 나위 없이 자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느껴지는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스멀스멀 흘러들어 이성을 마비시켰고, 아킨시나의 뼛속 깊숙한 곳에 새겨진 본능을 일깨웠다.

공포.

그가 결코 이길 수 없을, 종을 향한 비이성적인 공포였다.

“만약 피아를 구분할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해서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멍청하다면, 빨빨대고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숨을 멈추도록 해. 걸어다니는 대기오염이 되느니, 차라리 흙과 한 몸이 돼서 거름 역할이라도 하는 편이 지구에 이로울 테니까.”

환경보호에는 쥐뿔도 관심이 없는 주제에 이를 악문 채 바들바들 턱을 떠는 아킨시나의 눈앞에서, 에드워드는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눈을 접고 달콤하게 웃었다. 달빛을 받은 뱀파이어의 얼굴은 눈에 독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아킨시나에게는 그저 악귀처럼만 보였다.

교통정리를 끝낸 에드워드가 아킨시나를 위협하기 위해 흘려보내던 자신의 기운을 깨끗하게 거둬들였다. -B 지구에서 일하다 보면 별로 꺼낼 일이 없는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라이칸의 눈이 가진 매혹이나 세뇌와는 정반대로, 뱀파이어의 시선은 타인을 지배하는 데에 적합한 능력이었다. 라이칸의 것처럼 상대방의 감정까지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위협하고 조종할 수 있다. 상대가 이종이라고 해도 순혈 뱀파이어보다 상위의 존재가 아닌 한 지배대상이 되었다. 모든 라이칸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아킨시나 정도는 손쉬웠다.

마법에 걸렸다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린 아킨시나는 전신을 억누르던 차가운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느리게 입술을 달싹일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이미 자신의 멱살을 놓아준 후였고, 남은 흔적은 구겨진 옷깃과 자신의 안부를 묻는 그레고리의 목소리뿐이다.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몇 번인가 달싹인 후에야, 아킨시나는 줄곧 머릿속을 떠돌던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당신, 미쳤습니까?”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짙은 분노가 담긴 음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킨시나는 에드워드가 말하는 것처럼 케일리를 납치한 적이 없었고 어느 쪽이냐고 하면 그 자신이 스토킹을 당한 피해자였다. 심지어는 타고 온 택시를 보내버린 케일리를 늦은 밤의 웨스트 할렘가에 덩그러니 내버려두고 올 수도 없어 자신의 차로 파티장까지 태워다 주기까지 하던 참이었다.

케일리가 지나가던 갱에게 잘못 걸려 총이라도 맞으면 그를 이용해 에드워드를 물먹이겠다는 아킨시나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니 꼭 그를 위해서만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호의는 호의였다. 아킨시나는 자신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파티장까지 데려다 주는 도중, 케일리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빤했다. 파티장에 남겨두고 온 뱀파이어였다. 안 그래도 대화 내도록 울려대던 휴대전화가 신경 쓰였던 터라 아킨시나는 별말 없이 그러라고 했다.

케일리와 뱀파이어의 통화 내용은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어왔다. 별반 예상한 바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화였고, 그래서 방심했다.

아킨시나는 케일리가 뱀파이어의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뱀파이어 쪽에서도 정체를 들키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진심으로 덤벼들지는 않으리라 가정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무엇 하나 들어맞은 게 없었다.

에드워드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상대가 이종이든 인간이든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뱀파이어라는 족속과 엮여서 일이 제대로 된 역사가 없다는 라이칸 사이의 격언을 떠올리며 아킨시나는 가만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비이성적인 라이칸이었다면 상대가 뱀파이어든 뭐든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에드워드와 대적해서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았다.

“내가 미친 것 같아 보여?”

흠, 하고 턱을 만진 에드워드가 아킨시나를 향해 되물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런 무모한 짓을 저리를 리가…….”

아킨시나의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인간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종임을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권속도 아닌 인간에게 집착하는 묘한 행동까지 모조리,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정신 나간 뱀파이어는 그렇다 치고, 그에게 딱 달라붙어 눈을 깜빡이는 인간을 향해 무심코 시선을 옮긴 아킨시나의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싹텄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어째서 저 인간은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걸까? 타고나기를 동요가 적은 성격이라서?

하지만 아무리 성격이 그렇다고 해도 에드워드의 행동은 뱀파이어나 인간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가 많았고, 검은 피를 흘리는 그레고리도, 어긋난 목뼈를 아무렇지 않게 맞추는 자신도 인간의 기준으로 정상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지난 일주일간을 통틀어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답지 않은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케일리는 인간답지 않았다. 적어도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평범한 인간의 범위에 들어맞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억지 트집을 잡는 뱀파이어에게 의문 하나 가지지 않은 채 시키는 대로 안전벨트를 매고, 문에 매달렸다. 차에 들이받힌 후에도 자신이 어째서 그런 꼴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파리 목숨 취급하는 상대에게 한마디라도 쏘아붙이는 게 맞았다.

상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의문을 가져야만 했다.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케일리……, 설마 당신,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겁니까?”

불쑥, 아킨시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물음에 에드워드를 향해 있던 케일리의 시선이 느리게 옮겨왔다.

라이칸의 시야는 어둠 속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케일리의 밤색 눈에는 읽어낼 만한 감정이 없었다. 아킨시나는 자신의 물음에 별다른 반응이 없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후, “정체라니요?” 하고 담백하게 되묻는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그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짚어낼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의 호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건 이상했다. 그러니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나, 발언, 그리고 무모함에서 이상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기색도 없다.

뱀파이어도 아니고, 라이칸도 아닌 평범한 인간. 그런데 어째서 저 인간은…….

“이봐, 꼬마 늑대. 나는 이 녀석에게 정말로, 짜증스러울 정도로, 인내심을 가지고 공을 들이고 있다고. 그걸 망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에드워드의 그 말은 약간의 트릭이었다. 아킨시나가 지켜본 지난 일주일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멋대로 상상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준 것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의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한 시간의 실종으로, 케일리 로체스터의 존재가 그의 안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점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의심과 혼란, 그리고 분노와 굴욕을 담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킨시나를 무시한 채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유유히 센트럴 파크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에드워드의 경고를 무시하기에, 굴욕적이기 짝이 없게도, 아킨시나는 그가 무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현장에 견인차가 들이닥쳤고 자신의 명의로 등록된 차를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었던 아킨시나와 그레고리는 꼼짝없이 그들에게 잡힐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의 말대로,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