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6권) (27/41)

[BL]영국 비밀보안국의 비밀 6

#Mission5. Passion Week in NYC (9)

냉장고를 열어 깔끔하게 정리된 음식 중 몇 가지를 꺼내 테이블에 세팅한 에드워드가 멍한 얼굴로 맥주캔을 땄다. 어차피 뱀파이어는 술에 취하지 않았고, 마약 같은 향정신성 약물도 듣지 않았으니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을 따갑게 하며 뱃속으로 흘러가는 차가운 맥주에도 머릿속은 뿌연 채다. 기계적으로 캔을 기울이면서도 케일리에게서 들은 말의 충격을 반감시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뭐? 자길 좋아하지 말라고?

만약 오늘 이 순간이 아니었더라면 주제파악도 못하고 웃기는 소리 말고 발이나 닦고 잠이나 자라고 침대에다 던져버렸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농담이나 의미 없이 한 말로 치부하고 넘길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전화……, 전화를 해야겠어.”

텅 빈 맥주캔을 내려놓은 에드워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대전화는 센트럴 파크에 던져버렸으니 유선전화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장 페어리에게 달려가 케일리를 구인할 때 어떤 마법을 걸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물론 청결하고 목숨 아끼느라 빌빌거리지 않으면서 댁한테 절대로 반할 일 없는 데다 영생에 미련 없는 덜떨어진 놈이지만 가르치면 데리고 다닐 만한 신체 건장한 인간을 파트너로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에드워드 본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조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들리니 실제 구인광고의 조건마법에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에드워드의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그는 페어리를 아주 싫어했고, 페어리뿐만 아니라 요정이라는 종족 자체를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그들의 마법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도 그런 것이, 마법을 쓰는 종족 들 중 그 위력으로 줄을 세우면 요정은 용 다음으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종이다.

에드워드가 가문의 집요정 로라를 쫓아낼 수 없었던 것도 그녀의 마법이 순혈 뱀파이어의 힘으로도 쉽게 당해낼 수 없을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페어리가 ‘자신에게 절대 반하지 않을 파트너’라는 마법을 걸어 케일리를 구인했다면, 그건 무슨 수를 써도 놈이 자신에게 반할 수 없을 거라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아직 뭘 시작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절망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전화, 역시 전화로 확인을 해야…….

멍한 얼굴로 텔레비전 옆의 유선전화를 찾아낸 에드워드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번호를 눌렀다. -B 지구가 아니라 페어리의 개인번호였다. 별로 알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업무상 연락해야만 할 때를 대비해 외워둘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몇 번인가 통화 연결음이 울린 후 수화기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용건을 말해주시죠.

어딘지 푹 잠겨 있는 의문 섞인 목소리를 향에 에드워드가 말했다.

“이빨. 너 구인광고에 정확히 무슨 마법을 걸었지?”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코드네임도 아니고, 이빨 요정도 아니고, 요정도 아니고, 그냥 이빨이라고만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참으로 익숙했다. 장장 100년은 정기적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지구 반대편까지는 아니고 대충 그 비슷한 위치에 파견을 보낸 바로 그놈이다.

금세 자신이 받은 전화상대가 누군지 깨달은 페어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이 미친 모기새끼야! 지금이 몇 신데 전화질입니까, 전화질이!

“시끄러워. 너 구인광고에 무슨 마법 걸었어? 설마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 새벽 5십니다, 5시. 듣고 있습니까? 혹시 모기라서 귀가 없어요? 새벽! 5시! 착한 요정은 꿈나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시간이라고, 이해 안 됩니까?!

“무슨 조건이었는지 설명해봐.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돼. 네놈들이 쓰는 마법은 미국 법전 비슷한 거니까, 어딘가에는 구멍이 있을 거라고. 아니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덜떨어진 이빨 네 녀석이 일을 허술하게 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빨리 어떤 마법이었는지 지껄여봐.”

남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고 저 할 말만 하는 에드워드에 새벽 5시에 강제로 기상한 페어리가 이마를 짚었다.

새벽 5시였다. 다른 요정들은 죄다 꿈나라에서 꿀과 젖이 흐르는 낙원을 즐기고 있을 이 시간에, 자신은 직장의 진상 모기에게 붙잡혀 뜬금없는 모기 소리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공평했다. 세상은 정말이지 불공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간의 경험상 놈에게 원하는 것을 쥐여주지 않는 한, 이 통화는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페어리는 알고 있었다.

설마하니 뉴욕에서 런던까지 단숨에 쫓아오지야 못하겠지만 앞으로도 저 모기를 건사해야 하는 인사부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원하는 걸 쥐여주는 게 훨씬 쉬웠다. 그리고 페어리는 자고 싶었다. 최소한 출근시간까지는 자고 싶었다.

-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뭔진 모르겠지만 대답할 테니까, 다짜고짜 엄한 요정 잡지 말고 제대로 설명을 하라 그 말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는 요정에게 유사 편두통을 유발시키는 모기를 퇴치하기 위해 페어리가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먹고 떨어지라고 대답해주는 게 낫다. 다행스럽게도 에드워드는 평소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고 정말로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케일리, 걔 구인할 때 걸었던 조건마법.”

페어리가 대답했다.

- 이 미친놈아……, 그 조건을 누가 걸었는데, 왜 나한테 묻고 지랄입니까!

그의 입장에서는 매우 타당한 분노였다.

“내가 한 말을 어떤 식으로 마법에 옮겼는지를 말해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에드워드에 페어리는 자신이 걸었던 마법을 떠올리며 새벽 5시에 전화를 걸어 별 시답잖은 걸 묻는 악성 말라리아모기를 향해 씹어 뱉듯 대답을 돌렸다.

- 청결하고 목숨 아끼느라 빌빌거리지 않으면서 댁한테 절대로 반할 일 없는 데다 영생에 미련 없는 덜떨어진 놈이지만 가르치면 데리고 다닐 만한 신체 건장한 인간! 이걸로 만족했습니까?

나 이제 자러 가도 되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페어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왜 하필 인간이야?”

필드요원의 비율을 따지면 인간과 이종이 4대 6 정도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인간으로 제한하는 조건을 건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던진 물음이었지만, 페어리는 되레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볼 수 있냐는 양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되돌렸다.

- 왜냐니……. 설마 당신, 영국에 사는 이종들 중에 파트너를 들들 볶아 갈아치우는 취미로 악명 높은 순혈 뱀파이어와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정신 나간 놈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내가 뭘? 난 아주 유능한 요원이라고. 구인을 못하는 건 네놈들의 관리국이 일하기 싫은 직장이라 그런 거 아닌가?”

- 대체 누가 누구 탓을 하는……. 됐고, 난 자러 갈 겁니다. 휴대전화 끌 테니까 절대로 찾아오지 마세요. 어차피 뉴욕이니 방법도 없겠지만, 솔직히 어떤 이상한 방법으로 날 엿 먹일지 몰라서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거든요? 되도록이면 그 불쌍한 인간 분과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빕니다. 그 좆같은 조건도 다 맞췄으니까 불평불만 그만하고 적당히 만족하세요. 어차피 이종 중에 당신이랑 같이 일하려는 놈 없습니다. 그럼 이만.

뚝 끊긴 수화기를 잠시간 노려본 에드워드는 일단 원하는 답은 얻었으니 페어리에 대한 응징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놈의 너 같은 놈과 일할 이종이 남아 있을 것 같냐는 말은 아주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덜떨어진 이종들과 파트너로 일할 생각 같은 건 에드워드에게도 없었다. 그러니 그건 일단 아무래도 좋았다.

에드워드가 알기로 조건마법은 크게 두 가지로 방향성이 나뉘었다.

첫째는 특정 조건을 정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예측해 거기에 부합하는 대상을 찾아내는 것.

둘째는 아무 상대나 끌고 와서 조건에 부합하는 대상으로 개조하는 금제마법을 거는 것.

구인광고에 사용하는 건 보통 첫 번째였다. 그러니 케일리는 정말로 페어리의 마법이 인증한 ‘자신에게 절대로 반하지 않는 인간’일 테니, 그가 인간인 한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다행인 점은 조건마법이 기본적으로 시전자의 단어 사용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었다. 변호사들이 기를 쓰고 법전의 단어를 물고 늘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페어리가 건 조건마법에서 에드워드의 희망이 될 만한 단어는 ‘인간’이라는 부분뿐이었다.

즉, 케일리가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면 최소한 스타트 라인에는 설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조건마법이라는 게 미래까지 고려해 걸리는 것이다 보니 에드워드에게 다른 선택지 같은 건 없었는데, 심지어는 케일리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고 해서 딱히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을 거라는 문제점도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따위 조건을 걸지 않았더라면, 그가 자신과는 어떻게 해도 안 될 상대라는 걸 모른 채 살아갔을 텐데.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 마법이 없었어도 케일리는 케일리였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영리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뿐이라는 본인의 말처럼 놈은 머리가 좋았다.

좋아하지 말라니.

그런 게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이 마음고생이라는 말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온 시점 전에 이미 멋대로 움직인 에드워드의 감정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작은 가능성이라도 잡아봐야 했다.

“진짜 권속으로 만들기라도 해야 하나.”

순혈 뱀파이어의 권속은 뱀파이어가 된다. 게다가 숙주 뱀파이어를 부모, 아니, 그보다는 종교에 가까이 숭배하게 된다. 케일리를 자신의 권속으로 만들면 아마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다. 전부는 아니고, 반 정도만.

뱀파이어가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별미는 아니었다. 또 케일리라는 인간에게서 나는 냄새나 맛이 바뀐 후에도 그를 향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걸 확신하게 된다고 해도, 정말로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의문도 남았다.

결국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터덜터덜 소파에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은 에드워드가 험악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뭐 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 와중에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케일리는 갈아입을 옷이 없었는지 머리 위에 배스타월을 올린 채 느리게 걸어 나왔다. 보통 사람들은 그걸로 몸을 가린다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저가 보여주는데 구경을 좀 하는 게 어떤가 싶어 그만뒀다.

노골적으로 알몸을 훑는 눈길에도 불구하고 수치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에드워드를 지나친 케일리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하고 그대로 식탁에 앉았다. 그가 준비해놓은 음식은 미국 이민국에서 미리 넣어뒀을 냉동식품뿐이었다. 별로 맛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맛있을 리도 없지만 케일리는 불평불만 없이 플라스틱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은 좋아하지 말라고 해놓고서 저런 꼴로 돌아다니고 있는 거잖아?

물론 별로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게 현명한 일은 아닐 거라는 충고까지 던졌던 케일리다. 정말이지 남의 마음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나쁜 녀석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며 에드워드는 푸욱,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넘치는 게 시간이다. 충분히 고민한 뒤에 결정해도 케일리가 어디로 도망을 가지는 않을 테니, 그거면 충분했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다시 생각해야겠다.

◇ ◆ ◇

에드워드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것과 같은 타이밍에, 케일리는 막 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드워드를 발견한 그가 여전히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아직 자신의 머리도 다 닦지 못한 에드워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케일리의 머리에다 타월을 덮었다. 푹 젖은 밀빛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비비던 에드워드의 시선이 힐끗 식탁을 향했다. 먹는 건 깔끔하게 먹었는데, 식기며 포장용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식사 예절이 나쁜 것도 아니었고 편식도 없는데 유독 정리정돈을 안 했다. 한 번도 하라고 시킨 적이 없기는 했지만, 가끔 그런 점들이 신기할 때가 있다. 보통 혼자 사는 성인 남자는 자기가 지나간 흔적은 치웠다. 치우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아질 테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신경이 쓰여야 정상인데, 케일리는 아예 그런 일 자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잠깐만……. 얘 진짜 먹고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아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을 스친 놀라운 가정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외로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케일리는 계급장을 좋아하는 로저가 공들여 만든 인간놀이에서 무려 ‘친구’로 발탁된 인물이다. 훌륭한 집안에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 사회가 만든 괴물이 된 이 인간이 제 손으로 식탁 정리를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넌 그 성격을 빼도 충분히 이상한 놈이야, 그거 알지?”

평소처럼 비꼬는 것보다는 좀 더 감탄에 가까운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케일리가 조금 웃었다. 어렸을 때는 자주 들었는데, 머리가 크고 나서부터 듣지 않게 된 이야기였다.

“너 진짜 이상해, 그거 알지?”

학창시절의 동기들부터 시작해 또래의 친척, 그리고 교수들에게도 한 번씩은 들었다. 케일리가 생각하기에 스스로의 이상한 점은 다른 사람들보다 포장을 덜 한다는 것 정도였고, 실제로 그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다른 사람들이 꼭 해야만 한다고 인식하는 모든 걸 제대로 해냈다.

그래도 여전히 이상하다는 말은 듣기는 했다. 그거야말로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 사람이 없는 게 케일리는 신기했다.

“에디는 그런 말 할 때마다 무슨 생각 해요?”

그가 말하는 이상함과 지금껏 자신에게 그 말을 했던 사람들이 정확히 같은 뜻을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그냥 궁금했다. 이상하다는 말 자체보다는 모든 이들을 향해 비비 꼬인 말만 내뱉어 부러 만들지 않아도 될 적을 꾸역꾸역 쌓아가는 에드워드의 언어생활에 대한 의문이 더 크기는 했다.

악의 없이 묻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뭐 그런 쓸데없는 걸 물어보느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언제나 그러하듯, 그는 성가신 표정을 하면서도 성실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넌 숨 쉴 때마다 난 살아야지,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겠어! 에너지를 합성하겠어! 그런 생각 하면서 쉬냐?”

요컨대,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는 뜻 같다.

“그렇지는 않죠.”

조금 당황해서 대답하는 케일리에게 에드워드가 물었다.

“왜, 듣기에 기분이 언짢으시기라도 해?”

제법 물기가 가신 머리에서 배스타월을 거둬들인 에드워드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뒤로 넘겼다. 케일리의 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야 자신의 머리 위에 올린 수건으로 적당히 물기를 닦아낸 그를 향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니요. 오히려 재밌다고 생각하는데요. 가끔 안 사도 될 원한을 사고 다니는 걸 보면 저래도 되나 싶을 때도 있지만, 뱀파이어는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는다면서요? 그걸 아니까 요즘은 그냥 재밌죠. 어차피 옆에서 구경하는 것뿐이니까요.”

어떤 면에서는 사각지대 없이 독설을 내뱉고 다니는 자신보다, 그걸 재밌다고 구경하는 케일리가 훨씬 성격이 나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본인이 마시라고 목덜미를 내미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에디?”

에드워드에 의해 침대에 끝에 걸터앉은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불렀다.

별다른 대답이 없이 제 입에 엄지를 집어넣은 에드워드가 손가락 끝 마디에 대고 송곳니를 세웠다. 꽈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의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진한 피맛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뚝, 뚝, 뚝, 빠르게 떨어지는 피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 곧장 케일리의 입에 쑤셔 넣은 에드워드가 말했다.

“빨아.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두 모금 마시고 바로 뱉어.”

너무 많이 먹이면 전과 같은 참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두 모금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거면 내일 하루 동안 웬만한 이종의 위협이라면 손쉽게 제 몸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킨시나 같은 멍청이들이 들러붙지 않도록 자신의 냄새도 남을 테고.

순식간에 혀를 축축이 적시는 에드워드의 피는 전과 다름없이 놀라우리만큼 달콤했다.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빤 케일리가 정확히 두 모금을 삼킨 후, 그의 손가락을 뱉었다. 그 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제 손가락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케일리의 입에서 빼낸 엄지는 이미 눈에 띄게 상처가 회복된 후였다.

두 모금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자신이 아킨시나를 도발했으니, 그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리퍼 사건에서 자신들이 맡은 임무는 끝난 셈이니 런던에 돌아갈 수 있겠지만, 아니라면 일이 귀찮아진다.

당장 케일리를 권속으로 만들게 아니라면, 이 정도 보험을 들어둬야 안심이 됐다. 게다가 어차피 자신도 그의 피를 얻어먹을 테니, 기브 앤 테이크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뭐, 약간의 사심과 심술이 섞인 것도 사실이기는 했고.

“나 오늘은 안 다쳤는데요?”

눈을 깜빡이며 입맛을 다시는 케일리를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쓰게 웃었다.

“알고 있어.”

눈치도 빠른 녀석이, 꼭 이럴 때만 의도를 비켜냈다.

그것도 일부러인 건 아니겠지.

“에디, 그러면…….”

가만히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을 하려는 케일리의 아랫입술에 손가락을 가지고 갔다. 마치 거기에 다 못 삼킨 피가 묻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슥, 부드럽게 훑어낸 에드워드가 심술 섞인 파란 눈을 가볍게 내리깔며 말했다.

“쉿. 잠깐 앉아 있어봐. 기분 안 좋아지면 바로 말하고.”

자신의 피를 마신 인간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은 있어도, 기분이 나빠질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꺼낸 말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일리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입술에서 느긋하게 떨어지는 손가락을 시선으로 좇으며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게요.”

여기까지 오면 대체 얼마나 알고, 얼마나 시침을 떼고 있는지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다른 종족의 혈액에 섞으면 육체의 뱀파이어 화(化)가 진행되어, 종내에는 피의 주인인 순혈의 권속이 된다. 즉, 잡종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다른 종족이 먹으면 그 양에 비례한 시간 동안 피의 주인과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일시적인 순혈 뱀파이어 화였다.

에드워드가 생각한 보험은 바로 케일리의 일시적인 뱀파이어 화였다. 하지만 케일리가 알고 있는 피의 효과는 세 가지일 테고 치유와 뱀파이어 화를 제외하면 남는 건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마지막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마치 그에게 이상이 생기는 걸 걱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케일리를 내려다보았다. 케일리는 그 시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평소에 비해 다소 흐린 눈을 하고 있는 정도일까.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게 핏물이 든 혀가 엿보였다. 그 모습을 파란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며, 에드워드는 가만히 자신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방금 전 떨어져나갔던 살점은 간데없이, 감쪽같이 원래의 모양을 되찾은 제 엄지에 입술을 댄 에드워드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흐린 밤색 눈동자를 향해 눈으로 웃었다. 케일리는 무언가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대하는 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내뱉는 언동 탓에 곧잘 에드워드가 성정이 급해 참을성이 없을 것이라 착각하곤 했다.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판단이다. 먼저 그는 아주 고집이 셌고, 또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본능에 아로새겨진 욕구를 참아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특히 맛없는 인간의 생피를 먹을 정도라면, 쓰레기 같은 혈액 팩이나 먹겠다는 결정은 고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건강을 생각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같은 순혈들은 그를 향해 빈혈 뱀파이어이라는 둥, 저혈압 뱀파이어라는 둥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사실 뱀파이어는 그런 육체적인 질환과 거리가 먼 생물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혈액이란 생명활동을 위한 에너지원이었고 에드워드는 저질의 식사를 그나마도 최소한으로만 섭취하는 극심한 다이어트를 평생 지속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기에 집어삼켜져 자아를 잃고 피를 갈구하는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은, 에드워드가 그렇게 되기에는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맛이 없는 건 맛이 없는 거다. 차라리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입에 대기 싫은 걸 억지로 대지 않겠다는 굳건한 철칙이 굶주림과 생존본능을 이겨낼 만큼 대단한 것뿐이었다.

그런 에드워드에게 무언가를 참아낸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식욕이든, 색욕이든 어차피 따지고 들어가면 그냥 욕구다. 해결하지 않는다고 당장 죽어 자빠지는 욕구 같은 건 없다. 그게 에드워드의 지론이었다.

그에게 피를 먹이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원하게 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마 케일리도 그렇겠지. 만약 그가 욕실에 들어가기 전 던진 폭탄발언이 아니었더라면, 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그 행위 자체에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테다.

자신이 케일리를 좋아하게 된 것과, 욕구를 풀기 위해 몸을 섞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육욕은 인간뿐만 아니라 뱀파이어에게도 존재했다. 아마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걸 해소하기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게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하는 건 기껏해야 표면적으로나마 결혼이라는 제도를 지켜야 하는 사회적 동물 인간과, 유전자 레벨로 새겨진 일부일처제에 지배당하는 라이칸 정도였다. 하지만 케일리는 결혼하지도 않았고, 의리를 지켜야 할 상대도 없다.

그저 잠깐 즐기기 위해서 몸을 섞는 것조차 거리낌이 없는 에드워드가 심지어는 좋아하는 상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백을 한 적도 없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거절부터 당한 이 빌어먹을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자신의 피를 먹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없기는 힘들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그 또한 굳이 싫다는 상대를 데리고 섹스하는 취미는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고백을 한 것도 아니었고 너에게 뭘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닌데 자길 좋아하지 말라는 둥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내뱉은 케일리를 골려주겠다는 마음이 컸다.

보험은 보험이었고, 당초 목적은 이뤘으니 에드워드는 아쉬울 게 없었다. 목숨이 달렸던 전번의 상처 치료에서는 페트병 하나는 거뜬히 넘을 만큼 피를 마셨다. 덕분에 케일리는 하룻밤 내도록 최음효과에 시달렸고,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방출하지 못한 욕구와 열기에 뱀파이어 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당장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고통에 시달렸을 테다.

하지만 두 모금이라면,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할 터. 기껏해야 인간들이 사용하는 싸구려 약물보다 나은 정도일까. 그 정도를 굳이 자신이 나서서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케일리에게도 다른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하듯 만인의 연인 오른손이 있었다. 만약 정말로 급하다면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까지 더해서 3P를 시도할 수도 있을 테지.

그 광경을 팔짱 끼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에드워드에게는 충분한 수확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걸 노리고 먹인 게 아니었다는 점까지 더해, 아주 만족스러운 부차적 수확이기도 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 삶에 대한 욕구조차 희박해 보이는 케일리가 두 모금 정도로 이성이 마비되어 적극적으로 육욕을 해소하려 드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첫 섹스에서야 자신은 케일리의 피를, 케일리는 자신의 피를 마셔 약에 취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붙어먹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케일리라면 모를까, 에드워드는 지극히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케일리 또한 완전히 이성을 잃을 정도로 격렬한 효과에 지배되고 있지는 않았다.

당장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다소 흐릿해지고, 하얀 뺨에 핏기가 도는 정도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참을 만한 정도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전처럼 케일리 쪽에서 자신에게 매달리고 조를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놈이 매달리지 않으면, 에드워드도 거절할 수 없으니 그건 좀 아쉬웠다. 다음번에는 좀 많이 먹여놓고 거절해볼까.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거절 한 번에 거절 한 번을 똑같이 주고받는 걸 떠올리다 보니 스스로가 대단히 쪼잔하게 느껴져 다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고 보면 에드워드는 지랄맞은 후각과 입맛 탓에 상대를 고르고 골라왔고, 심지어는 스테디한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금욕이 익숙했지만 케일리는 아예 성욕이 없는 것처럼 지냈다.

그와 파트너가 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단 한 번 자신의 피를 마시고 완전히 이성이 나가 섹스했던 때를 제외하면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손장난을 치는 꼴도 본 적이 없다.

역시……, 아무래도 이 방법은 유치한 데다 통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보통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욕구가 쌓이게 마련인데, 평생을 신에게 바치기로 한 특이종도 아닌 주제에 정말로 신기하리만치 깔끔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담백한 성격인 걸까, 가끔 의문이 들 때도 있었으나 굳이 물어봐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딱히 자신의 연인이 된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한번 몸을 섞게 된 상대였다. 오히려 몸을 섞은 부분보다는 그 전의 행위가 더 중요했다. 맛있는 피를 얻어 마셨으니, 자신의 것을 나누어 피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도록 고쳐준 것뿐이었다.

섹스는 케일리의 몸을 수리하면서 따라온 옵션이었다. 사실 그냥 내버려뒀어도 에드워드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었고,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받아들인 케일리만 하루 이틀 괴로우면 끝났을 테다. 굳이 직접 상대가 되어 도와준 건 그저 에드워드의 친절이었다.

결국 치졸한 복수를 포기한 에드워드가 스스로의 멍청함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케일리를 잠자리에 유도하려 한 순간이었다.

“에디…….”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내일을 대비해 잠이나 자라고 그를 이끌기 위해 뻗어나가던 에드워드의 손이 허공에 멈춘 채 갈 곳을 잃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느낀 감정이 2차 대전에서 활약하다 북극에 떨어져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수십 년 후 해동된 미국인이 느꼈을 컬처 쇼크와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믿기지 않는 것보다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세계의 일이라는 점이 그러했다.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두어 번 입술만 뻥긋거리다 에드워드는 결국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피의 영향일까, 다소 흐려진 케일리의 시선이 대답을 종용하는 것처럼 에드워드를 응시했다.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단정한 얼굴에서는 방금 전 꺼낸 말의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두 모금의 효과로 은은하게 달아오른 뺨 정도의 차이일까. 이 순간에조차 케일리에게서는 감정의 냄새보다 샤워를 끝낸 후의 바디 소프 향이 더 강하게 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인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걸 묻는 걸까?

미간을 좁힌 채 에드워드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상대하는 게 케일리가 아니라 고양이였다면 차라리 쉬웠을 테다. 고양이에게는 호기심이 있으니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라 치부했으리라.

하지만 케일리는 세상에 뱀파이어와 요정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라의 여왕이 사실은 뮤턴트였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케일리였다.

물을 주든 피를 주든 마시라고 하면 의문 하나 없이 시키는 대로 마시고 뒤집어져 자는 것이야말로 케일리다운 반응이다. 갑자기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걸까?

그런 에드워드의 의문을 해결해준 것은 고개를 기울이며 튀어나온 케일리의 단도직입적인 추가물음이었다.

“다친 것도 아니고, 섹스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내가 에디의 피를 마셔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난 저녁도 먹었고 목이 마른 것도 아닌데요. 혹시 다른 효과도 있나요?”

물론 목이 마르면 피가 아니라 물을 마실 테고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인 그의 말인즉슨, 난 안 다쳤으니 네가 섹스하고 싶어서 먹인 게 아니냐는 의미였다. 아주 궤를 벗어난 건 아니었는데,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었다.

일차적으로는 새로 만든 적을 대비한 보험이었고, 부수적인 효과도 아예 노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케일리 쪽에서 하고 싶다고 매달려 오는 한이 있어도, 네가 먼저 날 거절했으니 나도 거절하겠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입이었다. 게다가 그게 복수가 되기 위해서는 케일리가 매달려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럴 낌새가 없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만약 나와 섹스를 하고 싶어서 수작을 부리는 거냐고 물은 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돌렸을 테다. 고민 없이 신랄한 부정과 비웃음, 그리고 자의식 과잉에 대한 비난을 쓰리 콤보로 날려 수치심을 안겨주었겠지.

하지만 상대는 케일리다. 부정하고 비웃어봤자 별로 효과도 없을 테고, 그 뒤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줘야 했다. 물론 보험이었다고 해명하면 케일리도 납득할 테고,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구종이 하나뿐이라 그냥 던지고 보는 건가?”

“구종이요?”

들릴 듯 말 듯 흘러나온 에드워드의 목소리를 겨우 잡아낸 케일리가,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양 곧장 되물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에드워드는 자신이 생각하던 걸 실제로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섹스 이야기를 꺼낸 케일리의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 다다른 가설 중 하나였다. 사실 저놈은 아무 생각이 없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막 던지고 보는 것뿐이라는 대단히 신빙성 있는 가설.

정치가인 부친 밑에서 자란 것치고는 화법이 직설적인 케일리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껏 나눈 대화의 대부분이 예의나 배려와는 동떨어진 직설 화법뿐이기도 했다. 부드러운 억양과 차분한 목소리 탓에 별반 의식하지 못했지만, 던지는 말의 파장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 말하는 거 말이야. 직구밖에 던질 줄 몰라서 그러는 건가 해서. 야구, 혹시 야구가 뭔지 몰라?”

진심으로, 에드워드는 케일리라는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대화의 종류가 생각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일단 던지는 직구뿐인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구종이 하나뿐인 대신, 제구력과 스피드가 끝내줬다. 어디를 노리는 건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봐도 예상할 수 없었고, 미리 대비하고 쳐낼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날아와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히 박혔다. 변화구 한두 개를 섞을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무조건 직구에, 견제고 뭐고 없이 던지고 봤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직구만 던지는 것 자체가 작전이라면 모를까, 처음부터 심리전이라는 걸 할 생각 자체가 없는 상대라면 대비를 할 도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순간, 그를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게 된 자신에게 섹스하고 싶냐는 질문을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것 자체도 문제였다. 이 자리에 심판이 있었다면 자신은 방금 전의 섹스 투구로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을 받았을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심지어 케일리는 자신을 향해 저를 좋아하지 말라는 말까지 던진 후였으니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생각을 하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교정의 여지라도 있을 텐데, 그냥 던지는 거라면 앞으로도 이런 걸 건사하고 살아야 하는 에드워드는 앞길이 막막했다.

“물론 야구는 알죠. 개인적으로는 축구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어쨌든, 갑자기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맥락을 잘 모르겠는데요.”

이해할 수 없다는 양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은 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반응속도가 빠른 케일리답지 않게 둔한 동작이었다. 아무래도 제 피가 돌기 시작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재차 날아온 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잠시간 고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케일리의 경우 질문을 회피하는 게 그렇게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중요하지도 않고 귀찮으면 운 좋게 넘어가겠지만, 운이 없으면 더 데미지가 큰 공이 날아올 가능성이 있다. 더 이상 고민하기를 관둔 에드워드가 사뭇 당당하게 대답했다.

“거기에 맥락이 없으니까 그런 거겠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케일리의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 꺼낸 것도 아니었고,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는 것이냐는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 대답을 피하고 싶은 것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케일리라는 놈은 자신이 너랑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대답하면 아무런 고민 없이 그냥 대줄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답을 고민하는 스스로에 대해 에드워드는 약간의 자괴감도 느꼈다. 불법행위를 저지르거나 거짓말을 할 때도 느끼지 않는 자괴감이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케일리와 한번 해보겠다고 원래 의도가 아니었던 걸 그랬다고 대답하는 것에는 느꼈다. 서글픈 일이었다.

게다가 성욕의 유무나 적극성의 문제가 아니라, 케일리라는 놈은 몸을 섞는 것 자체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그것도 좀 억울했다. 상대방은 아무 생각 없는데 이쪽에서만 진심으로 매달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게 대체로 진실이라는 점이 가장 억울했다.

“없어요?”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묻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있겠냐?”

에드워드는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한 심리적 거부감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놈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한 게 난이도 10 중 10점짜리였다면, 저 물음에 모른 척 오케이라는 대답을 돌리는 건 8점 정도였다. 말하자면, 8점짜리 거부감을 버티고 거짓말을 하는 것만으로 좋아하는 상대와 섹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짝사랑 상대를 자위기구로 이용하거나, 혹은 이용되는 행위였다. 물론 뱀파이어 주제에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느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남은 평생을 동족들에게 트와일라잇이라고 놀림받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사랑 타령을 하려는 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알량한 자존심 문제다.

그렇다면 대체 왜 피를 먹였냐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혔다.

여기다 대고 뭐라고 대답하면 제일 후회가 덜 남을까.

너랑 섹스하고 싶어서 먹였다고 거짓말해 몸을 섞는다면, 아마 후회할 거다. 내일까지 갈 것도 없이 대답한 순간 바로 후회를 시작하겠지.

하지만 아니라고 해도 후회할 거다. 케일리라면 피를 마셔서 좆이 팔팔하든 말든 자신의 하반신마저 무시한 채 얌전히 누워 잘 것 같다.

자신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대답하는 순간, 아 그렇구나 하고 바로 등을 돌리겠지. 그러면 자신은 아마 그 뒷모습을 보면서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다 차려놓은 코스요리를 물리치는지 밤잠을 설칠 터다.

뭘 고려해도 손해만 보는 결과뿐이다. 에드워드로서는 대답을 미루는 게 당연했다.

“에디……, 나랑 말장난 하는 거 재밌어요?”

기다리다 지친 양 느리게 한 번 눈을 깜빡인 케일리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 고작해야 말 한마디 하는데 쓸데없이 생각해야 할 게 많아서 짜증만 난다. 왜…….

속으로만 대답한 에드워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준 것은 아니었다.

“넌 지금 내가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보여?”

“그것보다는 짜증나 죽을 것 같아 보이는데요.”

“알면서 왜 물어? 지금 나 놀리냐?”

더 이상 생각할 거리도 없었고, 결론이 나지 않는데 고민해봤자다. 게다가 상대는 케일리다. 고민하는 만큼 자신만 손해를 보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에드워드가 결국 짜증 섞인 목소리로 토로했다.

“너 말이다,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보면서 정말로 아무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기는 하는 거냐?”

인간적으로 이것저것 따져보지 않아도 케일리는 너무했다. 물론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케일리 저놈은 인간이 맞으니까 이 부사는 잘못 쓰인 게 아니다. 케일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자신에게 너무했다. 자신이 저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눈치챘다는 걸 티도 내지 말든지, 티를 냈으면 배려를 해야 하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뱀파이어인 자신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케일리가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뱀파이어를 상대로도 예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대단히 종족 차별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억울함을 곱씹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눈을 크게 떴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생각이 있는 건가요?”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다 알고 하는 말 같은데, 심증만 가득하고 확증이 없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머리통을 두 손으로 움켜쥔 에드워드가 고개를 숙였다. 쿵, 꽤 아프게 이마를 부딪친 에드워드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케일리의 괘씸한 밤색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양심 없는 놈 같으니라고. 아까 나보고 너 좋아하지 말라면서? 그런데 왜 섹스는 되는 것처럼 말을 해? 내가 그러려고 먹였다고 하면, 대주려고? 설마 아닌데 그냥 던진 건 아니겠지?”

이마를 맞댄 채 그렇게 묻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곧장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하긴 했죠. 아, 섹스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내가 좋아져요? 그런 뜻이라면 확실히 좀 곤란하기는 한데.”

진심으로 곤란한 기색만이 묻어나는 케일리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에드워드가 그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움켜쥔 자세 그대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었다. 놈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톡 쏘아붙인 질문공세에도 불구하고 타격을 입은 건 케일리가 아니라 같이 직구를 날린 자신뿐이었다.

강적이다.

“……네놈의 그 대단한 논리비약 능력은 가끔 제자로 들어가서 배우고 싶을 만큼 존경하고 있어. 듣는 사람을 미치고 환장하게 만들고 싶을 때 그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테니까.”

케일리가 흐물텅한 해파리보다는, 순하기만 한 외견을 한 주제에 덩치에 맞지 않게 민첩하고 지능까지 높은 바다의 깡패로 범고래에 가깝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을 올려다보며 순한 척을 하는 가증스러운 얼굴에 속아 넘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더 이상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한편으로 에드워드는 이제 와서 그래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한숨처럼 내뱉은 에드워드의 말에 케일리의 눈매가 곱게 접혔고 뒤이어 부드러운 호선을 만들어냈다.

대체 왜 이 이상한 자식은 욕을 먹어놓고 살살 웃는가 싶어 어이없어 하는 에드워드. 아는지 모르는지, 희미한 웃음을 띤 케일리가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나 좋아하지 말라고.”

오늘 하루 동안만 두 번째로 듣는 말이다. 아직 뭘 시작해본 것도 아닌데, 정말이지 남의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게 언제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명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인간들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포장을 했다. 이타심이라는 보기 좋은 포장지에 숨긴 본성을 까발리는 걸 즐거워하는 에드워드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케일리가 이타심으로 포장을 하든 빨갛고 파란 크리스마스 포장지로 포장을 하든 상관없으니 인간의 평균 정도로만 포장을 해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멀쩡한 뱀파이어를 들었다 놨다, 가지고 노는 것도 정도껏이다. 이 인간이 제정신은 맞는 건가 싶어 의심이 섞인 눈을 가늘게 뜬 에드워드가 이번에야말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마를 마주한 채 케일리를 가늠했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능력을 숙지하고 일부러 생각을 덜 하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희미한 냄새만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놈은 이 상황을 푹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확실히 재밌어하고 있었다. 평소의 무심한 냄새와는 다른 유쾌함이 코끝을 간질였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 난 오히려 널 싫어하게 된 것 같아. 왜, 니들이 그랬잖아.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그 정도면 착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종이 한 장이라잖아. 착각할 만도 하지.”

에드워드가 낮게 깔린 진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당연하게도, 헛소리였다. 차라리 싫어하는 거라면 속 편하게 싫어했을 테다. 안타깝게도 건방지게 남의 감정을 좌우하려 드는 케일리의 뻔뻔한 작태를 앞에 하고도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고, 거기에 대고 누가 널 좋아하냐고 비웃을 수 없다는 점도 배알이 틀렸지만 그건 타고난 성격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껏 누굴 좋아해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런 걸 착각할 만큼 에드워드는 멍청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케일리마저 눈치챈 감정인데 그걸 착각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래도 에드워드는 우겨봤다.

“글쎄요. 내 감정이 아니니까 모르겠는데, 에디가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 아닌가요? 좋아하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한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일방적인 감정은 대부분 끝이 별로잖아요.”

안타깝게도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현실도피를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눈앞에 있는 푸른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는 것처럼 명쾌한 시선을 보내며 단정지었다. 그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짜증스러우리만치 맞는 말만 지껄였다.

“지금 그 말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네놈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을 망쳐주겠다고 하는 것 같아서 찝찝한 구석이 있어. 이건 내 기분 탓이겠지?”

“에디도 참. 내가 그렇게 부지런할 리가 없잖아요?”

“그런 말을 듣고 납득하는 내가 싫어지려고 해.”

“기왕이면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게 좋죠. 에디는 오래 살아야 하잖아요.”

“꼭 생각해주는 것처럼 말하고 있네.”

“생각을 아예 안 하지는 않아요. 좀 덜 하기는 해도. 게다가 에디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서 제일 많이 하고 있을걸요.”

“입에 침이나 바르시지?”

결국 평소와 다름없는 입씨름으로 끝난 대화에 에드워드가 침대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붙잡고 있던 케일리의 머리는 그대로 움켜쥔 채였다. 졸지에 함께 넘어간 케일리가 침대와 에드워드의 사이에 고기 패티마냥 끼여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무거운데…….”

아직 물기가 남은 정수리에 코를 비비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말했다. 대화를 하다 말고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사람을 깔고 엎드린 에드워드를 향해 다이어트를 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케일리의 입장에서는 배려를 한 셈이었다. 그 말에도 에드워드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제 정수리에 얼굴을 묻은 남자를 주욱 밀어냈다.

무거우니 떨어지라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에드워드의 얼굴을 밀어내는 건 그 답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거절이라는 걸 모를 것만 같던 케일리였으니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 너 내 피 마셨잖아.”

순순히 떨어져나가면서도 그렇게 투덜거리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말했다.

“맞아요. 바로 그거 때문에 이렇게 붙어 있는 게 곤란한 거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미간을 좁힌 순간,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에드워드는 오래간만에 몸이 제 의지를 반하고 한 바퀴를 빙그르 도는 기이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뭔가 벌어진다는 낌새를 느낄 틈도 없이 다가온 손이 팔뚝을 우악스레 움켜쥐었고, 바로 다음 순간 몸이 뒤집혔다. 그러고는 이 모양 이 꼴이다.

노골적인 자세로 자신의 허리에 올라탄 케일리를 침대 위에 누워 올려다보던 에드워드가 별안간 픽 웃었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말은 이럴 때 쓰기에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침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케일리의 성기가 모양을 갖추고 불뚝 일어선 건 굳이 원인을 따질 필요도 없이 피의 영향이었다. 케일리에게 욕구가 없으리라는 것도 어차피 선입견에서 비롯한 추측에 불과했고, 그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건 없었다. 없었는데.

“너희 세계에서는 말이야, 이런 걸 두고 추행이라고 부르지 않아?”

저를 좋아하지도 말라, 좋아하면 곤란하다, 아직 고백도 못한 뱀파이어를 환장하게 만드는 헛소리만 늘어놓은 주제에 이건 또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 꼴은 마치 멍청한지 똑똑한지 헷갈리는 케일리 녀석이 자신을 덮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확실히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 경우, 책임 소재를 따지고 들어가면 에디가 더 죄질이 나쁘지 않을까요?”

나한테 약 먹이고 모른 척했잖아요.

주욱 부드러운 동작으로 뻗어온 손이 이마 위에 흩어진 화려한 금발을 쓸어 넘기며 그렇게 말했다.

손가락 끝에 엉키는 금빛 실타래가 간지러워 눈꼬리를 파르르 떤 케일리가 힐끗 자신을 올려다보는 파란 눈동자를 쳐다봤다. 황당하다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빛이었다. 손을 대면 보석처럼 서늘한 감촉이 느껴질 것 같았지만 아마도 아파할 테다.

아주 잠깐 고민한 케일리는 아쉬운 기색 없이 손을 뗐다. 타인의 눈을 만지는 건 실례다. 상대가 뱀파이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꼭 상식인 같은 생각을 하는 것치고 케일리의 행동은 결코 상식의 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뱀파이어인 에드워드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확실히 침실에 들어오기 전과 비교하면 욕망이 짙어진 눈을 마주한 그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순수한, 물론 성욕이라는 단어와 순수라는 수식어가 얼마나 어울리는지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케일리의 시선이 담은 것은 대단히 순수한 욕정이었다.

그러니까, 그것뿐이었다.

그 안에 무언가 따듯하고 다정한 인간적인 감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상대하는 게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라고 했다면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터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아주 참을성 있는 뱀파이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지만, 새로운 생각이 한 가지 덧붙여지기는 했다. 자신이 참을성 있는 뱀파이어라면, 케일리는 아주 참을성 있는 인간이었다.

점점 짙어지는 욕정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더라면 에드워드는 그가 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했을 테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케일리는 그저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에드워드의 머릿속 한구석에 묘한 납득이 스쳤다. 사실 뱀파이어의 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이라는 게 훨씬 믿기 어려웠다. 그러니 자신을 찍어 누른 케일리의 행동 자체는 놀라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놀라운 건, 그가 발정 난 짐승처럼 굴지 않는다는 부분에 있었다.

최음제의 역할을 하는 순혈의 피도 저놈에게는 듣지 않는 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참이었는데, 그냥 참고 있던 것뿐이었다니. 정말이지, 인간다운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녀석다웠다.

마치 올바른 절차를 밟아 나가듯 허리를 숙인 케일리가 가만히 입술을 마주 댔다. 에드워드는 굳이 피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응하지도 않았다.

몇 번인가 에드워드의 입술에다 쪼듯 입맞춤을 내린 케일리는 상대방의 입술이 열릴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작은 한숨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듯 열린 에드워드의 입안을 가르고 들어간 혀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고개를 모로 비틀며 깊게 파고드는가 싶더니, 솔직하게 얽어 오는 뜨거운 살덩이의 감촉에 손가락 끝이 움칠거렸다. 저도 모르게 케일리의 머리를 감싸 쥐려 든 손이 허공에 멈췄다.

멈춘 자세 그대로 주먹을 꽉 움켜쥔 에드워드는 어째서 뱀파이어인 자신이 인간 같은 고민을 해야 하는지 조금 우울해졌다. 이 경우 모럴을 떠올려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케일리 쪽이다. 물론 에드워드가 저어하는 것도 딱히 이 행위에 모럴이 없다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우울했다.

공을 들인 키스에도 별달리 반응을 돌려주지 않는 에드워드의 뺨을 케일리의 손이 가볍게 감쌌다. 양 뺨을 감싸는 따듯한 손길에 에드워드는 기분이 묘해졌다.

인간이고 뱀파이어고 사내자식은 이래서 안 된다.

허리 밑에서 그러라고 하면 이성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무시했다. 자신이라고 해서 다를 바도 없는 주제에, 욕망에 무너져 내린 케일리를 에드워드가 비난하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을 눈치챈 케일리는 단 사탕이라도 되는 양 에드워드의 혀를 몇 번인가 빨아 올린 후에야 입술을 떼어냈다. 이 와중에도 단정한 얼굴에선 핏기가 몰린 입술만이 붉게 부각되었다. 물기 어린 입매에 선한 웃음이 맺혔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기만 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말했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나 봐요?”

그 물음을 에드워드가 단칼에 잘랐다.

“아니야. 난 오히려 네가 하자고 매달려도 거절할 생각이었다고.”

“어째서요? 나랑 하기 싫어요?”

“아니.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는 해. 물론 너한테 그런 섬세한 배려를 바라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네가 괴로워하는 걸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그래도 원래 의도는 다른 거였다고.”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케일리가 이해하리라는 환상은 품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까지를 되짚어도 놈과의 대화는 캐치볼보다는 스쿼시였다. 서로 죽자고 공만 던졌는데 이제 와서 받아쳐줄 거라는 착각을 가지는 게 더 대단했다. 에드워드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시간이 무언가를 해결해준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알았다.

예를 들면, 케일리가 바뀌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저 빌어먹을 놈에게 적응할 수는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원래 의도?”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말을 반복하는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가만히 상체를 일으켰다. 에드워드의 배를 깔고 앉아 있던 케일리가 움칠, 엉덩이를 물렸다. 맞닿은 피부는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되돌렸다. 그것을 모른 척한 채 에드워드가 말을 계속했다.

“보험. 네가 뭐라고 하든 이미 움직인 감정을 회수할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난 내 나름대로 내가 좋아하는 걸 지켜야 하지 않겠어?”

어떤 면에서 에드워드는 케일리와 비슷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섹스 한 번을 가지고 특별한 관계가 됐다고 착각할 만큼 순박한 시골 청년 같은 뇌 구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그러했다.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는 한번 섹스한 정도로 인간과 연인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쪽이 훨씬 정신상태가 의심된다.

뱀파이어에게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가장 비슷한 건 순혈끼리 아이를 만드는 것 정도다. 그것도 두 사람의 유전자가 섞인 사랑스러운 2세라기보다는, 공을 들여 만든 공동작품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에드워드뿐만 아니라 순혈 뱀파이어는 누구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이 없는 상대를 대할 때의 이야기였다.

“늑대 놈의 똘마니들이 리퍼에, 정황상 윗대가리일 늑대새끼까지 제대로 들쑤셔놨으니 내일부터는 일이 재밌어지지 않겠어? 그러니까 네가 한두 대 얻어맞고 나자빠지지 않도록 스물네 시간 정도는 보험을 들어놓은 거라는 뜻이다.”

결국 속내를 털어놓은 에드워드는 입맛이 썼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은 손해만 보는 꼴이었다. 솔직히 털어놔도 케일리를 좋아한다는 걸 광고하는 꼴이 됐고, 섹스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저 좋자고 저지른 일도 아닌데 말이었다.

“아…….”

납득했다는 양 작게 탄성을 내뱉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첨언했다.

“그러니까 널 데리고 디즈니랜드에 입장하기 전에 안전장치를 해놓은 것뿐이라고. 어린이들은 유모차에 잘 태워서 데리고 다녀야지, 자칫 잘못해서 길이라도 잃고 어린애 혼자 스페이스 마운틴에 올라타면 큰일이잖아.”

졸지에 유모차에서 떨어져 미아가 돼 스페이스 마운틴에 올라탄 가련한 어린이가 된 케일리는 사실 그가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듣지 못한 상태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유원지에 가본 적이 없는 그는 회전목마를 대신해 서러브레드 경주마를 저택의 마구간에서 길렀으며, 인형을 따는 사격게임이 아니라 메달과 명예를 따내는 사격 선수권에 나가는 삶을 살아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어찌됐건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케일리가 짧게 사과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속도 하나는 끝내주는 인간이다. 자존심이 없거나, 아니면 오기를 부리지 않아도 될 만큼 교육을 잘 받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케일리의 경우 어느 쪽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너 말이다, 머릿속에 그레이 존이라는 게 없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케일리의 사고방식에 몇 번이나 데였던 에드워드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한숨을 섞어 말했다. 변화구가 없다는 이야기와 어느 정도 상통하는 그 말에,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레드 존은 있는데요.”

농담이라는 건 알겠는데, 살짝 소름이 끼치는 건 기분 탓이 아니리라.

“넌 머릿속에 무슨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같은 걸 넣고 다니기라도 하는 거냐?”

“존(John)말고 존(Zone)이요.”

“알고 있어.”

“하하, 재밌네요.”

“놀리냐?”

“그럴 리가요.”

싱거운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도 케일리로부터 시작된 욕정의 냄새는 옅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순도 높은 욕정을 맡아보는 건 처음이었고, 사실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에드워드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보통 자아를 가진 생물의 감정은 단 한 가지로 증류되지 않았다. 불순물이 섞이는 게 당연했고, 그게 정상이었다. 복합적인 감정 탓에 다양한 냄새가 섞이는 것 자체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에드워드의 입장에서 케일리는 알면 알수록 이상한 생명체였다.

일단, 단일 감정으로 머리를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러했다.

에드워드가 상상했던 매달리는 케일리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지만, 남자답게 덮치고 보는 케일리라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게 그렇게 기쁜 것도 아니었다. 결국 의도한 바를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매달릴 때까지 구경할 예정이에요?”

그렇다고 대답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매달릴 것 같았다. 자존심이 없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환경에서 자란 놈이었는데, 어째서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수치 같은 걸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걸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자신이 뱀파이어인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인간들의 관점으로도 케일리가 이상한 건지 기회만 된다면 언제 한 번 날을 잡고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난 지금 하고 싶은데, 섹스.”

하고 싶기도 할 거다. 뭇 남성들의 구세주인 파란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품질의 최음제를 마신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밑천을 죄다 털어놓은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원하는 걸 옜다, 손쉽게 건네주고 싶지는 않았다. 피에 취한 거라고 해도 어쨌든 그가 자신의 육체를 원하는 건 사실이었다. 매달리라고 하면 매달리겠지. 그러니 그가 쉽게 갈 수 있는 대답은 해주지 않을 속셈이었다. 자신에게는 그 정도 심술을 부릴 자격이 있다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그럼 내가 하고 싶게 만들어봐.”

누가 사내자식 아니랄까 봐, 노골적으로 하반신을 붙이며 자신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시선을 마주한 채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케일리는 어째서 그런 대답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시선이 꼭 ‘너 나 좋아하잖아? 그런데 왜 거절해?’ 하고 묻는 것 같아 에드워드는 속이 쓰렸다. 정말이지 틀린 것 하나 없는 시선이었고, 그걸 알면서 이용해먹으려 드는 놈을 좋아하게 된 스스로가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랑 하는 게 싫어요?”

확인사살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대놓고 물어보기까지 하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마음이 안 들어.”

“왜요?”

“난 오늘 너무 열심히 일했거든.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겠으니까 그럴 마음이 들게 만들면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가 냅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뱀파이어가 지쳐요?”

“난 빈혈 있는 뱀파이어잖아. 원래 이상한 뱀파이어니까 만성 피로도 느끼나 보지.”

“……심술쟁이네요.”

노골적으로 성가셔하는 숨을 내뱉은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심술이나 부려야지, 싶었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궂은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렇게 귀여운 별명을 붙이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될 텐데?”

접어줄 것 같지 않은 에드워드의 태도에 케일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할 마음이 들게 만든다는 건 정확히 어떤 거예요?”

“글쎄, 자위 쇼라도 해보든지?”

“그걸 하고 나면 내가 넣게 해줄 거예요?”

“……음?”

에드워드는 무언가 굉장히 이상한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별로 들어본 적도 없었고, 그런 걸 요구하는 멍청이가 있었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듣는 요구였다. 그런데 지나치게 당당했다. 그래서 잠깐 고민했다.

내 귀가 잘못된 걸까.

하지만 에드워드는 오늘 자신의 귀가 한 번도 틀린 말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친절하게도 케일리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넣게 해줄 거냐고요. 이런 건 합의가 중요하니까 미리 확인해두려고요. 에디도 나한테 했잖아요? 공평하게 이번에는 내가 할 차례 아니에요?”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아가……, 세상이라는 게 그렇게 공평하지는 않단다.”

탄식하듯 내뱉은 에드워드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섞여 있었다. 뱀파이어를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인간이기는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뭐라고 말을 해야 이 인간이 납득을 할지 고민하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불만스레 물었다.

“어째서요?”

“평등이니 공평함 같은 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건 정말로 머리가 나빠서 착각하고 외치는 놈들이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갈망하는 가엾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나한테 이유를 물어봐도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세상인 걸 어떻게 하겠어.”

“하지만 이건 평등함의 문제가 아닌데요. 오히려 불공평함의 문제죠.”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했다고 너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불공평하게 생겨먹은 걸 공평함으로 비틀 수는 없는 거야. 원래 불공평한 거잖아? 넌 네가 케일리인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내일부터 데일리가 될 수 있어? 아니지? 그거랑 같은 거야.”

물론 개소리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넌 그냥 대주기 싫은 것뿐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할 문제였으나, 케일리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양 입을 벌리고 납득한 얼굴을 했다. 가끔 지나치게 상식 밖에서 반응을 하니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간단히 속아줄 때는 또 편했다.

에드워드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데 케일리가 말했다.

“그럼 난 어떡해요?”

하얀 얼굴 안에서 핏기가 도는 얼굴과 붉게 물든 눈꼬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에드워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점점 날카로워지는 케일리의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게 정확히 뭔데? 나랑 섹스가 하고 싶어? 아니면 나한테 박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에디가 하는 말은 내가 저번처럼 박히는 걸 한다면 해줄 수도 있다는 뜻이죠?”

“이야기가 빠른 건 다행이네.”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무심코 손을 뻗은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어깨를 움칠한 케일리가 어딘지 불만이 남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런데 왜 나는 되고, 에디는 안 되는 거예요?”

어딘지 미련이 남은 불퉁한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연히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명을 요구당하면 그럴듯하게 되돌릴 말이 없었다.

“글쎄? 지금까지 한 번도 박혀본 적이 없는데, 앞으로도 그러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서가 아닐까.”

“도전정신이 부족하네요.”

“걱정 마, 내가 오래 살아봐서 하는 말인데 그런 쓸데없는 정신은 없는 게 더 나을 때가 많으니까 말이야.”

“알았어요. 난 그렇게 사소한 데 신경 안 쓰니까 그거라도 상관없는데, 그럼 우리 합의된 거죠?”

그렇게 말하니 마치 자신이 사소한 데 집착하는 좀스러운 놈팡이가 된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엉덩이의 평화를 지켜냈다는 사실은 긍정적이었다.

결국 자위 쇼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에드워드는 자신이 결국 케일리의 페이스에 홀랑 넘어갔다는 사실을 결코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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