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41)

#Mission6. Like five-stages of death 사랑이나 죽음이나 그게 그거야 (2)

나오는 길에 운 좋게 마크 그린을 만났다. 역시나 잠을 못 잔 것처럼 눈 밑이 퀭한 그는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양손에 하나씩 똑같은 캔 음료를 두 개나 쥐고 있었다. 마침 잘 만났다 싶어 어제 마세라티를 잃었으니 오늘 탈 새 차를 내놓으라고 뻔뻔하게 손을 뻗으니, 차 키가 돌아왔다. 그것이 이민국의 차가 아니라 마크의 개인재산이라는 걸 모르는 건 에드워드와 케일리뿐이었다.

덕분에 순혈 뱀파이어에 열광하는 너드 연구자가 타고 다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포르쉐 911 타르가4는 브로드웨이의 길가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채였다. 아킨시나의 촬영이 예정된 브로드웨이 옥외에는 이미 한 대의 트레일러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 스태프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 아킨시나의 오전일정은 야외촬영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거리에서는 촬영이 요원했기 때문에, 새벽시간을 노렸지만 길거리 촬영은 언제나 난관이 많았다. 케일리가 읽은 사전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오늘의 촬영은 다음 봄 시즌의 카탈로그에 싣기 위한 프레타 포르테 남성복의 사전촬영이었다.

원래 좀 더 느긋한 일정으로 움직이던 이들이 유리 아킨시나에게 맞추느라 한 시즌 빨리 봄 컬렉션을 완성시켰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는데, 시기를 생각하면 그냥 도는 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걸 보면 에드워드의 말처럼 유리 아킨시나가 자신의 직업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지 않아도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어 보이는데, 그것 참 재미있는 라이칸이었다.

실상 이종들은 관리국에 등록하기만 하면 몇 가지 간단한 협력만으로 직업을 알선 받을 수도 있었고 보조금과 거주지까지 나왔다. 러시아의 왕자라니 그런 걸 받을 필요도 없겠지만 굳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옥 같은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게 사실이다.

아직 촬영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한 에드워드와 케일리가 바람이 찬 새벽의 브로드웨이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이른 시간인 탓에 열려 있는 카페테리아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의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 중인 거리에는 묘한 생기가 있었다.

본 촬영까지 한 시간이 조금 남은 참이었다. 아킨시나도 슬슬 도착할 테니 너무 눈에 띄지 않게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행인인 척을 하며 에드워드의 곁에서 나란히 걷던 케일리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전 크툴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킨시나가 도착할 때까지는 어차피 한가했다. 게다가 데이브들의 헛소리는 시간낭비로만 여겨졌지만, 케일리의 헛소리는 들어줄 만했다.

일단 지금까지 만난 적 없는 괴상한 사고방식이 가끔 흥미롭게 느껴질 때가 있는 데다,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가 조곤하게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저가 적은 탓에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또 그렇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그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귀담아듣고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는 의식의 깨우침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에드워드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괴이한 단어를 되짚었다.

“크툴루?”

얼마 전 건네준 백과사전을 펼쳐들며 이런 게 정말로 존재하냐고 물었던 그 삽화 페이지에 올라가 있던 이종의 이름이었다.

할리우드의 괴수 영화에서 곧잘 세계를 멸망시키곤 하는 괴생물체들과 비교해도 단연 선두를 달리는 괴기스러운 삽화에 매료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고 보면 용과 크툴루의 삽화를 들이미는 케일리에게 산타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별반 이번 사건과 연관이 없는 그 생물까지 어쩌다 도달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과 다리와 날개가 달렸다고 하니까 떠오르는 게 그 정도밖에 없더라고요. 게다가 실체를 보고서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는 건 무언가 숨은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했죠. 얼굴은 못 봤다고 했으니까 혹시나 하고. 에디는 어떻게 생각해요?”

세계 정복을 원한다면 될 수 있는 한 큰 게 필요할 것 같지 않나요?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그렇지 않을까, 약간의 의문이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밤색 눈에 에드워드가 침묵했다. 크툴루의 새끼라니. 차라리 놈들이 새끼 용을 기르는 것 같다고 했으면 그래 너도 생각이라는 걸 시작했구나 대견해했을 테다.

에드워드도 크툴루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E.T.와 같이 외계생물로 분류되어 특별관리대상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게다가 그들의 영토 리예는 태평양에 있었으니 영국 이민국은 엮일 일이 적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그레이드 올드 원을 잠재운 위대한 사제 크툴루가 때 아닌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화성에 유적탐사를 떠났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가 지구에 돌아올 때까지 케일리에게는 크툴루와 조우할 가능성이 없었고, 그래서 백과사전을 들이밀었을 때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화성에서 지구까지 돌아오려면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고 인간의 일생은 턱없이 짧았다.

세계 정복을 위해 크툴루의 새끼를 키웠다가는-키운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도 않는 생명체이기는 했지만.- 정복을 하기도 전에 멸망시킬 게 뻔했다.

자신들이 쫓는 비밀조직이 지능 없는 아메바로만 구성됐다고 해도, 저들 사는 세상을 지옥행 급행열차에 태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에드워드는 생각했다.

차라리 놈들이 인간이었다면 IS와 같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뛰어든다고 가정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종은 아니다.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인간들에 비해 본능이 중요한 이종들은 자신들의 생태계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걔들이 본 건 작았다잖아.”

네 생각은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는 걸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끝없이 거대한 무언가로 묘사되는 크툴루의 크기를 들어 아주 간단히 그의 논지를 파훼했다. 본인도 진지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덧붙였다.

“게다가 넌 그 그림을 보고 새가 생각이 나?”

“그림이라면 날개 달린 문어 인간 같기는 했죠.”

“그런데?”

“펭귄도 날개가 있으니 새잖아요. 게다가 바다에서 살고, 크툴루랑 비슷하지 않아요?”

“알겠어, 넌 일단 남극에 가서 펭귄한테 사과부터 하고 와.”

신랄하게 돌아온 에드워드의 타박에도 케일리는 별반 풀이 죽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눈에는 펭귄이나 크툴루나 비슷한 바다생물이었는데, 에드워드에게는 아닌가 보다 하는 게 다였다.

어찌됐건 자신이 엮인 일이다 보니 완전히 관심을 끄기도 어려웠던 터라 케일리 또한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보기는 했다. 요전 읽었던 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단 날개를 가진 이종의 수가 적었으니 데이브들이 본 것의 정체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또한 정체는 아킨시나를 붙잡고 물어보기로 결론을 내린 뒤라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케일리의 관심은 괴생물의 정체가 아니라 비밀조직의 목적에 있었다.

인간을 도륙해 키워낸 이종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애완동물처럼 사랑스러워서 먹고 싶다는 걸 구해다 먹여주며 고이 키우는 건 아닐 것 같았다. 그러기에 인간의 내장은 지나치게 리스크가 컸다. 그렇다면 무언가 원하는 게 있어서 먹여 살리고 있다는 뜻일 텐데, 데이브의 말처럼 세계 정복이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목적이 아니라면 사실 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세계를 지배하려면 공포가 필요하잖아요. 날개 달린 것 중에 별로 공포스럽거나, 힘 있는 이종은 없던데요. 적어도 요정을 가지고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을 테니까, 결국 에디가 말했던 것처럼 추측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는 하네요.”

저도 인간이라고, 이종에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는 게 요정에게만 호의를 보이는 게 아니꼬웠다. 뱀파이어와 요정의 사이는 오히려 좋은 편이었고, 실제로도 많은 순혈 가문에서 요정과 협력관계를 맺고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의 삶에서 겪었던 몇몇 유별난 요정의 경험으로 그들 종족에 대단한 편견을 지닌 뱀파이어였다. 케일리의 요정 우호론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넌 요정에 대해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어. 네가 내 집에서 본 요리하는 마피아도 요정이었다고. 또 심심하면 가루를 뿌려대는 인사부장, 걔도 요정이지. 게다가 공포를 원한다면 핵미사일 쏘아 날릴 버튼 하나면 충분한데 뭐하러 크툴루같이 위험한 데 손을 대겠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꼬마 놈이 오는지나 감시 하……어?”

그때였다. 케일리를 향해 비틀린 상식을 주입하는 동시에 어느 차에 아킨시나가 타고 있을지 꼼꼼히 살피기나 하라고 설교하던 에드워드가 말을 멈췄다.

끝이 올라간 말꼬리는 그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대단히 묘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목표물인 유리 아킨시나였다. 게다가 이미 근처를 몇 바퀴나 돌았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뿐, 그가 타고 있는 차는 케일리와 에드워드가 도착하기 전부터 줄곧 그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그들이 먼저 도착해 있던 아킨시나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일주일 내도록 타고 다니던 차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킨시나는 새빨간 페라리가 아니라 거무튀튀한 부가티 안에 있었다.

그냥 부가티도 아니고, 유려한 곡선의 차체가 인상적인 부가티 베이론이었다. 어제 처박힌 페라리의 다섯 배가 넘는 가격의 한정수량 슈퍼카를 하루 만에 공수해 온 걸 보면, 페라리를 탔을 때 사정없이 꼴아박힌 게 어지간히 자존심 상했던 모양이었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그 안에 있는 게 아킨시나라는 건 확실했다. 저렇게 화려한 은발이 흔한 것도 아니었고, 뒷좌석에 구겨 넣은 것 같은 체구도 눈에 띄었다.

아직 촬영 시작까지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의 직업생명을 두고 협박과 회유를 하려던 에드워드와 케일리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앞좌석에는 리퍼 중 하나인 스타일리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조수석에 탄 그녀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고 뒷모습밖에 보이지 앉았다. 늘 운전대를 잡던 매니저는 없었다.

몰래 다가가는 것까지도 아니지만, 에드워드와 케일리는 대화를 중단하고 부가티에 접근했다. 10미터, 5미터……그렇게 몇 발짝을 남기지 않았을 때,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아킨시나의 피로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킨시나는 뒷좌석 시트에 등을 기댄 채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차 사고와 함께 아킨시나들을 방치하고 튀었으니 잠을 잘 시간이 없었을 테지. 죄책감은 없었지만 곤히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떻게 깨우면 좋을까 케일리가 걸음을 늦추며 차창이라도 두드려볼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바로 옆에서 팔을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얼떨결에 딸려간 케일리가 그대로 부가티를 지나쳤다. 예상할 것도 없이 범인은 에드워드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커다란 손이 다가와 머리를 쥐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아니, 머리가 아니라 귀인 것 같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두 손이 귀를 막았다는 걸 깨달은 이유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무어라 대답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독순술을 하는 재주가 없는 케일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알아듣기 위해 제 귀를 막은 에드워드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같은 순간, 갑자기 잔뜩 인상을 찌푸린 에드워드가 바로 옆에 있던 건물과 건물 틈의 좁은 골목으로 케일리를 밀어 넣었다. 별안간 밀쳐져 어둡고 좁은 골목에 몸을 끼워 넣은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마치 거리와 케일리를 차단하듯 골목의 입구에 선 에드워드가 그제야 손을 거두어들였다.

어안이 벙벙한 케일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에드워드가 잔뜩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 원, 재수 없는 저주 같은 거라도 걸린 건가? 요즘 이상하게 보고 싶지도 않은 멸종위기생물이랑 너무 자주 마주치고 있다고. 얼른 이 빌어먹을 섬을 빨리 뜨든가 해야지, 나 혼자라면 모를까 뭐 하나 달고 다니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아.”

그것 참 뜬금없는 불평에 케일리가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에디? 나 몰래 벼락이라도 맞았어요?”

제정신을 의심하는 밤색 시선을 어이없다는 듯 내려다본 에드워드가 방금 지나온 부가티를 턱짓 했다.

“저 여자, 세이렌이야.”

“그, 바다에 사는 요정 말인가요?”

이종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지만, 신화는 아니었다. 특히 문학 작품에서 자주 인용되는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한다는 매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나고 자란 환경 덕분에 문화를 향유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던 케일리는 그녀들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비롯해,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예술품을 손가락만으로는 다 셀 수 없을 만큼 알고 있었다.

두어 달의 시간 동안 접한 이종들 중 가장 와 닿는 세이렌이 실존했던 것뿐만 아니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니. 세이렌 목격담이라면 몇 년에 한 번 있는 동창회에서 그네들의 재미없는 인생사를 듣지 않고도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빛내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말했다.

“요정이라기보다는 비린내 나는 생선 마녀지.”

“생선 마……, 여섯 살 먹은 조카에게 산타는 없다고 역설하는 도킨스 같은 짓이에요, 그거.”

지나가다 종교인을 발견하면 멱살부터 잡고 보는 걸로 유명한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의 이름에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혔다. 뱀파이어다 보니 종교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생각되기 쉬웠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순혈 뱀파이어 중에서는 유수의 명문가인 애쉬포드 가문만 해도 로저를 필두로 한 대부분의 성공회 교도였다. 물론 그가 종교를 믿는다거나 거기서 어떤 안위를 얻는 건 아니었지만, 제법 성실히 종교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도킨스보다는 훨씬 그들을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중세에만 해도 실제로 이단으로 분류되어 마녀사냥을 당했던 것은 대부분 인간이었고, 종교의 편에 서서 실권을 장악했던 쪽에 뱀파이어가 있었다. 물론 인간들이야 그런 실상은 알 도리가 없겠지만 에드워드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동족들의 권익보다는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자신의 바운더리에 집어넣을 생각이 없는 에드워드가 흥미로워하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인 도킨스는 말 그대로 무신론적 성향의 진화 깡패론자나 다름없었다.

말인즉슨, 진화론을 옹호하는 종교인이라고 해도 그의 앞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으며, 창조론을 들이미는 종교인은 그야말로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하게도 도킨스의 샌드백에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파생된 모든 종교뿐만이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야말로 모든 신앙이 포함되었다.

에드워드는 도킨스가 인생을 낭비하고 다니는 트위터의 존재를 알고는 있어도 해본 적은 없었고,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 에드워드로서는 그가 집필한 저서 몇 가지를 읽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도킨스의 전투력이 얼마나 흉흉한지 알 길이 없었다.

케일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산타니 뭐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말에 에드워드는 “걔가 그런 짓도 했어?” 하고 다소 황당한 어투로 물었고 “정말 끔찍한 동심파괴 행위였죠.”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온 대답에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진지한 얼굴로 도킨스를 비난하는 케일리야말로 다섯 살 때든, 여섯 살 때든 산타 같은 건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계산을 정리해 보일 것 같은 얄미운 녀석이었다. 그 입에서 동심이라는 말이 나오니 웃음이 나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에디, 교회 싫어해요?”

산타는 크리스마스의 부산물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생일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그것들의 관계를 떠올리면 그런 물음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겪어온 에드워드의 태도에서 예상하건대 케일리는 뱀파이어인 그가 인간의 창조물이나 다름없는 종교라는 개념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생각하며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상당히 의외로운 것이었다.

“난 종교에는 불만 없어. 싫어할 만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굳이 불만이 있다면 종교보다는 그걸 설파하고 다니는 인간들에게 있다는 의견을 명확히 하기 위해 에드워드가 첨언했다.

“신으로부터의 말을 과대해석해서 일을 망치는 저급 예언자가 언제나 문제지.”

의외로 본질을 꿰고 있는 그 말에는 케일리도 동의했다.

“어쨌든, 세이렌의 노래는 위험하니까 조심해야 해.”

이야기를 원래 궤도로 돌려놓은 에드워드가 힐끗 등 뒤의 부가티를 쳐다봤다.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뱀파이어의 청력을 얕보지 마. 그만큼 작은 소리였고, 저 여자가 밀폐된 공간 안에서 노래했기 때문에 무사한 것뿐이야. 녀석들의 마법의 영향력은 소리의 전달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 점은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군.”

매년 받는 건강검진에서 여전히 십 대 때와 같은 건강한 청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결과를 받아온 케일리가 다소 불만 어린 표정을 했지만 에드워드는 단호했다.

“넌 가까이 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잘못해서 세이렌의 사정권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귀찮아져.”

“노래를 들으면 잠에 빠지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하면 마녀라고 불리지도 않았을걸. 아킨시나가 잠에 빠진 것도 좀 이상해. 역시 추측했던 대로 한편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건데, 그러면 세이렌과 강시는 아킨시나와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 될 테니 일이 귀찮아지게 생겼어.”

유리 아킨시나가 유럽으로부터 이어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과 동행하면서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한 이유도 명확해졌다. 그는 자신의 피고용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러 다닐 때마다 세이렌의 최면에 걸려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럼 어떡해요?”

아킨시나는 뒷좌석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자고 있었고 앞좌석에는 세이렌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케일리는 전투요원으로는 쓸 만했지만 마법이나 술법과 같은 것에는 대항하기 어려웠다. 그리 긴 생각도 필요 없이, 간단히 판단을 내린 에드워드가 말했다.

“내가 먼저 가서 세이렌을 생포할 테니, 신호를 보내면 달려와. 꼭 뛰어와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걸어와도 상관없고. 세이렌의 노래는 일종의 최면이기 때문에 잠에서 깨우듯 흔들어 깨울 수는 없어. 노래에 걸린 최면시간이 전부 흐르면 저절로 깨어나겠지만, 그걸 기다리는 건 시간낭비지. 그러니 저 여자를 잡아놓고 아킨시나를 깨우도록 설득할 생각이야.”

에드워드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설득이 꼭 협박처럼 들렸다. 아마 크게 틀린 가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케일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자신은 이 상황에서 짐밖에 되지 않았다. 굳이 함께 뛰어들 정도로 열정적인 일 중독자도 아니었으므로 에드워드의 계획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세이렌의 노래를 통해서 최면이 걸린다면, 난 귀를 막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귀를 막으면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텐데 어떻게 하나요?”

“그것도 그렇군. 그냥 여기서 기다려. 내가 데리러 올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고. 어제처럼 사탕 준다고 아무나 쫄래쫄래 따라가면 안 돼.”

“저 아킨시나 씨한테 사탕 못 받았는데요.”

“그래, 잘했어. 앞으로도 걔한테 아무것도 받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얼굴에는 어딘지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심지어는 손을 뻗어 남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헤집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털을 좋아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보다는 그냥 머리카락을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인간들에게는 머리를 만지기는커녕 자신의 옷에 털이 묻었다며 불쾌한 얼굴을 하는 주제에 정말이지 차별대우가 심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애를 당하는 입장에서 불평을 하는 것도 영 모양이 이상했다. 또 에드워드가 머리를 만지는 것 자체가 불쾌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원래 인간이 아닌 데다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걸 케일리 또한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어린애를 대하듯 하는 거라면 알아챘을 테다. 자신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본인이 먼저 깨닫고 그만뒀겠지.

그는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어서, 자신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일을 강제로 시키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면 대신 해주기도 했다. 가까운 예를 찾아보면 어젯밤만 해도 그랬다. 식사를 챙기고 잠자리를 준비하고 찝찝한 몸을 닦아주는 것까지 모조리 그의 손이 대신했다.

에드워드는 성격이 비틀린 편이었지만, 악한은 아니었다. 게다가 못하는 게 없었다. 같이 있으면 편했다. 이 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게 대부분 에드워드라는 건 굳이 계산해볼 필요도 없다.

이쪽에서 청한 게 아니더라도, 이렇게 받기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울이 망가지기 마련이었다. 케일리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친절하게 충고까지 건넸다.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자신의 충고는 더 이상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한쪽이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유지할 수 있는지까지는 케일리도 몰랐다.

그가 빨리 자신에게 질리면 좋으련만.

머릿속 한켠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그와 멀어질 위험도 없다.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감정이 사라졌으면 바라는 생각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그게 케일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능지수가 높다는 것은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케일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조차 이성과 논리로 분류해 무게를 매겨 득과 실을 계산하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에드워드의 존재를 잘못 정의한 데 대해 반기를 들 감성이 없었다.

평범한 파트너의 관계로, 혹은 피를 제공하고 함께 있을 자격을 얻는 정도에서 만족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 있을 텐데.

아귀가 어긋난 결론과 함께,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하루가 다르게 다정해지기만 하는 그의 태도를 가만히 받아들인 케일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바가 없이, 에드워드는 몇 번인가 헤집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손을 거두어들였다.

산업혁명 말기에 태어났다는 에드워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아직 한참 어린 게 맞겠지만서도, 이렇게 몇 번이나 제 앞가림 못하는 어린애 취급을 받는 건 기분이 묘했다. 지금에 와서는 부모님이 다 뭔가, 조부모조차 자신을 에드워드처럼 대하지는 않았다.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지나간 손가락의 감촉이 두피에 남았다. 저도 모르게 제 머리카락을 슥슥 정리한 케일리가 무어라 대답을 돌리기도 전에, 씩 한번 웃어 보인 에드워드가 등을 돌려 홀로 부가티를 향해 달려갔다.

◇ ◆ ◇

에드워드는 이번 일을 빨리 끝내고 런던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뉴욕 지부에서 직접 차를 몰고 나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놈들에게 맡겨놨다가는 겨울이 다 가도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테고, 그러면 자신은 꼼짝없이 뉴욕에 묶이게 된다. 자신과 케일리는 세트였고 그건 나쁘지 않았지만 장소가 뉴욕이라는 건 싫었다.

뱀파이어들이 미국을 싫어하는 건 이곳이 이종뿐만 아니라 정신 나간 인간들이 모여드는 재수 없는 땅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뉴욕은 정도가 심했다. 특히 맨해튼은 꼭 지구상에서 정제하고 정제한 정신병자들만 모아서 만든 섬 같았다. 스콜세지가 셔터 아일랜드를 찍을 때 맨해튼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이유를 언젠가는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부가티의 조수석을 노크한 순간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건 본능의 경고였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말이 없었지만, 에드워드는 스스로의 본능을 믿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일주일간 말수가 적고 순한 얼굴을 하고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표독스럽게 변해 자신을 노려봤다. 바지런히 움직이던 그녀의 입술이 앙다물렸고, 힐끔 뒷좌석의 아킨시나를 확인했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듯 아킨시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처럼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나왔다.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마치 자신에게는 세이렌의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한테 뭘 원하는 거죠?”

세이렌은 모든 게 들통 났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알아도, 본인이 리퍼란 걸 들켰다는 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일 테지. 그렇다면 아킨시나와의 관계가 애매해졌다. 세이렌처럼 약한 이종이 뱀파이어를 알아보는 건 어렵다. 아킨시나의 귀띔이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쎄, 네가 나한테 뭘 줄 수 있는지에 따라 달렸겠지.”

세이렌은 제대로 된 패를 잡고 있는 것처럼 블러핑을 시도했다. 에드워드는 일단 속아 넘어가주기로 했다.

“유리에게 용건이 있는 거라면, 정식으로 오퍼를 넣어주세요.”

“유리 아킨시나라면 회사에서는 언제든지 대환영이지. 하지만 오늘은 일 때문에 찾은 게 아니야.”

“어째서 당신 같은 자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유리는 이번이 첫 외출인 어린아이입니다. 당신같이 위험한 뱀파이어와 엮일 만한 일은 하지 않았어요.”

마치 자신이 그에게 해를 끼칠 것처럼 구는 세이렌이 어이없는 한편, 에드워드를 거슬리게 만드는 태도가 하나 더 있었다. 여차하면 무력충돌도 감수할 생각이었던 에드워드가 곧장 물음을 던졌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그의 기억에 세이렌과 인맥을 쌓은 과거는 없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이상했다. 세이렌은 허를 찔린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지만,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알아야 하는 만큼은.”

어딘지 겁에 질린 것 같으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는 세이렌에 에드워드가 놀랍다는 양 과장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의문을 표하듯 모로 기울어진 시선 속에서 세이렌은 그의 심기가 그다지 편치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 그리고 그냥 뱀파이어가 아니라 아킨시나 한 명으로는 이길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순혈일지도 모른다는 아킨시나의 추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순혈 뱀파이어씩이나 되는 자가 어째서 자신들을 쫓는단 말인가? 최근 들어 신경이 예민해진 아킨시나가 스토킹을 의심했을 때, 제일 먼저 부정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리세 페티소프 자신이었다.

그녀는 순혈 뱀파이어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알아야 할 만큼은 알았다. 그들은 라이칸을 버러지 취급했다. 순혈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라이칸이란 한때의 유희거리도 되지 않을 나약한 사냥감이었고 세이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토킹이라는 것 자체가 유리와 남자의 사이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어떻게?”

튀어나온 물음에 리사는 잠시간 침묵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의문을 담은 파란 시선이 마치 자신의 뇌를 꿰뚫어 생각을 읽을 것처럼 서늘했다. 리사는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그레고리는 언제나와 같이 유리의 스케줄에 맞춰서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자신의 임무는 유리를 완전히 재운 후 촬영시간에 맞춰 일어나도록 최면을 거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을 끝낸 후 시간에 맞춰 돌아온 자신들이 촬영 내내 현장에 있었다는 암시도 걸었다. 유리의 최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자신은 슬슬 그레고리를 쫓아 일을 하러 나서야 했다.

중요한 건 언제나 시간이었다. 잡아온 인간들이 죽기 전에 내장을 척출해 ‘그것’의 식사시간에 맞춰 대령하는 게 리사와 그레고리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같은 임무를 가지고 움직이는 팀은 뉴욕에만 넷이 있었으니 한 타임을 빼먹는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솔직하게 털어놔야 하는 이유라도……?”

떨리는 목소리가 그렇게 물었다. 최면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곤란했다. 무력으로도 이길 방법이 없었는데 지켜야 할 상대까지 있었다.

“이유가 필요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뱀파이어가 뚜둑, 기울어져 있던 목을 반대편으로 꺾었다.

아무래도 뭘 원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대방은 자신에게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곤란하기 짝이 없다.

그레고리는 유리를 짐덩어리 정도로 여겼지만 리사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새끼 늑대였던 시절부터 돌봐온 유리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그는 자신을 아버지에게 고용된 감시인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키우다시피 한 아이다. 게다가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그레고리였다고 해도 최우선 사항은 유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상부조직에서 내려온 임무는 확실히 인간 사냥과 ‘그것’의 사육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성립하게 만들어주는 배후 세력은 라이칸의 왕이었다. 그들의 조직과 대외적으로는 레드 마피아를 필두로 한 러시아 라이칸의 왕은 협력관계였다. 그러니 ‘그것’을 사육하면서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인간들의 추적을 피해 다니기 위해서는 라이칸의 권력이 필요했다.

만약 동일한 상황이었더라면 그레고리 또한 유리의 안전을 우선했을 터다. 힐끔, 완전히 잠에 빠진 아킨시나를 돌아본 리사의 손 안에서 타이밍을 잘못 잡은 휴대전화가 따르릉 따르릉 요란스레 울렸다.

“받아봐.”

어딘지 무심한 목소리를 한 뱀파이어가 리사를 향해 그렇게 권했다.

“네 동료한테서 온 걸지도 모르잖아?”

“동료……라뇨?”

“아, 혹시 그것까지 일일이 말해줘야 하는 건가? 네 자랑스러운 동료 그레고리 말이야. 면허도 없는 주제에 외과수술을 자행하는 움직이는 시체. 오늘은 먼저 가운을 입고 수술대에 서 있나 보지?”

알고 있다!

믿을 수 없게도, 뱀파이어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조리 알고 있었다. 새파란 시선이 마치 전신을 옥죄이는 것처럼 차갑게 쏘아져 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찔린 리사가 꽈악,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울렸다. 의심을 사기 전에 뭐라도 대답을 해야 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양 무지를 가장한 그녀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레고리는 유리의 아침을 사러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이에요.”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변명임에 틀림없었다.

곧장 뱀파이어의 소름 끼치게 매끄러운 입술 끄트머리에 조소가 맺혔다. 그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정말로 자신에게 원하는 정보가 있는 건지도 의문이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반 이상을 들킨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하필이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뭘까?

“난 거짓말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늘 사실만 말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만약 그랬다가는 삶이 더럽게 피곤해질 테니까.

하지만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급이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피차 들킨 걸 아는 처지에 모르는 척을 하는 건 거짓말도 뭣도 아닌 시간낭비라는 생각 안 들어?”

모양 좋은 입술 틈새로 새어나오는 것은 대부분이 맞는 말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터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좋아, 좋아. 아침이라고 했나? 이제야 좀 재밌어지려고 하는군 그래. 마침 나도 아침을 못 먹은 참이라 허기가 지는데, 같이 들면 딱 좋겠어. 거기 네 주인부터 좀 깨워보는 건 어때? 손님이 왔는데 곯아떨어져 있는 건 그쪽 나라의 예의나 뭐 그런 건가 봐?”

기분 나쁠 만큼 투명한 물색 시선이 자신의 등 뒤로 넘어갔다. 남자가 쳐다보는 곳에는 최면에 빠져 의식을 잃은 유리가 있었다. 리사가 저도 모르게 옆 걸음질을 쳤다. 뱀처럼 소름 끼치는 시선에서 유리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이었다. 그 움직임을 포착한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차, 낭패한 얼굴을 한 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소란을 피우든 유리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의 일은 망칠 수도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왔고, 지금 손에 넣은 걸 누릴 자격이 있다. 유리의 일을 망치고 싶지 않은 동시에, 그에게 왕의 음모를 까발릴 수도 없는 리사가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쯤 도착해야 할 마중이 늦는다. 그가 있으면 뱀파이어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그레고리는 뱀파이어를 상대하기에는 자신과 비등하게 쓸모가 없는 놈이다. 그 남자가 제시간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이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이봐, 레이디피쉬, 난 시간을 낭비하는 걸 싫어해. 네 시간을 낭비하는 거라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겠지만, 내 시간을 낭비하려고 든다면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어. 네가 깨우지 않는다면, 내가 깨우도록 하지.”

네 소중한 주인님을 내 손으로 깨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쪽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

브로드웨이의 과장된 연극무대의 배우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얼굴에는 가면 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사냥을 당하는 입장에 선 적이 없는 절대적인 우위를 드러내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뱀파이어를 마주한 채 리사는 그가 자신을 지칭한 이름에 뒤늦게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고. 뱀파이어는 귀가 좋거든. 너희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면 쇠로 된 갈퀴를 들고 뇌를 긁어내리는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진단 말이지. 물비린내를 암만 숨겨봤자 뭐해, 노래 한번 부르면 죄다 들통 나는걸.”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이종을 단번에 구분하는 건 어려웠다. 자신이 세이렌이라는 걸 노랫소리로 맞혔다는 그의 말에 리사는 어쩔 수 없이 숨을 삼켰다. 유리가 없었다면 모를까, 자신에게는 주어진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 남자가 마중을 나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정도가 유일한 수였다.

“유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아무리 당신이 뱀파이어라 해도 그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겁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그녀의 순한 풀색 시선이 흔들림 없이 그렇게 말했다.

“확신해?”

출처가 불분명한 단호함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눈으로 웃으며 힐끗 뒷좌석에 시선을 던진 에드워드가 가볍게 되물었다. 그런 남자를 마주한 채 꿀꺽 침을 삼킨 리사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라는 바는 아니겠지만, 유리의 정체를 밝히는 게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판단이었다.

“아무리 당신이 뱀파이어라고 해도, 드미트리의 아이에게 손을 대 얼음 대지의 왕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라이칸은 이종 중에서는 수명이 짧은 편이었지만, 개체의 차이가 커 평균수명을 세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몇 세대에 걸쳐 러시안 라이칸의 왕으로 군림해온 드미트리 아킨시나의 이름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강한 라이칸이었기 때문에 약하게 태어난 새끼를 탐탁찮게 여긴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새끼가 다른 이종에게 사냥당하는 걸 내버려둘 위인은 아니다.

이미 그의 출신을 알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그 고귀한 신분의 왕자님과 엮여도 뒤지지 않을 만한 신분이라는 이유 하나로 먼 길 뉴욕까지 날아온 에드워드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 대지의 왕이라……. 레이디피쉬, 네 말이 맞아. 난 그 노친네와 척을 지고 싶은 건 아니야. 아무리 나라도 드미트리를 잘못 건드리면 삶이 다소 성가셔지기는 할 테니까. 잠깐 도망다녀야 할 수도 있고, 정면으로 충돌해도 확실히 일이 귀찮아지겠지.”

다행히도 그는 드미트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외견으로는 뱀파이어의 나이를 예측할 수 없었지만 대부분이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건 리사도 알았다. 다섯 세기를 넘게 살아온 드미트리는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유명인사였다.

그것보다도 지금 중요한 건 저 뱀파이어가 어떻게 인간 사냥에 관한 정보를 손에 넣었느냐였다. 설마 이쪽의 계획이 모조리 들통 난 걸까?

하지만 그건 이상했다. 다른 이종이라면 모를까, 뱀파이어가 자신들의 계획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지구의 이종족 중 타 종족에 대해 가장 배타적인 것이 뱀파이어였다. 다른 종과 일절 교류하지 않는 그 오만한 족속들은 대부분이 유럽 대륙에 처박혀 은퇴한 늙은이처럼 살고 있는 별종이다. 이민국에 등록되지 않은 뱀파이어들을 잡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며, 등록되어 있는 뱀파이어라고 해서 관리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점은 그들이 불사신이라는 것이었다. 뱀파이어, 특히 순혈 뱀파이어를 죽이는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랬다.

그들이 엉덩이 무거운 소수종족이 아니었더라면, 인간들 틈에 섞여 정력적으로 권력을 확장해온 라이칸과 대적할 가장 강력할 적으로 손꼽혔을 터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그들을 둘러싼 음산한 소문과는 달리 의외로 이종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희미했다. 아예 나타나지를 않으니 짧게 사는 이종들은 평생을 가도 한번 목격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종족에 대해 그러하듯, 라이칸이 뭘 하는지에 대해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저 뱀파이어가 자신을 추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유리와 함께 움직이느라 유럽의 몇 개 국가를 지나치기는 했지만 계획 자체는 뉴욕, 그중에서도 맨해튼을 중심으로 했다. ‘그것’ 또한 알에서 깨어난 이후 줄곧 맨해튼의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유럽에서 죽은 인간들은 내장을 척출하기 위해 잡은 게 아니라,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말려들어 개죽음을 당한 것뿐이었다.

심지어는 어차피 죽은 김에 썩은 고기가 될 육체에서 쓸모 있는 부분을 자연에 기여하라는 요량으로 배를 갈랐던 건 리사와 그레고리가 아니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동료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나한테 물어보세요. 대신, 유리에게는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뱀파이어가 말한 일과 연관된 건 자신과 그레고리뿐이었는데, 어느 쪽도 계획의 핵심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상태였다. 유리가 촬영하는 동안 비는 시간을 이용해 계획을 돕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실질적으로 계획을 실행하는 건 조직의 중심부였고 리사가 아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자신과 그레고리가 뭘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더 이상해졌다. 저 뱀파이어가, 이번 계획에 별반 기여하지도 않은 자신들을 굳이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것 참 눈물겨운 우정이네.”

우정. 그런 것보다는 훨씬 기울어진 마음이었지만 리사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유리는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테고, 그걸 알고 있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뱀파이어가 자신을 비웃듯 쳐다보는 것도 상관없었다.

“좋아, 그럼 걘 내버려두기로 할게. 네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약속은 무효야.”

“그런……! 유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

“아, 네가 그러든가 말든가, 난 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단 두들겨 깨워놓고 좀 괴롭히고 싶은 것뿐이니까 논리로 따져봤자 아무것도 해결 안 나. 유리 유리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래. 먼저 너희가 애지중지 키우는 애완동물의 정체를 들어볼까?”

정말이지 논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억지스러운 물음에 리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대답, 대답을 해야…… 그런데 저 남자가 지금 뭐라고 했지?

“애완…… 뭐요?”

어딘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눈살을 찌푸리는 리사를 향해 에드워드가 약간의 귀찮음을 담아 대답했다.

“니들이 키우면서 뭔지 모른다는 소린 안 하겠지? 싱싱한 내장을 날라다가 고이 먹여 키우고 있는 그거 말이야.”

“그건……, 나도 몰라요.”

“좋아,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대화 즐거웠어.”

입술을 깨물고 그렇게 대답한 리사를 향해 에드워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물러날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당혹스러운 얼굴로 등을 돌린 에드워드를 바라보던 리사가 다음 순간 입을 쩍 벌리고 굳었다.

몇 발짝 멀어진 에드워드가 쿵쿵, 두어 번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아스팔트를 박차고 대번에 부가티에 달려든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라는 수식어는 바로 이런 때를 위한 것일 터다.

정말로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짧은 시간이었다. 몇 미터나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에드워드가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아킨시나가 탄 뒷좌석 문을 걷어찼다. 피와 살로 된 다리가 만들어낸 참상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페라리 다섯 대 가격의 부가티의 뒷문은 그렇게 수명을 다했다.

“지, 지, 지금 유리에게 무슨 짓을……!”

한 타이밍 늦게 경악성을 내뱉은 리사가 에드워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킨시나의 멱살을 잡아 끌어낸 그는 이미 한 손으로 드는 게 기적적일 만큼 훤칠한 덩치를 바닥에 내리꽂은 후였다. 다급히 무릎을 꿇고 메다꽂은 아킨시나를 끌어안은 리사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째서? 무지는 죄야. 넌 내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고, 그 죗값을 네가 소중히 여기는 걸로 치른 것뿐이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진 마.”

“하지만…… 정말로, 난 그게 뭔지 모르…….”

“죄야, 죄. 멍청한 것도 죄고, 무식한 것도 죄라고. 중요한 건 뭘 알고 뭘 모르느냐가 아니라,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느냐잖아.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머릿속에서는 예수도 죽이고, 부처도 죽이고, 칠십억 지구인의 후장을 따고 다니는 것도 가능할 테지. 그래도 실제로 저지르지만 않으면, 생각을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네 경우, 그걸 반대로 돌려보면 답이 쉽게 나올 거야.

뱀파이어인 주제에 하는 말만 들으면 마치 저가 성인(聖人)이라도 되는 양 교만한 태도였다.

“네가 치르지 않은 죗값을 내가 단죄하는 게 문젠가? 중요한 건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아니라,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잖아?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게 바로 시스템이라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놀리듯 흘러나오는 유려한 목소리는 기분이 더러울 정도로 부드러웠지만, 그가 신은 구두의 앞코가 툭, 툭,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걷어차듯 유리의 다리를 건드렸다. 뱀파이어는 죗값이니 뭐니 기름칠 한 혀를 제멋대로 놀려댔지만 실속이 없었다.

그의 의도를 좀처럼 짚어낼 수 없는 건 뱀파이어가 뭔가를 숨기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면, 리사에게도 타개책이 없었다. 축 늘어진 아킨시나의 상체를 힘주어 끌어안은 리사가 이를 악물었다.

“비열한……! 만약 내가 인간을 죽인 게 죄라고 한다면, 나보다 당신이 훨씬 많이 죽였을 거예요. 대체 바라는 게 뭐죠? 개소리 말고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나 말해요.”

여기서 뱀파이어와 대치해봤자 승산이라고는 참새 눈물만큼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본인의 입으로 드미트리와 척을 지는 건 원치 않는다고 했으니, 차라리 유리를 내버려두고 자신이 그를 유인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자신과는 달리 전투에 특화된 사나운 자들이 모여 있는 본거지까지 끌고 갈 것도 없다. 그저 잠깐 시간을 벌 정도로만, 그래,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뱀파이어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조직에 알릴 수 있을 정도의 시간만 벌 수 있다면…….

하지만 어떻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유리를 내팽개치고 도망갈 수도 없다. 아니, 차라리 그가 자신을 쫓아오도록 유도해 유리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현명할지도 몰랐다. 남자가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올지 의문이었지만.

“난 지금 오랜만에 그럴듯한 목표가 생겨서 제법 의욕이 솟는 참이야. 뭔가가 싫어서 도망을 다니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괜찮더란 말이지. 약간의 장애물이 있긴 하지만, 넘치는 게 시간인 내 입장에서는 결국 뭘 선택하느냐의 단순한 문제거든.”

독기 서린 리사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귀찮은 노친네를 건드렸다가 꼬리를 달고 다니게 되면 기껏 손에 들어온 걸 손가락 쪽쪽 빨면서 애만 달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까지 일을 성가시게 만들 생각은 없어.”

여전히 핵심을 찌르지 않는 에드워드의 화법이 리사는 적잖이 답답했다. 마법이나 최면, 조악한 술법으로는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뱀파이어를 상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유리를 내팽개치고 냅다 도망을 치는 것도 우스웠다. 신체능력만 따져도 세이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상대를 가지고 육탄전을 시도하는 건 차라리 강물에 뛰어들어 피해보겠다는 작전이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최면에 빠진 아킨시나는 처음 정해놓은 시간이 되어야만 세이렌의 주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최면이 깨지 않는다고 해서 물리력에 의해 손상된 육체가 무사한 건 아니다. 세이렌인 자신과 비교하면 훨씬 튼튼한 유리를 걱정하는 게 비이성적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다치면 마음이 아팠고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로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킨시나의 상체를 차체에 기대도록 유도한 리사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귀를 쫑긋 세워야만 들리는 희미한 숨소리는 유리가 살아 있음을 시사했다. 그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자신의 등 뒤에 숨기기라도 하듯 앞으로 나선 리사를 향해 에드워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광경이었는데, 별로 와 닿지는 않았다.

유리 아킨시나에 대해 지대한 반감을 심어준 원흉은 브로드웨이의 골목에 몸을 끼우고 귀를 막은 채 양이나 세고 있겠지. 뭐, 그래도 상관없다. 쓸데없이 나서서 세이렌의 먹잇감이 되는 것보다야 양이나 세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시야에 없는 건 다소 불안했지만, 혼자 둔다고 위험해질 만큼 녀석에게 위협이 될 만한 상대도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말이지, 난 그쪽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새끼에게 유감이 참 많아. 나중에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친절하게 충고해주도록 해. 주인 있는 물건에는 함부로 손을 대는 게 아니라고. 레이디 피쉬, 정말로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은 게 있다면 그렇게 알기 쉬운 약점으로 만들진 마. 나 같은 악당을 만나면 제일 먼저 간파당해 허를 찔리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에드워드가 아킨시나를 끌어안은 리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나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무심해 보이기도 하는 묘한 얼굴이었다.

“날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유리에게 손대지 말아줘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건 유리도 대답할 수 없다.

확실히 그가 말한 대로 무지가 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무지해서 유죄인 죄수라면, 유리는 무지에 무죄였다. 그를 엮은들 뱀파이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기분을 푸는 것 정도가 다겠지.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고작해야 기분을 푸는 것보다는 더 얻어가는 게 그에게 있어서도 이득이었다.

뱀파이어가 유리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온 것이라면 표적으로 유리를 고르는 건 어리석었다. 리사는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거듭 말했다.

“내가 모르는 건 대답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뭐든 알아봐줄 테니까 유리를 내버려둬요.”

그녀의 절박한 애원에 에드워드가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만족이라기보다는 그 정도면 타협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오만한 얼굴에 속이 끓었다.

리사는 떨리는 눈으로 서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뱀파이어를 만나거든, 결코 눈을 쳐다보지 말라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이었는데 마치 온몸이 결박된 것처럼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뱀파이어의 눈에는 교묘한 마법의 힘이 있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겨우 한마디 말을 꺼내는 데에도 온몸의 피가 발밑으로 빠져나가듯 기분이 들 리가 없었다.

“좋아, 그게 뭔지 모른다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건 아닐 테니 날 거기까지 데리고 가. 그러면 네 소중한 꼬마 늑대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이미 댈 만큼 대놓고서 약속을 운운하는 입이 가당찮았다. 하지만 리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접한 핀란드 만에서 살고 있던 그녀에게 뭍에서 살아갈 기회를 준 것이 바로 소년 유리였다. 어린 시절 몸이 약했던 그는 얼음 대지를 지배하는 라이칸 왕의 유일한 새끼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비교적 기후가 온화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요양을 시킨다는 건 허울 좋은 명목에 불과했다. 유리를 제외한 왕의 가족은 모조리 모스크바의 대저택에 살았고 그곳은 일 년 내도록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는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왕은 그저 제 눈에 차지 않는 자식새끼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뿐이었다.

유리는 어릴 적부터 가족과 떨어져 자란 탓일까. 다소 대하기 어려운 성격에 가족에게조차 쉽게 기대지 못할 만큼 고립된 남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사에게는 고마운 은인이다.

세이렌의 일생은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난다. 인간들 사이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남을 재주도 없었고 라이칸이나 뱀파이어처럼 강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평생을 소금물에 전 생선으로 살다 죽었을 삶을 뭍으로 끌어준 유리에게 리사는 언제나 은혜를 입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재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남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유리는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우그러진 뒷좌석을 내버려둔 채 저가 타고 있던 조수석에 낑낑 유리를 수납하는 리사를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유리 아킨시나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있다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그를 이용하려던 계획과는 다소 달라진 결말이다.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여자가 유리 아킨시나를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굴 줄은 예상치 못했으나, 이용하기에는 오히려 이쪽이 확실했다. 아킨시나를 이용해 두 리퍼에게서 정보를 빼내려고 했던 것이 한 단계 빨라진 것뿐이었다.

에드워드는 놈들이 사육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정체를 까발릴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면 비밀조직인지 뭔지에서 꾸미는 꿍꿍이속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머지는 미국 이민국에서 해결할 테고 자신과 케일리는 일정대로 런던에 돌아갈 수 있겠지.

늘 그렇듯, 가장 단순한 길이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안전한 길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그러했다.

“따라와요.”

유리의 수납을 마친 리사가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걷기 시작하는 그녀를 향해 에드워드가 물음을 던졌다.

“걸어서 가나?”

“그렇게 멀지도 않아요. 게다가 어차피 지하로 내려가야 하니까 택시를 잡든 비행기를 잡든 소용없어요.”

“그래? 가깝다니 잘됐군. 레이디피쉬, 혹시 휴대전화 가진 거 있으면 잠깐 빌려주겠어?”

따라올 생각은 않고 갑자기 휴대전화를 내놓으라는 에드워드에 걸음을 멈춘 리사가 손에 쥐고 있던 기계를 순순히 내밀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뱀파이어는 결코 정의와 선의 상징이 아니다. 자신의 조직이 뭘 꾸미고 있든 간에, 뱀파이어가 그걸 저지하고자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죗값이니 뭐니 떠든 것도 정의구현이 아니라 그냥 성격이 더러운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것’을 사육하는 지하수로에는 세이렌이나 강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이종이 모여 있었다. 거기까지 끌고 가면 뭐든 수가 생기겠지.

그렇게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휴대전화를 받아든 뱀파이어는 여전히 자신을 따라올 기미가 없었다. 제 손에 쥔 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고 “하나로는 부족해. 하나 더.” 하고 재촉하는 말에 리사가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휴대전화를 두 개나 들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요.”

“머리가 두 개면 휴대전화도 두 개일 것 아냐?”

“어차피 유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휴대전화를 빼앗을 필요는 없…….”

“내가 직접 뒤져?”

“알았어요. 꺼내 올 테니까 기다려요.”

그가 유리에게 손을 대는 게 싫었던 리사는 결국 조수석을 열어 유리의 주머니를 뒤질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유리. 너도 지켜주지 못했고 네 휴대전화도 지켜주지 못해서.

어차피 듣지도 못할 상대라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리사는 안주머니에서 발견한 유리의 휴대전화를 찝찝한 얼굴로 뱀파이어에게 건넸다.

씩 웃으며 그것을 받아든 뱀파이어는 황당하게도, 먼저 강탈한 리사의 휴대전화를 부가티 너머의 좁고 어두운 골목 사이에 힘껏 던졌다.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리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굳은 그녀를 스쳐 지나간 에드워드가 말했다.

“뭐 해, 앞장서.”

“…….”

“요즘은 지하에서도 전화가 터지나?”

“얼마나 깊은지에 따라 다르겠죠.”

“그래? 그럼 너무 깊이 들어가기 전에 걸어둬야겠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별수 없이 앞장서 걷기 시작한 리사는 불쑥 내밀어진 휴대전화 키패드에 하마터면 앞을 보지 못해 넘어질 뻔했다. 발을 헛디뎌 휘청이는 그녀를 잡아줄 생각도 않은 채 에드워드가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듯 뻔뻔하게 말했다.

“네 번호, 입력해.”

아무래도 자신은 살짝 정신 나간 뱀파이어에게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다.

◇ ◆ ◇

“아…….”

툭,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바라보며 케일리가 저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덩이 같은 것에 머리를 맞았다. 상당히 아팠지만 자신의 정수리에 직격한 덕분에 날아온 물체는 별다른 상처 없이 골목 바닥에 안착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집어 드니 새빨간 케이스를 끼운 최신형 휴대전화다.

휴대전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맨해튼에서는 휴대전화 비가 내리는 걸까?

아무리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오염이 심화되고 있다고 해도, 그럴 리는 없었다. 대기권과 성층권 사이에 휴대전화 공장을 만들어놓은 게 아니라면 이 휴대전화는 누군가가 떨어뜨렸다는 게 타당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봤지만 케일리가 끼여 있는 골목의 양 사이드 건물에는 열린 창문이 없었다. 그러면 옥상일까? 하지만 양옆의 건물은 제법 높았다. 저 높이의 옥상에서 수직낙하를 했다면 이것보다는 더 아파야 했다.

별안간 날아온 물체에 깜짝 놀라 몇 초간 손을 떼기는 했지만, 곧장 귀를 막은 케일리는 무단투기된 낡은 가구에 걸터앉은 채 무릎에 놓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떨어진 물건은 줍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좁은 골목 바닥에 두면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돌아오면 자신이 앉았던 가구 위에 얹어놓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골목 바깥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가 늦는다. 거리에는 별달리 소란스러운 기척도 없었고, 귀를 막고 있다 보니 들리는 것도 없었다. 양이라도 세어야 하나? 뜬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을 정도로는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잠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다소 무료했다. 웬만하면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고 싶은 그였지만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골목에 앉아 있는 건 그다지 편안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자코 기다리기가 무료하다는 이유로 에드워드와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는 않았다. 약속이라기보다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에 가까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편의를 곧잘 봐주는 남자였다. 별로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안전하게 기다리라는 말조차 무시할 정도로 그에게 악감정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악감정은커녕, 오히려 20년을 알고 지낸 이해타산적인 친구보다 훨씬 편하게 느끼기까지 했다. 최소한 에드워드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쓸모없는 말을 지껄여 앞으로의 삶을 귀찮게 만드는 테러는 저지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요컨대 구블러 공작가의 차남이 배운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승마대회에서 우승했다거나, 맥코이 백작가의 방계에서 폴로 챔피언을 배출했다는 등의 입방정을 떨어 팔자에 없는 스포츠를 시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는 점에서 아주 유익한 관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친구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등을 호시탐탐 노리는 녀석들과 나란히 두고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있어서 유익하기만 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친절로 갚지는 못할망정, 꼬박꼬박 자신을 향한 감정을 사양해야 한다는 건 그의 폴리시에 어긋났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주는 친절을 거절하는 케일리는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친절한데 흑심까지 품고 있는 상대에게 무작정 기대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람 된 도리조차 최소한만 하며 사는 그였으나, 다행히도 케일리의 최소한의 안에는 자신을 좋아하는 상대를 기만하지 않는 예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은 받지 않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이 경우, 무엇을 받고 무엇을 거절해야 할지 선을 가늠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에드워드의 친절이 오직 자신을 향한 마음에서만 비롯한 건지, 아니면 피를 마시는 대가일 뿐인지, 둘 다인지, 상황에 따라 다른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으니 곤란한 노릇이었다.

어둡고 좁은 곳에서 소리 하나 없이 물끄러미 앉아 있자니 상념만 늘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도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는 케일리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어차피 고민해봤자 당장 내일부터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생각하는 만큼 손해였다. 생각을 하느니 당사자에게 묻는 게 빨랐고, 에드워드라면 곧이곧대로 대답해줄 게 틀림없었다.

케일리가 생각하기에는 일일이 본심을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는데, 에드워드는 그렇게 했다. 날이 선 정직함은 장점이 될 수 없건만 어째서인지 에드워드의 것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숨기지도 않았고 꾸미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피를 마실 수 없다는 약점을 드러냈으며 당당히 동족을 혐오했고 모든 이를 발 아래로 봤다. 그런 주제에 빈혈이니 두통이니 약한 소리도 곧잘 했고, 그런 것치고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어찌됐건 케일리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참신한 상대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에드워드라는 정의되지 않은 상대를 머릿속에서 떨치려 문득 고개를 내린 순간이었다. 시선의 끝에서 휴대전화 액정이 빛나고 있었다. 빛을 발하는 화면에 떠오른 텍스트는 ‘유리’였다.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케일리가 만난 유리는 한 사람뿐이었다. 유리 아킨시나. 그리고 자신의 정수리에 떨어진 휴대전화에 하필이면 유리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온 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닐 것 같다.

하필이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 휴대전화에서, 하필이면 유리가 전화를 걸었다는 걸 우연이라고 한다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자가 가엾은 고아 소년의 부모를 죽인 것도 지극히 우연히 일어난 묻지 마 범죄(Motiveless crime)였을 테다.

- Hello from the other side, I must have called a…….

귀에서 손을 뗀 케일리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영국이 자랑하는 팝 스타의 곡이 흘러나왔다. 자칫 잘못 들으면 지옥 건너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라는 의미로 들리기도 했다. 지옥(Hell)과 인사(Hello)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에 귀를 댄 케일리가 마치 자신의 휴대전화를 든 양 자연스레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아킨시나 씨.”

- 에드워드 씨다.

“어쩌다가 유리가 됐어요?”

- 그런 거 된 적 없거든?

“화면에 유리라고 떴는데요. 전화 건 사람 이름을 알려주는 시스템이거든요, 이게.”

요즘 기술이 참 좋아지기는 했다며 덤덤한 어조로 부연설명 하는 케일리에 휴대전화 건너편의 에드워드가 잠시간 침묵했다.

- 너 귀에서 손 뗐지?

말이 없는가 싶더니 불쑥 그렇게 묻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반사적으로 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지나가는 행인도 거의 없었다. 에드워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마치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는 것처럼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낸다.

“전화를 발로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 네 것도 아닌데 왜 받아?

“아는 이름이 보이기에요. 게다가 떨어뜨린 사람이 걸었을 수도 있는데 무시하면 가엾잖아요?”

- 웃기시네. 언제부터 얼굴도 모르는 놈들한테 그렇게 친절했다고? 어쨌든 귀는 됐고 일단 거기서 나와봐.

안 그래도 슬슬 골목이 지겨워지기 시작한 케일리가 냉큼 일어나 밝은 거리로 걸음을 내딛었다. 골목에 들어가기 전과 같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부가티가 서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조수석에 앉아 있던 세이렌의 모습이 사라진 게 보였다. 문제는 어딘가에는 있어야 할 에드워드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왔어요.”

무심코 좌우를 살핀 케일리는 하늘로 꺼졌는지 땅으로 솟았는지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는 휴대전화 너머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 거기 차 그대로 서 있으니까 운전석에 타. 옆에 고깃덩어리가 앉아 있을 텐데 어차피 당분간 정신 못 차릴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정육점에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가 어딘가에 막힌 듯 갑갑하게 느껴지는 건 자신이 주운 휴대전화의 통화감이 좋지 못한 탓일까. 그게 아니면 에드워드가 현재 있는 장소의 문제일까.

“에디, 아킨시나 씨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요?”

- 살다 보면 싫은 것도 참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참으면서 살아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면 내 지난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것 같아지니까 그만둬주지 않겠어?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아킨시나 씨는 이대로 계속 잠에 빠져 있는 건가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 네 감성에는 용납될지 몰라도, 난 아니니까 그놈을 거기다 대려면 제발 부탁이니 네놈의 머릿속에서만 해줘. 그리고 글쎄,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지만 반나절 안에는 돌아갈 예정이야. 너도 알다시피, 보험이라는 건 언제나 기간이 정해져 있는 법이니까. 난 이래 봬도 신중한 성격이라서 귀중품을 떼어놓을 때는 보험을 들어놓거든.

그 말을 들으니 격렬했던 어젯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보험이라, 그러고 보니 어제 그런 말을 했었지.

저가 피를 마시기로 해놓고 피를 가져가기는커녕 오히려 빼앗겨놓고서 아침부터 자신의 식사를 챙겨주던 모습은 확실히 다정했다. 뭘 해준다고 생색을 내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잘해줬다.

하기야, 그는 의외로 처음부터 입이 험할지언정 굳이 나서서 자신을 괴롭히진 않았다. 오히려 초반에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동시에 관심을 끄려 한 것 같았고 내버려두면 떨어져나가리라 멋대로 판단한 느낌이 강했다.

구울과의 대치 후 자신의 피를 마시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면 에드워드는 일부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악랄한 뱀파이어보다는 훨씬 인간적이었고, 나머지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로맨틱한 뱀파이어보다는 훨씬 무성의하게 다정했다.

케일리는 새삼 에드워드가 입으로 점수를 깎아먹지만 않는다면 아주 훌륭한 연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입만 열지 않는다면.

“어디에 뭘 하러 간 건데요?”

잠시간 말이 없던 케일리가 물음을 던졌다. 아킨시나와 자신을 남기고 세이렌과 사라진 것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 탓이다. 에드워드라면 데이브들의 사무실을 나올 때 선언한 것처럼 아킨시나를 두들겨 패서라도 깨워 원하는 답을 얻어낼 것 같았는데 말이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없었다. 그가 확인하고자 한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렇게까지 스스로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 건 아니라고 생각해 왔는데, 의외로 의욕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에드워드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케일리는 엉뚱한 곳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치며 상황을 멋대로 납득하고 있었다.

“혼자 가도 돼요?”

자신을 데리고 가면 도움이 될 거라는 의미보다는, 자신을 놓고 가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이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케일리는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편이다. 세상에는 자신이 아는 이종보다 모르는 이종이 더 많았고, 이번 일에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을 아킨시나와 단둘이 남는 것이 괜찮은 선택인지 의문이었다.

에드워드가 당부한 것처럼 그와 함께 움직이는 편이 훨씬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직접 해명했듯 케일리는 목숨을 내던지고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킨시나와 함께 있음으로 인해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상대하는 데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질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 아니, 나 혼자 가는 게 나아.

의외로 단호하게 돌아온 대답에 케일리가 어딘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제는 나보고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해놓고…….”

- 그건 내 옆이 제일 안전하니 한 말이었지. 지금은 아니고. 넌 거기서 그 멍청한 꼬마 늑대의 일행인 척이나 하고 있으면 돼. 내가 걔 일어날 때까지 도착 못하면 적당히 둘러대고. 어차피 휴대전화가 없으니 어디 연락도 못할 거고, 레이디피쉬는 내가 데리고 있으니 별 일은 없을 거야.

“그사이에 매니저가 돌아오면요?”

- 워킹 데드는 내가 뭔지 알고, 네가 뭔지 모르니 함부로 못 움직여.

어느새 세이렌과 강시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긴 모양이었다. 페어리가 들으면 동료가 늘어났다고 폭죽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인지 자신에게만은 별명을 지어주지 않는 에드워드에 약간의 섭섭함을 느끼는 케일리를 향해 그가 말했다.

- 사탕 준다고 아무나 따라가지 말고.

휴대전화 저편에서 귀를 간질이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케일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말…….”

결국 케일리는 에드워드가 시키는 대로 운전석에 들어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앉았어요.”

그의 말대로 아킨시나는 잠에 빠진 것처럼 숨소리 하나 없이 등을 기대고 있었다. 고깃덩어리라거나, 그 옆에 앉는다고 정육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애매할 만큼 생명활동의 징조가 없는 남자가 다소 안쓰럽게 느껴지기는 했다.

일도 열심히 하는 데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을 만큼 좋은 혈통인데 어쩌다 정육점 냉동고의 고기 취급을 받게 되었을까.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굴러갈지 몰라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유리 아킨시나의 입장에서는 이 예측하지 못할 상황들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러다 일어나서 날 보면 당황하지 않을까요? 어제 그렇게 헤어졌는데.”

사실 어제의 마지막은 헤어졌다는 말보다는 좀 더 과격한 표현이 어울렸다. 차 키가 그대로 꽂힌 운전석에 앉은 케일리가 힐끗 조수석에 무심한 시선을 보내는데 휴대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건너왔다.

- 당황하면 뭐 어쩔 건데?

언제나 그렇듯 뻔뻔한 분이셨다. 자신의 파트너가 유능함과 비례해 몇몇 안 좋은 것들을-정작 당사자는 신경 안 쓰는 것 같았지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케일리는 별반 당황할 것도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음, 먼저, 당황을 하겠죠.”

또박또박 힘이 들어간 발음을 들으며 에드워드가 픽 코웃음을 쳤다.

- 자존심만 더럽게 센 놈들의 장점이 뭔 줄 알아?

“글쎄요. 장점이 있기는 한가요?”

- 있지. 그런 놈들일수록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기가 쉬워. 특히 유리 아킨시나처럼 원칙주의에 완고하기까지 한 놈들은 더더욱. 늑대의 기원은 라이칸이야. 둘은 기본적으로 같은 종이거든.

갑자기 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시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케일리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톡톡, 운전대를 두드렸다. 마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간 말을 멈췄던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 그래서, 놈들은 주인 있는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아. 자존심이 더럽게 세서 다른 놈들의 손을 탄 걸 용납 못한다 그 말이지.

그런고로, 아킨시나는 어제 영역표시를 확실히 해둔 에드워드에게 무참히 꺾여 얼마 남지도 않은 제 자존심을 제 발로 훼손할 의도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란다. 그것 참 친절한 부연설명에 케일리는 과연 성격이 더러우면 다른 이들의 생각을 그런 식으로도 조종하는 게 가능하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니저는요?”

불퉁하게 튀어나간 물음은 새로운 별명을 얻은 난폭하고 신경질적인 남자에 대한 사소한 의문이었다. 그가 강시든 말든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의식 없는 아킨시나의 옆에 있다가 조우하게 되면 별로 유쾌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양쪽 발목에 둘, 허리춤에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겨 여분의 탄창도 들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맨해튼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글로벌 토픽감이 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리고 굳이 자신을 떼어놓고 간 에드워드가 다소 마음에 안 들기도 했다. 확실히 파트너십이라는 것 자체가 머릿속에 없는 남자라는 건 확실했다. 자신이라고 해서 에드워드의 샴쌍둥이마냥 오만 곳을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 위험한 일을 벌이는 거라면 머릿수가 많은 편이 유리했다.

전력에 끼워주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라도, 이렇게 뚝 떨어트려놓고 저 혼자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건 역시 파트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케일리는 생각했다. 자신도 꽤 열심히 쫓아온 사건이었으니 알 권리가 있었는데 말이었다.

- 워킹 데드는 다른 의미로 널 건드릴 수 없을걸. 놈들은 지금까지 아킨시나를 재워놓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해를 끼치지도 않았잖아? 어제만 해도 그랬지. 무허가 외과수술을 하다 말고 뛰쳐나가서 한 일이 꼬마 늑대의 픽업이었다 그 말이야. 요컨대, 놈들은 모종의 이유로 아킨시나를 보호하고 있거나, 그를 이번 일에 휘말리게 내버려둘 수 없는 처지일 확률이 높아.

확실히 아킨시나 또한 파티장에서 몰래 빠져나갔을 텐데 귀신처럼 찾아온 매니저는 스스로가 자리를 비운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 걸 보면 내장을 수집하고 다니는 취미에 대해서는 아킨시나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킨시나는 자존심 문제로, 매니저는 아킨시나에게 숨기는 게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없다. 확실히 그들이 에드워드의 보복을 두려워한다는 것보다는 훨씬 신뢰할 만한 근거였다.

케일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에드워드는 대단히 악질적인 음모를 꾸미는 양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제일 안전한 건 놈들이 보호하고 있는 짐승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겠어?

결국 하필이면 별로 달갑지도 않은 아킨시나의 곁에 널 남겨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었다는 양 흘러나온 대답에, 당황한 것은 케일리였다. 당연스러운 어조로 날아온 에드워드의 말이 그에게는 별로 당연하지 않았다.

- 말한 것처럼, 걔들이 섣불리 널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나도 열두 시간 안에는 그쪽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열두 시간……?”

- 어제 마셨잖아, 내 피. 그 정도면 반나절은 총에 맞아도 서너 발은 버틸 수 있을 테니 여차하면 먼저 쏘고 튀어. 어차피 아킨시나는 아는 것도 없으니까 굳이 감시할 필요도 없어. 옆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하니까 거기 앉혀놓은 것뿐이라고.

최면에서 깬 아킨시나가 수작이라도 부리면 선빵을 치고 튀라는 친절한 충고까지 건네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잠시간 말을 잃었다. 무슨 광경을 상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딘지 신이 난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황당한 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원래 그리 심사가 고운 뱀파이어가 아니었고, 사실 심사가 고운 뱀파이어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좀 소름이 끼치기는 했다.

그 말이 케일리의 귓가에 걸린 이유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마치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놓고 가는 게 안전하다면, 스스로의 기분이 상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는 대화의 흐름 자체가 문제였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들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애초에 세상의 중심이 그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데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뜯어고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게 당연했다. 자전하는 지구에게 네 자전축을 바꿔보지 않겠냐고 말을 걸어봤자 무의미한 것과 비슷했다.

꼭 에드워드에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케일리는 스스로가 근본을 따지면 오히려 그와 비슷한 타입의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달했던 것이었다. 그가 변하기 어려운 만큼이나, 자신 또한 변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똑똑한 에드워드라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냥 저가 바뀌었다. 사실 그렇게 큰 변화도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하고 싶은 말은 다 했고, 손해 보는 짓도 안 했다. 자신을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않으면서 저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였다. 제멋대로인 남자다.

하지만 자신이 그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게 알아서 흘러갔다. 에드워드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

요컨대, 다소 마음에 안 드는 상대의 옆이라도, 자신이 안전하다면 상관없다는 제멋대로인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결론을 내는 것처럼.

- 이봐, 케일리. 내 말 듣고 있어? 설마 통화하다 말고 자는 건 아니겠지?

“아, 네. 듣고 있어요.”

- 무슨 짓을 저지르든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까,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쏘고 튀어. 알아들었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에드워드의 당부에 케일리는 저도 모르게 굳었던 입가를 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뒤처리는커녕, 자신이 일을 벌이면 거기다 스푼에 포크까지 얹어 관리국 사람들을 환장하게 만들 뱀파이어가 말은 참 잘했다. 안전이 제일이라고 거듭 당부하는 것치고는 본인의 안위를 별로 챙기지 않고 아무 데나 뛰어들고 보는 남자를 향해 케일리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게요.”

휴대전화 반대편에서 잘했다고 칭찬하듯 만족스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만약 옆에 있었더라면 손버릇이 그러하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을 테지. 가끔 파트너와 애완동물을 착각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니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으리라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거기에 있으면 그의 옆을 따라다니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이라 근거를 들먹였던 것치고는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이 여실히 전해지는 통화였다.

주니어 때만 해도 사격과 승마실력으로 이미 프로 선수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이는 성적을 턱턱 내어놓았던 건강체를 걱정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었다. 케일리는 청소년기 이후로 자신의 부모님조차 걱정하지 않는 일신의 안위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뱀파이어의 존재가 껄끄러운 한편,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이를 나쁘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다만 마음 한켠이 안 좋았고,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만큼 자신에게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다는 게 불편했다. 그게 문제였다.

생각을 깊게 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오래 하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마음 한켠에 턱 걸린 에드워드를 마냥 모르는 척하는 건 어렵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릴리와 라일라, 스테이시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과의 결말을 떠올리며 케일리는 이번에야말로 같은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그쪽도 귀한 신분이라면서 고생이 많네요.”

잠에 빠진 건지 최면에 빠진 건지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눈 감은 아킨시나를 향해 케일리가 말했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차 안을 채우는 적막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음 한켠에 무겁게 내려앉은 고민을 모르는 척 외면한 채 케일리는 푹신한 카시트에 등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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