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6. Like five-stages of death 사랑이나 죽음이나 그게 그거야 (3)
“……?”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10미터가 넘게 떨어진 거리에서도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걸리는 거대한, 말 그대로 거대한 체구의 사내와 몇 번인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는 건 어쩌면 일방적인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는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을 살피는 것처럼 시선을 보내왔고 덩치에 맞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한참이나 서성거리던 사내는 조수석의 아킨시나가 완전히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확신한 후에야 부가티에 다가왔다. 그러고도 지나가는 행인인 척 스쳐 지나가며 운전석과 조수석을 날카롭게 훑은 그가 한 바퀴를 돌아 행인 행세를 포기한 것처럼 운전석에 대고 커다란 주먹을 두들겼다.
못해도 갓난아이의 머리통만 한 주먹이 쿵쿵 차창을 두드리는 것에 케일리는 얌전히 창을 내렸다. 매니저도 스타일리스트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아킨시나를 아는 것 같았다.
킁킁, 낯선 이를 경계하는 짐승처럼 코를 들썩인 사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푹 눌러쓴 스냅백에는 악취미의 화학약품 주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목이 늘어진 티셔츠 사이로 단단한 근육이 엿보였다. 힙합을 좋아하는 갱스터 사이에 섞이면 딱 어울릴 복장은 사내에게 별로 어울리는 차림새는 아니었는데,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흠?”
한참이나 케일리를 쳐다보던 그가 문득 눈썹을 찡그렸다. 모델인 아킨시나보다도 큰 키에, 그의 두 배는 될 법한 체구를 자랑하는 위협적인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고 있던 케일리 또한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일까. 눈앞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사내의 얼굴이 그렇게 흔한 조형인 것도 아니었다.
케일리는 지나가다 보는 행인 모두에게 관심을 두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눈썰미가 좋았다. 게다가 남자는 그저 지나가다 마주칠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깊고 재수 없게 얽혔던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뭐야, 인간 케일리.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건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이름을 모르는 구울 씨, 오래간만이네요.”
오늘 아침 포춘 쿠키를 먹었더라면, 이번 생에는 되도록이면 언데드와 얽히지 말라는 충고가 적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오늘, 하필이면 여기서, 이 타이밍에 그와 재회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언뜻 낯이 익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옆에 앉은 정육점 라이칸보다 안 좋게 헤어진 상대라니. 아무리 운명론과 종교에 관심이 없는 케일리라도 이쯤 되면 자신의 삶에 파란이 가득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우연에 이유 같은 게 필요할 리는 없겠지만, 여기까지 오면 차라리 뒤로 자빠졌더니 코가 깨지는 편이 대처하기 쉬웠다.
“이사라도 왔나 보지?”
차체에 손을 짚은 그가 불쑥 운전석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급격하게 가까워진 거리에도 케일리는 굳이 몸을 빼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주워듣기를 야생의 짐승은 먹잇감이 도망을 칠수록 더 끈질기게 쫓아온다고 했다. 구울의 분류가 짐승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구울이라니…….
만성빈혈이었던 에드워드에게도 버거운 상대였다. 에드워드의 피를 마신 자신이라면 어떨까? 상대할 만한 상대일까?
지금까지 만난 이종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위협적이었던 건 분명 구울이었다. 반사적으로 힐끔 조수석을 쳐다본 케일리는 아킨시나를 뛰어넘고 반대편으로 탈출하는 게 어려우리라 판단했다.
구울은 둔해 보이는 겉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민첩함을 자랑했다. 반사신경과 속도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케일리고 그와 에드워드의 대치를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 반격에 성공한 것도, 어디까지나 안구 저격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지금은 글쎄, 저격은커녕 총을 빼든 순간 저지당하지 않으면 선방이었다. 쏜다고 해도 이 짧은 거리에서 조준 가능한 총격으로 제지할 수 있을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케일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특유의 억양의 변화가 적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경우, 이사가 아니라 이민이 될 것 같은데요. 이런 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쪽이야말로 어쩌다 뉴욕까지 흘러들어온 겁니까?”
바로 눈앞까지 다가간 구울은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며 그렇게 묻는 인간 케일리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기야, 전번에도 겁대가리가 없다는 사실은 몸소 체감한 참이었다. 이제 와서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정도로 놀라기에는 마지막에 주고받은 대화만큼 놀랍기도 힘들었다.
제법 오래 산 구울은, 자신의 입에 수류탄을 쑤셔 넣는 인간은 지금까지도 단 한 명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더 늘어나지는 않으리라 확신했다.
“게다가 저와 당신이 이렇게 잡담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제 생각보다 사교적인 성격이신 모양이네요.”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찍찍 뱉는 말은 생각이 없어 보였고 목숨을 코 푼 휴지조각마냥 다루는 듯한 인간이었다. 두개골 속에 뇌가 수납되어 있다면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 저런 식으로 지껄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반대로, 이 인간의 전과로 말미암아 제법 잘 돌아가는 머리와 인간치고는 쓸 만한 신체능력을 지나치게 믿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운전석에 갇혀서 쓸 수 있을 만한 재주는 남아 있지 않겠지만.
“누가 할 소릴. 너야말로 왜 이런 델 기어다니고 있는 거지? 게다가 분명 전에는…….”
말을 하다 말고 문득 떠오른 재수 없는 얼굴에 고개를 쭉 빼고 주위를 둘러본 구울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알기로 이민국 놈들은 결코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영국 이민국의 괴짜로 지하세계에서는 제법 소문이 있는 빈혈 뱀파이어도 애인 갈아치우듯 파트너를 갈아치울지언정 뭔가를 끌고 다니기는 했다. 잠깐 공백이 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지만 한 달여 전의 대치를 떠올리면 다시 파트너를 붙이고 다니는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차 안에도, 차 근처에도 빈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눈 아픈 금발은 볕 아래에서 보면 까마귀가 좋아할 것처럼 발광을 하게 생겼는데 터럭 한 올 안 보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인간 케일리를 남겨두고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이쪽으로서는 그 편이 훨씬 편했다.
중국에서 배워 왔다는 술법으로 시체를 부리는 정신병자의 수하와 함께 다니는 세이렌은 언제나 시체보다 한발 늦게 움직였기 때문에 마중이 필요했다.
조직의 핵심간부인 라이칸 왕의 자식의 기저귀를 챙기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기껏 뉴욕까지 무기를 옮겨놨더니 시킨다는 게 기사 노릇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대의를 도모하기 위해 사소한 것들을 무시해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빌어먹을 섬나라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전문가를 통해 마개조를 마친 대 이종족용 중화기는 현재 뉴욕의 지하에 잠들어 있었다. 일이 잘 진행되기만 한다면 무기에까지 손을 뻗을 필요도 없이 게임이 끝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보험은 많은 편이 좋았다.
영국 이민국이 마개조 무기 밀수를 쫓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놈들의 미행실력은 형편이 없었고 심지어는 꼬리를 들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무기로 뭘 하려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을 터다. 어쩌다 운 좋게 살아 나간 인간 케일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다다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부터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다.
손을 뻗어 한 줌짜리 머리통을 움켜쥐기만 하면 간단히 짜부러지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 예정이었다. 놈들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새로운 임무가 생겼기 때문에, 인간 케일리를 짜부러뜨려 죽이면 정보를 얻어낼 수가 없다.
구울은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어찌됐건 지금 당장은 목숨을 부지한 인간을 바라보았다.
“뭐, 둘이든 하나든 별반 다를 게 없기는 하지.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나?”
빈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구울이 그렇게 말했고, 새카만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케일리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사실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었다. 전력을 다해 겨우 도망쳤던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은 전력을 다해도 도망을 칠 수 있을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아니요, 솔직히 별로 괜찮은 수가 없네요.”
그렇게 대답하는 케일리를 위아래로 훑은 구울이 동의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수류탄을 숨길 만한 주머니도 안 보이고, 폭탄 같은 걸 들고 있는 것 같지도 않는군 그래. 게다가 폭탄은 너무 커서 내 입에 안 들어가. 그 정도는 알지?”
쩌억, 커다란 입을 벌리자 상어 같은 이빨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수류탄이라면 모를까, 괜찮은 위력의 폭탄을 쑤셔 넣기에는 다소 모자란 입안의 공간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에드워드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저지당하겠지. 쏘고 도망을…… 쳤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스틱스 강을 건너게 될 것 같았다.
“이야기 끝났지? 그럼 좋게 말할 때 뒷좌석으로 옮겨 타.”
좋은 말이라고는 했지만 아마 그게 언제까지고 말일 리는 없었다. 케일리도 알고 구울도 아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다. 시키는 대로 운전석에서 내린 케일리가 뒷좌석 문을 잡았다.
운전석에 탄 채로 도망치는 건 어렵겠지만, 이대로 반대편을 향해 달음박질치면 이대로 잡혀가는 것보다는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탁 트인 차도 위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자신보다 다리도 길고 신체능력도 뛰어난 이종족과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을 것 같아 대번에 포기했다.
“별로 소용은 없을 것 같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순순히 뒷좌석에 올라탄 케일리가 도망치는 걸 마크하기라도 하듯 스윽 등 뒤로 다가온 구울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납치해서 감금하고 고문하려고.”
그것 참 솔직한 구울이다.
“그렇군요. 대단히 유감이네요.”
남 일처럼 대답한 케일리의 머릿속에서는 에드워드가 자신의 실종을 눈치채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가늠해보았다. 길면 반나절. 그 말은, 최대 반나절을 살아남으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이 어디에 끌려갔는지 찾아내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고, 그러면 다시 생존율이 떨어져가겠지만……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보다야 희망을 거는 편이 나았다.
케일리는 원래 낙관주의자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포기할 줄 알았고, 집착이나 야망은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는 게 싫어서 자살하고 싶은 부류라고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다소 효율주의를 표방하는 면이 있었고 가끔 심해지기도 했지만 기본은 했고 그 기본 안에는 살아남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은, 대부분 목숨을 걸어야만 살아남을 만큼 급박한 때였다.
“그러게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다니지 그랬어?”
친절하게도 뒷좌석 문까지 손수 닫아준 구울이 그렇게 말했다. 거대한 몸이 운전석에 구겨 들어왔다. 곧 시동이 걸렸고 케일리는 약간의 억울함을 담아 항변하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나쁜 일을 하고 다닌 기억도 없습니다만…….”
“내 눈 쐈잖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죠.”
“내 입에 수류탄 쑤셔 넣었고.”
“뒤끝 있으시네요.”
꽂혀 있던 차 키를 돌려 시동을 걸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구울이 뒤를 돌았다. 말은 없었다.
뻑.
케일리의 머리통을 말 그대로 있는 힘껏 후려갈긴 주먹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뭐 하나가 부러져도 부러졌지 싶은 괴기하기 짝이 없는 탁음이었다. 동시에 푹 쓰러진 케일리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잠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스르르 감긴 눈꺼풀을 잠시간 빤히 쳐다본 구울이 액셀을 밟았다. 달리기 시작하는 부가티 안에서 케일리는 실눈도 뜨지 않은 채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데에만 집중했다. 기절하는 척은 의외로 어렵다. 특히 귀가 예민한 자들을 속여 넘기는 건 아주 어려운 기술이었다.
다행히도 에드워드는 마치 이런 미래가 다가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험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무식한 주먹에 얻어맞았다고 당장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기절한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에 케일리는 얌전히 숨을 쉬는 데에만 집중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운명에는 이겨내야 할 시련이 잔뜩 남아 있는 것 같았으니, 에너지를 아끼는 게 좋았다.
◇ ◆ ◇
“대체……, 이건 뭐 하자는 수작입니까?”
촬영 스케줄에 맞춰 귀신처럼 눈을 뜬 아킨시나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양 손목과 발목이 결박된 채 자신과 마주 보고 있는 케일리를 향해 날이 선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빌어먹을 뱀파이어 때문에 뉴욕 경찰에게 붙잡혀 고역을 치른 그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이른 아침의 촬영 전에 잠깐 눈을 붙인 참이었다. 평소에도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던 탓에 차에서 눈을 붙이는 일이 잦았지만 일어났을 때 이렇게 황당한 상황에 빠져 있는 건 맹세코 처음이었다.
눈앞의 인간과 같이, 자신 또한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풀리지 않는 마법의 결박이었다.
“제가 부린 수작은 아닌데요…….”
말끝을 흐린 케일리가 수심에 젖은 얼굴로 아킨시나의 발치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에드워드가 말한 것처럼 아킨시나는 저들의 보호대상이었고, 어쩌면 아킨시나와 일행인 척을 하는 걸로 반나절 정도 목숨줄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를 굴렸던 것뿐이었다.
사실, 그런 맥락에서 따졌을 때 결과적으로 이 상황은 저가 부린 수작이 맞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민국을 그만두고 아킨시나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거짓말로 얼마만큼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았다가 거나하게 실패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아킨시나와 함께 일을 했다. 딱 한 번이었지만, 어쨌든 한 건 한 거였다.
문제는 구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생각을 안 하는 상대였다는 점이었을까. 보호대상인 아킨시나를 배신자로 오인하고 자신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굴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둘을 세트로 감금했다는 점에서,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케일리에게도 변명은 있었다. 구울은 별로 생각을 깊이 하는 타입이 아닌 모양으로, 목적지에 도착해 차를 멈춰 세운 후 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아킨시나를 쳐다봤다. 막 기절에서 깨어난 시늉을 한 케일리는 마치 아킨시나가 자신의 일행인 것처럼 구울을 속여 넘겼다. 사실 에드워드가 아킨시나를 협박해 이쪽으로 끌어들이자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니 속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구울은 그 허술한 계획에 완전히 넘어왔다. 마음을 고쳐먹고 이민국을 뛰쳐나와 아킨시나와 일을 하는 케일리가 아니라, 딴마음을 먹고 케일리에게 붙은 간교한 아킨시나라는 다소 황당한 방향으로.
“당신과 엮이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화를 억누르듯 한참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아킨시나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 어린 눈초리에 케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동의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참았다. 아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마음 다 안다고 공감해줘 봤자 아킨시나는 기뻐할 것 같지 않았다.
아킨시나는 자신을 결박한 것이 마법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기라도 하듯 앞으로 모은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물리력으로 해결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듯 금 하나 가지 않는 구속구를 내려다보며 아킨시나가 두 손을 맞잡고 이마에 댔다.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듯한 형상이었지만, 케일리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종도 종교를 믿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만약 그게 정말로 기도였다면, 맞닿은 손 사이의 틈으로 보이는 은빛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자신을 쏘아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제는 매니저에게 왕자와 거지라도 찍으려고 한 거냐는 헛소리를 들었습니다.”
불쑥 튀어나온 그 말에 케일리가 어제를 되짚었다. 자신과 아킨시나가 함께 있던 모습을 빗댄 걸까. 그런 것치고는 비유가 상당히 과격했다.
“그쪽이 왕자고, 내가 거지인가요?”
일을 이렇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으니 라이칸의 개소리에도 어울려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 케일리가 그렇게 되물었다. 이마에서 손을 뗀 아킨시나는 설마 반대라고 생각한 것이냐는 양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타박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것 참 자신감에 가득 찬 훌륭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줄 겁니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아킨시나가 핵심을 찔렀다. 보통의 경우 좀 찔리는 정도로 깨갱 뒷걸음질을 치지는 않는 케일리였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약간의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납치 감금 고문이라는 풀코스 메뉴에 아킨시나는 초대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잔꾀가 잘못 굴러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꼴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할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아킨시나가 정말로 모든 일과 무관하다면야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는 범죄조직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뿌리를 따라가면 결국에는 한패였다. 서로의 정체를 까발렸을 때 아킨시나가 이민국의 편을 들지, 리퍼의 편을 들지는 자명했다.
“글쎄요……. 일단 여기서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애매모호한 케일리의 대답에 아킨시나가 빠득, 이를 갈았다.
“당신,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군.”
케일리의 손목을 결박한 구속구를 노려보며 씹어 뱉은 아킨시나가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그런 자와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것부터 전부 다. 게다가 당신은 어제 그 남자의 행동에 아무런 의문을 느끼지 못했죠. 그건 당신이 이상한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무언가를 아킨시나가 알게 된 것 같다는 예감이 케일리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다고 해서 70년대 코미디 쇼에서 하듯 프라이팬을 들고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도 없다. 그 정도로 기억이 사라질 리가 없는 데다, 결정적으로 케일리에게는 프라이팬이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일부러 접근한 겁니까?”
어째서 안 좋은 예감은 늘 들어맞는 걸까. 이렇게 확률 높은 예감이라면 슈퍼볼 당첨 숫자 같은 데서 일해줬으면 하는 것이 케일리의 사소한 바람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복권을 사본 적은 없었지만, 나쁜 일을 예지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필요도 없는 복권을 사고 숫자를 맞히는 게 나았다.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상관없었지만, 사지도 않을 복권이야 어찌됐건 아킨시나의 깨달음이 별로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법에 대해서도, 그 남자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는 건 이미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일 테죠. 나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까?”
케일리는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브로드웨이에서 약 이십 분을 달린 거리의 지하라는 건 알았다. 아킨시나가 물어본 것처럼 처음부터 일부러 접근했고, 그에 대해서도 이미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을 향해 물음을 던지는 적대적인 남자와 가만히 시선을 마주한 채 케일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에디가 구하러 올 거예요.”
“갑자기 그건 무슨 헛소리……,”
“아킨시나 씨, 당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면 누군가가 구하러 와줄 거라고 생각하나요?”
자신의 물음은 모조리 무시한 채, 저 할 말만 던지는 케일리에 눈썹을 치켜세운 아킨시나가 말을 잃었다.
그는 지금 스스로가 처한 상황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다. 오늘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촬영일정부터 시작해서 눈을 붙일 때까지만 해도 자리를 지키던 그레고리와 리사의 행방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모든 것이 일순 정지했다.
“내 매니저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케일리는 자신이 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다면 그레고리와 리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 자신이 뱀파이어를 눈치챌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저 인간이 그럴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아킨시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스타일리스트는?”
물끄러미 마주쳐 오는 밤색 눈동자에서는 좀처럼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라이칸에게 초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저 머리통 안에 어떤 생각이 돌아다니는지 꿰뚫을 방법이 없었지만, 피아가 있는 종을 대하다 보면 자연히 표정과 몸짓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아킨시나는 천성이 예민했고 그런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케일리의 보디랭귀지나 표정, 그리고 시선에서는 읽어내릴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저 인간은 좋게 말하면 동요가 적었고 나쁘게 말하면 어디 한 구석이 고장난 것처럼 기묘한 균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어딘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어 아킨시나의 가슴 한켠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우릴 납치한 자들의 정체는 알고 있습니까?”
그제야 제일 중요한 부분을 짚는 아킨시나를 향해 케일리가 조금 웃었다. 보통의 평범한 인간은 납치를 당하면 제일 먼저 대체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파렴치한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궁금해했다. 아킨시나가 범죄를 저지른 이들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조금만 잘못돼도 간단히 죽는 인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건 어떤 면에서 자신의 사고 흐름과도 비슷했다. 최악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냉정을 되찾을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안타깝게도 지금 말해줄 수 있는 건 나도, 당신도 별로 안전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뿐이에요. 아,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제가 도착했을 때 이미 모습을 감춘 후였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킨시나 씨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좀 아쉽네요.”
마지막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킨시나를 위한 작은 힌트였다. 데면데면해 보이던 두 피고용인을 의외로 의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행방을 묻는 그에게 제 입으로 사실을 전달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까지 일일이 고려하면서 살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뢰를 제 입으로 깨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없었단 말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양 돌아온 아킨시나의 물음에 케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격한 그대로 말해드리자면, 아킨시나 씨가 조수석에서 혼자 잠들어 있는 걸 발견했고 그 모습을 납치범에게 들켜 함께 잡혀온 것뿐이랍니다. 뭐 짚이는 구석 같은 건 없으세요?”
다소 각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대부분 사실이었다. 납치를 당한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의 직업 때문이며, 과거 안 좋게 얽힌 사건에서 비롯했다는 걸 숨겼지만 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케일리는 생각했다. 오히려 아킨시나에게 주변인을 의심하게 만드는 뉘앙스의 물음을 던진 의도도 반 정도는 먹혔다.
“전혀……. 난 어린 시절부터 줄곧 러시아에 살았고, 그 둘을 제외한 이종과 얽힌 적이 없습니다. 근 몇 년간 일 관계로 자주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상대는 대부분 인간이었으니 이 일과는 관계없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혼잣말처럼 시작된 그 중얼거림은 말을 끝맺을 때쯤 확신에 차 있었다. 케일리는 그의 확신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자신에게는 도움이 될 한마디를 여상히 내뱉었다.
“그 둘이 있네요.”
아킨시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케일리를 쳐다봤다. 그도 잠깐 그렉과 리사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서 그 생각 자체가 헛짓거리나 다름없었다.
리사는 어린 시절 바다에서 주워 온 후 부친의 조직에 흡수되어 지금은 다른 일에서도 세이렌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렉은 처음부터 리사의 투잡 동료였다. 둘이 뭘 하고 다니는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아킨시나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자신을 다치게 해서 얻는 게 없다는 점이다.
자신과 그들의 사이는 이해관계가 확실했다. 부친을 낀 감시자와 죄수의 관계였다. 그 괴물 같은 사내가 엮인 한, 그렉과 리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컸다.
“그들은 아닙니다. 둘은 날 납치해서 얻을 게 없으니까.”
단호한 아킨시나의 대답에 케일리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런던에서 살았고, 아킨시나 씨와 에디를 제외한 이종과는 엮인 적이 거의 없거든요. 엮였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한번 얼굴을 마주쳤다거나 하는 정도라……. 그 정도라면 두엇 더 생각나기는 하지만, 보통 그런 걸로 원한을 가지지는 않죠? 혹시 이종들에게도 분노조절장애 같은 게 있나요?”
이렇게 사담을 나눌 만한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건네는 케일리에 울컥 가슴 한켠에 감정이 올랐다. 하지만 자신과 케일리는 현재 한배를 탄 입장인 것 같았고 그를 무시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머리를 맞대는 게 맞다.
타협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아킨시나였지만, 범인이 이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법구속구까지 사용했다는 건 납치범이 자신에게 실제로 해를 끼칠 수 있는 자들이라는 의미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제쳐두고서라도 생각하는 머리는 하나보다 둘이 나았다.
그렇게 결론내린 아킨시나가 방금 들은 물음에 답을 하려다 말고, 그게 자신의 종에 대한 상당한 실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얼굴을 마주쳤다고 죄다 납치하고 다니면 인간들이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왜 입 아프게 굳이 묻습니까?”
“상상이나 추측은 확신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저는 이종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모른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게다가 동요도 적군요. 믿는 구석이라도 있……, 아하. 당신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의 출처를 알 것 같군요.”
자신의 정체도 알고, 겉으로 보기에는 상황파악도 제법 냉정하게 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런데도 겁을 먹은 기색은커녕 지나치게 담담한 인간의 태도에 의문을 가지던 참이었다.
아킨시나의 신경이 문득 코끝을 스치는 기분 나쁜 냄새에 다다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인간의 냄새가 강하던 케일리에게서, 뱀파이어의 냄새가 짙게 흘러나왔다.
심지어 저 냄새는 그냥 뱀파이어의 것이 아니라…… 아니,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장면이 뭐가 됐든 자세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킨시나는 살색의 비율이 높은 상상으로 넘어가던 자신의 사고회로를 단단히 붙잡았다.
인간 쪽도 떠올리기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뱀파이어는 더 그랬다. 종도 다르고 성별까지 같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 한켠을 스쳤지만 곧 사라졌다.
뱀파이어는 원래 모럴이 없었다. 대체로 동족 안에서 한 명의 배우자만을 평생 좇는 라이칸과 달리, 놈들의 생태는 가볍고 지저분하고 불유쾌했다. 심지어 상대도 가리지 않았다. 차라리 인간은 나은 편이다. 네발 달린 짐승도 마다하지 않는 놈들에게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었다.
“말했듯, 난 짚이는 구석도 없고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는 날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함께 납치당하는 결론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까? 그, 같이 다니는 남자라든지.”
“아, 그런 가능성도 있겠네요. 하지만 에디와 만난 지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라서 과거사까지 줄줄 꿰고 있지 못해요. 게다가 그보다는 좀 더…….”
“더?”
“뭐, 어쨌든 에디에게 원인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탈출할 뾰족한 수가 없는 한 우리끼리 내부분열을 일으키는 게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게 요점이죠. 제 생각에 우릴 잡아온 이종 분이 살짝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들고 있었거든요.”
조금, 걱정이 든다는 건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 아주 큰 걱정이었다. 반나절 이후에는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큰 문제였지만, 어쨌든 케일리는 구울이 아무리 멍청해도 아킨시나의 머리를 에드워드 다루듯 뭉개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꼭 아는 사이처럼 말하는군요.”
의심 섞인 눈초리로 그렇게 말하는 아킨시나를 향해 케일리는 눈으로 웃어 보였다. 자신을 의심하는 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의심해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만.
“게다가 그 손가락은 어쩌다 그런 겁니까? 다른 곳은 멀쩡해 보이는데 하필 손가락만? 고문이라도 당했습니까?”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 대화 속에서 짜증 섞인 숨을 내뱉은 아킨시나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시야에 들어온 케일리의 엄지손가락이 기형적인 모양으로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것 아니라는 양 씩 웃어 보인 그가 대답했다.
“관절을 빼서 구속을 풀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이건 수갑 같은 게 아닙니다.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을 하세요.”
“아, 지금 거 좀 에디 같았어요.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수갑이 아닌 것 같았어요. 관절을 빼서 손을 빼보려고 했더니 그만큼 줄어들었으니까…… 신소재인가 했는데, 그럴 리는 없겠죠.”
“마법입니다.”
“마법이로군요.”
“안 놀랍니까?”
“원래 잘 안 놀라는 성격이라.”
어깨를 으쓱하는 케일리의 이마로 또르르, 식은땀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희미한 백열등 하나로 제법 넓은 공간을 비추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케일리의 얼굴은 평소에 비해 핏기가 적었다.
창백한 낯빛과 상관없이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 라이칸의 시력으로도 곧장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킨시나는 제 손으로 관절을 빼고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손가락을 덜렁거리는 독한 인간을 새삼스레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핏기가 적어 보이는 이유는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마셨기 때문이었고, 관절은 이미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순진한 발상이었다.
“여기, 지하예요. 탈출할 수 있을까요?”
마치 옛날부터 함께해온 동료라도 되는 양 자연스레 묻는 케일리를 향해 아킨시나가 대답했다.
“벽과 철창에 마법이 걸려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구속구는 풀 수 없을 테고, 이 정도 마법을 쓰는 자와 중간에 마주치면 상당히 귀찮아질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 역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인간이 아니라면?”
“상대의 종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죠. 그것보다, 구하러 와줄 왕자님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심술 섞인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아킨시나에게 케일리가 조금 웃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웃겼기 때문이었다.
“왕자님은 에디가 아니라 아킨시나 씨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그 말에, 아킨시나는 대번에 표정을 구겼다.
“몹쓸 병에 걸린 건 그 남자지, 내가 아닙니다.”
아무도 왕자님이라는 말을 병명으로 사용하지 않았건만, 이쪽도 참으로 묘하게 비비 꼬인 남자인 것 같다고 케일리는 머릿속 한켠으로 생각했다.
“뭐……, 아킨시나 씨 말대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사람이라면 언제나 만에 하나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린 당신들과 비교해서 목숨도 더 적고, 훨씬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보니 그런 본성을 가지도록 진화했거든요.”
사실 그 말은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평소의 케일리였다면 어차피 산다는 게 다 그런 거니 다소 험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자리에서 겸허히 받아들였을 테다. 가기 싫은 자선행사나 승마클럽도 최소한의 사교활동이 의무라는 설득이 돌아온다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떼는 게 케일리였다.
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만 일반적임과 상식적이라는 말에는 의외로 약한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우, 일반적이니 상식이니 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케일리가 생각해본 결과, 도망을 치다 구울에게 걸리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게 훨씬 승률이 낮았다.
가장 긍정적인 시나리오는 에드워드가 자신을 구하러 오는 것이었지만, 반나절이라는 타임 리밋 안에 실종을 눈치채고 납치된 장소까지 특정해 날아오는 걸 기대하기에 케일리는 다소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그가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안타깝게도 고려할 수 있는 나머지 시나리오는 모조리 부정적인 결말만 나왔다.
아킨시나의 구조가 먼저 도착하는 경우.
그러면 구울과 한패인 세이렌과 강시가 온다는 뜻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킨시나는 별 도움이 안 되고 나머지 둘에게마저 자신이 이민국의 요원이라는 걸 들키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본의 아닌 수작으로 불필요한 감금을 당한 아킨시나까지 적으로 돌릴 가능성이 있었다. 즉, 아킨시나의 구조가 먼저 도착하면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구울이 먼저 돌아오는 경우. 그것도 별로 좋은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친절히 어디 갔다 오겠다 말해주고 간 게 아니다 보니 어림짐작이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을 납치, 감금, 고문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고 싶은 것 같았다.
굳이 고문까지 하지 않아도 이민국에 지킬 의리는 없었기 때문에 술술 불어줄 생각이기는 했다. 아무리 봐도 이민국보다 에드워드가 발언력 있어 보였고, 에드워드는 상대가 누구든 쏘고 튀라고 했으니 자신의 편을 들어주겠지.
그러나 에드워드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는 일단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구울이 먼저 돌아오면 제일 먼저 위험해지는 건 이민국 요원인 자신이다.
구울 또한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하는 모양으로, 더 높은 놈을 불러올 것처럼 자리를 떴으니 그렇게 오래지 않아 돌아올 테다. 그러면 남은 건 고문과 배신인데 자신이 이민국을 배신한다고 해서 고문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아주 비효율적인 거래가 될 테다.
어떤 시나리오를 고려해도 예상 되는 결말은 대부분이 배드 엔딩이었다. 대체로 자신이 진짜 푸줏간의 고깃덩이가 되는 그런 엔딩.
아직 아킨시나가 같은 편일 때 함께 튀는 게 낫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와 함께 튀다 걸리면, 구울은 자신과 그가 같은 편이라는 착각을 더욱 견고하게 굳힐 테니 이쪽으로서는 두 번째 시나리오보다 나은 결과이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간단한 산수를 끝낸 케일리가 상쾌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아킨시나는 어딘지 떨떠름한 얼굴로 별달리 생존본능이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인간을 마주한 채, 찝찝함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으나 괜찮은 가설이 없었다.
“난 어느 쪽이냐고 하면, 원래 행동파에 가까워요. 내가 움직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때는 특히…….”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에 아킨시나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을 하는 건지 애매모호한 얼굴에는 특유의 희미한 웃음만 엿보였다. 좀처럼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면, 좀처럼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일 가능성도 있었다.
“행동파와는 몇억 광년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기셨습니다만.”
“그런 오해를 자주 받는 편이죠.”
“오해라…….”
“조금만 겪어보면 풀릴 오해죠.”
싱긋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케일리를 마주하면서도 아킨시나의 찝찝함은 가실 줄을 몰랐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한 라이칸의 감이 저 인간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감보다는 지난 일주일간의 학습일지도 몰랐다.
감이든 학습이든, 케일리 로체니는 확실히 이상했다. 어디가 이상하냐고 하면 그 남자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다니는 것부터 시작해, 납치에 감금까지 당한 지금 보이는 묘하게 침착한 태도,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어진 자신을 대하는 방식까지 통틀어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보니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 구석을 찾는 게 빠를 지경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조금 단정한 인상을 한 인간이었는데, 그 속에 뭐가 들어찼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겪어보면 풀릴 오해고 뭐고, 별로 겪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에드워드의 구출을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움직이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이유를 아킨시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끝난 계산까지 감으로 꿰뚫어 볼 수는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의 눈에도, 뱀파이어는 케일리를 상당히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남자가 납치당했는데 모른 척 내버려둘 리가 없다. 그런데 저 인간은 어째서 직접 탈출한다는 안을 고려하고 있는 걸까? 뿐만 아니라 그의 연인인지 주인인지 직장상사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는 뱀파이어는 자신을 싫어했다.
케일리가 내부분열이니 뭐니 지껄여댔던 걸 보면 이미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킨시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손과 발이 묶인 마당에 짐까지 달고 탈출하는 건 어리석다. 게다가 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그나마 움직일 만한 신체능력을 가진 자신과는 달리, 인간은 몇 발짝 통통거리다 쓰러지는 게 결말이었다. 예정된 짐덩이는 버리고, 혼자 튀는 게 현명했다.
하지만 아킨시나는 그를 버리는 것보다 먼저,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보기에 케일리와 에드워드의 관계는 이상했다. 서로 다른 제품에서 꺼내 온 부품이 기가 막힌 우연으로 들어맞아 기능하는 것처럼, 기묘한 구석이 많았다.
먼저 뱀파이어는 원하는 인간이 있다면 간단히 권속으로 만들어 제 노예처럼 끌고 다니는 야만적인 족속이다. 멋대로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제 명령을 듣게 만드는 행위에는 존중이나 배려가 없었다.
라이칸과 뱀파이어의 사이가 좋지 않은 데에는 종의 근원에 박힌 본성 자체가 양극단에 자리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일생을 한 상대만 따르는 라이칸과 저녁식사 메뉴를 고르듯 상대를 바꾸는 뱀파이어의 사이에 교집합이 생기기가 어려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케일리를 권속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해야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의 부재를 못 견디고 뒤를 쫓아왔던 걸 생각한다면 그 오만한 종족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했다. 적어도 뱀파이어는 케일리를 데리고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냈을 때, 놈은 진심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라이칸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고귀한 혈통을 이어 받은 자신이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겁에 질리지 않았을 테다.
뱀파이어가 진심이라고 해서 인간도 진심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신뢰를 하고 말고를 떠나서, 케일리가 마치 뱀파이어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탈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어째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는 걸까?
그와 함께 다니기는 하지만, 구하러 와줄 거라고 신뢰하는 것까지는 아니라서? 허나 그런 것치고는 그 또한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할 때의 표정이 상당히 묘했다. 대단히 희미한 감정의 변화였으나, 라이칸의 감은 그게 그저 기분 탓이 아니라고 말했다.
케일리 또한 에드워드에게 모종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뱀파이어가 그를 아끼는 만큼, 케일리는 뱀파이어를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원래 감정이라는 건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웠지만, 이 경우 기울어진 뱀파이어의 마음을 자신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 압니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은 뱀파이어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아킨시나가 불쑥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케일리의 의중을 떠 보기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를 기다리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건 자신과 함께 탈출 하겠다는 의미다. 케일리가 에드워드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킨시나의 입장에서 호재였다. 어젯밤, 자신을 마치 개새끼 조련하듯 다룬 뱀파이어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빤히 눈앞에 있는 기회를 보면서도 놓치는 건 바보에 머저리에 반푼이 등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제 케일리를 파티장 밖으로 유도했던 것처럼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건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 어찌됐건 그 뱀파이어의 앞에서 자신은 한낱 개새끼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무력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아킨시나에게 남은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완전히 포기하거나, 둘의 사이가 알아서 멀어지도록 말이 통하는 쪽을 공략하는 것. 아킨시나는 두 번째를 선택했다.
“약점……?”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며 갑자기 그런 말이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양 눈을 깜빡이는 케일리를 향해 아킨시나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가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약점은 개뿔, 뱀파이어에게 약점 같은 건 없다. 특히 순혈 뱀파이어는 만약 신이 있다면 무언가 대단한 실수로 만들어낸 생명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심각했다. 놈들은 죽지도 늙지도 않았고 원하는 모습으로 외모를 바꿀 수도 있었다. 모든 동물은 아니었지만, 한두 가지 동물로 변하는 것도 가능했고 아마 좀처럼 그들의 입으로는 밝히지 않는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을 터다.
뭐가 됐든 아킨시나에게 중요한 건 뱀파이어의 비밀에 대한 진실공방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케일리가 언젠가는 에드워드를 배신하는 데 그 거짓말을 이용해주었으면 하는 사소한 바람이었다.
쪼잔하고 유치한 데다 스케일도 작은 복수였지만, 오만한 순혈 뱀파이어씩이나 되는 자가 권속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손 위에 올려두기까지 하며 아끼는 인간으로부터 배신당한다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짧은 자기 합리화를 마친 아킨시나가 짙은 음영이 내려앉은 수려한 입매에 은근한 미소를 매단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심장.”
깜빡, 케일리의 눈꺼풀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반응했다. 아킨시나는 그가 무언가 반응을 돌려주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의아한 표정을 담은 얼굴로 아킨시나가 내뱉은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심장?”
그 반응에 아킨시나가 마치 대단한 비밀을 전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의 톤을 낮춰 케일리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매력적인 목소리가 밀실의 바닥을 타고 케일리의 발치를 타고 스르르 기어 올라갔다.
“오래된 영화나 종교와 관련된 기록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약점은 심장입니다. 유일한 약점이죠. 만약 당신이 뱀파이어를 죽이고 싶다면, 그의 심장을 노리세요.”
그 목소리는 투명한 독이었다. 지금 당장은 무해했지만, 이미 케일리의 머릿속에 파고들어 똬리를 뜬 교활한 맹독. 은밀하게 속삭이는 아킨시나의 얼굴에 맺힌 것이, 어딘지 늪과 같은 웃음이라고 케일리는 생각했다.
마주하고 있는 아킨시나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깊게 가라앉은 은빛 눈동자에는 묘한 서늘함이 남아 있었다. 에드워드가 새끼 새끼 했던 불렀던 건 그가 정말로 어린 라이칸이라서였을까?
아무래도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아킨시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케일리가 가만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 아킨시나 씨?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요?”
탈출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데다, 뜬금없이 에드워드의 약점을 논하는 아킨시나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케일리의 물음에 아킨시나는 눈을 접고 웃어 보였다.
아킨시나가 원하는 건 케일리가 자신을 대신해 에드워드의 심장을, 말 그대로의 심장이 아니라 마음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굳이 심장이라고 말한 건, 뱀파이어가 심장에 말뚝이 좀 박힌다고 죽지야 않겠지만 그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심장에 말뚝이 박히면 아플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말뚝을 박는 게 마음을 준 이라면, 마음도 아프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복수였다.
“케일리, 어제 말한 내 제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난 당신에게 관심이 있고, 당신의 말대로 그 남자를 별로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죠. 이유는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으니, 만약 그를 떠나고 싶어지면 방법이 없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관심이 있는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한 사소한 호의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보면 아킨시나가 그런 이야기도 하기는 했다. 에드워드를 엿 먹여보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여서 넘어가주기도 민망한 대단히 유치한 제안이었다는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남자를 신뢰하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바로 어제와 오늘 차이로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특히 당신처럼 그들의 본성을 모르는 순진한 인간들이라면 더더욱, 그 안일한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그때를 대비한 보험입니다.”
한 점 부끄럼 없는 얼굴로 아킨시나가 제법 긴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케일리는 그가 자신에게 뱀파이어의 약점에 대해서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케일리가 읽었던 백과사전에서도 뱀파이어의 약점이 묘사되어 있었고, 그건 심장과 태양이었다. 일광에서도 잘만 돌아다니는 걸 보면 역시 픽션이었구나 생각했지만 심장은 진짜였나 보다.
에드워드의 약점보다도, 케일리는 아킨시나의 말이 신경 쓰였다. 그를 신뢰하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자신이 그에게? 대체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보였나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스스로의 뺨을 쓸어내렸다.
마치 제 뺨에 그를 향한 감정이 묻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케일리는 어딘지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평소에도 멍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이상했다.
에드워드를 신뢰하고 있었나? 그에게 마음을 주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어지러운 생각은 좀처럼 정리가 될 줄을 몰랐다. 평소에도 멍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이상했다.
그런 케일리에게 도움은커녕 돌만 던지듯 아킨시나가 되레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인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라이칸의 감은 인간의 왜곡과는 달리 사실만을 가르쳐줍니다.”
아킨시나의 의도는 네가 간교한 뱀파이어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케일리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신뢰라는 건 케일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그가 살아온 세계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배팅해야만 하는 리스크를 떠안기 때문이었다.
가진 게 많은 이들은 잃을 것도 많았다. 그래서 쉽게 믿음을 주고받는 건 어리석음으로 여겨졌다. 케일리 또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신뢰는 곧 독이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다면, 그건 마음이나 믿음 같은 껄끄러운 것이 아니라 좀 더 계산하기 쉬운 재화여야 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정말이지, 곤란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언제부터였지?
잘 모르겠다. 에드워드에게 악감정을 품은 적이 없는 것처럼 처음에는 분명 큰 호감도 없었다. 그저 이종이라는 것이 특이한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언제부터일까.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건 그리 큰 계기가 아닐 터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치고는 의외로 잘 챙겨주는 데다가, 은근히 상식적이기까지 한 특이한 뱀파이어. 분명히 그게 다였는데.
……어째서일까?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게 맛있는 피를 가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케일리’라는 존재 그 자체를 향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좋고 싫고를 따지면 에드워드를 좋아했다. 지금까지 사귀어온 여자친구들을 좋아했던 것 정도로 좋아했다. 가족을 좋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 비슷하게는 좋아했다.
신뢰라는 건 어려운 과제다. 사랑보다도 어떤 면에서 훨씬 무거웠다. 그런 케일리였는데, 좋아하는 상대를 신뢰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그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싫어하지 않는다는 반대급부인 동시에 딱 그 정도의 마음일 것이라 착각하고 있던 케일리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큰일이야.”
자각조차 없는 것처럼,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케일리의 목소리에 아킨시나는 황당하기가 짝이 없었다. 납치에 감금을 당하고도 곤란함이라곤 터럭 한 올 보이지 않았던 인간이 타인을, 아니 다른 종이기까지 한 남자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곤란하게 여기다니.
물론 뱀파이어를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 자체가 곤란한 일이기는 했다. 인간이 뱀파이어를? 차라리 토끼가 사자를 신뢰한다고 하는 게 덜 우스운 이야기다. 그럼에도 아킨시나는 그의 곤란함이 대단히 이상한 곳을 스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일리는 분명 어딘지 불편한 것처럼 미간을 좁혔지만, 종내에는 입을 꾹 다물었고 아킨시나 또한 굳이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이 그의 호수에 제대로 돌을 던진 듯하다. 처음 겨냥했던 것과는 다른 부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던진 걸 되돌릴 수도 없다.
“그건 그렇고 탈출 말입니다만.”
화제를 원래 위치로 되돌린 것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찌푸린 얼굴을 한 케일리가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에게 배신의 씨앗을 심겠다는 목적도 어느 정도 달성된 것 같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탈출을 하더라도 케일리를 데리고 튀어야 할 이유가 없는 아킨시나는 그래,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처음 말을 꺼낸 거겠지 싶어 마주한 밤색 눈을 빤히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썩 괜찮은 계획이라도 있는 겁니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케일리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잠시간 말이 없던 그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킨시나 씨가 머리를 써서 벽에 구멍을 뚫은 다음, 지상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서 기어 올라가는 건 어때요?”
파리한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온화한 목소리에 아킨시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혹시 여기가 지하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어딜 기어 올라가겠다는 건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가 싶었다. 모르고 한 말이라면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거고, 알고 하는 말이라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머리를 써서 벽에 구멍을 뚫으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 그대로 ‘네 머리 단단하니 벽 정도는 허물 수 있지?’라는 우회적인 표현임에 틀림없었다.
“여기가 지하라는 건 내가 가르쳐드렸잖아요?”
무슨 말을 하냐는 양 되레 저가 이상한 얼굴을 하는 케일리에게 아킨시나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지하에서 아무 생각 없이 벽을 부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킨시나에게는 자신의 머리를 함부로 다루는 것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남의 머리를 중세의 공성망치 취급하는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합리적인 결론이기는 했다. 인간이 하나, 라이칸이 하나 있을 때 맨손으로 밀실에서 탈출하려면 벽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면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들이받는 것보다야 라이칸이 승산이 있으니 말이다.
“흠, 일반적으로는 무너진 천장에 매몰될 가능성이 높겠죠?”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도 하고 싶다는 겁니까?”
“네.”
“혹시…… 자살이 취미입니까?”
“그런 게 취미인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다음에 보게 되면 꼭 아킨시나 씨 이야기를 해둘게요. 걱정 마세요. 난 그렇게 쉽게 안 죽으니까.”
어이가 없다는 양 튀어나온 아킨시나의 목소리에 케일리는 그럴 리가 있냐는 것처럼 픽 웃었다. 아킨시나로서는 교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웃음이 어이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이 남자와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을 통틀어 기껏해야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횟수였지만 확실히 보통 인간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게 어떤 점인지 정확히 짚기는 어려웠으나, 아킨시나는 남자의 언행이 대단히 교묘히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에서 하늘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한 말만 해도 그랬다. 그는 별반 오기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를 과신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하는 말을 보면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적도 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내뱉었다. 한낱 인간의 육체를 한 주제에, 마치 수백 년은 산 뱀파이어처럼 말……, 아니 물론 그는 뱀파이어보다는 덜 교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당연한 듯 스스로를 향한 믿음을 가졌다.
그런가……. 아무래도 이 인간의 위화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스스로를 향한 믿음 같았다. 보통의 인간들은 스스로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을지를 가늠하는 데 애를 먹었다. 자기 객관화에 방해가 되는 수많은 감정을 가진 탓이다.
하지만 케일리가 드러내는 감정은 대부분이 희미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평가를 퍽 서늘하게 내렸다. 그게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그건 확실히 특이한 점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장담을……, 아니, 그것보다 지금 내가 당신 목숨을 걱정하는 것 같습니까? 당신네 종족이 착각도 병이라는 말을 합디다만, 확실히 그런 것 같군요.”
뾰족하게 날이 선 지적에 케일리는 아킨시나가 점점 자신을 향해 우기던 ‘관심 있어요’ 설정을 잊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관심이 있으면 걱정을 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닌데, 저렇게 역정을 내면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물론 의심이고 뭐고, 처음부터 그의 관심을 말 그대로의 관심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결과 다를 바 없기는 했지만 아킨시나가 별로 그런 류의 계략에 어울리지 않는 라이칸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될 때마다 가엾어지는 건 하는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런던 사교계는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으며 목 위는 하하 호호 웃는 최고의 위선 무도회였다. 사교계뿐만 아니라 가업상 정치판에서도 잔뼈가 굵은 케일리는 아킨시나의 얄팍함을 보고 싶지 않은 구석까지 속속들이 꿰뚫을 수밖에 없었다.
“아닌가요? 걱정 안 하신다면 그냥 부숴도 되는데. 아킨시나 씨도 떨어지는 돌 좀 맞는다고 죽지는 않을 것 같으신데, 혹시 제가 잘못 봤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짓 모른 척을 해주는 건 친절이라기보다는 귀찮음이 컸다. 당연하게도, 아킨시나 또한 그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아킨시나는 케일리가 눈앞에서 죽어 자빠져도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하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이 난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을 거야, 하고 룰루랄라 접시에 물을 떠 온다면 제정신이냐고 물을 것 같았다. 그건 걱정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아킨시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죽으면 자신을 대신해 빌어먹을 뱀파이어에게 대신 복수해줄 사람이 없어지니 그것도 아주 조금 곤란하기는 했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난 책임 못 집니다. 각자 자기 목숨만 챙기도록 하죠.”
본인이 문제없다는데 이쪽에서 굳이 말리는 것도 모양이 이상했다. 케일리의 말처럼 머리로 박아볼 생각은 아니지만, 일단은 벽의 두께라도 가늠해봐야 부술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이 날 터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선 아킨시나가 그 자리에서 두어 번 제자리 뛰기를 했다. 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폴짝폴짝 뛰는 것밖에 못했지만, 어쨌든 움직일 만했다.
한 발로 뛰는 것처럼 두 발로 콩콩 뛰어 벽에 도착한 아킨시나가 손을 들어 시멘트인지 돌인지 모를 벽을 몇 번인가 두드렸다. 이 정도면 손으로도 부술 수 있을 것 같다. 좀 아프기야 하겠지만, 못할 건 없겠지. 게다가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다 누군지도 모를 납치범과 대면하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니다.
잘 생각해보면, 자신은 원한을 산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가족 중에는 전방위로 원한을 뿌리고 다니는 라이칸이 몇 있다. 빨리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건 케일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아킨시나가 두 손을 들어 벽을 내리치려다 말고 문득 시선을 돌려 케일리를 돌아보았다. 다소 지반이 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벽을 부순다고 곧장 천장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본인을 불사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인간이 깔려 죽지는 않겠지, 일말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건 그저 전후관계를 따진 논리적 사고의 결과일 뿐 결코 걱정이 아니었다.
-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