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41)

#Mission6. Like five-stages of death 사랑이나 죽음이나 그게 그거야 (5)

케일리 로체스터는 직무이력으로는 통상 여덟 번째가 되는 이번 직업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잘못하든 망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그러했고, 책임을 질 것이 거의 없다는 부분 또한 나쁘지 않았다.

지금껏 주로 책임자의 입장에서 회사를 운영해온 그는 어쩌면 의외로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게 적성에 맞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지금까지의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을 되짚어볼 정도였다. 아버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정치를 하는 것도 죄다 귀찮고 번잡하게만 느껴졌기에 차선을 택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누군가의 밑에 붙어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별달리 죄책감이랄 감정을 느껴본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지만 적어도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은 지켜온 그였다.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한 끼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아주 사소한 것들.

꼭 지켜야만 한다고 누군가 알려준 것도 아니었지만, 세금을 내는 것과 같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짊어져야 하는 일종의 의무라고 여겨왔다. 그 사람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선이 에드워드의 곁에 있으면 매우 낮아진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머리 꼭대기에 있었던 선에 겨우겨우 닿으며 살았다고 한다면, 에드워드와 만난-정확히는 새로운 직장에 들어온.- 이후로 선의 수위가 매우 낮아졌다. 기껏해야 허리 밑쯤일까.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이종으로 바뀌는 것만으로 이렇게 삶이 편해질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각각 필요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예를 들면 로체스터 공작 부부의 자식으로 있기 위해서는 고등 교육을 마쳐야 했고, 종종 그들이 좋아하는 사격술이나 승마술을 배워야 할 때도 있었다. 좋은 자식이 되고 싶다면 형제자매들처럼 좀 더 노력해야겠지만 케일리는 그렇게까지 욕심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최소한이나 최저한이라는 말을 선호했다.

말하자면, 최저라인을 달성한다면 그 이상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다는 완곡한 표현이 케일리라는 인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의미다.

로체스터 부부는 대체로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는 똑똑한 차남 케일리는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최저라인에만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그가 가진 뛰어난 재능이나, 훌륭한 두뇌 같은 것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만나도 그뿐이었다. 세상 모든 재능과 두뇌가 적합한 장소에 이용되어야만 한다면 제일 먼저 제3세계에서 묻혀 사라지는 어린 가능성부터 파내야 한다고 제법 논리적인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존재가 단순하고, 명쾌하고, 흥미로웠다. 그가 자라온 세계에서는 에드워드와 같은 자들을 낙오자로 분류했다. 좋은 혈통을 낭비하는 멍청이들. 그저 남들 하는 만큼만 따라가도 이미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어슬렁거릴 수 있는 기회를 제 손으로 던져버리는 저능아.

케일리는 스스로가 그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는 걸 알았다. 거기서 더 내려갈 생각도, 올라갈 생각도 없으니 부족함을 느끼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등바등 발버둥을 쳐서까지 원하는 게 없다면, 굳이 아끼는 이들의 눈앞에 진창을 펼치고 내쳐지는 수고를 감수할 만큼 싫어하지도 않는다면, 그 방식이 나쁠 건 또 뭐가 있겠는가?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제 생각에 이런 식으로는 평생을 가도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여상하게 던진 목소리와는 달리, 케일리의 모양새는 썩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손은 가지런히 아랫배에, 다리는 발목이 묶여 통통 뛰어다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별수 없다. 벽을 부수고 반대편 수로로 나왔지만 이번의 문제는 올라가는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밀실에서 탈출할 때와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천장을 부쉈다가 맨해튼 한복판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는 별로 예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최소한 해야 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왔던 케일리는, 자신이 새로운 직업과 이종들에 대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들의 세계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에드워드였다.

이 세계가 편한 게 아니라, 에드워드의 존재가 자신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뿐이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케일리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착각을 한 자신이 나쁜 건 안다. 그래도 울컥 억울함이 밀려오는 것까지는 컨트롤 할 수 없었다.

“그쪽만 생각을 하는 건 아닙니다.”

아킨시나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케일리는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슬슬 피의 효과가 사라져가는 것 같다.

이 하수도 안에서는 자신의 편이 없었다. 무언가를 실패하고 널브러진 자신을 회수해주는 레이튼이 없었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해보라고 길을 터주는 부모님도 없었다. 남의 손을 빌려가면서까지 뭔가를 해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던 케일리지만, 이렇게 혼자 바동거려야 겨우 목숨을 챙길 수 있는 상황에 빠지니 자신이 얼마나 배부른 삶을 살아왔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 없지만, 역시 다음부터는 에드워드가 싫다고 해도 그의 옆에 딱 붙어 있는 게 가장 옳은 선택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의견이 일치한다니 기쁘네요. 그런 김에 뭔가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대책 말입니까? 출구를 찾아서 뛰는 것 외에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까?”

다리가 묶여 있다 보니 뛰는 것도 속도가 더뎠다. 그래도 길을 더듬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아킨시나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어찌어찌 그를 쫓던 케일리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래서는 출구를 찾기 전에 탈진해 하수도의 팅팅 불어터진 변사체로 운명을 다할 것 같았다.

“그렇긴 하지만, 무작정 뛰는 건 방법이 아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아시겠지만 천장을 부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건 뉴욕이에요.”

“그건 나도 알아요. 일단은 지금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할 수 있게 방향을 정해서 한곳으로만 계속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걷는다기보다는 통통 뛰어다닌다는 말이 어울렸지만 어쨌든 케일리는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정처 없이 길을 따라가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킨시나가 제법 차분해진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음, 여기에 물건 하나를 놔두고 표시를 해놓은 다음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만 꺾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원래 위치로 돌아오면 우린 미로에 빠진 거나 다름없으니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겠죠.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출구에 도착할 거고요. 하수도니까, 어딘가에는 사다리가 있지 않을까요?”

별다른 이견 없이 아킨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표시를 위해 떨어뜨릴 물건은 아킨시나가 차고 있던 시계였다. 케일리는 이미 자신의 무기를 다 털린 후라 더 이상 꺼낼 게 없었고 신발이나 옷을 벗어놓으려면 더 튼튼한 아킨시나가 하는 게 나을 거라는 주장이 통과되었기 때문이었다.

케일리는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아킨시나는 별달리 친근하게 나눌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에 둘은 얌전히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만 나아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가는 아킨시나와는 달리, 케일리는 점점 시야가 어두워져가는 걸 느꼈다. 이곳에 잡혀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피의 효과가 떨어져간다는 걸로 간접적인 추측은 가능했다.

짧으면 한나절, 길면 꼬박 하루 정도일까. 에드워드가 찾으러 오기 전에 나가떨어져서는 본전치기는커녕 원금까지 잃는 꼴이다. 자신의 원금은 목숨이고 하나밖에 가진 게 없으니 간단히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현저히 떨어져가는 체력과 시야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면 양팔이 결박된 아킨시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니 꼼짝없이 뉴욕 지하의 불어터진 변사체가 된다.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통, 통, 어두운 시야에 눈을 부릅뜬 채 아킨시나의 뒤를 쫓던 케일리가 문득 멀리서 비춰 오는 빛을 발견했다.

출구인가! 지친 다리를 박차고 중국 영화의 강시마냥 콩콩 빛을 향해 뛰던 케일리와 아킨시나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출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둘의 생각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착각이었다.

“대체 저 다리를 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튀어올 수 있는 거야?! 하마터면 길 잃어버릴 뻔했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궁금하면 쟤들한테 직접 물어보든가.”

“젠장, 이래서는 옷에서 구린내가 빠질 날이 찾아오질 않겠네!”

손전등을 든 채 투덜거리는 한 무리의 남자들 사이에는 익숙한 거구가 섞여 있었다.

“인간 케일리, 산책은 재밌었나?”

요즘 들어 쓸데없이 자주 보는 구울을 마주 보며, 케일리는 아킨시나의 차가운 시선에 답지 않은 어색한 웃음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왼쪽으로 가자고 했을 텐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확실히, 자신의 선택이 재앙을 불러온 게 맞는 것 같다.

◇ ◆ ◇

“레닌, 근데 쟤 되게 얼굴이 익숙하지 않아?”

허공에 대고 손전등을 휘휘 휘저은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케일리는 그가 지칭하는 게 아킨시나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그 얼굴이 익숙하다 못해 위험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별안간 손전등의 빛을 정면으로 맞은 아킨시나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그의 바로 앞에서 얼굴을 쑤욱 가져다 대고 허, 허참, 허이고, 몇 번이나 헛소리를 내뱉은 남자는 멀뚱하니 선 구울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왕자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심드렁하니 귀를 후벼 판 구울이 대답했다.

“왕자고 나발이고, 저 늑대새끼가 우릴 배신하고 이민국에 주둥이를 털었으니 일단 잡아 가둬서 어디까지 털어놨나 알아봐야 할 것 아니…….”

이어지는 구울의 이야기를 듣는 아킨시나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그 또한 이민국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일은 없다. 자신이 부친에 의해 이민국에 등록된 이종이라는 걸 아는 정도다. 알지도 못하는 놈들과 한패라 의심을 받은 게 이 촌극의 전말이라는 어이없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무어라 항변하려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선수를 친 케일리가 그렇게 소리쳤다.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어쩐지 영영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케일리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아킨시나가 모든 일을 바로잡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굴러갈지 정확히 묘사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케일리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이렇게 필사적이었던 때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간절한 표정을 한 채 그들에게 호소했다.

“아킨시나 씨는 결코 여러분들이 인간을 사냥해서 내장을 적출한 뒤 음모를 이루기 위해 괴물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킨시나 씨는 배신자가 아니에요. 물론 저는 이민국의 요원이 맞지만, 아킨시나 씨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그를 믿어주세요.”

단호하면서도 진정성이 있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하수도에 있던 사내들이 제각각 눈빛을 교환했다.

뭐야, 역시 배신이잖아? 근데 왕자는 어떻게 저런 걸 알고 있는 거야? 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레고리? 아니야, 걘 왕자랑 사이 별로잖아. 리사……, 그년이로군.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하수도에 적막이 감돌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지 않았지만 상황을 수습하기가 애매하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만든 원인이나 다름없는 유리 아킨시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배신과 이민국, 그리고 조직의 목적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이 적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선두에 선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일리의 얼굴을 살폈다. 거짓을 찾으려는 것보다는 저 망할 인간이 얼마나 큰 리스크가 되어 돌아올까를 가늠해야 했다. 자신을 뜯어보는 이종 사내를 향해 케일리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듯 이렇게 말했다.

“아킨시나 씨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말에 남자들은 오히려 확신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눈빛이 바뀌었다. 케일리가 바라던 방향으로 일이 굴러갔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킨시나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었지만, 그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할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케일리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 선택은 케일리에게도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나마 자신과 같은 길을 가던 아킨시나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걸 막을 길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이민국 요원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고 통할 시점도 아니다.

그러면 남는 건 하나뿐이다. 아킨시나가 뭐라고 지껄이든 범인으로 몰리도록 발목을 붙잡는 동시에, 그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도록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어차피 저들도 이민국 요원과 아킨시나를 같이 처리할 수는 없다. 도망을 치다 잡혔는데도 아킨시나를 알아보고 내분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케일리는 확신했다. 자신의 목숨줄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줄 방법이 있다면, 그건 아킨시나뿐이다. 그렇다면 그 줄을 잡는 게 당연하다.

아킨시나는 실제로 아는 게 거의 없었고 그는 그저 진실을 토로한 것뿐이었다. 구울에게 잡혀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케일리는 진실을 말했지만 구울이 멋대로 착각하고 아킨시나까지 데리고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정보를 빼낸 이민국의 요원으로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야, 아킨시나가 엮이는 편이 생존률은 올라간다. 그러니까, 딱히 목숨을 보장해줄 거라는 소망보다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는 정도의 기대였다.

케일리는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의 머릿속 저울에서 아킨시나는 별로 무거운 상대도 아니었고, 게다가 그의 목줄은 모든 일의 원흉인 핏줄이 지켜줄 테니 자신이 챙겨야 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알지도 못하면서 에드워드의 심장을 운운하며 배신을 종용한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주 사소한 문제였지만 케일리에게는 아킨시나를 향한 호감을 단번에 깎아먹는 결정적인 트리거나 다름없었다.

그 말인즉슨, 에드워드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자신을 이용해보겠다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 게 아니겠는가. 만약 그와 대적할 만한 힘이 있었다면 대번에 심장을 찔러 넣었을지도 몰랐다. 에드워드가 왕자님보다 강하다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돌아가는 상황을 유일하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케일리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다.

아킨시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결백함을 대신 주장해준 케일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야기의 흐름상 그가 바로 이민국의 요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넋이 나가 그를 쳐다보며 말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사내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온 모양이다. 선두에 있던 남자가 뒤의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둘 다 가둬.”

“아무리 그래도 저쪽은 좀 건드리기 애매하지 않습니까?”

“아냐, 오히려 잘됐어. 가둬두면 더 이상 방해도 못할 것 아냐. 게다가 왕한테 별로 사랑받는 것 같지도 않던데 여차하면 묻어버리고 모른 척 입이나 닦는 거지 뭐. 또 몰라, 왕이 직접 손을 못 써서 그냥 살려뒀던 걸지. 그럼 오히려 애물단지 하나가 사라져준 꼴이니 기뻐할 거라고. 안 그래?”

그 말을 들으면서도 아킨시나는 이를 악물 뿐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이야기의 흐름상 자신의 부친이 엮여 있는 게 틀림없었고, 케일리 또한 일의 진상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자신뿐이다.

언제나 그랬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까맣게 모른 채 말려들기만 하는 게 자신의 삶이었다. 그게 싫어서 벗어나보려 발버둥을 쳤는데, 결국에는 이 모양 이 꼴이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말도 안 나왔다. 그들의 말이 맞다. 부친은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뻐할지도 몰랐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삶을 원망하며 살아왔다. 빌어먹을 핏줄이나, 운명 같은 것들이 족쇄처럼 매달려 온몸을 죄어들었다.

빠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돌아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인간들 틈에 섞여 사진을 찍으며 유리 아킨시나라는 개체를 봐주던 이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꿈처럼만 느껴졌다. 허탈했다. 자신을 잡아온 것이 부친의 부하라는 것도 그러했고, 그런 이들에게마저 쓰레기 같은 취급을 당한다는 게 참담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는 아킨시나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왕자님, 가족싸움을 하려면 집안에서만 하는 게 현명해. 쓸데없이 주변에 피해를 주고 다니면 가만히 있다 얻어맞은 우리가 빡이 치잖아. 왕자님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를 다루듯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건네는 남자에도 아킨시나는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그런 아킨시나가 이상해 저도 모르게 끼어든 것은 오히려 케일리 쪽이었다.

“그, 아킨시나 씨는 정말로 죄가 없어요. 그냥 보내주시는 게…….”

이번에는 반 정도 진심으로 꺼낸 말이었다. 설마하니 저들이 아킨시나를 정말로 끝장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아킨시나가 다소 얄밉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그는 모든 사건에 정말로 발가락 하나 끼어들지 않았다는 걸 모르기도 힘들었다. 그냥 성격이 좀 비틀린 어린애. 그 정도가 아킨시나를 향한 케일리의 결론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대화로 인해, 케일리는 아킨시나에게 부모 잘못 만난 불쌍한 어린애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아, 그래그래. 우리도 다 알고 있어. 이해한다니까. 왕자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어디서 들은 건지도 모르고 뭐 그런 이야기지? 알아들었어.”

무엇 하나 알아들은 것 같지 않은 비비 꼬인 대답이 돌아왔다. 심지어 아킨시나 당사자도 스스로를 변호할 의지를 잃은 것처럼, 사사건건 비비 꼬인 말을 늘어놓던 입이 꾹 다물려 있었다. 낭패였다.

케일리는 그들이 아킨시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끌어들이려 했을 뿐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꼭 이 상황은 자신이 잘못 읽은 수 탓에 저 남자까지 위험에 빠진 것처럼……,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기는 했다.

난감한 일이다. 대체로 생각한 대로 상황이 굴러가는 인생을 살아온 케일리가 오래간만에 당황이라는 감정을 품었다. 잘못된 대처로 잃어봤자 넘쳐나는 재산의 일부거나, 별로 쌓은 기억도 없는 평판 정도였던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판단미스로 아킨시나의 목숨이 위험해졌다. 케일리는 아킨시나를 위해 항변하려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자신이 둔 수 탓에, 정작 진짜로 그의 결백을 주장할 수가 없어진 거다.

실제로 이민국에서 알아낸 사실이 아킨시나나 그의 주변에서 알아낸 게 아니라는 말을 해봤자, 저들은 이미 훨씬 먼 곳까지 생각이 달려간 후다. 처음 지점에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많이 나갔다.

아킨시나가 완전히 결백하냐고 하면 당연하게도 그 또한 옳고 정당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에드워드를 물먹이기 위해 잔꾀를 부리다 된통 혼이 난 데다가, 결국 직접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자신의 손을 대신 빌려 그를 처리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대체 자신이 언제 에드워드한테서 도망치고 싶어질 줄 알고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그렇게 긴 관점에서 복수를 시도하다니 참 인내심이 대단하다 싶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제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 어리다는 게 빤히 보여 괘씸하기보다는 우스웠다.

그런 와중에도 지금 상황에서 제일 죄가 적은 자를 꼽자면 아킨시나가 맞다. 케일리가 찰팍, 몇 발짝을 다가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짐승도 제 새끼는 챙긴다는데 이종한테는 그런 관념도 없는 모양이다. 괜히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는 남자가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 짐승처럼 보여서 입안이 썼다. 그런 말을 듣게 만든 게 자신의 탓만 같아서였다.

“어이, 미란다. 넌 지상에 나가서 인어를 잡아와.”

“인어요? 갑자기 그 계집애는 뭐하러요?”

“딱 봐도 한패잖아. 잡아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면 먹이로 던져버린다고 해.”

말 없는 아킨시나 괴롭히기를 그만둔 것처럼 미련 없이 등을 돌린 남자가 제 부하에게 말했다.

어이없는 얼굴을 한 채 그 명령을 들은 부하는 남자가 결코 인어를 괴물의 먹이로 던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내도록 인어에게 추파를 던져댔고, 답지 않게 신사 노릇까지 해가며 그녀의 시선을 받기 위해 껄떡댔다. 껄떡대면서 신사인 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놈이 발정 난 짐승새끼이기 때문이라는 걸 본인만 몰랐다.

가엾은 인어만 잘못 걸렸다며 끌끌 혀를 찼지만 그래 봤자 가재는 게 편이다. 남자의 부하는 그가 드디어 인어를 손에 넣을 명분을 얻었으니 앞으로 같잖은 쇼 하는 꼴은 안 봐도 되겠거니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러죠 뭐. 어디다 잡아놓을까요?”

부하의 물음에 잠시간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남자가 대답했다.

“새장 밑으로 끌고 와.”

그 말에 부하가 멈칫했다. 그렇게 목을 매던 인어 계집이니 겁만 좀 주다가 어떻게 잘 구슬려보겠거니 했던 예상을 훨씬 상회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겁을 줄 모양이었다. 문제는 남자의 바지 속 사정보다도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목숨이었다.

새장은 인간의 내장을 빼서 주면 된다는 걸 알아내기 전까지 괴물의 먹이가 될 이종을 잡아 가뒀던 도구를 의미했다. 바닥이 훤히 뚫려 있는 새장과 흡사한 그것은, 한 발짝도 되지 않을 만큼 좁은, 말 그대로 새가 앉아 있는 게 어울릴 횃대만이 걸린 고문도구.

거기서 균형을 잡고 언제까지고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 괴물이 버티고 있는 바닥을 제외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 틈도 없었다. 발밑의 괴물을 피해 횃대에서 버티다가 결국에는 힘을 잃고 떨어져 내릴 때의 절망. 횃대에서 버티는 동안의 공포.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낄낄대는 이종들의 광기까지.

인간 사냥을 시작하기 전 잡혀왔던 캐트시나, 어린 요정들을 구경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을 때에는 맨정신으로는 보기 힘든 참상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조직의 중간간부인 남자에게 직속으로 딸려 있으니 망정이지, 밑에서 일하는 잔챙이들은 언제나 새장 속의 캐트시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품었다.

괴물을 이용하기 위해, 그 끔찍한 흉물을 살려내는 데에만 혈안이 된 상층부에서 말단을 먹이로 던져주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자행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창고에 처박힌 물건을 또 뭐 때문에 꺼내 오라는 건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얼른 움직이지 않고 뭘 햐나는 것처럼 자신을 향해 눈짓하는 남자를 향해 부하가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그걸…… 다시 매달 거라는 뜻입니까?”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을 보는 것과, 이종을 잡아먹는 괴물을 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새장은 잘못하면 나도 고깃덩어리가 되어 괴물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다시 꺼내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남자는 완고했다.

“저 둘을 새장에 집어넣을 생각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는 왕자의 배신을 처단하는 것보다, 인어에게 집착하느라 그녀가 싸고도는 상대를 제거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고작해야 치정싸움에 새장을 가져오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었지만 부하는 그러지 않았다. 말을 해서 통할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괴물이 인간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조직의 잔챙이였다. 괴몰이 이종 외에 뭘 먹을 수 있는지, 그게 자신들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온갖 것을 던져준 덕분이다. 결국 그나마 인간의 내장을 잘 먹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쓸데없는 이종 사냥이 줄어든 건 다행인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먹는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문제가 벌어졌다.

이종 사냥보다도 귀찮은 게 인간 사냥이다. 이종은 실종이 되어도 찾는 이들이 적었으며, 좀 없어진다고 해도 금방 티가 나지 않았는데 인간은 아니었다. 쓸데없이 무리를 짓고 사회를 이루는 놈들의 특성 탓에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갖은 수를 써야 했다.

인간 사냥팀을 몇 개 국가로 나누고 타깃을 달리 한 뒤 인간들의 수사기관의 눈을 피하는 데 총력을 다했다. 그래도 꼬리가 밟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민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날이 머지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예견했다.

문제는, 이렇게 완벽히 계획을 들켰다는 사실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는 점이다. 남자가 해야 할 건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인어 계집애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상부에 이번 일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원하는 걸 쥐여주는 게 빠르다는 걸 부하는 알고 있었다.

“왕자도 말입니까?”

정말로 왕자를 함께 제거할 생각이냐고, 확인을 위해 그렇게 묻자 남자는 되레 그게 무슨 문제냐는 양 대답했다.

“실수로 먹어버렸다고 하면 문제없잖아. 왕이 괴물을 죽일 거야, 뭐야. 제 아들놈을 잡아먹었다고 죽이기에는 너무 많이 투자했지. 게다가 핏줄이라고 썩 아끼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문제없어.”

그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왕이 자신의 핏줄을 탐탁찮게 여긴다는 이야기는 갓 태어난 핏덩이를 별장에 처박았을 때부터 돌았다.

“뭐, 그러시다면야……. 인어는 되도록이면 빨리 끌고 와야겠네요.”

“저놈들이 잡아먹히기 전에는 끌고 와야 필요한 정보를 털어놓을 테니까.”

상어처럼 빽빽이 박힌 이를 드러내며 남자가 웃었다. 그것 참 악당다운 음습함이라고 생각하며 부하가 반대편을 향해 달음박질 쳤다.

새장에 갇히면 평범한 인간은 한 시간도 채 버티기 힘들다. 체력 자체가 다른 이종은 그나마 버텼지만 그래도 식음을 전폐하며 횃대에 매달려 있기만 하는 건 고역이다. 라이칸이라면 일주일 정도는 버틸까? 아직 매달아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잡아온 캐트시의 최장기록은 열흘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열흘 안에는 인어를 잡아와야 한다. 이미 꼬리를 내뺐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얼마나 왕자를 싸고돌았는지 떠올려보면 갈 때 가더라도 왕자는 짊어지고 튈 인사였다. 모르긴 몰라도 아직 뉴욕에 있는 데다 사라진 왕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겠지.

이쪽에서 그를 데리고 있다고 하면 귀찮은 일 없이 끌고 올 수 있을 터다. 세이렌은 귀찮은 상태다. 강력한 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귀찮았다. 최면이니 세뇌니 하는 노래를 꺼내기 전에 정리하지 못하면 역공을 당할 위험이 크지만 그걸 빼면 허약한 생선 뼈다귀였다.

그러니 미리 귀마개라도 사서 끼고 찾아야 할까, 대책을 세우며 그는 묵묵히 지상을 향해 뛰었다.

◇ ◆ ◇

“히이익! 저건 대체 뭡니까, 좀비라도 됩니까? 다리가 잘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피가 검은색이잖아! 독 있는 거 아니야?!”

“둘 다 시끄러워.”

“클라라, 너야말로 침착하게 내 옷에 손 닦지 마!”

그들이 이민국 직원이라는 걸 상기하면 무식이 통통 튀는 대화다.

세상에 좀비 같은 건 없다. 인간들이 지어낸 픽션 속 괴물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굳이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지저분하게 뜯어진 팔뚝과 어깨의 이음매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검은 피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질린 얼굴을 한 요원들은 그 와중에도 안광을 빛내며 달려드는 시체를 처리하고 있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건 단연 에드워드였지만, 그 다음에 오는 건 데이브였다. 확실히 필드 책임자쯤 되면서 그 정도 실력도 없어서야 말이 안 된다. 그의 부하들도 제법 우수했다. 입만 닥칠 수 있었더라면 좀 더 쓸 만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으아악! 더러워! 더럽다고! 나 조준하고 토하지 말란 말이야!”

시체로 산을 쌓는다는 건 바로 이런 광경을 가리켜 하는 말이겠지. 문득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그 관용구를 떠올린 에드워드는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적들의 뱃속에 내장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놈들의 재활용 정신을 칭찬했다.

내장은 먹이로, 몸은 재활용. 지구를 생각하는 훌륭한 정신이나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별로 유쾌하지 않을 게 분명한 광경임에 틀림없다.

코를 마비시키는 악취와 검은 피의 향연에 꽥꽥 불평불만을 질러대는 기간제 동료들을 힐끗 뒤돌아보며 에드워드가 말했다.

“좀비는 뇌를 먹는다고들 하잖아. 그러니까 니들은 걱정 없어.”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였지만,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머릿속은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온몸의 피가 생각을 방해할 만큼 엉망진창으로 날뛰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지 않으면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치밀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뭐라도 지껄였는데 별반 도움은 되지 않았다.

끝없이 달려드는 검은 피의 시체들은 좀비가 아니라 강시였다. 강시에게 물려 피가 빨리면 강시가 된다고는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이야기다. 자신은 뱀파이어였고 해당사항이 없었고 게다가 저들은 강시를 좀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떤 의미에서 강시는 동양의 좀비 같은 것이니 크게 다를 바도 없겠지.

요전 강시 이야기를 해줬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한 뉴욕 요원들을 뒤로한 채 에드워드는 길을 막는 멍청이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들며 착실하게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런 에드워드의 뒤를 힘겹게 쫓는 베타 팀과, 그보다 훨씬 뒤에서 잔당을 처리하는 뉴욕 필드요원들의 9할은 인간이니 걱정이 될 법도 했지만 그는 원래 주위를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다른 것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기도 했다.

막 머리 위로 떨어진 거구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던 데이브가, 한 타이밍 늦게 자신들이 무뇌 인간이라는 비난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서 짐승처럼 달려든 사내를 허공에 띄운 채 초능력을 이용해 진공포장 하며 데이브가 소리쳤다.

“나 뇌 있거든!”

바로 뒤에서 팔다리가 절단된 와중에도 바득바득 기어 따라붙는 몸뚱이를 반 토막 낸 클라라가 성의 없는 말투로 툭 던졌다.

“대장은 없을지도 몰라. 다음에 CT 찍어봐.”

그 말에 양손에 팔뚝만 한 나이프를 움켜쥐고 강시의 팔다리를 노리던 드류가 한마디 보탰다.

“클라라 말이 맞아! 지금까지 착각하면서 살았던 걸 수도 있으니까 꼭 찍어봐. 돈 없으면 모금해줄게.”

아르고야와 살만은 이 와중에도 입만 살아 떠들어대는 두 사람에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래도 몇 년이나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겨온 동료들에게 뇌 없는 아메바 취급을 당한 데이브가 우울한 표정으로 허공에 띄운 손을 꽉 그러쥐어 주먹을 만들었다.

끄으으윽, 괴기스러운 소리와 함께 거구의 강시가 압착기에 깔린 양, 부피를 줄였고 곧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바뀌어 하수도에 떨어졌다.

“너네 인사고과 초안 내가 쓴다는 건 기억하고들 있는 거지……? 으응?”

막 강시 하나를 끝장내고 제 등을 덮친 강시에게 다시 진공포장술을 시도한 데이브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이, 에드워드는 선두에 서 묵묵히 길을 뚫었다.

지하도를 따라 며칠 전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는 여정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이 길고 길었다.

맨해튼 섬을 이 잡듯 뒤져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던 둘의 행방을 찾은 건 반쯤 운이나 다름없었다. 뉴욕에서 움직일 수 있는 요원을 모조리 투입했고, 뉴저지와 워싱턴에서도 충원을 받았다. 그렇게 뒤져도 그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아킨시나와 케일리.

대체 어떻게 엮였는지, 뭘 목적으로 한 납치인지, 납치가 맞기는 한 건지 온갖 추측과 설전이 오갔지만 누구도 답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이틀을 허비했다. 실마리를 찾은 건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이민국에 전적으로 협력하는 대신 유리 아킨시나의 신변을 보장받고자 스스로를 팔아넘긴 리사의 휴대전화에 사진 하나가 전송됐다.

아킨시나와 케일리가 커다란 철제 새장에 매달려 있는 괴상한 광경이었다. 그게 어떤 상황인지 제일 먼저 눈치챈 건 리사였다. 새장 밑에 피칠갑을 한 괴물은 리사도 몇 번인가 본 적 있다. 수년 전부터 왕이 정성스레 돈을 퍼부으며 키워낸 괴물이다.

아킨시나를 따라 뉴욕에 출장을 올 때마다, 사소하게는 먹이 조달에서 캐트시를 유혹하는 역할부터 크게는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최면을 거는 것까지 다양하게 힘을 보탰던 그녀였다. 새장과 괴물만 봐도 거기서 벌어지는 일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몰랐을지언정, 그걸 키우는 데 뭐가 필요한지도 모를 수는 없다. 하필이면 자신에게 날아온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도, 리사는 정확히 꿰뚫었다.

에드워드 또한 괴물을 발견했던 지하의 널찍한 공간을 떠올렸는지 곧바로 표정이 굳었다. 사진 속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케일리와 악연을 맺었던 몇 안 되는 이종이 있었다. 구울은 그가 이민국 요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아킨시나에게까지 손을 댄 건 케일리가 함께 있었던 탓이겠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던 퍼즐의 큰 그림이 구울의 존재로 단번에 명확해졌다. 에드워드가 수색대를 대신해 실전에 투입해도 손색이 없을 정예를 끌어 모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100년간 레토르트 다이어트를 했던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만큼의 전력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구울은 강력한 상대다. 그를 제외하더라도 제법 고전할 만한 이종들이 모여 있을 테고, 애초에 이쪽은 상대 조직의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리사 또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세이렌을 귀찮은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킨시나를 빌미로 협박성 사진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다.

전력으로 따지면 기껏해야 연약한 인간 여자와 다를 바 없는 게 세이렌이다. 그저 뒷덜미를 잡아다 끌고 가면 끝날 걸 굳이 인질까지 잡아둔 데는 이유가 있다. 세이렌은 일대일로 대치할 때는 별반 위협이 되지 않지만, 다수와 다수의 싸움에서는 충분한 전력이 된다. 특히 미리 대비하지 못한 이들은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에드워드가 팔자에 없는 짐꾼 노릇을 하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자신의 등짝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세이렌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앞을 막는 적을 청소하듯 치워 나가며 에드워드는 앞으로 나아갔다.

사진 속에서 아킨시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매달려 있던 케일리의 안색은 당장 쓰려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 거기서 만 하루가 더 지났다. 잘 버티고 있을까. 상대가 아킨시나든 뭐든 상관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해서 살아주기만 한다면, 에드워드는 그걸로 족했다.

희망을 가진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초침이 도는 매 순간마다 그가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절망에 담금질을 당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그래서 에드워드는 염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부디 이 빌어먹을 수로의 끝에서, 새도 아닌 주제에 새장에 갇힌 멍청이가 살아서 자신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기만을.

간절히.

◇ ◆ ◇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뜨거운 자쿠지나 핀란드 사우나에 처박힌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혈관까지 먹기 좋게 익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바람 선선히 부는 지상으로 탈출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더 이렇게 매달려야 하는지, 혹은 정말로 살아남을 방법이 있기는 한 건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이 어두컴컴한 미래였다.

새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이런 상황이 찾아오리라고 짐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킨시나도, 케일리도 상상력이 빈약했다는 이유로 작금의 상황에 빠진 상태에서 서로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런 데 쓸 힘이 있다면 불안정한 횃대에 매달리기 위해 쓸 수 있도록 아껴두는 게 나았다.

지금까지 서로를 무언가의 메이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확실히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손을 잡아야 한다. 손을 잡는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분열하면 무조건 죽는다.

새장이라는 게 말 그대로 커다란 새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케일리는 조금 허탈해졌다. 그저 새장에 매달아놓는 것뿐이라면 감옥에 갇힌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감금상태였다. 쫄쫄 굶으며 생리현상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당장 죽지는 않는다. 요는, 에드워드가 자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다.

……라고 처음에는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피투성이의 생물이 파닥파닥 날아오르려 시도하며 시시때때로 새장에 몸을 부딪쳐 오는 것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그냥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떨어뜨리려 드는 이종이 입가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걸 보면서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건 어느 정도 타이밍을 예상할 수나 있었다. 날개를 단 새끼 이종은 아직 제대로 날지 못해 새장에 닿기까지 제법 시간을 필요로 했고, 몸을 부딪쳐 흔들어보는 것 정도밖에 할 줄 몰랐다.

가끔 침을 질질 흘리며 올려다보는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짐승 새끼 같아 오돌토돌 소름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렇다 할 위협이 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대충 날아볼 것 같으면 횃대를 꽉 붙잡으면 되는 노릇이니까.

문제는 날개 달린 새끼보다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 같은 이종이었다. 이종‘들’이 아닌 이유는 문제가 되는 이종이 단일개체이기 때문이다.

아킨시나의 스타일리스트인 인어를 잡아오라고 시켰던 그 남자는 아무래도 이민국보다 그들 쪽에 유감이 많은 것처럼 질척거렸다. 어차피 널린 게 시간이라는 태도로 새장 밖에서 아킨시나를 툭툭 건드리며 저속한 물음을 던져댔고 심심하면 새장에 해골을 던져 흔들었다.

대체 뭘 하던 공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척척한 바닥에는 잘 보존된 백골이 굴러다녔다. 그중에 제일 던지기 쉬운 건 두개골이었고 새장에 맞아 부서지는 뼈를 바라보며 케일리는 이종들에게는 고인을 향한 존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남자의 시비는 대체로 둘의 뜨거운 과거를 솔직하게 불어보라는 추잡한 내용이었는데, 케일리의 입장에서는 어째서 이종들의 치정싸움에 자신이 피해를 입어야 하는지 의문스럽기 짝이 없는 없었다.

정작 자신을 잡아온 구울은 구석에 놓인 낡은 소파에서 코를 후벼 파며 그 모습을 지루한 듯 구경하거나, 뒤집어져 자는 게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오늘은 어수선하게 움직이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종종 지나다니던 이종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종들은 어딘지 날개 달린 새끼를 꺼렸고, 하수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게 트인 공간의 한가운데에 둥지를 튼 그것은 며칠 내내 방치돼 있다.

가끔 찾아와 아킨시나를 집적이는 이종 남자에 따르면, 새장이란 것 자체가 날개 새끼를 굶겨 결국에는 맛없는 음식을 뜯어먹게 만드는 일종의 고문도구인 모양이다. 그게 라이칸을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을 먹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날개 새끼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힘이 다 빠진 자신이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우울한 현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횃대에 매달릴 수 있도록 손발의 결박이 풀렸다는 것 정도였는데 그래 봤자 새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소용없었다. 손발의 자유를 되찾은 순간 목숨을 위협받는 건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니다.

케일리는 역사나 신화 같은 것에 깊은 관심을 둔 적이 없었지만, 자신이 갇힌 데가 어딘지 지옥의 문을 숨긴 카타콤 같다고 생각했다. 로마가 아니라, 수백만 구의 유골을 숨기고 있는 프랑스의 카타콤이었다.

굴러다니는 백골부터 시작해 어둠침침하고 음습한 분위기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뉴욕의 지하에 이런 공간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에드워드가 뉴욕을 싫어하는 이유를 몸으로 느끼며 케일리는 횃대 위에 빨래처럼 늘어진 채 멍하니 생각을 계속했다.

사실 그는 스스로가 불평불만을 말할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아킨시나에게 유감이 있던 이종에게 잘못 걸려 지금은 그가 더 주목받고 있었지만, 시작을 따지면 자신이 그의 배신을 풍기는 뉘앙스로 착각을 심어준 게 문제였다. 만약 이민국과의 연관이 없었더라면-실제로 없기도 하고.- 아킨시나는 지금까지처럼 온실 속 왕자님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터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킨시나만은 안전할 것이라 잘못 계산하고 그를 방패삼은 자신의 판단미스가 불러온 비극이라는 걸 인정했다. 게다가 에드워드에게 유감이 있다고는 해도 결국 그는 동료애고 뭐고 굳이 손을 뻗을 필요도 없는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주었다.

힘이 빠져 미끄러질 뻔할 때마다, 손목을 붙잡는 단단한 손길에 목숨을 구하다 보면 남의 손으로 복수를 하려 시도했던 찌질한 과거 정도는 용서하게 되는 법이었다.

지하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케일리는 자신이 새장에 갇힌 지 얼마나 흘렀는지 추측해보려다 그만뒀다. 얼마나 지났는지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배가 고프다거나, 팔이 아프다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등의 생각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무래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아킨시나는 아직 멀쩡해 보였지만 피의 힘도 완전히 떨어진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래도 체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온몸에 감각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제법 시간이 흐르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자신은 천사처럼 생긴 악마에게 잡아먹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걸까. 미래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별로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도 않았지만, 역시 가능하면 살고 싶은 게 모든 생물의 본능이다.

몇 번인가 미끄러 떨어질 뻔한 걸 아킨시나가 구해줬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구해줘야 할 의리도 이유도 없었고 스스로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케일리는 그저 운이 없어 악연으로 엮인 구울에게 잡혀온 것뿐이었지만, 아킨시나는 제 핏줄에게 내동댕이쳐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똑같이 새장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더 불쌍한 건 아킨시나다. 케일리는 이미 이민국에 대해 아는 걸 죄다 털어놨지만, 아킨시나는 여전히 괴롭힘을 당했다. 대체로 치정문제였다. 정말이지 가엾기 짝이 없었다.

살아남는 데에는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뭐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떨어져버릴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육체의 한계는 정신을 갉아먹는다.

케일리는 고통에 둔감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발화점도, 역치도 높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인간이었다. 영원히 버틸 수는 없다. 언젠가는 한계가 찾아왔고 그 타이밍을 뒤로 미루는 것 정도가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팔다리가 떨어져나갈 것만 같은 고통에 케일리는 계속해서 뭔가를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에드워드는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는 것 자체가 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다 죽어가는 마당에 답고 답지 않은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신을 현혹하려 들던 아킨시나의 말이 자꾸만 가슴 한켠에 걸렸다. 뱀파이어를 죽이고 싶다면 심장을 노리면 된다. 그 말은, 에드워드라고 해서 마냥 불사신은 아니며 그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자신이 구울과의 대치에서 그를 구해내지 못했다면 벌어졌을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할 수 있기 때문에 총을 든 것뿐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에드워드가 자신을 구하다가 다치는 정도라면 괜찮았다. 어차피 그는 금방 나았고 게다가 쉽게 죽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예컨대, 구울과 같이 에드워드로도 쉽게 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상대처럼 말이다.

에드워드는 굳이 구울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한 게 아니라면, 소모적인 전투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 보면 자신과 비슷한 효율주의자였다. 입 때문에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상황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케일리는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자는 주의였고 그 안에 에드워드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게 그를 진짜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필요하냐고 하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삶에 대한 집착이라는 건 어려운 문제다. 특히 자신의 경우 그 정도가 심했다. 살고 싶다. 그건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든 그럴 테다.

하지만 누군가를 희생해서까지 살고 싶은가를 따지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 희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겠지만, 자신에게 목숨을 걸고 구해낼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케일리는 진심으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한숨만 나와 케일리는 이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계산기나 두드리는 스스로가 다소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만약 자신이 생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뤄야 할 일이 있는 거라면 또 모를까. 에드워드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하러 올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머릿속에서 스스로를 저울에 올리며 케일리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곤란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사람 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읽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곤란하기는 매한가지다.

자신은 어느새 에드워드를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면 이건 그저 파트너를 걱정하는 단순한 마음일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직장동료가 다 뭔가, 친구나 가족을 가지고도 이렇게까지 골몰해본 적은 없었다.

단지 상황의 문제일까?

그렇다기에 자신은 제법 진지하게 에드워드를 생각했다.

그에게 악의를 드러내는 아킨시나가 못마땅했다. 그가 무릅써야 하는 게 죽음이라면, 자신을 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황당한 생각까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킨시나에게 뱀파이어의 약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정확히 같은 심경으로 케일리는 자신의 감정이 대단히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상황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정말로 곤란한 감정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거나, 아마도 자신의 감정을 알게 되면 기뻐하지 않을까 라는 등의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좀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옆집 백작가의 레오폴드가 남자 애인을 데리고 왔으니, 나는 남자에 뱀파이어인 애인을 데리고 와봤어요, 라고 말하면 아마 집안이 발칵 뒤집히다 못해 사지가 묶인 채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게 그나마 유일하게 행복한 결말일 터다. 적어도 정신병원에 감금될 때는 로체스터라는 성을 계속 쓸 수 있을 테니 그 정도면 해피엔딩이 맞다.

그에 비해, 불행한 결말은 수도 없이 떠올랐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사랑의 도피라는 건 21세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신분제도가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이 시점에 급이 맞지 않다고 반대할 만큼 보수적인 사람은 로체스터 일가에는 별로 없었다.

문제는 종족이다. 로체스터 일가는 비교적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으나, 그게 개나 늑대나 뱀파이어를 애인으로 삼으려 드는-심지어 수컷이다!- 차남까지 포용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결국 자신과 에드워드는 그냥 이대로 멀어지는 게 가장 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일리는 자신이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투신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로미오와 줄리앙도 아니고, 굳이 정신병원에 갇힐 위험을 무릅쓰고 이뤄야 할 만큼 절박한 사랑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케일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가족을 버리고 에드워드를 선택하든지, 에드워드를 버리고 가족을 선택하는 둥의 사치스러운 고민을 할 군번도 아니다.

새어나오는 건 한숨이요, 느는 건 주름이다. 턱끝에서 뚝, 뚝, 쉴 새 없이 땀방울이 떨어졌다. 더 이상 잡생각을 떠올릴 여유도 없다. 여유가 없어서 어떻게든 정신을 분산해보려 했지만 슬슬 한계다. 자신은 얼마나 여기에 매달려 있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만 하루 이상은 지났겠지. 체력의 한계는 곧 정신력의 한계였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가만히 고개를 든 케일리가 아킨시나를 쳐다봤다. 그도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이쪽에 비하면 훨씬 가뿐한 표정이었다. 확인하듯 주위를 둘러보자 새장 밑에는 얼쩡거리며 아킨시나를 놀리던 남자도,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구울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케일리는 횃대를 붙잡고 앉아 있는 아킨시나를 향해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요.”

아킨시나는 얇은 횃대 위에 앉아 있었지만, 케일리는 거진 매달려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앉아 있다가 떨어지는 것보다는 손발을 써서 매달리는 게 훨씬 안정적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일리를 향해 아킨시나는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는 양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밑으로 떨어져서 저 날개 달린 녀석을 붙잡고 있을 테니까, 그사이에 도망치세요. 이번에는 마법도 없으니까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을 거예요. 날 데리고 가는 것보다 훨씬 도망치기 쉬울 거고, 당신은 라이칸이니까 뱀파이어나 구울처럼 강한 상대와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어요.”

“지금, 자살하겠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고결한 희생이라고 해주면 안 될까요? 아킨시나 씨, 미안한데 길게 말할 힘이 없어요. 할 건지 말 건지, 그것만 대답해줘요.”

케일리에게는 정말로 더 이상 낭비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긴 이야기도 아닌데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기력을 소모했다. 케일리는 더 늦기 전에 아킨시나라도 탈출시키는 길을 골랐다. 지금 상황에서 골라잡을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어이가 없다는 양 자신을 바라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아킨시나를 향해 케일리가 단호하게 첨언했다.

“둘 다 죽으면 개죽음에 자살행위지만, 그로 인해 하나가 살아 나갈 수 있다면 그건 나쁘지 않은 전략이에요. 어쨌든 둘 다 죽는 것보다는 괜찮은 결과이기도 하고.”

“그래서, 날 위해서 희생해주겠다고 선심이라도 쓰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쪽을 희생해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더 확률이 높은 쪽을 택하려는 것뿐이에요.”

케일리는 성자가 아니었고 뭐 대단한 삶의 목표도 없다. 그러니 여기서 끝난다고 해서 크게 아쉬울 건 없다. 가능하면 살고 싶었지만 선택지에 삶이 없다면 매달릴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킨시나를 이용한다는 카드를 쓰는 게 이득이다. 자신이 희생하고 아킨시나가 살아 나가면 그는 자신에게 빚을 진 게 된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래다.

“그 부탁이라는 게 뭐기에 목숨까지 겁니까?”

어딘지 기가 질린 얼굴로 아킨사나가 들어나 보자며 그렇게 말했다. 케일리는 그 또한 다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나는 사실을 쉽게 꿰뚫었다. 여기서 둘 다 살아 나가는 방법 같은 건 없다. 그런 게 있었더라면 좀 더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시도했을 테니까.

비 오듯 흐르는 땀방울이 눈을 찔렀다. 그걸 피하려 자못 인상을 찌푸린 케일리가 대답했다.

“에디를 만나거든, 난 이미 죽었으니까 구하러 오지 말라고 전해줘요.”

“그게 무슨……!”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해도 된다면, 둘이 너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줘요. 에디도 친구 없거든요.”

아무래도 그런 성격이다 보니…….

남 이야기를 할 입장이 아니라는 현실을 무시한 채 어딘지 먼 곳을 바라보며 케일리가 그렇게 말했다. 농담이나 장난이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마주쳐 오는 케일리에 아킨시나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현명한 걸지도 모른다.

새장 밑에서 버티는 날개 달린 이종에게서는 위험한 냄새가 났다. 태어나 줄곧 별장에 갇혀 살아 전투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지만, 아킨시나에게도 본능은 있었다. 둘 다 살아 나갈 수 없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이를 살리는 게 맞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선뜻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아킨시나는 그의 말에 따르는 게 정말로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거기에는 영영 바른 답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결단을 촉구하는 케일리의 종용에 아킨시나가 꾹,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케일리는 조금 웃었다. 영 못 미더운 동료기는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가족들에게도 한마디 정도 유언을 남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남겨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더 떠오르는 미련은 없었다.

“그를 잘 부탁해요, 유리.”

꺼질 듯한 목소리가 온화하게 허공으로 흐트러졌다. 곧 떨어질 아래를 내려다본 케일리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날개 달린 새끼 짐승의 눈이 어딘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감각이 없는 팔에서 힘을 뺐다. 마지막 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이 머저리 새끼가!’ 따위를 외치는 에드워드의 것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했는데.

뭐, 아무렴 어떤가. 파노라마는 리모컨으로 돌릴 수 있는 케이블 채널이 아니다. 원하는 쇼이기만 하면 에피소드가 달라도 그럭저럭 만족했다.

중력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을 가르고 추락하는 기분은 생각처럼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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