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Nightmare before Christmas
케일리가 죽음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출장으로 잠깐 저택을 비웠다던 로저와 몇 달 만에 얼굴을 마주한 케일리는 그의 여전한 수다의 희생자가 되어야만 했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듣고 흘렸겠지만, 그가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의 심장을 가졌다는 약간의 죄책감으로 오래간만에 그의 신경을 긁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던 참이었다.
시답잖은 불평불만을 풀어놓던 로저의 입에서 자신이 잠든 사이 에드워드의 기행 몇 가지를 듣게 된 케일리는 답지 않게 조금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이 깨어난 방은 에드워드의 침실이었는데 내부의 문으로 이어진 결코 좁지 않은 옆방에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가득 찬 포장도 뜯지 않은 신상품이 가득했다.
품목은 옷부터 시작해 시계, 구두, 가방을 비롯해 방 안에 백화점을 차리기라도 할 것처럼 엄청난 양의 물건이었다.
잠자코 케일리의 곁을 지키던 에드워드가 그가 깨어나면 입고 걸칠 것이 걱정되어 하나둘 주문하기 시작한 것들이 두 달 사이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는 사실에는 천하의 케일리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몸은 하나뿐이었는데, 에드워드가 사들였다는 물건은 평생을 돌려써도 부족할 만큼 많아 보였다. 금전감각이 둔한 걸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케일리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 규모의 과소비는 해본 역사가 없었다. 과연 뱀파이어다운 스케일이었다.
“너 자는 사이에 방 하나를 채웠다고. 말이나 돼?”
돈도 많은 주제에 마치 자신의 살을 떼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불만을 토로하는 로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일리가 옆에서 시침을 떼는 에드워드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에디, 애인을 가지고 인형놀이를 할 수는 없어요.”
대답은 로저에게서 돌아왔다.
“아니야, 내가 바란 반응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다른 문제가 있어?”
“젠장맞을 커플 바퀴벌레 같은……. 아니, 하나는 빼고……. 아냐, 역시 둘 다…….”
중얼중얼 끝도 없이 늘어놓는 로저의 편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뿐이랴, 로저의 손에서 애지중지 자라난 에드워드는 당연하다는 양 그를 비웃으며 신랄한 현실을 투하했다.
“저쪽도 엄밀히 따지면 접니다만.”
“이러다 언젠가는 둘 다 꼴 보기 싫어질 것 같아서 무서울 지경이라고.”
“바라던 바입니다.”
말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막내아들놈을 바라보며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던 로저는 결국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쾅! 요란스레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벼운 비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향해 아킨시나의 이야기를 꺼낸 건 순전히 그날의 기분이 썩 괜찮았다는 이유였다.
줄곧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저택까지 직접 찾아오지 않던-더 정확히는 못하던.- 라이칸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꽁꽁 가둬두고 자신만 아는 반푼이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길고 긴 삶을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관대함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한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구를 상대로 뭘 느끼는지 모조리 꿰뚫을 수 있으니 굳이 물리적으로까지 묶어놓을 필요도 없다는 건 당분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라이칸이 그러하듯 오래된 뱀파이어의 저택에 들어서기를 꺼리는 유리 아킨시나는 크리스마스를 빌미로 자신들을 악의 소굴에서 끌어내려 몇 번인가 시도해 왔다. 악의 소굴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에서나 그러할 뿐, 로저의 자식인 에드워드와 그런 에드워드의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는 케일리에게는 더없이 편안한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어찌됐건 라이칸인 유리와 세이렌인 리사는 로저의 존재감 탓에 저택 가까이 오는 것도 어려운 모양이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케일리가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만 했을 뿐 직접 찾아오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곧 크리스마스잖아. 만나서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선물도 준다고 나오라던데 어때? 가고 싶어?”
“뭐, 가기 싫을 이유도 없죠.”
그렇게 간단한 대화가 오갔고, 일주일이 지난 금요일 점심 무렵으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장소는 19세기에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런던의 자존심으로 나이트 브릿지에 우뚝 선 헤롯 백화점이었다.
현재, 크리스마스의 향취를 물씬 풍기는 내장으로 단단히 무장한 채 손님을 맞아들이고 있는 헤롯 백화점 안에서 살벌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오늘 모이게 된 계기는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 ◆ ◇
사과와 화해의 장이 되었을 오늘의 약속이 살벌한 파국으로 치달은 전말은 이러했다.
누가 마피아 가문의 외동아들 아니랄까 봐, 유리는 멀쩡히 나타난 케일리를 보자마자 진지한 표정으로 정중한 사과를 건넨 아킨시나가 팔 하나 다리 한 짝은 아무렇지 않게 떼어줄 것처럼 굴었다. 라이칸의 팔다리를 받아봤자 하등의 쓸모가 없는 케일리가 그건 됐고, 평범하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달라고 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사실 크리스마스 선물도 별로 가지고 싶은 건 없었지만 아킨시나의 팔다리를 받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화점의 매장을 몇 군데인가 돌던 케일리가 고작해야 삼십 분도 되지 않는 쇼핑에 질려 제일 가까운 곳에서 적당한 옷을 고른 참이었다. 계산을 위해 상품을 든 아킨시나를 힐끔거리며 한참이나 우물쭈물 하던 점원이 무언가를 결심한 양, 브랜드 명이 찍힌 종이가방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킨시나 씨, 전부터 팬이었습니다. 정말로 좋아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인을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모델을 그만둔 후에도 종종 겪는 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의 말을 건네려던 참이었다. 그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에드워드가 아킨시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 대단하신 앞발로 사인 한번 해주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빼? 닳아? 닳는 것도 아니잖아. 좀 해줘라, 해줘. 펜 좀 잡는다고 발가락이 부러지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에드워드에 인상을 구긴 아킨시나는 결국 그를 상대하는 것보다 점원에게 사인을 해주는 게 빠를 것이라 판단하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거절한다면 정중히 사과의 말을 건네려 불안한 마음으로 대기하던 점원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허둥지둥 감사인사를 내뱉은 점원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의 손에는 유성 펜과 상품 카탈로그가 들려 있었다.
“저, 여기에 부탁드릴게요.”
그녀가 펼친 것은 두 페이지에 걸쳐 커다랗게 이어진 향수 광고였다. 그러니까, 올가을 뉴욕에서 찍은 바로 ‘그’ 향수 광고였다.
반사적으로 깐죽거리던 에드워드를 돌아본 아킨시나의 표정이 더 어두워지기도 힘들 만큼 어둡게 가라앉았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화색이 돌던 에드워드의 얼굴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카탈로그의 사진을 향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벽 하나를 온통 아킨시나의 사진으로 도배할 만큼 그의 거죽을 사랑하는 점원뿐이었다.
“저 망할 사진, 분명히 폐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도 그렇게 기억합니다만…….”
신이 나서 아킨시나를 놀리던 에드워드의 기분이 급격하게 저하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매장 안에서 적당히 어슬렁거리며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리사와 케일리는 굳은 얼굴로 나타난 자신들의 파트너가 어째서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를 수밖에.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 같은 하루는 그렇게 서막을 열었다.
◇ ◆ ◇
결국 나아지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에드워드와 아킨시나가 휴대전화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걸어댔다.
에드워드는 모든 일의 원흉인 데이브-보다는 좀 더 뉴욕 이민국에서 출자한 회사에 클레임을 거는 것에 가까웠다.-를 들들 볶았으며, 아킨시나는 소속되어 있던 모델 에이전시에 연락해 현 상황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리사와 케일리로 말할 것 같으면 결코 의견을 일치시킬 수 없을 것만 같던 둘이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딘지 동질감을 느꼈다.
그까짓 사진 하나가 그렇게 중요할까. 하지만 둘에게는, 적어도 에드워드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모양이었다.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 에드워드는 모든 일의 원흉이 아킨시나인 것처럼 살벌한 태도를 유지한 채 지구 반대편쯤에 있을 데이브를 향해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케일리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그 사진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다. 가족들에게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인상이 다른 사진이었는데 에드워드가 그렇게까지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문제의 카탈로그를 꺼내 온 직원이 ‘요즘 이 사진이 얼마나 화제인데요. 모르셨어요?’ 하고 여분으로 가지고 있었다던 것을 건네주면서 ‘그런데 상대 모델 분은 누구인가요? 인터넷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고, 메이커에서도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어서 정체가 뭐냐고 난리지 뭐예요.’ 하고 묻기까지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눈이 마주친 순간 케일리는 그녀가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걸 확신했다. 에드워드가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그는 여전히 화를 냈다. 아마 그의 복잡한 심경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게 될 날은 아직 머나먼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붙잡고 불이 난 둘을 내버려둔 채 리사와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손에 이끌려 저택으로 돌아왔다.
팔다리를 대신해 사과의 의미로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들고 먼저 올라간 케일리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에드워드는 마침 돌아온 로저와 마주쳤다.
그의 손에 들린 카탈로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로저는 막내아들의 심상찮은 기색에 끈질기게 매달려, 결국은 케일리와 아킨시나가 나란히 실린 향수 광고를 목격하게 된다.
“포토샵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는 로저의 평가에 에드워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케일리와 아킨시나가 절묘하게 엮인 그 광고사진은 몇 번을 봐도 기분이 더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죄다 회수해버리고 싶었지만 데이브의 말에 따르면 쓸데없이 손을 쓰는 것보다는 모든 게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나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엄청난 주목을 모으는 케일리의 정체를 더 비밀스럽게 만드는 건 역효과였다.
“포토샵이 대체 뭡니까?”
로저는 시비를 걸듯 묻는 막내를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에디, 너같이 생긴 애들은 몰라도 되는 거야.”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실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로저에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그것 참 기분 더러운 대답이로군요.”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게 기계문명과는 도통 가까워질 줄을 모르는 에드워드에게 로저가 할 수 있는 가장 깔끔한 설명인 동시에, 제 아들의 외모에 대한 극찬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칭찬을 받은 당사자뿐이었다. 포토샵으로 수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라는 게 그와 쏙 빼닮은 스스로를 향한 칭찬도 된다는 것 또한 그러했다.
“쟤는 이런 짓 안 해도 쉽게 유명해질 방법이 열 가지는 더 있을 텐데 왜 꼭 솔선수범해서 자기 무덤 파는 걸 고른다니?”
“제가 압니까?”
“그건 그렇고 같이 나가는 것 같더니 왜 혼자야?”
드디어 바위에 들러붙은 따개비 같던 그 망할 인간을 뜯어낸 것이냐고 화색이 도는 얼굴로 묻는 로저를 향해 에드워드가 위층을 눈짓했다.
“짐 정리한다고 먼저 올라간 것뿐입니다만.”
쓸데없이 로저에게 잡혀 시간만 낭비했다. 꼴도 보기 싫은 카탈로그를 내버려둔 채 에드워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그런데 이 사진 진짜 잘 나오긴 했다. 케일리 안 같아.”
“그러고 보니 그쪽 점원도 눈앞에 두고 못 알아보긴 하더군요.”
“역시 포토샵이…….”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로저를 내버려둔 채, 에드워드는 케일리를 쫓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 ◆ ◇
“…….”
계단을 올라와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에드워드가 발을 멈췄다. 방 안에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뜬 그를 향해 마침 돌아선 케일리가 반가움을 드러냈다.
자신을 바라보며 생긋 웃는 얼굴을 마주한 채 에드워드는 자신의 시력에 크나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가능성 없는 확률인지를 고려할 여력도 없었다. 제발 시력에 문제가 생긴 거였으면 좋겠다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케일리는 그만큼 황당한 꼴을 하고 있었다.
“아, 사실 하고 나서 좀 후회하긴 했는데…… 그렇게 안 어울려요?”
옅은 밀빛을 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온데간데없었다. 빡빡 밀려 사라진 머리카락은 흔적도 없이, 하얀 머리통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이 이질감을 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렸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이러면 아무도 못 알아볼 거 아니에요.”
케일리가 하는 말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 있는 에드워드를 향해 부연설명이 날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게 싫은 것 같기에요.”
아니었나요?
고개를 기울이는 하얀 머리통은 민둥산이었다. 거기에 매달려 있어야 할 머리카락이 없었다. 단 한 올도.
“너 진짜…….”
“배려심 가득한 연인이죠?”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야.”
다른 말을 떠올릴 수가 없어 그렇게 내뱉은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다가왔다. “칭찬 고마워요.” 말하며 뺨에 입을 맞추는 민둥산 머리통은 가까이서 보니 파괴력이 더했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면서도 에드워드는 “나야말로 생각해줘서 고오맙다.”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스럽게도 정말로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건넨 말은 아니었다.
“별로예요?”
에드워드가 황당한 얼굴로 던지는 말을 듣고서야 어딘지 시무룩한 표정을 한 케일리가 제 민머리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처음으로 케일리의 머리를 직시한 에드워드는 새삼 저 추진력을 이 나라의 정치가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면 세상이 아주 급진적으로 바뀌지 않을까 감탄이 들 지경이었다.
하여튼 말릴 틈도 없이 일단 움직이고 보는 성격은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상황이 끝나 있으니 뒤늦게 말해봤자 소용이 있어야 말이지. 게다가 굳이 따지면 에드워드는 그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서 문제일 수는 있겠지만.
짐을 정리하겠다며 먼저 올라갔던 녀석이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났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없다고 해서 케일리가 카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머리카락은 살아 있는 한 자란다. 손발톱이 자라는 것처럼 앞으로도 자랄 거다. 더 이상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면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자신의 뺨에 손을 댄 채 우울함 섞인 시선을 마주쳐 오는 케일리를 에드워드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깊게 패인 눈매와,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시선을 끌었다. 머리카락이 없다 보니 오히려 평소보다 시선을 둘 곳이 적어 지나치기 쉬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뜬 푸른빛 시선에 점점 다른 색이 섞여갔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쁜 외모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미인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그건 케일리보다는 자신의 외모가 그랬다. 어쨌든 눈 달린 것들이 죄다 녀석만 쳐다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얼굴을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니 크게 의식한 적이 없기도 했다.
새삼스럽게 뜯어보게 된 케일리의 얼굴은 좀처럼 눈을 뜰 줄 모르던 두 달 동안 질릴 만큼 지켜본 것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게다가 녀석이 이제 나이를 먹지도 않을 테니 줄곧 이 얼굴일 테지.
눈을 감으면 저절로 떠오를 만큼 익숙해진 케일리의 얼굴을 마주한 채 에드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이렇게까지 중요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아니, 문제는 머리카락이 아닐지도 몰랐다.
에드워드는 눈을 내리깐 채 음영을 만든 긴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케일리, 너.”
“네?”
“그거 원상복귀 될 때까지 밖에 싸돌아다니지 마. 정 나가고 싶으면 모자를 쓰든지, 가발을 쓰든지 뭐든 쓰고.”
“보기 안 좋아서요?”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연놈들이 쳐다볼 생각을 하면 화딱지가 난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에드워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나가는 인간들이 죄다 까마귀 고기를 잘못 처먹은 것도 아닌데 반짝이기만 하면 채어 갈 리가 없었다. 반짝거린다고 쳐다볼 리도 없었다. 게다가 쳐다보는 게 싫다는 이유는 이미 케일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뒤였다.
아직 그 말에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놈은 어째서인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다른 연놈들이 알아보는 게 싫어서’라는 이유를 꿰뚫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망할 놈의 심장이…….
원래도 눈치가 없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자신의 심장까지 가져간 덕분인지 쓸데없이 많은 걸 읽게 됐다. 에드워드는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한 이유에 인상만 잔뜩 찌푸린 채 뭐라고 대답을 해볼까 고민에 빠졌다.
솔직하게 말한다고 손해 볼 것도 없겠지만 역시 유치했다. 로저가 들으면 하루 내도록 배를 잡고 웃을 게 뻔했다. 케일리는 겨우 그런 걸로 비웃음을 던질 만큼 성실하지 않았으나 그 외의 모든 놈들이 웃을 거다.
그렇게 오만상을 찌푸린 에드워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쪽.
입술에 맞닿은 감촉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에드워드는 대체 지금 이 순간의 뭐가 케일리로 하여금 자신에게 뽀뽀를 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겨우살이가 있어요.”
케일리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확실히 외출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문 위에 겨우살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크리스마스다. 저택 곳곳에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장식품이 걸려 있었으니 이상할 건 없다.
“크리스마스잖아요. 너무 화내지 말아요. 어차피 에디랑 같이 나가는 게 아니면 나갈 일도 없는데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요.”
싱글싱글 웃으며 맞는 말만 꺼내는 저 입이 참으로 얄미웠다. 복수도 뭣도 되지 않겠지만 겨우살이 밑에 선 연인의 입술에 에드워드는 툭,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커다란 두 손이 케일리의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이번에는 심술보다도 호기심이었다. 예쁘게 잘 깎은 머리는 그 짧은 시간에 뭘 어떻게 했나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밀려 있었다. 그것보다 대체 모로 깎은 걸까?
“네가 깎은 거냐?”
“네, 둘이 바빠 보이기에 잠깐 쇼핑하러 갔다 왔잖아요. 그때 샀죠. 의외로 머리 깎는 기구도 진보하고 있더라고요. 저소음 저진동 같은 옵션도 있었어요.”
“그러냐…….”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다. 살면서 남의 빡빡 민머리를 만져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순혈 뱀파이어라도 그렇게 흔한 경험은 아닐 테다. 다른 사내자식의 민둥머리를 보고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지는 않았으니 못할 경험이라기보다는 이상한 경험이라는 게 어울릴 것 같기는 했지만.
“반질반질해.”
가만히 케일리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에드워드가 불쑥 말했다.
“그냥 피부인데요.”
“아냐, 너도 한번 만져봐. 그럼 이해할 거야.”
“음, 잘 모르겠는데요. 만져보니까 마음에 들어요?”
에드워드를 따라 자신의 머리를 슥 만진 케일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위를 다시 슥슥 쓰다듬으며 에드워드가 말했다.
“싫은 건 아니야. 그래도 다음에는 그러지 마.”
“왜요? 씻기도 편하고 좋은데.”
“난 머리카락 있는 게 더 좋아.”
“머리카락이 있으면 뭐가 달라요?”
“잡을 수 있잖아.”
“음. 확실히 스킨헤드는 잡을 데가 없긴 하죠.”
“그건 스킨헤드가 아니라 대머리……. 어쨌든 별로야. 게다가 쓰다듬는 맛도 없잖아.”
“쓰다듬는 건 지금도 할 수 있어요.”
“난 머리를 만질 때는 최소한 머리를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다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털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뭐, 꼭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민 것도 아니기는 했고 그가 지나치게 광고사진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반쯤 충동으로 한 선택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아쉬워할 줄은 몰랐다.
“에디, 다 큰 성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건 무례한 행동이에요.”
줄곧 신경 쓰였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네 머리카락 가늘고 부드러워서 손가락에 스치는 거 기분 좋아. 다시 나면 한번 너도 만져봐.”
머리카락이 사라진 머리를 아쉬운 손길로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하니 비장감까지 감돌았다. 정말로 아쉬운 것처럼 중얼거리는 에드워드에 케일리는 한 번 물어나보고 밀걸 그랬나 조금 후회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뭐, 좋아요. 다시 털이 나면 자라도록 내버려둘게요.”
그런데 머리카락이 자라나기는 하는 건가요?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드는 생각이었는데 케일리는 스스로를 좀비 비슷한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사실 그렇게 묻기도 했다.
“저는 좀비 같은 건가요?”
별반 심각해 보이지도 않는 표정이었지만 에드워드는 기겁을 했다. 자신이 어딜 봐서 좀비 같은 걸 데리고 사는 악취미 뱀파이어로 보인단 말인가.
케일리는 엄연히 살아 있었다. 인간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게 녀석을 좀비로 만드는 건 아니다. 살아 있는 부분만 남아 있으니 평범한 인간에 비해 부족한 게 많기는 했다. 생명활동 자체가 인간과는 다른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좀비는 아니다. 좀비는 죽은 주제에 살아 다니는 워킹 데드였지만 케일리는 리빙 데드다. 엄밀히 말하면 한번 죽긴 했지만 지금은 살아 있다. 그러니 좀비는 아니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그를 옹호하던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문득 문 위의 겨우살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 받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 일 년에 한 번씩 뭘 챙겨야 하는 건 귀찮아서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너무 자주 돌아오잖아.”
“음,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데요?”
“일 년이 계속 반복되고 끝나지도 않는다고 생각해봐.”
“뱀파이어는 참 어렵네요. 크리스마스잖아요. 좀 더 즐거워도 된다고 생각해요.”
“난 다른 걸로 즐거운 게 좋아. 믿지도 않는 종교의 생일파티를 같이 즐길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제법 단호하게 수많은 인류의 명절을 부정하는 에드워드에 케일리가 잠시간 침묵했다. 이렇게까지 크리스마스를 싫어할 줄은 몰랐는데. 사실 머리를 민 것도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첫 번째 서프라이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계획에 궤도수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미 산 선물을 물릴 수도 없었고, 자신이 잠든 사이 방 하나를 채운 에드워드의 소비벽에 뭔가를 돌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굳이 따지면 크리스마스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건네는 걸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다는 건 문제다.
“그럼 이렇게 해요.”
그리고 케일리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매년 크리스마스의 색으로 물든 로체스터 가의 저택에서 보낸 기억이 쌓이고 쌓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불러일으켰다. 에드워드도 그런 걸 한 가지쯤 가지고 있었으면 했다.
“에디가 원하는 걸 뭐든 한 가지 들어줄게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여전히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채였던 손을 가볍게 치워낸 케일리가 한 발짝 물러서 가만히 에드워드를 마주 보았다. 어딘지 얼빠진 얼굴을 한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악동처럼 씩 웃어 보였다.
“자, 그럼 올해의 소원을 말해보세요.”
진심으로 뭐든 들어줄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에 에드워드는 저 대머리가 진심으로 저러는 건가 잠시간 고민했다. 진심이든 가식이든 일단 원하는 걸 말한다고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별로 뜯어먹고 싶은 것도 없었고, 사실 살아온 시간부터 시작해 어딜 어떻게 봐도 자신이 훨씬 가진 게 많을 텐데 저런 말을 꺼내는 게 가소롭기도 했지만 그 점까지 포함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눈에 뭐가 껴도 단단히 낀 것 같기는 했다. 스스로의 감각기관이 하나하나 케일리에게 잠식당해 마지막에는 놈의 덜떨어진 부분까지 전부 예뻐 보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더욱 무서운 건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는 점이다.
어찌됐건 천하의 케일리가 제 입으로 뭐든 들어주신다는데 이 좋은 기회를 거절할 에드워드가 아니었다. 뭐든지 말하라며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연인을 향해, 에드워드가 마주 웃었다.
“자위 쇼.”
아무렇게나 뒤로 넘긴 금발 뒤에 따로 조명판을 세운 것처럼 빛이 나는 화려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 화려한 머리통 위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겨우살이를 바라보며 케일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그 말에 다소 황당한 얼굴을 했다.
“너, 그때 어영부영 안 하고 넘어갔잖아.”
자신은 변태가 아니라고 주장하듯 덧붙이는 에드워드에 가물가물 떠오르는 기억이 있기는 했다. 물론 자위 쇼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자위는 했다. 게다가 본인도 즐겼으면서. 약간의 책망을 담아 케일리가 말했다.
“에디, 끈질긴 남자는 미움받아요.”
“난 원래 끈질겨. 순혈 뱀파이어가 생피를 안 마시면서 사는 건 인간들이 채식주의자로 사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끈질김이 필요하거든.”
“자위랑…… 자위 쇼의 차이가 뭔데요?”
“일단 시작해봐. 아닌 것 같으면 말할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처음 에드워드에게 주고 싶었던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힘들거나 어려운 소원도 아니기는 했다.
“뭐, 알겠어요. 그리고 소원은 끝나면 다른 걸 말해줘요. 남 자위하는 걸 보는 게 일 년에 한 번밖에 빌지 못하는 소원이라는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진심으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 같은 동정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일인용 소파를 끌어다가 침대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구경할 준비는 다 됐다는 것처럼 자신을 올려다보는 거만한 시선에 케일리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양, 픽 바람 빠진 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침대에 걸터앉은 케일리가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는가 싶더니, 엉덩이를 들고 곧장 하의를 내렸다. 속옷까지 단번에 끌어내리는 남자다운 몸짓을 바라보며 에드워드는 그에게서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 같은 걸 기대하는 건 단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얀 허벅지 사이에서 축 늘어진 성기에 하얀 손가락이 얽혔다. 몸 전체가 그러하듯 색소가 연한 살덩이를 감싸 쥔 손이 느긋하게 그것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전조도 없이 시작된 자위를 바라보며 소파에 앉아 있던 에드워드가 가만히 등을 기댔다. 드레스 셔츠를 차려입은 채 하반신만 벗어 던진 위아래의 갭이 제법 봐줄 만했다.
선홍빛으로 달아오른 귀두 끝을 몇 번인가 문지르던 그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별반 급할 것도 없다는 양 제 성기를 몇 번인가 훑어 반쯤 세워놓은 케일리가 고개를 들어 뭔가를 찾듯 헤매는 시선을 던졌다.
아무래도 자극이 부족했다. 그냥 만지고 세워서 흔들다 싸기만 하는 것과, 에드워드가 기대하고 있는 자위 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뜬금없이 포르노라도 틀어보라고 할 수는 없으니 뭔가 야한 생각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야한 생각, 야한 생각.
별로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서 케일리는 기숙학교 시절 동기들이 몰래 들여오곤 하던 포르노 DVD의 영상을 되짚기로 했다. 당시 기숙사의 마돈나로 떠올랐던 금발 포르노 스타 제이미의 가슴이 흔들리는 모습을 상상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던 그의 시야에 문득 에드워드의 머리색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에디도 금발…….
가슴은 없었지만 제이미와 비교해도 떨어지기는커녕 압승을 할 정도로 훌륭한 미인이기도 했다. 입으로 깎아먹지만 않는다면 굳이 몸을 굴리지 않아도 얼굴 하나로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걸 보면 아킨시나와 비슷한 조건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고른 에드워드가 별종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히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를 가지고 자위를 하는 게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 고민하던 케일리는 어차피 그는 인간이 아니었고 자신도 그렇게 됐으니 쓸데없는 걸 잴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가늘게 뜬 눈으로 에드워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케일리가 성기를 훑던 손을 떼 제 입가로 가져갔다. 소원씩이나 되는 자위 쇼이니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혀를 내어 제법 꼼꼼히 타액을 묻혔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손을 가지고 다시 성기를 쥐고 흔드니 아까보다 훨씬 수월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손에 쥔 살덩이를 위아래로 흔들며 자극을 계속했다. 선단에 맺히기 시작한 투명한 액체를 손가락 끄트머리로 비벼 성기 위에 펴 바르듯 움직였다. 붉게 혈색이 올라 제법 단단해진 살덩이를 잡은 손바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머지 손으로 침대를 짚은 케일리가 그 감촉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느긋하게 고개를 젖혔다.
내리깐 시선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표정이다. 찡그린 이마 위로 햇볕이 부서지는 것처럼 예쁜 색의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어졌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짜증스러운 손이 그걸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그 일련의 동작을 가만히 눈으로 좇으며 케일리는 성기를 쥔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의 손이라는 상상을 했다.
자신의 것에 비해 굵은 손가락 마디가 단단하게 성기에 닿아, 그것을 감싸 쥐고 느리게 움직이는 감각.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이미 몇 번인가 기억에 새겨진 쾌감을 되살리는 것은.
점점 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물기 어린 마찰음이 청각을 자극했다. 고개를 젖히고 턱을 치켜든 채 들뜬 숨을 내뱉었다. 하, 하아, 아아. 허리 아래로 뻐근한 쾌감이 내달렸다.
문득 시선을 들자 뚫어져라 다리 사이를 응시하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홀린 듯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를 구경하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 그의 하반신은 한눈에 봐도 잔뜩 성이 나 부풀어 있었다.
답답하지도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먼저 해결해야 할 게 있었다. 핥는 것처럼 시선을 옮겨 에드워드의 얼굴을 담았다. 케일리는 자신이 그의 얼굴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싫어하기도 힘든 얼굴이기는 했다.
저 얼굴이 쾌감에 찌푸려지는 모습은 말도 못하게 자극적이었다. 우아한 조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욕을 잇새로 씹어 뱉으며, 허리를 추켜올리는 천박한 동작 하나하나가 이율배반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냈다. 예술영화의 포장을 뒤집어쓴 포르노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젖은 얼굴을 떠올리며 케일리가 뜨거운 숨을 삼켰다.
머릿속을 헤집는 에드워드의 입술이 자신의 것을 삼키는 곳까지, 들킨다고 해도 별반 문제가 되지 않을 상상이 자유롭게 날개를 펼쳐나갔다. 어차피 연인인데 그 정도 상상도 못한다면 이쪽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는 자위 쇼까지 시키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자기합리화를 마친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갔다. 예민하게 고조된 성감이 곧 다가올 절정을 암시했다. 막판의 스퍼트를 올리듯 빠르게 손을 움직이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정확히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라고 하는 자위인데 얼굴을 쳐다보면 어떡하나 싶어 눈가를 찌푸린 케일리가 말했다.
“왜, 다른 델 봐요?”
대답은 없었다. 조금만 더, 더……. 자극을 좇듯 허리가 들썩였다. 눈앞이 흐려지는 건 생리적인 작용이었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쾌감에 숨을 뱉은 케일리가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무슨 생각…… 하아, 하는 거예요?”
혼자 심해를 유영하듯 검붉게 가라앉았던 눈이 별안간 뭍으로 끌려 나온 것처럼 색을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색이 짙은 선홍빛 시선을 마주한 채 케일리가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확실히 시선이라는 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눈을 마주하고 있을 뿐인데 그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허리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좀 더 이 고조감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절정에 다다르는 쾌감을 좇고 싶다는 욕망이 상충했다. 그와 동시에 에드워드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야말로.”
대답이라기보다는 물음이었다.
모양 좋은 입술 사이에 붉은 혀가 보였다. 지나치게 정확한 발음과 종종 드러나는 20세기식 억양이 다소 둔화된 묵직한 목소리였다. 거기에 섞인 여실한 감정에 심장이 뛰었다. 그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야한 생각이요.”
그렇게 말한 케일리가 악동처럼 웃었다. 지금 미친 듯이 날뛰는 게 자신의 심장인지, 에드워드의 심장인지 정확히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자신에게는 심장이 없고, 제 가슴 속에 있는 건 에드워드의 것이다. 하지만 그와 자신이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러니까 누구의 것이 뛰든 별반 중요하진 않았다.
소파의 팔걸이를 짚고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선 에드워드가 성큼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빳빳이 선 성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자위를 멈춘 케일리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핏빛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꺼떡이는 성기 끄트머리에 투명한 액체가 맺혔다가, 기둥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선연한 감각을 내버려둔 채 케일리는 자신의 뺨에 근처에 닿을 듯 말 듯 맴도는 하얀 손가락 끄트머리에 입술을 가지고 갔다.
“구체적으로 말해봐.”
에드워드의 손이 차가운 게 아니라 자신이 뜨거운 걸지도 몰랐다.
“에디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
그것보다는 좀 더 적나라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얼굴과 관련된 것이기는 했다. 입술 위를 가볍게 터치하는 손가락에 이를 세우며 그렇게 대답하는 케일리에 에드워드가 다소 언짢은 표정을 했다. 케일리의 입술이 닿은 손가락 끄트머리를 통해 웃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언짢을 타이밍은 아니다. 또 뭐가 그렇게 심기 거슬리셨나, 에드워드의 손가락을 꾹꾹 아프지 않게 깨물고 혀를 내밀어 핥는 케일리의 머리 위에 불쑥 이상한 말이 떨어졌다.
“너랑 있으면, 나만 손해 보는 기분이야.”
한숨처럼 튀어나간 그 말은 결코 본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 같은 건 순혈 뱀파이어에게도 없었다. 자신이 감정을 가지고 저울질하는 말을 꺼낼 때마다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던 케일리를 떠올리며 에드워드는 낭패한 얼굴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밤색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황당함이 스며 있었다.
“에디는 참…….”
진심으로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서 꺼낸 말도 아니었다. 스스로도 어이없는 말을 했다 싶어 무어라 수습하려는데, 케일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많아요.”
예상치 못한 그 말에 에드워드가 “뭐?” 얼빠진 대답을 돌리자 케일리는 픽 웃으며 다시 한 번 친절하게 자신의 말을 반복해주었다.
“귀엽다고요.”
결국 몇 번인가 입술만 뻐끔거리다 당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에드워드가 허리를 숙여 머리털이 사라진 머리에 코를 묻었다. 샴푸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살내음이 났다. 그 위에 뺨을 댄 채 시선 밑에 닿는 목덜미에 손을 뻗었다.
다 그래그래 받아주는 것처럼 굴면서도 은근히 한마디 지지를 않는 고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본전도 못 찾을 불평을 안으로 삼키며.
목덜미를 더듬는 차가운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흠칫 어깨를 떤 케일리가 딱 눈높이에 있던 에드워드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철컥철컥, 벨트 푸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두 손으로 바지를 끌어내린 케일리가 잔뜩 성이 난 채 드로즈에 갇힌 성기를 툭,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뒷덜미를 감싸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곧장 반응을 돌리듯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그것을 드로즈 위에서 핥아올리는가 싶더니, 입을 크게 벌려 천과 함께 강하게 빨아올리자 흣, 억눌린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허벅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빨기 쉬운 위치를 잡은 케일리가 그림처럼 잘 짜인 복근에서 배꼽으로, 금빛 음모의 시작점까지 더듬어 내려갔다. 검은색의 타이트한 드로즈마저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남자다.
확실히, 아킨시나처럼 모델을 했으면 좀 더 쉽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들었다. 뭐, 이렇게 좋은 걸 혼자서만 볼 수 있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기는 했다.
드로즈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느리게 내려가는 속옷에서 퉁, 천장을 향해 일어선 성기가 튀어나왔다. 벗기다 만 드로즈를 어중간하게 걸쳐진 상태로 내버려둔 채, 완전히 발기한 살덩이를 양손으로 버겁게 감싸 쥔 케일리가 붉게 피가 쏠린 선단에 코끝을 가져가 가볍게 비볐다.
“빨아줄게요. 전에 못한 게 아쉽다면서요? 자위 쇼에, 오럴이면 이제 아쉬운 거 없죠?”
입에 넣기에는 버거워 보이는 그 끄트머리에 혀를 내어 할짝거리는 장난 같은 몸짓이었다. 겨우 그것뿐이었는데, 하반신에 피가 몰렸고 허리에는 빠짝 힘이 들어갔다. 자위 쇼는 분명 자신이 꺼낸 말이었지만, 오럴은 아니었다.
해줄 것도 아니면서 죄 없는 뱀파이어를 놀리기라도 하듯 미국에서는 오럴이 섹스가 아니니 뭐니 지껄인 게 누구였는데. 약간의 억울함과 눈앞의 보상을 두고 고뇌하던 에드워드가 기둥을 핥는 습한 감촉에 움찔 시선을 내렸다.
……눈에 독이었다.
붉은 혀가 날름 기둥 위의 도드라진 핏줄을 훑고 내려가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워 오는 건지…….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며 추궁해야 하나 싶었는데 어린 짐승처럼 싹싹 핥기만 하는 게 또 그렇게 능숙해 보이지도 않았다. 문제는 케일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에드워드가 결국 깊은 한숨을 들이켰다.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싫어요?”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묻는 케일리가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저도 남자에, 꺼떡이며 배까지 닿도록 발기한 주제에 자신이 싫어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거야말로 말이 안 됐다.
자신의 욕망을 내버려둔 채 남의 것으로 신경을 옮긴 케일리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도 에드워드는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는 멍청이는 세상에 없다.
“……싫겠냐?”
한숨처럼 흘러나온 목소리가 케일리의 뒷덜미로 떨어졌다. 그것 참 에드워드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한 손으로는 버거운 성기를 단단히 붙잡아 그 위로 머리를 내렸다.
◇ ◆ ◇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뉘엿뉘엿 해가 지던 참이었는데 어느새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활짝 열린 커튼 사이에 달은 없었다. 먹구름 사이에 사라진 달 조각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별반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성인 남자 둘이 누워도 몇 바퀴는 구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은 침대였다. 그 위에서 케일리는 세상에 그밖에 매달릴 게 없는 것처럼 탄탄한 허리에 필사적으로 다리를 휘감았다.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팔을 움켜쥐자 손바닥에 움틀 근육이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팔목 안쪽으로 손가락을 더듬고 들어가자 곧장 반응을 돌리는 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력적인 기분이었다.
멋대로 목구멍을 치고 나오는 감정을 억누르기가 버거워 에드워드의 목에 팔을 감쌌다. 매달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자 키스를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이 떨어졌다.
애매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를 곧장 파고들어 케일리의 혀를 낚아챘다. 혀뿌리까지 삼킬 것처럼 강하게 빨아올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입안까지 정복하겠다는 양 예민한 혀 뒤를 아프지 않게 빠는 감촉이 선연했다.
이미 한 번의 사정을 마쳐 훨씬 수월하게 움직이던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단단하게 선 굵은 살덩이가 좁은 구멍을 비집고 완전히 처박히는 감각은 무어라 형용하기가 어려운 묘한 것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기가 된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피부가, 시선이, 숨결이 닿는 모든 곳으로부터 열꽃이 피었다.
팽팽하게 올려 붙은 고환이 입구 근처에 뭉개졌다. 더, 더 깊이 파고들 것처럼 허리를 밀어붙이는 몸짓은 섹스라기보다는 좀 더 궁극적인 욕망처럼 느껴졌다. 떨어져나간 입술을 대신해 눈앞에 있던 에드워드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선뜻한 감각을 조금이라도 죽여보려 애를 쓰던 케일리가 문득 시선을 올렸다.
욕망에 흐려진 붉은 눈이 보였다. 조각처럼 떨어지는 뺨을 향해 손을 뻗은 케일리가 그의 눈가를 문질렀다. 별반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그러고 싶다는 충동대로 행동했다.
“왜, 안 움직여요……?”
밭아지는 숨을 꿀꺽 삼키자 제법 그럴듯하게 말이 나왔다. 내장을 가득 채운 성기에서 두근두근, 맥박이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에드워드에게는 더 이상 심장이 없었는데, 자신의 안에 파묻은 살덩이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맥박은 에드워드가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듯한 이유 같은 건 없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거 알…… 하아, 아요?”
대답이 없는 에드워드를 향해 케일리가 말했다. 드문드문 끊기는 말 사이로 습한 숨이 섞였다.
“하아, 심, 장이…….”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정신을 차린 것처럼 퍼뜩 눈을 깜빡인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안색을 살폈다.
“어디 안 좋아?”
뱀파이어의 심장을 가진 인간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케일리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에드워드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뉴욕의 순혈 너드를 자신의 주치의로 두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자신이 잠에 빠진 사이에도 종종 찾아와 몸 상태를 체크해줬다는 마크 그린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다소 위험한 사람이기는 했다. 의사면허를 아직 박탈당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는, 위험했다.
어쨌든 자신의 심장에 유난히 과민반응을 하는 에드워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케일리는 한창 섹스를 하던 도중에 허둥지둥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며 당황한 얼굴을 하는 남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심장이, 엄청나게 빨리 뛰고 있어요.”
“너, 이 자식……!”
“옛날에 그런 말을 들었거든요. 섹스 도중에 하는 고백이나, 청혼만큼 사람을 어이없고 환장하게 만드는 게 없다는. 사실 지금까지는 동의하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케일리가 가만히 에드워드의 뺨을 감쌌다. 불면 날아갈 연약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렇게 만졌다.
“사랑해요.”
“케일리, 너…….”
“‘나도 그래요’라는 건 좋은 고백이 아닌 것 같았어요.”
쿵, 쿵, 쿵,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아주 빠르게 뛰었다. 사실 그게 누구의 박동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서 심장이란 어차피 하나밖에 없는 것인 데다, 이 감정을 누구의 것인지 분류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거기에 의심이나 의문을 끼워 넣을 필요가 있을까.
없는 것 같았다.
부서지듯 단 웃음을 웃으며 케일리는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이마에 제 것을 누르는 에드워드를 향해 다시 한 번 말했다.
“사랑해요, 에디.”
이번에는 더 정확히, 바로 앞에 있는 눈을 마주한 채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선홍빛 눈동자가 젖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케일리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코와 코가 맞닿았다. 그래서 예쁘게 자리 잡은 코끝에 키스했다. 이마에도, 뺨에도, 끝내주게 예쁜 눈매에도 입술을 내렸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이나 멍하니 얼이 빠져 있던 에드워드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웃음기 섞인 케일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에디의 에디가 좋아하네요.”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성기를 강하게 죄이는 내벽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떤 것과 정확히 같은 순간이었다.
인간으로 산 시간을 다 합쳐도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녀석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이런 게 말이나 되나 싶다가도, 저런 어이없는 점까지 다 합쳐서 예뻐 보이는 건 케일리보다는 자신의 감각에 생긴 문제임에 틀림없다.
“진짜 넌…… 무드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분위기 파탄자야.”
한숨처럼 흘러나간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달았다.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요?”
웃음을 머금은 채 그렇게 말하는 케일리를 향해 에드워드가 한 타이밍 늦은 대답을 돌렸다.
“나도, 그래.”
◇ ◆ ◇
한편, 문 바깥에서 걸레를 쥐고 우물거리던 힐이 결국 오늘의 청소를 포기하고 뒤돌아선 순간이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알렉스가 자신을 향한 시선에 힐끔 시선을 들었다.
최근 들어온 에드워드의 새 권속이었다. 인간형이었지만 그게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렉스도 알았다. 그녀는 평범한 도베르만이 아니라 뱀파이어 도베르만이었으므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힐과 잠시간 눈싸움을 한 알렉스가 흥, 못마땅한 콧김을 내뿜었다.
『뭘 봐, 신참?』
새침하게 던지고 우아한 네발로 걸어 사라지는 도베르만의 검게 윤기가 흐르는 엉덩이를 바라보는 힐의 입가에 씩 자그마한 웃음이 맺혔다.
오늘도 어김없이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애쉬포드 저택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