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 PartA. The Sun
오래간만에 학창시절의 얼굴을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로저 애쉬포드는 한 달 전에 도착한 초대장을 도무지 기쁜 마음으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서재의 책상 한켠에 올려둔 그것을 몇 번이나 무시하려다가, 결국에는 참가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줄곧 그러했다.
대학시절 사교클럽의 정기모임.
그렇게 생각하면 별로 거리낄 것도 없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모임이 문제인 건 아니다. 대부분의 동기들에게도 문제는 없었다.
케일리 로체스터. 자신의 저택에 눌어붙은 그 이름 하나가 로저의 삶에 지대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케일리를 핑계로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면 놈과 함께 엮여 그날 내도록 입방아에 오를 터다.
꼭 나가야 하는 모임이 아니라고 해도 국외에 있는 것도 아닌 멤버가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심지어 사업이니 사교활동이니로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녀석들은 자신이 그렇게 바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거기서 모르는 사이 새롭게 생겨날 소문을 감당하느니 모른 척 나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판단해 참석한 모임에서 로저는 언제 어디서 누가 케일리를 화제로 올릴지 탐색하느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회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가끔 익숙한 얼굴이 보일 때마다 반가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쏟을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망할 케일리 로체스터가 자신의 가엾은 막내아들을 로체스터 저택에 당당히 데리고 간 이후, 소문이라는 소문에 귀를 세우게 된 것은 결코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고 로저는 확신했다.
다른 것보다도, 에드워드는 자신을 쏙 빼닮았다. 친척이라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아마 외견상 나이가 떨어져 있었더라면 곧장 부자관계를 의심받았을 정도로 닮은꼴이었다. 그런 에드워드가 케일리와 엮여 도는 소문이 달갑지 않은 건 당연했다.
정찰을 하듯 혹시나 귀 아픈 이야기가 돌지는 않는지 매의 눈으로 배회하던 참이었다. 로저의 귀에 “그러고 보니까 K 그 녀석이 말이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K로 시작하는 이름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 모임에서 그런 식으로 불리는 놈은 케일리뿐이다. 계집애 이름 같아 헷갈리니 가족들이 부르는 애칭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귀를 쫑긋 세운 로저가 ‘K’라는 불길한 이름이 나온 무리의 곁을 서성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스물일곱이나 먹고 가출을 감행한 케일리 로체스터가 화제였다.
“듣고 놀라지나 마라, 걔 이번에 취직했다더라.”
“K가?”
“설마. 창업했다는 걸 잘못 말한 거지?”
“S 쪽 소식통이니까 정확해. 걔네 집에서 소소하게 축하파티까지 했다더라. 제대로 된 직장이라던데? 분명 거길 소개해준 게…….”
어째서일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고개를 돌린 톰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자리를 벗어나려 했던 로저가 흠칫 멈춰 섰다. 가볍게 원을 그린 동기들의 시선이 톰의 시선을 따라갔다. 샴페인 잔을 쥔 로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저, 넌 또 왜 뒷걸음질을 치고 그러냐?”
“글쎄, 네 착각일걸.”
“아니, 너 지금 나한테서 두 발짝 멀어졌잖아.”
“요즘은 라식기술도 발전했다던데 좀 받아보는 게 어때?”
느긋한 웃음과는 달리 날카롭게 돌아온 로저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K 걔한테 직장을 소개시켜줬다는 미친놈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로저도 할 말이 많다. 그는 케일리 로체스터 같은 걸 남의 회사에 꽂아 넣을 만큼 잔학무도한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그 회사를 망치고 싶다면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뒷수작을 부리고 말지, 다른 것도 아니고 케일리를 꽂아 넣는 방법은 쓰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비겁한 악당이라도 지키는 도리라는 게 있다. 로저에게 있어서는 케일리가 바로 그 구분선쯤 된다고 볼 수 있었다.
동기들이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로저가 말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냐?”
어딘지 납득한 얼굴을 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그럼 대체 왜 그런 거냐는 비난의 눈길을 보내는 놈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는 로저의 심정은 말도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럴듯한 직장도 구했겠다, 슬슬 정신 차리고 정착하려는 것 같다면서 공작부인께서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K한테 붙여줄 신붓감을 찾는다잖아.”
그러고 보면 12월 초에 있었던 로체스터 저택에서의 만찬에 공작부인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워 참석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그 저택의 로체스터들은 아직 공작부인에게 차남에게 생긴 남자 애인의 존재를 전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몇 번이나 블라인드 데이트를 주선했던 공작부인에게 사랑스러운 금발의 며느리 같은 건 세상에 없다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는 순진무구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건 로저가 제일 잘 알았다.
그녀는 케일리가 진지하게 사귀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게 여자든 남자든 신경 쓰지 않고 당장 영영 둘을 묶어놓을 방법이 없을까 계획을 세울 인물이다. 로체스터들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직 쉬쉬하고 있는 거겠지.
자신의 아들이 상원의원의 부인 경력만 40년이 다 되어가는 잔뼈 굵은 교활한 여자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로저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공작부인의 귀에 들어가기를 저어하는 탓인지 아직 그의 남자 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저택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은 것 같다.
동기들은 케일리의 결혼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한 상태였다.
“그분도 참 부지런하셔.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아직도 포기를 안 하시네.”
“너 같으면 아들내미가 K 같은 놈인데 바지라도 걷어붙여야지 가만히 있을 거냐?”
“그건 그래.”
너도 나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로저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 발등에 불 떨어진 놈을 둘이나 알았는데 별 시답잖은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 싶었다.
“사실 K가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걔 은근히 연애도 많이 했잖아?”
“음, 맞아. 게다가 꼭 예쁜 애들이랑만 사귀더라.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면서 의외로 밝히는 놈이었지.”
“무심한 척하면서 볼 건 다 보고 다녔다는 말 아니겠어?”
드래곤 스쿨에서 이튼 스쿨에 진학해 옥스퍼드까지 함께 올라갔던 동기가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는 양 덧붙였다.
“내가 스테이시를 1년이나 짝사랑했는데 홀랑 낚아채 간 개새끼였지.”
“야, 기분 더러운 건 알겠는데 말은 바로 해라. 스테이시 걔는 K가 낚아챈 게 아니잖아.”
“맞아, 스테이시가 걔한테 작업 거는 거 모르는 사람은 너뿐이었거든. 눈치 없는 새끼.”
여기저기서 날아온 진실에 짝사랑의 추억을 훼손당한 동기가 죽을상을 했다. 그 흐물거리는 놈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눈부시게 화려한 미인에 집안이면 집안, 지성이면 지성,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게 없던 스테이시가 어쩌다가 그런 놈한테 빠져서는 못 볼 꼴을 보게 되었는지 아직도 원통하기만 했다. 자신을 골랐더라면 평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줬을 텐데.
하지만 스테이시는 케일리를 골랐고 결국에는 납치와 감금으로 법정까지 가는 수모를 겪었다. 물론 범죄를 저질렀고 나쁜 일이었으나 그의 입장에서는 모든 일의 원흉인 케일리가 원망스러운 게 당연했다.
케일리 로체스터는 사귀는 상대를 이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은 별로 하는 것도 없어 보였는데 늘 끝이 험악했다.
“물론 우리도 걔한테 문제없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솔직히, 걔한테 여동생은 절대 못 주지.”
불쑥 튀어나온 그 말에 샴페인 잔을 쥔 사내들이 가만히 긍정의 시선을 보냈다. 케일리 로체스터에게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놈의 연애를 지켜봐온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미 놈에게 금쪽같은 아들내미의 심장과 아들내미의 본체까지 빼앗긴 로저는 그저 입안이 썼다. 쓴 게 입안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앞으로 셀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갈 자신의 미래에서 결코 뺄 수 없는 존재로 부상했다는 사실에 세상이 온통 쓴맛으로 가득 찬 것처럼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뱀파이어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면 분명 자신은 만성 우울증으로 생애를 마감했을 것이다. 물론 이 생애는 마음대로 마감도 할 수 없기는 했지만 꼭 그런 기분이었다.
“맞아, 걔한테는 누나도 못 줘. 이혼한 엄마도 안 되고.”
“너희 어머니 또 이혼하시냐?”
“몰라, 난 이제 포기했어. 하고 싶은 대로 사시라고 내버려둬야지. 내가 끼어들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쨌든 K 그자식이 나쁘다기보다는 내 가족이 스토커가 되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 소개 못 시켜주지.
솔직히 말해서 그놈이 좀 그런 게 있어. 가만히 데리고 다니다 보면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따르고, 또 해달라고 하면 곧잘 해준단 말이지. 다 맹숭맹숭하게 굴면서 잘하면 나한테만 길들여질 것 같다는 희망을 준다고 해야 하나.”
줄곧 듣기만 하던 로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희망은 무슨, 희망고문을 잘못 말한 거겠지.”
“내 말도 그 말인데.”
그 희망고문을 희망으로 만든 위대한 놈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만천하에 밝히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없는 동기를 안주로 입방정을 찧어대는 가벼운 동기들 사이에서 한숨, 한숨, 그리고 또 한숨만 삼킬 뿐이었다.
이 날의 모임에서 로저는 뱀파이어도 신경성 위염에 걸릴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