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비밀보안국의 비밀 외전
#Family seat1)
센트럴 런던, 하이드 파크와 템즈강 사이에 위치한 슬로언 스퀘어.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보트족2)이라는 해괴한 주거형태까지 등장한 런던임을 고려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싼 그곳에 에드워드와 케일리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린 것도 벌써 1년이나 전의 일이다.
뉴욕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런던으로 돌아온 게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케일리가 완전히 안정을 되찾기까지 둘은 꼬박 1년을 로저의 저택에 머물렀다. 로저는 심장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다니는 정신 나간 막내아들과 그걸 홀랑 받아먹은 이번 생의 동창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었다.-받아주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기는 했다.-
그렇게 애쉬포드 가의 저택에 식사가 필요 없는 식충이 둘이 눌어붙은 지 정확히 1년 뒤. 로저는 케일리의 몸이 에드워드의 심장에 완전히 적응한 것을 확인하고서는 이 날만 기다렸다는 양 두 녀석을 제집에서 쫓아냈다.
케일리와 에드워드로 말할 것 같으면, 그때까지만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애쉬포드 가 저택에서 딱히 나갈 생각이 없었다. 케일리야 누가 함께 살든 신경 쓰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고, 에드워드의 경우 로저의 천적인 케일리의 합세를 기꺼워하면 기꺼워하는 다소 비틀린 성격이니 당연한 일이다.
로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 인간 파리지옥의 희생양이 되는 걸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케일리가-더 정확히는 에드워드의 심장이- 저택 밖에서 잘못되는 꼴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정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로저는 케일리의 존재를 1년 동안 인내심 있게 감내했다.
순혈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1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로저는 그걸 데리고 있던 1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노라고, 녀석들을 쫓아내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따금 울적해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만큼 끔찍한 나날이었다.
사실 당시의 로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케일리만 내쫓고 싶었다. 그러나 케일리가 나가는데 에드워드가 홀로 남겠다고 할 리가 없었고, 결국 귀여운 막내아들까지 함께 쫓아내는 형국이 되었다.
로저가 둘을 곧장 길바닥에 내몬 건 아니었다. 그는 전적으로 에드워드만을 위해 슬로언 스퀘어에 네 개의 침실과 프라이빗 테라스가 딸린 새로운 타운 하우스를 마련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애쉬포드 가로 돌아와 행복에 빠져 있던 집요정 로라를 다시 그들에게 딸려 보냈다. 로라는 애쉬포드 가의 저택에 돌아온 지 약 1년 만에 또다시 에드워드와의 불행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심장으로 살아가게 된 지 2년.
슬로언 스퀘어로 이사를 온 지는 1년이 흐른 현재.
인간이었던 시절보다 훨씬 튼튼해진 케일리는 에드워드와 함께 영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에 조금씩 적응해가는 중이다.
지금까지처럼 최소한의 의무만 이행한 채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한하다고만 생각했던 시간이 무한해진 탓일까. 놀랍게도 케일리는 마냥 놀고먹는 것도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가 엄청난 의욕까지는 아니지만 소일거리를 하겠다는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신기했다. 케일리는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늘 은퇴한 노인같이 살고 싶어 했다.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젠 아예 노인이 될 수 없어져서 그런지, 은퇴한 노인네의 삶이 옛날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은 않게 되었다.
그 외에도 사소하게 바뀐 부분들이 있다.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영향으로 이따금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는 그런 것들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자신이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아니다. 그저 에드워드가 말해준 것처럼, 자신은 그의 심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는 것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심장을 주었다는 게 아직도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는 애초 뱀파이어가 아니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심장이 어떤 것인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일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게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좋았다.
싫은 것은 있어도 좋은 건 거의 없는 삶에서 이렇게까지 확실히 느껴지는 좋은 것은 어쩌면 처음일지도 몰랐다.
케일리는 에드워드의 그런 점이 좋았다.
자신과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왔던 명확한 감정을 만들어줄 수 있는 건 그 남자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케일리는 꼬박 2년을 빈둥거렸다. 돌이켜보면 인생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 시간은 의외로 거의 없었다.
슬슬 빈둥거리는 데에도 이골이 날 즈음, 비슷하게 한가한 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에드워드가 이민국 복귀를 말했다.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심장에 완전히 적응한 덕분에 인간이라기보다는 순혈 뱀파이어에 가까워져 더 이상 위험할 일도 없고, 이민국에서의 일이 제법 인상에 남아 있기도 해서 둘은 그대로 휴직을 끝내고 필드 요원으로 복귀했다.
이민국에서는 둘의 복귀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쉴 새 없이 임무를 던져주었다. 덕분에 지루할 일 없이 잉글랜드 전역을 돌아다니다 어느 틈엔가 크리스마스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그즈음, 케일리는 꽤 오랫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은 상태였다. 육신이 불안정했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뒤로는 그냥 귀찮아서였다.
가족들은 케일리가 로저의 친척인 에드워드 린델의 의료기기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다고 알았고, 본디 성정이 그렇다는 걸 알아서 먼저 찾아오라는 둥 연락을 자주 하라는 둥 안달을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케일리의 입장에서도 이대로 영원히 가족과 얼굴을 보지 않을 것도 아니었으니 어차피 한 번은 소개시켜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케일리는 로체스터 공작가의 연례행사인 크리스마스 파티에 에드워드를 동반해 참석하겠다고 연락을 넣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건, 가족들이 에드워드의 존재를 생각 외로 예민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애쉬포드 가의 친척이라고 소개했으니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족들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도 전에 따로 디너에 초대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케일리는 에드워드에게 다음 주말에 자신의 가족들에게 인사 겸 식사나 함께 하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너는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마음대로 정해버리는 거냐 역정을 냈다. 케일리는 에드워드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지를 건네며 청혼까지 한 주제에 가족에게 인사하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어찌 됐건 사흘 내도록 툴툴거리는 것치고는 제법 성실하게 방문 준비를 하는 게 귀여워서 이따금 튀어나오는 불평불만은 적당히 듣고 넘겼다. 딱히 이런 일이 없어도, 에드워드는 대체로 잔소리가 많았기 때문에 케일리는 이미 거기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눈 깜짝할 새 며칠이 흐르고, 로체스터 가의 저택을 방문하는 주말이 다가왔다.
에드워드는 며칠 전부터 부산스럽게 새로운 슈트를 맞추느니 뭐니 정신이 없었지만 케일리는 늘 그렇듯 느긋했다.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해서 꼬리를 내릴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 쓰는지 싶었지만, 구경하는 게 재밌으니까 그냥 부산을 떨도록 내버려뒀다.
디너 초대라 늦은 오후에나 나갈 예정이었는데 벌써부터 머리를 넘기니 뭐니 정신없이 구는 에드워드를 침대에 누워 구경하던 케일리도 정오 무렵에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샤워를 마친 뒤 드레스 룸의 거울 앞에 섰다.
“고마워요, 알렉스.”
놀랍게도 패션센스가 썩 괜찮은 힐이 골라준 오늘의 외출복을 등허리에 짊어지고 나타난 알렉스에게 케일리가 감사인사를 건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세운 그녀가 살랑, 우아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케일리가 에드워드의 일부가 된 탓에 알렉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 웬만해서는 목소리를 듣기가 힘들었다. 이따금 힐과는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으나 그마저도 빈번하지는 않다. 케일리는 개와 주인이 닮는 것처럼 뱀파이어와 권속도 닮는 건지 궁금했지만, 보편성으로 치부하기에 지나치게 적은 표본이라 아직 그들 간의 상관관계를 확신하지는 못했다.
슬로언 스퀘어로 독립한 뒤 이 집의 구성원은 뱀파이어의 심장인 케일리, 순혈 뱀파이어 에드워드, 그의 권속이자 도베르만인 알렉스, 역시나 권속이자 신이었던 힐, 그리고 가문의 집요정 로라라는 독특한 조합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케일리는 최근 들어 비약적인 성장을 보이는 힐과, 그런 힐을 제 하수인처럼 부리는 알렉스를 구경하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힐은 신이 되다 만 뱀파이어였으니 개인 알렉스에게 뻣뻣하게 굴 법도 했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알렉스는 힐에게 뻣뻣하게 굴었고 힐은 알렉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었다. 신이란 인간의 생각보다 동물을 좋아하는 존재였던 걸까. 이따금 궁금했지만 직접 물어봐도 힐은 그저 베실 웃으며 뺨을 붉히기만 했다.
힐이 골라준 포멀한 슈트를 차려입은 케일리가 빼꼼 드레스 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복도 너머 드로잉 룸3)에서 에드워드가 평소에 비해 신경질적인 인상으로 이쪽을 힐끔거렸다. 빨리 하라고 닦달해봤자 전혀 빨라지지 않는 걸 아니까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다. 꼭 뭐 마려운 개 같아 입가에 웃음을 매단 케일리가 우아한 걸음으로 에드워드에게 다가갔다.
“에디, 왜 그렇게 안색이 창백해요?”
가볍게 뺨을 쓸자 원래도 낮은 편인 체온이 평소보다도 떨어져 있다. 뱀파이어도 긴장을 하나? 잠시간 고민하던 케일리는 자신의 연인이 이따금 자신보다도 인간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걸 상기했다. 하기사, 뱀파이어도 울고, 웃고, 화도 내고 섹스도 하니까 긴장 정도는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간단하게 결론내리는 그에게 불퉁한 얼굴을 한 에드워드가 말했다.
“넌 왜 그렇게 늘 제멋대로야? 왜 그렇게 네 생각밖에 못 하는데?”
“아, 우리 오늘은 또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가요?”
“가족한테 인사를 갈 거면, 나한테도 미리 상의를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요.”
“긴장?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긴장이 무슨 불치병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을 것까지는 없지 않나요?”
“긴장한 거 아니라잖아.”
케일리가 물끄러미 에드워드의 얼굴을 응시했다. 딱히 의심 섞인 눈은 아니었지만 에드워드는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낱낱이 읽혔다. 케일리 쪽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꿰뚫어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정말로 긴장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정말로 긴장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케일리의 가족인 인간 나부랭이들을 만나는 것뿐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지금껏 인간의 기준으로 꽤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다. 로체스터 공작가과 애쉬포드 후작가를 반목하게 만든 냄새나는 약혼 파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케일리의 조상이었던 레이디와 이어지지 않은 게 지금 생각하면 다행인 일이다. 조상과 후손, 둘 다와 결혼하는 건 뱀파이어의 기준으로 생각해도 다소 껄끄러운 면이 있다. 기괴한 취미가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한 가문에 들러붙는 질척한 뱀파이어도 흔한 건 아니니까.
“좋아요. 그럼 일단 아닌 걸로 해둘게요. 더 늦기 전에 나갈까요?”
에드워드가 더 귀찮아지기 전에 그의 불평을 끊기 위해 케일리는 나섰다. 그는 역시나 긴장 탓인지 차가워진 에드워드의 손을 잡아 현관으로 이끌었다. 몇 번인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던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별로 좋은 청자는 아니라는 걸 떠올리며 불만 어린 얼굴로 그의 손길에 끌려 나갔다.
운전은 언제나 그렇듯 에드워드의 몫이었다. 케일리도 면허는 있었지만 직접 운전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그에게 절대로 운전대를 맡기지 않았다. 심장이 바뀐 뒤로 몸이 튼튼해진 걸 무슨 만능열쇠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라, 옛날보다도 위험에 둔감해진 놈의 손에서 박살난 차가 한두 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차가 부서지는 편이 케일리가 부서지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가능하면 아무것도 안 부서지는 게 좋다. 분명 탈것은 소모품의 일종이기는 하나 케일리 같은 괴상한 방식으로 소모하기 위해 있는 건 아니니까.
케일리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게 된 지 몇 달이 지난 덕분에 몇 달째 무사한 캐딜락에 올라탄 둘은 첼시를 지나 런던 서쪽으로 달렸다. 로체스터 일가는 버크셔 주의 윈저 성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센트럴 런던에서 차로 한 시간이 조금 안 걸리는 거리였다.
평소 같았으면 잡담을 했을 텐데 에드워드는 오늘따라 입을 꾹 다문 채 굳어 있다. 케일리는 평소와 같은 느긋한 표정으로 차창에 턱을 괸 채 그 얼굴을 구경했다. 평소보다 신경질적이어 보이는 에드워드가 다소 생경한 탓이다.
에드워드의 심장을 가진 뒤로 특별히 그의 감정에 민감해진 케일리는 에드워드가 진심으로 긴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작해야 자신의 가족의 디너일 뿐인데 저렇게까지 긴장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기도 했고, 사실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집중해서 심장의 힘을 쓰면 에드워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읽을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케일리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 게 그렇게 유쾌한 능력은 아님을 알았다. 에드워드는 머릿속을 읽는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싫어하지 않았으나, 그보다는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에드워드가 불퉁하게 말했다.
“글쎄요.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 쓰나 싶어서?”
“왜 별게 아니야. 별거지.”
“그냥 디너일 뿐인데요? 먹을 필요도 없는데 먹는 게 고역이기는 하겠지만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네 가족이잖아.”
“하지만 에디는 가족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도 않잖아요.”
“네 가족이 아니라 내 가족이니까 신경 안 썼던 거지.”
“그럴 필요 없는데.”
“넌 좀 신경을 써.”
“에디도 참, 진짜로 신경 쓰면 싫어할 거면서.”
“…….”
서로의 감정을 읽는다는 건 이럴 때에 참 편리한 동시에 불편했다.
에드워드는 자기가 꺼낸 말에 찔려 다시 입술 끄트머리를 움틀거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굳이 반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케일리가 힐이나 알렉스에게 흥미를 가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고, 그건 대상이 가족이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에디, 내가 가족 이야기 해줄까요? 힌트 같은 거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뭔데? 한번 해봐.”
“아버지는, 이미 에디한테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전에 자선행사에서 로저 친척이라고 소개했는데도 호의적이었으니까 확실해요. 게다가 원래 자식한테 무른 분이시라 내가 약혼자라고 데리고 가면 딱히 반대할 성격도 아니거든요.”
“널 이런 녀석으로 키워놓은 걸 보면 심하게 물렀겠지. 안 봐도 뻔하긴 하네.”
“하하, 맞아요. 어머니랑 아버지가 둘 다 유한 편이셨어요. 오히려 어릴 때 엄했던 건 레이튼이었으니까요. 아, 우리 집 버틀러요. 그리고 스탠은, 스탠 기억하죠? 자선행사 때 봤으니까. 걔는 지금이야 결혼하고 얌전해졌지만 옛날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칼 맞을 짓을 하고 다녀서 남 연애사에 참견할 자격이 없어요. 또 오늘은 혼자 온다니까 귀찮은 부부 상대할 일도 없고 다행이죠. 둘은 성격이 비슷해서 한자리에 두면 곤란하거든요.”
“나머지는? 너 남동생이랑 여동생도 있다며.”
“위에도 누이가 한 명 있어요. 엘레노어인데, 그녀는 일 때문에 프랑스에 살아요. 크리스마스 끼워서 벌써 휴가를 잡아둬서 이번엔 못 온다는 모양이에요. 남동생은 제임스인데, 작년에 대학 졸업했고 더 공부하고 싶다면서 미국에 가 있어서 못 오고요.”
“왜 그렇게 다 밖에 나가 있어?”
“에드워드 입장에선 전부 못 모이는 편이 낫지 않나요? 다 오면 귀찮을 텐데.”
그 말도 틀린 건 아니라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오늘은 부모님이랑 스탠, 그레이스밖에 없어요.”
케일리는 삼남 이녀 중 차남인데, 순서대로 스탠, 엘레노어, 케일리, 제임스, 그레이스다. 그리고 오늘 디너에는 장남의 배우자, 장녀, 삼남이 부재중이었다. 케일리와 에드워드를 더하면 총 여섯이 모이는 소소하다면 소소한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레이스는 지금 대학생이에요. 그리고 걔는 잘생긴 사람 되게 좋아해요. 얼굴 엄청 밝혀서 잘생기기만 하면 뭐든 용서되는 애니까, 에디는 걱정 없겠네요!”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지금 자신의 얼굴을 칭찬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결점을 지적하는 건지 조금 헷갈렸다.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는지 잠시간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케일리가 아, 하고 무언가 떠올랐다는 양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독일 출신이라 말수도 적은 편이고 조금 무뚝뚝할지도 몰라요.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에드워드는 케일리의 뜬금없는 독일식 미들네임이 어디서 왔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긴장을 푸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래도 좋은 정보였지만 말이다.
◇ ◆ ◇
잉글랜드의 긴 역사 속에서 공작위를 받은 가문은 총 열넷이다. 그중에서도 현대까지 명맥을 이은 데는 소수에 불과했고 개중 로체스터 공작가처럼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는 곳을 꼽자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17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수 세기를 왕가의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로체스터 공작가의 영지는 잉글랜드 중부 내륙에 위치한 코번트리 등지였다. 그곳에는 공작가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관리한 성이 있는데, 20세기에 접어들며 실제로 공작가 일원이 거주하지는 않게 된 탓에 패밀리 시트로 명맥을 이어나가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따름이었다.
21세기, 현재.
로체스터 공작가의 실질적인 거주지는 버크셔 주, 윈저성 근교의 고즈넉한 마을로, 템즈강 상류를 끼고 끝없이 펼쳐진 녹음이 인상적인 장소였다. 센트럴 런던에서 차로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입지도 그렇거니와 공작가의 방대한 방계까지 포함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부지를 자랑했다. 덕분에 센트럴 런던에 타운 하우스4)를 따로 둔 이들도 컨트리 하우스5)를 마냥 방치하지 않았고, 그 전통은 로체스터 공작가의 일원들이 직계인지 방계인지를 차치하고 윈저성 근처에서 멋모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개중에서도 직계 일가가 거주하는 저택은 18세기 중반에 건축을 시작해 후반까지 증축과 개축을 반복했는데, 당시 유행했던 팔라디안 양식이 고스란히 적용된 대규모 조지안 하우스6)였다.
직계라고는 해도 결혼한 장남과 장녀 내외는 본가에서 차로 10분가량 떨어진 별채에 살았고 실질적인 거주자는 공작 부부, 갓 대학을 졸업한 삼남, 그리고 얼마 전 대학생이 된 막내딸 정도였다. 삼남 이녀의 다섯 형제인 공작 부부의 자식들 중에서 차남이자 세 번째 자식인 케일리 로체스터만이 미혼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독립을 한 유일한 자식인 셈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케일리가 유난히 유능해서 이른 독립을 이뤄낸 건 아니다. 그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일곱 번의 사업 실패 뒤 어린애처럼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집을 나가 본가에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다.
그건 엄밀히 따지면 독립이 아니라 가출이다. 때문에 본가에는 아직 케일리의 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족들은 그가 정확히 언제 어디에 있는지까지는 몰랐지만, 제약회사인지 의료기기 회사 같은 곳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다거나, 이따금 슬로언 스퀘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걸 목격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곤 했다.
케일리에게서 직접 전화가 올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의뭉스럽게 대답을 넘겨버리는 탓에 뭘 하고 다니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어찌 됐건 일단 한 사람 몫을 하며 잘 살고 있는 것 같으니 내버려두자는 게 가족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 케일리가 뜬금없이 약혼자를, 그것도 남자 약혼자를 데리고 집에 찾아오겠다고 한 것이다! 공작가가 발칵 뒤집히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다.
“그레이스, 진정하고 제발 자리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면 안 될까?”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스탠, 다른 사람도 아니고 K라고! K한테 애인이 생겼다니, 심지어는 남자 애인이라니! 궁금하지 않고 배기겠어?”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K가 집에 오는 게 얼마 만이야? 벌써 3년쯤 지나지 않았어?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K가 커밍아웃에, 약혼자까지 소개하러 온다니 믿기지 않아.”
그건 스탠 또한 마찬가지다.
그레이스처럼 방방 뛰며 안절부절못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설마하니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를 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정말 진지한 사이가 아니라면 그런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는 녀석이다. 스탠의 입장에서는 동생이 동성 파트너를 선택했다는 것보다도, 동생이 가족에게 그를 소개시키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게 더 무서웠다.
“3년씩이나 된 것 같지는 않은데.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야?”
“아냐, 진짜 2년은 거뜬히 넘었다니까? 생각해봐, 그때. K네 마지막 회사 도산 처리 끝냈을 때가 거의 3년 전이었다고.”
“그런 것 같기도 하네.”
“K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글쎄…….”
“스탠, 넌 왜 그렇게 반응이 미적지근해? 너 설마 남자 애인을 데려온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부지런한 차별주의자였다고.”
“그렇게까지 부정하니까 오히려 미심쩍은데?”
“아니라니까. 오히려 K 같은 녀석을 데려가준다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모를까.”
“그건 그래. 난 사실 K라면 평생 혼자 살다 고독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왠지 K는 결혼이랑 안 어울렸어. 옛날부터 말이야, 걘 혼자 있어도 별로 고독해 보이지도 않았다고.”
오래간만에 포멀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레이스가 아련한 얼굴로 과거를 회상했다.
K, 케일리 로체스터는 열 살이나 터울이 있는 손위형제였지만 늘 그레이스와 가까이 지냈다. 로체스터 공작가는 형제들 사이가 좋은 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넓은 저택에서 놀이상대를 찾는 건 대단히 요원한 일이었기 때문에 열 살이란 나이 차 정도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대체로 그레이스가 일방적으로 케일리를 가지고 노는 편이었지만, 그가 특별히 거절하는 것도 아니라서 곧잘 어울리곤 했다. 성가신 걸 싫어해서 놀이 중에도 매번 실종되거나 꼼수를 부리기 일쑤였으나 어찌됐건 그레이스는 케일리를 좋아했다. 적어도 스탠처럼 어린 여동생과 놀아주는 게 싫어 냅다 꽁무니를 빼는 얍삽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물론 그레이스는 케일리가 놀아주기 싫다는 이유로 꽁무니를 뺄 정도로 적극적인 도망을 칠 정도로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과 설렁설렁 어울린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 궁금한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너무 과한 호기심은 K의 약혼자에게도 실례니까 조심하도록 해.”
스탠은 크리스마스보다도 케일리의 약혼자에 더 들뜬 여동생을 향해 짐짓 엄하게 충고했다.
“흥,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걱정 마. 주의할 테니까.”
전혀 주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반짝이는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스탠이 한숨을 내쉬었다.
케일리의 약혼자, 에드워드 린델.
2년 전 참석한 자선파티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 확실히 나쁘지 않은 남자였다. 케일리의 애인이라는 걸 차치하면 할리우드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긴 데다 매너도 썩 괜찮았다. 심지어는 정상인이기까지 했고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케일리에게 제대로 된 직업을 준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선행사의 경매 테이블에서는 케일리의 의자를 빼주질 않나, 다 큰 녀석의 잔에 스트로를 꽂아주지를 않나, 친근하게 머리카락을 헤집질 않나. 종내에는 마치 케일리에게 손발이 없는 것처럼 온갖 걸 다 챙겨주는 모습을 봤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함께 훔쳐보던 화이트도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니라 염병 떠는 연인 같다는 감상을 내놓았고 말이다.
어찌 됐건, 스탠 또한 에드워드 린델이 케일리로 살아 있는 인형 놀이를 하려 들었던 라일리나, 평생 무인도에 감금하려 들었던 스테이시보다 낫다는 건 인정했다. 로체스터 공작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예의 바르게 행동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케일리가 그의 호의를 당연하다는 양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녀석이야 호의에 둘러싸여 자란 덕분에 크게 타인의 친절을 의심하거나 저어하는 성격도 아니기는 했지만, 그때 그 광경은 확실히 평소와 다른 점이 많았다. 보통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라도 사내놈들 사이에서 그런 식의 접촉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받아들이진 않았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탠은 케일리가 동성애자로 방향을 틀었다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왜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서 애쉬포드 놈들의 친척이냐 그 말이야…….”
스탠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에드워드가 왕실의 친척이라고 하는 편이 덜 부담스러울 뻔했다.
다른 가문도 아니고 애쉬포드라니.
로체스터 일가와 수 세기에 걸친 유치하고 개인적인 악연을 이어온 그 악독한 집안의 친척을, 그것도 남자를 약혼자랍시고 데리고 온다는 케일리를 스탠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대단히 케일리다워서 오히려 현실감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비단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뒤져도 케일리와 가정을 꾸릴 만한 상대가 쉽사리 나타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마냥 반대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이번 상대를 놓치면 케일리는 영원히 혼자 몸으로 외로이 늙어 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애쉬포드 따위라도 곁붙이가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정답 없는 딜레마에 빠진 로체스터 일가는, 누가 셰익스피어의 후손이 아니랄까 봐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카풀렛 일가-그들은 셰익스피어적 비극에 대입하면 케일리 쪽이 로미오일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기실, 가족들은 케일리의 마지막 연애가 스토킹으로 시작해 납치, 감금이라는 비극으로 끝이 난 스테이시라는 걸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 상태였다. 어린 시절에는 각종 주니어 대회를 휩쓸며 수재 소리를 듣던 둘째아들이 연애에 있어서는 줄줄이 실패만 계속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케일리의 경우, 스탠과 같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문어다리를 걸치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마음에 성실하게 임했지만 대부분 그 상대방이 한 발짝 법망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우를 범하고 케일리를 범죄의 피해자로 전락시켰다.
따져보면 의외로 화려한 연애 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늘 끝이 안 좋았던 걸 생각하면 이번에도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가족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따지면 멀쩡해 보이던 사람도 케일리와 치정으로 엮이는 순간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치닫곤 했다.
워낙 재수가 없는 케일리의 인생이었다. 이번 상대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로체스터 일가는 케일리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그의 약혼자가 어떤 인간인지 파헤쳐주겠다는 각오로 오늘의 디너 자리를 만든 것이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내도록 센트럴 런던에서 용무를 보고 돌아온 로체스터 공작 부부까지 합쳐서, 한자리에 모인 네 가족은 드로잉 룸에 앉아 케일리와 그의 약혼자를 기다렸다.
케일리로부터 4시가 조금 넘어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곧 도착할 즈음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가운데, 간간히 스탠과 그레이스만이 호기심과 염려 섞인 잡담을 주고받던 참이다.
“케일리 도련님이 정문에 당도 하셨다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6대째 로체스터 가의 버틀러인 레이튼이 공작 내외와 그의 자식들에게 고대하던 소식을 전했다.
케일리의 약혼자를 먼저 디너에 초대한 건 로체스터 공작 내외였다. 저택에서까지 늘 포멀한 차림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패밀리 서퍼도 아니고 디너7)다 보니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들이 어딘지 긴장한 낯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버틀러가 드로잉 룸까지 객을 안내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 짧은 시간도 기다릴 수 없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탓에 일가가 조르르 현관까지 마중을 나갔다.
정문으로부터 길게 이어진 정원을 지나 현관까지는 차로 3분가량이 걸렸다. 케일리의 성격상 걸어올 리는 없으니 곧 얼굴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2년 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케일리를-더 정확히는 그의 약혼자를- 향한 희미한 불안과 기대가 가족들의 얼굴에 가득 찼다.
곧 현관에서 이어진 낮은 계단 밑에 서 있던 로체스터 일가의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먼저 내린 건 조수석에 타고 있던 케일리였다.
“다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요?”
스윽, 나란히 현관 앞에 선 가족들을 쳐다보던 그가 인사보다 먼저 의아한 물음을 던졌다.
곧 운전석에서 따라 내려 차 키를 버틀러에게 건넨 에드워드가 케일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 또한 로체스터 일가가 죄다 현관 바깥까지 기어나와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일순 표정을 굳히기는 했지만 곧 매끄러운 얼굴로 미소를 띤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등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가족들의 곁으로 유도했다.
“에드워드 린델입니다. 예전 자선행사에서 인사드린 적이 있었죠.”
에드워드는 제일 먼저 리암 로체스터, 공작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미 첫 만남에서 가명을 썼기 때문에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게 나을 듯하다고 로체스터 가를 방문하기 전 케일리와 합의를 본 바다. 정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보니 괜한 의심을 살 만한 꼬투리를 주지 않는 게 좋으리라는 의도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에드워드도 동감했다. 그는 자신이 몇 세대 전 저들의 조상과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약혼을 파기하고 시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저 뒤끝 한번 끝내주게 더러운 혈족에게 또 책잡힐 일을 하면 뱀파이어가 아니라 머저리라고 생각했다.
뒤이어 그는 로체스터 공작부인인 사라 로체스터, 장남 스탠 로체스터, 막내 그레이스 로체스터와도 간단한 악수와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그와 대면한 적이 있는 리암과 스탠과 달리, 사라와 그레이스는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고 깜짝 놀란 눈으로 에드워드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로저 애쉬포드의 친척이라는 이야기는 미리 들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닮아 쌍둥이라고 해도 의심할 수 없을 것 같은 외견 탓이다. 다행인 점은, 에드워드의 성은 애쉬포드가 아니라 린델이었고 덕분에 사라와 그레이스는 예의 바른 청년에게 애쉬포드라는 악독한 선입견 보다 호감에 가까운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 ◆ ◇
본가에서 개인적인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로체스터 가의 요리사가 제대로 된 디너를 준비하는 건 상당히 오래간만의 일이다. 미슐랭 레스토랑만큼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으나 손님에게 내놓기에 손색이 없는 코스요리가 순차적으로 날라졌다.
테이블 매너 따위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시대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눈길이 가는 건 사실이라 로체스터 일가는 이따금 케일리와 나란히 앉은 그의 약혼자를 훔쳐봤다.
놀랍게도 에드워드는 갓 19세기에서 건져 온 것처럼 훌륭한 예법을 자랑했다. 식기 사용법부터 시작해 사소한 애티튜드까지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하게 교육을 받은 로체스터 형제들과 비교해도 뒤지기는커녕 오히려 에드워드에게 배워야 할 것처럼 우아했기에, 그들은 에드워드가 ‘그’ 로저 애쉬포드의 친척이라는 걸 제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식사 중의 대화도 비슷했다. 에드워드는 어떤 주제가 튀어나와도 대화가 끊어지는 일 없이 적절하게 받아쳤고, 나중에는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운 리암조차 어떤 놈인지 알아보겠다는 꿍꿍이를 잊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그와의 대화에 열중했다.
특히 둘의 화제가 공작가가 가장 번영했던 시대인 두 세기 전 의회 역사까지 되돌아갔을 때, 당시의 정세에 관해 무엇 하나 빠트릴 것 없이 박식하기 그지없는 견해를 내놓는 에드워드를 향한 리암의 눈빛은 거의 사랑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어 다른 가족들을 경악에 빠트렸다.
에드워드가 정말로 그 시대를 살았다는 걸 알 리가 없는 로체스터 일가는 케일리가 대체 어디서 이런 완벽한 남자를 잡아왔는지 진심으로 궁금할 지경이었다.
식사 내도록 리암이 에드워드를 독차지한 탓에 스탠과 그레이스는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하지만 리암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이따금 케일리와의 만남이나, 녀석의 어떤 점에 반했는지 따위를 묻고 싶어 하는 자식들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기대는커녕 걱정과 염려로 만든 오늘 이 자리가 이렇게 즐거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일까. 리암은 케일리가 데려온 약혼자가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서, 이대로 보내야 한다는 게 못나 아쉽게 느껴졌다.
디너의 끝 무렵에 푸딩8)이 나오자 결국 참지 못한 리암이 에드워드를 향해 어차피 주말인데 하룻밤 묵고 가지 않겠냐는 이례적인 제의를 던지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그 제안을 거절한 건 에드워드의 옆에서 이따금 맞장구만 치며 식사에 열중하던 케일리였다. 자신이야 방이 남아 있으니 상관없겠지만 에드워드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어 불편할 것이라는 대단히 합리적인 이유였다.
결국 리암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크리스마스 파티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참석하겠다는 대답을 한 적도 없었는데 이미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리암의 심정을 알 리가 없이, 로체스터 일가와 에드워드 양쪽 모두 걱정했던 일이 벌이지지 않은 채 무사히 디너가 끝났다.
식후 티타임을 위해 드로잉 룸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식사 내도록 리암에게 에드워드를 빼앗겼던 스탠과 그레이스가 그의 양옆에 들러붙었다.
“저기, 에드워드. 우리 K, 케일리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역시, 로저의 소개로? 그 전에는 본 적이 없었나요? 나름대로 유명인이었거든요. 주니어 대표도 몇 번이나 했어요.”
“안타깝지만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로저로부터 구직 중인 괜찮은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가졌죠. 마침 비서가 급하게 그만둔 참이었는데 마땅한 후임을 찾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다 케일리를 뽑겠다는 생각을 다 하셨어요?”
“예?”
“아니, 물론 우리 케일리가 나름대로 쓸모 있을 때도 있기는 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비서직에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데요…….”
에드워드는 제 오라비를 매우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레이스의 의견에 백분 동의했다. 케일리 로체스터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발버둥을 쳐도 비서직에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다. 섬세함이나 꼼꼼함, 배려 따위와는 거리가 멀고 아무리 세세하게 일을 지시해도 획기적으로 정신 나간 해결법을 찾아냈다. 물론 이따금 그런 게 빠르고 효율적일 때도 있었지만-예를 들면 구울의 입에 수류탄을 쑤셔넣는다든지- 대부분의 경우 주변인에게 만성 편두통을 만드는 결과만 낳았으니까.
하지만 에드워드는 여동생의 앞에서 그를 폄하하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가족이란 게 원래 자신이 건드리는 건 괜찮지만 남이 건드리면 불쾌한 존재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해내기도 해 이따금 놀라곤 했을 정도니까요.”
어딜 어떻게 들어도 예의상 하는 말 같았는데 워낙 멀끔한 얼굴이다 보니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그레이스는 대체 신이 케일리를 얼마나 사랑하면 완벽한 배우자까지 준 건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머리도 좋고 손만 댔다 하면 뭐든 척척 해내서 어릴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안 풀리는 걸 보면 역시 신은 공평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신은 불공평했다.
그것도 상당히 심각하게 한 놈만 편애하고 있었다.
“부럽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에드워드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그레이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고쳤다.
“와, 진짜 대단하네요. 우리 가족들은 케일리가 영영 혼자 살다 죽으면 어쩌나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만 해도, 뜬금없이 약혼자를 데려온다고 하니까 또 어디 이상한 사이코한테 걸렸나 보다 싶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레이스.”
“꾸며낸 것도 아니잖아, 스탠. 난 진짜 이 결혼 대찬성이에요. 약혼식은 그렇다 치고, 결혼식은 제대로 할 거죠? 나 들러리 시켜주면 안 돼요? 그런데 게이 결혼에선 누가 신부 측 들러리 해요? 나, 로저랑도 아는 사이인데 둘 중에 들러리 필요한 쪽에서 불러주면 안 될까요?”
“그레이스…….”
스탠은 오늘 처음 인사한 주제에 벌써 결혼식까지 착착 진행된 그레이스의 머릿속이 창피했다.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었다. 에드워드를 보는 게 민망해서 머쓱하게 그를 쳐다본 스탠은 생각 외로 불쾌해하지 않는 그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들었다. 결혼 이야기에 아무런 대꾸 없이 단정한 웃음만 매달고 있는 게, 꼭 케일리와의 결혼이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 약혼자라고 데리고 왔으니 당연히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사이이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또 달랐다.
스탠은 연애에 있어서는 한없이 모자란 자신의 동생이 드디어 멀쩡한 애인을 데리고 왔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그건 그레이스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혹시라도 에드워드를 놓칠세라 눈을 반짝인 그녀가 차를 마시며 간간히 대화에 참여하던 리암에게 화살을 던졌다.
"아빠도 재미없는 이야기로 손님 지루하게 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슬슬 정해야죠. 케일리한테 결혼식을 맡기면 완전히 엉망이 될걸요? 이게 둘 사이에서 끝낼 만한 작은 일도 아니고, 우리 가족이랑 에드워드네 가족도 엄연히 당사자잖아요. 가족들끼리 인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지, 또 식은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시작해야죠.”
눈썹을 추켜올리며 그레이스의 수다를 잠자코 듣기만 하던 리암이 이번에는 그녀의 의견에 공감하는지 들고 있던 찻잔을 티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뗐다.
“확실히 그도 그렇군. 미스터 린델, 다음번엔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어떻겠소? 그쪽에서도 우리 애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이들과 한 가족이 될 건지 알아야 할 테니 말이오.”
“아버지.”
“케일리, 네게 물은 게 아니지 않아.”
“그게 아니라, 에디는 부모님이 안 계세요.”
“…….”
“말하자면 고아 같은 거라서요. 그러니까 가족모임은 로저를 불러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사이 별로잖아요, 그 집안이랑.”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부연설명에 케일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심지어는 이야기의 당사자인 에드워드조차 당황해 케일리를 쳐다봤다. 물론 케일리의 가족이 로저를 알고 있다 보니 진짜 부모를 밝힐 수야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당히 둘러대면 될 걸 굳이 고아라고 표현할 것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오, 세상에. K!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무신경하게 해버리면 어떡하니?”
살얼음판이 된 드로잉 룸의 정적을 깬 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일리를 쳐다보던 그레이스였다.
“케일리, 이번에는 네가 무신경했단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면서 말하라고 하지 않았어?”
무뚝뚝한 성정 탓에 말수가 적은 사라마저도 눈썹을 추켜올리며 케일리를 타박했다.
“미안하오, 미스터 린델. 내 아들놈이 이렇게 무신경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남의…… 자기 연인의 아픔까지 무례하게 파헤치는 냉혈한이기까지 할 줄은 몰랐소.”
잠시간 아연한 낯빛을 했던 리암도 사라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순식간에 죄인이 된 케일리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입장에서야 에드워드는 죽지도 않고, 그의 부모도 멀쩡히 살아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케일리가 이따금 무신경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는데, 아직 젊은 나이에 양친을 잃은 약혼자에게 상처를 주는 게 당혹스러웠다. 미간을 좁히며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낸 리암이 케일리를 눈짓하며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정말 이런 녀석이…… 괜찮은 거요?”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뭘.”
“아무리 그래도…….”
“케일리도 악의는 없었을 겁니다.”
“당사자가 그렇다면야 하는 수 없지만, 내 기회를 봐서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하겠소.”
그 뒤로도 얼마간 케일리의 무심함을 지적하는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듭 케일리를 옹호하는 에드워드 덕분에 곧 풀렸다. 그 뒤로는 케일리도 별말 없이 가족들과 에드워드의 대화를 듣는 쪽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랄 것 없이 시간이 흘렀고 곧 밤이 깊어졌다느니, 슬슬 돌아가봐야 한다느니 하는 쪽으로 주제가 흘러갔다.
도착했을 때처럼 현관 밖까지 배웅을 나온-이번에는 걱정이나 염려가 아니라 순수한 호의였다.- 로체스터 일가는 이미 예의 바르고 총명한 청년 에드워드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그들은 에드워드가 부를 수 있는 가족이 애쉬포드 가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족모임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더 이상 이 결혼에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졌다.
막판에는 어딘지 측은한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끌어안아주기까지 하는 로체스터 공작 부부를 겪으며, 에드워드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인간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케일리 같은 게 태어났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등이 켜진 현관 앞에서 포옹부터 시작해 두 손을 꼭 붙잡고 결혼식에서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는 말까지 건네는 리암과 그 옆에서 그러면 자신은 어머니라고 부르라는 사라에게 얼굴 근육이 경련할 때 까지 억지웃음을 짓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에드워드는 얼떨결에 고아가 되어, 얼떨결에 인간 부모까지 생긴 자신을 말간 얼굴로 쳐다보기만 할 뿐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지 않는 케일리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물론 케일리가 원래 그런 놈이기는 했다. 오늘 내도록 실컷 구경만 하다가 이제 와서 친절하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게 훨씬 이상했으니까.
작별인사에 한나절을 보내는 걸로 유명한 영국인이라는 걸 감안해도 지나치다 못해 독하게까지 느껴지는 인사가 겨우 끝이 났다. 드디어 차 키를 돌려받은 에드워드는 운전대를 잡고 로체스터 가의 정문을 나설 때까지 정신이 쏙 빠져 어딘지 멍했다.
케일리의 가족은 굳이 따지면 평범한 축에 속했다. 공작 부부는 정치판에 이골이 난 것치고 인간적인 데다 정도 많았고, 또 귀족이라고 오만하게 굴지도 않았다. 스탠과 그레이스는 지나치게 호기심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크게 선을 넘는 언행이 없어서 불쾌감을 느낄 만한 부분도 없었다.
다만, 에드워드는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은 인간들 앞에서 얌전하고 예의 바른 인간인 척하는 게 이렇게나 진 빠지는 일이라는 걸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팔다리가 축축 늘어지는 것처럼 지쳤다. 뱀파이어의 육체가 고작해야 저녁 좀 먹은 걸로 축이 날 리는 없었으니, 이건 온전히 정신적인 문제였다.
“피곤해…….”
로체스터 가의 정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중얼거린 에드워드의 곁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케일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적당히 자르라니까 왜 일일이 맞장구를 쳐요? 다 받아주면 괜히 이야기만 길어진다고 미리 경고했잖아요. 어차피 내 가족이랑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었으면서 답지 않게 성실하게 구니까 피곤해지는 거예요.”
그건 비난이라기보다는 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아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획 고개를 돌린 에드워드가 사납게 치켜뜬 눈으로 케일리를 노려봤다. 자신이 대체 누구 때문에 별것도 아닌 인간들 앞에서 뺨이 아프도록 웃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맞춰주며 광대 노릇을 했는데. 그 원인이라는 놈이 말똥말똥한 얼굴로 그러게 대충 넘기지 뭘 그렇게 열심히 했냐고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아니, 뱀파이어를 병신 취급해도 정도가 있지. 에드워드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에드워드가 사랑에 눈멀었다지만 자신의 노력과, 그의 가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면에 있는 케일리를 향한 마음까지 폄하당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원래 그런 놈이라 치부하며 평소처럼 간단히 삼켜버릴 수가 없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분을 가라앉히려던 에드워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트렸다.
“케일리, 너라는 놈은 정말……!”
너와 달리, 남들한테는 상처를 받을 만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기는 하는 거냐고. 울컥해 쏘아붙이려던 에드워드가 별안간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의 상처라니. 그런 걸 아는 놈 같았으면 애초에 듣는 병신의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저따위 잡소리를 충고랍시고 지껄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짜증나는 건, 케일리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말대로, 케일리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자신이 멋대로 한 짓이었다. 저 녀석이 시켜서 한 것도 아닌데 왜 몰라주냐 생색을 내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 뱃속을 헤집는 불쾌감을 억지로 내리누른 에드워드는 슬로언 스퀘어에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정면을 쳐다보며 운전에 집중했다.
그 와중에도 운전 중에 화를 내다 참지 못하고 차가 부서지는 것보다, 휘말린 케일리가 다치는 게 더 짜증스러운 스스로를 어이없어하면서 말이다.
◇ ◆ ◇
“케일리, 주인님께서 왜 저렇게 풀이 죽으셨나요?”
스콘과 클로디드 크림, 그리고 딸기 잼을 담은 트레이를 침실까지 운반한 힐이 고개를 기울이며 침대 구석에 처박힌 에드워드를 눈짓했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케일리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스콘 하나를 집어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게 아닐까요?”
물론 케일리는 에드워드가 굶주렸다는 이유로 토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토라졌다기보다는, 다소 기분이 상한 것뿐이기도 했고. 아니, 어쩌면 힐의 말이 가장 정확할지도 몰랐다. 에드워드는 풀이 죽어 있었다. 그렇게 긴장하던 인사를 제대로 끝낸 것과는 별개로, 하찮은-그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들에게 꼬리를 치며 마지막에는 사라와 리암의 강제성 짙은 요구에 ‘어머니’, ‘아버지’라 불러주느라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는 했다.
케일리는 그렇게까지 맞춰줄 필요 없으니 적당히 잘라내도 된다고 조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서 고생을 하는 에드워드가 이상했다. 가족들이야 어차피 가족들이다. 그들이 에드워드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케일리로서는 크게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에드워드와 사는 건 자신이지 가족들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뭐라고 하든 에드워드를 놓을 생각도 없는데 뭐하러 일일이 가족들 기분까지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이제 가문에 빌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원래보다 더 뻔뻔해진 케일리가 보기에 에드워드가 오늘 내도록 안 맞는 옷을 입고 생고생을 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는 갑자기 역성을 내기까지 했고…….
사람이든 뱀파이어든 스트레스를 쌓아두기만 하는 건 좋지 않았다. 케일리는 침실의 티 테이블에 간단한 야식거리를 놓아주고 종종걸음으로 트레이를 밀고 나가는 힐의 뒷모습에 “고마워요.” 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이쪽을 뒤돌아본 힐이 에드워드를 닮은 천사 같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2년 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한 힐은 최근 들어 빅토리아 시대의 아동학대 비주얼에서 벗어나 청소년 파트 타이머 정도로는 보였다. 그리고 점점 에드워드를 닮아가고 있었다. 같은 권속인 알렉스는 에드워드와 닮은 점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원래 비슷하게 생긴 외모인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남은 스콘 조각을 입안에 집어넣은 케일리가 티 포트에 우러난 홍차를 조금 따라 두어 모금을 마셨다. 허기가 져서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 중인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대번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뭐가 문제인지 쏘아붙였을 남자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버리니 이쪽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참으로 곤란했다.
침대 맡에 걸터앉아 잠시간 에드워드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케일리가 똑똑, 노크하듯 그의 등을 두드렸다.
“에디, 왜 토라지고 그래요?”
감정을 읽게 된 이후로 전보다 섬세함이 사라진-에드워드는 거기서 더 사라질 섬세함이 있었다는 게 경악스러웠다!- 케일리는 진짜 토라진 이를 두고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홀로 꽁해 있었던 에드워드가 단단히 비틀려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침대 구석까지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콕 처박혀버렸다.
그 모습을 어이없게 쳐다보던 케일리가 덩달아 침대 안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는 에드워드의 머리가 있을 만한 곳에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토라진 거냐고 묻잖아요.”
잠시간의 적막 뒤에 시트 안에 틀어박혀 다소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토라진 거 아니거든?”
“거짓말하지 말고요.”
“난 너희같이 음흉한 인간놈들이랑 달라서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지금 그게 거짓말이잖아요?”
에드워드는 흥,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자신이 정말로 기분이 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쪽은 제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톱에 때 같은 것들 앞에서 한껏 재롱을 피우느라 허리가 휠 뻔했는데, 그걸 두고 왜 병신 같은 짓을 하냐고 묻는 무신경함에 진심으로 마음이 상했다. 그리고 케일리는 원래 그렇다며 결국에는 받아들이려 드는 머저리 같은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너야말로, 내가 기분이 더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면서 왜 물어보긴 물어보는데?”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조금 쯤 유치해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어렸을 적에도 한 적이 없던 어리광 비슷한 징그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집어치우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왜 신경을 안 써요?”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내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게 에디 기분인데요?”
“거짓말하지 마.”
“난 거짓말 잘 안 해요. 알면서 또 그러시네.”
“…….”
안타깝게도 케일리는 에드워드와 달리 정말로 거짓말을 잘 안 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누군가를 속이는 귀찮은 짓을 할 만한 놈이 아닌 탓이다.
“에디, 내 가족한테 그렇게 잘 보이고 싶었어요?”
“그럼 넌 내가 너처럼 눈엣가시나 돼서 쫓겨났으면 좋겠냐?”
“꼭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게다가 로저는 나 좋아해요. 쫓겨난 건 사실이지만.”
“퍽이나 좋아하겠다…….”
“칭찬 고마워요.”
“칭찬 아니거든?”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결국 뒤집어쓰고 있던 시트를 걷어버리고 벌떡 몸을 일으킨 에드워드가 가만히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케일리를 노려봤다.
“넌 왜 로저 그 자식한테 막 대해?”
“네?”
“네가 정말로 날 신경 쓰면, 그 새끼한테 잘해야 할 거 아니야. 내 가족이니까.”
갑자기 로저에게 돌아간 화살에 케일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에디, 진심이에요?”
빈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아서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케일리를 응시하며 잠시간 인상을 찌푸렸던 에드워드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앞으로도 그 새끼랑은 친하게 지내지 마.”
로저와 친하게 지내는 케일리라니.
둘이 친구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알콩달콩 친구 놀이를 할 거라 상상하자 괜히 기분만 잡쳤다. 에드워드는 늘 자신만 녀석에게 매달리고, 맞춰주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던 게 멍청하게 느껴졌다. 애초 그런 걸 일일이 따져가며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그 괴상망측한 가족 앞에서 실실 웃으며 어울려준 건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일 까지는 아니었다.
사실, 에드워드에게 있어서는 그 편이 훨씬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인간을 싫어하며 지내온 세월이 얼마인데, 고작해야 케일리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점부터 믿을 수 없었다. 꼭 자기 자신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었다.
케일리가 자신의 노력을, 아니, 그보다는 노력의 이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데 대해 과하게 실망한 것도 그랬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유로 기분이 상했는데 이런 걸 케일리에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드워드는 꼭 갱년기 위기를 맞은 중년 가장이 된 기분이었다.
인간들처럼 나이를 먹었다고 남성 호르몬이 부족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정말이지 의문이었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이 갱년기 중년 놈들과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 자각 정도는 있었다.
게다가 이건 비단 이번 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케일리는 마음만 먹으면 에드워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웬만해서는 생각을 읽으려 들지 않았다. 그 탓에 종종 제 성격에 걸맞은 무심한 소릴 했고, 에드워드는 일일이 거기에 상처를 받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케일리가 자신의 불쾌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읽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럴 때 에드워드는 차라리 케일리가 자신의 머릿속을 죄다 파헤쳐 불합리한 마음까지도 굳이 말할 필요 없이 알아서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도록 손아귀에 쥐여준 능력인데, 아예 쓰지 않으니 그건 그것대로 섭섭했다.
그랬다.
지금 에드워드가 케일리에게 가장 섭섭한 건, 그가 자신이 건네준 특권을 전혀, 받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사용하지 않으려 든다는 점이다.
사소하게 쌓인 것들이야 많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게 이 상황의 원인이었다.
머릿속이든 마음속이든 마음껏 침범할 수 있도록 모든 걸 넘겨줬는데 정작 받은 녀석이 곱게 간직만 하고 있으니 의미가 없었다. 심장을 떼어줬는데도 아직까지 완전힌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건 케일리의 그런 점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는 건 에드워드도 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한참 부족하기만 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녀석에게 헌신하는 만큼 돌려받고 싶었다. 100퍼센트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상관없으니 무엇이든 돌려받고 싶은 것뿐이었다.
물론 에드워드도 상대가 케일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녀석이라는 걸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바라는 건 그저, 아주 작은 증명이었다.
녀석 또한 자신에게 동일한 마음을 보내고 있다는, 고작해야 그런 성의 표시.
하지만 그런 걸 대놓고 내놓으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말로 하면 어떻게 해줄까 물어오고 원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줄 것이다.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진심에서 우러난, 그러니까, 질투든, 집착이든, 이해든, 무엇이든 말이다.
그가 지금까지 다른 인간 놈들에게는 한 번도 나눠준 적이 없을 법한 감정이기만 하면 상관없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그렇게 작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욕심 없는 뱀파이어라는 사실이 기가 찼다.
그런 에드워드의 심정도 모른 채, 케일리가 슬쩍 손을 뻗어 에드워드의 뺨을 감싸 쥐었다. 별 깊은 생각도 없으면서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게 얄미웠다.
심장을 준 뒤로 케일리 쪽에서 먼저 접촉을 시도하는 일이 잦아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에로틱한 애정이 솟아났다기보다는, 그것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는 탓이다. 그래도 에드워드는 케일리가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게 좋았다. 역시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녀석에게 어째서 자신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인지 가르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에디, 기분 풀어요.”
에드워드는 여기서 자신이 기분을 풀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케일리야 워낙 성격이 무던하다 보니 토라진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는 녀석이고, 에드워드는 늘 하고 싶은 말이든 행동이든 참는 법이 없었으므로 둘 사이에 이런 유의 대화가 오가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이다.
쪽, 다시 한 번 어린애 장난처럼 입을 맞춰오는 케일리의 얼굴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숨과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에드워드가 케일리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녀석이 자신의 생각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어떤 마음인지 낱낱이 파헤쳐서, 차라리 난도질을 해주는 편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선을 넘어와줬으면 하고 염원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하지만 진심이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케일리에게 모든 것을 넘겨줄 수 있는 것처럼, 그도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물론 에드워드도 딱히 말 그대로 케일리의 모든 것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녀석의 손에 굳이 쥐여준 것 정도는, 이따금이라도 좋으니 휘둘러줬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이다.
“내가 정말로 에디가 무슨 생각을 하든 신경 안 썼으면, 이렇게 같이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기분이 더러워 보이든 말든 내버려뒀을 거고요. 에디도 나에 대해 그 정도는 알잖아요?”
알기 싫을 부분까지 쓸데없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잠시간 입을 다문 채 고집스러운 침묵을 지키던 에드워드가 결국 조금씩 풀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몰라. 알 게 뭐야.”
물론, 단단히 비틀린 심기가 당장 풀어질 리는 없었지만 말이었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가져간 그거 때문에 뒤죽박죽 섞여서, 이젠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게 너한테까지 박힌 건지, 아니면 정말로 너한테 나에 대한 마음이 있는 건지 구분할 수도 없어졌다고.”
꼭 화를 내는 것 같은 사나운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그저 우울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야말로 지금껏 한켠에 제쳐뒀던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착잡한 심정을 삼켰다.
문제는 그거다. 케일리에게 심장을 줘버린 탓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졌다는 것. 에드워드는 케일리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자신의 것이었다. 케일리가 느끼는 감정이 자신의 것인지, 케일리의 것인지 에드워드로서는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게 평탄하다고 여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아주 작은 계기로도 이렇게 터져나올 정도로 곪아 있었다. 에드워드는 지금껏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곁에 붙어 있었던 스스로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줄곧 품고 있던 의심은 언제든 터져나올 시한폭탄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한다고 멀쩡한 사실이 감쪽같이 사라져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케일리가 자신의 것을 읽지 않는 것처럼, 에드워드 또한 의식적으로 케일리를 읽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에드워드는 사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봤다 의심만 생겨날 게 뻔했고, 그렇다고 해서 심장을 다시 빼앗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케일리에게 생겨난 감정이 자신으로부터 감염된 병균 같은 것이라면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 눈을 내리깔고 다시 입을 다물어버린 에드워드의 두 뺨을 케일리의 양손이 가만히 감쌌다.
“난 아닌데요.”
에드워드가 시선을 들자, 케일리는 언제나와 같이 차분한 목소리에 희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안 그래요. 뭐가 내 건지, 뭐가 에디 건지, 헷갈린 적 없어요.”
“……어떻게?”
“낯서니까요.”
낮지만 힘 있고, 또한 단정적인 어조였다.
문득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케일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어린애 말장난 같은 명제가 스쳤다.
“에디 말이 맞아요. 나도 이따금 섞여요. 갑자기 나랑 상관없는 감정이 생겨나기도 해요. 하지만 에디의 감정은 낯설어서,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어요.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요.”
느리게 이어지는 다정한 목소리가 차분히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날아와 박혔다.
“이대로 에디의 감정에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달라질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감정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건 계속 나한테 있어요. 에디를 향한 것들도 모두 포함해서요.”
에드워드와 시선을 마주한 채, 케일리가 눈을 휘고 조금 웃었다.
“그런데, 난 섞여도 괜찮아요.”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드워드에게 케일리가 말을 이었다.
“누구 건지 알아볼 수 없어도 상관없어요. 똑같은 마음이라는 뜻이잖아요. 누구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차피 같은 거니까 굳이 이름표까지 붙여가면서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린 에드워드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내 가족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내 앞에서만 잘 보여요.”
문득 에드워드는 자신의 지난 2년간의 고민이 죄다 바보같이 느껴졌다.
케일리에게 심장을 심은 탓에 자신의 감정까지 병처럼 옮겨버렸으리라 생각했다. 감정이든, 생각이든, 쓸데없이 읽어버리는 짜증스러운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걸 줘버렸으니 케일리가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런데, 그 모든 게 헛생각이었다.
케일리는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감정을 감지해온 자신보다도 명확하게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고 있었다.
“뭐, 난 벌써 더할 나위 없이 잘 보고 있으니까 더 노력할 필요 없어 보이긴 하지만요.”
결국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걸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얼굴을 잠시간 먹먹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한 에드워드가 그의 뒷목을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소 거칠게 입술이 뭉개졌다. 제법 세게 부딪혀 아플 법도 한데 케일리는 저항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안을 난폭하게 헤집었다. 에드워드가 느긋하게 얽혀오는 케일리의 혀를 갈급하게 빨았다. 그대로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에드워드는 뜨겁고 달큰한 살덩이를 놓아준 뒤에도 얼마간 촉촉이 젖은 아랫입술을 우물거렸다.
“하아……. 에디, 이제 기분 좀 풀렸어요?”
에드워드는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한 줌짜리 목덜미를 느리게 문질렀다.
그는 나른하게 묻는 케일리를 잠시간 불만스럽게 응시하다가, 결국 뚱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토라진 적 없다고 했잖아.”
그는 케일리를 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영속성은 믿었다.
그리고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는.
케일리의 마음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제법 근거 있는 확신이 들었다.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Lee입니다.
영비 출간으로부터 2년 만입니다. 다시 뵙는 분도, 새로이 뵙는 분도 언제나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이 외전에는 슬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출간 2주년 기념으로 짧은 외전을 쓰려고 한 저는 케일리와 에드워드를 19세기로 보내 기숙학교에서 처음 만난다는 설정으로 가벼운 AU-평행세계-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쓰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이야기는 점점 덩치를 불리고, 장난 아니게 길어져서 하는 수 없이 별개의 작품으로 내기로 했습니다. 주인공은 19세기 버전 소시오패스 케일리와 뱀파이어 에디였고요. 외전이 아니게 된 시점에서 이 친구들을 처음 보는 독자분이 계시니 감정선을 차근차근 쌓기 위해 스토리가 보강되었고 단편에서 중편이, 중편에서 장편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2주년에 맞출 수 없어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쓰게 된 상견례 이야기입니다.
쓰면서 즐거웠습니다. 저도 케일리랑 에디가 그 뒤로 어떻게 변할지는 생각 안 해봤었는데 새삼 얘들은 역시 이렇게 살 것 같아서 웃겼고요. 둘 다 결혼은 처음이다 보니 종족이 뭐든 간에 긴장하지 않을까 싶었고. 그런데 케일리는 뭘 처음 하든 별로 긴장하지 않을 것 같은데 역시 얄미운 녀석입니다.
외전은 소소하게 영국 상류층 느낌을 살려봤는데 솔직히 저는 식도락도 관심 없고 예의 바른 사람도 아니라서 귀찮게 사는 놈들이구나 싶군요. 참고로 영국은 아직도 계급제 사회라서 소셜 클래스라고들 하는 Upper class, Middle class(중간에 Upper-middle class라는 묘한 것도 존재합니다.), Working class가 존재하며 사용하는 어휘나 단어, 악센트까지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간단히 축약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계층 차이가 있는데 그건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사회문화나 인류학을 좋아하는 공학도이기 때문에 흥미롭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하면 좀 이상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외전에 신을 넣고 싶어서 이런 것도 썼는데 에피소드 분위기에 안 맞아서 눈물을 머금고 빼버렸네요.
슬프니까 후기에라도 붙여놓을게요.
“에디, 내 거 만질래요?”
“……뭐?”
“내 거요, 좆.”
“너, 케일리, 매번 그, 망할, 호칭 좀…….”
“좆이잖아요. 아니면 페니스? 자지? 특별히 선호하는 거 있으면 말해요. 그걸로 불러줄 테니까.”
“…….”
“만지기 싫어요? 잡지에서는 이러면 보통 기분 풀린다던데.”
“…….”
“아, 드디어 뒤돌아봤네요.”
“……너, 어디 가서 절대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하겠어요?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기 싫으면 내 남편 앞에서만 해야죠.”
“…….”
“그렇죠, 달링?”
◇ ◆ ◇
“네가 생각하기에, 네가 전이랑 달라진 것 같아? 내 심장 때문에.”
“음, 정확히 어떤 점에서요?”
“나야 모르지. 성격 같은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사고방식이라도.”
“글쎄요……. 크게 달라진 건 모르겠지만, 달라졌다고 해도 그건 에디 심장 때문은 아닐걸요.”
“그럼 뭐 때문인데?”
“에디 때문이죠.”
“……?”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 진심이 된 적이 없거든요.”
“…….”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변했다면 그건 내가 에디한테 진심이라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게 늘어난 거잖아요? 지금까지는 없었는데, 내 속에 새로 생겨난 거니까요.”
“…….”
“아, 물론 에디는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지만요.”
여하튼 케일리와 에디를 다시 찾아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저도 저 녀석들이 좋습니다.
제가 쓰는데도 좀 웃기는 짬뽕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여러분의 삶에 언제나 무운이 함께하기를.
- 케일리와 에드워드, 그리고 저 둘과 별로 깊은 관계는 아닌 Lee 드림.
#참고서적
*작가의 개인 소장서입니다.
*한서KR/영서EN/일서JP
EN) 영국인을 보다: 영국인 습관 속 숨은 규칙Watching the English: The Hidden Rules of English Behaviour - Fox, Kate
KR) 영국인 발견 - 케이트 폭스 (*같은 책이며,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JP) 영국의 기묘함과 수수께끼イギリスの不思議と謎 - 金谷 展雄
JP) 「영국 사회」 입문: 일본인에게 전하고 싶은 진짜 영국「イギリス社会」入門―日本人に伝えたい本当の英国 - コリン・ジョイス, 森田 浩之
JP) 영국 귀족의 저택: 컨트리 하우스의 모든 것 - 田中 亮三, 増田 彰久
#미주
1. Family seat : 귀족들이나 젠트리의 주거지. 보통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지나 토지에서 가문의 일원들이 대를 거듭해 세습하는 저택을 의미한다.
2. 보트족 : 런던은 집값이 너무 비싸서 템즈강에 보트를 대어놓고 보트에서 거주하는 보트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곳이다.
3. 드로잉 룸 : 영국은 사용하는 단어에도 계급체계가 존재한다. 거실, 혹은 접객실의 경우 중상류층은 Drawing room 혹은 Sitting room, 노동계급은 Living room 혹은 Lounge.
4. 타운 하우스 : 영국 상류층은 과거 각기 지방의 영지에 컨트리 하우스, 혹은 패밀리 시트라 불리는 호화저택을 두고 사교계 시즌인 여름에만 런던에 방문했다. 런던, 혹은 런던 근교에 둔 여름용 주택을 타운 하우스라고 불렀다.
5. 컨트리 하우스 : 타운 하우스의 반대 개념. 사교계 시즌 외의 시간에 이용하는 저택으로 보통은 해당 가문에서 대를 거듭해 세습한다.
6. 조지안 하우스 : 18세기 무렵 영국에서 유행한 건축양식 중 하나.
7. 디너 : 중상류층은 가벼운 저녁식사를 Supper, 보다 격식 있는 저녁식사를 Dinner라고 표현한다. 간단한 가족끼리의 저녁식사는 Family supper 혹은 Kichen supper라고도 한다. 노동계급에서는 Dinner를 점심식사라는 의미로 쓰고, 저녁식사는 Tea라고 부르기 때문에 식사를 지칭하는 단어에서도 계급이 드러난다.
8. 푸딩 : 중상류층은 식사가 끝나고 나오는 후식을 통틀어 Pudding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