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어플은 드디어 오늘, 유신이 히트를 맞이한다고 알려 왔다. 마지막으로 센터에 방문한 지 약 일주일째였다.
지난 일주일간, 유신은 딱히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지냈다. 카페 아르바이트도 나가고, 대학교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산처럼 쌓인 리포트는 늘 그렇듯 그의 골칫거리였다.
히트 전후로 컨디션이 어떨지 몰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일정을 비우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밥도 열심히 먹으려고 노력했다. 이쪽은 얼마나 잘했는지 솔직히 자신 없었지만.
그런 바쁜 와중에도 잠시 짬이 날 때 닉 메드의 팬 사이트와 SNS 계정을 둘러보는 것이 유신의 즐거움이었다.
사실 본인도 닉의 팬 계정을 운영하고픈 욕구는 없지 않았고, 10년 넘는 덕질 경험으로 솔직히 시작만 하면 잘나갈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바쁜 대학 생활 탓에 결국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단 시작하면 학교 수업이나 리포트보다 계정 운영에 더 정성을 쏟을 것도 걱정이었고.
닉의 팬들 사이에서는 슬슬, 자신들의 우상이 뉴욕에 있다는 설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아직 닉의 목격담이나 파파라치 컷이 뜨지는 않았지만, 소속사 사장인 아이잭 심슨이 LA가 아닌 뉴욕이 있다는 증거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그럼 다음 작품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팬들은 걱정이 많았다. 소수지만 닉이 요 몇 년 크게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으니, 휴식기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닉이 지금 뉴욕이라는 걸 자신만 알면 좋을 텐데. 이게 말도 안 되는 독점욕이라는 것을 본인 또한 알면서도, 유신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도 닉이 대리모를 통해 2세를 계획 중이라는 소문은 전혀 없었다. 그 대리모가 자신이라는 소문도, 물론 없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하아.”
유신은 제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 자기 방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시트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그 위로 미리 커다란 목욕 수건을 깔아 두었다.
벽에 걸린 닉의 아름다운 포스터 두 장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하려는 터무니없는 짓을 떠올리니, 그것조차 괜히 쑥스러웠다.
지금 집에는 유신밖에 없었다. 밀리에게는 억제제 휴약으로 히트가 올 것 같으니 하룻밤만 집을 비워 달라고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다. ‘진짜’ 히트는 며칠이나 지속된다지만, 억제제 복용 중간에 오는 히트는 보통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침 슬슬 그럴 시기였기에 밀리는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방학 때로 맞추지 그랬냐고, 굳이 학기 중에 히트를 겪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억제제나 호르몬 쪽은 문외한인 베타답게, 나름 사정이 있겠거니 예사로 넘겼다.
밀리는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다정한 말을 남기고, 하룻밤 다른 친구 집에서 자고 오기로 했다. 밤새 팝콘과 옛날 영화가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 예정이었다.
“슬슬 시작되나?”
유신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양팔로 제 몸을 끌어안았다. 땀이 밴 목덜미를 훔치자, 한껏 예민해진 살갗은 그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페로몬 샘을 자극한 듯 훅 향이 짙어졌다.
그의 페로몬은 레몬과 민트가 뒤섞인 산뜻한 향이지만, 히트 때면 데이지꽃의 달콤한 향이 섞였다. 히트 때조차 끈적하기보다 은은한 향기인 것이 어느 면에서는 그다웠다. 물론 본인은 자신의 향을 느낄 수 없다.
유신은 15살, 한국 나이로는 16살에 오메가로 발현했고,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억제제 휴약 히트를 겪었다. 권장 주기가 1~3년인 만큼, 그 정도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보통은 진통제나 안정제 따위를 처방받아,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면서 시간을 죽이는 식으로 보냈다. 이런 식으로 제정신(?)으로 맞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들 휴약기에 겪는 히트는 진짜 히트와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다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한다.
“이게 별게, 아니라니.”
막상 히트가 시작 중인 유신으로서는 그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이렇게 들뜨고 기분이 이상한 게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럼, 진짜 히트 때는 무슨 이성이라도 나가나.
실제 히트와 러트를 겪는 오메가와 알파들은 종종 진짜 이성이 나가 버리곤 한다. 유신도 당장 다음번 히트 때 그 사실을 사무치도록 만끽하게 되지만, 지금은 아직 모르는 이야기다.
“후우.”
가빠지는 숨에 심호흡을 하며, 유신은 책상 위에 늘어놓은 것을 살폈다. 지금부터 할 일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죠앤에게 받은 딜도는 센터에서 받은 이후로 처음 제대로 꺼내 보는 것이었다. 뭔가 쉽게 손을 대기 민망했달까.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사이 미리 연습이라도 해 둘 걸 그랬다.
어제 특별 배송으로 닉의 정자도 받았다. 자체적으로 온도 등이 유지되는 특수 케이스에 들어 있었고, 그 케이스는 그대로 센터로 반납하면 된다고 했다. 비싼 거라니 조심해야 했다. 보안 때문에 잠금장치는 몇 단계를 거친 이후 마지막으로 유신의 홍채를 인식해야만 열렸다.
그래도 이거 자신이 빼돌리면 바로 난리 나는 거 아닌가? 하는 한국인의 의심병이 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태껏 계속 이런 식으로 사용해 왔을 텐데 그 비슷한 뉴스는커녕 소문조차 없던 것으로 보아, 나름의 대책은 세워져 있는 듯했지만. 알고 보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지금처럼 유명인의 대리모와 난자 제공자가 같은 케이스 자체가 처음일 거란 사실은 생각도 못 했다.
“됐어. 나랑은 상관없어.”
유신은 쓰고 있던 안경을 끌어 올리고, 정자가 든 시험관을 제일 작은 딜도에 세팅했다. 여분 따위 없이 딱 하나뿐이라 좀 신경 쓰였지만, 매뉴얼만 봐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이 시험관을 케이스에서 꺼내고 1시간 안에 끝나야만 한다. 유신은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요는 정액이 자궁에 들어가면 되는 거잖아. 흥분해서 자궁 입구가 열리게 한 다음, 정액을 넣으면 끝이다.
“근데 뭐부터 해야 하지?”
난감했다. 살면서 한 번도 뒤쪽을 쓴 경험은 물론, 뒤쪽으로 제대로 자위도 한 적 없었다. 센터 쪽이나 죠앤은 유신이 경험이 풍부하다고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고.
“일단 넣어 볼까.”
유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란히 놓인 딜도부터 살폈다.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건 역시 맨 위쪽의 제일 큰 핑크 딜도였다. 너무 크고, 너무 굵고, 지나치게 리얼한 성기 모양에, 그 와중에 색은 또 선명한 형광 핑크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원래 들어 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꺼내 놓았더니, 상자에 들었을 때보다 더 커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냐. 유신은 핑크 딜도는 바로 제쳤다. 제일 작은 건 정액이 든 시험관을 세팅했으니, 지금 쓰긴 그럴 거고.
“저건 들어갈까?”
유신의 시선이 중간 크기의 파란색 딜도로 향했다. 핑크색이 (약간 과장을 섞어) 어린애 팔뚝만 하다면 얘는 그나마 손가락 세 개를 합친 정도의 굵기였다. 표면이 구슬처럼 올록볼록한 건 좀 거슬렸지만.
물론 저것도 유신의 기준에는 컸다. 그래도 젤이 있으니까, 어떻게 들어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 차라리 그 전에 손가락 정도라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유신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제 손가락을 엉덩이가 물고 있는 장면을 상상한 것이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 구멍이 움찔거리며, 동시에 울컥 안쪽에서부터 젖는 것이 느껴졌다.
“아, 옷부터 벗어야지.”
유신은 쭈뼛거리며 허리의 고무줄로 손을 가져가, 속옷까지 한꺼번에 내렸다. 예상대로 점도가 없는 투명한 액으로 속옷은 거의 절어진 상태였다. 아니, 이 상태면 바지도 무사할 리 없었다.
흥분한 증거를 보자 그는 괜히 민망했다. 히트를 맞이한 오메가의 몸이 알파를 원하며 제 구멍을 알아서 적신 애액이었다.
목욕 수건 한 장으로 택도 없겠다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성적인 판단이 뒤따르기에는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 바지가 벗겨지며 천이 다리를 스치는 가벼운 감촉에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생각해 보면 아까 씻고 나서 옷을 왜 입었는지 모르겠다. 괜히 빨래만 늘어났다. 굳이 벗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도 모르지 않았지만.
“응.”
유신은 침대에 앉은 채 벽에 등을 기댔다.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가볍게 쓸어 올리자, 열기를 머금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른쪽 다리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훑는 손길이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 위로, 교통사고 때 다친 흔적과 그때 수술했던 자국이 흉터로 남아 있었다. 몇 년이나 지나서 많이 옅어졌는데도 당시의 끔찍하던 상황이 충분히 짐작 가능할 정도였다.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지만, 아마 본다면 틀림없이 징그럽다고 생각하겠지. 흉터의 위를 손으로 훑는 것만으로 유신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기분 좋아.”
하지만 손이 그대로 느슨하게 벌어진 허벅지 사이를 지나 더 깊이까지 들어가자, 생각은 바로 흐트러졌다.
유신은 차마 눈으로 직접 보지도 못한 채,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엉덩이 사이의 좁은 입구를 훑었다. 이미 달아오른 몸에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엉덩이 안쪽 제일 깊은 곳에 있는 구멍은 이제 완전히 성기로 변해 있었다. 입구는 안에서 줄줄 흐른 애액으로 흠뻑 젖은 채, 손끝을 가져다 대자 바로 꿈틀거리며 환영했다.
손가락을 슬쩍 움직이자, 바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직 살면서 아무것도 허락한 적 없는 좁은 구멍이 유연하게 손가락을 두 마디나 받아들였다.
어느새 본격적으로 히트로 들어간 안쪽은 이미 완전히 녹아내린 채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손가락이 쾌감을 구하며 내벽을 훑어 내렸다. 어디를 문질러도, 어디를 찔러도 강한 자극에 허리가 흔들렸다.
“아, 이거 생각보다 너무.”
답하듯 안쪽에서 울컥 애액이 내뿜어졌다. 어서 빨리 더 깊이까지, 자궁까지 들어오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앞쪽의 남성기도 어느새 완전히 발기한 채였다. 하지만 몸의 주인은 그쪽은 존재조차 잊은 듯, 뒤쪽 구멍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치적거리는 젖은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쾌감을 좇듯 손가락이 점점 빨라지고, 유신의 흥분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좀 더.”
하지만 부족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히트를 맞이하여 자궁까지 알파의 정액을 원하며 발정한 탐욕스러운 구멍이 손가락 하나로 만족할 리 없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주변을 훑는 유신의 눈에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 딜도가 들어왔다. 열 오른 눈동자가 세 개의 크고 작은 그 실리콘 막대들을 핥듯이 살폈다. 방금까지만 해도 부끄럽다며 제대로 보지도 못하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저거면 좀 더 깊이까지, 자신이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까.
유신은 어느새 중간 크기의 파란색 딜도를 집어, 그 위로 젤을 흩뿌렸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머리로 판단하기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이미 흠뻑 젖은 구멍에, 그리 크지 않은 딜도는 힘들지 않게 들어갔다. 하지만 유신은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확실히 깊은 곳까지 찔러 넣어졌다.
“기분이 이상해. 흣!”
아까 손가락으로 쑤실 때와 마찬가지로, 점점 높아져 가는 쾌감에 뒤쫓긴 것처럼 딜도를 쥔 손이 빨라졌다.
딜도 표면의 올록볼록한 구슬 모양의 요철이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내벽을 자극하고, 입구의 주름을 스칠 때마다 쾌감이 높아져 갔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쉴 새 없이 달콤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자신은 발현한 이후, 여태껏 몇 번의 히트를 겪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통제에 취해 거의 잠만 자고, 반쯤 졸면서 적당히 앞뒤를 비비는 것으로 끝냈다. 도구는 무슨, 무서워서 젖은 뒤쪽에 손가락을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만으로도 히트 중에는 쾌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직접적으로 안을 딜도로 쑤시는 지금은, 정말.
“응, 으응.”
흥분으로 고개가 흔들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문득 벽에 걸린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소년 시절의 발레단 수석 무용수 니콜라이가 무대 의상을 차려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닉 메드가 검은 양복을 입고, 매력적인 미소를 뽐내며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센터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닉은 포스터보다도 훨씬 더 잘생기고, 반짝이고, 또 눈부셔서.
“아.”
살아 있는 그를 떠올린 것만으로 내벽이 욱신거리며 물고 있던 딜도를 조였다.
손끝이 그의 부드러운 금발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부분은 닿은 적이 없어 그렇다는 사실은 잠시 잊은 채. 손끝을 부드럽게 스치던 그 밝은 금빛 물결이 그대로 자신을 감싸는 것만 같다.
오렌지 계열에 시나몬 향이 섞인 그의 알파 체향을 떠올린다. 아, 그래! 그건 베르가못이라는 거다. 예전 인터넷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닉 메드의 페로몬 향은 베르가못이라고.
그게 그런 향이었구나. 향수에 관심이 없어서 여태 몰랐다. 자신이 그 향을 다시 맡을 일이 있을까?
머릿속이 멍하니 들뜬 채, 딜도를 쥔 손은 안쪽을 쑤시며 정신없이 기분 좋은 부분을 탐하고 있었다. 특정 부분을 쑤시자 거의 동시에 앞쪽의 남성기까지 허리 전체가 울렸다.
“이거, 이상.”
쾌감에 솔직한 손이 정신없이 그 부분만을 탐하고 있었다. 상상과는 완전히 궤적을 달리하는 지나친 쾌감에 이성은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하윽!”
그리고 초심자에게 지나친 자극에 유신의 허리가 튀고, 동시에 그의 남성기도 사정했다.
하지만 한번 절정에 닿았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몸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제대로 숨도 돌리기 직전부터, 엉덩이 안쪽이 바르작대며 더 큰 쾌감을 원해 왔다.
“부족해.”
이것이 히트로구나. 정말 아랫도리의 노예가 된 기분이라고, 바로 다시 발정하는 제 몸에 유신은 약간 질린 채 생각했다.
손이 충동적으로 핑크색 딜도를 집어 들었다.
너무 크고, 너무 굵고, 선명한 형광 핑크색의 딜도였다. 완전히 발기한 남성기를 극단적으로 본뜬 형태는 어떤 의미로 그로테스크할 정도였다. 하지만 방금 도달해 한껏 예민해진 뒷구멍에 저걸 넣는다면.
분명 기분 좋을 거야.
유신은 이번엔 딜도에 젤을 바르는 것도 잊었다. 어차피 애액이 넘쳐흐르고, 아까 딜도를 적셨던 젤이 남아 있어서 딱히 상관도 없었다.
단번에 밀어 넣지 못하고 입구에서 머뭇거린 것은, 그나마 남은 한 조각 이성 덕분이었다. 하지만 실리콘으로 조형한 선단의 제일 불룩한 부분이 구멍에 빠듯이 들어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손이 단번에 끝까지 딜도를 밀어 넣었다.
“아흣!”
파란색 딜도로 쑤실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유신은 온몸이 억지로 반으로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한번 도달해 부드럽게 녹은 구멍은 게걸스럽게 거대한 딜도를 삼키고 있었다. 히트를 맞아 한껏 흥분한 오메가의 몸은 그조차 쾌감으로 인식했다. 부끄러움조차 잊은 채 뒤쪽의 감각을 만끽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각에 몰입한 채 유신은 열심히 제 안에서 딜도를 앞뒤로 움직였다. 흥분으로 발끝까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흐응!”
반쯤 정신이 나가 정신없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자각 따위 없었다. 거의 금욕적이기까지 하던, 성적으로 무심하던 평소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흐트러진 채였다.
“더, 좀 더.”
몸이 순수하게 더 깊은 쾌락을 갈구했다. 딜도를 움직이던 손이 전선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앞뒤로 쑤시는 것은 멈추지 않으며 반대쪽 손으로 더듬더듬 그 끝에 붙은 버튼을 찾아냈다. 망설임 없이 전원을 켜자, 딜도가 몸 안에 박힌 채로 진동을 시작했다.
우웅, 웅, 웅.
“히익!”
빼곡하게 내벽을 채우는 거대한 덩어리의 진동에, 유신은 온 배 속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점점 더 높아지는 쾌감에 그는 이미 침대에 완전히 드러누운 채, 허리를 비비적거리며 흐트러져 있었다. 엉덩이 아래 깔고 있던 목욕 타월은 이미 그 존재가 의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너무 커, 깊.”
진동에 맞추듯 엉덩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 실 같은 이성이 이건 너무 이상하다고 얕은 의문을 제기했지만, 딜도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이 가볍게 움직여 안쪽 느끼는 곳을 찌르는 것만으로 바로 다시 흥분으로 젖어 버렸다.
“그만, 너무.”
그저 순수하게 쾌감을 추구하며 정신없이 손과 허리를 흔들 뿐이었다. 아직 벗지 않은 상의가 말려 올라가 그의 가는 허리와 납작한 배가 드러났다.
거대한 딜도를 머금은 아랫배는 딜도가 움직일 때마다 그 형태가 가볍게 더해지곤 했다. 꽤나 야한 모습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자각이 없었다.
아아, 딜도가 아니라 니카가 이렇게 박아 준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내벽이 더 죄어들었다. 허리 안쪽이 찌릿찌릿 울렸다. 명백하게 더 흥분한 것이었다. 딜도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진동과 함께 그런 내벽을 더욱 자극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상관없잖아. 그 사람이 박아 준다고 상상하는 건. 어차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 이럴 때 상상에서 당신을 떠올리는 정도는.
바르작거리며 침대에 엎드린 채 벽에 붙은 포스터를 바라본다. 이번에는 소년 시절 사진은 못 본 척, 성인이 된 양복 차림의 닉하고만 눈을 마주쳤다.
손으로는 열심히 딜도를 뒷구멍에 쑤셔 넣는 중이었다. 배어 나온 땀에 긴 앞머리가 이마 위에 엉켜 있었다. 하얀 얼굴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야했다.
저것도 몇 년 전이다. 지금의 닉은 저 때보다 더 성숙하다. 좀 더 최근의 포스터를 벽에 붙여 놨어야 했는데.
역시 누군가가 이렇게 박아 준다면, 그 상대는 당신이면 좋겠어. 어차피 내 머릿속에서 혼자 이러는 건데, 이 정도가 죄는 아니잖아?
히트에 완전히 젖어 든 유신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멍하니 가쁜 호흡만 내뱉었다.
닉의 베르가못 향 페로몬이 코끝에서 희미하게 떠도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시나몬 향이 살짝 더해지고, 달콤하고 짙은 장미 향도 아주 약간.
닿은 적 없는 그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붙잡는 것을 상상한다. 굵은 성기가 제 아래를 밀고 들어오고, 거칠게 흔들기 시작한다.
“니카, 니카.”
유신은 지나치게 흥분해 자신이 누구를 부르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였다. 어차피 다른 이름일 리도 없었다.
영화에서 보던 그를 기억한다. 광고나 화보에서의 그를 기억한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에게 제일 인상 깊은 모습이라면, 오래된 발레 영상이다. 지금보다 어려서 (아주 조금) 작고 가늘지만, 긴 금발 아래 섬세한 미모는 딱히 변한 것도 없었다.
딱 달라붙는 발레 타이츠를 신은, 근육이 꽉 잡힌 허벅지는 건강하고 아름답다. 지금의 자신과는 달리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그는 마치 유신에게 보여 주겠다는 듯 가볍게 점프하고, 멋지게 피루엣을 몇 번 돌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유신을 향해 몸을 숙여 왔다. 어느새 머리는 짧아지고, 현재의 어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제 위에서 웃고 있는 얼굴은 얼마 전 만났던 닉의 얼굴과 겹친다. 상황이 상황이라 약간 얼빠져 보이던 그 얼굴은 역시나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스크린이나 화보에서 보던 것보다 어딘가 귀여웠다.
“니카, 나, 흐윽.”
그때 훅 하고 배 안쪽이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하반신은 계속 찌릿찌릿 쾌감에 절어 있었지만, 지금 것은 확실히 어딘가 달랐다. 뒷구멍에서 울컥 흘러나오는 애액은 엉덩이를 다 적시다 못해 마치 아래에 웅덩이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이거로구나. 모르지만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지금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히트를 맞은 채 흥분해 임신할 준비가 끝난 오메가의 자궁이 입구를 연 것이다.
왜 죠앤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오메가인 이상, 누구나 겪어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흣.”
유신은 제 안쪽을 채우는 딜도를 거칠게 뽑아냈다. 안쪽 주름이 마치 거부하듯 딜도를 빨아 당기며, 아쉬운지 오물거렸다.
아, 좀 싫은데. 그는 이런 자신이 좀 야한 것 같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대로 핑크 딜도는 대충 던지고, 제일 가느다란 딜도를 집었다. 가늘긴 하지만 길이는 핑크 딜도만큼이나 길었다. 전원을 끄지 않아 핑크 딜도가 여전히 웅웅 진동하고 있지만, 이쪽은 더 이상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지막 딜도는 색이 회색이라 그럴까, 맨질맨질한 표면 때문일까. 다른 딜도와 달리 확실히 의료 용품 같은 분위기가 유신은 묘하게 긴장되었다.
하지만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한껏 흥분한 제 안쪽에 딜도를 찔러 넣었다. 방금 전에 비해 확연히 가늘어, 조금의 저항도 없이 깊은 안까지 빨려 들듯 들어갔다.
탐욕스러운 구멍이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빠끔거렸다. 하지만 이제부터 하게 될 일을 아는 만큼 머릿속은 그렇지 않았다. 반대로 오히려 더 흥분이 높아지며,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부풀어 오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정체를 깊이 생각하기보다 먼저, 딜도의 끝이 자궁의 입구에 닿았다.
“아.”
요는 정액이 자궁에 들어가면 되는 거라고. 흥분해서 자궁 입구가 열리게 한 다음, 정액을 넣으면 끝이라고.
그럴 리 없잖아. 그런 간단한 것일 리가 없었다.
자신은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됐다. 아니면 차라리 그냥 병원에서, 이렇게 자신의 손을 쓰는 것이 아니고, 의료진의 손을 빌려서.
아니, 그건 또 싫어.
정액은 버튼 하나로 유신의 자궁으로 들어갔다. 그의 남성기는 아플 정도로 발기해 선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유신은 딜도를 쥔 반대편 손으로 성기를 가볍게 훑었다.
“흑.”
이미 흥분이 극단에 닿은 만큼 그런 작은 자극에도 바로 절정에 닿았다. 두 번째라 정액은 처음보다 훨씬 묽었다.
그의 자궁이 겨우 들어온 사랑스러운 상대의 정액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입구를 조이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그걸 느낄 수 있을 리 없으니 이건 그냥 기분 탓이다.
힘이 빠진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침대에 늘어져 버렸다. 느슨하게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아직 박혀 있는 회색 딜도의 끝이 보였다. 안쪽에서 흘러나온 애액과 두 번에 걸쳐 사정한 정액으로 구멍 주변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유신은 호흡을 고르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쓰고 있던 안경이 과격한 움직임에 거의 벗겨져 기우뚱하게 머리에 얹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안에 박힌 딜도를 뽑아냈다. 뒷구멍은 어느새 처음에 가까울 정도로 오므라들어 있었다.
“으흥.”
덕분에 딜도가 구멍을 빠져나오는 감각이 다시 그를 흥분시켰다. 몸이 다시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신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뒷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반기듯 내벽이 손가락을 조이고, 애액이 다시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그가 이 일련의 과정이 모두 히트 때문이라고 깨달은 것은, 새벽에 잠시 욕망이 가라앉았을 때였다. 하지만 곧 새로운 욕구가 덮쳐 와 울면서 다시 뒤를 쑤셔야 했다.
사실 딜도로 깊이까지 괴롭힌 것은 처음뿐, 그 뒤로는 조금 겁이 많아져 입구만 깔짝깔짝 건드렸다.
부드러운 거품 같은 욕망이 전신을 휘감은 채 가라앉지를 않았다. 유신은 밤새 침대 위에서 신음하며 앞과 뒤에서 물을 흘려 대는 수밖에 없었다.
안정제 없이 맞이하는 히트란 정말 징글징글하다고, 잠깐씩 이성이 돌아올 때마다 혀를 찼다. 이 정도로는 ‘진짜’ 히트에 비하면 약과인 것은 미처 몰랐다.
이성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창피해.”
확실히 맑아진 정신과 간밤과 달리 명백히 느껴지는 수치스러움에 유신은 히트가 끝난 것을 알았다. 어차피 혼자 있을 때 혼자 한 짓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을 쳤다.
하의는 아직 벗은 채, 작고 동그란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반신 군데군데 말라붙은 수상쩍은 하얀 흔적까지 모조리.
엉망진창으로 더러워진 침대나 하반신과 달리, 몸은 그렇게 뒤를 쑤셔 댔는데도 멀쩡했다. 오히려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받은 콘돔은 결국 하나도 안 썼구나.”
러브 젤도 크게 필요는 없었다. 원래 히트 때의 오메가는 애액이 넘쳐 나는 법이다.
덕분에 시트는 다 새로 빨아야 하겠지만. 침대는…… 음, 괜찮겠지?
귀찮으니 빨래는 좀 더 나중으로 미루자. 일어나는 것도 좀 더 나중으로.
멍하니 늘어져 있으려니 뭔가 쌀랑해, 유신은 꾸물꾸물 옆에 던져 놓은 바지만 집어 입었다. 물론 애액에 담갔다 꺼낸 듯한 팬티는 빼고다.
문득 콘돔을 자신이 써야 했던 걸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랬으면 정액이라도 덜 튀었을 거라는 작은 깨달음이랄까. 확실히 경험이 없다 보니 생각이 짧다.
“아, 맞다.”
그대로 유신은 누운 채 빙그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엉덩이만 들어 올려, 긴 다리가 벽에 기대게 했다. 자연스럽게 하반신이 거꾸로 선 자세가 되었다.
매일 꾸준하게 2시간 이상 운동을 하는 그는, 다리가 불편하다지만 웬만한 일반인보다 몸이 가벼웠다. 예전에는 하루에 최소 8시간, 평균 10시간 이상 몸을 움직였기에 지금은 너무 게을러졌다고 본인이 생각할 뿐이었다.
헐렁한 상의가 흘러내려 허리 쪽이 드러났다. 그는 판판한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어디선가 임신을 위해 수정과 착상이 잘되도록, 성교가 끝난 뒤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10분 정도 다리를 위로 하고 누워 있으면 좋다는 카더라를 보았다. 물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풍문이고, 만에 하나 효과가 있었어도 그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지나고 난리를 얼마나 쳤는데, 유효 기간이 끝나도 진작에 끝났을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도 왠지 이러고 싶었다.
“아기, 생겼으면 좋겠다.”
그쵸, 니카?
마지막 말은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삼킨 채, 유신의 시선은 벽에 걸린 포스터를 향했다.
거꾸로 매달린 닉이 멋있게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 거꾸로 보는 건 제 쪽이던가.
그러고 보니 오른쪽 포스터는 스파이 영화 때다. 그 뒤로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지. 돈도 좀 생겼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새 포스터를 사야겠다. 가능한 최신 버전으로.
유신은 이대로 포스터에 키스하고 싶은 기분을 슬쩍 억눌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역시 내가 미쳤나 봐. 창피해 죽겠어.”
딜도로 뒤를 쑤실 때보다 더 부끄러운 기분에, 그는 괜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이렇게 배덕한 기분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숨겨 둔 생강 과자를 몰래 꺼내 먹은 이후로 처음이야.”
“아, 그래요?”
감정이 북받친 닉의 푸념에도 올가는 하품을 겨우 참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생각하면 이래선 안 되겠지만, 벌써 2주 넘게 저러는 중이라 솔직히 너무 지겨웠다.
닉 또한 그녀의 건성인 반응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멋대로 계속했다.
“그냥 생강 과자가 아니야. 크리스마스용으로 쓰기 위해 따로 빼 둔 거였다고. 원래 러시아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생강 과자를 먹는 전통은 없거든. 어머니는 그 비스킷을 일부러 영국의 전문가에게서 직접 주문했어. 원래 그런 도락을 즐기시는 분이셨지.”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연극적으로 몸을 젖혔다. 워낙 그림이 되는 외모라 그런지 과장된 동작 또한 고전극의 한 장면처럼 잘 어울렸다.
올가가 여전히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나는 굳이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어. 좋아하는 게 눈앞에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기다린다고 더 맛있어지는 것도 아닌데?”
배우답게 발음이 너무 좋아 한 단어 한 단어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닉의 다음 출연작은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라도 아무 문제 없을 듯싶었다.
올가는 기계적으로 지난 2주간 아이잭이 닉에게 되풀이하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그래도 불륜은 안 되세요, 미스터 메드. 미스터 심슨도 말씀하셨잖아요. 누구랑 놀아도 상관없지만, 본인도 불륜은 못 막아 준다고.”
“나도 알아!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이러고 있잖아.”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주변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건 포함되지 않는 거야?!
“그거 큰일, 아니, 다행이네요.”
올가는 이건 또 골치 아프다고 생각 중이었다. 이 사람 밑에서 일하며 늘 새로운 변덕에 고통받았지만, 이번 건 새삼 신선했다.
무슨 일이냐면, 대리모로 아이를 만들려고 찾아간 종합 병원 부속 센터에서 어떤 남성 오메가에게 홀딱 빠져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상대의 이름도 모른단다. 아는 건 지독하게 예쁘다는 거랑, 아마도 지금 임신 준비 중이라는 것 정도?
덧붙여 그 건물에는 대리모 센터도 있었지만, 불임 클리닉과 산부인과도 있었다. 아마도 그 오메가는 유부남, 적어도 그에 준하는 상대가 있을 게 분명했다.
듣자 하니 어차피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눈 것도 아닌 듯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아이잭도 닉이 실제 뭘 할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슬슬 다음 대본이 정해질 것 같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인 듯했다. 아니, 오히려 금지된 사랑에 대한 저 열정을 연기로 승화하길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올가로 말하자면, 그저 성가셨다. 직장에서의 매일매일이 좀 단조로웠으면 좋겠다.
“안녕, 여러분! 어때? 오늘도 니키는 금단의 사랑에 대한 열병으로 괴로워하는 중인가?”
“윽, 가브.”
그리고 마치 불에 기름을 붓듯, 가브리엘이 딱 맞춰 나타났다. 오늘도 멋진 몸에 딱 맞는 화려한 주황색 맞춤 양복을 입고 있었다.
올가는 저 알파는 어디서 맨날 저렇게 특이한 색으로 양복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지가 늘 신기했다.
“뭐, 보시다시피요.”
그녀는 냉큼 뒤로 물러섰다. 가브리엘은 닉에게 다가와 낄낄 웃으며 철썩 등을 쳤다.
“니키, 들었어. 유부남 오메가한테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아직 기혼이라고 확정은 아니거든!”
제풀에 찔려서인지, 닉이 괜히 더 발끈했다. 가브리엘은 그 반응에 더더욱 재밌어했다.
사실 처음 여기 온 날 언급했던 큰 프로젝트가 이제야 겨우 끝이 났다. 덕분에 그가 들르지 못하는 사이, 생각 이상으로 상황이 재밌어져 있었다. 당분간은 매일같이 찾아와 이 소동을 듬뿍 즐길 예정이었다.
“그 사람 만난 날, 대리모에게 줄 정자 빼러 갔었다며? 정자 운동성이 최고로 좋다고 칭찬받았다는 이야기, 나도 들었어. 자랑스럽다, 우리 우성 알파님. 넌 역시 내 최고의 친구야.”
“그딴 허튼소리나 하려고 온 거면, 당장 돌아가.”
“왜? 나니까 그런 이야기로도 너랑 농담을 해 주는 거야. 블라다 누님조차 이렇게 웃어넘겨 주지 않을걸.”
블라다는 블라디미라의 애칭으로, 러시아에 있는 닉의 네 살 위의 누이였다.
닉이 흠칫했다.
“너 요새도 그녀하고 연락해?”
“당연하지. 네가 안 하니까 나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누님이 이래저래 걱정이 많으셔. 당신의 남동생이 언제 가족을 꾸리고 한 사람에게 정착할지 고민하시더라.”
“누나는 본인이나 어떻게 하고 나한테 참견하라 그래. 잠깐, 너 설마 대리모를 구한 걸 이야기하진 않았겠지?”
“니키,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안 했어. 좋은 소식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너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블라다 누님이 제일 맘에 걸렸으면서.”
닉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됐으니까, 지금은 그쪽에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전하지 마. 꼭 필요하게 되면 내가 직접 연락할 테니.”
“그건 걱정 마.”
가브리엘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에 있는 닉의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마지막에 두 사람은 항상 이런 조용한 분위기가 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먼저 입을 떼는 쪽은 항상 가브리엘이었다.
“맞다. 그래서 네 대리모는 애가 생겼대?”
“잘 몰라. 히트는 잘 보냈다는 거 같던데.”
닉은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올가가 냉큼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그거 관련입니다만.”
사실 그녀가 오늘 여기 온 표면적인 이유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닉이 추가로 엉뚱한 행동을 저지르지나 않을지 분위기를 보고 오라고, 아이잭이 부탁한 것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그 늙은 흑인의 부탁에 너무 약해서 큰일이었다.
“임신 여부는 다음 주나 돼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억제제를 끊고 첫 번째로 오는 히트에 바로 애가 생길 확률은 극도로 낮아요.”
올가의 설명에 닉이 어딘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안 생겼어?”
“절대까지는 아니지만, 아마도요. 다음 달에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테고요. 설마! 아이가 생겼을 거라고 기대하셨나요, 미스터 메드?”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 안 할게. 참고로 난 여자애가 좋아. 날 닮았으면 분명 엄청 예쁘겠지.”
“그건 유전자 중 절반이고, 다른 유전자 주인의 외모도 중요하지 않을까?”
자기애 가득한 닉의 말을 가브리엘이 바로 지적했다.
“가브, 내 외모면 반으로 나눠도 충분하다고.”
“확실히 상대 쪽도 워낙 미인이라 그건 걱정이 안 되네요.”
거의 동시에 닉과 올가가 대답했다. 그리고 서로 무슨 소리냐는 듯 마주 보았다.
올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우성 알파가 제 대리모 후보자의 사진을 봤다면 절대 저런 반응일 수가 없는데. 잠깐.
“미스터 메드, 혹시 제가 드린 대리모 후보에 대한 파일을 안 보셨나요?”
“그걸 내가 꼭 봐야 하는 거야?”
“세상에, 그래도 당신을 애를 낳을 오메가인데! 물론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의무는 없지만요. 보통은 관심을 가지죠.”
올가는 방구석에서 대본에 섞인 채 대충 던져져 있던 파일을 바로 찾아왔다.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저기 섞여 있길래, 개인 정보도 그렇고 계속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따지자면 굴러다니는 대본 또한 죄다 대외비였지만)
저 모양새를 보아하니 왠지 안 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안 봤을 줄이야. 정말 꼭 해야 하는 일 외에는 완전 대충대충이다. 저 외모에 그 재능이 아니었으면, 진작 길거리에 나앉아 죽었을걸.
“오, 올가가 대놓고 미인이라고 하길래 얼마나 예쁜가 했더니, 진짜 예쁘네.”
파일을 열자마자 가브리엘이 감탄했다. 파일 맨 앞장에 올가가 추가로 끼워 둔 사진을 본 것이었다.
그녀는 유신의 흐릿한 프로필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추가로 몇 개의 일상 사진을 따로 얻었다.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나아요.”
“정말요? 혹시 연예인 지망생 그런 거 아니고?”
“일반인이 맞답니다.”
올가의 설명에 가브리엘은 의외로 바로 납득했다.
“확실히 이 정도 외모의 우성 오메가가 연예계에 있었다면, 적어도 소문은 들었을 듯하네요.”
하도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궁금해진 걸까? 방금까지 관심 없어 하던 닉도 슬그머니 파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거칠게 파일을 빼앗아 들었다.
“니키? 왜 그래?!”
“미스터 메드,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가브리엘도 올가도 깜짝 놀랐다.
정작 닉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는 파일을 몇 번 팔랑팔랑 넘긴다 싶더니, 고개를 처박고 핥는 듯이 첫 페이지 첫 줄부터 하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든 것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꼼꼼히 다 읽은 다음이었다. 그의 평소 대본 외우는 속도를 감안했을 때, 이미 저 파일의 내용은 오타 하나까지 모조리 그의 머릿속에 저장됐을 터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흥분과 기쁨으로 뒤섞인 채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가브리엘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뭐야, 니키. 그 파일의 인물이 그 정도로 네 취향이었어? 뭐, 확실히 딱 그때 네가 말한 스타일의 미인이긴 하지만…….”
“이 사람이야.”
“응?”
“이 사람이라고, 가브. 내가 센터에서 반한 상대!”
닉이 확신에 찬 채 소리쳤다. 과연 그 이야기에는 항상 여유 넘치던 가브리엘조차 놀랐다.
“우와, 진짜?”
“맞아! 확실해.”
“세상에!”
올가도 깜짝 놀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유신을 보자마자 닉이 말한 조건에 찰떡으로 들어맞는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대도 센터에서 닉이 반했다는 오메가가 바로 유신일 줄이야. 아니, 생각해 보면 거기서 다른 사람이 튀어나오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긴 했다.
“난 역시 운이 좋아.”
탁 하고 파일을 덮으며, 닉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우린 역시 운명이었어.”
***
오늘 아침, 임신 테스트기에 한 줄이 떴다. 즉, 임신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테스트기는 수정 후, 10~14일 전후로 임신 여부가 확인이 가능하다. 지난번 히트 이후로 내일이 딱 2주째 되는 날이었다. 센터 예약은 모레로 잡혀 있었다.
“왜 그래? 예상했었잖아.”
사실 유신은 어느 시점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랬다.
무엇보다 애초에 임신을 시도한다고 항상 성공할 리 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유신은 한참 전 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에 절로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설탕을 하나 더 넣을 걸 그랬나.
그는 지금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루이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말이라 피크 타임 근무를 끝내고 막 돌아가려는데, 방금 전 사장인 루이스가 붙잡은 것이다.
“유신, 샌드위치 금방 만들어 줄 테니까 먹고 가. 오늘도 또 아무것도 안 먹었지?”
“전 괜찮아요.”
“시급에서 안 깔 테니 돈은 걱정 말고.”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거절하기도 좀 그렇다. 실제로 아무것도 안 먹은 것도 맞았다.
하지만 유신이 자리에 앉자마자 단체 손님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음식이 나올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듯했다.
안 그래도 오늘따라 손님이 많긴 했다. 며칠 사이에 날씨가 부쩍 추워져서 그런 모양이었다.
지금 이 커피도 근무 중 마시려고 내렸지만, 계속 바빠서 먹지 못하고 남은 것이었다. 버리면 분명 루이스가 새로 내려 줄 거라, 미안해서 챙겨 들고 왔다.
어차피 리포트도 정리가 안 되는 중이었다. 유신은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고, 테이블 위에 관련 자료들을 펼쳤다.
맨날 쓰고 제출해도 리포트는 줄지도 않고, 쓸 때마다 새삼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디어를 모을 때는 확실히 집보다 이런 장소가 집중이 잘됐다. 생활 소음 덕인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조차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볼펜으로 연습장에 이것저것 썼다, 죽죽 그어 지우는 것만 반복 중이었다.
원인은 역시 아침에 한 줄이 뜬 임신 테스트기 때문이겠지. 알고 있어도 지금으로선 자신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제일 문제였다.
이번에 임신을 못 했다고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한 번 만에 임신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임 여부는 이미 검사가 끝났을 테니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끝까지 임신이 되지 않더라도 유신이 계약금을 돌려줄 필요는 없었다. 이건 계약서에 명시된 조항이었다.
지원서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신은 대리모 계약서에 대해서는 각 잡고 분석을 했다. 찬찬히 읽어 보니 의외로 상식적이랄까, 오히려 대리모 쪽에 유리한 조항이 많았다. 적어도 이쪽에서 나서서 소문을 퍼트리는 등 터무니없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은 그랬다.
예를 들어 필요한 제반 비용은 당연하게 모두 닉 쪽이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다. 소소한 것 하나도 유신이 부담할 부분은 없었다.
만에 하나 임신 중 유산을 한다 해도, 고의성이 없는 이상 비용은 당연하고 계약금조차 반납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 위로금으로 원래 지급 예정 금액의 50%까지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개월 수 등에 따라 세세하게 조건이 나뉘어 있기는 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절차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쪽 역시 상식적으로 무난한 조항뿐이었다.
솔직히 유신이 머리가 복잡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임신도 무서웠지만, 이대로 계속 시도만 하고 실패해 지지부진 늘어지는 쪽 역시 싫었다. 학교 휴학 문제가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역시나 아이 아버지의 존재겠지. 닉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자 유신은 더더욱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단순히 그와 대리모 계약을 맺었다고 볼 수 있을까? 실은 그저 팬으로서 이 상황을 즐기는 건 아닐까? 이렇게 속셈이 가득 찬 채로, 자신이 과연 그의 아이를 낳아도 괜찮을까?
올가는 자신들이 만날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센터에서 우연히 닉과 마주쳐 버렸다. 행동반경이 겹치는 만큼 가능성은 충분했다. 벌써 이런데 과연 앞으로 아이가 생기고 태어날 때까지 더는 마주치지 않을 거라 어떻게 장담한담.
무엇보다 자신은 이걸 원하는 걸까, 원하지 않는 걸까?
“아, 쓸데없는 걸 적어 버렸네.”
리포트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적고 있던 연습장에 ‘인공 수정’ ‘시험관’ ‘성공 확률?’ ‘예쁘겠다’ ‘니카의 아이’ 따위의 글자가 구불구불하게 적혀 있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적당히 섞인 채다.
유신은 누가 볼세라 휙 주변을 둘러보고, 빠르게 그 위를 죽죽 검은 볼펜으로 지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미끄러지듯 유신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좌석이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남자였다. 피부가 희고, 팔다리가 매우 길고,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안 보이도록 감싸고 있는 짙은 노란색 비니. 밝은 회색의 얇은 패딩. 도수가 없는 듯한 못생긴 노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두꺼운 테 안쪽에서 금빛 속눈썹에 감싸인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유신을 응시했다.
“안녕.”
남자는 쓰고 있는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얇고 우아한 입술로 미소 지었다.
“어, 저…….”
“나 알지?”
저 아름다운 얼굴이 달리 누구겠는가? 예술품에서 빠져나온 듯한 미모에, 유신은 눈앞의 이 남자가 방금까지 자신이 생각하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니카.”
혀에 달라붙는 듯한 이름을 작게 입 안에서 굴렸다가, 유신은 당황해 바로 고쳤다.
“아니, 닉 메드.”
“니카라 불러도 돼.”
닉이 고개를 저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갑자기 그를 둘러싼 반경 30cm가 패션지의 화보 촬영장 일부로 바뀌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쪽은 이유신, 맞지?”
유신은 어리바리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그저 혼란할 따름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거기다 그가 한국식으로 또박또박 자신을 불러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솔직히 팬으로서 그가 자신에게 애칭을 허락한 것만 해도 머리가 빵 터질 거 같은데.
정작 닉은 태연히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아니, 그게. 이 앞을 지나치는데 창가에 네가 보이잖아.”
물론 당연히 거짓말일 터다. 할리우드 스타가 걸어서 뉴욕의 골목길을 지나다닌다고? 중심가나 명품 거리도 아니고, 관광지하고도 먼데? 거기에 우연찮게 자신과 딱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유신은 닉을 쏘아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이 맞은편의 알파에게 어떻게 보일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다.
“당신은 틀림없이 저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닉은 대답 대신 유신과 눈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보석이 박힌 듯한 청록빛 눈동자에 유신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 태연한 척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난번에 우리 만났을 때 기억나?”
여전히 눈을 피하지 않는 채 닉이 속삭였다. 시선이 집요하게, 눈앞의 오메가의 긴 속눈썹을 훑고 있었다.
물론 유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있었던 날을 가리킨다. 몇 번이고 돌이켜 떠올리다 못해, 히트 때는 멋지게 반찬으로 사용했었지.
“그날은 죄송해요. 저기, 그. 제가 멋대로 등을 두드렸잖아요.”
“왜 사과해? 난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은데.”
“감사라뇨. 그 정도는 누구나.”
“아니야, 그날 유신이 날 도와주지 않았으면 난 분명 사람들 앞에서 보기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을 거야.”
당신은 그런 모습도 충분히 멋있었을 텐데. 하지만 유신은 굳이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괜스레 시선만 피했다.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도 그날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라지고 없었어.”
“죄송해요. 그날은 급한 일이 있었어요.”
급하긴 했지. 성인 용품이 든 쇼핑백을 화장실에 놓고 왔더랬다.
결국 거기엔 없어서 안내 데스크까지 가서 찾아와야 했다. 그걸 다 사용하고서도 이번 히트에서는 임신에 실패했지만.
근데 지금 여기서 당신한테 임신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직 임신 테스트기만 사용했을 뿐, 센터에서 확실하게 검사는 받지 않았다. 거기다 지난번만 해도, 자신이 대리모인 걸 모르는 거 같았고.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면 역시 당황스럽겠지. 유신이 망설이는데, 닉이 테이블 너머에서 좀 더 가까이 몸을 숙여 왔다.
“괜찮아. 결국은 널 찾았으니까.”
“찾았다?”
봐, 역시 거짓말한 거잖아.
유신은 그에게 수상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닉은 변명도 없이 빙긋 마주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이 역시나 너무 눈부셔, 유신은 논리적으로 따질 타이밍을 또 놓치고 말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정말 그런 의지가 있는지부터 불분명하지만.
“한동안 정말 고민했다고.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찾아야 할까?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왜 절 굳이 찾으려 했는데요?”
“왜냐니?”
정말 모르냐는 것처럼 닉이 유신과 천천히 눈을 맞추었다.
“네게 답례를 해야 하니까.”
“답례라뇨?”
“아까 말했던 것처럼,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서 날 도와줬잖아.”
“괜찮아요. 전.”
당연하다는 닉의 대답에 유신이 바로 손을 내저었다.
“근데 왜 그날, 네가 내 대리모라는 거 말 안 해 줬어?”
“쉿!”
유신은 누가 ‘대리모’라는 단어를 들을세라, 닉의 머리를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시에 지금은 아니더라도 역시 그때는 몰랐었구나, 하고 납득했다.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사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그의 대리모인 걸 알게 되면서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알게 된 루트는, 역시나 올가였을까?
“미안, 유신! 내가 좀 늦었지? 대신 오늘 샌드위치는 좀 더 솜씨를 발휘했으니까 진짜 맛있을걸. 정말이지, 넌 좀 더 밥을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한다고.”
공교롭게도 마침 루이스가 샌드위치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그는 테이블에 커다란 접시를 내려놓으며, 닉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오, 첨 보는 손님이시네. 안녕하세요!”
“안녕.”
닉은 망설임도 없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루이스의 얼굴에 바로 재미있다는 미소가 번졌다.
“와우, 데이트? 네 맞은편에 밀리 말고 누가 앉은 거 처음 봐, 유신!”
“아니, 루이스! 아니에요.”
“그러면 좋겠네요.”
데이트란 단어에 유신과 닉이 정반대의 대답을 했다. 유신은 눈썹을 치켜뜨고 닉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아까 유신이 머리를 누르는 바람에 눈가까지 비니에 거의 가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말도 안 되게 오뚝한 콧날만 봐도 일반인의 범주는 아득히 뛰어넘었다.
유신은 루이스가 닉의 정체를 알아보지 않을까 두근두근해, 루이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추가 주문부터 했다.
“루이스, 이 신사분한테.”
“신사분?”
신사분이라는 단어에 루이스의 눈이 호를 그렸다. 유신도 솔직히 자신이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루이스는 유신의 반응에 재밌어하느라, 닉의 정체에 관한 관심이 살짝 사그라든 것 같았다.
유신은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닉을 향해 물었다.
“저기, 단 거 좋아해요?”
“응, 좋아해.”
사실 저 질문은 확인차 한 거였다. 유신은 닉이 러시아 사람답게 단 걸 아주 잘 먹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유제품을 별로 즐기지 않고, 커피보다는 홍차인 것도.
“루이스, 이 신사분께 레몬 파이 하나 주세요.”
“응, 알겠어.”
루이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은 파이의 상세한 옵션을 확인하고, 마실 음료로 홍차도 주문했다. 곧 루이스가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섰다. 다행히 닉을 알아보지는 않은 듯했다.
닉은 유신이 제 취향을 잘 파악해 음식 주문을 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신으로서는 십여 년 차인 팬의 정보를 무시하지 말라는 마음이었지만. 물론, 당사자에게 그 사실(자신이 열성 팬이라는)을 밝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레몬 파이는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디저트 메뉴 중 하나거든요.”
“맛있을 거 같네.”
닉은 유신을 향해 다시 눈을 마주 보며 상긋 웃었다.
그나저나 니카가 원래 저렇게 헤프게 많이 웃는 사람이었던가? 최근 파파라치 컷만 봐도 항상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는데. 역시 파파라치랑 실제는 다른가 보다.
꽉 눌러썼던 비니가 어느새 약간 뒤로 젖혀져, 그의 밝은 금발이 이마 쪽에 살짝 드러나 있었다. 아니, 이상한 모자로 가리고 있어도 마스크가 내려간 시점에서 이미 얼굴 공격 대폭격 상태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좋지 않다. 유신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안 먹어?”
갑자기 닉이 물어서 유신은 화들짝 놀랐다.
“네?”
“그 샌드위치 말야. 네 식사잖아.”
그는 테이블 가운데 놓인 샌드위치 접시를 가리켰다. 순간 어떻게 알았냐고 유신은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아까 루이스가 다 이야기하고 갔다. 모르는 쪽이 더 이상했다.
얼핏 보면 호밀빵에 햄과 야채가 든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먹기 편하게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특이한 점은 내용물이 엄청 많이 들어서 무척이나 두껍고 커서, 일반적인 크기의 2배는 되어 보인다는 거였다.
루이스가 솜씨를 발휘했다더니 빈말이 아닌 듯했다. 마음이야 정말로 고맙지만, 문제는 너무 크다 보니 유신이 먹기도 전부터 식욕이 떨어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루이스의 잘못은 아니다. 순수하게 제 문제였다.
“드실래요?”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샌드위치를 유신은 별생각 없이 닉에게 권했다.
“나한테 다른 사람의 밥을 뺏어 먹는 취미는 없는데.”
퉁명스런 말투와 달리 유신을 바라보는 닉의 눈빛은 다정했다. 그는 테이블에 널린 책과 프린트들을 슥슥 정리하고는, 어서 먹으라는 듯 손수 샌드위치 한 쪽을 유신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 아뇨!”
“응?”
얼결에 받아 들며 스치듯 닿은 손끝이 왠지 뜨거워, 유신은 어쩔 줄 몰랐다.
“이게 원래 이 정도로 큰 게 아니라서요. 그러니까, 루이스가. 루이스는 방금 전에 샌드위치를 갖다준 여기 사장님인데, 제가 밥을 못 먹은 것 같다고 만들어 주시면서, 너무 인심을 후하게 쓰신 거 같아요. 어차피 저 혼자 다 못 먹을 양이고.”
자신이 지금 이렇게 꼴사납게 횡설수설하는 건 틀림없이 눈앞의 얼굴이 너무 반짝이는 탓이라고, 유신은 괜히 닉의 탓을 했다. 지금 제 얼굴은 틀림없이 새빨개져 있을 텐데,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그럴 때는 같이 먹자고 하는 거야, 하고 속삭이며 닉은 남은 샌드위치 반쪽을 자신이 가져갔다.
유신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빤히 그를 살폈다. 아름다운 남자는 먹는 모습도 그림 같았다. 속이 듬뿍 든 커다란 샌드위치를 입가에 묻히지도, 테이블에 흘리지도 않고 깔끔하게 먹는다.
그렇다. 세상에! 니카가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서, 사장님이 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거다. 이게 말이 되나? 너무도 현실감 넘치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망상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상황에 유신은 어떻게 진정해야 할지를 몰랐다.
“안 먹어?”
그런 유신을 향해 닉이 다시 물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 그저 눈부셨다. 유신은 얼결에 손에 든 샌드위치를 덥석 물었다.
“머, 먹을 거예요. 배고파요.”
빈말이 아니라 그가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허기가 졌다. 일어나서 지금까지 먹은 양을 생각한다면 당연했지만, 유신으로서는 최근 들어 간만에 느끼는 배고픔이라 신기했다.
“맛있네.”
“네, 맛있어요.”
그래도 혼자였으면 아마 거의 못 먹고 그대로 포장했겠지. 유신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생각했다.
“근데 진짜 대체 왜 그날, 네가 내 대리모라는 거 나한테 말 안 해 줬어? 말해 줬으면 내가 그때부터 알았을 텐데.”
“콜록!!”
하지만 거기서 닉이 생각도 못 한 질문을 다시 하는 바람에, 그만 크게 사레에 걸릴 뻔했다.
“괜찮아?”
유신은 식은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켜고, 닉을 향해 눈을 흘겼다.
“몰랐던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요? 전 당연히 당신도 안다고 생각했어요. 계약은 이미 한 상태였으니까요. 당신 쪽에서 먼저 이야기 안 하니까, 그 화제는 꺼내기 싫구나 싶어서 일부러 피한 거라고요.”
닉이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 못 했어. 그 부분은 내가 사과할게.”
“그렇게 갑자기, 사과해도 말이죠, 니카.”
“좀 늦었지만, 나는 우리가 친해지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 유신은 앞으로 내 아기의 엄마가 되어 줄 거잖아.”
닉의 직접적인 표현에 유신은 잠시 멈칫했다가, 지금 제 얼굴이 어차피 너무 빨개서 더 바뀔 것도 없다는 사실에 내심 안심했다.
“어, 엄마라뇨. 그냥 유전적 모친이죠.”
“그게 그거지.”
“완전히 다르거든요.”
“유신, 가볍게 생각하자고.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아이가 생기려면, 둘 사이의 친밀도가 높은 쪽이 좋잖아?”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에게 좋은 관계일수록 임신이 잘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의외로 허무맹랑한 풍문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증명된 주장이었다. 물론 그 말이 사이가 좋아야만 임신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로, 오메가는 임신 기간 중에 아이의 아버지인 알파의 페로몬과 접촉해야 컨디션이 좋았다.
원래 오메가는 호르몬이 불안정하거나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부드러운 소재나 좋아하는 것들, 긍정적인 관계에 있는 알파의 페로몬이 밴 물건들로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좋아했다. 소위 ‘둥지’였다.
억제제를 복용할 때는 사실 둥지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임신 때는 원래도 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억제제도 복용을 중단하게 된다. 아이 아버지인 알파와 계속 함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오메가들은 자주 상대 알파의 물건들을 모아 둥지를 만들곤 했다.
산부인과 의사들도 적극 권장하는 행동이었다. 유신의 대리모 계약서에도 임신하게 되면 둥지를 만들 재료를 보내 준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임신 후의 일이고, 그 또한 반드시 실제로 만날 필요는 없었다. 임신 전부터 이렇게 ‘직접’ 만나서 친하게 지내라는 조항은 계약서 어디에도 없을 텐데.
“안 그러셔도 돼요, 니카. 본업도 바쁘실 텐데.”
친하게 지낸다는 이야기에 유신은 저도 모르게 얼마 전 히트 때 닉을 반찬(?)으로 삼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자신은 벽에 걸어 둔 그의 포스터와 눈을 맞춘 채 실컷 해 버렸다.
덕분에 유신은 딱 잘라 닉을 거절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말았다. 솔직히 지금도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왠지 엉덩이 안쪽이 욱신거리는 것 같아서 괜히 들뜬달까.
“그럼, 적어도 답례는 할 수 있게 해 줄래? 그때 병원에서 엘리베이터 고장 났을 때 네가 도와줬잖아.”
그러고 보면 닉은 아까 처음 유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아무리 기억을 돌이켜 봐도 딱히 보답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데도 말이지.
“괜찮아요. 그렇게 일일이 저한테 신경 안 쓰셔도.”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정말 안 돼?”
유신은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니카가 자신을 향해 친하게 지내자고 조르고 있다고!
처음 대리모 계약의 상대방에 대해 들었을 때, 그와 가까워지는 상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망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그조차 이 정도로 가깝지도 않았다.
“그건. 그래도.”
“유신, 응?”
앞으로도 저 얼굴로 저렇게 계속 조르면, 과연 자신이 끝까지 거절할 수 있을까. 전혀 자신 없다.
유신이 어쩔 줄 모르며 간신히 대답을 참던 때였다.
“자아, 신사분께 레몬 파이.”
마침 루이스가 주문한 파이와 홍차를 가지고 다가왔다. 신사라는 단어는 물론, 아까 유신이 한 말을 흉내 낸 것이었다.
유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미 긍정의 대답을 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유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닉이 느긋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이미 그런 생각 따위 죄다 읽고 있다는 듯 여유 만만한 그 모습은, 조만간 허락을 받아 낼 거란 자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어쩌면 그게 또 싫지 않은 제 쪽이 제일 문제일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루이스.”
유신은 아까 닉이 한쪽으로 치워 둔 책과 자료들을 부스럭부스럭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근데 둘, 진짜 무슨 사이야?”
루이스는 대놓고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유신은 최대한 별거 아닌 척 둘러대려고 애썼다.
“친구예요.”
“앞으로 더 친해질 예정이죠.”
하지만 거의 동시에 닉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이는 바람에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루이스는 재밌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친해질 친구라. 좋은데?”
“아뇨, 루이스.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그래, 그래. 알겠어. 아직은 말이지?”
“아, 루이스!”
그 와중에 닉이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가만히 보고 있다는 사실이, 유신은 제일 부끄러웠다.
그때 루이스가 닉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나저나 당신 정말 잘생겼네요. 근데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설마 루이스가 닉의 정체를 눈치챘나? 당황하는 유신과 달리, 정작 당사자인 닉은 태연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요.”
많이 듣겠지.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맨날 나오는 유명인 본인이니까.
“아, 알겠다! 당신 유명한 사람하고 엄청 닮았어요, 그렇죠? 누구더라? 미남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다행히 루이스의 빈궁한 상상력은 할리우드 슈퍼스타가 이상한 노란 안경을 쓴 채, 자신의 작은 카페에 앉아 있을 거라고 연결 짓지 못했다. 물론 닉은 그런 루이스의 오해를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글쎄, 누구였을까요?”
루이스가 큰 덩치만큼 화통하게 웃었다. 그는 닉의 진짜 정체도 모른 채, 이 잘생긴 남자가 마음에 쏙 든 게 틀림없었다.
“이런, 아직 인사도 안 드렸네요. 난 루이스예요. 여기 사장이죠.”
“네, 유신에게 들었습니다.”
“유신의 친구는 다 제 친구죠. 반갑습니다.”
“전 닉이라고 부르세요. 제 주변은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닉이라는 이름에 루이스가 눈을 빛냈다. 꽤나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맞아요. 이제 생각났어. 당신은 닉 메드랑 꼭 닮았어요! 좋겠어요. 슈퍼 미남 스타하고 꼭 닮았잖아요.”
“감사합니다.”
닉은 부정도 긍정도 없이, 그저 매력적인 미소만 되돌렸다.
“그럼, 미스터 닉. 즐거운 시간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미 충분히 즐겁답니다.”
마침 다른 손님이 들어와 루이스는 급히 카운터로 돌아갔다. 닉은 턱에 손을 괸 채 입가를 느슨하게 했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좋은 분이세요.”
유신은 들고 있던 샌드위치가 뭔가 버거워 다시 접시로 내려놓았다. 아직 반도 못 먹은 자신과 달리, 닉은 이미 왕성한 식욕으로 제 몫의 샌드위치를 거의 먹어 치운 상태였다. 그는 파이 접시로 시선을 향했다.
“이거 맛있어 보인다.”
카페 루이의 레몬 파이는 새콤한 레몬 커드 위에 구운 머랭을 올려, 새콤달콤한 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다. 단것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맛있게 먹을 만한 맛이었다.
하지만 닉은 먼저 홍차에 설탕부터 넣었다. 스푼으로 차를 젓는 간단한 행동이 신기할 정도로 무척 우아했다.
“인기 많은 메뉴예요.”
“맞다. 유신은 여기서 아르바이트하지?”
그에게 자신이 여기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뭐, 사장님이라고 하는 데서 대충 눈치챘을 수도 있고.
“네, 주말에 잠깐씩요. 오늘 근무는 이미 끝났어요.”
닉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파이를 포크로 잘라 한 입 먹었다. 이 모든 동작 역시 물 흐르듯 끊김 없이 절도 있고 단정했다.
“음, 진짜 맛이 괜찮은데.”
“그 말. 당신이 진짜 닉 메드인 걸 안다면, 루이스가 진짜 기뻐할걸요.”
“사실대로 알려도 상관은 없는데, 그 뒤로 다시 해당 가게에 가기 힘들어지는 게 좀 싫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신은 닉의 손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렇게 시럽투성이에 껍질은 바삭한 파이를 먹으면서, 과자 부스러기 하나 입가에 묻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그 시선을 느낀 듯 닉이 고개를 들었다. 보석을 박은 듯한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가 유신과 마주 보았다.
“한 입 줄까?”
“괜찮아요.”
유신은 바로 거절했지만, 닉은 딱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넌 사양하는 게 너무 몸에 뱄어. 말로만 그러면서, 그렇게 원하는 눈빛으로 보면 오해한다고.”
“제가 듣기에는 당신의 그런 말투야말로 오해 사기 딱 좋거든요.”
“오해가 아니라, 난 진짜 너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건데?”
장난스러운 말투에, 농담도 잘한다고 유신이 피식 웃어 버렸다.
“좋아요, 니카. 인정할게요. 전 단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이 먹는 모습을 보니 왠지 먹어 보고 싶어졌어요.”
“좋은 징조야. 상대의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건, 우리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어느새 레몬 파이 한 입을 올린 포크가 유신의 입 앞에 내밀어져 있었다. 유신은 눈만 들어 이게 뭐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포크의 주인인 닉은 그저 미소만 보낼 뿐이었다.
코끝으로 들어오는 새콤달콤한 향이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침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결국 유신은 견디지 못하고 머뭇머뭇 입술을 열어, 포크에 올려진 파이를 먹었다. 너무 망설인 탓인지 입가에 크림이 살짝 묻어 버렸다.
닉이 손끝으로 그 하얀 자국을 살짝 닦아 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손길에 유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맛있어?”
“시고 달아요.”
유신은 즉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왜인지 닉이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굉장히 귀여운 것을 보는 듯한 태도였다.
“웃지 말아요, 니카.”
“그럼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줘, 유신. 기껏 만났으니 우리 대화를 하자.”
뾰로통 입을 내미는 유신을 향해 닉이 속삭였다. 그가 지금 먹고 있는 파이만큼이나 달콤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대화를 하자고 해도.”
“나는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저에 대해서요?”
“지난번에 넌 나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했잖아. 하지만 난 너에 대해서 계약서에 써 있는 만큼밖에 몰라. 불공평하다고 생각 안 해?”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요?! ……아니, 말하긴 했지만.”
유신은 당황해 되물었다가, 다음 순간 바로 긍정했다.
엘리베이터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닉을 위로하며, 자신만만해져 그런 말을 하긴 했다. 분명 그때 머릿속으로 자신은 닉의 기사를 스크랩한 파일만 몇 권이나 가지고 있다며 뿌듯해했었지. 왠지 부끄럽다.
“기억났어?”
“기억은 났는데요. 그건 특별히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냥 흐름상 충동적으로 한 말이랄까, 별 뜻이 없달까.”
“즉, 너도 나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라는 거로군.”
“솔직히 말하자면 여태껏 다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또 가까이서 보고 있으려니, 몰랐던 점이 자꾸 보이는 것도 같고.”
적어도 저렇게 잘 웃는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 봐, 지금도 자신을 향해 녹을 듯한 미소를 보내는 중이다.
유신은 십 년도 넘게 그의 팬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좀 더 멋대로에 약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긴 했다) 실제로도 천재니까, 그런 점까지도 좋았지만.
렌즈를 통하지 않고 직접 만난 닉은 훨씬 다정하고, 훨씬 더 멋있었다. 지금보다 더 자신을 반하게 만들어서 대체 어쩌려고.
“유신, 그럼 이제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진 거야?”
“니카, 그거랑은 좀 다르죠. 이건 그냥 계약의 연장선이에요. 앞으로 생길 아기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테니까요.”
거짓말이다. 자신이 닉과 친해지기 싫을 리 없다. 그저 선을 넘는 것이 무서웠다. 억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맞아, 아기를 위해서.”
유신은 고집스럽게 그와의 거리감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정작 닉이 동의하자,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저런 말을 왜 저렇게 달콤하게 하는지, 그 목소리가 또 너무 좋아 새삼 버거웠다.
“그래서 나에 대해 뭐가 궁금한가요?”
“물으면 대답해 주는 거야?”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그냥 넘어가 주지 않고, 굳이 여기서도 조건을 건단 말야.”
“싫으면 관둬요.”
“그게 재밌단 거야.”
유신은 자신은 아니라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닉이 또 웃었다. 정말, 뭐가 저리 즐거운 건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저렇게 잘 웃는 사람인 줄 진짜 몰랐다. 계속 말하지만, 그런 점이 싫은 건 아니다.
“아, 뭐부터 물어보지?”
“너무 그렇게 뜸 들이지 말아요. 괜히 더 긴장하게 되잖아요.”
왠지 쑥스러운 마음에 유신은 괜히 내려놓았던 샌드위치를 다시 들었다. 닉은 포크로 접시에 남은 파이를 크게 한 입 잘랐다.
“난 그냥 너에 대한 거면 뭐든 궁금해.”
“들어 봤자, 재미없을걸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미 재밌다니까. 그리고 너도 나한테 궁금한 걸 묻는 거야.”
“갑자기 물어보라 해도.”
샌드위치를 이미 들고 있어서 다행이야. 유신은 모른 척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닉도 잘라 놓은 파이를 먹었다.
“그래, 첫 번째 질문은 역시 이걸로 할까?”
“네.”
“유신은 어떻게 미국 국적이야?”
그건 사실 여기 온 뒤 엄청나게 들었던 질문이라, 대답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잠시 미국에서 살 때 제가 태어났거든요. 동생도 안 그런데, 집에서 저만 그래요. 그래서 유학 장소를 여기로 정한 것도 있어요. 비자 문제가 없으니까요.”
“확실히 그 점은 매우 큰 장점이겠군.”
“당신은 여전히 러시아 국적이죠?”
“어차피 활동하는 데 크게 문제는 없으니까, 굳이 바꿀 필요가 없지.”
귀찮은 부분은 회사에서 알아서 해 준다고, 닉은 작게 윙크를 했다.
“러시아에는 거의 안 가는 걸로 아는데, 가족들과는 자주 보나요?”
별생각 없이 평소 팬으로서 궁금하던 질문을 입에 올리다, 유신은 멈칫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에게 자신이 팬인 것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닉은 별달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가족들과는 배우로 데뷔한 후로 거의 만난 적이 없어. 그쪽도 내 연기에 별 관심도 없고.”
닉의 가정사는 언론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러더라도, 실제로는 보통 가족들처럼 자주 연락하고 지낼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 말만으로는 거의 남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듯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반응하면 팬인 것이 티가 날 것 같아, 유신은 일부러 상관없는 척을 했다.
“유신, 너희 가족들도 여기 없지?”
“네, 다들 한국에 있어요.”
“서류에서 봤어. 부모님하고 남동생이 있다고.”
“네, 동생은 두 살 어리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죠.”
“나도 네 살 위의 누이가 있어. 그녀는 가업을 돕고 있지.”
닉의 누나인 블라디미라 세르게예브나는 팬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그녀는 그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굉장히 눈에 띄는 미인이자 여자 알파였다. 능력 있는 사업가로, 해당 업계 기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동생하고는 사이좋아?”
“유호하고는 사이가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만난 지 너무 오래돼서요. 어릴 땐 그래도 친했던 거 같은데.”
“나도 비슷해. 거기다 우리 쪽은 나이 차이도 크고.”
“그죠, 그죠.”
그러고 보니 가족에 대해서는 아까부터 서로 맞장구만 치는 것 같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우연히 의견이 잘 맞는 거겠지?
“너도 한국에 자주 안 가나 봐.”
“네, 여기 온 이후로 거의 돌아가지 못했어요. 이유는 당신과 달리, 거의 돈 때문이지만요.”
“돈 때문이라.”
아마도 닉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부자인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버는 출연료가 푼돈으로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돈 생각을 하니, 유신은 다시 속이 쓰려 왔다.
“그래도 사고 전까지는 가고 싶으면 갈 수는 있는데 귀찮아서 안 간다는 쪽에 가까웠거든요. 장학금도 있었고, 집안 형편도 훨씬 좋았어서요.”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바지 아래에 감추어진 깊은 흉터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사고가 나면서 장학금이 끊기고, 마침 그때 아버지 사업도 기울기 시작했어서요. 그렇다고 빚더미에 앉거나 그런 건 아니고 먹고살 만은 했지만, 외국에서 돈을 부탁하기는 좀 염치가 없더라구요. 원래 무용이 돈이 많이 들잖아요. 전 어릴 때부터 들인 돈치고,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됐으니까.”
그나저나 자신은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고 있는 걸까. 뭔가 어색해 어쩔 줄 모르는 유신을 향해 닉이 물었다.
“많이 괴로웠어?”
저를 내려다보는 청록색 눈동자가 왠지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아뇨, 그냥 뭐. 생각해 보니까 결국 그렇게 되었을 것 같아서요. 아마 사고가 나지 않았어도, 결론이 별 볼 일 없는 건 비슷했겠죠.”
“그렇지 않아.”
자신을 비하하는 유신을 닉이 부정했다. 유신은 그런 그를 향해 쓰게 웃었다.
“니카는 금전적인 문제로 괴로웠던 적은 없죠?”
“하지만 나도 부모님의 기대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건 같아. 그분들은 아마도 내가 발레를 업으로 삼기를 원하셨을 거야.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할 수 없었지.”
닉의 이야기에 유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네요. 부모님께서 배우 활동을 반대하셨어요?”
“글쎄, 모르겠어. 그 일로 딱히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저도 춤을 그만둘 때, 부모님과 그에 대해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았어요.”
유신은 방금 깨달은 새삼스러운 사실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대리모를 하게 된 일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한 적 없었다. 현재 정기적으로 하는 안부 전화에서는 간단히 서로의 안부만 묻곤 했다.
그러고 보면 부모와 깊은 속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게 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솔직히 지금같이 추락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이런 건 안 겹쳐도 되는데.”
“그러니까요.”
어이없다며 닉이 피식 웃고, 이번엔 유신까지 웃어 버렸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정말 이런 건 안 겹쳐도 되는, 아니 안 겹쳐야 하는 거다.
유신은 처음에는 동경하던 우상을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할수록 점차로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둘이 이야기하면 대화가 끊기지를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어색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방금 전처럼 쉽게 남과 나눌 수 없는 민감한 이야기조차 그러했다.
마치 만나야만 할 둘이 만나, 해야 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문득 어둑어둑해진 창밖을 향해 유신이 속삭였다.
원래 뉴욕의 12월은 해가 짧다. 오후 4시 반이면 이미 바깥은 껌껌했다.
어느새 그들 앞의 접시도 거의 비었다. 유신은 간만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몇 입에 질렸을 커다란 샌드위치를 결국 그만큼이나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닉이 함께 있던 덕분이리라.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어요.”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유신은 일어날 채비를 했다. 닉이 물었다.
“앞으로도 여기 오면 널 만날 수 있을까?”
“안 돼요.”
“왜?”
“소란이 일어나면 어떡해요. 당신은 스타잖아요?”
“봐, 지금도 괜찮은걸.”
닉이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가리켰다.
마감을 앞둔 카페는 조용했고, 전반적으로 느긋한 분위기였다. 몇 없는 손님들은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앉았고, 루이스는 카운터 안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은 결국 부정하지 못한 채 닉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이상한 안경 아래 아름다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역시 유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집으로 가?”
“네, 돌아가서 리포트도 완성해야 하고. 당신도 바로 돌아가나요?”
“그래야지.”
그들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괜찮으면 길이 겹치는 데까지만, 조금 같이 걸을까요?”
“응?”
유신의 제안에 닉의 눈이 커졌다. 유신은 입술을 살짝 혀로 핥았다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나가서 함께 걸어요.”
바라보는 눈빛에 둘 다 열기가 오르는 것을 본인들만 서로 몰랐다. 둘 다, 닉이 당연하게 동의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해가 진 12월 초의 거리는 쌀쌀했다. 코트나 얇은 패딩을 입기에 딱 적당한 온도였다.
어둠이 깔린 거리에서 닉은 웃기는 안경을 벗어 버렸다. 머리카락을 가리려고 어색하게 눌러썼던 비니도 새로 고쳐 썼다. 확실히 얼굴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미모가 더 빛났다.
“공원 쪽으로 갈까요. 조금 돌아가긴 하지만, 그편이 더 걷기 좋으니까.”
집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쉬워, 유신은 약간 먼 길을 골랐다. 닉이 자신의 그런 선택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냥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공원에 가까워지자 공간이 트여서 그런지 인적이 더 드물게 느껴졌다. 아직 시간은 이르지만, 이미 해가 진 지 한참이라 꽤나 늦은 시간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공원이 거의 끝나 가는 길목에서, 갑자기 닉이 말을 꺼냈다.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전 좋아요.”
물론 유신은 닉의 팬이니 같이 찍은 사진을 당연히 원했다. 자신은 그렇다 치고, 닉 쪽이 왜 갑자기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둘은 공원 가로등을 조명으로 셀카를 찍었다. 붙지 않고 살짝 떨어진 채 나란히 선 자세가 지금 그들의 마음속 거리감 딱 그대로일지도 몰랐다.
“요즘 카메라는 밤에 셀카를 찍어도 잘 나오네요.”
닉의 최신형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 유신이 감탄했다. 내심 저 사진을 핑계로 그의 개인 연락처를 따도 되는 건가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런 사진 찍는 걸로 기분 나빠 할 만한 상대는 없어?”
“없어요, 그런 거. 실은 데이트도 안 해 봤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가, 유신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나도 요새 뭔가 의욕이 없어서 아무하고도 한동안 데이트 안 했어.”
다행이랄지, 닉은 유신의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한 듯했다. 살면서 아예 데이트 상대가 없었다는 선택지는 그에게 없는 것이다.
“아, 아뇨. 그게.”
덕분에 당황한 유신은 보도블록의 한쪽이 살짝 튀어나온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유신은 자신이 그대로 넘어질 줄 알았다.
다리가 온전치 않다 보니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도, 뭐가 잘 맞지 않으면 쉽게 중심을 잃곤 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면서 다녔는데, 옆에 닉이 있다는 이유로 아닌 척해도 들떴던 게 틀림없었다. 곧 엉덩이에 느껴질 아픔에 유신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다음 순간, 단단한 팔이 허리를 붙드는 감촉을 느꼈다. 훅 느껴지는 베르가못 향이 어질어질했다.
“아, 감사합니다.”
“조심해야지.”
닉이 잡아 준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인사하는 유신을 그가 가볍게 나무랐다. 하지만 끌어안긴 채 올려다보는 깎은 듯한 뺨이 어딘가 쑥스러운 듯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닉은 유신이 메고 있던 제법 무거운 백 팩을 자연스럽게 제 손으로 옮겼다. 허리를 껴안은 팔이 좀 느슨해지기만 할 뿐 떨어지지 않아, 유신은 뺨을 붉혔다.
“저기.”
“또 넘어지면 안 되니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은근슬쩍 닉의 팔에 힘이 더 들어왔다. 유신도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이제 그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사이좋은 한 쌍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까부터 은은하게 느껴지는 베르가못 향에 유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삼 자신이 그의 아이를 낳기로 되어 있는 것을 인식했다.
억제제를 끊은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 곧 다음 히트도 찾아올 것이다. 유신은 페로몬 샘에 붙여 둔 향기 패치가 잘 작용하고 있는지 신경 쓰였다.
두 사람은 이제 옆으로 나란히 선 채 서로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신장 차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닉이 제 품에 들어온 유신의 어깨를 안고, 유신은 닉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둘의 어깨가 겹치며, 자연스럽게 고개와 고개가 서로에게 기댔다.
“네가 지금 데이트하는 상대가 없다는 건 알겠어, 유신. 그러면 밀리는 누구야?”
꼭 붙은 채 걸음을 옮기며 닉이 물었다. 그렇게 묻는 그의 눈빛은 꽤나 어두웠지만, 그 품에 갇힌 듯한 유신으로서는 눈높이와 자세 때문에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밀리의 이름이 나와서 놀랐을 뿐이었다.
“밀리를 어떻게 아세요?”
“그거야, 그때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네가.”
“네?”
닉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다 말고, 제풀에 찔린 듯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아니,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밀리가 대체 누군데?”
“밀리는 제 하우스메이트예요.”
“역시 같이 사는.”
“네, 대학 인트라넷 하우스메이트 모집 글로 알게 돼서, 지금 3년째 같이 사는 친구죠. 저보다 두 살 어린 아주 귀여운 베타 남자애예요. 연애 대상은 당신 같은 알파구요.”
유신은 닉이 왜 저렇게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자신과 밀리를 다른 식으로 오해한 걸까? 그렇다면 방금 전의 설명으로 밀리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풀렸을 것이다.
왠지 지금 태도를 보니 진짜 그런 거 같기도 했다. 닉이 대놓고 머쓱해하는 게 유신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왜? 착각하는 건 둘째 치고, 밀리랑 제가 만에 하나 그런 사이든 아니든 이 사람이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있나?
“그냥 확인한 거야. 우리 둘은 서로 친해지는 편이 좋으니까.”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요?”
“그래, 아기를 위해서.”
마찬가지로 핑계를 찾는 듯한 유신의 확인에 닉이 재빨리 동의했다. 서로를 끌어안은 팔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지만, 둘 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모른 척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천천히 걸어, 멀리 돌아서 유신이 사는 집 앞까지 왔다.
한 층에 세 집씩 있는 7층짜리 낡은 다가구 건물이었다. 유신은 그중 5층에 살았고, 다행히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둘은 공용 현관 앞에서 미적거렸다.
“고맙습니다.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유신의 가방은 여전히 닉이 들고 있었다. 아까 넘어질 뻔할 때 건네받은 이후로 당연하다는 듯 돌려주지 않았다.
“자, 여기 가방. 네가 다시 안 넘어져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요. 이제 가셔도 돼요.”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유신도 딱히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닉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가방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 그러니까 더 쉽게 넘어지는 거라고. 꼭 필요한 거 아니면 좀 빼도 괜찮을 거 같아.”
갑자기 쓸데없는 참견까지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괜히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볼게요.”
지금 유신은 처음 카페 루이에서 닉이 맞은편에 앉았을 때보다 훨씬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닉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친밀하게 구는 것이었다.
“근데 진짜 왜 안 가요? 들어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렇다는 소리 하면 웃어 버릴 거예요.”
“웃는 건 상관없는데, 유신.”
닉은 성가신 듯 비니를 벗어 버렸다. 사르르 흘러내리는 백금발에 반사적으로 홀린 유신이 눈을 깜박였다.
“네, 니카.”
“난 아직 오늘 널 만나러 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어.”
“목적?”
코앞에 있는 닉의 얼굴이 새삼 너무 잘생겨서, 유신은 감탄스러워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숨을 잘 못 쉴 지경이었다.
“역시 잊었구나. 지난번 엘리베이터에서 날 도와준 데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잖아.”
“아, 그거요? 진짜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아냐, 밥 한 끼 정도는 사야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거기서 버릇대로 한 번 더 거절하려다, 유신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자신이 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닉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핑계가 생기는 거였다. 깨닫고 보니 거절하기에는 솔직히 너무 매력적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밥 한 끼 정도는.”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피하며 유신은 간신히 긍정의 대답을 했다. 닉이 좀 더 고개를 가까이 하며 물었다.
“언제가 좋아?”
닉의 손끝이 가볍게 유신의 턱을 스쳤다. 유신은 저도 모르게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본의 아니게 시선이 또 맞닿았다.
“전 금요일 저녁이 괜찮아요.”
“이거 우연이네. 나도 괜찮은데.”
둘은 마주한 채 눈을 떼지 못하고, 서로의 시선이 시선을 따라가며 어쩔 줄을 몰랐다.
어느새 얼굴은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가볍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마다 상대방의 페로몬의 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 금요일에.”
“그래, 금요일에.”
겨우 숨을 들이켜고, 유신은 작게 속삭였다. 닉도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