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유신은 카페 루이에서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간은 그때그때 조금씩 바뀌지만, 보통 오후 바쁠 때 사장인 루이스를 거드는 식이었다. 이번 주 일요일 근무는 5시까지라 닉에게는 그때까지 오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닉은 그보다 한 시간이나 이른, 4시에 도착하고 말았다. 나름 미적거린다고 미적거린 거였지만 결국 오후 4시가 한계였다.
그것도 낮에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마치고, 메이크업을 씻어 내고 오느라 늦어져 이 시간이었다. 아니었다면 훨씬 더 일찍 도착했을 것이다.
닉은 열심히 머릿속으로, 이건 미리 데리러 온 게 아니라고 되뇌었다. 그냥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차나 한잔하려는 거지. 덕분에 사랑스러운 아르바이트 직원이 커피를 내리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는 건 덤일 뿐.
참고로 닉은 오늘도 빈손이 아니었는데 나름대로 지난번의 일을 교훈 삼아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그날 유신은 꽃다발은 결국 받아 주었다. 그대로 두면 결국 버리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인 남자의 품에도 차고 넘쳐 들고 있기 버거운 것을 눈으로 직접 보자, 닉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배려가 없었는지를 인정해야 했다.
다이아몬드 팔찌는 당연히 꺼내지도 못했다. 뭣보다 줬어도 너무 비싸다고 당연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닉이 오늘 가져온 것은 커다란 선물용 구움 과자 세트였다. 까눌레, 마들렌, 휘낭시에, 미니 파운드케이크 따위다. 유통 기한도 넉넉해서 두고 먹기 좋았다.
그 가게의 과자는 비싼 편이긴 하지만 다이아몬드처럼 지나치게 비싼, 사치품은 아니다. 음식이라 거절하기에 애매하게 느껴질 거라는 심리적 틈새도 노렸다. 밀리라는 하우스메이트와 나눠 먹으라는 이야기도 덧붙일 예정이었다. 닉이 보기에 유신은 분명 저 혼자 먹으라면 거절해도, 같이 나눠 먹으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볼 성격이었다.
사실 쓸데없는 거 가져오지 말라고 유신이 이미 못 박아 둔지라 그 부분은 아직도 조금 걱정이었다. 그래도 먹는 건 쓸데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올가에게도 물어봤는데 초콜릿이나 과자 세트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덧붙여 데이트가 망한 건 다이아몬드를 도로 가져온 시점에서 모두에게 이미 들켰다. 올가를 제외하고는, 거절당하지 않았는데 다이아몬드를 받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닉은 앞으로는 아이잭과 가브리엘, 저 두 알파들에게 절대 데이트 관련해 조언을 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약간 변명을 하자면, 이름도 잘 못 외웠던 예전 데이트 상대들은 뭘 사 줘도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보통 닉이 사 주는 선물은 가격대가 상당했고, 그래서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주고받음이 익숙한 이들이기도 했다. 데이트 때 꾸미고 온 것도, 차에 탈 때 본 걸로 충분했다. 그대로 바로 명품 샵에 들러 신상 원피스니 가방 따위를 사 주면 다들 좋아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 진짜 사 주고 싶다고 생각한 상대는 유신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거절당했을 때는 그만큼 더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제 안의 삐뚤어진 무언가가 아주 살짝, 바로잡히는 기분이었다.
“어서 오세요!”
닉이 카페에 들어갔을 때, 유신은 한창 일하는 중이었다. 카운터 안에서 주문을 받거나 커피를 만드느라 바빠 보였고, 닉을 알아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모자챙으로 얼굴을 가리며 마침 비어 있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창가와 완전히 반대편 자리였고, 카운터가 잘 들여다보이는 방향이었다.
오늘은 비니가 아니라 검은색 캡 모자를 깊게 눌러써, 눈에 튀는 백금발을 가렸다. 그 아래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옷은 무난하게 트렌치코트와 니트 스웨터였다.
사실 지난번 여기 왔을 때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상하게 보여도 상관 않고 일부러 더 그렇게 입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최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게 보이고 싶었다. 물론 유신에게 말이다.
지금 닉의 의상은 그런 고민 끝에 나온 평범하고 무난한 컨셉이었다. 일부러 튀지 않는 기본 아이템으로만 골랐다. 트렌치코트도 스웨터도, 몸에 걸친 모두가 흔하게 살 수 있는 저가 브랜드 제품이었다.
문제는 워낙 옷걸이가 좋다 보니, 저가 상품도 그가 걸치면 명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이었다. 일반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멋진 자신을 미처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닉은 주변을 살피고 바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실은 그저 카운터 안에 있는 유신의 얼굴을 보다 잘 보기 위해서였다. 아직 닉이 온지 모른 채 바빠 움직이는 유신의 옆얼굴이 시야에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닉의 표정이 실실 풀어졌다.
“세상에, 진짜 왔네?!”
한편 가게 맞은편에서 누군가 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저게 누구야.”
거의 동시에 닉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저를 보고 파닥파닥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닉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제 쪽으로 오라고 신호했다.
상대는 쭈뼛거리면서도 꽤나 빠르게 원래 자리를 정리하고는, 바로 닉의 맞은편으로 옮겨 앉았다. 반쯤 마신 커피 잔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닉이 앉은 자리는 마침 성인 6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을 만큼 제일 넓은 자리였다. 지난번 유신과 둘만으로 꽉 찼던 아담한 창가 2인석과는 달랐다. 모자를 눌러쓴 채 대충 앉느라 미처 몰랐다.
원래라면 혼자서 이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덕분에, 지금 불러낸 상대가 더 쉽게 이쪽으로 옮겨 앉았을 수도 있었다.
“아하하, 반가워요.”
웬만한 여자보다 키도 체구도 크지 않을, 20대 초반의 아담한 남자애였다. 약간 어두운 피부에 검은 곱슬머리를 하고, 애교 많은 둥근 눈이 인상적이었다.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베타가 틀림없었다.
유신의 하우스메이트라는 아주 귀여운 베타 남자애가 바로 이 녀석일 것이다.
“네가 밀리지?”
“네, 맞아요. 당신은 닉 메드 본인이죠?”
닉은 굳이 대답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대충 예상했다는 듯 밀리는 그런 냉정한 반응에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빛냈다.
“가까이서 보니 진짜 잘생겼네요! 안 그래도 유신이 오늘 여기서 본다고 이야기해 줬거든요. 근데 정말로 오셨네요. 그것도 유신이 마치는 시간보다 한참 일찍.”
“너 어디까지 알지?”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유신이 저한테 당신에 대해 이야기한 게 아니라, 지난번에 유신이랑 당신이 여기서 만나는 걸 이미 직접 봤거든요. 물론 저 정도 되는 눈썰미니까 눈치챘죠. 변장술이 상당하시더라고요. 그나저나 운이 좋으신 줄 아세요. 아마 앞으로 제 도움받을 일이 많으실걸요.”
하지만 한껏 신난 밀리와 달리, 닉은 그저 귀찮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본명이 뭐야?”
“네?”
“밀리는 애칭이잖아. 네 본명이 뭐야?”
“유신한테서 못 들었어요?”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어.”
잘생겼지만 대놓고 거만한 태도에, 밀리가 오호 이것 보라며 눈썹을 올렸다.
“에밀 미타인데요.”
“그래서, 에밀.”
“에이, 뭘 그렇게 딱딱하게 불러요. 편하게 밀리라고 불러 주세요. 다들 그렇게 부르는데.”
“에. 밀.”
“네에, 편하신 대로 하시죠.”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닉을, 밀리는 결국 포기했다.
아, 그 이름 너무 딱딱해서 싫은데. 밀리는 입 안으로 투덜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맞다. 금요일 날 대단했다면서요.”
그리고 그 한마디에 여유 만만하던 닉의 표정이 바로 무너졌다.
“윽, 그건.”
“물론 유신은 남의 치부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성격은 아니에요. 예리한 제가 대충 분위기로 다 파악했죠. 괜히 오늘 여기서 또 보는 거 아니죠?”
거기까지 말하고, 밀리는 보란 듯이 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런 쬐끄만 남자애한테 한 소리 들어 닉은 내심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유신이 엮여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나 며칠 전 지은 죄가 너무 컸다.
“그랬군.”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입꼬리만 들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유신이었다면 당장에 잘생겼다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을 만한 매력적인 미소였다.
의외로 밀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 진짜 쓸데없이 잘생겼어! 근데 어떻게 다들 못 알아보죠? 나도 첨엔 못 알아봤지만. 다들 눈이 삐었나? 다 가리고 있어서 그런가?”
“티가 안 나도록 나름 평범을 연기 중이지.”
“지금 그게 말이 돼요?!”
“튀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해.”
“우와, 보고 싶다. 보여 주세요!”
“싫어. 귀찮아. 한번 그랬다가 여기 또 못 오게 되면 귀찮다고.”
여전히 터무니없이 거만한 대답에 밀리가 다시 입을 삐죽댔다.
“솔직히 당신은 이제부터라도 저한테 잘 보이셔야 한다구요. 금요일에 집 앞까지 안 올라온 걸로 이미 저한테 찍혔거든요? 거기다 애가 내려갔는데 계속 운전석에 앉아서 차 문도 안 열어 주셨죠?”
닉은 다시 뜨끔했다. 유신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본인은 계속 신경 쓰이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걸 간파하다니.
“너.”
“뭐, 그래도 이렇게 일찍 온 건 잘하셨어요. 그리고 방해 안 하게 구석에 앉은 것도요! 아, 그거 선물이죠?”
밀리의 시선이 닉이 가져온 과자 박스를 향했다. 별말 아닌데도 여태껏 들은 소리가 있어서 그런가, 닉은 괜히 긴장했다.
“그렇긴 한데.”
“또 꽃을 가져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괜찮네요.”
“그래?”
갑자기 칭찬하는 분위기에 닉은 바로 으쓱해졌다.
“네, 주신 꽃 덕분에 집이 화사해진 건 좋은데, 시든 뒤에 쓰레기 버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스트레스거든요. 먹는 게 훨 낫죠. 실은 꽃다발이 워낙 커서 지금 여기 꽃도 다 그거예요!”
그러고 보면 카페 루이에서는 원래 군데군데 생화를 한두 송이씩 두곤 했는데, 오늘따라 테이블마다 꽃이 한 바구니씩 놓여 있었다. 집에 최대한 두고도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나눴다고 한다.
“어쨌든 이건 같이 사는 너하고도 나눠 먹으라고 준비한 거니까, 잘 먹어.”
“오, 나름 점수 따시려는 거? 확실히 이번에도 혼자 먹기엔 터무니없이 양이 많아 보이긴 하네요. 고마워요. 잘 먹겠습니다. 이 브랜드 원래 좋아하거든요.”
“잘됐군.”
“근데 유신이 여기 과자 가격을 알아요?”
박스에 달린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밀리가 짓궂게 물었다. 닉이 소리 없이 신음했다.
“알려 주지 마.”
“알겠어요.”
두 사람은 재빠르게 둘 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으며 서로 동의한다는 눈빛을 교차했다.
닉은 점점 이 하우스메이트 녀석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유신의 말이 맞았다. 얜 좋은 녀석이다.
그때 루이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오, 누군가 했네요! 미스터 닉, 오늘 진짜 멋있는데요?”
“하하, 안녕하세요.”
솔직한 평가에 닉이 애매하게 웃었다. 확실히 지난번의 노란 비니에 비하면 오늘 옷차림은 양반이긴 했다.
“아니, 밀리! 넌 왜 또 여깄어?”
루이스는 닉의 맞은편에 앉은 밀리를 보고 놀랐다. 밀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닉의 옆에 있는 과자 상자를 가리켰다.
“자기, 저거 유신한테 줄 선물이래요. 둘이 오늘 유신이 일 끝나면 만나기로 했대요.”
“오, 두 사람 역시 데이트하고 있구나!”
밀리의 이야기에 루이스가 반가워했다.
“하하, 그렇게 됐어요.”
닉은 이제 와서 괜히 쑥스러워했다. 그런 그를 향해 루이스가 새삼 감탄했다.
“밀리, 미스터 닉 진짜 닉 메드랑 닮았지? 오늘은 옷이 말쑥해서 더 그래 보여. 그래서 애칭도 닉이라잖아.”
루이스는 여전히 닉이 닉 메드 본인이 아니라, 그와 꼭 닮은 일반인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한번 머릿속에 박힌 고정 관념이 이렇게나 무서운 법이다.
“그죠. 똑같죠.”
밀리는 금세 상황을 눈치챘지만 굳이 사실을 말하는 대신 의미심장하게 후후 웃었을 뿐이었다. 닉을 위해서라기보다 그냥 자기만 알고 있다는 지금 상황이 맘에 든 쪽에 가까웠다. 그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맞다, 자기. 우리 귀여운 캣은 잘 지내요? 요즘 통 못 봤는데.”
“안 그래도 좀 있으면 짐하고 가게에 나올 거야. 여기서 저녁 먹기로 했거든.”
“와, 그래요? 간만에 우리 캣 스위티를 만나겠네.”
그리고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닉에게 설명해 주었다.
“짐은 루이스의 남편이고, 캣은 두 사람의 딸이에요. 그녀는 진짜 귀여워요.”
“애들은 다 귀엽지.”
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원래 애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뭘 드릴까요, 미스터 닉?”
“홍차 한 잔 주시죠.”
“좋아요. 금방 갖다 드리죠.”
루이스가 사라지자마자, 밀리의 입이 다시 댓 발로 나왔다.
“너무 취급이 다른 거 아녜요?”
“또, 뭐?”
“루이스요. 저한테 하는 거랑 너무 다르게 깍듯한 말투를 쓰시잖아요.”
“저 사람은 유신의 고용주니까, 예의를 차려야지.”
밀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사람,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릴 한 건지 자각은 있는 걸까?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유신과 닉의 관계를 열렬히 응원 중이었다. 물론 둘 사이의 대리모 계약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 가능한 일이긴 했다.
그저 뭔가의 우연으로 둘이 사랑에 빠져 비밀 연애 중이라고, 혼자서 몽글몽글 망상하는 중이랄까. 유신이 종종 뭔가 너무 심각해져서 조금 신경 쓰이지만, 닉이 이렇게 생각해 주고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원래 유신은 혼자 곧잘 심각해지곤 하는 타입이었다.
이렇게 혼자 신이 난 밀리는 두고, 닉은 다시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물론 유신을 보는 것이었다.
마침 루이스가 유신에게 다가가 뭐라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단순히 주문을 전달한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유신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듯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대로 유신과 닉의 눈이 마주쳤다. 가벼운 미소가 돌아왔다. 닉은 루이스가 유신에게 제가 왔다고 알려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닉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진 채 손을 흔들어 주려 했지만, 그보다 전에 새로운 손님이 가게로 들어왔다.
유신은 주문을 받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섰다. 루이스는 밀린 전표를 확인하고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한동안 둘 다 정신없었다. 바쁜 시간대라서 두 사람이 함께 일한다는 이야기가 괜한 말이 아니었다.
한동안 보다 보니 이 카페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루이스는 매장 주문을, 유신은 카운터 안에서 테이크아웃 위주로 주문을 받고, 음료는 둘이 같이 만들었다. 식사와 스낵류는 모두 루이스가 요리했다. 간단한 거라 그런지 미리 어느 정도 준비해 두는 건지 음식은 모두 금방금방 나왔다.
그렇다고 꼭 누가 할 일, 누가 할 일 정확히 나눠진 것은 아니고, 작은 가게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일하는 것 같았다. 유신이 일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으니, 그 외에는 사장인 루이스 혼자서 어떻게 유지해 가는 듯했다.
“자, 홍차 나왔습니다.”
닉의 홍차는 바로 나왔다. 뜨거운 물에 티백을 담그는 것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애초에 닉은 이 동네에서 홍차에 대한 기대가 없어 이 정도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나마 여기는 꽤 좋은 브랜드의 티백을 쓰고, 추가로 쓸 수 있는 더운물을 한 잔 더 주는 것으로 충분히 센스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헉, 당신 그게 뭐예요?”
“왜?”
홍차 잔에 당연하다는 듯 설탕을 몇 개씩 넣는 닉을 보고, 밀리가 당황했다. 정작 닉은 어깨만 으쓱하고는 보란 듯이 설탕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때 갑자기 카운터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유신?”
당황하는 밀리를 두고, 닉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신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취객으로 보이는 남자가 막 카운터 안으로 달려드는 참이었다. 어디로 봐도 유신을 노리는 모습에 닉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몸을 던지려던 때였다.
우당탕탕!
다음 순간, 취객은 가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닉은 뻔히 다 보고도 방금 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을 숙인 유신이 탁탁 취객의 등을 두드리며 뭐라 뭐라 했다. 남자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유신은 몸을 일으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불편한 듯 오른쪽 허벅지를 잘게 두드렸다.
그는 오늘 헐렁한 청바지 위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몸 전체를 감싸는 짙은 색 앞치마를 걸쳤다. 앞치마 구석에는 가게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키도 크고 어깨도 적당히 넓은 데 비해 옷도 앞치마도 어딘가 커서 헐렁하고, 접어 올린 소매 아래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은 부러질 듯 얇다. 어딘가 가련한 데가 있는 모습에 닉은 새삼 방금 전 자신이 본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시선을 느낀 듯 유신이 닉을 돌아보더니, 눈을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랑스러웠지만, 어색함과 쑥스러움이 한 스푼씩 뒤섞여 있었다.
***
정확한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유신, 미스터 닉이 와 있어!”
루이스는 주문을 받고 돌아오자마자, 유신을 향해 흥분해 소곤거렸다.
“네?”
“이 카페에! 네 일이 끝나길 기다리는 거 같던데?”
반사적으로 가게 안을 돌아본 유신은 금방 닉을 발견했다. 최대한 평범한 척 꾸미고 있지만 긴 팔다리와 예술적인 비율은 독보적이었다. 특히나 오늘 의상은 지난 두 번에 비해 확실히 무난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있다.
닉을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가, 유신은 제풀에 민망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다른 손님이 들어와 주문을 받는 척 도망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분도 지나지 않아 문제의 남자가 찾아왔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심하게 취해 있었다. 어쩌면 노숙자일지도 몰랐다.
뭔가를 헷갈려 가게에 잘못 들어온 듯한 남자를, 루이스가 나서서 침착하게 돌려보내려 했다. 유신은 여전히 카운터 안쪽에 있었고, 취객과는 약간 떨어진 상태였다.
가게를 하다 보면 별별 사람들이 오곤 했다. 총이나 다른 무기를 가지지 않은 이상, 이 정도는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보통은 루이스의 몇 마디에 무난하게 가게를 나갔다.
오늘 불청객은 술 때문인지 좀 더 끈덕졌다. 루이스의 신호에 유신은 경찰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남자가 그 사실을 깨닫고 카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유신을 노린 것이었다.
“이 쥐새끼가, 뭐 하는 거야!”
취해서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소리치는 남자의 손이 막 닿기 직전이었다. 유신은 반사적으로 그 옷깃을 붙잡고, 동시에 눈으로 빠르게 훑어 그에게 총이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몸에서 힘 빼세요. 아니면 크게 다칩니다.”
“엉……?!”
그대로 유신은 어깨로 남자의 가슴을 걸고는, 그대로 그를 붕 띄워서 뒤로 넘겨 버렸다.
우당탕탕!
다음 순간, 취객은 가게 바닥에 큰대자로 누워 있었다. 얼떨떨 넋 나간 얼굴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요? 다치진 않았죠? 숨을 들이켜고, 내쉬어 보세요. 좋아요. 괜찮아요.”
유신이 그런 남자를 일으켜 앉히고는 다친 것은 아닌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그는 시킨 대로 힘을 뺀 듯, 조금 놀라긴 했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취해서 몸에 힘이 빠져 있었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취객과 눈을 맞추었다.
“앞으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됐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본인은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우성 오메가의 매력은 상대를 홀리게 한다. 특히나 상대가 무방비하거나 이성이 약해져 있을수록 쉽게 먹혔다. 마음속에서 우러나 시킨 대로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상대를 압박해 억지로 따르게 만드는 우성 알파와는 조금 달랐다.
우성 오메가는 상대를 홀릴 수 있고, 우성 알파는 상대를 압박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본능적으로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 즉, 이번 일은 유신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남자는 취한 것도 있어서인지 유신의 매우 말을 잘 따랐다. 그대로 비척비척 일어나 가게 밖으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그래, 겸사 술도 좀 깼기를.
급 피곤해진 기분에 유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쭈그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은 몸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방금 전의 과격한 움직임에 무리를 했는지 다리가 아파 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잘게 두드리고 말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닉이 놀란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다들 처음 보면 저런 반응이더라. 뭔가 쑥스러워서 유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니카, 내가 남동생이 유도했다고 말 안 했던가요?”
“안 했어.”
닉은 눈으로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었다. 유신은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며,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나나 동생이나 몸을 잘 쓰는 편이거든요. 나도 발레 안 했으면 같이 유도를 했을 수도 있어요. 내 쪽은 아마 취미에 안 맞아서 동생처럼 그렇게 오래는 안 했겠지만요.”
생각해 보면 유호도 태권도를 하려다 넘어갔다고, 유신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 예전부터 묘하게 저런 사람들이 잘 꼬이는 체질이어서요.”
오늘은 그렇다 쳐도, 분명 그 대부분은 그가 우성 오메가다 보니 일어난 일일 테지만, 본인은 그 점에 대해서는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동생이 유도를 하는데, 나한테 이 동작이 제일 도움이 될 거라고 알려 줬어요. 이래 봬도 힘이 꽤 세거든요. 아세요? 이미지와 달리 베타와 오메가 사이에 근력을 비교하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대요. 알파는 또 다르겠지만요.”
유신이 방긋 웃어, 닉은 얼떨떨한 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떻게,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요?”
“아니, 더 좋아졌는걸.”
하지만 이어진 망설임 없는 대답에, 유신은 다행이라며 다시 웃었다.
***
“미안, 니카. 기다렸죠?”
아르바이트가 끝난 유신이 닉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카페 로고가 그려진 앞치마는 벗고, 대신 펑퍼짐한 적갈색 스웨터를 걸쳤다. 닉에게도 이미 익숙한, 평소 입고 다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손에는 늘 입는 빨강과 노랑, 녹색이 뒤섞인 체크무늬 코트가 들려 있었다.
유신은 금요일에 입었던 카멜색 캐시미어 코트는 당연하다는 듯 벽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 예쁘긴 하지만 품이 좁다 보니, 안에 스웨터를 입고 입으면 불편했던 것이다.
카페는 신기하게도 5시를 기점으로 손님이 확 줄어들었다. 루이스가 괜히 그 시간에만 추가 아르바이트를 쓰는 게 아니었다.
“어라, 두 사람?”
닉의 자리는 우연찮게도 가게에서 제일 넓은, 성인 6명도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밀리와 같이 있던 것은 유신도 아까 봐서 알았지만, 그 외에도 생각지 못한 인물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유신이다. 유신, 안녕!”
“안녕, 유신. 오늘도 루와 일한다고 고생했어.”
가녀린 목소리는 금발의 네다섯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애였고, 그녀의 보호자인 듯한 젊은 남자도 함께였다. 루이스의 남편인 짐과 그들의 딸인 캣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모였어요?”
자연스럽게 닉의 옆으로 앉으며 유신이 물었다.
“루가 여기 같이 앉으라잖아. 이분이 유신의 데이트 상대라며.”
“아, 루이스는 쓸데없는 소릴!”
하지만 짐의 대답에 유신은 얼굴이 바로 빨개졌다.
정작 루이스는 지금 한창 파스타를 볶느라 바빴다. 양으로 보아 절대 짐과 캣을 위한 2인분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다 함께 저녁을 먹는 분위기에, 유신은 닉에게 사과했다.
“니카, 미안해요. 괜찮을까요?”
“난 상관없어. 유신의 친구들을 만나게 돼서 오히려 좋은데.”
닉은 의외로 선선히 이렇게 대답했다. 빈말이 아니라 단둘이 아닌 것은 별로였지만, 유신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게 된 점은 정말로 반가웠다. 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닉을 향해 짐이 감탄했다.
“다시 봐도 정말 미남이시네요. 첨엔 진짜로 닉 메드인가 했을 정도예요. 어떻게 이름도 우연히 닉이세요?”
왠지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루이스는 여전히 닉을 닉 메드 본인이 아니라 꼭 닮은 일반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덕분에 배우자인 짐도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유신은 당황했지만, 사정을 아는 밀리는 그저 즐거운 표정이었다. 당사자인 닉 또한 여전히 밝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본인이 저러는데 굳이 제 입으로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좀 그랬다.
“실은 선물을 가져왔어.”
닉이 드디어 유신에게 준비한 과자 박스를 건넸다.
“이게 뭐죠?”
“쓸데없는 건 안 된다 그래서, 선물로 먹을 걸 준비했어. 먹는 건 쓸데없지 않…… 겠지?”
“그 말이 그렇게 신경 쓰였어요, 니카?”
“당연하지. 네가 나한테 한 말인데.”
“그땐 워낙 놀라움의 연속이었으니까요.”
“하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발 그냥 이대로 넘어가 줘.”
“그래서 이건 그냥 과자인 거죠?”
유신은 의외로 선뜻 박스를 받아 들었다. 먹을 거라는 말에 닉의 예상대로 경계심이 낮아진 것이었다.
“맞아. 전에 보니까 단 걸 잘 못 먹는 거 같아서, 일부러 이걸로 했어. 여태껏 먹어 본 것들 중에 심하게 달지 않으면서, 제일 맛있어서 내가 일부러 고른 거야.”
닉으로서는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유신이 희미하게 뺨을 붉혔다.
“고마워요.”
하지만 포장지를 죽죽 뜯는 그 손길에 거침은 없었다. 리본은 풀다 귀찮아지니 바로 옆으로 밀어서 빼 버렸다. 포장지 아래서 드러난 틴 케이스를 본 유신이 감탄했다.
“상자가 너무 예뻐요.”
“응, 그래서 선물로 많이 한대. 커피나 홍차와 먹어도 좋아.”
“자기야, 그거 나도 예전에 먹어 봤는데, 엄청 맛있는 가게야.”
옆에서 밀리도 거들었다.
“그래?”
유신의 표정에 기대감이 어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밀리는 닉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가 일부러 좋게 이야기해 줬다는 사실을 깨닫고, 닉은 혼자 감동했다. 물론 ‘자기’라는 애칭은 역시 거슬렸지만, 보아하니 유신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신과 밀리가 붙어 있는 모습이 생각보다 더 귀여워서 큰일이었다. 세상 무해한 투샷이랄까. 저런 둘 사이를 오해하다니, 정말 큰 실수를 했었다.
“에밀하고도 나눠 먹으라고 일부러 큰 박스를 샀어.”
“에밀? 아아, 밀리요.”
싫어하는 본명으로 닉이 대놓고 부르자, 밀리의 표정에서 아주 잠깐 웃음이 사라졌다. 정작 유신은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밀리를 조금 실망시켰다.
“잘됐다, 밀리. 너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유신은 이제 캔을 열어 안에 가득 든 먹음직스러운 과자들을 구경 중이었다. 처음에 부루퉁해하던 밀리였지만, 평소 가격 때문에 한 개도 먹기 힘든 과자를 수십 개나 눈앞에 두자 불만은 잠시 잊어버렸다.
“와, 진짜 맛있어 보여. 자기야, 나 하나 먹어도 돼?”
“물론이지, 밀리.”
“맞다. 캣한테도 줘야지.”
밀리는 바로 마들렌과 까눌레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가, 캣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짐의 뒤에서 눈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정말 귀여운 아이로군요.”
닉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연예계에 있으면서 아역 배우라면 많이 봤지만, 웃는 얼굴이 저 정도로 귀여운 꼬마는 흔치 않았다. 부모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이 절로 느껴졌다.
짐이 딸바보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않고 환히 웃었다.
“고마워요.”
“이 아이는 당신과 루이스 사이의 친딸인 거죠?”
“네, 캐서린, 그러니까 캣은 나와 루이스가 둘의 정자를 사용해 대리모로 얻은 아이예요. 저희 부부의 보물이죠.”
닉의 질문은 어떻게 보면 너무 개인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같은 남자 커플 사이라 생각해서인지 짐의 경계심은 느슨했다.
베타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고, 알파와 오메가도 구별할 수 없다. 거기다 실제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타기도 한 만큼, 상대방을 자연스럽게 베타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의미로 페로몬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편한지도 몰랐다.
아마 유신이 오메가라는 사실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평소에는 거의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닉도 자연스럽게 베타로 대하고 있었다.
“근데 캣은 닉 메드를 모르나 봐.”
여전히 짐의 뒤에 숨은 캣을 향해 밀리가 웃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닉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손에는 밀리가 준 과자를 꼭 쥔 채, 원래도 큰 눈을 하도 크게 떠서 얼굴 반은 되는 듯했다.
“그럴걸. 얘는 어린이 채널에서 하는 공주님 만화만 보니까.”
짐의 대답에 밀리가 다시 감격했다.
“와, 너무너무 캣답고, 귀엽다.”
그때 캣이 짐의 옷깃을 끌어당겨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리고는 아빠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소곤거렸다. 짐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 왕자님?”
다들 무슨 소리냐고 어리둥절하는데, 짐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캣이 그러는데, 닉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왕자님 같대.”
“아이, 캣! 나한테는 네가 공주님이야!”
밀리는 캣이 너무 귀여워서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짐이 캣을 조심스럽게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응, 응, 그래. 뒤에 숨지만 말고 왕자님께 말을 걸어 보자.”
너무 귀여워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캣을 보고 있었다. 아빠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듯 그녀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닉 왕자님, 너무 멋있어요.”
“정말? 고마워.”
닉의 말투는 고맙지 않은 건 아니지만, 왜 굳이 당연한 사실을 말하느냐는 태도였다. 그게 또 얄미우면서도, 지금 상황과 그의 외모에 절묘하게 어울렸다.
반대로 캣은 그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좀 더 용기를 내서 한마디를 더 했다.
“유신의 방에 있던 포스터의 왕자님하고 닮았어요!”
사심 없는 순수한 캣의 말에 유신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아니, 캣! 무, 무, 무슨 쓸데없는 소릴.”
다음 순간, 유신은 다급히 부정했다. 하지만 버벅거린 순간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애가 한 말에 이렇게 진심으로 반응한 것부터 이미.
캣이 다시 해맑게 외쳤다.
“전에 놀러 갔을 때, 유신의 방에서 봤어요! 내가 벽에 왕자님 사진이 붙어 있다니까, 유신이 왕자님 맞는다고 했는데.”
“어떤 사진이었지, 캣?”
닉이 제 외모를 잘 아는 남자만이 지을 수 있는 매력적인 미소를 보였다. 애니메이션에서 바로 빠져나온 듯한 왕자님을 앞에 두고 캣은 흥분했다.
“긴 머리를 땋아 올린 얼굴 사진하고, 지금 정도로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진요.”
그 설명만으로도 닉은 벽에 붙은 포스터가 무언지 대충 눈치챈 듯했다.
“그랬구나. 캣이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어. 고마워. 크게 도움이 됐어.”
“응!”
닉의 칭찬에 캣이 기뻐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높이 묶은 금발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런 둘을 향해 짐이 흐뭇하게 웃었다.
“닉, 그렇게 애 말에 안 맞춰 줘도 돼요.”
“아뇨. 힘든 것도 아닌데요, 뭘.”
닉은 유신과 눈을 맞춘 채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어디로 보나 이미 죄다 눈치챈 분위기에, 유신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아아, 닉 본인에게 자신이 팬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들켜 버리다니. 이대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유신이 닉 메드의 팬이었지?”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짐이 작게 소곤거렸다. 닉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목소리였다.
“지, 짐!”
사실 루이스는 물론, 짐도 유신이 닉 메드의 팬인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유신의 주변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본인부터 딱히 감춘 적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떠벌리고 다니는 쪽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닉 메드 본인에게 알려지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유신은 여태껏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고 맹렬하게 후회했다.
“왜? 그래서 닉 메드하고 꼭 닮은 미스터 닉하고 쉽게 좋은 분위기가 된 거 아냐?”
“대체 누가 그래요?”
“루가 그러던데.”
“아니에요!”
늘 차분하던 유신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질렀다. 평소와 달리 전혀 여유가 없는 그 모습에, 밀리는 대놓고 즐거워 보였다.
“식사 왔습니다. 밥 먹자!”
다행이랄까, 아니랄까. 마침 루이스가 파스타 접시를 가져왔다.
한쪽 팔에 접시 세 개씩, 총 여섯 접시를 한 번에 옮겨 온 것이었다. 웨이터 경력이 긴 사람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완벽한 진기명기였다.
그중 확연히 작은 접시는 파스타 면에 토마토소스만 버무린 것으로, 캣을 위한 키즈 파스타였다.
“루이스도 같이 밥 먹어요? 가게는?”
테이블에 차례로 놓이는 여섯 개의 접시를 보고 밀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루이스는 웃으며 짐과 캣의 옆에 앉았다.
“지금은 손님이 적은 시간이라 괜찮아. 필요하면 바로 나가 보면 되고.”
유신이 배고파 못 참겠다는 듯 그들 중 제일 먼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아, 맛있겠다. 어서 먹어요.”
그대로 파스타를 입으로 가져가는 유신에게, 밀리도 루이스도 짐도 놀란 얼굴을 했다. 요 몇 년간 항상 무언가를 삼키는 데에 힘들어하던 그였다.
닉만이 뭐가 이상한지 모른 채,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
유신과 닉은 나란히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둘이 함께 카페를 나오게 되었다. 주변에서 당연히 그럴 거라 여기는 분위기가 유신은 싫진 않으면서도 괜히 쑥스러웠다. 정작 밀리는 닉이 가져온 과자 박스를 자신이 대신 챙겨 가며, 둘이 잘 놀다 오라고까지 했다.
실은 자신이 팬이라는 사실에, 닉이 무슨 말이라도 꺼낼 줄 알고 유신은 계속 긴장 중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아무 말도 없었고, 그 사실이 더욱 그를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배 속은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채워져 있고, 덕분에 상황에 비해 기분은 느긋했다.
루이스가 만들어 준 파스타는 맛있었다. 겨우 삼분의 이 정도 먹어 치웠을 뿐이지만, 평소 유신이 먹는 양을 생각하면 진짜 많이 먹은 거였다. 원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힘들어서 허기가 져도, 식욕이 없어서 항상 힘들곤 했다.
이걸로 닉이 함께 있으면 자신이 식사를 잘하게 된다는 가설이 좀 더 힘을 얻는다.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오랜 기간 동경하던 우상이라 그럴 수도 있었고, 어쩌면 그가 우성 오메가인 자신과 대칭되는 우성 알파라 그런지도 몰랐다.
닉이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식사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던 것도 신기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유신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닉은 어땠을까?
해가 진 12월의 저녁은 꽤나 쌀쌀해, 유신은 코트의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웠다.
정작 닉은 상대적으로 얇은 트렌치코트 한 장이었다. 주변이 어두워져서 선글라스는 벗었고, 대신 검은 챙 모자를 아까보다 좀 더 깊게 눌러썼다.
“니카, 안 추워요?”
“이 정도야 뭐.”
유신의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고향을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도 몰랐다.
“와, 저거 봐요. 온통 크리스마스예요.”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유명한 공원 근처였다. 집 근처와 달리 관광객들도 많이 들리는 장소로, 지금 이곳은 완전히 별천지였다. 커다란 트리는 물론, 회전목마에 간이 스케이트장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반짝이는 전구 줄이 여기저기 걸쳐져 있고, 크리스마스 마켓의 가판대에서는 사람들이 빨강과 녹색과 황금의 물건들을 팔았다. 푸드 코트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한껏 들뜬 사람들이 휴일 저녁을 즐기며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벌써 12월도 한창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 근처 살잖아? 무슨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
혼자 놀랐다가, 혼자 납득하는 유신을 보고 닉이 어이없어했다. 유신은 속으로 여기가 그렇게 근처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요새 리포트가 많아서 바빴어요. 거기다 다음 주면 기말고사고.”
“기말고사?! 괜찮아? 내가 공부 시간을 뺏은 거 아냐?”
“어차피 매일 조금씩 하고 있으니까, 시험 기간이라고 특별히 시간이 없거나 하진 않아요. 잠시 이렇게 쉬어 줘야 공부도 더 잘되더라구요. 돌아가면 그때부터 다시 책을 봐야 하지만요.”
유신은 들뜬 눈으로 공원을 둘러보았다. 그중 특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역시 회전목마였다. 반짝이는 전구가 달린 기둥과 그 사이를 아래위로 흔들리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지개색 모형 말들, 즐거워하는 사람들.
“탈까?”
그 시선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달은 닉이 물었다. 회전목마에는 주로 아이들이 타고 있었지만, 어른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딱히 타고 싶어서 본 건 아니라고 생각한 듯, 닉도 다시 권하지 않았다. 대신 둘은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푸드 트럭을 지나며 닉은 뭐라도 먹을까 물었지만, 유신은 배가 충분히 불렀기 때문에 이번에도 거절했다.
뭔가를 살 생각은 없었지만,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둘러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닉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아, 이거.”
호두까기 인형, 산타 모양의 촛대, 책상 위에 둘 수 있는 미니 크리스마스트리 따위의 아기자기한 물건 사이에서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의외의 물건이었다.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살이 장식이네요.”
작은 타원형의 잎 사이에 희고 동그란 구슬 같은 열매가 알알이 달린 겨우살이는, 이 동네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문이나 현관에 흔하게 장식하는 식물이다. 보통은 문에 걸어 장식할 수 있도록 리스형이나, 현관 천장에 달 수 있게 커다란 부케로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어린아이도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미니 부케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빨간색 공단 리본으로 묶어 두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겨우살이를 장식하는 이유는.
“하나 살까?”
닉은 주머니를 뒤져 50불짜리 지폐 한 장을 겨우 찾아냈다. 고액권이라 주인은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지만, 닉이 잔돈을 가지라 하자 바로 좋아라 했다.
“너무 바가지 쓴 거 아니에요?”
“줄게.”
“네?”
갑자기 닉이 비싸게 주고 산 겨우살이 부케를 떠넘겨, 유신은 눈을 크게 떴다. 반사적으로 겨우살이를 받아 든 유신이 저도 모르게 뺨을 붉힐 때였다.
“유신, 나 너에게 고백할 게 있어.”
“뭐, 뭘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유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닉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둘은 거의 몸을 겹친 듯한 자세가 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느새 주변은 인적이 거의 없었다. 바로 옆이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북적이는데, 나무 한 겹 안쪽으로 들어오니 바로 이렇다.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군데군데 가로등이 있어서 크게 어둡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난 카페 루이에 간 게 오늘이 두 번째가 아니야. 지난주에 네 앞에 앉았을 때, 이미 다섯 번째로 찾아갔던 거였어. 실은 네가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널 보기 위해 찾아갔었는데, 계속 못 만나다 보니 결국 그렇게 여러 번 가게 되었던 거야.”
“그랬구나.”
갑작스런 이야기에도 유신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닉이 눈을 찌푸렸다.
“안 놀랐어?”
“아뇨, 듣고 보니 왠지 그랬을 것 같달까. 그랬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달까.”
“다행이다! 네가 싫어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
“니카, 내가 당신을 싫어할 리 없잖아요! 그래도 직접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싫어할 리 없다는 말에 닉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는 이걸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도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잖아? 네 방에 붙여 뒀다는, 내 포스터.”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유신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닉에게서 계속 별말이 없길래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 이제 보니 그냥 이렇게 단둘이 될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유신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들고 있던 겨우살이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건.”
주변을 둘러싼 나무 위로 공원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가 삐죽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도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왜 그 포스터가 거기 붙어 있는 건지.”
닉은 대답해 주지 않을 때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함정에 빠져 버린 듯한 기분에 유신은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함정이라면, 무척 달콤한 함정이 틀림없었다.
결국 자신은 닉의 질문에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리될 것을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나 팬이에요, 당신의.”
겨우 속삭이고, 유신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안경 아래 눈가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제 답에 닉이 환하게 웃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주변까지 밝아지는 듯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는 즐거운 듯 자신의 턱으로 손을 가져갔다.
“긴 머리 때면 못해도 내가 청소년 때니, 꽤 오래전 사진이라 지금은 구할 수도 없을 텐데.”
“맞아요. 실은 발레 하던 시절부터 좋아했어요.”
덕분에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의 대리모 일을 수락하고 말았다. 머릿속은 온통 당신에 대한 사심으로 가득 찬 채.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안할 뿐이다.
“나도 네가 직접 말해 줘서 기뻐.”
하지만 이어지는 닉의 목소리에, 유신은 홀린 듯 다시 고개를 들고 말았다.
왜일까? 지금의 그는 그대로 자신을 끌어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모자를 벗자, 아름다운 금발이 반짝이며 사르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보통 오래 모자를 쓰고 있으면 조금은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뻗치거나, 땀이 배거나 하지 않나? 이 알파는 어떻게 된 게 그런 흔적조차 없었다.
닉은 성가신 것처럼 앞머리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뒤로 넘겼다. 유신은 저도 모르게 그 단정한 손끝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사실을 눈치챈 그가 다시 웃고, 달콤한 미소에 유신은 좀 더 어쩔 줄을 몰랐다.
어느새 닉의 시선이 유신이 들고 있던, 제가 준 겨우살이 미니 부케로 향했다. 그가 물었다.
“너도 알지? 크리스마스 때, 이 식물이 무슨 의미인지?”
“네.”
대답하고, 유신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겨우살이 아래서 키스를 하면 연인이 된다던가, 결혼을 한다던가. 하여간 행복하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된다는 속설. 이 나라에 살면서 모르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 수많은 대문과 현관 천장에는 겨우살이가 걸려 있고, 연인들은 그 아래서 장난스레 키스를 하곤 한다.
“유신, 내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를 하려면 그 나무를 찾아 황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알고 봤더니 ‘아래’라는 게 꼭 살아 있는 나무일 필요는 없더라고. 현관에 걸린 리스는 물론, 누군가 옆에서 나뭇가지를 들어 줘도 되고, 키스 당사자 중 한 명이 가지를 높게 들고 있어도 상관없었어. 아니, 그게 보통이라지.”
치사해. 차라리 당신이 겨우살이를 높게 들고 머리 위에서 흔들어 줬다면, 자신은 그냥 모르는 척 눈을 감기만 하면 됐을 텐데. 이러면 꼭 이쪽이 원해서 먼저 나서는 것만 같잖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신은 얌전히 들고 있던 겨우살이를 머리 위로 들었다. 10cm에 가까운 신장 차이에 어지간히 손을 들어도 닉의 머리에 아슬아슬 닿을 듯 말 듯 했다.
“이렇게?”
닉과 유신의 눈이 새삼 다시 마주쳤다.
어차피 둘 다 같은 마음이었다. 겨우살이의 아래에서, (실은 유신이 들고 있는 것뿐이지만) 닉이 머뭇머뭇 고개를 숙여 왔다.
“키스해도 될까?”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잖아. 유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피하는 대신 살짝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키스보다는 뽀뽀에 가까운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닉의 손끝이 유신의 턱을 훑고, 가볍게 입술 위를 덧그렸다.
“어때?”
“잘 모르겠어요.”
그의 질문에 유신은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닉이 준 겨우살이의 미니 부케를 머리 위로 든 채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그 아래서 키스하는 연인들의 행복과 사랑을 빌어 준다는 귀여운 의미를 가진 식물이다.
“한 번 더 하면, 좀 더 확실해질 거 같아요.”
이런 가벼운 키스조차 유신은 처음이었다.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반대로 닉은 유신이 경험이 많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센터가 보낸 그에 대한 파일에 성 경험이 ‘풍부’하다고 체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은 경험이 없는 것이 부끄러웠던 유신이 허세를 부려 거짓으로 체크한 것뿐이었지만, 닉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그는 유신이 낯설어 뻣뻣하게 구는 모습을 다른 이유로 해석했다.
“키스를 ‘한 번 더’라.”
닉은 유신이 끼고 있던 안경부터 벗겨 버렸다. 다시 입술과 입술이 가까워졌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결국 유신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왜 키스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감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지간한 심장이 아니고서는, 계속 눈을 뜨고 있기가 쉽지 않은 거다.
“흣!”
그대로 입술이 빨려, 유신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 안에서 신음했다. 입 안으로 파고드는 혀가 뜨거웠다.
허리를 끌어안아 오는 양팔은 단단했다. 입술에서 뒤섞이는 숨결이 생생하다. 혀가 드나들 때마다 젖은 소리가 울리고, 제 것이라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응, 응.”
유신으로서는 들고 있던 겨우살이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열기에 어떻게 숨을 쉴지도 모른 채, 그저 받아 내는 것에 급급했다.
반대로 닉은 묘하게 순진한 듯한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유신이 자신을 느껴 주는 것이 기뻐, 좀 더 거칠게 입맞춤을 이어 갈 뿐이었다.
다리에 몸이 힘이 풀려 뒤로 넘어가는 가느다란 몸을 닉이 가볍게 받쳐 안았다.
둘 사이의 기본적인 체격 차이에 어느샌가 유신은 닉의 양팔 사이에 갇힌 듯 되어 버렸다. 그는 유신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양팔을 제 목에 감아 매달리듯 끌어안도록 했다.
유신은 맞닿은 부분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녹아 뒤섞여 하나가 된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본능이 부풀어 오르고, 둘의 페로몬 향이 짙어졌다. 주변을 채우는 공기가 노골적으로 달착지근해졌다.
유신이 살면서 여태껏 키스에 대해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이도 있는데, 키스가 새콤달콤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입술과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 행위다.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 존재하겠냐는 생각이었다. 실제 키스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축축하고, 질척하고, 뜨겁고, 이상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입술을 떼고 싶지도 않았다.
단단히 끌어안고, 또 품에 끌어안긴 채, 이렇게 계속 몸과 입술을 겹치고 있고만 싶었다.
“하, 하아.”
제대로 숨을 쉬는 요령을 몰라 유신이 허덕거리며 호흡 부족으로 죽기 직전, 닉의 입술은 떨어졌다. 여전히 닉의 품에 끌어안긴 채 유신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한참이 지나도록 유신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닉의 가슴에 오히려 얼굴을 묻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있죠, 니카.”
닉은 그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응.”
기분 좋은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듯 유신이 코앞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니카가 아니었으면, 나 알파 퇴치 스프레이를 쐈을 거예요.”
“응?”
하지만 이어진 유신의 말에 닉은 화들짝 놀라, 사랑스러운 오메가의 어깨를 붙잡고 저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덕분에 밀착하고 있던 몸이 살짝 떨어졌다.
유신은 아직 들고 있던 겨우살이를 살짝 입 근처로 가져다 댔다. 안경을 쓰지 않은 눈으로 바로 올려다보자, 섬세한 속눈썹에 둘러싸인 사랑스러운 눈망울이 더 강조되었다.
“스프레이, 나라에서 지급해 주거든요. 나도 일단은 우성 오메가니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갑자기 그 스프레이는 왜? 내가 이성을 상실한 것도 아닌데?!”
알파 퇴치 스프레이는 말 그대로 알파를 퇴치하는 스프레이로, 알파가 페로몬 때문에 성욕으로 이성을 잃었을 경우에 순간이지만 행동 불능에 빠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일반 남자로 치면 성기를 잡힌 듯한 공포와 닮았다는데, 그보다 훨씬 더 공포감이 높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단, 높은 효과만큼 엄청 비쌌다.
“당신이 멋대로 키스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잖아요. 난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상대가 당신이 아니었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구요.”
유신은 해사한 얼굴로 생긋 웃으며, 듣는 알파에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쉽게도 했다. 아까 카페에서 취객을 처리하던 솜씨로 봐서는, 스프레이 없이도 충분히 해결 가능했을 것 같지만.
“그거 영광인걸.”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닉은 유신의 턱을 제 쪽으로 살짝 당겨 뺨에 가볍게 코끝을 비볐다. 유신이 간지러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키스요. 역시 아기 때문에 한 거죠?”
“아기?”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기려면, 당신은 나와 사이가 좋아야만 하니까요.”
잠시 까먹고 있던 단어에 닉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어지는 유신의 말이 그저 마음에 들었다.
“맞아. 난 너와 사이가 좋아지고 싶어. 가능하면 지금보다도 더.”
그대로 그는 다시 유신을 제 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다시 입술과 입술이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키스를 조르는 것이었다.
“한 번 더 해도 돼, 유신?”
“안 돼요, 니카.”
유신은 가볍게 양손으로 닉의 가슴을 밀어 내고는, 자세를 바로 한 뒤, 안경을 다시 꼈다.
“이젠 돌아가요. 제 기말고사가 코앞이라구요.”
닉은 의외로 끈질기지 않게 수긍했다. 일단 키스를 성공한 것만으로 오늘 만남의 목적은 충분히 이루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모자부터 다시 깊게 썼다.
“바래다줄게.”
“응.”
유신은 닉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닉은 그의 허리에 제 팔을 감았다. 두 사람은 한 쌍의 참새처럼 서로를 끌어안았다.
대형 트리와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흥겨운 공원을 뒤로하고, 그들은 유신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꽤 멀리까지 와 버린 바람에 돌아가는 길은 조금 멀었다. 마침 집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가 딱 맞춘 듯 그들 앞의 정류장에 섰다. 유신의 재촉으로 둘은 버스에 올라탔다.
애매한 시간대의 버스는 딱히 붐비지 않았다. 버스 기사는 어둑어둑한 조명과 모자 때문에 닉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떨어지지 않는 귀여운 젊은 한 쌍에게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둘은 버스 구석의 2인용 좌석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유신의 손에는 여전히 닉이 준 겨우살이 미니 부케가 들려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공용 현관까지 가서도, 거기서 유신이 들어가는 데에만 10분 이상 걸렸다.
겨우 유신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닉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그가 내키지 않는 느린 걸음으로 한 블록 정도 걸어가, 모퉁이를 돈 다음이었다.
“응, 그래. 내 위치는 핸드폰 GPS로 확인해.”
닉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짧은 통화를 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커다란 고급 세단이 나타났다. 그는 딱히 놀라지도 않고, 우아한 동작으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닉, 데이트는 잘됐어?”
운전석에서 아이잭이 미소를 보냈다. 닉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들어 봐, 아이잭. 오늘 유신을 보러 카페에 들어갔더니 말야…….”
차는 뒷좌석 문이 닫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
닉에게서 받은 겨우살이의 미니 부케는 유신의 방문을 장식했다.
바깥쪽이 아니라 방 안에서 볼 수 있도록 문 안쪽에 걸었다. 밀리에게 조금 부끄러운 것도 있었고, 그래야 혼자 실컷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스까지 해 버린 이상, 이제 둘 사이의 관계가 보통 이상으로 깊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유신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키스를 다시 떠올리면, 뭐랄까 머릿속이 멍해서 뭔가를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그는 지난번에 구했던 닉의 노란색 비니를 손에 꼭 쥔 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곤 했다.
이미 묻어 있던 페로몬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지만, 닉이 쓰고 있었다는 것만 떠올려도 묘하게 안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이 비니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못 했다. 그가 이 모습을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이럴 때마다 너무나도 닉이 곁에 있었으면 싶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 못해, 어딘가 미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유신은 인터넷 검색으로 그 사실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대신, 온라인 쇼핑으로 닉 메드의 최신 포스터를 주문했다.
그날 밤 헤어질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이대로 매일 만날 기세였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다음 날, 닉의 팬 사이트와 팬 계정에서는 우리의 슈퍼스타가 스톤버그 감독의 신작에 출연하기로 확정했으며, 뉴욕에 거주 중인 것이 맞는다는 정보가 속속 올라왔다. 유신은 자신이 전날 키스한 상대와 팬 사이트가 언급하는 스타가 전혀 다른 사람인 양 그 정보에 놀라워했다.
둘은 여전히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슬슬 닉의 답장 간격이 평소보다 조금씩 늦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대답할 수 있을 때 대답이 돌아오는 속도로 봐서는, 그저 바빠져서 답장이 쉽지 않다고 보는 쪽이 맞을 듯했다. 적어도 닉이 이전보다 바빠진 것은 확실했다.
아니, 여태껏 한가하던 게 이상했던 건지도 몰랐다. 닉 메드는 원래도 다작하는 타입의 배우였다.
유신이라고 한가한 것도 아니었다. 본격적인 기말고사 기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학기 내내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는 타입이라 시험 기간을 크게 타지는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지난주에 비해 핸드폰을 볼 시간이 줄었다.
단, 목요일은 시험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하루 종일 아직 남은 과목의 시험공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어 오히려 전날까지 억지로 오늘 몫의 공부까지 끝내야만 했다.
다음번 히트를 대비해 대리모 센터의 병원 진료가 예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제 진료는 다 끝났고, 약만 타면 돌아갈 수 있었다. 매튜 선생님에게서 받은 처방전을 손에 든 채 유신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공부 때문에 거의 밤을 새고 온 덕에, 그냥 서 있어도 절로 눈이 감겼다. 병원에 온 목적 때문에 한껏 날이 선 신경과 예민해진 감각이 시험공부로 지친 뇌에 수면욕까지 뒤섞여, 유신의 컨디션은 엉망진창이었다.
안 그래도 억제제를 끊는 등 여러 이유로 인해, 지금 그의 호르몬은 요동치는 중이었다. 덕분에 기분도 요동을 쳤다.
거기다 며칠째 커피에 든 우유나 설탕 말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기억이 없었다. 오늘은 그래도 레토르트 죽이라도 꼭 먹어야 할 텐데.
일단 돌아가면 내일 시험을 위해서도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마지막 복습을 하고.
“하아.”
한창 시험 기간 중이라 어차피 제대로 쉴 수도 없다. 유신이 뻑뻑한 눈두덩이를 엄지로 문지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였다.
그는 로비에서 닉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이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유신!”
하지만 자신을 발견한 닉이 이름을 부르며 양쪽으로 크게 손을 벌리자,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