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이야기는 조금 앞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자네 기말고사가 다음 주 화요일까지였지?”
“네, 맞습니다.”
진료실에서 만난 매튜 선생은 여전히 친절했다. 유신은 그의 느긋한 말투와 허허실실한 웃음에 조금은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원래라면 자네는 이번 주에 히트를 겪었을 거야. 보통 한 달에서 석 달 주기로 돌아오니까. 자네는 오메가 중에서도 주기가 꽤나 칼같군.”
지난번 히트로부터 벌써 4주가 지났다. 유신이 죠앤에게서 받은 딜도로 혼자 그 난리를 친 지도 벌써 한 달째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유신은 임신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아직 좀 민망해 괜히 시선만 피했다.
“그렇, 군요.”
“뭘 부끄러워하고 그러나? 좋은 거야. 한 달 주기로 히트가 올 때 난소가 제일 성숙하고 임신 확률도 높아지거든. 그래서 임신 준비 때 약을 써서 그에 주기를 맞추려고 하는데, 자넨 그럴 필요가 없지. 시험 기간하고만 안 겹쳤어도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워. 그지?”
유신이 오늘 진료를 예약한 이유는 다음 히트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번처럼 단순히 통보만 받는 거라면, 죠앤만 만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번째 히트 예정일과 기말고사 기간이 딱 겹쳐 버린 것이다.
저용량의 억제제와 히트 유도제를 함께 복용하면, 부작용 없이 히트 날짜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었다. 단, 반드시 의사의 진료와 상세한 처방이 필요했다.
유신은 이미 지난주부터 매튜의 처방을 받아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는 확인 및 미세 조정을 위해 한 번 더 들른 것이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이상 없이 진행 중이었다.
“걱정 말게, 유신. 오늘 검사 결과로 보아, 자네의 다음 히트 예정일은 다음 주 목요일이니까. 시험은 화요일에 끝난다니 딱 들어맞는구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쪽이 할 말이야. 컨디션은 좀 어떤가?”
“사실 딱히 좋진 않아요.”
유신의 솔직한 대답에 매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호르몬이 널을 뛸 거라 좀 힘들긴 할 게야. 평소보다 예민해지기도 하고. 한동안 가능한 한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뭐, 기말고사도 있어서 그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죄송해요.”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의사로서 그것까지 못 도와주는 내가 더 미안하지. 언제든 심하게 불편하거나 약이 안 맞으면, 바로 우리 쪽으로 연락하고.”
“네, 알겠습니다.”
매튜는 유신의 차트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고 기록을 보니 지난번 히트 때는 혼자서 인공 수정을 시도했던데.”
“네, 그래도 상관없다고 해서요.”
“이번에도 똑같이 할 건가?”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억제제를 끊고 나서 찾아온 두 번째 히트잖아. 혼자서는 쉽지 않을 텐데? 원한다면 센터에서 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방식도 나쁘지 않아. 아니면, 혹시 도와줄 누군가가 있나?”
그 질문에 유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를 오해한 듯, 매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누가 있는 거로군. 그런 상황에 적절한 매뉴얼은 따로 보내도록 조치하지.”
있긴 누가 있다고? 아무도 없다. 하지만 매튜의 착각에 대해, 유신은 굳이 나서서 해명하지 않았다.
슬슬 진료도 끝나 가는 분위기였다. 유신은 조심스럽게 궁금하던 부분에 대해 추가 질문을 했다.
“매튜 선생님, 만약에 제가 이번 히트로 임신한다면 예정일이 언제죠?”
“여성 임신이면 예정일이 9월 중순이 되지만, 오메가의 임신은 그보다 짧으니, 이 경우 예정일은 8월 중순이야. 물론 1주 정도 전후로 바뀔 수도 있고.”
유신이 반가워했다.
“다행이다. 그럼 이번에 임신을 하게 되면, 늦어도 8월 말에는 태어나겠군요.”
“말까지는 안 가지. 그렇게 되면 자네 경우는 제왕 절개를 하게 될 테니까. 근데, 왜? 무슨 사정이 있길래?”
“그, 학교 복학 때문에요.”
의외로 매튜는 그 대답에 곤란해했다.
“아이 낳고, 그렇게 빨리 대학으로 돌아간다고? 적어도 한 달은 몸을 잘 추슬러야지.”
“학기 초 일주일 정도는 오리엔테이션 위주로 진행돼서 널널하니까, 괜찮을 거 같아요.”
“뭐, 꼭 그렇게 하려는 사정이야 대충 짐작이 간다만.”
이유는 빤했다. 유신은 최대한 빨리 졸업해 일을 하고 싶었고, 한 학기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부터 매튜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전부터 느꼈다만, 유신, 뭐가 뒤에서 자네를 쫓아오기라도 하나? 모든 걸 빨리하라고 닦달이라도 하는 거야?”
유신은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대학의 학비도 너무 비싸고,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아서요.”
“금전적 문제는 이번 일로 어떻게 해결된 걸로 들었는데.”
“그건.”
그대로 정곡을 찔려 유신은 잠깐 멈칫했다. 매튜는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이제 겨우 20대 중반이야. 한번 인생의 목표가 어긋나서 초조한 것은 알겠지만, 추가로 실패해도 충분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이야. 젊고, 건강하고, 아름답지. 영양 상태는 좀 나쁜 듯하지만, 그걸 감안하면 더더욱 놀라울 만치 건강해. 자신에 대해 좀 더 여유를 가지는 게 어떻겠나?”
유신은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러게요.”
하지만 여유를 가지라니.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지를, 자신은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됐으니까, 일단 돌아가면 밥부터 먹도록 해. 밥 안 먹고 약 먹으면 담에 볼 때 혼낼 테니까.”
“죄송합니다.”
혼나 버렸다.
어머니 아버지도 해 주지 않던 조언에, 유신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좋다, 싫다를 판단할 기준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채 진료를 끝내고, 잠시 후 유신은 처방전을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마침 빨간 머리에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젊은 남자가 친한 척 인사를 해 왔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페로몬으로 보아 알파였다. 페로몬은 굳이 주변에 흘리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조절에 꽤나 서툰가 보다고 유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본 적은 있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신이 자신을 몰라본다는 사실을 깨달은 알파가 친한 척 웃어 보였다.
“저 폴이에요. 대리모 센터 안내 데스크 직원.”
“아! 안녕하세요.”
이제 기억났다. 이전 비가 심하게 내리던 날, 그가 우산을 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닉과 같이 갇혔지. 돌이켜 보면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지난번에 우산 갖다주신 건 잘 받았어요, 유신.”
“다행이네요.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그날 얼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쉬웠어요.”
“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유신은 잽싸게 올라탔다. 워낙에 피곤한 상태라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산을 빌려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표면상 친절함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갑자기 폴이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유신은 저도 모르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폴이 변명처럼 둘러댔다.
“저도 내려갈 일이 있어서요.”
고층의 특정 구역을 담당하는 안내 데스크 직원이 일하다 말고 1층까지 갈 일이 뭐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관계자도 아닌 만큼 유신은 그런가 보다 넘겼다. 대신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에 집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에는 이미 머릿속에서 폴의 존재를 거의 잊었다.
어서 빨리 수납을 끝내고 집에 가야겠다. 아니, 그 전에 약도 찾아야지. 역까지 걸어서 내려갈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급 피곤해졌지만, 일단 이 장소만 벗어나도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었을 때, 폴의 눈동자가 한결 어두워진 채 제 뒤를 쫓는 것을 유신은 미처 몰랐다. 유신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못 박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검은 코트를 온몸에 망토처럼 두른 키가 큰 남자 알파였다.
마스크와 모자로 가리고 있어도 알 수 있는 밝은 금발, 청록색 눈동자, 예술적인 이목구비. 유신은 그가 누군지 바로 눈치챘다. 아니, 너무도 명확해 오히려 믿지 못하고, 자신의 착각이 아닌가 의심해 버렸다.
“이유신!”
하지만 닉이 제 이름을 불렀을 때, 그의 양팔이 자신을 향해 크게 벌어진 것을 본 순간.
유신의 머릿속에 가득하던 여러 잡념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품에 뛰어들어 그저 그를 끌어안고서,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알파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실 뿐이었다.
왜 닉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걸까? 그리고 왜 갑자기 자신을 향해 팔을 벌렸을까? 그리고 자신은 왜 그 품으로 달려들었을까?
물어야 할 질문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그 수많은 질문 또한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닉은 그런 유신을 데리고, 기둥 뒤에 있어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사랑하는 오메가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떼지 않은 채였다.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그저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였다.
유신과 만나지는 못해도 계속 메시지는 주고받았고, 덕분에 그가 오늘 코스모 센터에 진료를 보러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병원에 가는 것을 계속 내켜 하지 않았다는 것도.
공교롭게도 늘 바쁘던 스케줄이 오늘 하루 일찍 끝이 났다. 마침 유신이 병원에 있을 시간이었다. 닉은 그저 유신이 보고 싶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출발했다. 미리 연락을 않은 건 분명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엇갈려도 어쩔 수 없다고도 미리 생각했다.
하지만 막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닉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중인 유신을 발견했다. 엇갈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눈앞에서 놓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소리쳐 이름을 부르고, 닉은 잠깐 후회했다. 자신이 온 것도 모를 텐데 큰 소리로 아무 데서나 이름까지 부르다니.
그러나 유신의 하얀 얼굴이 너무 창백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다 상관없어졌다. 닉은 저도 모르게 양팔을 크게 벌리고, 품에 들어오는 가냘픈 몸을 끌어안았다.
확실히 너무 말랐다. 몇 번 같이 밥 먹을 때는 잘 먹는 거 같던데, 뭐가 문제일까? 좀 더 영양가 있는 걸 먹여야 할까?
유신이 제 앞에서는 평소에 비하면 극적으로 잘 먹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괜찮아?”
“안 괜찮았는데, 점점 괜찮아지는 거 같아요.”
닉의 질문에 유신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가만 보면 은근히 솔직했다. 안 괜찮은데 그렇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본인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종종 잘못 판단한다는 점이다.
지금 유신이 닉의 알파 페로몬의 영향으로 점점 안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둘 다 깨닫지 못한 채였다.
“밥 먹으러 갈까?”
말하고 닉은 조금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유신을 보고 있으니,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유신 또한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잊고 있던 맹렬한 허기가 돌아왔다. 그는 조금 수줍어하며 닉을 향해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유신이 제 품에서 진정하는 동안, 닉은 핸드폰으로 열심히 저녁 먹을 장소를 수배했다.
다행히 가브리엘과 바로 연락이 닿았다. 그를 통하면 나중에 좀 귀찮아질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제 친구를 위해 ‘가비스 오가닉 가든’의 본점에 있는 별실을 연결해 주었다. 일반 손님은 전혀 접근이 불가능해,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식사가 가능한 장소였다.
지난번에도 미슐랭 레스토랑 말고 차라리 이런 데서 만날 걸 그랬다고, 닉은 조금 반성했다. 당시엔 그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즐기게 해 주고 싶었던 게 컸지만.
“뭐 먹을까?”
친구의 가게지만 닉도 실제로 온 건 처음이었다. 몰래 방문하면 섭섭해할 테고, 말하고 가면 서비스를 마구 내어 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조만간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신 때문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잘 정리된 깔끔한 메뉴판만 봐도 관리가 잘되는 가게라는 것이 느껴졌다. 닉은 그중 눈에 띄는 메뉴 하나를 발견했다.
“여기 이런 것도 있다. 한국식 불고기가 올려진 라이스 볼.”
“흠, 아마 불고기덮밥인가 보네요.”
“요즘 한식이 유행이라 넣었나 봐. 이걸로 할래?”
“지금 너무 무거운 건 안 들어갈 거 같아서. 맑은 수프랑 아보카도 샐러드로 할게요.”
유신은 메인 요리 쪽은 거의 보지도 않고 메뉴판을 덮었다. 닉은 너무 양이 적지 않은가 생각했지만, 유신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 더 말을 얹지 않았다.
“그럼 나는 깔라마리 샐러드랑 이 불고기 라이스 볼을 먹을게.”
그러고 보면 유신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한 데가 있었다. 아까 닉과 붙어 있으면서 한결 나아졌지만,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으며 떨어지게 되자 그 효과가 조금 떨어졌다.
유신의 컨디션 난조에는 호르몬제에 수면 부족과 식사량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 중이었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이런 상태에 익숙해 딱히 문제가 뭔지도 몰랐다.
사실 닉은 오늘 진료 중 유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하지만 바로 묻지 않고 좀 더 분위기를 살피기로 했는데, 그의 평소 성격으로 보면 정말로 큰 인내심을 발휘한 거였다.
초조한 닉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음식은 금방 나왔다. 그에게는 깔라마리 샐러드, 유신에게는 맑은 야채 수프였다.
“괜찮아?”
“맛있어요.”
유신이 힘겹게 수프를 삼키는 것을 보고 닉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거운 게 안 들어갈 것 같다는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유신의 기준으로는 여태까지 닉과 함께 있을 때가 극적으로 잘 먹은 거였고, 오늘은 그래도 평소보다 나은 편이었다. 그는 제가 닉을 걱정시키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실제 수프는 맛이 좋았다. 닉의 앞에 있는 샐러드도 신선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나름 열심히 스푼을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간만에 커피가 아닌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아.”
그러다 실수로 스웨터에 조금 흘리고 말았다. 냅킨을 찾는 유신을 향해 닉이 제 손수건을 건넸다.
“닦아.”
“감사합니다.”
유신은 별생각 없이 받아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그 위로 고개를 박았다.
“유신?”
닉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유신은 그저 깊게 숨을 들이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모르는 듯했지만, 손수건에는 본인의 알파 페로몬이 배어 있었다. 깊게 들이마실 때마다 유신은 몸 안쪽의 초조함이 진정되는 듯했다.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유신의 안색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표정도 한결 편안했다.
“니카, 이거 나중에 돌려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가져도 돼. 아니, 그냥 가져!”
“아니에요. 다음에 꼭 돌려 드릴게요.”
말과 달리 유신은 아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손수건을 양손으로 꼬옥 쥐고 있었다.
보통 자신의 페로몬은 느끼지 못한다. 닉은 단순하게 저 손수건에 뭐가 있는 건가 궁금해했다.
메인 요리는 조금 빨리 도착했다. 닉은 마지막 남은 깔라마리 조각을 야채에 곁들여 한입에 삼켰다.
“어떻게, 식사는 마음에 드십니까?”
하지만 접시를 손에 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눈을 흘기고 말았다.
갈색 머리, 녹갈색의 헤이즐 아이에 보기 좋게 그은 피부.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자신만만함으로 가득 찬 미끈하게 잘생긴 얼굴을 한 저 알파는.
“이…….”
“저희 레스토랑은 고객 한 분 한 분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이 그런 닉을 향해 잠자코 있으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좀 귀찮아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식사 중에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무려 직접 나서서 서빙을 할 줄이야.
오늘 가브리엘은 무려 연보라색 맞춤 정장 차림이었다. 그나마 디자인이 점잖은 편이라 유니폼 같아 보이기도 해서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이긴 한가?
“고마워요. 정말 맛있어요. 아직 수프밖에 못 먹었지만요.”
유신은 아무런 의심 없이 가브리엘을 향해 방긋 웃었다. 물론 딱히 의심할 이유도 없었다.
당연히 직원에게 으레 보내는 예의상 미소였다. 하지만 저 녀석에게는 그것조차 아깝다고, 닉은 속으로 괜히 흥분했다. 무엇보다 유신의 저 사랑스럽고 상냥한 미소에 가브리엘이 살짝 감동한 듯해서 더 그랬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 중이다. 가브리엘 또한 진짜 직원이라도 되는 양, 천연덕스럽게 유신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보카도 샐러드 시키셨죠?”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후후, 그 정도야 서빙의 기본이죠.”
서빙의 기본은 무슨. 애초에 닉이 방금 깔라마리 샐러드를 먹었으니, 나머지 샐러드는 유신의 몫이라는 것을 모르기가 더 힘들지. 닉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제 친구를 쏘아보았다.
“이쪽 분은 불고기 라이스 볼이었죠?”
그때 갑자기 가브리엘이 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려 닉은 흠칫했다. 하지만 간신히 웃음을 참는 얼굴로, 자신의 앞에 음식을 내려놓는 걸 보니 역시 얄미웠다.
“그럼 서빙도 끝났으니, 어서 돌아가시죠.”
“안 돼요. 모름지기 훌륭한 식당 직원이라면 고객 한 분 한 분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나 더 필요한 부분은 없으시고요? 불편한 점이 있다거나.”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어서 나가시면 됩니다.”
가브리엘의 깐죽거림에 그만 분위기를 타는 바람에 닉은 마음의 소리가 가감 없이 튀어나와 버렸다. 다행히 유신은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 가게의 아보카도 샐러드는 양상추에 얇게 썬 아보카도를 올리고, 수란과 다진 토마토 따위를 토핑한 요리였다. 불고기 라이스 볼은 역시나 불고기덮밥이 맞았다.
“영광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마지막까지 연극적인 대사를 읊는 것을 잊지 않으며, 가브리엘이 겨우 사라졌다.
닉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대로 옆에 앉아 같이 먹자고 하지나 않을까 계속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그의 성격치고는 얌전히 돌아간 편이라, 이후가 더 걱정이긴 했다. 분명 한동안 이걸로 엄청나게 놀려 먹을 것이 뻔했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 메시지를 폭풍처럼 보낼 텐데, 다 씹어야겠다고 닉은 조용히 마음을 정했다.
“역시 신선하네요.”
유신이 샐러드를 한 입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네, 아까 닉 앞에 있던 깔라마리 샐러드도 야채가 진짜 싱싱해 보인다고 생각했거든요. 이것도 진짜 싱싱해요.”
그제야 닉은 유신이 가브리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점은 좀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배가 차기 시작하며 기분이 꽤 나아진 유신은 아까보다는 확실히 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닉은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들떠, 상관없는 건 잠시 다 잊기로 했다.
“맛있다니 다행이야.”
그렇게 둘 다 메인을 반쯤 먹었을 때였다. 유신이 갑자기 몸을 기우뚱했다.
“실은 원래라면 나 오늘이 두 번째 히트 중이에요.”
“그래? 벌써 그런 시기가…… 잠깐, 지금 괜찮은 거야, 유신?”
의미를 깨닫고 놀라서 당황하는 닉의 반응에, 유신도 그가 왜 그런지를 생각하고 조금 뺨을 붉혔다.
“기말고사 때문에 히트를 일주일 미뤘어요.”
닉은 이제야 유신이 오늘 그 일 때문에 센터의 병원에 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굳이 병원에 간 목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그나저나 벌써 두 번째 히트라니, 왜 좀 더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자신도 거기 맞춰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유신은 이제 남은 수란만 괜히 포크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제가 잘못했나요? 당신도 역시 하루라도 빨리 아기를 보고 싶겠죠?”
“아냐, 학생이면 기말고사가 중요하지. 그리고 일주일 정도인데, 뭘.”
“이번이 마지막 인공 수정 기회라서 신경 쓰여요. 다음번부터는 시험관 시술 들어간다고 해서. 아, 죄송해요. 이런 세세한 건 관심 없으실 텐데.”
“아냐, 나도 설명은 들어서 알고 있어.”
실은 관심 없어서 대충 듣는 둥 마는 둥 했었다. 막상 당사자가 어떤 기분일지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유신은 이번에 실패하면 시험관도 그렇지만, 복학 문제도 걸려 있어서 꽤나 심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닉에게 그렇게 세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매튜 선생님이 그러는데, 다음 히트는 딱 일주일 뒤 다음 주 목요일에 시작할 거래요.”
“그 사람이 네 주치의야? 닥터 매튜?”
“매튜 선생님, 그러니까 닥터 매튜 테일러는 제 주치의랄까, 담당 선생님이세요. 오메가인 할아버지 의사죠.”
유신의 설명에 닉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나이 많은 의사가 오메가인데, 이름이 매튜 테일러야?”
“네, 센터에서 같은 오메가라고 날 위해 일부러 연결해 줬다고 들었어요. 왜 그래요?”
“오메가 의사인 매튜 테일러면 내가 아는 사람일 거야. 애초에 오메가 의사 자체가 흔치 않기도 하고.”
그 이야기에는 유신도 놀랐다.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렇지.”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닉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생각하던 그 ‘일’에 대한 적임자를 찾은 듯했다.
***
밤늦게 핸드폰이 시끄러웠다.
누구지? 닥터 매튜 테일러는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가, 몇 년 만에 보는 이름에 황급히 통화 버튼부터 눌렀다.
“니콜라이?!”
-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로군.
핸드폰에서 들려온 음성은 흠잡을 데 없는 영국 상류층 억양이었다. 영국 토박이보다도 더 완벽했다. 오히려 진짜 토박이는 어느 정도는 나고 자란 지역의 사투리가 섞이기 마련이다.
“그렇군. 지금은 닉 메드였던가요?”
매튜의 말에 그,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메드베데프. 아니, 닉 메드는 낮게 웃었다.
- 닥터 테일러, 당신이라면 날 니콜라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는지를 생각해 보면, 당신은 그 이름이 익숙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 당신이 더 이상 메드베데프가의 어린 도련님이 아니듯, 저도 지금은 칭송받는 의대 교수가 아니니까요. 지금 저는 뒷방의 늙은 의사에 불과하고, 당신은 전 세계에서 명성이 높은 영화 스타죠. 바뀐 관계만큼, 지금도 나름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매튜는 핸드폰을 고쳐 쥐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말투도 어느샌가 점점 정중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닉의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예전 자신이 아직 런던에 살던 시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어쩌면 저 할리우드 스타는 자신이 예전처럼 어린아이를 대하듯 취급해 주길 원하는지도 모른다. 잠시 그런 생각이 매튜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것까진 닉의 이기심이다.
벌써 세기 힘들 정도로 세월이 흘렀고, 그가 어떻게 추억하느냐와 별개로 애초에 당시에도 자신들의 관계는 그렇게 대등하지 않았다. 지금 주고받는 말투가 그러하듯.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당신이 나에게 연락할 정도면 매우 특별한 이유가 있을 텐데. 지금 제가 어디서 일하는지는 이미 조사가 끝났을 거고.”
이어진 잠깐의 침묵은 동의와 같은 의미였다.
- 닥터 테일러, 난 내 러트 주기를 조정하고 싶어.
“러트 주기를요?”
- 다음 주 이날로.
문득 매튜는 오늘 낮 코스모 센터에서 만났던 환자를 떠올렸다.
검은 머리에 어두운 눈동자와 창백한 얼굴을 한, 아름다운 아시아인 남자 우성 오메가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의 히트 예정일이 바로 다음 주 같은 날이었던 것이다.
그 오메가는 임신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상대 알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다. 아마 꽤나 거물의 대리모가 아닐까 대충 짐작만 하는 중이었다. 오메가의 스펙으로 보아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본인은 자신의 가치를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지만.
그는 대단히 사랑스럽고, 묘하게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원래 우성 오메가라는 존재가 그런 경향이 있긴 했다. 워낙 희귀하다 보니 매튜도 의사로 근무하며 만난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이 오메가가 그런 우성 오메가들 중에서도 확 두드러지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고 보면 어린 니콜라이와도 닮았다.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어딘가 사라져 버릴 듯 가련했더랬다. 그러니까 벌써…… 근 20년 전의 일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요?”
- 내 오메가의 히트가 그날이야.
닉의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매튜는 상대인 오메가는 자신이 그의 오메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열어 두었다.
알파들은 꽤 자주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곤 했다. 만약 전화가 아니라 직접 만난 거라면, 매튜 또한 바로 휩쓸려 버렸을 것이다. 특히나 닉은 우성 알파기 때문에 이런 면에 있어서 한층 더 강력했다.
우성 오메가는 상대를 홀려 시킨 대로 하고 싶어지게 만들고, 우성 알파는 상대를 압박하는 것으로 굴복시켜 제 뜻에 따르게 했다. 하지만 대부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만한 상황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해, 실제로 그런 상황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생존에 문제가 생기거나, 혹은 정말로 강하게 원하지 않는 한은.
매튜는 문득 닉이 지금 이 상황을 ‘의도’했는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리 행동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만약 의도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라면, 그만큼 상대 오메가에게 홀렸기 때문이리라.
어렵게 돌려 말했지만, 결국 다시 말해 사랑에 푹 빠졌단 소리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선 안 되겠지요?”
매튜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 추가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군.
두 사람은 다시 침묵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교환했다. 어느 이상으로 상대에게 신뢰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이런 방식이 더 익숙했다.
잠깐의 의논을 거쳐, 매튜는 다음 날 오전 일찍 닉의 펜트하우스를 방문하기로 했다. 닉이 나서서 센터로 가겠다 했지만, 매튜가 적극 거절했다.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르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 그의 성격에 맞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닉이 당당하게 혼자 센터를 방문했다가, 자신이 담당 중인 그 우성 오메가와 직접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매튜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닉이 그 오메가의 계약 상대라는 사실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럼, 내일 오전에, 닥터 테일러.”
그렇게 매튜와 통화를 끝내고, 닉은 들고 있던 유신에 대한 파일을 소파로 던져 버렸다.
처음에는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채 잊었던 파일이지만, 지금은 닳도록 보고 또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유신의 예전 상대들을 맹렬히 질투하고, 이후 생길 자신과 그 사이의 아이(들)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솔직히 매튜에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닉은 제 행동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조금은 의구심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의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이제 와서 무를 생각은 절대 없다는 점이었다.
***
좁은 거실은 텔레비전과 소파 사이에 요가 매트를 하나 깔면 빼곡하게 찼다. 얼마 전 설치한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밀리는 매년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했다. 같이 살게 되고 첫 연말, 그는 유신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자기 돈으로 트리와 장식을 사 왔다. 그리고 매년 장식을 조금씩 업데이트하기까지 했다.
유신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해도 그만, 안 해도 상관없었다. 밀리가 트리에 진심인 부분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맞을 때면 그를 도와 같이 트리를 설치하기도 했다.
지금 유신은 오늘 해야 하는 운동 중이었다. 그에게는 일주일 단위로 매일 소화하는 운동 루틴이 있었다. 하루에 적어도 2시간 이상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유신이 그렇게 거실 요가 위에서 뻘뻘 땀을 흘리고 있으면, 밀리는 항상 저보다 운동을 많이 하는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주말에 한 시간씩 조깅하러 가는 것도 힘든 그였다.
무엇보다 다녀오면서 항상 크림이 듬뿍 든 커피를 사 마시는 덕에, 운동을 할 때마다 더 살이 찌는 듯하다는 점이 제일 큰 불만이었다. 커피를 적어도 시럽을 넣지 않은 라떼로 바꿔 보라고 유신은 진지하게 제안했지만, 밀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했다.
정작 유신에게 매일 하루 2시간의 운동은 딱히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현역으로 춤추던 시절에는 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몸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평균적으로 하루 8에서 10시간 정도였다.
물론 내내 춤을 춘 건 아니고, 체력을 위한 유산소 운동이나 기초 근력 운동도 모두 포함한 시간이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취미 레벨이면 몰라도, 적어도 춤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춤만 춰서는 원하는 체형을 유지할 수도, 원하는 동작을 완성할 수도 없었다.
기초 운동은 지루했지만, 춤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춤추는 자체는 항상 즐거웠기에, 동작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힘든 적은 있어도 연습에 가기 싫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콩쿠르 직전이나 발표회 시즌 같은 때는 잠자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충분한 휴식도 댄서에게는 의무 사항이라고, 발레 선생님께 눈물이 나오도록 꾸지람을 듣고 자는 시간 정도는 챙기게 되긴 했지만.
힘과 체력은 어딜 가도 상위권이라고 자신했다. 다른 힘쓰는 운동을 했어도 충분히 통했을 거라는 평가도 있었다. 사실 지금도 힘이나 체력은 평균보다 뛰어났다. 아니었다면 이렇게 못 먹고 맨날 무리하면서 멀쩡히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을 테지.
‘자기야, 다시 무용을 시작해 보면 어때? 가능할 거 같은데.’
가끔 밀리는 유신에게 이제 다시 춤출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는 했다. 유신도 안 해 본 생각은 아니었고, 조금씩 시도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한번 완전히 그만둔 그 업계에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은, 유신에게 있어 마냥 아득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좋았다. 매일같이 운동하지 않으면 사고로 다친 부분이 안 좋아진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은 그냥 몸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대놓고 묻는다면 절대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무엇보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요즘은 그조차 쉽지 않기는 했지만, 멍하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기말고사는 이제 화요일인 내일, 단 한 과목만이 남았다. 그러고 나면 정말로 끝이었다. 히트 예정일은 목요일이었다.
지금 유신은 온몸으로 히트가 직전이라는 느낌을 받는 중이었다. 진짜 히트를 겪은 뒤에는 이 정도는 말 그대로 ‘느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 본인의 페로몬은 느낄 수 없는 만큼, 되레 더 불안해 향기 패치와 스프레이를 엄청나게 사용 중이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같이 사는 밀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미처 생각지 못한 채였다.
지금 밀리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얼핏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편의상 식탁으로 공간을 나눠 한쪽을 거실, 한쪽을 부엌으로 부르고 있을 뿐, 원래는 그냥 한 공간이었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 사이 요가 매트를 펼 수 있을 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를 부엌과 식당으로 쓴다고 생각하면 정확했다.
실은 유신은 이번 주에 시작하는 히트에 대해 밀리에게 아직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상태였다.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 한 쪽에 가까웠다.
문득 밀리가 자신을 향해 웃어, 유신도 마주 웃었다. 밀리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 자기야.”
“응.”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물어봐.”
유신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매트 위에서 자세를 바로 했다. 밀리도 작정한 듯 옆으로 왔다.
“자기 혹시 요새 억제제 안 먹어? 조만간 또 히트 와?”
밀리는 정곡을 찔러 왔다. 처음에는 적당히 둘러대고 넘기려던 유신이었지만, 자신을 곧게 쳐다보는 동그란 눈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어, 밀리?”
“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티가 났어?”
“엄청. 내가 베타라서 페로몬은 못 느끼는데도, 자기가 엄청나게 향기 패치에 집착하는 건 모를 수가 없더라. 계속 스프레이도 뿌리고.”
“그랬구나.”
유신은 뭔가 모를 창피함에 양손으로 괜히 얼굴을 쓸었다. 밀리가 좀 더 몸을 숙여서는, 그런 유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기야, 정말이지 대체 무슨 사정인 거야? 아직도 이야기 못 해?”
“정말 미안해, 밀리.”
물론 유신은 말할 수 없었다. 밀리는 알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유신. 지금 이 일이 닉 메드와 관련이 있어, 없어?”
그거야말로 유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고 동요하는 표정까지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밀리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몸을 굳혔다.
“나 지금 엄청 엄청 엄청 짚이는 게 하나 있는데. 설마 그건 아니겠지?”
“제발 네가 잘못 추측했기를 빌어.”
“말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혹시 중간고사 끝나고, 네가 그, 보드카 때문에, 충동적으로 신청했던.”
곤란하게도 밀리는 원래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아무 반박도 못 하는 유신의 표정이 바로 대답이었다. 밀리가 흥분해 버럭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대신 흥분하는 하우스메이트를 향해, 유신은 곤란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정해, 밀리.”
“하, 진정? 지금 네가 그런 말 할 때야? 그때 바로 취소한 거 아니었어?”
“분명히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그래, 이제 알겠다. 이래서 자기가 지난번에 뜬금없이 닉 메드의 아기 어쩌고 했던 거구나. 요새 들어서 갑자기 돈 이야기도 덜 하게 됐고.”
“계약금은 정말 꼭 필요한 데다 아주 조금만 썼어.”
유신의 설명에 밀리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안 들은 거야, 안 들은 거. 애인 한 명 사귄 적 없던 내 하우스메이트가 지금 대리모 센터와 계약을 했다니! 자기는 항상 너무 물러. 그럼 안 된다고. 게다가 전후 상황을 보아하니 상대방이 바로 그 닉 메드인 거 같은데, 진짜야?”
“일단은.”
“세상에나, 세상에!”
밀리는 다시 흥분했다. 반대로 상대의 그런 맹렬한 반응에 유신은 오히려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대리모니까, 진짜 섹스하는 건 아냐.”
“웃기고 있네. 닉 메드가 자길 보는 눈이 완전히 녹아내리던데. 난 분명 둘이 사귀고 있는 줄.”
“에이, 아니야. 니카 같은 할리우드 스타가 나 같은 일반인이랑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둘이 왜 계속 만나는데?”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친해지면, 아기가 잘 생긴대.”
“웃기고 있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솔직히 이야기해 봐. 당장 지난번 네 히트 때 둘이서 섹스한 거 아냐?”
“안 했어. 인공 수정은 섹스가 아니고, 특수한 기구로 하는 거야.”
그래서 직접 제 손으로 닉의 정자를 몸에 넣었다. 결국 임신은 실패했지만.
밀리는 지금 제 눈앞에서 유신의 뺨이 천천히 붉어지는 것을 의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곧 둘이 정말로 섹스를 했다면 저 정도 반응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둘이 섹스 안 했다는 말은 (믿기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사실인 듯했다.
“그건 내 친구가 아직 사회적으로 섹스 미경험자라는 소리 같은데.”
“사회적인 게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내가 경험이 없는 건 맞아.”
밀리가 천천히 유신을 살폈다.
“자기야, 혹시 억지로 하는 거면,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
“억지로 아냐.”
유신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신음하듯 덧붙였다.
“실은 그 점이 제일 문제야.”
그의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와 우연처럼 마주쳤을 때도, 그와 키스를 했을 때도. 억지 따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 쪽에서 나서서 원하듯 군 적이 대부분이었지.
“자기야, 그 할리우드 스타가 그렇게 좋아? 전에 왜 좋냐고 물어봤을 때, 다른 이유가 아니고 그냥 얼굴 때문에 좋다며.”
“맞아. 너무 잘생겼어.”
“어후, 그렇게 좋은지.”
대답하는 유신의 입가가 다시 미소를 띠는 것에 밀리는 이제 포기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 봐, 유신. 자기 춤 그만둔 거, 닉 메드가 영화계로 가 버린 거랑 관련 있지? 하려면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던 거 아냐? 지금도 이렇게 매일같이 운동하잖아.”
“아냐.”
“정말로?”
밀리의 질문에 유신은 바로 부정했다. 하지만 말하면서 순간 본인도 조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아냐. 아닐 거라고 생각해.”
“진짜 몰라? 네게 그런 목적으로 접근한 알파는 엄청 많지만, 네가 그 사람한테 하듯이 반응한 건 처음이라고.”
“으음.”
하지만 유신은 밀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박일 뿐이다.
어느 정도는 밀리가 예상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가, 약간 표정을 밝게 바꾸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네 다음 히트 예정일이 언젠데?”
“일단 이번 주 목요일.”
“이브 전날이잖아! 며칠 남지도 않았어.”
“그렇구나. 벌써 곧 크리스마스야.”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이번 주 토요일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다 보니, 달력을 빤히 보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 그때 여행 다녀올게, 자기야.”
결심한 듯한 밀리의 선언에 유신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
“안 그래도 계속 여행 가고 싶었으니까, 그냥 겸사 다녀올게. 어차피 회사도 크리스마스 연말 휴가인 데다, 너 히트 때 내가 집에 있으면 불편할 거잖아. 억제제 끊고 두 번째 히트면, 하루로 안 끝날 거고.”
밀리의 말대로 이번 히트는 분명 지난번처럼 하루로 끝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크리스마스 시즌에 예약도 없이 갑자기 여행이라니, 티켓을 구하는 것부터 쉽지 않을 터였다. 밀리는 부모하고도 사이가 안 좋아 집에 갈 수도 없을 텐데.
안 그래도 이 문제 때문에 밀리에게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지난달 히트 때처럼 밀리에게 집을 비워 달라고 부탁할지, 따로 숙소를 잡을지를 정하지 못했던 거였다.
집에서 보내는 쪽이 익숙한 장소라 편했지만, 밀리에게 더 부탁하기는 너무 미안했다. 그의 말대로 이번 히트는 하루로 끝날 리 없었고, 그렇다고 상세한 사정을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너무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일단 기말이 끝날 때까지로 미뤄 둔 쪽에 가까웠다. 그러고 나면 너무 늦어질 거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도저히 결정을 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밀리가 먼저 혼자서 죄다 눈치채고 말았지만.
닉은 계속 자기한테 맡겨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쁜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신경 쓰게 하기도 그랬다. 무엇보다 그날 뭘 할지를 생각하면,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고 싶기도 했다. 정작 그쪽에서 뭘 계획하는 중인지 유신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할 수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아냐, 나 숙소를 구했어.”
유신은 엉겁결에 거짓말부터 했다. 더 이상 밀리를 신경 쓰게 하는 것도 미안한 노릇이었고, 숙소야 지금부터 구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꼭 거짓말도 아니다.
“알았어.”
밀리는 영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유신을 살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정신 승리를 하면서도, 유신은 괜히 찔려 슬쩍 그 시선을 피했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없도록 할게. 너무 걱정 마, 밀리.”
“뭐, 믿기진 않지만. 그래도 문제 되면 바로 이야기하기다.”
“응.”
유신의 대답과 상관없이 밀리는 나름대로 도움을 줄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그게 미안해서라도 유신은 친구가 신경 쓸 일을 더는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려면 히트를 보낼 숙소부터 구하는 게 먼저였다. 유신은 밀리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급히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 절대 빼먹지 않는 운동 루틴조차 잠시 잊은 채였다.
그래도 들어오기 직전, 밀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걱정 말라고 대답해 주는 그가 유신은 괜히 든든했다.
“자, 어서 내가 히트를 보낼 숙소부터 찾자.”
유신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노트북부터 켰다.
방문 안쪽으로 여전히 닉이 선물한 겨우살이 부케가 걸려 있었다. 볼 때마다 그날의 키스가 떠올라 뺨을 붉히곤 했지만, 계속 보고 있다 보니 그래도 많이 익숙해졌다.
침대 머리맡에는 지난번에 닉이 떨어트리고 간 비니와 그가 이번에 빌려준 손수건이 잘 정리되어 놓였다. 그 반대편에는 새로운 닉 메드의 포스터가 추가로 걸려 있었다.
원래는 이전 포스터를 떼고 그 자리에 붙일 생각이었는데, 받고 보니 그냥 맞은편에 붙이는 게 나아 보였다. 이번에 새로 개봉할 영화 포스터로,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셔츠를 입은 닉의 얼굴 클로즈업이 멋있었다. 머리를 지금보다 짧게 잘랐는데, 그건 그것대로 얼굴이 더 잘 보여서 좋았다.
“잘생겼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유신은 새삼 포스터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직 덜 익숙해진 포스터라 그런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잠시 흐물흐물해지곤 하는 것이다.
마침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아, 니카가 보낸 메시지다.”
☜ 유신, 내일 시험 끝나지? 저녁에 혹시 시간 괜찮아?
☜ 나도 스케줄이 저녁에 두세 시간 정도 뜨는데, 너만 괜찮으면 만나고 싶어.
☜ 만약 힘들다면 짧게라도.
몰랐는데 운동하는 사이 몇 개나 보낸 듯했다. 마지막 줄이 방금 도착한 메시지였다.
☜ 얼굴 보여 줘. 보고 싶다.
다시 말해, 시험 끝났으면 얼굴 보자는 이야기였다. 유신은 핸드폰을 든 채 침대로 몸을 묻고는, 눈가를 붉힌 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아, 더 좋아지게 만들면 어떻게 해.”
당연히 곧 보낼 답장은 ‘만나요’였다.
***
닉은 벤치에 앉은 채 유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지난번 유신과 산책했던 바로 그 공원이었다.
한쪽으로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고, 회전목마가 돌고 있었다. 이미 깜깜해진 저녁 시간이지만, 아이스 링크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즐기는 중이었다. 아마 밤 10시까지 운영하던가?
저기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유신에게 준 겨우살이의 미니 부케를 샀었다. 그리고 그 안쪽 오솔길에서 그와 키스를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때의 간질간질한 기억을 떠올리고, 닉은 괜히 쑥스러워서 손으로 뺨을 긁었다.
오늘 그는 온통 검은색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사실 방금까지 스케줄을 소화하다, 얼굴만 겨우 씻고 온 참이었다. 세팅한 머리 위로 지난번에도 썼던 검은색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촬영 의상이던 디자이너 브랜드의 난해한 셔츠와 바지 위에는 검은색 롱 패딩을 껴입었다.
유신에게는 시간이 많은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못 와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바쁜 와중이었다. 새로 찍는 영화가 벌써 작업을 시작한 데다, 곧 개봉할 영화도 홍보를 준비 중이었다.
오늘도 새 영화 관련 테스트 촬영을 겨우 끝냈고, 좀 있다가는 개봉 예정 영화를 위한 홍보 영상 촬영이 잡혀 있었다.
새 영화의 실제 촬영까진 아직 제법 남았지만, 벌써 테스트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스톤버그 감독은 닉을 캐스팅한 것이 너무 흡족해 혼자 뉴욕까지 날아와 닉과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 의상이 난해한 이유도 테스트로 이리저리 이미지를 맞추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개봉 예정작은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로, 닉은 바다와 관련 있는 특수 능력을 소유한 주인공 캐릭터를 맡았다. 내부 시사회 반응도 좋았고, 이래저래 기대작이라 홍보 스케일도 컸다. 특히나 제임스 눌란 감독은 닉이 현재 뉴욕에서 지낸다는 소식에, 평소 못 했던 많은 것들이 가능하겠다며 즐거워했다.
평소라면 두 감독들의 의욕 넘치는 행보를 닉도 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딱히 반갑지 않았다. 하다못해 해는 바뀌고 시작했으면 싶었다. 그렇다고 주어진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주말로 다가온 크리스마스에는 일을 못 한다고 못을 박아 둔 상태였다. 전화해도 받지 않을 거라고 선언해 두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두 감독들도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만 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만약 닉이 무슨 생각인지를 알았더라면, 감독들이 아니라 아이잭이 제일 먼저 나서서 그를 뜯어말렸을 것이다.
물론 닉은 당장 닥칠 때까지 아무에게도 제 계획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의 계획에 대해 짐작 가능할 만한 사람은 닥터 매튜 테일러뿐이었지만, 그는 반대로 이쪽에 접점이 없었다.
“후우.”
닉은 핸드폰으로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유신이 올 때가 되었다.
벌써 12월도 하순이라, 날씨는 부쩍 쌀쌀해져 있었다. 하지만 패딩까지 입고 있으니 하나도 춥지 않았다. 닉이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들떠서 그런지도 몰랐다.
솔직히 방금까지 스케줄을 소화하다 온 참이라 아직 좀 멍했다. 한창 연기에 빠져 있다, 아직 현실에 다 못 내려온 기분이랄까. 그 와중에 늦고 싶지 않아 서두르다가, 오히려 조금 일찍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유신을 기다리는 이 시간조차 즐거웠다.
닉의 옆에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든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커피는 식지 않도록 일부러 보온 기능이 있는 텀블러에 담았다. 자신이 산 거면 좋겠지만, 올가가 사다 준 거였다.
그녀는 준비성이 좋았다. 텀블러도 그녀가 떠올린 세심한 배려였다.
마음 같아서는 식당에 가서 근사하게 한 끼 먹고 싶었지만, 오늘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건 안 되지. 닉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하려고 마음먹은 일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한쪽에 높이 솟은 트리를 향했다. 그 옆으로 멀리 보이는 회전목마까지. 분명 지난번에 유신은 저걸 타고 싶어 했다.
지난번 병원에서 만났을 때, 유신이 불안하고 우울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히트가 오기 전에, 무조건 들뜨게 해 주고 싶었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는 기분 전환에 적격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무리를 해서라도 오늘 보자고 했던 거다.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니 딱 적당했다.
“니카!”
드디어 기다리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닉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신을 향해 예술 작품 같은 미소를 보냈다.
그는 늘 입는 체크무늬 코트 위에 날이 추웠는지 주황색 목도리와 털모자를 추가했다. 부드러운 앞머리가 헝클어진 아래, 별을 박은 듯한 눈동자는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벤치에 앉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가 주변의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여태껏 닉이 계속 유신을 찾아갔던 것과 반대로 처음으로 유신 쪽에서 닉을 찾아온 거였다.
“시험은 잘 봤어?”
“그냥, 그냥요.”
닉의 질문에 유신은 이야기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당연한 듯 제 옆으로 앉는 그에게 닉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건넸다.
“저녁 안 먹었지?”
“네, 감사합니다.”
“식당까지 갈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준비해 왔어.”
“역시 바쁜데 나 때문에 일부러 나온 거.”
“아냐, 내가 문자에서도 말했지? 이렇게라도 얼굴이 보고 싶었어.”
닉의 열렬한 표현에, 아닌 척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는 유신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오늘 드디어 유신은 기말고사가 끝이 났다. 그리고 이틀 후 목요일이면, 두 번째 히트가 시작될 터였다. 당장 내일부터 가능한 외출은 피하라는 것이 의사들의 의견이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는 닉의 말도 맞았다.
내일은 인공 수정을 위해 코스모 센터로부터 특별 배송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닉의 정자가 든 전용 케이스였다. 하지만 유신은 거기에 대해서까지 굳이 닉에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텀블러에 들어 있어서 그런지, 커피가 아직 따뜻해요.”
“그렇지?”
닉은 올가에게 잘했다고 내심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무심하게 커피에 설탕을 들이붓는 그를 향해 유신이 물었다.
“근데 왜 홍차가 아니고, 커피예요?”
여기서 자신이 직접 산 게 아니라서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음, 샌드위치에는 커피라서?”
대신 닉은 유신의 모자를 귀까지 푹 눌러 씌웠다. 뺨을 훑는 손길에 유신의 뺨이 좀 더 붉어졌다.
“날씨가 상당히 추워졌어.”
“이번 토요일이 벌써 크리스마스잖아요.”
유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공원 한쪽의 커다란 트리를 향했다.
“우리 집에 작은 트리가 있다는 얘길 했던가요? 밀리가 만들었어요. 나도 거들긴 했지만요.”
“같이 사는 네 작은 친구 말하는 거지? 왠지 그런 게 어울리긴 하는군.”
“그죠? 손재주가 좋아서 그런가, 요리도 엄청 잘해요.”
트리라. 그러고 보면 닉의 펜트하우스에도 트리가 있었다. 한 달 전쯤 아이잭과 올가가 법석을 떨더니, 전문 업체에서 방문 설치를 하고 돌아갔다.
“지금 내가 지내는 집에도 멋진 트리가 있어.”
“아, 그 펜트하우스요?”
닉은 유신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나 했다가, 곧 그가 자신의 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여태껏 의외로 이런 상황이 많았는데도, 지금까지는 자신이 예사로 넘기는 바람에 미처 깨닫지 못한 것뿐이었다.
“거의 거실 천장에 닿을 만큼 커. 그 거실이 2층까지 트여 있거든.”
“우와!”
유신은 어떻게 만들었냐며 눈을 빛냈다.
사실 닉은 트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주문조차 아이잭과 올가에게 맡겨 두었을 뿐이다. 그는 슬쩍 말을 돌렸다.
“좀 걸을까?”
마침 샌드위치도 다 먹은 참이라, 닉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많은 쪽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 쓰자, 유신은 수상해 보인다고 재밌어했다.
닉은 그가 자신과 같이 걷도록 유도했다. 물론 발길 닿는 방향은 회전목마 쪽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요 며칠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봐도 스케줄 말고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단 말이지.’
아이잭은 요새 닉에 대해서 조금 불만이 있었다. 물론 다른 데란 ‘유신’을 말한다.
정작 닉은 아직 일에 지장을 준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아이잭은 항상 제 일에 대해서 걱정도, 잔소리도 지나치게 많았다.
‘전 맘에 들어요. 사람이 어떻게 항상 일에만 신경 쓰며 살겠어요. 기계도 아니고.’
의외로 올가가 그런 닉을 적극 응원했다.
‘나중에 제가 아이잭한테 잘 이야기해 봐 드려요, 미스터 메드?’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맞아요. 어차피 그 사람은 당신을 못 이기니까요. 걱정 마세요.’
‘나도 알아, 올가.’
하지만 거만한 닉의 대꾸에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니키, 내가 보니까 그 오메가는 이미 너한테 푹 빠진 게 분명하던데. 지난번에 우리 가게에 왔을 때 말야.’
가브리엘의 이야기는 닉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정말 그렇게 보였어?’
‘응! 나같이 매력적인 알파가 옆에 왔다 갔다 해도, 눈길 하나 안 주고 너만 보고 있었잖아.’
‘음, 그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고마워.’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뭔가 좀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닉은 제 친우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모두에게 러트에 대해서는 비밀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지금 긍정적인 가브리엘조차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몰랐다. 당연히 유신에게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유신, 언제 한번 펜트하우스로 트리 보러 와.”
그래도 아이잭이 알아서 트리를 설치해 준 덕에 유신에게 이런 이야기도 꺼낼 수 있다. 닉은 최근 들어 잔소리가 늘어난 그에게 조금은 감사한 마음을 가져 보기로 했다.
트리를 보러 오라는 그 제안에 대해 유신은 싫지 않은 눈치였지만, 역시나 쉽게 ‘네’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다음번에 SNS에도 올려 주세요.”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네. 나중에 생각나면 올려 줄게.”
상관없다. 어차피 유신은 곧 그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더라도 닉이 그렇게 만들 예정이었다.
“네, 기대할게요.”
마침 둘은 회전목마 앞이었다.
“저거 타자!”
“아니에요.”
닉의 제안에 유신이 고개부터 저었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닉은 이번에는 그렇게 넘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넌 지난번에도 여기서 같은 대답을 했지. 그때는 정말 타기 싫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이제는 아닌 걸 알아.”
닉은 망설임 없이 두 장의 표를 샀다.
지난번과 달리 오늘 그는 지갑을 챙겨 왔고, 그 안에는 10불과 20불의 지폐들이 잔뜩 있었다. 덕분에 판매원에게 고액의 거스름돈을 기부하는 상황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표를 사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유신도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얌전히 줄의 맨 뒤로 가서 섰다. 의외로 대기가 있어서 잠시 기다려야 했다.
흥겨운 캐럴이 울려 퍼지고, 색 전구와 알록달록한 목마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저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들뜨는 공간이었다.
드디어 순서가 오고, 유신은 빨간색 안장을 얹은 갈색 말을 골랐다. 닉은 금색 안장의 흰색 말이었다.
갑자기 웃음을 참는 듯한 유신을 향해 닉이 물었다.
“왜?”
“백마 탄 왕자님이 온몸에 검은색을 둘렀다 싶어서.”
유신은 거기까지 말하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지금 닉으로 말하자면 온몸에 검은색을 두르고, 거기에 까만 모자까지 눌러쓴 차림새가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키도 크고 지나치게 비율이 좋아서 다른 의미로도 절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부스스한 앞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유신이 옆에 있으니, 날카로운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다. 갑자기 그냥 귀찮아서 대충 입은 걸로 보이게 된달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신도 평범한 외모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족과 친구, 혹은 연인과 각자의 행복에 차서 크리스마스 시즌의 저녁 시간을 즐기느라 바빴다.
실은 그런 사람들 중 닉과 유신도 포함이었다. 특히 유신은 오늘 기말고사도 끝난 참이니, 기분이 들뜨지 않기도 힘들었다.
“아, 재밌었다.”
회전목마에서 나오며 유신은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감탄을 흘렸다. 닉이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거 다행인걸.”
“니카, 당신은요?”
유신은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보내며, 제 어깨를 감싼 닉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나도 즐거웠어.”
“회전목마는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 타죠?”
“난 어릴 때도 안 탔어. 내 아버진 차라리 진짜 말을 타라는 주의였거든.”
농담이라고 여긴 듯 유신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작고 동그란 머리통이 제 어깨에 살짝 기댔다 떨어진다. 겨우 경계심이 사라진 고양이 같다고, 닉은 생각했다.
회전목마 옆으로 아이스 링크가 있었다. 유신은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봐요, 늦은 시간인데도 스케이트 타는 사람이 많아요.”
뉴욕의 겨울 시즌에는 스케이트가 명물이라, 시내에만 이런 아이스 링크가 여러 개 있었다. 대부분 입장료도 저렴하고, 스케이트도 대여해 줘서 초심자도 편하게 이용 가능했다. 물론 자기 스케이트가 있으면 가져와도 상관없었다. 특히 여기 아이스 링크는 스케이트 대여료는 받지만, 입장료는 무료였다.
닉은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을 보던 유신의 몸이 슬금슬금 리듬을 타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기본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도 잠깐 탈까?”
닉은 가볍게 제안했다. 확실히 회전목마 때 마음속 경계가 낮아져서인지 유신은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다. 대신 확신이 없는 듯 눈을 깜박였다.
“스케이트요.”
“내가 살던 동네는 추워서 겨울마다 집 근처에서 스케이트를 열심히 탔었지. 얼음 위에서 피루엣을 하듯 스핀을 돌면 꽤 재밌었어. 대여 스케이트로 쉽진 않을 테지만. 한창 탈 때는 공중 1회전도 가능했었는데.”
“아뇨, 저 타 본 적 없어서요.”
이건 닉이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래?”
“매년 겨울마다 집 근처에 링크가 생기긴 했는데, 춤추는데 다치면 안 된다고 절대 못 타게 해서 얼음 근처도 간 적 없어요.”
그 표정은 어딘가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좋아. 정했다.”
“아, 니카!?”
갑자기 닉이 손목을 잡아당겨 유신이 놀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스케이트 대여소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못 탄 스케이트를 오늘 타 보는 거야! 내가 가르쳐 주지.”
닉이 바로 사이즈를 물어 유신은 엉겁결에 제 신발 사이즈를 대답했다. 그는 능숙하게 스케이트 2개를 대여했다. 대여용 스케이트 두 개가 곧 그들의 앞에 놓였다.
“어머, 당신. 닉 메드랑 엄청 닮았네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요.”
대여소 직원의 이야기에 닉은 천연덕스럽게 윙크를 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직원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유신에게 애인이 잘생겨서 좋겠다는 눈빛만 보냈다. 유신은 괜히 뺨을 붉혔다.
스케이트는 대여가 가능했지만, 장갑은 무조건 사야 했다. 저렴한 것으로 가져다 놓아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초보자는 장갑은 있는 게 좋아. 위험할 수 있거든.”
“그렇군요.”
닉은 스케이트장 바로 앞 벤치에서 유신이 스케이트를 신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이즈는 괜찮아? 불편하지 않아?”
“괜찮은 거 같아요.”
“잠깐, 나가기 전에.”
빙판에 오르기 직전, 닉은 유신의 목도리와 모자를 고쳐 주었다. 모자는 좀 더 깊게 씌우고, 목도리도 턱이나 입가가 가려지도록 꽁꽁 감았다.
“너무 답답한 거 같은데요.”
“얼음 위는 추울 수 있으니까 미리 대비해야지.”
물론 핑계고 실은 꽁꽁 싸매서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 그의 얼굴을 보여 주기 싫은 게 컸다. 유신은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아무리 꽁꽁 싸매 놓는다 해도, 스케이트를 타다 보면 다시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신만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털모자를 쓴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뉴욕의 겨울은 쌀쌀해서 그런 모자가 보온용으로 딱 적당했다.
신고 있던 신발은 무료로 나눠 주는 봉지에 넣어서 등에 멨다. 유신은 그게 재밌다고 좋아했다. 닉은 즐거워하는 유신을 보는 것이 그저 좋았다.
“봐요, 니카! 저 혼자 얼음 위에 섰어요.”
“오, 잘하는데.”
원래 몸을 쓰는 데 익숙해서 그런지, 유신은 닉이 기본 요령을 알려 주자 금세 혼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닉은 자꾸 넘어지려는 그를 계속 잡아 주는 상황을 기대했기에 살짝 아쉽기도 했다.
“니카, 우리 스케이트 타고 저기 끝까지 한 번에, 앗!”
그때 갑자기 뒤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오던 고등학생들이 유신과 부딪혔다. 전적으로 그쪽에서 제대로 앞을 보지 않은 탓이었다. 유신은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닉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어차피 넘어지지도 않았고.”
정작 고등학생들은 제 쪽에서 잘못해서 부딪힌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짜증부터 냈다.
“아, 진짜! 잘 보고 다녀야…… 흡!!”
하지만 그들은 바로 쭈그러들었다. 닉이 험악한 기색으로 그들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한 것도, 손끝 하나 닿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성 알파 특유의 압도적 존재감이 그들을 세게 내리눌렀다. 아무리 베타여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니, 베타였기에 그 정도로 그쳤다. 만약 알파였다면 그대로 거기 주저앉아 오줌을 찔찔 지렸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들은 굽신거리며 사과를 했다.
“조심해.”
“아, 아, 아, 알겠습니다.”
“아, 아,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대로 그들은 허겁지겁 아예 링크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유신은 목도리를 다시 제대로 매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뭐예요? 벌써 가 버렸네요. 안 다쳤으니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려고 했더니.”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안 괜찮으니까. 조심해야지, 위험하게.”
유신은 웃으며 닉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 말도 맞아요. 사람도 많으니, 서로 조심해서 타야죠.”
닉이 불쾌한 이유는 단순히 위험해서가 아니었다. 유신에게서 풍기는 달착지근한 오메가 페로몬이 짙어지는 중이었다. 히트가 멀지 않아서인지, 자신이 그의 향에 예민해서 그런지는 불분명했다. 둘 다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지금 러트 직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한 채였다. 여하튼 저런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유신에게 실수라고 부딪히며 닿았다는 자체가 닉은 불쾌했다.
내 오메가에게 감히.
“어, 노래가 바뀌네요?”
유신의 말대로 갑자기 캐럴이 뚝 끊기더니,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앞으로 10분간 얼음 정비 시간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아, 뭐야. 지금 막 타기 시작했는데.”
“쉬고 다시 타면 되죠. 나 추워요. 우리 따뜻한 거 마셔요.”
둘은 끼고 있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빙판에서 나왔다. 닉은 유신에게 줄 핫초코를 사고, 유신의 제안으로 둘은 한 잔을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이잖아요.”
“그렇지.”
“신기하지 않아요? 벌써 2천 년도 더 전에 태어난 사람의 생일을 전 세계에서 축하해 준다는 거.”
“그런가?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어.”
“니카, 당신의 생일도 팬들이 잔뜩 축하해 주잖아요. 1월 1일 맞죠?”
원래 매년 이맘때쯤에는 자신도 소속사로 생일 선물이랑 편지를 보낸다며, 유신은 쑥스러워했다. 올해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깜박 잊어 미안하다며.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자신의 팬이었지. 좋아해 주는 것은 기쁘지만, 자꾸 저렇게 언급하면 뭔가 선을 긋는 것 같아 별로였다.
“유신, 네 생일은 10월 말이었지?”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파일에서 봤어. 대체 그 표정은 뭐야?”
“아니, 니카가 내 생일을 기억해 주다니 너무 영광이라.”
“아쉬워. 조금만 더 일찍 너와 만났어도 올해 생일부터 축하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다음번 생일엔 꼭!”
“다음번이라니, 아니에요. 말만으로도 고마운걸요.”
유신은 감격한 듯 고개를 저었다. 닉은 열이 오른 듯 상기된 유신의 얼굴과, 추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고, 천천히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살짝 내리뜬 눈 주위를 감싸고 있는 섬세한 검은 속눈썹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무언가를 기다리듯 유신의 작고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입술과 입술이 닿기 직전.
빠바바바, 밤!
다시 커다랗게 행진곡이 울렸다. 정비 시간이 끝난 거였다. 사람들이 일어나 우르르 링크로 몰려갔다.
유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닉의 손을 끌었다.
“우리도 링크로 돌아가요.”
“응.”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닉은 이번 키스는 날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일 거슬리는 부분은, 실패한 이 키스처럼 자신들의 관계도 약간씩 부족하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