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결혼 제0장(2부) (9/22)

2부 계약 결혼 제0장

“맞죠? 닉 메드와 그, 소문의.”

“틀림없어. 둘이 여긴 무슨 일이지?”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니까, 역시 데이트 아니겠어요?”

고오급 레스토랑은 수군거림까지 우아한가 보다. 유신은 입가에 떠오르는 쓴웃음을 억누르며,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하도 힐끔힐끔 쳐다봐서 머리에 구멍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들 체면 관리 중이라 그런지, 대놓고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찍고 싶다는 표정만은 한가득이었지만.

오늘은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기에 딱 적당한 날이었다.

클래식이 울려 퍼지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공간이었다. 실은 유신이 지난번 닉과 처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며, 나이프를 날려 버렸던 바로 그 레스토랑이었다.

장소는 같지만 묘하게 당시랑 분위기가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우선, 기억과 달리 배경에 흐르는 클래식이 라이브 공연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손님이 드문드문 있고 차분하던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만석에 한결 시끄러웠다. 죄다 외모가 번듯한 젊은 남녀였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 손님들은 나이대도 분위기도 훨씬 더 다양했다. 인상도 훨씬 더 까다롭고, 더 시끄럽기까지 했다.

유신은 지난번 자신이 들렀을 때가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정리된 분위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에 닉이 뭔가를 했었다는 사실도.

그래도 오늘은 지난번처럼 실수할 일은 없었다. 이 가게에 갈 거라고 올가가 미리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테이블 매너를 외우고 연습해 두었다. 실은 외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넣어 둔 대본 아닌 대본을 떠올리며, 유신은 심호흡을 했다. 몸에 딱 맞춘 옷이 살짝 불편했다.

지금 유신은 그야말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새로 붙은 스타일리스트가 솜씨를 제대로 발휘했다. 평소 그의 낡은 카디건에 익숙한 사람은 첫눈에 못 알아볼 정도다.

화사한 느낌의 밝은 회색의 양복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했다. 뿔테 안경도 벗었다. 도수가 그렇게 높지 않은 만큼 얼굴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옷차림도 바뀐 덕에 인상이 확 달라졌다.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기는 것은 닉의 제안이었는데, 덕분에 단정한 이마와 반듯한 눈썹이 잘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얼굴에서 가장 인상적인 크고 아름다운 눈도 자연스럽게 강조되었다.

유신은 눈이 약해서 콘택트렌즈를 끼지 못했다. 근시가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라 약간 시야가 흐릿해도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소리나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물론 닉이었다. 간만에 보는 얼굴은 피곤한지 살이 살짝 내렸다.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감싼 새하얀 남자는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아름답다 못해 유신에게는 마치 천상의 피조물처럼 보였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상대는 분명 일반인 우성 오메가라고.”

“눈에 띄는 미인이야.”

“역시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조합은.”

가뜩이나 둘 다 눈에 띄는 차림새에, 테이블조차 구석이 아니라 가게 한가운데였다. 거기다 유신의 옆에 보란 듯이 놓인 커다란 꽃다발까지. 마치 일부러 눈길을 끌려고 작정한 듯한 모양새였다.

그 꽃다발은 지난번 여기 왔던 날, 닉이 유신에게 주려고 했던 꽃다발만큼 터무니없이 크지는 않았다. 대신 유신과 잘 어울리도록 세심하게 디자인되어, 테이블 한쪽에 놓아두기만 해도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유샤.”

얼마 전부터 유신을 부르는 자기만의 애칭을 닉이 속삭였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유신도 슬슬 그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데 익숙해져 간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래에 깔린 연극적인 분위기가 영 어색했다.

“음료는 주스로 해야겠지? 와인을 마실 수는 없으니까.”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니카.”

마찬가지로 닉을 애칭으로 부르며, 유신은 평소와 다른 뻣뻣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대한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실은 완전히 긴장한 상태였다. 지금부터 닉이 무엇을 할지 알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수군거림이 자신의 행동이 어색해서가 아닐까 싶어 신경 쓰였다. 실은 그 웃는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라 그런 것을 본인만 몰랐다.

반대로 닉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저 유신이 평소 보는 그의 모습이 아닐 뿐이었다. 마치 무대에 오른 듯 뿜어내는 그의 지나친 존재감에 유신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실제로 이 모든 것이 연극이기는 했다. 본의 아니게 관객이 되어 버린 다른 손님들과 레스토랑 직원들이,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인데.”

그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닉이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주변이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유신은 그런 침묵이 머쓱했다.

그리고 닉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신음 같은 감탄이 주변의 여성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사실 남자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15캐럿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 다른 장식 없이 커다란 다이아몬드만 심플한 플래티늄 위에 올려져 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광채는 딱 봐도 범상치 않았다.

딱히 남녀 공용으로 보이는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과시를 위해서라면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얼마죠?’

처음 닉의 펜트하우스에서 저 반지를 보았을 때, 유신은 참지 못하고 가격을 묻고 말았다. 올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15캐럿 다이아몬드면 쓸 만한 건 보통 1.5밀리언 정도는 하죠.’

1.5밀리언, 150만 달러는 한화로 18억 원 정도이다. 거기다 ‘보통’이라는 건, 그 위가 있다는 의미다. 닉의 성격상 중간 정도 등급에 만족했을 리 없었다. 거기서 유신은 더 물어볼 의지를 상실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에서는 청혼 때, 서프라이즈로 약혼반지를 선물한다. 일반적인 직장인의 경우 보통 월급 3개월 치를 사용한다고 할 정도로 꽤나 비용을 들여, 보석이 크고 화려한 알반지를 고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결혼반지는 심플한 밴드 형태가 많았다.

남자 커플 사이에서는 약혼반지 없이 심플한 결혼반지로 청혼을 하기도 하지만, 순수하게 과시를 위해 커다란 알반지를 선물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아니면 주변에 요란하게 약혼을 소문내고 싶거나.

‘설마 저걸 끼고 다니라는 건 아니겠죠?’

반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유신을 향해 올가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폈다.

‘당연하죠. 특수한 상황인 만큼 평소에 끼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아, 다행이…….’

‘단, 중요한 시점에서는 두어 번 반지 낀 모습을 언론에 노출해야만 해요.’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유신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

최소 18억(아마도 실제 가격은 훨씬 더 높을 예정)을 손가락에 올려 두고 다니라니. 웃기지 마.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건만, 그 일이 진짜로 제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랑 결혼해 줘, 유샤.”

닉이 반지를 들고 유신의 손을 맞잡았다. 유신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기로 이미 정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뭐라 말하기에도 목이 막혀, 유신은 수줍은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너무 긴장해 딱히 어렵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직 음식 주문 전이었지만, 옆 테이블의 음식 냄새가 점점 더 거슬리던 참이었다.

하지만 닉이 유신에게 반지를 끼워 주는 순간, 주변은 다른 의미로 술렁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도 점잖은 척하며 곁눈으로 훑던 사람들이 대놓고 웅성댔다.

“어떻게 저런 실수를 하죠?”

“오른손?!”

닉이 유신의 ‘오른손’ 약지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 주었던 것이다.

주변이 죄다 놀라고 있는 와중에도, 정작 닉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유신을 보느라 정신없었다. 그리고 유신 쪽은.

“윽!”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손으로 입을 감쌌다. 그는 그대로 당황해 화장실로 급히 이동했다.

“우욱.”

가게에 온 것이 처음이 아니라서 화장실이 어딘지 알고 있어 다행이었다. 유신은 변기를 붙잡은 채 신음했다.

닉이 바로 뒤쫓아 갔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유신이 버릇처럼 화장실 칸을 착실히 잠가 둔 덕이었다. 물론 닉이 작정하고 문을 부수고자 했다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그도 오늘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유샤, 괜찮아? 구급차라도 불러?”

“괜찮…… 욱.”

다시 토기가 올라와 유신은 제대로 대답도 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비싼 레스토랑답게 화장실도 깨끗해서 그렇게 역겹지는 않았다. 벽도 변기도 바닥도 깨끗하고 반짝반짝했다.

그 와중에 유신은 18억을 변기에 흘려보내지 않도록 오른손을 꼭 주먹 쥐고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올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부담 백배…… 우욱.

그렇게 유신과 닉이 화장실로 사라지고, 가게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에는 빈 반지 케이스와 꽃다발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저거, 그거 맞죠?”

“네, 입덧.”

“역시 임신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남은 사람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중얼대는 중이었다. 개중에는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거나, 급히 SNS에 올릴 글을 작성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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