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10/22)

제2부 제1장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새해 카운트다운까지 거슬러 가자.

12월 31일 11시 반. 그러니까 해가 바뀌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유신은 하우스메이트인 밀리와 함께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볼 드랍 행사 중계를 보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퀘어에서는 매년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해가 바뀌는 순간, 대형 공(ball) 모형을 떨어트리는(drop) 행사를 하곤 했다. 이것이 바로 뉴욕의 유서 깊은 새해맞이 행사인 볼 드랍이다.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엄청난 인원이 관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공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잠깐에 불과하므로, 직전 두세 시간 정도 각종 축하 공연을 했다. 지금도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유명 가수가 가사에 뉴욕이 나오는 팝송을 부르는 중이었다.

“자기야, 감자칩 먹을래?”

“아니, 괜찮아. 고마워.”

밀리의 말에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밀리는 식탁 앞에, 유신은 소파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감자칩 말고도 몇 가지 간식과 음료들이 놓여 있었다.

소파는 어른 하나가 눕기도 너무 작고, 어른 둘이 앉으면 꽉 차는 작은 사이즈였다. 공간이 좁아서 이 크기가 최선이었다. 유신은 소파 위에서 한껏 웅크린 채, 낡고 빨간 체크무늬 담요를 뒤집어쓰고 텔레비전 화면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담요가 감싸고 있는 동그란 어깨와 무릎이 묘하게 귀여웠다.

“유신, 졸려 보여.”

“응, 실제로도 너무 졸려. 보다가 자 버릴 것 같아.”

“자기 요새 계속 그러네.”

“기말 끝나고 피곤했나 봐.”

유신이 하품을 했다. 눈이 이미 반쯤 감긴 채였다.

정확히는 기말이 아니라 히트 이후로 계속 그렇다는 것을, 밀리도 아는데 유신이 모를 리 없었다. 부드러운 담요에 뺨을 비비는 유신을 살피며, 밀리는 아삭아삭 감자칩만 입으로 가져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노래가 끝나 가고 있었다. 올해는 이제 30분도 채 남지 않았고, 행사도 슬슬 막바지였다.

다음 날인 1월 1일은 닉의 생일이다. 그는 대놓고 유신과 같이 새해를 맞이하고 싶어 했지만, 데이트는 취소되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와, 역시 잘생겼네.”

화면에 클로즈업된 닉의 얼굴에 밀리가 새삼 감탄했다. 유신이 괜히 뺨을 붉혔다.

그렇다. 닉은 지금 뉴욕 볼 드랍 행사에 참석 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밀리. 슈퍼스타가 뉴욕에 있는데 당연히 불러야지.”

그래서 지금 유신은 졸린 것도 참고 중계를 보는 중이었다.

닉은 지금 초대 손님 자격으로 저기 있었다. 뉴욕 시장이 콕 집어 요청해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효과는 확실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전광판에 비칠 때마다 현장 음성에 여성들의 함성이 커지곤 했다.

역시 할리우드의 슈퍼스타이자, 전 세계 소녀들의 스윗하트. 대단한 인기에 밀리는 내심 감탄했다.

하지만 현장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여기에도 비슷한 상태인 사람이 있었다. 닉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마다 유신의 얼굴도 흐물흐물 녹았다. 거의 화면에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자기, 뭐 해?”

밀리의 눈앞에서 유신은 핸드폰으로 닉이 클로즈업되는 시점을 노려 텔레비전째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닉의 지금 표정이 일할 때 주로 보이는 가식적인 미소라는 사실을 이제 유신도 알았지만, 멋있는 걸 어쩌랴. 닉이 제 바로 앞에서 얼굴 한가득 웃는 것도 좋았지만, 저렇게 일한다는 느낌으로 한껏 계산하고 웃는 모습도 역시 좋았다. 결국 외모가 최고다.

“팬 게시판에 인증 샷을 올리려고. 음, 이미 올라왔네. 나는 댓글에 사진 추가해야겠다.”

“아, 그래?”

밀리는 전혀 예상도 못 한 해맑은 대답을 슬쩍 외면했다. 정작 유신은 다른 사람들이 올린 인증 사진에 눈을 빛내느라 바빴다.

“응, 진짜 잘생겼다.”

그 모습은 어디로 봐도 전형적인 방구석 열성 팬이었다. 실제로는 만나 보지도 못한 듯한 분위기를 팡팡 풍기고 있었다. 일주일 전 둘이 발정기를 같이 보냈다는 사실이 꼭 거짓말 같다고, 밀리는 생각했다.

“밀리, 작년에는 너도 저 현장에 있었지?”

어느새 화면에서 닉은 사라지고, 다른 가수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유신의 질문에 밀리가 갑자기 기겁했다.

“그 일은 이야기 마. 그때 겁나 싸우고, 그 개자식하고 헤어졌잖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거기다 그 뒤로 감기 몸살로 일주일을 앓아눕고. 정말 다시는 안 가. 진짜 힘들었어.”

“텔레비전으로 보면 엄청 즐거워 보이는데.”

“이렇게 중계해 주는 때부터는 나도 나름 즐거웠어. 그 전까지 10시간을 저기서 기다려서 그렇지.”

볼 드랍은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만큼,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최소 10시간에서 12시간 전부터 나가서 대기해야 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원래 밀리도 유신도 그런 활동적인 행사에 나서서 참가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덕분에 몇 년을 뉴욕에서 지내면서 한 번도 나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에는 당시 밀리의 남자 친구가 강하게 같이 가자고 밀리에게 제안을 했더랬다. 그도 전혀 흥미가 없지는 않았던 터라, 든든한 동행과 함께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매우 기대를 했었다. 뭐,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본인이 말한 대로.

참고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지만, 밀리는 현재도 솔로였다. 오늘 같은 날에도 그가 집에 있는 이유다.

계속해서 남자 친구를 모집 중이었지만, 취향인 멋진 알파 남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베타와 알파가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아서, 여태껏 쉽게 사귀었던 쪽이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자기, 아직도 저기 가고 싶어서 그래?”

닉이 저기 있어서 유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밀리도 모르지 않았다.

“아냐, 밀리. 그냥 보고 있으니까 또 재미있어 보여서.”

“됐어, 넌 안 간 게 다행이야. 이 시간쯤이면 저기가 얼마나 추운데. 요새 자꾸 졸기만 할 정도로 컨디션도 안 좋잖아?”

“잠이 좀 늘긴 했는데, 몸 상태는 진짜 괜찮아.”

밀리의 이야기에 유신은 웃었지만, 실제로 이번 주 들어 그가 잠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잘 때 빼고는 거의 소파와 한 몸처럼 지내는 중이었다.

“차라리 닉 메드한테 부탁해서 대기실에 초대해 달라고 하는 편이 합리적이겠다.”

“어떻게 그래.”

밀리가 대놓고 말하자 유신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괜히 두르고 있던 담요를 몸에 더 꽁꽁 감으며 꼼지락거렸다. 밀리는 다 먹은 감자칩 봉지를 작게 접었다.

“맞다. 닉이 좀 있다 자기 보러 온다 그랬잖아, 유신?”

“저거 끝나면 온다 그러긴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새벽에야 끝날 텐데, 내일 오전에도 스케줄 있거든.”

“와, 진짜 바쁘네.”

“연말연시라서 찾는 곳이 많나 봐. 거기다 곧 영화 개봉도 하고, 새 영화 촬영도 들어가니까.”

방금 전 노래는 끝이 났지만, 곧 새로운 가수가 등장해 다른 노래를 시작했다. 닉이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신이 소파에 몸을 묻으며 작게 하품을 했다.

실은 히트가 끝난 뒤로 계속 닉과 엇갈려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너무 바빠서였다. 그래도 생일날은 보자고 먼저 말을 꺼내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못 보게 됐다.

닉은 끝나고 새벽에 들르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유신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때까지 깨어 있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눈이 감기기 직전이었다.

정말 왜 이렇게까지 졸린지 모르겠다.

그래도 억지로 잠들지 않으려는 데는,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해가 바뀌기까지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점점 감겨 오는 눈을 유신은 억지로 부릅떴다.

“난 커피 한 잔 마셔야겠어. 지금 타면 딱 해가 바뀔 때 마실 수 있겠다. 유신, 자기도 마실래?”

하지만 싱크대로 향하며 커피를 권하는 밀리에게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고마워.”

이번 주부터 이상하게 커피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에는 하루 한 잔 이상은 꼭 마셨는데, 그래서 이렇게 졸리는 걸까? 꽤나 합리적인 추론이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실은 이런 졸림은 전형적인 임신 초기 증상의 하나였다. 좀 이르긴 했지만 개인에 따라 아주 예민해서, 병원에서 검사로 알기도 전부터 이렇게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물론 본인은 이게 그 때문인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잠시 후, 밀리가 커피를 가져오자 향기로운 커피 향이 좁은 거실을 채웠다. 평소라면 유신도 같이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속이 울렁거려 입가를 눌러야 했다. 밥을 잘 안 먹어서 그런가 생각하며, 그는 괜히 담요로 더 몸을 묻었다.

「10, 9…….」

드디어 새해를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명색이 ‘볼 드랍’인 거치고 저거 공은 존재감 없지 않아?”

“진짜, 정말!”

밀리의 말에 유신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3, 2, 1!」

해피 뉴 이어! 그리고 해가 바뀌었다.

흩날리는 꽃가루, 번쩍이는 불꽃놀이, 반짝이는 전광판.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전통적인 새해 축가가 울려 퍼진다.

“생일 축하해요, 니카.”

유신은 작게 속삭이며,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도 같은 내용을 메시지로 보냈다. 예약 문자로 보내도 된다지만, 가끔 오류가 나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가 억지로 잠들지 않으려 했던 이유였다.

지금 텔레비전 화면 속은 난리였다. 해피 뉴 이어를 외치며, 다들 얼싸안고 키스한다고 바빴다.

“아, 나만 키스할 상대 없어.”

밀리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구시렁댔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닉 메드가 옆에 있던 여자 진행자에게 끌어안겨 키스를 당하고 있었다. 직전에 요령 있게 피해서 입술과 입술이 닿지는 않았지만, 립스틱이 그의 뺨에 자국을 만들었다. 적어도 여자 쪽은 사심이 가득한 것이 분명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가 보여 밀리는 유신을 흘끔댔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쌕쌕 낮은 숨소리가 편안했다.

얘 정말 요새 왜 이렇게 많이 잘까? 밀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침대로 옮겨 주고 싶어도, 170 초반의 밀리에게 180에 가까운 유신을 옮기기란 만만치 않았다. 예전에 겪은 몇 번의 씁쓸한 실패를 떠올리며, 밀리는 그냥 유신의 자세만 최대한 편하게 고쳐 주었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핸드폰을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파가 좀 좁긴 하지만, 저러다 정 불편하면 자기가 일어나서 옮겨 가겠지.

볼 드랍 행사도 슬슬 끝나는 중이다. 닉이 매력적인 치열을 뽐내며 한창 뭔가 인사말을 건네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뺨의 립스틱 자국은 이미 깨끗이 지워진 후였다.

“응?”

마침 윗집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울렸다. 윗집은 비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 이사 왔는지 모르겠다고 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제 텔레비전을 끄고, 왠지 잠들기 아쉬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노트북에 이어폰을 꽂고 예전에 사 뒀던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딩동!

현관 벨이 울린 것은 그로부터 약 두 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마침 영화도 끝난 참이었다. 문을 연 밀리는 이제 익숙해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오, 이번에는 문 안 부쉈네요.”

“그때는 실수였어. 미안해.”

상대의 빈정거림에 닉은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뻔뻔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난번에 유신의 히트 직전 그를 데려가며 문을 부순 일을 가리키는 거였다. 다행히 문은 닉이 준 지폐로 그사이 밀리가 깨끗하게 고쳐 두었다.

닉은 선글라스에 검은색 모자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감싸고 있었지만, 키와 자세 때문에라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일부러 의식해 감추지 않으면 존재감이 바로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밀리도 알고 있었다. 검은색 롱 코트 아래는 방금까지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과 같은 옷이었다.

“근데 어떡하죠? 유신은 자요. 깨울까요?”

하지만 밀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닉은 이미 유신이 잠든 소파 앞에 서 있었다.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애정이 가득했다.

“이 슬리핑 뷰티.”

달콤하게 속삭이며, 비싸 보이는 가죽 장갑을 벗고 손으로 뺨을 살짝 눌렀다. 그렇게까지 하는데도 유신은 영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애가 피곤한가 봐요. 아픈 것까진 아닌데 요새 잠이 늘었더라구요.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안 그래도 메시지에서 그 이야기 했어. 내가 방으로 옮겨 줘도 될까?”

“그래 주시면 좋죠. 저 혼자서는 못 해서요.”

당연히 그대로 번쩍 들 줄 알았는데, 닉은 화장실에서 손부터 씻고 왔다. 그리고는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잠든 유신을 안아 들었다.

보고 있으려니 뭔가 낯간지러워, 밀리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이대로 자러 가도 될까? 솔직히 조금 졸린데. 근데 둘이 신경 쓰였다. 방문은 아직 열려 있지만.

하지만 의외로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바로 닉이 나왔다.

“왜 벌써 가세요?!”

“어차피 좀 있다 새벽부터 스케줄이야. 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있을 수도 없어.”

“와, 진짜 바쁘시네요.”

놀라서 입을 쩍 벌리는 밀리를 앞에 두고, 닉이 묘하게 쑥스러워했다.

“저기, 유신에게 내가 왔다고.”

“넵,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갑자기 닉이 환하게 웃어서 밀리는 순간 놀랐다. 저런 표정도 짓는 사람이로구나.

바쁘긴 어지간히 바빴는지 닉은 그대로 돌아갔다. 뭔가 임금님이 순식간에 왔다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밀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 마신 컵을 개수대로 옮겼다.

근데 저렇게 티 내고 다녀도 안 들키나. 자타 공인 슈퍼스타잖아. 파파라치라거나, 그런.

거기까지 생각하다 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생각해 보면 제 코가 석 자라, 남의 사정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서 빨리 자신도 새 남자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밀리도 자러 갈 준비를 했다.

***

유신이 닉과 제대로 만난 것은, 새해가 밝고도 일주일이나 지난 1월 7일이 되어서였다. 러시아에서는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생일도 못 쉬었는데, 모국의 크리스마스에는 꼭 쉬어야겠다고 주장하고 간신히 얻어 낸 휴가였다. 닉은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야.”

둘은 당연하다는 듯 카페 루이에서 만났다. 가게 제일 구석에 있는 작은 2인용 자리에 마주 앉아, 닉은 지난번과 같이 레몬 파이에 홍차, 유신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평소와 달리 커피가 아니라는 사실을 닉은 약간 신선해했다.

“응, 니카.”

유신이라고 그를 만나 싫을 리 없었다. 그래서 테이블 위에 올린 손을 그가 실컷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자연스럽게 고개와 고개가 서로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키스할 정도의 거리였지만, 커플들이 이러는 정도는 딱히 특이한 광경도 아니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일 점심을 애매하게 지난 시간대의 가게는 한가했다. 나른하고 조용한 재즈가 그런 분위기를 더했다.

“너만 나를 애칭으로 부르는 거, 너무 불공평한 거 같지 않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 봐.”

“음, 왠지 불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그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뭘요?”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를 닉은 세상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어차피 유신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나도 널 이제부터 애칭으로 부르려고.”

“뭐라고 부를 건데요?”

“유샤.”

달콤하게 속삭이고, 닉은 어딘가 수줍어하며 되물었다.

“어때? 괜찮아?”

“난 좋아요.”

유신도 동의했다.

지금 닉은 저가 SPA 브랜드 쇼윈도에서 마네킹이 입은 것을 그대로 빼 와서 입은 듯한 차림새였다. 사실 마네킹보다도 더 잘 소화하고 있었지만, 그런 브랜드 특유의 후줄근함까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일부러인지 사이즈가 없었는지, 바지와 소매는 살짝 짧고 반대로 품은 어정쩡하게 커서 더 그랬다.

유신을 향해 나사가 살짝 빠진 듯 웃는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텔레비전에서 보던 날카로운 이미지와는 어딘가 달랐다. 유신은 갈수록 둘이 같은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유샤. 유샤. 유샤.”

닉은 만지작거리던 유신의 손에 좀 더 세게 깍지를 껴 들어 올리고는, 검지 위로 입술을 떨구었다.

“아, 니카. 뭐야, 그만해요.”

그 키스가 손등을 거쳐 손목, 그 아래까지 계속 내려오자, 유신은 곤란해하며 잡힌 손을 빼냈다. 하지만 투덜거리면서도 입가는 이미 웃는 채였다.

닉이 이번에는 양손을 맞잡았다.

“응, 유샤?”

“아, 제발.”

뭔가 즐거워 유신은 웃음을 터트렸다. 닉도 같이 웃었다.

둘 다 테이블 위로 비스듬히 몸을 내밀고 있어, 닉의 오른쪽 어깨와 유신의 왼쪽 어깨는 이미 맞닿은 채였다. 닉이 유신의 왼손 엄지부터 차례로 입 맞추기 시작했다. 유신은 이번에는 손을 빼는 대신, 맞닿은 알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마스 때 같이 히트를 보내고 처음으로 만나는 거였다. 그사이에 새해 첫날 새벽 닉이 잠시 들렀다는데, 잠들어서 온 줄도 몰랐다. 다음 날 밀리에게 전해 듣고야 알았다.

사실 히트 기간 동안 유신은 밀리에게 이리저리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우선 닉이 자신을 데려가며 현관문을 멋지게 부숴 놓는 바람에, 혼자서 수리를 알아봐야 했다. 거기다 닉은 유신의 핸드폰을 챙기기는 했지만, 히트 기간 내내 방치하는 바람에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히트가 끝나고 유신이 확인했을 때, 핸드폰은 이미 한참 전에 배터리가 나가 있었다.

충전하고 보니 밀리가 며칠 동안 계속 괜찮냐고 부재중 메시지를 남기고, 몇 번이나 전화도 했다. 제일 마지막 메시지는 내일까지 연락이 안 오면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유신은 미안함을 느끼며, 바로 그에게 무사하다고 생존 보고부터 해야 했다.

유신이 밀리에게 긴 사과의 전화를 하는 동안, 닉은 SNS에 거실의 크리스마스트리 사진을 올렸다. 그는 유신과 같이 트리 앞에서 셀카를 찍고 싶어 했지만, 유신은 닉이 대놓고 말해도 능숙하게 거절했다. 감히 생각도 못 했다는 쪽에 가까웠다.

둘 다 씻고 정리하고 한숨 돌릴 즈음, 올가가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산더미 같은 포장 음식과 함께였다. 그녀는 둘이 같이 발정기를 보낸 사실을 아는, 닉 쪽의 유일한 관계자였다. 아이잭에게조차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은 거기서 그렇게 끝났다.

“실은 선물이 있어, 유샤. 어쨌든 크리스마스니까.”

닉은 벌써 유신을 자연스럽게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미 지난 며칠간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었던 덕이다.

뭔가 하고 유신이 보는 앞에서,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얄팍한 빨간 상자를 꺼냈다. 보석 상자처럼 보이지만 반지라기에는 좀 크고, 목걸이라기에는 좀 작았다.

유신은 미처 몰랐지만, 그것은 예전 첫 데이트 때 닉이 준비했다가 꺼내지도 못했던 바로 그 다이아몬드 팔찌였다. 심플한 백금 링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남자용 팔찌.

닉은 유신이 뭐라 하기도 전에 바로 상자부터 열어서는, 내용물을 꺼내 그의 팔에 걸어 주었다. 생각한 대로 가느다란 손목에 딱이었다.

“예상대로 잘 어울려.”

유신이 놀란 얼굴로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예뻐요. 근데 너무 비싸 보여서.”

“실은 이거 산 지 좀 됐어. 전해 줄 타이밍을 못 잡아서 이제야 크리스마스 핑계로 주는 거야. 반품 기간은 진작에 지났으니까, 제발 그냥 받아 줘.”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하기 쉽지 않다. 유신은 잠시 애매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동안 알고 지내며 닉이 깨달은 사실인데, 의외로 유신은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았다.

거절하면 정말 싫은 거고, 받아들이면 좋은 것이 맞았다. 달콤한 분위기와 부드러운 미소에 다들 헷갈려서 그렇지, 정작 본인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힘들다고 물었을 때, 힘들면 바로 힘들다고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면 진짜 괜찮은 거였다.

문제는 본인이 본인의 한계를 잘 몰랐다. 괜찮다고 했을 때 진짜 괜찮은지, 본인은 괜찮다고 생각할 뿐 한계를 벗어났는지를 주변에서 확인해야만 했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날 위해서 준비해 준 게 기뻐요.”

“응.”

어쨌든 이번에 그의 ‘유샤’는 받아 주기로 결정한 듯했다. 닉으로서는 거절당하지 않아서 그저 기뻤다.

거기서 유신이 살짝 뺨을 붉혔다.

“사실 나도 당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거든요, 니카.”

“응, 나를 위해?”

“따지자면 선물은 내가 더 해야죠. 며칠 전 당신 생일이었잖아요. 실은 그날 볼 수도 있다고 해서 미리 준비했었는데, 결국 못 봐서요. 그래도 러시아는 생일 지나서 챙겨 줘도 괜찮다니까.”

유신은 거의 항상 가지고 다니는 커다란 백 팩에서 부스럭부스럭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날 위해서, 뭘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당신하고 비교하면 정말로 별거 아니라구요.”

영 민망해하는 유신의 옆에서 닉이 정중히 리본을 풀고, 포장지의 테이프를 뜯어냈다. 바로 쫙 찢어 버릴 것 같은 그의 이미지와 달랐다. 기분이 들떴는지 아주 살짝이지만 알파 페로몬이 달착지근하게 새어 나왔다.

“모자?”

그것은 끝에 동그란 술이 달린, 전통적인 형태의 회색 니트 털모자였다.

“어차피 당신한테 부족한 물건은 없잖아요. 뭘 할까 진짜 고민했는데, 실은 당신이 저희 집 앞에 비니를 떨어트리고 간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대로 돌려주기가 좀 힘든 상황이라서, 그 대신으로 준비했어요.”

“고마워. 잘 쓸게.”

“원래 이런 거 잘 못 골라서,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모자랑 색만 다른 걸로 샀어요.”

뭘 받아도 닉은 기뻐했을 테지만, 유신의 그 말을 제일 좋아했다.

“그거 좋은걸! 정말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대놓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유신이 너무 사랑스러워, 닉은 충동적으로 그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거의 뽀뽀에 가까운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유신은 화들짝 놀랐다. 단번에 귀까지 새빨개져 버렸다.

“앗, 안 돼요!”

“왜? 이미 여러 번 했잖아.”

“그치만 가게에 다른 손님들도 있고.”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리고 다른 사람이 없으면 괜찮은 거야, 유샤?”

“밖이고.”

“밖이 아니면 된다는 거지?”

유신이 준 모자를 써 보며, 닉이 대놓고 능글거렸다.

“아, 몰라요!”

이제야 닉이 지금 괜히 자신을 놀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신은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코까지 내려 버렸다. 하지만 닉이 모자를 벗으며 어지러운 듯 고개를 털자, 참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어느새 둘 다 주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채,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 버렸다. 유신은 쉽게 인정하지 않겠지만, 둘 사이의 (물리적인) 간격이 (물리적으로) 한층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사이를 가로막는 테이블이 아니었다면, 서로에게 눌어붙을 기세였다.

그래서 둘 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닉은 사실 방심한 것이 맞았다.

찰칵, 찰칵, 찰칵.

카페 바깥 사각지대 골목 사이에서 누군가가, 누가 봐도 달콤한 시간을 나누는 그들을 향해 맹렬히 셔터를 눌러 대고 있다는 사실을.

***

할리우드의 슈퍼스타이자 전 세계 소녀들의 스윗하트로 유명한 닉 메드는 원래 애인이 끊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딱히 오래 사귀는 상대도 없었지만, 반대로 애인이 없는 시기도 항상 짧았다. 아니,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닉이 한동안 LA가 아닌 뉴욕에서 지낸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타임스퀘어의 새해맞이 볼 드랍 행사에 참석한 이후, 사람들은 깨달았다. 벌써 몇 달간 그의 새 애인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가 항상 사귀던 금발에 잘 그은 피부를 가진 미녀들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그런 여자는 여기 뉴욕의 차가운 공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특종의 냄새를 맡은 파파라치들이 닉에게 달라붙었다. 링컨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채드 링컨은 아마추어 사진사로, 아슬아슬하게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제보 사진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어두운 피부에 체구가 작은 남성 오메가다. 어디도 튀지 않는 평범한 인상은 그의 직업에 딱이었다.

특히나 열성 오메가인 만큼 페로몬을 느낄 수 있어, 알파나 오메가인 유명인을 쫓을 때 특히 좋았다. 반대로 그 자신은 페로몬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들킬 염려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링컨이 잠복을 시작하고 며칠간, 의외로 닉은 얌전히 맡은 스케줄만 소화했다. 매일 밤 광란의 파티를 벌일 것 같은 평소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애초에 너무 바빠 친구조차 만날 시간이 없어 보이긴 했다.

볼 드랍 행사가 끝난 새벽에 잠시 어딘가를 다녀왔다는 소문은 있었다. 전혀 갈 법하지 않은 주택가라, 그를 주시하던 파파라치들조차 죄다 방심해 오히려 정확한 위치를 놓쳤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그 뒤로도 단조롭게 스케줄만 소화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며칠 안에 새롭게 나타났던 파파라치 중 9할 이상이 사라졌다.

단, 링컨은 남아서 얌전히 다음 기회를 기다린 쪽이었다. 그의 촉이 이번 일이 대박이라고 외쳐 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닉이 (절대 그럴 수 있을 리 없으면서) ‘평범’한 척 사이즈도 잘 맞지 않는 저렴한 SPA 브랜드로 몸을 감싼 채, 깊게 눌러쓴 모자로 그의 화려한 백금발을, 선글라스로는 조각 같은 얼굴을 감춘 채 혼자 어딘가로 향할 때, 링컨은 제 똥촉이 이번에야말로 맞았다는 사실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공교롭게도 닉은 차도 없이 걸어서 후문으로 살짝 빠져나왔기에, 마침 거기 있던 사람은 링컨뿐이었다. 다들 그 슈퍼스타가 항상 뒤꽁무니에 비서나 직원을 붙인 채 당당히 정문으로만 다닐 거라고 예상한 탓이었다. 여태껏 스케줄을 나갈 때마다 그러기는 했다.

그렇게 링컨은 뉴욕 뒷골목의 작은 카페에서, 금발이 아니라 검은 머리의 상대와 로맨틱한 키스를 나누는 닉의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가게 바깥에서 찍을 수밖에 없어서 사진은 흐릿했다.

닉의 얼굴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상대도 안경을 끼고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마른 남자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단, 둘이 지독하게 달콤해 보인다는 것과, 어지간히 사랑에 빠진 것만은 분명했다.

스캔들의 상대가 남자라는 것만으로 딱히 화제가 될 세상도 아니고, 어차피 오메가일 터였다. 얼굴이 좀 더 확실하게 나온 같이 있는 사진이 필요했다.

링컨은 과감히 닉은 버리고, 검은 머리 남자 쪽에 붙기로 했다. 남자는 완벽한 일반인이었고 전혀 조심하지 않아서, 미행은 너무 쉬웠다. 문제는 그가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엉덩이에 거미줄 치겠다고 링컨이 울상이 될 즈음, 검은 머리 남자가 드디어 며칠 만에 밖에 나왔다. 하지만 신이 나 그를 뒤쫓아 간 링컨은 목적지에서 발견한 간판에 제 눈을 의심했다.

“윽, 이건.”

[코스모 종합 병원 별관, 산부인과·불임 클리닉·대리모 센터]

촉이 맞았다. 역시 이번 건은 대박이었다.

***

“어머, 미스터 메드! 어디 가세요?”

빠른 걸음으로 현관홀로 향하는 닉을 향해, 올가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양손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들고 있었다.

“유신이 오늘 병원 정기 검진이라고 해서 나도 같이 가려고.”

닉이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끼며 대답했다. 이미 검은 코트에 검은 챙 모자까지 쓴 상태라 수상쩍으면서도, 키가 크고 자세가 좋아서 그것만으로도 멋있었다.

올가는 바로 짐을 내려놓고, 눈을 빛내며 따라나섰다.

“정기 검진이면 산부인과죠? 오늘 가면 아기 초음파 사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거 같은데.”

“와, 저도 보고 싶네요.”

태평하게 부러워하는 그녀를 두고 닉이 인상을 썼다.

“근데 실은 조금 늦었어.”

“그럼 서둘러야죠! 유신이 기다리겠어요.”

“그러진 않을 거야. 말 안 하고 가는 거라.”

“네?!”

당황하는 올가에게 닉이 별거 아니라며 대답했다.

“실은 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그냥 간다는 소리도 아직 안 했어.”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올가는 바로 납득했다.

“왠지 알 것 같네요.”

“그러니까. 유신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가볍게 생각하면 될 걸, 뭐가 그렇게 신경 쓸 게 많은지 모르겠다니까. 어차피 내가 좋아 어쩔 줄 모르면서.”

하지만 이어지는 닉의 거만한 말에는 그녀 또한 저도 모르게 이리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바로 그런 점이 문제가 아닐까요?”

“내가 뭘?”

설마 진짜 몰라서 묻는 걸까? 올가는 아닌 걸 다 알면서, 일부러 심술궂게 덧붙였다.

“알고 보면 유신은 당신이 싫은 걸 수도 있죠. 좀 잘해 봐요. 저쪽은 마냥 좋아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안 싫어해.”

“확신이 있으시네요.”

“그게 왜? 당연하잖아.”

하지만 당당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오히려 그녀 쪽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작 그렇게 말한 당사자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하아, 유샤하고 결혼하고 싶다.”

“그럼 그냥 청혼해 버리세요, 미스터 메드.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어차피 둘 사이에 이미 애도 생겼는데.”

낯부끄러운 바보 커플이라고 생각하며 올가는 아무 말이나 했다. 하지만 의외로 돌아온 닉의 대답은 싸늘했다.

“올가, 그가 임신한 상태로 도망가 버리면 책임질 거야?”

갑작스런 이야기에 올가는 놀란 눈을 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듣고 보니 꽤나 그럴듯했던 덕이다.

“확실히, 부정 못 하겠네요.”

“그러니까.”

닉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마침 지하 주차장에 있었다. 그래도 초고속 엘리베이터답게 빠른 속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라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문득 올가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충동적으로 속삭였다. 매사 유유자적 여유 넘치는 닉이 이리저리 불안해하는 모습이 의외로 꽤나 보기 즐거웠던 탓이었다.

“차라리 선택지를 다 지워 버려서, 그가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만들면 어때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닉이 그녀를 돌아보는데,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정기 검진 결과는 예상대로 임신이었다. 어차피 유신은 아침에 임신 테스트기로 두 줄을 보고 온 참이었다. 그래서 놀랐다기보다, 역시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실은 테스트기조차 일종의 확인 절차에 불과했고, 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히트 중 닉의 첫 노팅 때가 분명했다. 왠지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매튜 선생이 임신 중 유신의 담당 의사로, 데이브는 담당 간호사로 지정되었다.

매튜는 유신에게 임신 초기와 관련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다. 그중 많이 졸릴 수 있다는 부분에서, 유신은 자신이 지난 2주 내내 왜 그렇게까지 졸렸는지에 대한 답을 드디어 얻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 안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유신, 소식 들었어요!”

진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대기실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대리모 센터에서 유신의 담당자인 죠앤이었다. 어느 순간 당연하다는 듯 직접 유신을 찾아오게 된 그녀였다. 처음에는 항상 유신이 그녀의 사무실까지 찾아갔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많이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죠앤. 간만입니다.”

“연락 듣자마자 바로 내려왔잖아요. 얼굴 보고 싶어서.”

그녀는 얼굴 한가득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유신의 손을 덥석 맞잡았다. 막 진료실에서 나오던 데이브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 태도가 완전 딴사람이라니까.”

“어머나, 데이브!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봐요, 유신이 놀라잖아요.”

“무슨, 내가 더 놀랐거든요!”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유신은 놀라지는 않았지만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둘이 사이가 좋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나 보다. 아니, 너무 좋은 건가?

“어쨌든 임신 축하해요, 유신! 한시름 덜었네요.”

“네, 감사합니다.”

맞잡은 유신의 손을 아래위로 붕붕 흔드는 죠앤의 웃는 얼굴은 데이브를 대할 때와 비교해 확연히 상냥하긴 했다. 아마 데이브도 이 차이를 지적하고 싶은 거겠지.

“인공 수정이 두 번 만에 성공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번에도 실패했으면 시험관 시작해야 했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죠앤의 말에 유신은 순간 멈칫했다. 죠앤이 그런 유신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어머, 유신, 시험관이 그렇게 싫었어요? 이제 임신했으니까, 그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실은 자신이 지난 히트 때 인공 수정이 아니라, 닉과 진짜 섹스를 했다고는. 참고로 센터에서 보내 준 인공 수정에 사용할 정자는, 그 정자의 원래 주인인 닉이 멋대로 버려 버렸다.

“빨리 아기 아버지 측에도 연락해야겠어요.”

“네?”

유신은 죠앤이 닉에게 직접 인공 수정이 성공했다고 전화하는 상상을 해 버렸다. 이미 자신이 오늘 아침 닉에게 병원에 간다는 이야기는 했었지만.

정작 죠앤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한시라도 빨리 연락해야죠. 미즈 노비코프도 기뻐할 거예요.”

올가 노비코프는 닉의 비서였다. 대리모와 관련한 센터와의 연락은 그녀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지난번 히트가 끝났을 때, 닉의 펜트하우스로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아, 올가. 맞아요. 그래, 어서 알려야죠.”

실은 유신은 발정기 때 그녀와 잠깐 인사도 했었다. 더티 블론드를 뒤로 바짝 당겨 틀어 올린, 깐깐하고 마른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초음파 사진은 받았어요?”

“아뇨, 매튜 선생님께서 아직 이르다고 하셔서.”

“미즈 스티븐슨, 유신은 이제 막 임신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에요.”

데이브가 죠앤에게 핀잔을 주었다. 물론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맞다. 이제 4주 차죠? 초음파는 다음 주는 돼야 보겠네요. 주수 계산이 좀 헷갈리죠?”

“네, 처음 듣고 좀 신기했어요. 아기가 생긴 시점이 3주차라니.”

임신 주수는 여성의 마지막 생리일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관례적으로 정기적인 생리가 없는 오메가의 경우에도 함께 사용되었다. 대신 이쪽은 생리일 대신 히트 시작일을 3주차 1일로 계산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2주 후 정기 검진 때면 아기 심장 소리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대신 한동안은 절대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요.”

죠앤은 마치 엄마라도 되는 듯 유신에게 당부했다. 재밌게도 데이브조차 그 점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동의했다.

“동감이야, 유신.”

곧 유신의 손에는 데이브와 죠앤이 안겨 준 임신 관련 책자와 영양제 따위가 든 쇼핑백이 들렸다. 조앤은 이건 맛보기고, 무거운 건 따로 집으로 보내 주겠다며 덧붙였다. 데이브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자신 쪽이 더 쓸모 있는 물건들을 보내 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유신이 갑자기 자신이 잘 돌봐야 하는 귀한 화초라도 된 기분을 느끼며 대기실을 나설 때였다.

“안녕하세요!”

우연히 마주쳤다는 듯이,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으로 누군가 뒤에서 인사를 해 왔다.

아무리 우연이라도 이 정도로 겹치면, 아무리 태평한 유신이라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애매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선 빨간 머리의 알파를 올려다보았다.

“폴, 여긴 웬일이야?”

마침 유신을 뒤따라 나오던 죠앤이 물었다. 폴은 그녀의 존재는 예상치 못한 듯 흠칫했고, 그 점이 유신의 꺼림직함을 부풀렸다.

“미즈 스티븐슨이야말로, 어떻게?”

“나야 유신의 담당이니, 임신 소식을 듣고 찾아왔…… 앗, 이건 안 들은 걸로 해. 환자의 임신 소식을 멋대로 내 입으로 밝히고 말았네.”

“괜찮아요, 죠앤.”

폴이 유신을 향해 악수를 청해 왔다.

“축하합니다. 아기 아버지가 기뻐하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거절하기 애매해 맞잡은 손이 축축해서 기분 나빴다, 여전히 질질 흘리는 듯한 옅은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도 묘하게 불쾌했다. 여태껏 실수로 새어 나온다고 가볍게 넘겼지만, 이쯤 되면 일부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맞다, 폴. 여기서 만난 김에.”

다행히 죠앤이 폴을 불러, 유신은 손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럼, 전 먼저 가 볼게요. 죠앤도 신경 써 줘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봬요, 폴!”

이리저리 신경 쓰이지만 모른 척, 유신은 일단 자리를 피했다. 혹시 부르기라도 할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 같은 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바로 잡아탈 수 있었다.

황급히 닫힘 버튼과 함께 1층을 누르고 핸드폰을 보니, 닉에게서 병원에 도착했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유신은 바로 답장부터 보냈다.

☞ 지금 진료실을 막 나왔어요.

☞ 결과는 예상대로.

스케줄 중이라서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닉의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 예상대로라니? 무슨 의미야, 유샤.

☞ 오늘 아침에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떠서 그럴 줄 알았거든요.

☜ 두 줄이라고? 왜 그 이야기 안 했어?

☞ 그래서 지금 이야기하잖아요, 니카.

유신은 적당히 대답하며, 천천히 병원 로비를 가로질렀다.

☜ 그럼 지금부터 뭘 할 거야?

☞ 오늘부터는 수납도 안 해도 된다 그래서 바로 돌아가려고요. 의사 선생님이 시킨 대로 집에서 얌전히 쉬겠습니다.

☜ 지금 집에 간다고?

솔직히 유신은 집에서 쉰다고 하면, 닉이 잘 생각했다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이 조금 예상과 달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이런 반응이지?

☞ 네, 그러니까 오늘 스케줄도 열심히 해요, 니카. 오늘도 바쁘잖아요.

안 그래도 닉이 오늘 같이 병원에 오고 싶어 하는 게 빤히 보였지만, 유신은 일부러 눈치 못 챈 척했다. 이번 주도 닉은 줄줄이 스케줄로 바쁘기도 했고, 만에 하나 병원에서 그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소란스러워질 게 뻔했다.

그래도 지금 반응은 역시 이상하다. 유신이 다음 답장을 기다리느라 계속 핸드폰을 힐끗대며 정문을 나설 때였다. 건물 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를 끌어당겼다.

“유샤.”

익숙하게 덥석 허리를 안아 오는 팔은 단단했다. 이렇게 유신을 부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아까부터 감싸 오는 짙은 알파 페로몬에 유신은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다.

“니카.”

꼭 그럴 생각도 아니었는데, 반사적으로 유신도 닉의 목에 팔을 감고 껴안았다.

임신한 아기의 아버지라 그럴까. 그저 자신이 너무 좋아해서일까. 닉의 알파 페로몬에 감싸이는 것만으로 유신은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너랑 같이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 일부러 가는 중이었는데, 네가 벌써 진료가 끝나고 병원에서 나오는 중이라잖아.”

“오면 온다고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 니카.”

“유샤, 그랬으면 넌 딱 잘라서 내게 오지 말라고 했겠지.”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유신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둘의 포옹이 더욱 단단해졌다.

닉은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채 검은 챙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꼈지만, 화려한 존재감은 어쩔 수 없었다. 본인이 여유가 없어 그걸 지우는 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한 쪽에 가까웠다.

날씨도 추운데 그 목덜미는 웬일로 땀이 옅게 배어 있었다. 늘 느긋하던 그가 자신을 보고 싶어 서두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유신은 기분이 절로 들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만나서 다행이다. 그죠?”

“엇갈릴까 봐 마음이 급했어.”

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닉이 유신의 뺨에 키스했다. 어차피 유신도 거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의지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둘이 같이 있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나마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조금 비껴, 건물의 사각으로 살짝 피한 것이 얄팍해진 이성의 한계였다.

“바쁜 거 아니었어요?”

“바빠. 다음 주말부터는 해외 프로모션으로 출국도 해야 한다고.”

“잘하고 올 거예요.”

유신은 웃으며 닉에게 좀 더 팔을 감았다. 닉이 그런 유신의 안경을 벗겼다.

“유샤.”

“아, 니카.”

당연하다는 듯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

“됐어. 대박이야. 이거면 됐다고.”

연신 셔터를 누르며 링컨은 신이 났다.

‘산부인과’라는 단어에서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건물 입구에서 커다란 덩치의 경비원에게 가로막혔다. 이 건물은 예약한 환자가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단호한 대응에, 당황하기보다 오히려 뭔가 있구나 싶어 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그대로 링컨은 건물 밖에서 죽치고 기다렸다. 그사이 사전 조사도 어느 정도 마쳤다. 그렇게 열심히 대기한 보람이 지금 찍고 있는 사진이었다.

처음에는 혼자 병원을 나서는 닉 메드의 애인(후보자)의 사진을 좀 더 자세히 찍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물론 저 건물이 산부인과라는 사실이 잘 보이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닉 메드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바쁜 척하더니 가짜였나? 아니면 진짜로 바쁜데 억지로 보러 올 정도로 푹 빠진 건가?

판단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로 다음 순간 둘은 남의 눈을 신경 쓰는 것처럼 건물 그늘로 몸을 피하더니,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껴안고 키스를 시작했던 것이다. 닉은 분명 푹 빠진 것이 분명했다.

“진짜 잘했어, 나!”

줌 기능이 좋은 최신형 카메라를 추가 비용을 들여 빌려 온 자신을, 링컨은 셀프 칭찬했다.

잠시 후, 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니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돈이 좋긴 좋다고, 거리상으로는 지난번과 크게 차이도 없는데 결과물이 훨씬 더 선명했다.

어디로 보나 사랑에 빠진 알파와 오메가 한 쌍이었다. 특히나 닉 메드의 달콤한 미소가 제대로 찍혔다. 완전히 풀어져 녹아내린 듯한, 여태껏 스크린에서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반대로 상대는 거의 뒤통수만 찍혔는데, 일반인인 만큼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줌을 당겨 좀 더 선명하게 보니 꽤나 미인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여태껏 닉이 사귀던 상대와 타입이 전혀 다를 뿐이다.

같은 남자 오메가인데 자신과 너무 차이가 난다. 왠지 부럽다고 생각했다가, 링컨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일할 때 사심은 금물이라고.”

일단은 지금 찍은 사진이나 어떻게 최대한 비싼 값에 팔아먹을지 궁리해 볼 일이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밀린 집세를 내고, 억제제도 좀 비싼 걸로 사고 (효능은 비슷하다지만 확실히 비싼 게 덜 역겹고 맛이 더 좋으니), 간만에 스테이크도 사 먹어야지. 아, 술도 한 잔, 아니, 한 병.

그렇게 들뜬 채 계속 발을 움직였던 게 문제였을까.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던 링컨은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 상대방이 잘 피한 덕에 링컨은 카메라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형편에는 빌리기도 부담스러운 물건인데 천만다행이었다.

“괜찮으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야,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 다?!”

호들갑스럽게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들던 링컨은 깜짝 놀랐다. 아까 닉과 함께 있던 검은 머리의 오메가가 제 앞에 서 있던 것이다.

렌즈를 통해 줌으로 당겨 보면서도 꽤나 미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단순히 그 한마디로 끝낼 게 아니었다. 살면서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이었다.

예쁘다고 해서 딱히 여자 같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 자체가 압도적이었다. 터무니없이 사랑스럽달까.

링컨은 여태껏 우성 오메가를 만난 적은 없지만, 눈앞의 이 생명체가 분명 그거라는 사실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알파였다면 분명 사랑에 빠져 버렸을 거다. 그 잘난 닉 메드가 목을 매던 것도 이해가 갔다.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키가 커서, 링컨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였다. 180이 조금 안 되는 정도? 닉 메드가 워낙에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아담해 보인 거지, 오히려 큰 키였다. 종합하자면 여자들이 대부분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였다. 그 호감에 실은 다수의 남자 및 남자인 링컨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은 모른 척 넘겼다.

무슨 운동을 했는지 몰라도 근육질은 아니지만 몸이 가볍고, 자세가 좋은 데다 움직임이 우아했다. 살짝 손을 흔드는 동작만으로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괜찮으세요?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뇨!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전혀, 조금도 문제없어요.”

남자의 질문에 링컨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당황해 버벅거리다가, 어서 가 보시라고 손을 퍼덕이기까지 했다. 꽤나 꼴불견이었을 텐데도 남자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가볍게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눈을 깜박이자 안경 안쪽에서 긴 속눈썹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에 절로 눈길이 갔다. 커다란 초콜릿색 눈동자는 안에 별을 박은 것만 같았다.

문득 링컨은 이 남자에겐 자신 같은 사람이 딱히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태도를 보였기에, 이 정도는 이미 익숙했던 것이다.

링컨은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보았다.

“완전 천사님이네.”

“그지, 천사지? 그러니까, 그만 봐. 닳아.”

그때 갑자기 검은 바지에 감싸인 긴 다리가 시야로 날아들어, 링컨은 얼어붙었다. 그대로 머리를 걷어차일 것 같았다.

“힉!”

하지만 어깨를 움츠리며 머리를 감싼 것이 부끄럽도록, 날아든 발은 아무것도 없는 벽에 걸쳐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리의 주인을 확인한 링컨은 머리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없었다.

“니, 닉 메드?!”

그 할리우드 스타가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각 같은 미모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빼어났지만, 지금의 험악한 분위기는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검은 머리의 오메가와 같이 있을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방금 전까지 헤벌쭉 풀어져 있던 모습이 거짓말만 같았다. 감출 생각도 없는 우성 알파 특유의 위압감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자, 링컨의 기분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쳤다.

열성 오메가가 견디기에는 너무 강한 페로몬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닉을 올려다보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꼴사납게 바닥에서 허우적대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미스터 파파라치?”

“네, 넵!”

겉보기는 질문이지만, 실은 이미 명령이었다. 링컨은 닉을 향해 최대한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닉은 불쾌감을 감출 생각도 없었다.

“내 유샤를 배웅도 못 하고 일부러 널 찾아오게 만들었으니, 각오는 됐겠지?”

“아, 네, 무, 물론입니다요. 아뇨, 고의라는 건 아니구요.”

“일단 카메라부터 내놔.”

“부, 부수시면 안 됩니다. 빌린 거라서요. 제 능력으로는 그거 못 갚아요.”

어차피 링컨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닉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은 자세라는 사실은 이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닉은 익숙하게 카메라를 조작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확인하는 조각 같은 옆얼굴은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기분에 링컨은 바늘방석이라도 앉은 듯했다.

“명함.”

“네?!”

그러나 거기서 전혀 생각도 못 한 단어가 튀어나와, 링컨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닉은 짜증을 감추지 않으며 다시 요구했다.

“이런 일 할 때 연락받으려면, 명함 정도는 있을 거 아냐. 내놔.”

“그, 그래도.”

“어서.”

이번에도 링컨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는 고분고분 닉에게 제 명함을 바쳤다.

닉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명함을 살피더니, 슥 제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무슨 영화 장면 같아 멋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영화 주인공에게 깨지는 엑스트라 악역이라 생각하니, 링컨은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저, 그러면 카메라는.”

이제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죄다 까발려졌다. 반쯤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그는 빌린 카메라라도 돌려받으려 했다. 하지만 닉은 여전히 카메라를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채드 링컨.”

“네, 넵!”

갑자기 이름을 불려 링컨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어떻게 이름을 알았나 했는데, 맞다. 명함에 적혀 있었지. 이대로 눈앞에서 카메라가 박살 나는 장면을 이미 본 것만 같다.

하지만 이번에도 링컨의 예상은 완전히 비껴갔다.

“잘 찍네.”

“네에?”

생각도 못 한 칭찬에 링컨이 어버버했다. 닉은 여전히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인물을 예쁘게 찍어. 마음에 들어.”

고개도 들지 않고 카메라의 액정으로 찍힌 사진을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사진이 마음에 든다는 듯 푹 빠져든 모습이었다.

“네, 넵? 가, 감사합니다??”

링컨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벅였을 뿐이었다.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사진을 보고 있는 닉의 머릿속에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방금 전 펜트하우스를 나올 때 비서 올가가 저를 향해 속삭이던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차라리 선택지를 다 지워 버려서, 그가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만들면 어때요?’

“링컨, 파파라치 생활은 어때? 할 만해?”

“솔직히 힘들죠. 벌이도 시원찮고, 돈이 될 만한 건수에는 수십 명의 라이벌들이 달려드니까요. 오늘 여기 이렇게 혼자 온 건 진짜 운이 좋은 거죠.”

“운이 좋은 건 아니지 나한테 붙들렸으니.”

“아, 그것도 그러네요.”

갑자기 닉이 저를 향해 카메라를 던지듯 건네, 링컨은 황급히 받아 들었다. 그가 채 자세를 바로 하기도 전에 닉이 물었다.

“그럼, 단독으로 독점 계약해서 사진을 찍는 데는 관심이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대환영이죠!”

“근데 왜 안 하지?”

카메라에 부서진 곳은 없는지 세심히 살피며 링컨이 대답했다.

“누가 저 같은 쩌리한테 그런 걸 맡긴다고요. 마땅한 경력도 없고, 빽도 연줄도 없는데요.”

“하지만 실력이 매우 뛰어나면 그런 게 없어도 되잖아?”

“제가 그 정도로 빼어난 실력은 아닌가 보죠, 헤헤헤.”

“그럼 누군가 제안을 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은 있다는 거지?”

“물론이죠! 아, 그래도 페이는 들어 보고요. 너무 싸면 못 해요.”

링컨은 뺀질거리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절대 일어날 리 없는 일이니 쉽게 답한다는 태도였다. 카메라가 무사한 것을 확인해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닉이 링컨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제안을 하나 하지.”

“네, 네엡?!”

거칠게 당겨진 옷깃에 목이 졸려 링컨은 호흡이 가빠졌다. 그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닉이 손을 놓았다.

“페이도 절대 나쁘지 않을걸.”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속삭여, 링컨은 위압감에 꿀꺽 침을 삼켰다.

***

그날은 1월 말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유신이 다니는 대학의 봄 학기 개강이 벌써 다음 주로 다가와 있었다.

유신은 닉의 해외 스케줄 때문에 일주일 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그렇다. 드디어 오늘 닉이 돌아온다!

그동안 유신은 스타 닉 메드의 팬 계정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며 겨우겨우 버텼다. 닉에게 말하면 바로 수십 장의 셀카를 보내 줄 테지만, 그게 부담스러워서 본인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사실 유신은 요즘 닉이 곁에 없으면 뭔가 불안했다. 오메가에게 흔히 있는 임신 증상 중 하나로, 아기의 아버지인 알파가 옆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임신 초기와 말기에 두드러지는 증상이었다.

자신의 이런 변화에 제일 당황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유신 본인이었다. 원래는 아무리 혼자 있어도 괜찮았는데 말이지. 아직 임신했다는 자각도 거의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벌써 다음 산부인과 정기 검진이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지난번에 다녀온 뒤로 정확히 2주 뒤였다.

이번에 가게 된다면 아기의 심장 소리도 듣고, 초음파 사진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 임신했다는 실감이 날까? 유신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컨디션 문제로 주말에 하던 카페 아르바이트는 당분간 쉬기로 했다. 커피 냄새를 맡으면 속이 울렁거리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탓이었다. 유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입덧이 이미 시작되어서 그런 거였다.

집에만 계속 있으면 역시 답답해서, 바람도 쐴 겸 잠시 도서관에 다녀오려던 참이었다. 다음 주 개강과 관련해 찾아보고 싶은 책도 있었다.

막 나가려는데 웬일로 밀리한테서 전화가 왔다.

“응, 밀리? 무슨 일이야?”

유신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밀리는 원래 한번 나가면 뭘 놓고 갔다거나 하는 꼭 필요한 내용이 아니면, 거의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 자기야, 지금 어디야?

“지금? 이제 슬슬 도서관 가려고.”

- 아직 집인 거지? 다행이다! 자기, 일어나서 아직 인터넷 안 봤지?

“응, 늦잠 자는 바람에 좀 전에 일어났거든. 이제 막 나가려는 중이야.”

- 잠깐만, 나가지 마!

밀리가 소리치는 것과 유신이 현관문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지난번에 닉이 부수고, 밀리가 수리한 바로 그 문이었다.

갑자기 번쩍이는 플래시 세례가 유신을 맞이했다.

“미스터 유신 리 맞으시죠?”

“우성 오메가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정말인가요?”

“닉 메드와의 관계는 인정하시나요?”

“산부인과에서 목격된 부분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현관문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뒤섞여 질문을 쏟아 냈다. 어디로 봐도 기자들이었다.

유신은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당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지만 느긋하게 중얼거리는 태도는 원래 성격 때문인지, 적어도 겉보기엔 그렇게까지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 악, 어떡해. 그래서 내가 나가지 말랬잖아!

오히려 통화 중이던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밀리의 목소리가 더 야단스러웠다.

유신은 제 친구가 왜 나가지 말랬는지 바로 이해했다. 몰려든 기자들의 질문에 닉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밀리,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너무 걱정 마, 괜찮을 거야.”

그는 일단 전화부터 끊었다. 그리고 여전히 소란스러운 기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예상외의 침착한 태도에 갑자기 기자들이 조용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가까이서 본 유신의 분위기가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신은 별생각이 없었다. 일단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싶은데 여기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너무 이상할 테니까. 그렇다고 함부로 대답했다가 나중에 꼬투리를 잡혀도 곤란했다.

묘한 침묵이 잠시 이어지던, 바로 그때였다.

“이쪽은 일반인입니다. 함부로 집 앞까지 이렇게 몰려와서 소란을 떤다는 건, 고소도 충분히 각오한 거겠지요?”

위압감 있는 굵은 목소리가 기자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이 바로 양쪽으로 갈라지고, 대머리에 단단한 체구를 가진 흑인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고급스러운 맞춤 양복에 비싸 보이는 캐시미어 코트 차림이었다.

닉 메드의 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얼굴을 유신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원래는 닉의 매니저로 시작해, 지금은 소속사 사장인 아이잭 심슨이었다. 실제로 보니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덩치도 크고, 카리스마가 상당했다.

기자들은 아이잭까지 등장하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처음에 난리 친 것에 비해 영 배짱이 없었다.

“이쪽으로.”

유신은 아이잭이 이끄는 대로 그 난리 통을 빠져나왔다. 미리 차가 건물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뒷좌석에 타자마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올가가 능숙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안녕하세요, 유신! 연말에 보고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올가.”

연말이란 물론 히트 때를 가리킨다. 유신은 제 뺨이 붉어지는 것을 모른 척했다.

아이잭의 눈썹이 불만족스럽다는 듯 위로 치솟았다.

“연말에 봤다고? 나만 빼놓고?”

“호호, 우리 둘이야 원래 코스모 대리모 센터에서 인사를 한 사이니까요.”

올가의 설명은 의도와 다르게 아이잭을 더 심란하게 만드는 듯했다. 그는 미간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도착하고 하도록 하지.”

차는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향하는 방향으로 보아 목적지는 닉의 펜트하우스인 듯했다.

유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목적한 내용을 찾기는 딱히 어렵지 않았다. 연예 뉴스 제일 위쪽에 떡하니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금발성애자, 드디어 운명의 상대를 만나다?

: 닉 메드의 새로운 애인은 금발이 아닌, 검은 머리의 남성 오메가

- 산부인과에서도 목격, 이미 2세가?』

생각 외로 정확한 기사 내용에 유신은 놀랐다.

다행이랄까 대리모에 관한 이야기는 싹 빠지고 없었다. 달라붙은 기자들이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해 아예 조사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은 덕이었다. 물론 대놓고 파고든다면 밝혀지는 거야 시간문제겠지만.

현재 그들의 관심은 열애설 상대방의 외모, 그리고 둘 사이의 비밀 데이트 (모아 놓고 보면 딱히 비밀로 하려는 의지도 없어 보이는)와 스킨십에 집중되어 있었다.

임신 여부도 흥미로운 소재인 듯했다. 겸사 결혼이라도 하면 기삿거리가 늘어나니 더 좋고, 정도라는 것이 빤히 보였다.

슬쩍 팬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팬 사이트도, SNS도 난리였다. 열애설 정도야 닉 메드에게 일상이었지만, 그 상대가 여태껏 사귀던 애인들과 너무도 달랐던 탓이었다. 임신설까지 더해지니, 이번에 진짜 결혼이라도 하는 거 아니냐고 다들 흥분해 있었다.

읽다 보니 어느새 그 분위기에 감화되어, 유신은 자신이 그 열애설의 상대라는 것도 잊고 댓글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 흑역사가 적립되기 직전, 차가 멈추었다. 유신은 황급히 쓰고 있던 댓글을 깨끗하게 지웠다.

***

역시 목적지는 닉의 펜트하우스가 맞았다. 주차장에서는 전용 엘리베이터로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트리가 치워진 거실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한낮에 봐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히트 중에 유신이 닉과 뒹굴었던 소파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얼룩이 생겨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물어볼 수 있을 리 없다.

“뭔가 마실 걸 가져오죠. 커피라거나.”

“아, 전 아무것도 안 마셔도 될 거 같아요.”

올가의 제안에 유신은 손으로 입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커피 향만 떠올려도 속이 울렁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가 한 박자 늦게,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요. 피곤할 텐데 어서 앉아요.”

실제로도 피곤했기에 유신은 바로 자리에 앉았다가, 올가가 왜 그랬는지를 눈치채고 뺨을 붉혔다. 임신한 자신을 배려한 것이었다.

거기다 아이잭은 지금 저를 빤히 보는 중이었다. 커다란 대머리 흑인 남자가 그러고 쳐다보니 꽤나 위협적이었다.

역시 열애설 때문이려나. 적어도 임신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대리모를 제안한 쪽은 닉이고, 그런 중요한 일을 소속사 사장인 아이잭 모르게 진행했을 리 없었다. 애초에 대리모 관련 담당자는 아이잭 바로 아래서 일한다는 올가였다.

뭔가를 마시는 것은 이제 포기하고, 올가가 유신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쪽은 역시 아이잭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는 대신 창가 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기자들이 왜 몰려든 건지는 이제 대충 알지? 오면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는 걸 봤어. 음, 그러니까.”

“유신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자신을 어떻게 부를지 헤매는 아이잭을 향해 유신이 슬쩍 말을 얹었다. 전혀 예상 못 한 듯 아이잭은 순간 유신을 돌아보았다가, 아아 하고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양손을 모아 쥐었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아직이군. 둘은 이미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내 소개만 하면 되는 건가? 난 아이잭 심슨, 닉 메드의 소속사 사장이다. 유신 리, 맞지?”

“맞아요. 반갑습니다, 미스터 심슨.”

“그냥 편하게 아이잭이라고 불러. 닉도 어차피 그렇게 부르니까. 나도 네가 말한 대로 편하게 유신이라고 부를 테니.”

“네, 아이잭.”

유신은 아이잭과 악수를 했다.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하고, 아이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하튼 기사를 봤으면 대충 알겠지만, 닉과 너의 스캔들 기사가 지금 싹 퍼졌어.”

묘하게 꿍꿍이가 있는 표정을 오래 알고 지낸 올가는 금방 알아보았지만, 유신은 당연히 몰랐다. 그는 그저 현 상황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상태였다.

“네, 그렇더라고요.”

“사실 우리 쪽은 이미 이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어.”

그럼 왜 막을 노력은 하지 않았냐고 유신은 따지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 바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애초에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주변에서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둘이서 아예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딱 붙어서 뉴욕 전체를 쏘다녔던데.”

기사에서 데이트하던 사진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뉴욕 전체라기엔 행동반경이 그렇게 넓지는 않다고, 유신은 왠지 억울했지만 여기서 그렇게 말해 봤자 의미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아니, 아니. 그쪽을 원망하는 게 아냐. 너야 잘 몰랐으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닉은 파파라치들의 생리를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대체 왜 그런 건지.”

사과하는 유신을 향해 아이잭이 연극적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휙 유신과 눈을 맞췄다.

“저기, 유신. 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라니, 갑자기 그렇게 물으셔도.”

“내가 같이 일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꽤 매력적인 알파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할리우드 스타에, 부자고, 잘생겼고, 재능도 넘치고.”

그때 갑자기 아이잭이 닉에 대한 칭찬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그가 수상쩍다는 의심과 별개로, 유신은 팬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스타가 아니고, 슈퍼스타죠.”

“그러니까 말야!”

유신의 말에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가, 아이잭은 머쓱해하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말인데. 닉이 돌아오고 나서 직접 이야기하긴 할 거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면.”

문득 유신은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은 대리모 계약의 상대방 아기 아빠가 닉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때와 왠지 분위기가 같았다. 그는 이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결정을 해야 될 거라는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아뇨, 아이잭. 안 들으면 안 될까요?”

“오, 안 돼. 설마 어디 가 버린다는 이야길 하려는 건 아니겠지?”

대놓고 손을 내젓는 아이잭을 향해 유신이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을 했다.

“맞아요. 제가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제가 잠적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서요. 어차피 애기가 태어나고 나면 제 일은 끝이잖아요. 걱정 마세요. 전 언제라도 떠날 수 있어요. 병원에 소개장만 써 주시면 조용히 애만 낳고 보내 드릴게요.”

“오, 안 돼. 그러면 은퇴라고.”

“은퇴요!? 누가요?”

“누군 누구야? 닉 메드지!”

“니카가요? 은퇴요?!”

아이잭의 한마디에 더 당황한 쪽은 물론 닉의 팬이기도 한 유신이었다. 새파랗게 질리는 그의 손을 아이잭이 붙들었다.

“그래, 잠적은 절대 안 돼.”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다른 수가 없잖아요.”

“아냐, 있어.”

확신에 찬 아이잭의 말에 유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있다고요?”

“그래! 닉이, 닉이 좋은 해결책을 말했었어.”

“대체 뭔데요?”

긴장했는지 아이잭은 닉의 이름을 두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뭔가 하고 숨을 죽이는 유신의 손을, 좀 더 꼭 붙잡으며 빠르게 속삭였다.

“둘이 결혼하면 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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