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13/22)

제2부 제3장

드디어 봄 학기가 시작되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한 달간의 방학 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유신은 솔직히 수업을 들어가기가 좀 부담스러웠다.

“어라, 괜찮은 건가?!”

하지만 오전에 있던 전공 필수 수업이 끝나고, 오후에 있을 전공 선택 수업을 위해 강의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의외로 아무 문제도 없었다.

솔직히 상상 속에서는 훨씬 더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네가 그 열애설의 주인이냐고 옆자리 학생들이 물어 오고, 교수님도 마찬가지.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옮길 때면 복도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닉 메드 같은 슈퍼스타와 어떻게 사귀느냐 따지고, 닉의 팬들이 자신의 사물함에 쓰레기를 넣어 놓는…….

그만 그만, 아무래도 자신은 드라마나 만화를 잘못 봤나 보다.

유신은 자신의 생각이 너무 과했나 싶어 살짝 민망해졌다. 현실은 조용할 뿐이었다.

오전의 전필은 같은 과 학생들이 거의 수강했다. 대부분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다.

유신은 대학교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지만, 기본적인 사회관계는 유지 중이었다. 수업 전후로는 평범하게 방학 동안 잘 지냈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방학 중 제일 큰일이었던 닉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꺼낼 수 없었다.

어쩌면 다들 그 열애설의 주인공이 저인 줄 못 알아본 것은 아닐까? 안 그래도 밀리가 파파라치 사진하고 너무 다르다고, 못 알아보겠다고 한 적도 있다.

적당히 빈자리에 앉으며, 유신은 핸드폰을 셀카 모드로 바꾸어 슬쩍 제 모습을 살폈다. 헝클어진 앞머리에 뿔테 안경, 창백한 안색, 얼룩덜룩한 낡은 코트와 아래 받쳐 입은 비슷하게 낡은 스웨터까지.

흠,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다르긴 하네.

자화자찬이 아니라, 지난 토요일 닉과 저녁 식사 데이트에서 찍힌 사진은 제가 봐도 꽤나 그럴듯했다. 평소 입지 않는 비싼 옷을 입고, 부스스한 앞머리는 단정히 정리하고, 안경도 벗은 자신은 사진의 마법인지 무슨 필터 덕인지 진짜 연예인 같았달까.

덕분에 링컨이 찍은 데이트 사진은 반응이 매우 좋았다. 식당에서 주변에 앉은 다른 손님들이나, 주차장까지 오가며 마주친 행인들이 사진을 찍어 SNS에도 엄청나게 퍼졌다. 그러라고 공개적으로 식사를 한 거긴 했지만, 엄청나게 찍히는 ‘좋아요’에 유신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안경을 벗자는 것은 아이잭의 제안이었다. 시력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 식사하는 데는 딱히 문제가 없었다. 솔직히 식사 내내 주변이 하도 소란스러워,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 싶기도 했다.

대신 유신은 그냥 테이블 맞은편의 닉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약간 흐릿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다 상관없어졌다.

솔직히 주변이 신경 쓰여 어차피 맛은 뭘 먹어도 잘 몰랐을 것이다. 한껏 긴장한 채 닉이 권하는 대로 적당히 포크를 움직였을 뿐이었다.

역시나 코트가 문제인 걸까. 유신은 빨강과 노랑, 녹색이 뒤섞인 헐렁한 체크무늬 코트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코트도 그렇고, 아래에 여러 겹 겹쳐 입은 스웨터나 체크무늬 셔츠 같은 것도 사실 세련된 느낌은 없다. 테가 두꺼운 안경에, 하도 부드러워 잘 헝클어지는 앞머리 쪽도 문제일지도.

하지만 역시 이쪽이 편하달까, 이렇게 입는 쪽이 마음에 안정이 된달까. 또한 만에 하나 옷차림이 달라져 못 알아보는 거라면, 이 상태 (즉, 낡은 코트와 뿔테 안경) 인 이상, 닉과의 열애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유신이 안심하며 메고 있던 백 팩에서 필기구를 꺼낼 때였다.

“안녕, 유신? 이번에도 같은 수업 듣네. 반가워.”

모르는 여학생이 유신에게 말을 걸었다. 키가 크고, 제법 단정한 외모였다.

“누…… 구?”

“나 기억 안 나?”

허탈한 듯 웃는 얼굴이 뭔가 낯이 익다. 유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곧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맞다, 인터뷰.”

밀리의 인터뷰와 세트로 올라와 있던, 닉의 열애설 관련해서 유신에 대해 인터뷰를 했던 같은 학교 학생이었다. 확실히 인터뷰 중에도 같은 수업을 들었다고 했었다.

“그거 봤구나.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아냐, 기자한테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부끄럽다. 본인이 볼 줄은 몰랐어.”

사실 매디슨은 지난가을, 유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 루이에서 그에게 연락처를 건넸다가, 거하게 차인 적이 있었다. 애초에 유신은 그게 고백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컸지만, 당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작지 않았다.

학교에서 같은 교양도 듣는 만큼 유신도 당연히 저를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제일 충격이었다. 단순히 학교와 아르바이트에서 같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는 사실을 지금은 잘 알게 되었지만.

애초에 이 우성 오메가는 남에게 관심을 두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수업에서 마주쳤을 때, 고백한 줄은 전혀 모르고 똑같이 대해 줘서 오히려 편했다. 잘 살펴보니 자신만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신의 무심함이 다른 학생들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매디슨은 의외로 쉽게 실연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성 오메가가 자체 능력으로 사람을 홀린다는 사실은 유명했지만, 대부분의 우성 오메가들이 본능적으로 그러하듯 유신 역시 아주 필요할 때가 아니면 그런 능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본능적으로 최대한 쓰지 않으려 애썼다. 덧붙여 우성 오메가가 사람을 홀린다면, 우성 알파에게는 상대를 압박하는 능력이 있다.

사실 지금 매디슨은 그녀 혼자만의 생각으로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행동을 여기 있는 다른 모든 학생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중이었다.

유신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평소 모습과 기사 사진이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좀 다르게 입은 같은 사람이었다. 그저 아무도 쉽사리 그에게 물을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실은 지금 수업도 유신이 강의실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학생들은 그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그 뉴스 봤어? 우성 오메가인 우리 과 유신 리가 닉 메드랑 사귄대.”

“닉 메드면 그 할리우드 스타?! 볼 드랍에도 왔었잖아.”

“왜? 닉 메드는 금발만 사귈걸. 유신은 금발이 아니잖아.”

“아냐, 이미 임신도 했다던데?”

“토요일에 개비스 오가닉 본점에서 둘이 같이 밥 먹었다더라. 아예 대놓고 러브러브 하더래.”

“나 사진 봤어. 둘이 완전 잘 어울려.”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소수 인원이 수강하는 과목인 만큼 강의실 한쪽에서 이야기해도 모두 다 들을 수 있었다.

“유신이 오늘 학교에 왔어?! 임신으로 휴학하는 거 아니고?”

“왔던데. 평소랑 똑같이 그 이상한 코트 입고. 오전 강의 때 내 옆자리였어.”

“아, 그 코트.”

“우와, 좋았겠다.”

다들 멀쩡한 성인이면서, 마치 고등학생처럼 흥분해서 지껄여 대는 중이었다.

“근데, 유신이랑 닉 메드랑 진짜 사귀는 걸까?”

“사진이 있잖아. 설마 아니겠어? 인정한다는 기사도 떴어.”

“하지만 그건 닉 메드 쪽 입장이잖아.”

“누가 유신한테 직접 물어볼 사람?”

하지만 그 질문에는 다들 대답 대신 서로의 눈치만 봤다. 잠시 망설이다 매디슨은 번쩍 손을 들었다.

“내, 내가 물어볼게.”

어떤 의미로 총대를 멘 쪽에 가까웠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인터뷰에 응한 죄라고 생각하고 겸허히 역할을 받아들였다. 이 수업을 선택한 이유도 반 이상은 다시 한번 더 그와 같은 수업을 듣고 싶어서였는데, 이걸 기회로 말이라도 한 번 걸어 볼 작정이었다.

“왔다, 왔어.”

“쉿!”

마침 화제의 주인공이 강의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교실은 바로 조용해졌다.

유신이 주변에 관심이 많았다면 바로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적당히 비어 있는 자리로 향할 뿐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유신에게는 익숙한 것일지도 몰랐다. 항상 화제의 중심인 만큼,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이었다면 사는 게 너무 피곤했을 테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인생에는 고민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무심하게 의자에 앉는 유신의 옆얼굴을 보며, 매디슨은 꼴깍 침을 삼켰다.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은 이전과 똑같이, 아니 더 예쁘기만 했다. 딱히 여자 같지도 않은데, 그 외의 형용사를 붙일 수 없었다.

매디슨은 용기를 내서 이번에도 같은 수업을 듣는다며 겨우 말을 걸었지만, 유신의 반응은 영 신통찮았다. 전혀 기억 못 하는 게 분명했다. 어떤 의미로 예상대로랄까. 하지만 눈앞에서 저런 반응이니 왠지 맥이 풀렸다.

아마 자신의 이름은 절대 모르겠지. (뭐, 기대도 안 했다.) 매디슨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는데, 의외로 그 웃는 얼굴이 낯이 익었나 보다. 유신은 그제야 그녀를 인터뷰에서 봤다고 기억해 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땐 섭섭했지만, 막상 알아보니 그녀는 쑥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해 줘서 고맙다고 웃기까지 해서 더더욱 그랬다.

“실은 그 인터뷰를 할 때까지도 내가 그 열애설에 대해서 몰랐거든. 연예 뉴스를 잘 챙겨 보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서 좀 엉뚱한 소리를 했던 거 같아.”

“아냐, 괜찮아. 나야말로 나 때문에 기자가 귀찮게 한 거 같아서 미안해.”

“아냐, 아냐. 실은 처음에는 유신, 네가 무슨 범죄에 연관된 건 아닌가 하고 깜짝 놀랐다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처음 기자가 접근해 유신에 관해 물었을 때, 매디슨은 드디어 저 얼굴 때문에 치정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바로 앞에서 유신이 저리 웃으면 누구든 싸울 생각이 바로 사라질 텐데, 이상하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열애설 사실이야?”

“뭐, 그렇지.”

유신은 이제 와서 굳이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잭이 이제부터 열심히 소문을 낼 작정이던데, 여기서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쪽이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분 탓인지 주변도 갑자기 웅성거리는 것 같아, 왠지 민망했다. (사실 그건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이었고, 그가 닉과의 열애설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지만) 갑자기 매디슨이 양손을 번쩍 맞잡아 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보자마자 바로 납득했잖아!”

사실 그 기사를 처음 보고, 그녀는 너무나 설득력이 있어 그저 감탄만 거듭했다. 너무 어울렸다고나 할까. 그래, 역시 할리우드 슈퍼스타 정도는 돼야 급이 맞지, 감히 자신이 껴들 상대가 아니었다.

참고로 매디슨은 유신과 친하지 않았기에, 그가 원래부터 닉 메드의 팬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응? 뭐, 뭐가?”

“둘이 완전 잘 어울리더라! 나도 응원할게, 유신.”

갑작스레 돌아온 열렬한 반응에, 유신이 당황으로 빨개졌다.

“어, 어어, 고마워.”

매디슨은 (유신은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신이 나 붙잡은 손을 크게 아래위로 흔들기까지 했다. 당사자의 인정을 받아 냈으니 다른 친구들도 만족했을 것이다. 게다가 얼결에 손까지 잡고, 완전 이득이다.

“첫 수업인데 늦어서 미안하네. 그럼 어서 시작하지.”

마침 교수가 들어와, 매디슨은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신은 아직 얼떨떨했다. 얼결에 응원을 받아 버렸다. 이상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다 동갑도 아니다. 자신은 동기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이었다. 어쩌면 강의실의 반수 이상이 갓 스물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액면가는 자신보다 연상이지만 실제는 어리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다들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오늘이 임신하고 첫 등교인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생각 외로 괜찮았다고 유신은 생각했다. 단, 커피 향을 맡을 때마다 메슥거려서 그걸 피하는 게 좀 힘들긴 했다.

솔직히 대학생들이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는 줄 처음 알았다. 물론 자신도 지난 학기까지 커피를 달고 살긴 했다. 덕분에 식욕이 떨어져서 점심 먹는 걸 까먹은 것 빼고는 괜찮았다.

이대로라면 휴학 없이 이번 학기를 어떻게 끝마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유신은 수업 중이지만 슬쩍 핸드폰을 확인했다.

점심 즈음 비행기를 탄다는 메시지 이후, 닉에게서 추가적인 연락은 아직 없었다. 저녁때는 돼야 도착한다 그랬었지.

닉은 오늘부터 출국이었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의 해외 홍보로, 짧은 시간 여러 나라를 돌고 오는 빡빡한 스케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거의 동시에 개봉하는 대형 영화는 이런 부분이 힘들다.

돌아오는 건 2주는 지나서다. 언제 닉을 다시 볼지 생각하니, 유신은 벌써 막막했다. 동시에 그 짧은 사이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그에게 이리저리 의존하고 있었구나 살짝 반성했다.

***

하지만 유신은 닉이 없는 2주간, 멍하니 그를 그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슬슬 과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입덧도 조만간 제대로 시작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다행히 닉은 자신의 드레스 룸 한 칸에 페로몬이 잔뜩 묻은 옷들을 남기고 갔다.

핑계는 아니지만, 반쯤은 그 옷 때문에라도 유신은 아직 닉의 펜트하우스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밀리는 전혀 신경 쓰지 말라며, 오히려 적극 응원했다.

“이제 슬슬 프러포즈를 해야지?”

아이잭이 찾아왔을 때, 유신은 닉이 자던 침대에서 그가 남기고 간 옷가지들로 둥지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간 채였다. 페로몬 향이 매분 매초 조금씩 옅어져 가는 것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과제는 해야 한다고 노트와 각종 참고 서적들을 침대 위에 잔뜩 펼쳐 두었다. 하지만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이걸 어쩌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네, 아이잭? 뭐라고요??”

“슬슬 프러포즈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프러포즈? 청혼? ‘결혼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그거?! ……욱.

유신은 당황해 엎드린 자세에서 급히 몸을 바로 하다가, 급한 자세 변화로 그만 속이 메슥거려 잠시 멈칫했다.

닉이라면 유신의 그런 미묘한 변화도 바로 눈치챘겠지만, 아이잭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약한 부분을 들키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일부러 멀쩡한 척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사이, 아무 말 없는 상대방의 반응을 암묵적인 긍정으로 받아들인 아이잭이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번 데이트 사진이 반응이 좋았잖아. 닉이 돌아오는 때에 맞춰서 프러포즈 장면도 유출할까 해. 적당한 고급 식당에서 닉이 무릎을 꿇은 채 반지를 내미는 거지. 꽤나 그럴듯할 것 같지 않아?”

“그거 좋네요.”

물론 유신도 그 장면이 보고 싶었다. 무릎 꿇고 반지를 내미는 닉이라니, 왜 영화감독들은 그런 멋진 장면을 여태껏 촬영하지 않았던 거지?

“반지는 당연히 커다란 알 보석이 박힌, 값비싸고 화려한 보석 반지여야 하고.”

아이잭은 주절주절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마치 콕 집어 누군가에게 듣기라도 한 듯 내용이 구체적이었다. 꼭 어느 누군가가 생각해 낼 법한 상황과 장면이라는 사실은, 유신 또한 그에게 너무 익숙해진 상태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사이 유신은 속이 좀 가라앉아, 아이잭이 말하는 중간에 토하러 화장실에 달려가는 상황은 다행히 맞이하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집중이 잘되지 않아 제대로 된 대응은 힘들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닉도 보고 싶고, 거절할 의지도 기력도 없다. 결국 유신은 대충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네, 뭐, 원하시는 대로.”

차라리 아예 닉에게서 고백이나 청혼을 받았다면, 오히려 유신은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여러 상황이 겹치니 오히려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닉이 그걸 노렸다면, 어떤 의미로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데, 닉?”

갑자기 아이잭이 휴대폰에 대고 동의를 구해, 유신은 깜짝 놀랐다. 설마 지금 통화 중이었나? 그것도 닉과?

- 잘됐네. 그럼 바로 진행해.

“자, 잠깐만요. 거기, 니카?”

하지만 이어지는 닉의 목소리에 유신은 저도 모르게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아이잭이 핸드폰을 들어 올려, 유신은 액정에 보이는 닉의 얼굴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몰랐는데 아까부터 영상 통화 중이었나 보다. 즉, 방금 전의 아이잭과 자신의 대화도 모조리 들었다는 거다.

닉이 있는 장소는 호텔 방인 듯했다. 이미 해가 진 뉴욕과 달리 창밖이 훤했다.

유신이 닉의 얼굴을 확인한 것처럼, 그도 유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가 두고 간 옷 더미에 반쯤 파묻힌 유신의 상태를 보자, 그는 액정 한가득 달콤한 미소를 보냈다.

- 유샤, 또 내 옷으로 둥지를 만들었던 거야?

“아니, 이건, 그냥 학교 과제가 안 풀려서.”

- 그러라고 옷을 남기고 간 거지만, 역시 너무 귀엽네.

바로 앞에 있지 않아서 그런가, 뭔가 평소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느끼해진 건 기분 탓이 아닌 거 같은데? 저렇게 말해도 저 얼굴이랑 잘 어울려서 상관은 없었지만. 유신은 홀린 듯 멍하니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좋아, 아이잭. 한시라도 빨리 프러포즈 반지부터 주문하자.

“미즈 노비코프에게 연락해 두도록 하지.”

프러포즈 반지라니, 듣기만 해도 뭔가 성가신 일거리가 가득히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단어였다. 유신은 멍하니 이번에도 올가가 고생하겠구나 생각했다. 뭐, 그녀라면 알아서 일하는 만큼 보너스를 잘 받아 챙길 것 같지만.

그런 유신을 가운데 두고, 닉과 아이잭이 서로 이죽댔다.

- 난 이만 나가 봐야겠어. 당신이 나한테 붙여 보낸 직원이 아까부터 잔뜩 재촉 중이라고.

“그거 듣던 중 반가운걸, 닉. 나 없이 간 김에 제대로 일 많이 하고 오라고.”

- 이거 참, 말도 참 얄밉게 한다니까.

“누가 할 소리를.”

하지만 닉의 시선이 다시 유신을 향하자, 그는 다시 분위기가 확 부드러워졌다.

- 유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곧 갈 테니까. 아니, 그냥 내가 나중에 따로 네 핸드폰으로 연락할게.

나른하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이, 눈빛이 너무나도 제 취향으로 훌륭해, 유신은 새삼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

- 그럼, 반지 잘 골라 놔. 유라시아 대륙에서 키스와 사랑을 보내지.

곧 전화는 끊어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진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 말고, 유신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프러포즈 반지를 끼는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달리 누구겠는가?

당연히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바로 다음 날 올가가 한 무더기의 반지 카탈로그를 싸 들고 유신의 앞에 나타났다.

“이게 다가 아니고, 여기 태블릿 PC에도 제가 폴더로 정리해 놨으니까, 그쪽도 보시면 돼요.”

유신은 카탈로그 중 맨 위에 있는 민트색 표지의 책자를 몇 장 넘기다가, 바로 다시 덮었다. 여기서 한 개를 고르라니, 자신에게는 절대 불가능했다.

“적당히 알아서 해 주세요.”

질린 듯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올가가 무슨 소리냐며 당당하게 반박했다.

“유신, 정말요? 정말 알아서 해도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실가락지 하나로 하자고 하면, 어차피 안 들어줄 거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죠!”

올가의 눈빛은 대놓고, 할리우드 슈퍼스타의 약혼반지에 그게 무슨 망언이냐고 외치는 듯했다. 하지만 유신은 어차피 돌려줄 반지에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너무 비싸지 않은 걸로 해요.”

1캐럿도 등급 높은 건 억 소리 난다는데, 그런 걸 잠시라도 손에 끼고 있을 생각을 하니 유신은 벌써부터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실제는 억은 문제도 아닐 거라는 사실은, 반지 사이즈를 재어 갈 때조차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닉이 돌아오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완성된 반지도 도착했다.

실크 장갑을 낀 주얼리 매장의 직원이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시점에서 유신은 이미 불안했다. 반지 케이스 또한 일반적으로 보던 사이즈보다 확연히 컸다.

“15캐럿 물방울 다이아몬드예요. 멋지죠?”

직원이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올가가 흥분해 설명했다.

다른 장식은 전혀 없이, 커다란 다이아몬드만 심플한 백금 테 위에 올려진 반지였다. 애초에 저런 엄청난 다이아몬드가 붙어 있는데, 굳이 다른 장식이 필요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예상을 멋지게 위로 뛰어넘은 반지를 앞에 두고, 유신은 저도 모르게 신음부터 흘렸다. 속물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궁금해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얼마죠?”

“15캐럿 다이아몬드면 쓸 만한 건 보통 1.5밀리언 정도는 하죠.”

올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150만 달러라면, 한화로 18억 원이다. 거기다 ‘보통’이라는 건, 그 위가 있다는 거고.

거기서 유신은 더 물어볼 의지를 상실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걱정은 하나뿐이었다.

“설마 저걸 끼고 다니라는 건 아니겠죠?”

“당연하죠. 특수한 상황인 만큼 평소에 끼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어요.”

“아, 다행이…….”

“단, 중요한 시점에서는 두어 번 반지 낀 모습을 언론에 노출해야만 해요.”

최소 18억(아마도 실제 가격은 훨씬 더 높을)을 손가락에 올려 두고 다니라는 소리다. 유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짓이었지만, 지금 그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억짜리 1캐럿 반지를 원한다고 정확하게 주장해 볼걸.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덕분에 프러포즈 장소로 향하는 리무진에서 유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뜩이나 상황 자체도 긴장되는데, 중간부터 18억(최소)짜리 반지를 끼고 있어야 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리고, 위와 식도가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진짜 속이 안 좋았다. 물도 잘못 삼키면 바로 올라올 것 같은데, 밥을 먹으러 가야 하다니 마음이 정말 무거웠다.

프러포즈 날짜는 발렌타인데이로 정해졌고, 장소는 공교롭게도 유신과 닉이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었던, 미슐랭 3 스타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식사 중 유신이 화려하게 나이프를 날려 먹었고, 그걸 포함해 이런저런 이유로 다 먹고 나와 차에서 닉과 말다툼을 했던 바로 그 레스토랑 말이다. 물론 그 뒤에 바로 화해하기는 했지만. 유신은 이래저래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반대로 리무진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닉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모양새가 마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제 늦게야 귀국했는데 조금도 피곤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지금 그의 양복 안주머니 안에는 18억(최소)이 든 벨벳 반지 케이스가 있을 터였다.

특별한 날이라고 유신의 스타일리스트는 평소보다 더 힘을 줬다. 덕분에 지나치게 몸에 꼭 맞는 슈트가 보기 좋을진 몰라도, 솔직히 유신은 너무 불편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반짝이 포장지에 싸인 초콜릿 봉봉 같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안경은 아직 쓰고 있었다. 닉의 얼굴을 좀 더 오래 자세히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벗을 예정이었다.

“하아.”

그래도 닉의 페로몬을 느끼면 확실히 울렁거림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왜 그래, 유샤?”

“그냥 좀, 긴장돼서요.”

“맞아, 나도 긴장돼.”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는 유신에게, 전혀 긴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닉이 미소 지었다. 팔걸이에 올려진 유신의 손 위로 닉의 손이 겹쳐졌다.

유신의 손이 작지도 않은데, 닉은 손은 딱 적당하게 그 손을 완전히 감쌌다. 겹친 손바닥으로 직접 와 닿는 페로몬은 더 기분 좋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닉 메드의 팬 게시판에 들어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을 하나 잃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거기 들어가 팬 활동을 할 정도로 뻔뻔한 성격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너무 궁금하지만 무서워 외면하는 쪽에 가깝달까? 실은 열애설 인정 기사가 뜬 날까지도 계속 게시 글을 체크했었다. 대부분은 평범하고 호의적이었지만, 열애설 인정과 동시에 튀어나온 몇몇 악의 넘치는 글이 너무 강력했던 탓이다.

이 사람은 이런 상황이 안 싫은가? 안 부담스럽나?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유신은 빤히 눈앞의 알파를 살폈다. 닉은 입가에 엷게 띤 미소까지, 역시나 기분 좋아 보인다.

도무지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휙 반대편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무진이 슬슬 식당 앞에 도착하는 중이었다.

당연한 듯 겹친 손은 둘 중 아무도 빼지 않은 채였다.

***

할리우드 슈퍼스타 닉 메드와 그의 아름다운 우성 오메가 애인의 프러포즈 장면은 그날 밤, 전 세계 SNS 트렌드를 지배했다.

단, 세상에서 최고로 로맨틱한 프러포즈라서는 아니었다. 거절당하지 않은 것치고 세상에서 제일 망한 프러포즈로 화제였다.

프러포즈 장소는 미슐랭 3 스타인 유명 프렌치 레스토랑. 멋진 꽃다발에, 15캐럿이라는 다이아몬드(자칭 보석 전문가라는 사람이 길게 분석을 남겼다. 어마어마한 예상 시세는 덤) 프러포즈 반지까지.

정식으로 교제를 발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따끈따끈한 커플. 게다가 상대방은 지금 임신 초기로, 여태껏 풀린 파파라치 사진을 보면 사이도 좋고, 프러포즈를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이 바로 그 닉 메드다.

하지만 프러포즈 상대의 Yes! 라는 대답과 함께 이어지는 둘의 감동적인 포옹과 키스를 기대하던 주변 사람들의 예상은 바로 깨졌다. 프러포즈 받지를 받아 들자마자, 입덧이 도진 유신이 화장실로 뛰어가 버린 것이다. 거기다 무슨 이유인지 닉은 유신의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닉은 바로 따라갔지만, 곧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왔다. 멋지게 차려입은 할리우드 미남 배우가 혼자서 샴페인을 마시는 모습은 제법 멋지긴 했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뭔가 측은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빠른 속도로 샴페인 한 병을 다 비워 주변의 놀라움을 샀다. 관련해서는 충격이 그렇게 컸냐는 반응이 먼저였지만, 뒤이어 러시아 출신에게 보드카가 아닌 와인 한 병은 음료수에 불과하다는 댓글이 수만 개의 ‘좋아요’를 받기도 했다. 사실 뒤쪽이 더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던 유신은,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핼쑥한 얼굴로 돌아왔다. 뭔가를 더 먹을 만한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는 여전히 빼지 않은 채였다.

저건 프러포즈가 실패한 거냐, 성공한 거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닉이 그를 품에 껴안듯이 데리고 레스토랑을 떠났다. 유신의 오른손 약지에서는 여전히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번쩍이고, 닉은 싫은 기색도 없이 싱글벙글했다. 그렇게 커플이 완전히 레스토랑을 떠난 후, 남은 사람들은 닉의 프러포즈가 성공하긴 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닉 메드는 하룻밤 새에, 15캐럿 다이아몬드를 주고도 프러포즈 이벤트는 실패했지만, 프러포즈는 성공한 우성 알파라는 명예로운지 불명예스러운지 모호한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구해 왔어?”

“일단 우리 가게 거래처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죄다 모아 봤는데.”

“고마워, 가브. 잘했어.”

닉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가브리엘이 건네는 커다란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펜트하우스의 현관홀은 매우 넓었지만, 190에 가까운 알파 둘이 서 있으니 묘하게 꽉 찼다.

“오늘 한가했는데, 이거 때문에 바빴다니까.”

“결국 재밌어하고 있으면서.”

싱글싱글 웃는 가브리엘에게 닉은 대놓고 투덜거렸다. 그대로 쇼핑백을 품에 안은 닉이 앞장서고, 가브리엘이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어제 프러포즈는 결국 성공한 거야, 실패한 거야? 인터넷에서 완전 난리던데.”

가브리엘의 질문에 닉이 대놓고 날을 세웠다.

“그게 뭐 크게 중요해?”

“맞아. 네가 거절당했는데 유신이 아직 여기 있진 않겠지. 근데 대체 반지는 왜 오른손 약지에 끼워 준 거야?”

“가브, 날 어린 시절부터 알던 네가 그 이유를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물론 나야 알고 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거기까진 생각 못 할 텐데, 왜 굳이 그렇게 했냐는 거야, 니키.”

가브리엘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닉을 살폈다. 닉은 굳이 대답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답이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브리엘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 유신은 어딨어?”

“나의 유샤는 지금 거실에서 운동 중이야. 거의 간단한 스트레칭 정도지만.”

“갑자기 웬 스트레칭?!”

“가만히 있으면 더 울렁거려서 뭐라도 해야 하겠대.”

“이런. 그래서 내일 시사회는 갈 수 있겠어?”

“본인은 갈 생각이긴 하던데.”

닉이 향한 곳은 식당이었다. 만찬 때나 사용하는 12인용 식탁 위에는 이미 접시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모두 복숭아였다.

크고 작게 썰어 놓은, 흰색과 노란색의 갖가지 복숭아들이 접시마다 조금씩 담겨 있었다. 하지만 2월인 만큼 생복숭아는 당연히 없고, 모두 통조림이나 병조림이었다.

“이게 다 실패한 거야?”

“응, 다 아니래.”

놀라워하는 가브리엘을 향해 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브리엘이 흥미롭다는 듯 식탁을 둘러보았다.

“유신이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한 거야?”

“어제 레스토랑에서 돌아온 뒤로 물도 제대로 못 마시길래, 뭐가 먹고 싶냐고 계속 물었지. 그랬더니 딱 하나 복숭아를 이야기하더라고.”

“근데 통조림은 또 안 되고?”

“병조림도 싫대. 그냥 과일로 먹고 싶은가 봐.”

“입덧이 생각보다 심하구나.”

한 입 정도 먹은 접시도 있지만, 대부분 손도 대지 않고 깨끗했다. 그 한 입조차 제대로 유신의 목구멍으로 넘어갔을지 불분명했다.

“난 몰랐어. 겨울에 생복숭아를 못 구한다는 거.”

“닉, 너만 그런 거 아냐. 나도 음식업을 하지만 한 번도 그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복숭아 철이 되면 디저트로 내놓기도 했으면서.”

“난 애초에 복숭아 껍질을 벗기기 귀찮아서, 굳이 먹을 생각도 한 적 없다고! 복숭아 철 따위 알 게 뭐야.”

이게 뭐라고 커다란 두 남자들은 진지하게 복숭아 철에 대해 의논했다. 아니, 닉은 마지막에 거의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울분을 토한다고, 한겨울에 복숭아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유신이 먹고 싶은 게 정확히 뭐래?”

“한국에서 먹던 ‘딱복’이라는데, 대체 정확히 뭔지를 모르겠어.”

“그럼 한국에서 구해 오면 안 돼?”

“안 돼. 알아보니 한국에도 이 계절에는 없대. 아무리 빨라도 5월 말이나 돼야 나온다더라.”

닉의 대답에 가브리엘이 신음했다. 지금이 2월이니, 아직 석 달은 더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걸 기다리라고는 못 하겠군.”

“일단 통조림이나 병조림이라도 권해 봤는데, 내가 구해 온 건 다 거절당했어.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이제 됐다지만, 아무것도 못 먹고 있는 걸 보고 또 어떻게 그래.”

닉은 식탁에 놓인 접시들을 다 치운 다음, 쇼핑백에서 가브리엘이 새로 가져온 복숭아를 꺼냈다. 하지만 접시에 덜기 전에 신중하게 그중 몇 개를 뺐다.

“이건 내가 이미 준 거야.”

“실패했어?”

“응, 안 되겠대.”

“내가 가져온 것 중에 먹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다.”

가브리엘은 그리 이야기했지만, 닉은 사실 이미 크게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유신을 부르러 거실로 나갔다.

“안녕, 가브리엘. 니카가 당신을 불렀나 봐요.”

유신은 가브리엘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닉의 말대로 그는 요가 매트를 펴고 한창 스트레칭 중이었다.

날씬하게 가는 체격이지만, 의외로 온몸에 단단하게 근육이 잡혀 있다. 유연한 몸 선은 현역 댄서라 해도 믿길 정도였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듯한 옆선에 가브리엘은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닉이 자연스럽게 끌어당겨 유신은 매트에서 일어났다. 웃고 있긴 했지만 역시나 영 기운이 없었다.

프러포즈를 받다 말고 보란 듯이 토하고 온 뒤로, 그는 계속 속이 울렁울렁하는 중이었다. 결국 오늘 학교 수업도 들어가지 못했다. 하루 정도로는 학점에 영향이 없을 테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유샤, 가브가 복숭아를 가져왔어.”

“복숭아!”

닉의 한마디에 유신이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창백하던 뺨이 그야말로 복숭아색으로 물들었다. 가브리엘은 왜 닉이 저렇게 열심히 복숭아를 구해다 주려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복숭아, 먹으러 가요.”

유신은 이번에도 식당에 있느냐고 닉에게 묻더니, 성큼성큼 그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방금까지 스트레칭을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발걸음이 한층 스텝을 밟는 것 같았다. 복숭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 듯했다.

“겨울인데 생복숭아가 있었나요?”

“아뇨, 나도 복숭아 병조림밖에 못 구했어요.”

“아, 그래요.”

그는 이번에도 생복숭아는 없다는 가브리엘의 대답에 대놓고 실망했지만, 곧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번엔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이번에도 유신은 복숭아를 먹지 못했다. 통조림이든 병조림이든 설탕은 필수고 약간의 레몬즙 따위가 추가되는데,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뭣보다 그가 먹고 싶던 것은 아삭아삭한 복숭아였다.

“미안해요, 가브리엘. 넘어가지가 않아요. 나도 너무 먹고 싶은데.”

유신은 소파에 거의 누운 채 울먹였다. 여러 개의 부드러운 쿠션이 그의 머리와 등 뒤를 편안하게 받치고 있었다. 닉이 바로 붙어 앉은 채, 유신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 그가 제 페로몬을 충분히 들이마실 수 있게 하고 있었다.

다정한 둘의 모습에 나름 감동을 받으며,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유신.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일부러 신경 써서 챙겨 준 건데, 너무 고마워요.”

“유샤, 내가 복숭아 가져왔을 때는 그런 말 안 했으면서.”

가브리엘에게 감사를 표하는 유신에게 닉이 유치하게 툴툴댔다. 유신이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니카, 내가 안 했어요? 미안해요. 당연히 정말 고맙죠.”

“그래, 지금이라도 말해 줬으니 됐어.”

자연스럽게 유신이 닉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브리엘은 당신이랑 좀 다르잖아요. 분명 당신이 억지를 부려서 가브리엘이 가져오게 했을 거면서.”

“아냐,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지.”

“니키의 말이 맞아요. 친구끼리 이 정도는 도와야죠.”

정말이에요? 하는 눈빛을 보내는 유신에게, 가브리엘은 그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유신의 손이 여전히 닉의 앞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은 게 재밌었다. 둘은 여전히 꼭 붙은 채였다.

“알아요? 니키는 당신을 무지 걱정 중이에요.”

“그 정도로 안 좋은 건 아닌데. 괜히 과장하는 거예요.”

“과장한다니! 어제부터 전혀 못 먹고 있잖아, 유샤.”

괜찮다는 유신을 향해 닉이 답답해했다.

“전혀는 아니에요. 토마토하고 흰죽하고 삶은 달걀흰자는 먹었다고요. 아, 탄산수도.”

“봐, 내 말이 맞잖아. 사람이 그거밖에 못 먹고 있다니까!”

“하루 이틀 그 정도 먹는다고 안 죽어요. 내일까지 안 나으면 병원 가서 약 받아 올게요.”

“나도 같이 갈 거야. 정말이지, 현대 의학으로 왜 저걸 못 고치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가브리엘도 덩달아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걱정이긴 하겠다. 저래서 내일 저녁 프리미어 시사회는 참석하겠어? 아이잭이랑 올가는 너희 둘이 같이 참석한다고 엄청 홍보 중이던데.”

“아픈데 당연히 집에서 쉬어야지. 그리고 유신이 못 가면 나도 안 갈 거야.”

닉의 선언에 유신이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팬으로서 그 시사회가 얼마나 중요한 스케줄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니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프리미어 시사회를! 나 신경 쓰지 말고 꼭 가야죠. 그리고 내일이면 지금보단 괜찮을 거예요. 안 되면 약이라도 받아 오면 될 거고요.”

“그럼 지금 당장, 아니 오늘은 이미 진료가 끝났나? 그럼, 내일 아침 첫 진료로 예약하자!”

유신과는 다른 의미로 흥분한 닉이, 당장이라도 병원 접수처를 박살 낼 기세로 외쳤다.

그때였다. 여태껏 거의 조용하던 유신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닉이 평소와 다른 벨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유신이 핸드폰의 액정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

***

“네, 엄마, 아빠. 저예요. 유신이요.”

- 아유, 우리 아들 얼굴 보기 정말 힘들다.

- 그니까, 얼굴을 아예 잊어버리겠어.

간만에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간간이 메시지로 생존 신고 정도만 하고 하도 연락이 없다 보니, 답답해진 유신의 부모가 직접 전화를 건 것이었다.

닉은 가브리엘과 함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도 부모님에게 인사드리고 싶다는 닉의 의견은, 말도 안 된다며 유신이 단칼에 거절했다. 대신에 옆에서 보고 있는 건 괜찮다며 허락했다.

유신의 부모는 평범한 한국인 중년 부부로, 아버지는 키가 크고 말랐고, 어머니는 아담하고 통통했다. 유신과 많이 닮았으면서도 그와 달리 확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우성 오메가의 부모로는 보이지 않는 수수한 인상이었다.

“죄송해요. 너무 간만에 얼굴 보여 드리죠?”

- 아니야, 우리야말로 좀 더 자주 연락해야 했는데. 장사를 시작하고 너무 신경을 못 써 준 것 같아 미안하구나. 그래도 이제 가게도 제법 자리를 잡았으니까, 그 점은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단다.

“다행이네요.”

부모 둘 중 이야기는 주로 어머니 쪽이 하고, 아버지는 옆에서 과묵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영상 통화가 아니었다면 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원래 유신의 집안은 두 아들을 다 예체능을 시킬 정도로 유복했지만, 몇 년 전 아버지의 사업이 많이 기울며 어려워졌다. 빚을 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제 예전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현재 부부는 치킨집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영향으로 유신의 재정 상태가 나빠진 것이, 지금 일어난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유신이 대리모 광고에 혹할 일도, 술김에 센터에 신청서를 접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너는 잘 지내니? 건강하지?

“그럼요.”

- 학교는 괜찮고?

“네, 학교도 잘 다니고 있어요.”

나란히 선 부부는 매우 사이가 좋아 보였고, 자식인 유신을 향한 눈빛은 정다웠다. 닉은 한국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그린 듯 사이좋은 가족이었다.

하지만 닉은 곧 부모를 향하는 유신의 태도에 좀 애매한 데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 유신아, 유호가 지난가을에 전국 체전에서 메달 딴 건 들었니?

“와, 정말요? 잘됐다.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 동생 일은 그렇다 치고, 넌 어떠니? 네 발레 선생님이었던 진아 선생님께서 뉴스 기사를 안 보여 주셨으면, 엄마는 지금도 모를 뻔했어. 애인이나, 임신이나, 결혼까지. 그런 중요한 일은 좀 우리한테 미리 알려 줬어야지.

“아, 진아 선생님이. 아아, 그러셨구나.”

유신은 난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들이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왔는지도 깨달았다. 예상대로 본인들이 뉴스를 보고 눈치챈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유신에게 발레를 가르치던 진아 선생님이 그들에게 기사를 찾아 준 듯했다.

역시나 주변의 누군가가 어떻게든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물론 그들이 딱히 뭘 이용하겠다거나,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네가 계속 팬이던 그 배우 맞지?

계속 조용히 있던 아버지가 겨우 한마디를 했다. 어머니가 웃으며 거들었다.

- 원래 발레리노였다며? 진아 선생님도 발레를 전공해서 그런지, 그 배우에 대해서 잘 아시더구나.

“네, 맞아요.”

- 축하해. 원래 좋아하던 사람이랑 이루어졌구나. 우리가 이사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네 방 벽에 그 사람 포스터가 붙어 있었을 텐데.

“……그러게요.”

사업이 망하며 어릴 때부터 살던 큰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 가야 했다. 그 뒤로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비행기 티켓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없던 유신은 아직 한 번도 새로 이사한 집에 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찾아가지 못한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이 사람들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 들을 때마다 유신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곤 했다. 딱히 악의는 없지만, 그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은 말들이 툭툭 던져지고 있었다.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인지는 둘 다 딱히 관심이 없었다.

- 근데 정말로 애가 생긴 거니? 결혼하는 것도 맞고?

“임신은 맞고, 결혼은 아직 잘.”

- 우와, 애인 소식도 못 들었는데, 벌써 손주가 생겨 버렸네. 그런데 결혼은 왜 잘 모르니? 그 배우가 너한테 청혼한 거 아니니? 엄마도 동영상 봤어.

“그게 아직 정리가 잘.”

- 애도 생겼는데 결혼하는 게 맞지.

- 아유, 당신도 참.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유신이도 사정이 있을 텐데, 알아서 결정하겠죠. 유신아, 아빠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물론 어떤 결정을 하든 우린 네 의견을 존중할 거란다.

- 흠흠, 그거야 그렇지.

“네.”

예전부터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다정한 부모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항상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이 있고, 유신은 그들이 마냥 편하지가 않았다. 오래 떨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계속 그랬다.

전적으로 호의적인 상대방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역시 유신의 태도는 뭔가 삐죽삐죽 애매한 데가 있다. 닉은 그나마 한두 마디씩 들리는 아는 한국어 단어들을 최대한 조합해서, 대화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 유신아, 조만간 한번 한국에 와야지? 유호도 널 보고 싶어 할 텐데.

- 그래, 사귀는 사람도 꼭 데려오고. 아빠랑 술 한잔하자.

- 이그, 당신도 참.

“그 사람도 바쁘고 하니까. 안정기까지는 비행기 타기도 좀 그렇고요.”

- 안정기? 맞다, 우리 아들 오메가니까, 네가 임신한 거지? 엄마가 배려가 부족했네. 이해해 줘.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아무래도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거에 익숙지가 않잖아.

“네, 알아요.”

- 여보, 유신이 못 오면 우리가 가면 안 되려나?

- 가게 비우고 어떻게 가요? 비행기값도 한두 푼이 아닌데.

같은 이유로 유신도 계속 한국에 안 가는 중이기는 했지만, 그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차라리 그들이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편이 마음이 덜 불편할 것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었다.

- 그러고 보니, 여보. 진아 선생님이 간다지 않았나, 미국?

- 맞다.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유신아, 네 아빠 얘기 들었지? 그럼 이번에 진아 선생님 미국 갈 때, 네가 뵙고 인사드리면 되겠다. 겸사 우리도 선생님 편으로 이것저것 보낼 테니까.

그들은 마치 미국이 옆 동네 작은 마을인 양 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신은 선생님이 어느 지역으로 오는지도 모르면서 왜 그리 쉽게 부탁하려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두려워 굳이 지적하지 못했다.

“네에.”

“저기, 유신. 역시 나 너희 부모님께 인사…….”

“쉿, 니키. 조용히 있어. 통화 중이잖아.”

보다 못한 닉이 끼어들려는 것을 가브리엘이 말렸다. 영어 대화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틈에 유신이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지금 좀 바빠서 이만 전화 끊을게요. 다음에 다시 통화해요.”

- 그래, 유신아. 조만간 다시 전화하자꾸나.

- 우리 아들, 앞으로는 결혼 같은 중요한 일을 엄마가 뉴스 기사 보고 알게 하면 안 돼.

유신은 통화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소곤거렸다.

“……노력해 볼게요.”

반사적인 긴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기력이 빠져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유신을 향해, 닉이 일부러 더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

“벌써 통화 끝났어? 난 네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됐어요. 당신 같은 유명인을 오메가 아들의 알파 남편으로 맞기엔, 우리 부모님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진짜 준비가 되지 않은 쪽은 유신인 듯했다.

“상대편은 좀 더 길게 통화하고 싶었던 거 아냐?”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통화 내용 중 그나마 단어 한두 개는 알아들은 닉과 달리, 한국어를 모르는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유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관없어요. 그래 봤자 진짜로 결혼할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가브리엘이 눈썹을 치켜뜨는데, 갑자기 유신이 창백한 안색으로 입가를 눌렀다.

실은 통화 내내 그의 안색은 계속 좋지 않았다. 영상 통화의 조악한 화질이 그 사실을 통화 상대방에게 전달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안 되겠어. 잠시 화장실 좀요.”

결국 유신은 입가를 손으로 막은 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손을 내저어, 따라오려던 닉을 말렸다.

“역시 병원부터 예약해야겠어.”

대신 그는 내일 최대한 일찍 유신과 병원에 가 봐야겠다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거기 있는 셋 중 누구도, 지금의 통화가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뉴욕 프리미어 시사회장에는 일찌감치 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다. 레드카펫 행사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제부터 줄을 선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간이 되자 관계자들부터 배우들까지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다들 화려한 면면이었지만, 여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닉 메드였다.

닉의 이번 주연작은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로, 현재 전 세계에서 개봉 진행 중이었다. 그가 지난 2주간 해외를 돌고 온 것도 이 영화의 프로모션 때문이었다.

현재까지 시사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최근 닉의 새로운 열애설로 미디어 노출이 늘어난 점도 의외로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오늘 닉이 제 새 애인과 함께 온다는 소문에, 팬들뿐만 아니라 언론도 흥분 상태였다. 요즘 한창 핫한 셀럽 커플의 첫 번째 공식 투샷을 찍을 욕심에 시사회장을 찾은 기자들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았다.

“꺄아아아악. 닉!”

“어서 와요!!”

“와아아, 드디어!”

닉이 타고 있는 리무진이 들어오는 것만으로, 모여든 팬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차가 지정된 위치에 멈추고 경호 직원이 문을 열자 이제는 완전히 골목이 떠나갈 기세였다.

“꺅, 너무 잘생겼다!!”

“와, 실물 진짜!”

“어떡해, 나 심장 떨려 죽을 것 같아!”

“죽지 마. 닉은 제대로 보고 나서 죽어야지!”

멋진 검은 양복에, 밝은 금발을 뒤로 넘겨 예술적인 이마 선을 그대로 드러낸 닉이 성큼 리무진에서 내리고 있었다. 보기 좋은 근육질의 허벅지를 꽉 조이는 맞춤 양복이 긴 다리를 근사하게 강조했다.

그는 모여든 팬들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보내며 손을 들어 보였다. 이 정도 반응이야 익숙하다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대로 그가 다시 리무진 뒷좌석을 향해 몸을 숙이자, 팬들이 더 흥분했다.

“잠시만, 역시 누구랑 같이 왔나 봐!”

“그 새 애인?”

“우와, 그림 같다. 둘이 너무 잘 어울려.”

그건 지정된 포토 석 앞에 대기 중이던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그들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단체로 돌아가며 갑자기 분위기가 혼란해졌다. 찰칵찰칵찰칵 요란한 셔터 소리는 덤이다.

차에서 내리다 말고 그 소란에 반사적으로 멈칫하는 유신을, 닉이 능숙하게 에스코트했다.

“유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빈말은 아니고 실제로도 유신은 어제보다 상태가 낫기는 했다. 닉이 아침 일찍 그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덕이다.

매튜 선생님은 바로 약을 처방해 주었다. 다행히 약이 효과가 있는 듯했다. 성분 자체는 비타민제의 조합에 가깝다고 하니, 거의 플라시보 효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 때문에 닉이 시사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가는 닉의 팬들에게 완전 원수로 찍혀도 할 말 없었으니 말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스케줄인데. 자신부터가 시사회 때 사진을 보기 위해 간만에 팬 사이트에 용기 내어 들어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유신의 스타일리스트는 신나서 그를 멋지게 차려 입혔다. 하지만 그가 오늘 보여 줘야 할 것은 옷이 아니라,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약혼반지였다. 최소 18억 원(이지만 아마도 실제는 더 비쌀) 15캐럿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

솔직히 유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터무니없이 비싼 돌을 돌려주고만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 반지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것이 유신의 임무 아닌 임무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떻게 보이라는 건가 싶었지만, 유신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닉이 에스코트를 하는 척 반지를 카메라 렌즈 방향으로 드러내면, 기자들과 군중이 알아서 반응했으니까.

“어머 어머, 세상에, 저 반지 좀 봐.”

“우와, 다이아몬드 진짜 크고 번쩍거린다.”

“와, 저거 청혼할 때 닉이 들고 있던 반지잖아.”

“역시 둘이 결혼하기로 했나 봐!”

무엇보다 청혼할 때 받은 반지를 끼는 것은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유신이 특별히 뭔가 한마디 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알아서 멋대로 해석을 늘려 갔다.

“앗차, 조심해야지.”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긴장해,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유신을 닉이 부축했다. 자연스럽게 닉의 팔이 유신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것과 동시에,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닉은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도록 최대한 미적대며 손을 뗐다.

그리고 두 사람이 시사회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유신을 부축하는 닉을 찍은 사진이 SNS에서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

시사회 이후로 올가와 아이잭은 한껏 신이 났다.

“지금 두 사람 이름이 계속 검색어 1위라니까요! 관련 사진들도 조회 수 난리 났어요.”

“하하하, 그래,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반응이야.”

올가가 말하는 사진이란 물론 시사회 중 닉과 유신을 찍은 투샷을 말했다. 사진마다 유신의 왼손 약지에서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이잭은 이번 일을 계기로 닉의 이미지가 좀 더 건실하게 바뀌어 매우 흡족했다. 임신한 (것으로 알려진) 애인을 살뜰하게 에스코트하는 모습이, 이전 열애설 상대에게 무심하던 것과 확실히 다르기는 했다.

특히나 시사회장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유신을 부축하는 장면이 제일 반응이 좋았다. 닉의 품에 폭 감싸이는 유신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하다는 평가였다. 올가가 지금 가리키는 사진도 바로 그 부축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었다.

“특히 이 사진이 화제잖아요. 이거 그 사진사가 찍은 거 맞죠? 제퍼슨이던가?”

“링컨이요.”

또다시 올가가 엉뚱한 전직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올려, 유신이 작은 목소리로 고쳐 주었다. 정작 아이잭은 올가의 칭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우리 쪽에서 배려해 제일 좋은 위치에서 찍었으니, 당연히 결과물이 좋아야지. 돈을 얼마나 줬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감탄한 표정으로 한 번 더 사진을 살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진 솜씨가 훌륭한 것도 사실이에요. 미스터 메드가 갑자기 사진사라며 파파라치를 데려왔을 때는 무슨 변덕인가 했지만요. 확실히 그의 눈이 정확하긴 했어요. 파파라치로 썩기엔 좀 아까울 정도?”

유신으로서는 올가의 그런 호의적인 반응조차 실은 부담스러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임신도, 결혼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였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알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리 쉽게 적극적으로 응원해 올 줄은 몰랐다.

그런 개인적인 사정과 외부적인 상황은, 이미 유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었다. 임신은 몰라도, 결혼은 실은 가짜라는 점도 그를 더 버겁게 만들었다.

이번 주부터는 닉의 새 영화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사실 다른 배우들의 촬영은 이미 시작되었고, 닉은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홍보 때문에 늦게 합류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닉은 스케줄 사이사이 계속 대본을 옆에 끼고 있었다. 일단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유신은 지금보다도 닉을 보기 힘들어질 터였다.

더 이상 닉의 펜트하우스에 머무를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유신은 닉이 없는 틈에 도망치듯 거기서 나왔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그저 침대로 드러눕는 것이 고작이었다. 밀리도 처음에는 단순하게 반가워했지만,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유신이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자 결국 억지로 끌어냈다.

“나가서 밥이나 먹자!”

물론 밥은 핑계고, 나가서 코에 바람이라도 쐬자는 의미가 더 컸다.

따로 갈 곳도 없어 결국 이번에도 카페 루이로 오고 말았다. 애매한 시간이라 손님은 거의 없었고, 그들은 커피 향을 피해 최대한 카운터에서 먼 구석 자리에 앉았다.

“오, 유신! 간만이야. 몸은 좀 괜찮아?”

주문을 받으러 온 루이스의 태평한 얼굴을 보자, 유신은 밀리가 왜 여기로 오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여태껏 유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럼요, 괜찮아요. 갑자기 알바를 관둬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픈데 어떡해.”

평소와 똑같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유신은 마음이 편해졌다.

“루이스! 이거랑 이거, 이거, 이거까지 다 주세요.”

밀리는 샌드위치와 파스타 따위를 잔뜩 주문했다. 유신은 다 못 먹을 거라고 말렸지만, 밀리는 남으면 싸 가면 된다고, 뭘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 일단 다 시켜 보자며 당당했다.

주문을 다 받은 루이스가 카운터로 돌아가자마자, 밀리는 이때라는 듯 유신을 닦달했다.

“자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앞으로 어떡할 거야?”

“나도 몰라.”

답이 없기는 유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학기는 어떻게든 끝내고 싶었지만, 역시 휴학이 답인 걸까. 마음 같아서는 애가 태어날 때까지 어디 조용한 데 숨어 버릴까 싶다. 통장에 돈도 있는데.

하지만 영화 촬영 때문에 닉을 며칠 못 본 것만으로 벌써 컨디션이 별로인데, 아예 떨어진다면 도저히 괜찮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닉이 스케줄로 해외에 나가 있을 때도 밤마다 거의 그의 드레스 룸에서 살다시피 했었는데.

유신은 손으로 머리를 껴안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아졌다지만 지금도 속은 계속 울렁대는 중이었다.

게다가 닉과는 일단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약혼 상태를 유지하기로 말해 놓은 상황이다. 이제 와서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뭔가 약속을 어기는 것만 같아 내키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가 자꾸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말해서 곤란했다.

그러다 유신은 문득, 밀리가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여기요!”

갑자기 밀리가 입구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대로 자신을 휘감는 너무도 익숙한 페로몬에, 유신은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친구와 교체하듯 자신의 맞은편으로 앉는 상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니카.”

예상과 전혀 다르게 어색한 둘의 분위기에, 밀리가 놀란 듯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자기야, 난 네가 말도 안 하고 나왔다 그러길래. 둘이 이야기는 나눠 봐야지. 그럼, 이제부터 둘이서 이야기 잘하고. 난 이만.”

“밀리, 가지 말고 그 뒤에 앉아 있어.”

“어, 응, 그래.”

하지만 바로 유신에게 지적당해 그대로 발이 묶여 빈자리에 앉았다.

“유샤, 왜…….”

닉은 어울리지 않게 거친 숨을 고르느라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촬영을 마치자마자 온 듯 검은색 코트 아래, 의상인 듯한 화려한 실크 블라우스가 엿보였다. 가뜩이나 이목구비도 화려한데, 세팅된 백금발과 메이크업이 남아 있는 입술까지 더해져 매우 눈에 띄었다.

유신은 솔직히 당연히 닉이 한 번은 자신을 찾으러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걸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저렇게 대놓고 서둘러 올 줄은 몰랐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아, 밀리가 알려 줬겠구나.”

제 이름이 나오자, 밀리가 눈치도 없이 바로 끼어들었다.

“난 그냥 자기가 너무 기운 없어 하니까, 자길 생각해서.”

“밀리, 잠시만 좀 조용히 있어. 지금 우리 둘이 이야기하잖아.”

“앗, 미안.”

하지만 싸늘한 유신의 반응에 바로 깨갱 하고 쭈그러들었다. 겨우 호흡을 진정한 닉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유샤, 말도 안 하고 집으로 돌아갔지?”

하지만 답답한 쪽은 유신도 마찬가지였다.

“말했으면 말렸을 테니까요.”

“그거야 당연하지.”

무슨 당연한 이야길 하냐는 닉을 향해, 유신 또한 맞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이번에도 닉이었다.

“정말 왜 가 버린 거야? 나와 결혼하기로 했잖아?”

“하는 척이요.”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유신은 작게 소곤거렸다. 왜인지 닉의 기색이 더 험악해졌다.

“어쨌든 애가 태어날 때까진 내 옆에 있기로 한 거 아닌가? 계약서에 사인도 한 거로 아는데.”

“당신은 촬영으로 계속 없었잖아요. 그래서 잠시 집에 왔을 뿐이에요.”

“정말 그런 거면 나한테 이야길 하고 갔어야지. 아니면, 아이잭이라거나. 아이잭이 너무 윗사람 같아서 불편했다면, 올가한테라도. 메시지에 답도 안 하고. 내가 네 하우스메이트한테서 네가 거기 있다는 이야길 전해 들어야겠어?”

“미안해요. 이렇게 바로 찾을 줄 몰랐어요. 당신 촬영이 끝날 때쯤에는 연락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계약서 사인한 건 이거랑 아무 상관 없잖아요. 대부분 협찬이나 광고에 관한 내용이었을 텐데요.”

“자꾸 섭섭하게 그러지 마. 그렇다고 내가 싫은 건 아니잖아. 정말 싫은 거면 어중간하게 여지 주지 말고 확실히 날 밀어내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구요. 내가 못 그럴 걸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요. 당신을 싫어할 수 없는 걸 알면서.”

닉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굳이 자신과 선을 그으려는 유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유신으로서는 자신이 왜 그 집에 있기 힘들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는 닉이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유샤.”

“당신이야말로 한 번이라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봤냐고요. 애초에 우리가 대리…….”

“자기야, 거기서 더 이야기하면 안 돼.”

그때 갑자기 밀리가 끼어들었다. 이번은 아까처럼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가게 안의 인구 밀도가 묘하게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닉 메드잖아?!”

“앞에는 누구지?”

“그 새 애인 아냐? 임신했다는.”

“내가 봤던 사진하고 분위기가 전혀 다른데. 안경도 썼고.”

“아냐, 얼굴이 똑같아. 안경 벗고 앞머리 넘기면 바로 네가 아는 모습일걸.”

“정말 미인이네.”

닉의 정체를 눈치채고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겉에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있지만 한껏 눈에 띄는 그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면,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사인해 달라면 해 줄까?”

“같이 셀카는 안 되려나?”

사람들은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다 못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욱.”

유신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안 그래도 겨우 앉아 있었는데 한계를 넘은 거였다. 닉이 밀리를 불렀다.

“에밀, 일단 유샤를 데리고 집에 가 있어.”

“넵, 알겠습니다! 아……, 근데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죠?”

밀리의 말대로 이미 사람들이 벽처럼 그들을 둘러싼 상태였다. 하지만 닉은 마냥 여유로웠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하면 돼.”

그는 웃으며 입고 있던 검은색 코트를 벗어 유신의 머리 위에서부터 덮어씌웠다. 거기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었는데, 하나는 코트에 묻어난 닉의 페로몬이 유신의 컨디션을 좋아지게 했고, 둘째로 닉이 코트 아래 입고 있던 화려한 블라우스가 그를 더 눈에 띄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신이 아닌 닉을 향해 쏠렸다. 그 한가운데서, 그가 연극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곧게 편 등, 살짝 거만하게 든 턱, 날카로운 눈빛과 아랫입술만 엷게 웃는 표정까지. 스크린 관에서 빠져나온 듯한 할리우드 슈퍼스타가 거기 있었다.

이제 밀리도 알 것 같았다. 닉이 지난번에 말한 평범을 연기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확실히 저런 모습을 보이고 나면, 이 가게에는 다시 올 수 없겠지.

“꺄아아아, 닉!”

“너무 잘생겼어요. 사진 찍어도 돼요?”

“악수해요!”

“사인해 주세요!!”

“자아, 여러분. 저는 한 명뿐이니, 한 번에 한 가지씩 부탁해 주세요.”

어느새 닉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작은 팬 미팅을 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유신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닉이 일부러 이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밀리는 유신을 데리고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 만든 샌드위치를 가져오던 루이스가, 갑자기 제 가게 안에서 벌어진 소란에 당황한 듯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닉 메드 본인이라고? 그의 임신한 새 애인까지? 아니, 그게 유신이었어?!”

동시에 드디어 루이스도 이 카페에 몇 번 왔던 미스터 닉 메드가, 단순히 닮은 꼴이 아니라 진짜 닉 메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이쯤 돼서도 몰랐다면 그게 더 큰 문제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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