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연인 제0장
“여기요!”
손을 흔드는 밀리를 향해 키가 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저가 SPA 브랜드에서 마네킹이 입고 있을 법한 옷으로 상하의에 구두까지 맞춰 입고 있었는데, 비율과 몸매가 마네킹보다 더 좋아서 오히려 옷이 묻혔다. 밝은 금발과 조각 같은 얼굴은 눌러 쓴 털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물론 남자의 정체는 닉이었다. 그는 지금 다시 평범을 온몸으로 연기하는 중이었다.
참고로 털모자는 올해 초 유신이 선물했던 바로 그 모자로, 요새 날씨가 많이 풀려서 다음 주만 되어도 어색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마침 좀 쌀쌀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밀리가 앉은 자리는 카페 루이에서 제일 넓은 단체석이었다. 닉은 저를 위해 비워 둔 자리에 앉고는, 옆자리의 유신에게 키스했다.
“왔어요, 니카?”
“응, 내가 좀 늦었지? 미안.”
그대로 닉의 양팔이 빨려 들듯이 유신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가 허리를 껴안았다. 고개가 유신의 어깨 위로 툭 올려진다. 유신은 웃으며 닉이 쓰고 있던 털모자의 동그란 술을 톡톡 두드렸다.
유신은 벌써 슬슬 임신 4개월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겉으로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아랫배에 아주 조금 살이 붙었나? 싶은 정도였는데, 그조차 헐렁한 스웨터를 즐겨 입는 덕에 완벽하게 가려졌다.
자연스럽게 한 뭉치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을 보고, 맞은편에 있던 밀리가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뭐예요? 지금 여기 두 사람만 있는 거 아니거든요?! 게다가 벌써 봄인데 둘 다 똑같은 털모자나 쓰고 있고. 그렇게 티 안 내도 둘이 커플인 거 딱 보면 알겠구만!”
밀리의 말대로 유신도 오늘 색만 다른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애초에 유신이 생일 선물로 제 모자와 세트로 사 준 것이기도 했다.
친구의 지적에 유신이 슬그머니 털모자를 벗어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았다. 실내에서 계속 쓰기는 약간 덥기도 했다.
“응, 응, 그래.”
정작 닉 쪽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보란 듯이 유신만 더 세게 껴안았다.
당연하다는 듯 밀리와 나란히 앉은 가브리엘이, 모자가 부러우면 사 줄까 하고 해맑게 물었다.
납치 사건 이후에도 유신과 밀리가 계속 그 집에서 살 수는 없었다. 유신은 닉의 펜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겼고, 밀리도 혼자 살 집을 구했다.
대신 갑작스런 이사에 필요한 추가 비용은 닉이 제 책임이라며 죄다 부담했다. 1년 치 집세 차액까지 모두. 그래서 밀리는 오히려 고마워했다.
하지만 이사 후에도 밀리는 퇴근하고 매일같이 유신에게 놀러 오는 바람에,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참고로 밀리의 새집에는 유신보다 가브리엘이 더 많이 들렀다고 한다.
“왕자님, 안녕하세요!”
대각선으로는 루이스의 가족인 짐과 캣이 앉아 있었다. 캣은 닉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확 표정이 밝아졌다.
“안녕, 공주님. 오늘도 엄청 귀엽네.”
닉은 자연스럽게 그녀와 하이 파이브를 했다. 꼬마 팬에게 팬 서비스를 하는 슈퍼스타의 모습이었다. 캣이 까르르 기뻐했다.
묘하게 언젠가의 식사를 떠올리는 인원 구성이었다. 그때도 딱 이 단체석에 앉았었고, 가브리엘만 새로 추가되었다.
곧 루이스가 이번에도 산더미 같은 음식을 가져왔다.
“지난번엔 진짜 놀랐다고. 근데 난 이렇게 봐도 진짜 모르겠다니까. 정말로 닉 메드 본인이야? 꼭 닮은 사람이 아니고?!”
그는 커다란 접시를 테이블 가운데로 내려놓으며, 입이 근질근질해서 겨우 참았다는 듯 바로 닉에게 질문을 쏟아 냈다. 닉이 하하 웃었다.
“그렇든 아니든 딱히 달라질 건 없지 않겠어요?”
루이스는 의외로 바로 납득했다.
“흠,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어쨌든 온 김에 맛있게 먹고 가라고. 오늘도 내가 솜씨를 좀 발휘했지.”
오늘 루이스가 준비한 음식은 파스타가 아니라 필라프였다. 정확히는 (아시안 슈퍼에서 파는) 김치와 깡통 햄이 추가된 한국식 필라프. 다시 말해, 유신이 보기에는 그냥 스팸 김치볶음밥이다. 루이스의 말에 따르면 깡통 햄 회사에서 올려 준 레시피를 참고했단다.
어린 캣에게는 너무 매울까 봐 다른 음식을 준비했는데,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간장 계란밥이었다. 집에서도 이걸 너무 잘 먹는다고 짐이 감탄했다. 유신이 다음에 한국서 받은 김을 가져다줄 테니 같이 먹여 보라고 했더니, 짐이 매우 좋아했다.
미국인답게 버터를 듬뿍 넣어 만든 김치볶음밥은 냄새가 환상적이었다. 안 그래도 다른 테이블에서 그거 뭐냐고, 주문하고 싶다는 손님들이 벌써 몇이나 있었다.
루이스가 이번에 굳이 밥으로 준비한 이유는 물론, 유신이 밀가루보다 쌀을 더 잘 먹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신은 입덧도 거의 끝나고 컨디션이 좋아 요즘 거의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이제 파스타 정도는 거뜬히 소화시킬 수 있었지만, 당연히 김치볶음밥이 더 좋았기 때문에 루이스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입덧이 끝난 건 좋은데, 나 요즘 너무 많이 먹는 거 같지 않아? 매튜 선생님도 이대로 체중이 급하게 늘면 조심해야 한댔거든.”
제 앞에 놓인 개인 접시에 작은 산처럼 볶음밥을 덜어 놓고,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이며 유신이 푸념했다. 마찬가지로 볼이 빵빵하게 볶음밥을 먹고 있던 밀리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좀 더 먹어도 돼. 전보다 살이 붙었다는 거지, 넌 지금도 완전 말랐다고.”
“그래도 너무 단 거랑 기름진 건 안 먹으려고. 건강에 안 좋다잖아.”
“안 먹는다고요?”
가득 찬 유신의 접시를 보며 저도 모르게 되묻는 가브리엘의 옆구리를 밀리가 가차 없이 쿠욱 찔렀다. 다행히 유신은 볶음밥에 집중한다고, 제 친구의 손길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가브리엘을 깨닫지 못했다.
“아, 너무 많이 담아 놓고는 좀 그런가? 그럼 덜 먹는다고 할게요.”
볶음밥을 한 숟갈 크게 퍼서 와앙 입으로 가져가는 유신을 보자, 밀리는 식욕이 돌아와서 정말 잘됐다며 새삼 감동했다. 몇 년째 친구가 제대로 못 먹는 모습만 봤던 만큼 진심으로 감동한 것이었다.
물론 그 옆에서 비슷한, 아니 오히려 더 풀린 표정으로 유신의 먹는 모습을 보고 있는 바보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닉은 제가 먹는 것도 잊고 유신이 먹는 모습을 보느라 바빴다.
사실 유신더러 지금도 말랐다는 밀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워낙에 말랐던 만큼 조금 살이 붙는 정도로는 티도 나지 않았다.
부러질 것 같던 손목이 그냥 좀 사람 같아진 정도랄까? 여전히 매우 날씬한 체격인 것은 변함없었다. 지금도 단순히 몸이 뻐근하다는 이유로 하루의 꽤 많은 시간을 매트 운동으로 소비하고 있기도 했다.
“루이스, 오늘 볶음밥도 맛있어요.”
“괜찮았어, 가브? 담엔 야채를 조금 추가해 볼까 싶어.”
어느새 가브리엘은 루이스와 진지하게 음식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식에 레몬 파이 말인데요.”
“너희 가게에서 팔고 싶다는 말이면 역시 거절할게. 그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라니까.”
“제가 보장한다니까요. 루이스, 그 맛은 좀 더 널리 알려야만 해요!”
특히 가브리엘은 여기 카페 루이의 명물 레몬 파이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가게에서 꼭 정식으로 팔고 싶어 했다.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칠 정도로 밀리와 함께 여기에 자주 들렀다는 의미기도 했다.
“니카, 촬영도 슬슬 막바지죠?”
제 앞의 그릇을 거의 비운 뒤에야, 드디어 생각났다는 듯 유신이 닉에게 물었다.
닉은 여전히 사랑스러워 어쩔 수 없다는 듯 유신에게 팔을 감아 반쯤 끌어안은 채였다. 시선이 떨어지지를 못했다.
“응, 순조롭게 진행 중이야. 네 학기도 이제 슬슬 끝나는 중이지?”
“아마 당신 촬영이 끝날 때쯤, 제 기말고사도 끝날 듯해요.”
서로 바쁜 와중이지만 둘은 최대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난 주말에는 반나절이기는 했지만 단둘이서 보내기도 했다.
“학기가 끝나면 어딘가 다녀오자. 그래, 한국에 계신 너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면 어때?”
사실 닉은 그 납치 사건 이후 계속 유신에게 흘리듯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지만, 유신은 줄기차게 대충 넘길 뿐이었다. 슬슬 닉도 그냥 휴양지나 다녀와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신의 반응이 의미심장했다.
“흠, 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정말 그래도 좋아요? 당신이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대놓고 의미심장하게 딴소리를 하는 거다. 아무리 봐도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유신의 성격상 단순히 물어보는 정도로는 절대 이야기해 줄 리 없다는 것도 닉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 후식 나왔습니다.”
마침 루이스가 후식으로 예의 그 레몬 파이를 가져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는 그대로 끊겼다. 루이스는 파이 한 판을 인심 좋게 큼직큼직하게 갈라서는, 모두에게 한 조각씩 나누었다.
“그래서, 두 사람 결혼식은 언제야?”
밀리가 신이 나 파이에 포크를 찔러 넣으며 물었다. 유신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올해 안에는 하지 않을까? 아기 태어나고 나서?”
“왜? 태어나기 전에 하는 게 더 낫잖아.”
“급할 거 없잖아. 양쪽 다 가족들까지 오려면 일도 커지고.”
그 대답에 닉이 슬쩍 유신을 살폈다. 확실히 오늘 좀 평소와 다르다. 문제는 명확히 딱 뭐가 다른지 짚어 내기 힘들단 건데.
그런 두 사람의 묘한 기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밀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겠네! 유신은 한국에서, 닉은 러시아에서 가족들이 와야 하니까. 와,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전 세계에서 모인다는 느낌이야.”
“전 세계 맞지.”
가브리엘도 동의했다. 슬쩍 제 가족들은 프랑스에 있다고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유신네 가족들에 대해서는 대충 들은 적 있는데, 닉네 가족들은 어때요? 역시 모스크바에 살아요?”
“아냐, 밀리. 니카의 본가는.”
“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야.”
“어디요?”
억양이 강한 러시아식 발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밀리에게 가브리엘이 작게 소곤거렸다. 밀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세인트피터스버그!” ((주) St. Petersburg: 상트페테르부르크 영어 표기)
“아니, 상트페테르부르크.”
닉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밀리의 발음을 교정해 주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딱히 놀랍지는 않지만, 굳이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유신은 그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 러시아어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은 있었지만 굳이 여기서 참견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자신도 책과 미디어로 익힌 만큼 읽고 쓰는 건 몰라도, 발음과 말하기는 솔직히 자신 없었다.
“뉴욕!”
그때 갑자기 캣이 크게 소리쳤다. 뭐지 하고 테이블의 어른들이 한꺼번에 그녀를 돌아보자, 작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씩씩하게 이렇게 이어 외쳤다.
“캣은 뉴욕에서 살아요!”
어른들의 대화에 자신도 끼고 싶었던 거다. 그 깜찍한 모습에 테이블의 모두가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닉은 아까 조금 껄끄럽던 부분에 대해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한번 말을 꺼낼 기회를 놓치면 그다음엔 더욱 쉽지 않은 법이다. 그때 자신이 너무 쉽게 넘어갔다고 닉이 후회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