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제3장
검사 결과, 당연하게도 닉도 유신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침대까지 옮겨 가며 입원한 것이 무색하게 둘은 당일 바로 퇴원했다.
병원에서 저녁까지 먹은 후의 일이었다. 닉이 잠은 돌아가서 자고 싶다고 하자, 유신도 동의했다.
낮에 블라다와 함께 병원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왔을 때, 세르게이는 이미 가고 없었다. 닉은 제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옆에 블라다가 있기도 했고, 유신도 거기서 더는 묻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것에 맞춰, 닉은 하녀에게 두 잔의 코코아를 부탁했다. 뭐냐고 눈으로 묻는 유신에게 그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힘든 하루였잖아. 마지막 마무리는 단 게 필요해.”
그냥 본인이 먹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유신은 자기 직전에 뭔가 먹는 건 내키지 않아 한두 모금만 홀짝였지만, 달고 따뜻한 음료가 몸 안에 퍼지자 기분이 느긋해지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외로 그렇게 진하진 않고, 눈이 튀어나오게 달았지만 맛은 좋았다.
지금 유신은 늘 입는 티셔츠에 낡은 조거 팬츠, 닉은 목욕 가운 차림이었다. 묘하게 오늘 아침,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젯밤을 떠올리게 하는 의상이다.
“블라다의 말이 맞았어. 병원에 들른 건 잘한 거 같아. 입원까지 한 건 좀 지나쳤지만. 확실히 안심이 되긴 해.”
닉은 아까는 블라다 앞에서 구급차를 불렀다고 그렇게 투덜대더니, 유신과 둘이 있게 되니 바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정도면 앞에서 직접 이야기해 주라고 유신은 한마디 할까도 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게 또 저 남매의 특징인 거 같기도 했다.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응?”
“아까, 병실에서 둘만 있을 때.”
잠시 둘의 눈빛이 서로 교차했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닉은 유신이 무엇을 묻는 건지 바로 이해했다.
“이야기를 좀 해 봤는데, 생각보다 말이 통하더라고.”
“잘됐네요.”
“사실 나도 좀 바뀌긴 한 것 같아.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일이 있었어도, 절대 여기로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유신을 바라보는 닉의 눈빛은 마냥 다정했다.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데도요?”
“그런 건 어차피 의미 없는 가정이야. 그냥 그 정도의 문제가 됐다는 거니까.”
가볍게 닿는 입술에서는 서로 달콤한 코코아의 향이 났다. 닉의 팔이 자연스럽게 유신의 허리를 껴안았다. 맞춘 듯 그 품에 끌어안긴 채 유신이 눈을 깜박였다.
“나도 그럴까요? 이야기하면 말이 통할까?”
굳이 그 대상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닉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유신의 부모님에 대해서였다.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낫겠지?”
“그렇겠죠? 이제 그분들도 좀 더 나이가 들었고, 조금은 달라졌겠죠?”
닉이 안고 있던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그냥 시도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더라.”
“사실 저부터도, 만에 하나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말을 해 봤다는 사실에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어른이 되긴 했어요.”
“그거 잘됐는걸.”
“다른 소중한 것이 생겼거든요.”
그대로 유신이 닉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방금 전의 가벼운 입맞춤에 비해 확연히 진한 키스였다. 코코아의 달콤한 맛이 서로의 입 안에서 뒤섞였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자연스레 분위기가 꽤나 녹진해져 있었다. 닉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유신이 미소 지었다. 마주 보는 시선 한가운데, 초콜릿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닉이 번쩍 그런 유신을 안아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제 하지 못한 걸 마저 할까?”
닉은 유신을 공주님 안듯이 옆으로 안아 올렸다.
“앗, 갑자기 뭐예요?”
갑작스러운 무게 중심의 이동에, 유신은 깜짝 놀라 닉의 팔에 목을 감으며 매달렸다. 정작 닉은 마치 인형을 들듯 가볍게 유신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 씨가 어젯밤에 슬리핑 뷰티가 되는 바람에 못 한 걸 마저 해야지.”
능글맞은 말투에 유신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젯밤에 닉이 씻는 동안 자신이 먼저 잠든 일을 가리키는 거였다. 역시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은근 속에 담아 두고 있었나 보다.
닉은 그런 유신의 뺨에 쪽 입 맞추고는, 그대로 유신을 안아 든 채 성큼성큼 이동했다.
안 그래도 지금 그는 샤워 가운 한 장만 걸친 채였다. 코앞에 느슨한 옷깃 사이로 보이는 단단하고 섬세한 근육에 유신은 절로 눈길이 갔다. 달아오른 얼굴이 더 빨개졌다.
물론 그 목적지는 침대였다. 천장이 있는 거대한 원목 침대는, 둘이 누워서 데굴데굴 구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 부드러운 시트가 매끄럽게 자신을 감싸, 유신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아.”
제 위에 그늘을 드리우듯 몸을 겹쳐 오는 알파의 페로몬에 유신의 가슴이 기분 좋게 콩닥콩닥 뛰었다. 콩알이도 기분 좋은지 배 속에서 작게 꼬물거려, 유신은 왠지 더 부끄러워졌다.
“해도 돼?”
특히나 닉이 제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을 때, 가슴의 두근거림은 절정에 이르렀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신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같았다.
바로 시작해도 자신은 절대 거부하지 않았을 텐데, 항상 다정하게 이렇게 물어봐 주는 것이 좋았다. 대중 앞에서는 늘 멋지기만 한 우성 알파가, 제 앞에서 저렇게 무방비한 것이 특히나.
유신은 충동적으로 눈앞의 깎아지른 듯한 뺨을 양손으로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유샤?”
그리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닉의 코끝에 쪽 입 맞추고는,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아직도 몰라요? 난 어차피 당신이면 다 좋아요.”
“그 말, 바꾸면 안 돼, 유샤.”
닉이 느긋하게 유신의 위로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안경을 벗기는 것이 먼저였다.
유신의 눈꺼풀이 초점을 다시 맞추듯 느리게 깜박거렸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보기 좋은 눈썹과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우는 눈가, 부드러운 뺨 할 것 없이 닉의 입술이 달콤하게 내려앉았다.
유신 역시 닉의 뺨을 감싼 손을 풀지 않은 채, 답하듯 그의 뺨과 귓가에 몇 번이고 달콤하게 입 맞추었다. 어느새 더 이상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 제발.”
문득 귓가와 목덜미의 경계선, 간지러운 부분에 입술이 닿아 유신이 끙끙대며 몸을 뒤척였다. 그는 갚아 주듯 닉의 코끝을 입술로 가볍게 머금었다 뗐다.
하지만 거기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 보며 자연스럽게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맞춤이 단번에 깊어졌다.
닉이 밀어붙이듯 유신에게 깊숙이 혀를 섞었다. 두 사람분의 타액이 입 안에서 엉기고, 유신의 팔이 얽히듯 닉을 끌어안았다. 닉은 이제 뽑아낼 기세로 유신의 혀를 빨아 당기고 있었다.
겹쳐진 하반신이 서로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었다. 유신은 얇은 천 사이로, 분명히 느껴지는 닉의 욕망을 느꼈다.
느슨하게 걸친 샤워 가운 사이로 느껴지는 열기에 앞섶은 불룩 솟아 있을 테지만, 차마 내려다볼 수 없어 애써 무시했다. 자신 역시 흥분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입술 사이로 숨이 뒤섞이고 있었다. 서로 간에 짙어지는 페로몬만큼이나 기분이 더 들떴다. 배 속의 아기가 꼬물거리는 것이 왠지 배덕해 더 흥분되었다.
슬그머니 닉의 손길이 유신의 티셔츠 아래로 파고들어 왔다. 옆구리를 쓸어 오는 단단한 손끝과,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가운 손에 유신의 몸이 떨렸다. 그는 동시에 제 뒤가 자연스럽게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니카.”
닉을 부르는 유신의 목소리는 마냥 달았다. 닉이 더듬듯 유신의 티셔츠를 말아 올리다가, 살짝 입술을 떼며 한 번에 벗겨 냈다. 티셔츠는 그대로 침대 바깥으로 던져졌다.
어느 사이엔가 닉이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살과 살이 직접 닿아 오는 노골적인 감각에 유신은 흥분했다.
“하아.”
맨살에 닿는 닉의 몸은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눈앞의 보석 같은 청록색 눈동자는 대놓고 열기로 들떠 있었다. 유신은 자신이 더 뜨거워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길이 닿는 부분 부분마다 기분 좋을 만큼 시원해 상쾌했다. 닉의 몸에서 풍기는 땀 냄새 섞인 짙은 페로몬이 유신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살랑살랑 번져 오던 산뜻한 베르가못 향에 어느새 그는 흠뻑 빠져든 것만 같았다.
입술이 목덜미로 미끄러지자, 유신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갔다. 목 안쪽에서 열에 들뜬 달콤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응.”
닉은 드러난 목덜미와 쇄골과 어깨 위로, 몇 번이고 입술을 가져갔다. 어느 한 군데 사랑스럽지 않은 곳도, 달지 않은 곳도 없다는 것만 같았다. 붉은 울혈이 하얀 피부에 꽃처럼 번져 갔다.
“아, 거긴.”
그대로 닉이 조심스레 유신의 살짝 선 유두를 입에 머금어, 유신이 작게 앓았다. 임신 중반에 접어들며 유신의 유두는 평소보다 미묘하게 부푼 상태였다. 덕분에 작은 자극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슴의 살집도 조금 늘어난 듯했는데, 그 감촉을 느끼듯 닉의 손이 반대편 가슴 주변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닉은 그대로 가볍게 빨아 당겼다가, 천천히 입 안에서 혀를 써서 유신의 유두를 굴리기 시작했다. 민감한 부분에 느껴지는 직접적인 자극에 유신이 앓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유신의 가는 손가락이 닉의 금발에 얽혔다.
하지만 닉은 개의치 않고 계속 유두를 입에 문 채 혀로 굴리고, 다른 쪽 가슴은 손으로 주무르며 자극했다.
“으응, 응.”
유신의 허리가 흔들리는 것과 함께, 힘이 빠진 양 허벅지가 느슨하게 벌어졌다. 아직 임신한 티가 크게 나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 확연히 둥글어진 아랫배 아래, 이미 잔뜩 흥분해 있던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지금 유신의 얼굴은 열에 들떠 마냥 흐트러져 있었다. 부드러운 앞머리가 땀에 배어 뒤로 넘겨져, 보기 좋게 반듯한 이마가 모두 드러난 상태였다.
긴 속눈썹이 안에서 배어 나온 습기로 촉촉하게 젖은 채, 그 안쪽 달콤한 초콜릿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작고 하얀 얼굴도 평소와 다르게 눈가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닉도 슬며시 유두에서 입술을 뗐다. 직접적인 자극은 없었지만, 그런 유신의 모습에 그 역시 아까부터 한껏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천천히 유신의 양 허벅지에 손을 짚었다.
유신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이미지와 다르게, 허벅지는 단단하고 근육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으로 다져진 무용수의 근육이, 한창때만큼은 아니라도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닉의 손끝이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긴 흉터를 스치고, 유신이 흥분과 다른 의미로 몸을 떨었다. 그대로 닉의 커다란 손이 유신의 바짝 선 성기를 감싸 쥐자, 유신의 사고는 잠시 정지되었다.
천천히 쓰다듬어 오는 닉의 차갑고 긴 손가락이 유신은 마냥 기분 좋았다. 손가락은 성기의 끝까지 느긋하게 타고 내려와서는, 한 번에 쓸어 올리며 고환까지 부드럽게 자극해 왔다. 빳빳이 일어선 성기는 이미 축축하게 끝을 적시는 중이었다.
“응, 좋아.”
유신의 목 안쪽에서는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거기서 닉이 유신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향하려 하자, 닉의 손목을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유샤?”
“나도.”
무슨 일이냐는 듯 이름을 부르는 닉에게, 유신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겨우 그렇게 속삭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닉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곧장 자세를 바꾸어 조심스레 유신을 옆으로 눕게 하고, 자신은 몸을 뒤집었다. 유신의 성기가 닉의 코앞에, 닉의 성기가 유신의 얼굴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리 사이에서 유신이 꼴깍 침을 삼키는 기척을 느꼈다. 닉 또한 거의 발기한 상태였다. 빳빳이 위를 향한 성기는 그대로 배꼽을 지나 배를 찔러 댈 기세였다. 그 와중에 유신의 기척에 오히려 크기를 더했다.
“아, 어떡해. 더 커졌어.”
작게 속삭이는 유신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닉은 어이없이 사정해 버릴 것만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곧 아래에서 성기의 끝을 물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열심히 할짝대는 간지러운 감촉은 절대 능숙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닉은 너무 흥분하다 못해 아랫배가 아파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사정에 다다르기엔 조금 부족했다. 어서 유신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닉도 유신의 성기를 덥석 물었다.
“흣.”
유신의 성기는 알파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일반 남성치고 작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미 완전히 발기해 꺼떡거리는 성기를 닉이 물어 오자,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신의 허리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미 입 안을 채운 닉의 성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발음이 나오지 못했다.
간격을 두지 않고 곧장, 닉이 입 안을 좁히며 쭉쭉 유신의 성기를 빨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환을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축축한 점막이 단단해진 성기를 감싸듯 조여 오고, 까끌까끌한 혀가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성기를 훑고 있었다. 방금 손으로 만져 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자극에, 그대로 유신의 허리가 녹아내렸다.
“흑, 흐으.”
빨아올리는 움직임이 빨라지는 것에 따라 유신의 신음도 깊어졌다. 지나친 흥분에 그는 울먹이는 것이 다였다. 자신도 하겠다며 닉의 성기를 입에 물던 기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도 함께 닉을 애무하려고 크게 입을 벌렸지만, 맞춘 듯 닉이 목 안쪽 깊이까지 성기를 물어 왔다.
유신은 어느새 입 안에 있는 닉의 성기를 빨아 당기는 것도 잊고, 제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힘이 풀려 절로 벌어지는 도톰한 입술 사이로 발기한 커다란 성기가 튕겨 나올 듯, 입 안쪽에서 예민한 점막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 유신의 손은 저 알파를 저에게서 떼 내고 싶은 건지, 더 깊이 붙잡아 당기는지 애매했다. 본인도 잘 모르는 듯했다. 그저 짙어지는 페로몬만큼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만이 명백했다.
“으응, 흣.”
언제 사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유신의 성기는 닉의 입 안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온몸이 뜨겁고, 성기는 너무 흥분하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동시에 엉덩이 안쪽 깊은 곳이 근질근질 저려 와, 본인은 깨닫지 못한 사이 뒤가 울컥 젖어 들어갔다.
닉은 입을 떼기보다 오히려 더 몰아붙이듯 유신을 자극해 왔다. 고환을 자극하던 손이 뿌리에서 음모를 쓸었다. 반대편 손이 은근슬쩍 회음부를 지나 좀 더 뒤쪽으로 미끄러졌다.
“아, 거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유신이 닉의 성기에서 입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엉덩이 사이의 은밀한 구멍을 훑고 있었다.
방금까지 끝에서 반절을 간신히 입에 머금고 있던 닉의 성기가 툭툭 유신의 뺨에 닿았다. 크기부터 압도하는 험악한 물건은 그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유신을 자극해 왔다.
갑자기 닉이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며 유신의 성기를 거칠게 빨아 당겨, 유신은 그대로 흐트러졌다. 손가락으로는 여전히 뒷구멍을 조심스레 지분거리는 채였다.
단단한 손끝이 금방이라도 들어올 듯 들어오지 않고 입구의 섬세한 주름을 훑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짙어지는 페로몬과 함께 오메가의 애액으로 안쪽이 젖어 들었다.
히트 중에 비하면 훨씬 적었지만 안을 적시기에는 충분했다. 이대로면 금방 바깥으로 배어 나올 것만 같아, 유신의 허리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몸이 준비가 끝났으니 어서 넣어 달라고 애타게 외치는 것이었다.
닉 또한 유신의 페로몬 변화만으로도 분명 그 사실을 분명 눈치챘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저 여전히 앞쪽 성기를 입에 머금은 채 혀를 더 거칠게 움직이며, 이제는 본격적으로 뒤쪽 주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앞과 뒤를 한꺼번에 자극당하자, 가뜩이나 아까부터 한계 직전인 몸은 그야말로 녹아내렸다.
“흑, 어서.”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넣을 듯 말 듯 간을 보는 것처럼 움직였다. 애가 탄 유신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며 보챘다. 동시에 뒤쪽 입구가 움찔거리며, 좁은 틈 사이로 뚝뚝 애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유신은 더 이상 그런 것을 판단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계 직전의 생리적인 눈물이 후드득 눈에서 떨어졌다. 솔직히 절정이 코앞이었다.
“어서, 니카, 아아.”
마치 그 반응에 답하겠다는 듯 닉이 오히려 더 거칠게 움직여 오자, 유신은 그대로 더 흐트러졌다.
사실 닉으로서는 지금이라도 넣고 싶은 것을 최대한 참을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 마구잡이로 박고 싶었지만, 이런 걸로 임신 중인 유신을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몸도 무거운데, 그저 기분 좋은 것만 하게 해 주고 싶달까.
이다음에 유신이 입이나 손으로 해 주면 좋겠지만, 안 되면 좀 있다 욕실에라도 가서 혼자.
“흣!”
그런 서글픈 생각과 함께 닉이 그대로 뺨을 부풀리며 유신의 성기를 빨아 당길 때였다. 드디어 유신이 닉의 입 안에서 사정했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 삽입만 하지 않고 있을 뿐, 며칠 전에도 손으로 해 주었던 덕분인지 정액은 그렇게 진하지는 않았다. 닉은 입에 머금은 정액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꿀꺽 삼켰다.
자신이 사랑하는 오메가이기 때문일까? 빈말이 아니라 먹을 만하다 못해 어떤 의미로 맛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맛을 굳이 따지자면 페로몬과 비슷한 레몬과 민트의 맛일지도.
유신은 사정의 여운에 취한 채 거의 누운 듯 비스듬히 앉았다. 숨을 내쉬는 것에 따라 가슴이 크게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눈동자는 흥분으로 촉촉했고,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 있었다. 힘이 풀려 느슨해진 허벅지 사이가 야릇하게 젖었다.
미칠 듯이 야한 모습이지만, 정작 본인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닉을 향해 조르듯 양팔을 내밀 뿐이었다.
“니카.”
“응, 유샤.”
물론 닉은 거절하지도,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의 몸이 다시 바로 겹쳐졌다.
유신이 닉에게 고개를 묻으며 목을 꼬옥 끌어안자, 닉도 손등으로 그런 유신의 뺨을 쓸어 주었다.
그대로 유신이 제 쪽에서 닉을 당겨 먼저 키스했다. 갑작스런 입맞춤에도 닉은 놀라지도 않고 바로 유신을 받아들였다. 왜냐면 자신도 그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던 중이기 때문이었다.
곧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혀를 얽는 젖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각도를 바꿔 가며 깊게 깊게 서로가 익숙한 점막을 탐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유신도 닉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제 뺨을 쓰다듬는 닉의 커다란 손에 뺨을 비비며, 유신이 눈을 깜박였다.
“당신도.”
고작 한 마디였지만, 닉도 유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실은 닉은 아직 사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벅지 사이에는 여전히 성난 성기가 빳빳하게 발기한 채였다.
“아니, 난 괜찮아. 무리할 필요 없어. 그래, 너만 괜찮다면 손으로 조금 도와준다면.”
하지만 대놓고 물어 오는 그 달콤한 제안을 닉은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욕망과 이성이 뒤섞여 횡설수설하는 그를 향해, 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넣어 줘요.”
그리고는 설마 하며 자신을 고쳐 보는 닉을 향해 수줍게 덧붙였다.
“나도 하고 싶으니까. 간만에, 끝까지.”
이 상황에서 눈이 마주치면 이미 끝이다.
닉은 유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어 콘돔을 꺼냈다. 의외의 장소에서 나온 의외의 물건에 유신이 피식 웃었다.
“왜 그게 거기서 나와요.”
“미안, 어젯밤에 미리 넣어 뒀어. 혹시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유신의 얼굴이 빨개질 차례였다. 그렇게까지 기대했는데 자신이 그가 씻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잘했어요, 니카.”
유신은 미안하다는 사과 대신, 일단 닉을 칭찬했다. 그대로 닉이 유신을 끌어안아 왔다.
“유샤.”
유신의 이름을 부르는 닉의 목소리는 마냥 달았다. 동시에 잔뜩 성난 그의 성기가 유신의 허벅지에 비벼졌다.
뜨겁고 단단한 그 감촉에 유신은 긴장 같은 흥분이 찌르르 제 척추를 타고 아래로 흐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엉덩이 안쪽 또한 마찬가지로 움찔거렸다.
성기만큼이나 닉도 흥분해 들뜬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유신은 좋았다.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가 오직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자신이 이렇게 그를 향한 독점욕이 가득 찬 인간인 줄 처음 알았다. 치밀어 오르는 사랑스러움에 유신은 닉을 더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여 금발로 덮인 뒤통수에 뺨을 비비고는, 눈앞에 보이는 귀 뒤쪽에 입술을 떨군다.
이제 닉은 유신의 뒤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아까에 비해 명백히 적극적인 손길이었다. 노골적으로 주름을 훑자 아까보다 한층 더 배어 나온 애액에 치적치적 젖은 소리가 났다.
움찔움찔하는 쾌감에 유신의 허리가 대놓고 흔들렸다. 자신이 졸라 놓고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유신은 닉을 말렸다.
“괜찮아요. 그냥 해도 되니까.”
실제로도 유신의 말대로 그의 안쪽은 이미 흠뻑 젖은 채 알파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지금 바로 삽입한다 해도, 닉이 워낙 크다 보니 조금 빠듯할 수는 있겠지만 무리는 아니었다.
“아냐, 네가 힘들 수 있잖아.”
정작 닉은 손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핑계는 유신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는데, 한껏 열중한 얼굴은 정말 그뿐만인지 살짝 의문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유신이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보다 한 박자 먼저, 닉의 손가락이 뒤쪽으로 파고들었다.
“아.”
진작에 흠뻑 젖은 내벽이 반가운 듯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거침없이 들어오는 손가락을 따라 쿨쩍쿨쩍 음란한 소리가 울렸다. 좀 더 굵은 것을 바라는 허리가 무의식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파고든 손가락이 안쪽에서 마디를 굽혀, 유신은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자지러졌다. 눈치 없는 내벽이 닉의 손가락을 조였다.
아무리 제 쪽에서 먼저 요구했다지만 너무 밝히는 것 같아 유신은 괜히 부끄러웠다.
아닌 척 흔들리는 허리를 애써 붙잡는데, 마치 그 상태를 다 읽고 있다는 양 닉이 두 번째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 또한 무리 없이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닉은 안쪽부터 부드럽게 늘려 가듯 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파고드는 틈 사이로 주륵 애액이 배어 나왔다.
“으응!”
결국 두 손가락이 안쪽에서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는, 유신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닉이 유신의 쇄골 위로 입술을 박았다.
“유샤.”
달콤한 목소리에 유신은 이미 한번 사정한 제 성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닉이 반쯤 발기한 유신의 성기를 손바닥 전체로 감싸듯 쥐었다. 뒤를 푸는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로 늘어 있었다.
동시에 앞과 뒤를 자극당하자 유신은 어쩔 줄 모르며 흐트러졌다. 젖은 내벽에 움직이는 대로 지꺽지꺽 소리가 나는 손가락을, 안쪽에서 세 방향으로 벌리자 그의 허리가 튀었다.
너무 과한 자극에 유신이 저도 모르게 닉을 끌어안은 등에 손에 힘을 주었다.
“니카.”
거의 동시에 닉의 손가락이 슬며시 유신의 뒤에서 빠져나왔다. 한꺼번에 떨어져 나간 손가락에 유신이 뭔가 모를 허전함을 느낄 때였다.
닉이 콘돔을 입에 물고 한 손으로 껍질을 뜯어냈다. 꽤나 그림이 되는 장면이었지만, 본인이 자각하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신이 홀린 듯 보는 앞에서, 닉은 콘돔을 흥분한 제 성기에 씌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나치게 흥분하다 못해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기세가 험악했다.
익숙한 손길이었지만 마음이 급한지 살짝 삐끗하는 닉에게 유신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메가의 손이 닿은 알파의 성기가 더 단단해지는 듯했다.
“일반 콘돔 사이즈면 찢어졌을걸요.”
유신의 말에 닉이 이미 안다는 듯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그대로 그는 유신을 눕히고 허벅지를 크게 벌리게 해 엉덩이까지 완전히 드러나도록 했다. 부끄러운 자세에 유신의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 두근거림의 원인은 수치심뿐만은 아니었다.
방금 풀어 둔 구멍이 기대에 찬 듯 움찔거리는 것이 실은 자신의 마음만 같았다. 앞쪽 성기도 이미 거의 발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닉은 곧장 본격적으로 박는 대신, 단단한 성기의 끄트머리로 구멍 근처를 꾹꾹 눌러 왔다.
민감한 구멍에 스치듯 닿아 오는 성기의 기세는 그저 뜨겁고 험악했다. 손가락과는 확연히 다른 뜨거운 감촉에, 유신은 절로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듯했다.
“싫어요, 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이번에도 유신은 닉을 조르고 말았다. 방금 전보다 꽃향기가 한결 짙어진 달콤한 페로몬이 닉을 유혹하듯 쏟아졌다.
어차피 참지 못하는 것은 닉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닉이야말로 꽤 전에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들어간다.”
그런 거 굳이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대답 대신 삽입이 쉽도록 좀 더 허벅지를 벌려 보였다. 그대로 닉은 천천히 유신의 안에 제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임신 중만 아니었어도 이미 몇 번이고 안쪽을 잔뜩 범하고 앞도 뒤도 엉망으로 적시게 만들어 버렸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닉은 마지막 남은 이성의 한 조각으로 조심스럽게 유신의 안으로 제 성기의 끝을 들이밀었다. 그래도 압도적인 크기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닿아 오는 뜨거운 감각에 유신은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닉은 지금 유신이 제 성기에 있는 주름 하나하나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간만이라 충분히 풀었다 해도, 워낙 크다 보니 유신은 숨이 버거웠다. 근래 삽입은 간만이라 더 그런 듯했다. 아무리 미리 풀어 두었다 해도 익숙지 않은 경험치만큼 유신의 내벽은 좁고, 닉은 상대적으로 너무 컸다.
하지만 아픔만이 아니라, 기대에 찬 허리가 성기를 받아들이는 대로 가볍게 흔들렸다.
무엇보다 오메가의 내벽이 반가운 듯이 알파의 성기를 반기고 있었다. 내벽은 맞춘 듯 벌어지며 받아들이고 있었고, 안에서 배어 나온 애액이 삽입을 도왔다.
“유샤.”
“니카, 흑.”
내벽에 바로 닿아 오는 뜨거운 감각이 선명해질수록, 유신의 목 안 깊은 곳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달래듯 유신의 앞쪽을 훑어 내리며 닉이 좀 더 유신의 안으로 들어왔다.
앞쪽의 제일 굵은 부분이 지나자 삽입은 확실히 수월해졌다. 그러나 겨우 전체의 삼분의 일 정도가 들어갔을 때, 닉이 심호흡을 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신의 몸을 생각해 여전히 조심스러웠던 것이었다.
유신이 그런 닉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싫어. 당신을 끝까지 다 가지고 싶어요.”
닉이 목구멍 안쪽에서 낮게 욕을 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던 중이건만, 유신이 저렇게 나오니 바로 이성이 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닉은 바로 유신의 안으로 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뿌리까지 다 박아 넣은 뒤에야 그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아.”
커다란 성기에 유신은 몸이 반쪽으로 나뉘어지는 듯했지만, 불쾌하다기보다 어딘가 충족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자신이 줄곧 원해 오던 것만 같았다.
“움직인다.”
이번에도 굳이 먼저 말을 한 뒤에야 닉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신은 그 사실이 왠지 불만스러웠다.
“아, 일일이.”
“응?”
“그렇게 일일이 말할 필요, 흑!”
갑자기 닉이 아래서 세게 박아 올려 유신은 반사적으로 신음부터 흘렸다. 닉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어 왔다.
“이렇게?”
누가 봐도 일부러 그러는 것에 유신은 조금 화를 내려 했지만, 닉이 바로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신은 그대로 흐트러지며 항의도 함께 먹혀 버렸다. 안쪽에서 느끼는 부분을 긁어내리다 다시 퍼억 쳐올리기를 닉이 반복하자, 유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니카, 흐응.”
“하, 유샤.”
물론 그래 봤자 어차피 더 급한 쪽은 물론 닉이었다. 맞춘 듯 자신을 감싸 오는 유신에게, 닉은 금방이라도 싸 버릴 듯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자신이 허리를 움직이는 대로 유신의 몸도 앞뒤로 흔들리는 것이 좋았다. 올려다보는 초콜릿색 눈동자에 어린 쾌감이 그를 기분 좋게 들뜨게 했다.
“니카, 나. 너무.”
조르듯 불러 오는 자신의 이름이 닉을 부추겼다. 그가 움직임을 빨리하자, 유신의 신음도 빨라졌다.
“응, 응.”
어느 순간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자각 없이 대놓고 달콤해져 있었다. 닉은 기세를 늦추지 않으며 엇박으로 쳐올렸다.
과한 자극에 유신이 지나치게 느껴지는지 흐느꼈다. 하얀 팔이 어쩔 줄 모르며 닉에게 매달려 왔다.
유신은 닉의 페로몬으로 온몸이 절여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음모가 제 엉덩이에 반복해서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선명했다.
반대로 닉 또한 훅 느껴지는 달콤한 페로몬에 이성이 마비되는 듯했다. 함께 보냈던 러트의 기억이 선명하게 그의 흥분을 부추겼다.
“흣.”
닉이 안쪽에서부터 느끼는 부분을 마구 찔러 올리자, 이미 한 번 사정했던 유신의 성기가 단번에 다시 단단해졌다. 과도한 자극에 버거워하면서도, 유신은 온몸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뒤부터 허리까지, 쾌감으로 척추가 녹아 버리는 듯했다.
닉의 성난 성기로 뒤를 꿰뚫린 채, 유신의 성기가 두 사람의 사이에서 꺼덕이고 있었다. 손도 대지 않았건만 완전히 빳빳이 일어선 것이었다.
“유샤, 좋아?”
퍽퍽 찔러 올리며 닉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의 숙인 고개를 타고 뚝뚝 땀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으응, 니카.”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야하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온몸이 더 깊이 원한다는 듯 움찔대고 있었다.
그저 닉을 받아들이고 느낀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저 닉이 좋아, 잔뜩 느끼며 매달리듯 끌어안을 뿐이었다. 이미 반쯤 눈이 풀려 있었다.
거기서 갑자기 닉이, 마치 숨을 고르듯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엉뚱한 부분을 찔러 왔다. 유신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잘 느껴지는 곳으로 닉을 유도했다.
“아, 좀 더, 안.”
일부러 유신이 제일 느끼는 부분을 비껴서 박아 오는 거였다. 너무 좋으면서도, 더 좋을 수 있는 것을 아는 만큼 유신은 더 애가 탔다.
하지만 대체 뭘 어떻게 할지 모르는 채 고작 조르는 것이 다였다. 쾌감에 지배당해 잔뜩 느끼며 매달리듯 닉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렇게 유신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제 움직임에 따라 박자를 맞추듯 쾌감을 좇는 것이, 닉에게는 마냥 사랑스러웠다.
“여기?”
드디어 닉이 제일 좋은 부분을 정통으로 푹 찔러 넣었다. 유신은 방금 전까지의 흥분이 거짓말처럼 확연히 더 흥분했다. 지나친 쾌감으로 바르르 떠는 몸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응, 좋아요. 더.”
“그렇게 좋아? 어디가? 여기?”
닉이 답하듯 순식간에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한 번에 끝까지 찔러 넣자, 유신이 너무 느껴 바로 자지러졌다.
“흑, 니카.”
“아님, 여기?”
“좋아요. 더어.”
안쪽까지 퍽퍽 찔러 넣자, 맞닿은 안쪽에서 젖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과도한 자극에 유신은 그저 흔들리며 흐느낄 뿐이었다.
닉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런 유신의 안으로 몇 번이고 괴롭힌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자극했다. 미묘하게 각도를 바꿔 가며 제일 느끼는 부분만 반복해 박아 대는 것이었다.
퍽퍽 박아 넣는 것에 따라 애액이 안에서 넘치듯 흘러내렸다. 유신은 제 내벽이 이미 녹아서 없어져 버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슬슬 한계라는 듯 닉이 더 속도를 올렸다. 유신도 그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퍽퍽 느끼는 부분을 찔러 올려지는 상태에서 그라고 딱히 다르지도 않았다.
절정이 멀지 않은 듯 닉은 조금 자세를 바꿔, 유신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한 다음 꾸욱 깊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유샤.”
닉이 제 이름을 부르며 한계인 듯 깊게 쳐올렸다. 유신이 닉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절정이었다. 닉의 성기가 세차게 정액을 토했다. 콘돔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뜨거운 열기에 유신은 제 안이 젖는 것만 같았다.
사정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몇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동시에 닉은 둘 사이에서 애처롭게 흔들리던 유신의 성기를 가볍게 손으로 훑었다.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당하는 쾌감에 한계 직전인 성기는 쉽사리 도달했다. 아까보다 한결 연해진 두 번째 정액이 두 사람 사이에서 튀었다.
이어진 틈도 안에서 흘러넘친 애액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콘돔이 없었다면 훨씬 더 엉망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둘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숨결이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뒤섞였다.
여전히 서로 꼬옥 껴안은 채였다. 닉이 살며시 유신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가만가만 뺨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두 사람의 시선이 겹쳐졌다.
달콤하게 웃고 있는 지독하게 잘생긴 얼굴이 천천히 유신을 향해 다가왔다. 이 사람은 이럴 때도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이제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감탄하며, 유신은 신이 예술적으로 조각한 듯한 그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사랑해요.”
유신의 달콤한 속삭임에, 닉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이었다.
“나도 사랑해.”
뜨겁게 달뜬 숨결이 겹치며, 두 사람의 입술은 당연하다는 듯 맞닿았다.
***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창밖은 훤했다. 백야 때문이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기는 아니었지만, 벌써 그 영향이 드러나고 있었다.
닉은 멍하니 창밖의 희뿌연 하늘을 바라보았다. 막 씻고 나와 샤워 가운 한 장 차림으로, 밝은 금발에 아직 젖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이 시기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밤의 가운데에 한밤중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이 그나마 남아 있지만, 조만간 그조차 거의 없어지다시피 바뀔 것이다.
물론 이 도시의 여름에도 해는 뜨고, 진다. 하지만 해가 지고 서녘의 어스름이 완전히 사라질 만하면, 진남빛으로 변한 하늘이 완전히 검은색이 되기도 전에 다시 동녘이 밝아 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래 왔기에, 여름에는 잠이 들 때도 바깥이 아직 밝다는 사실이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겨울에는 밤이 길었지만, 여름이 오면 다시 기나긴 낮이 시작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섭지 않았다.
반대로 처음 미국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는 여름에도 밤이 되면 완전히 어두워지는 것이 너무도 이상했었지.
그래, 그랬었다. 분명히 그랬다.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아무리 어두워도 아침은 다시 오고, 긴 밤이 기다리는 겨울이 지나면, 밤이 길었던 만큼 여름에 찾아올 낮은 길다는 것을.
“으응.”
침대 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닉은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유신이 잠결에 낸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닉은 조금 반성했다. 아무리 유신이 원했다고 해도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이 참았어야 했는데. 결국 따지자면 나중에 더 덤벼든 쪽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정작 유신은 닉의 내적인 고민은 전혀 모르는 채,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다. 느긋하게 울리는 쌕쌕 평온한 숨소리가 마냥 평화로웠다.
닉은 충동적으로 그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응.”
혹시 일어나나 했지만, 유신은 기분 좋은 얼굴로 닉의 손등에 뺨을 비벼 올 뿐이었다. 부드러운 뺨이 살짝 눌린 모습이 귀여웠다.
하고 나서 그대로 잠들었지만, 유신은 보송보송했다. 아까 닉이 뜨거운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헝클어져 흘러내린 앞머리 아래, 내리깐 속눈썹이 길었다. 그 아래 보기 좋게 오똑한 콧날, 모양 좋게 도톰한 입술이 있다. 이미지상 입을 살짝 열고 잘 것 같은데, 의외로 단정하게 꼭 다문 채 자고 있었다.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유신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닉은 가슴이 뛰었다. 이 오메가가 지금 제 옆에서 같이 잠들고,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해 준다니 불가사의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유신과 센터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만난 이후로, 닉에게는 매 순간 모든 것이 다 그러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여기 이 방에 다시 있다는 것부터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날 때만 해도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올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그렇게 마주하게 될 줄도.
몇 년 만에 마주 본 아버지는 기억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여전히 쓸데없이 고압감을 풍기는 잘생긴 외모와, 커다란 키나 체격은 같았다.
하지만 미묘하게 늘어난 주름과, 이제 더 이상 올려다보지 않고 오히려 내려다보아야 하는 눈높이가 달랐다. 아버지 쪽이 늙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엔 심각하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더 이상 별문제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받게 하던 관계가 어느새 별게 아니게 되었다.
그 사실이 허무하면서도 묘하게 편안한 이유는, 이제 자신은 혼자가 아니어서다. 그렇게 만들어 준 상대가 지금 옆에 있다.
이제 닉은 아예 침대에 앉아 유신의 자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물론 제일 좋은 부분은 이 기다림이 영원이 아니고, 그가 곧 잠에서 깨어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 빠를 필요도 없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일어나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 줄 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자신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렇게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최고의 행복이었다.
***
☞ 유신? 자기야?
☞ 자?
☞ 일어났어?
☞ 닉하고는 만났어?
☞ 괜찮아? 둘이 싸웠어? 자기 혹시 지금 상황 완전 망했거나 그런 거 아니지?
☞ 진짜, 진짜 괜찮지???
밀리가 보낸 메시지는 이미 열 개도 한참 넘어 있었다. 죄다 연락이 없어서 걱정하고, 답장을 재촉하는 내용이었다.
닉과 재회하고 정신이 없어서 던져둔 핸드폰을 드디어 확인한 거였다. 유신은 침대에 기대앉은 채, 빠르게 그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 미안, 밀리. 핸드폰 확인을 미처 못 했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 자기, 진짜 이번엔 너무 심했어. 기다리다 눈 빠지는 줄 알았다고.
☞ 어떻게 나한테 연락하는 걸 까먹어?
☞ 나는 닉 메드가 거기 가는 거, 너한테 바로 이야기했는데.
어지간히 서러웠는지 몇 개나 되는 메시지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 밀리, 아냐. 실은 그게 말야.
유신은 빠르게 요 이틀간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밀리에게 알려 주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닉과는 무사히 만났고, 그날은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으며, 다음 날은 아침 일찍부터 닉의 아버지와 식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뒤 관광지에서 닉이 구르는 바람에,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와야 했다고.
세세한 부분은 생략했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 병원? 괜찮아?
☜ 응, 애초에 다친 것도 아니었던걸. 검사 결과 이상이 없어서 바로 퇴원했어.
☞ 다행이다.
밀리가 너무 걱정할까 봐, 유신은 자신도 같이 입원해 검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돌아온 뒤 닉과의 뜨거운 밤을 떠올리고, 그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도 굳이 메시지에 적지 않고 슬쩍 넘긴 것은 당연하다.
문득 환히 밝은 창밖이 눈에 들어왔다. 백야로 유명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직 여름이 되려면 조금 남았지만, 벌써 낮이 제법 길어 이제 겨우 아침 7시인데도 바깥은 완전히 환했다.
시차를 고려한다면, 뉴욕은 슬슬 밤 12시가 된다. 유신은 밀리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답장을 보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퇴근 후 인터넷 생활을 즐기는 밀리가 한창 놀다가 슬슬 잠들 시간이었다.
덧붙여 지금 유신은 막 씻고 나와, 아직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였다.
주위가 밝아서 그런가, 꼭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는데 잠에서 빨리 깨고 말았다. 실은 같이 자던 닉이 먼저 일어나는 바람에 허전해서 잠에서 깬 거지만 본인도 닉도 자각은 없었다.
사실 유신은 자는 사이 닉이 몸을 닦아 줘 그렇게 더럽지는 않았지만, 닉이 씻은 것을 보자 왠지 씻고 싶어졌다. 대신 여전히 가운 한 장 차림인 그와는 달리, 유신은 씻고 나올 때 옷을 다 챙겨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젯밤과 거의 비슷한 멋없는 긴팔 티셔츠와 허리가 고무줄인 낡은 조거 팬츠였다. 어제 옷도 그렇지만, 오늘 입은 옷도 모두 닉이 뉴욕에서 일부러 챙겨 온 거였다.
예쁜 파자마라도 입으면 좋았겠지만, 유신은 요즘 그냥 이 차림이 제일 편했다. 무엇보다 예전에 비해 배에 살이 붙기 시작해 넉넉한 바지가 필수였다. 물론 이건 그의 배 속에서 열심히 자라는 중인 콩알이 덕분이다.
☞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죄다 나한테 계속 물어봐서, 엄청 난감했었다고.
마침 밀리에게서 추가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알고 보니 카페 루이의 사장인 루이스는 물론, 가브리엘이나 아이잭, 올가까지 죄다 밀리에게 저에 대해 캐물어 왔다고 한다.
☞ 물론 내가 너랑 연락이 닿기는 했지만, 그때는 나도 답장을 못 받던 중이었는데.
☜ 밀리! 진짜 진짜 연락 늦어서 미안.
유신은 거기서는 솔직하게 사과하기로 했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밀리를 귀찮게 하나 황당하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이었어도 밀리에게 제일 먼저 물어봤을 것 같기는 했다. 이해는 가면서도 밀리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생각하니 괜히 미안했다.
☞ 괜찮아, 괜찮아. 병원도 다녀왔다는데, 내가 봐줘야지.
정작 밀리 본인은 진짜 별생각 없는 듯했다. 오히려 태평하게 유신을 더 걱정했다.
☞ 닉은 괜찮지?
☜ 당연히 괜찮지
☞ 그럼 됐어, 자기야. 너그러운 내가 봐줘야지.
유신은 감격했다. 밀리는 역시 좋은 친구, 좋은 녀석이다. 배 속의 콩알이도 유신의 마음을 느꼈는지, 기분 좋다고 꼬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태동이란 게 한 번 느끼고 끝이 아니라, 일단 느끼고 나면 계속 느껴지는 그런 종류인 듯했다.
시선이 반사적으로 아기 아버지인 닉을 향했다. 그는 지금 방 반대편에 있는 제 짐 가방 더미에서 한창 무언가를 찾는 중이었다. 이것저것 잔뜩 싸 들고 온 것까진 좋았는데, 워낙 짐이 많다 보니 뭐 하나 찾으려면 계속 저런 식이었다.
유신도 슬쩍 베개 밑을 만졌다. 그 아래에는 그가 지난번 시내의 노점에서 샀던 물건이 숨겨져 있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투박한 종이봉투의 감촉에 유신은 괜히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 밀리! 뉴욕 돌아갈 때 내가 꼭 여행 선물 사 갈게.
☞ 당연하지! 러시아 과자가 그렇게 달다는데 너무 내 취향일 거 같아. 꼭 사 와. 기다리고 있을게.
☜ 응, 알겠어.
닉이 드디어 목적한 물건을 찾았는지, 짐 가방에서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 그래서, 자기야. 닉하고 화해는 제대로 한 거지?
☜ 응, 걱정시켜서 미안.
☞ 미안하면 앞으로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마침 밀리가 닉과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유신은 괜히 찔려, 닉에게서 슥 시선을 피하고 안 보던 척을 했다. 밀리는 신이 나서 계속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 그리고 혹시 닉의 가족들이 괴롭히면 바로 나한테 이야기하고.
☜ 에이, 안 그래. 다들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닉의 아버님도, 누님도.
무엇보다 유신은 닉의 팬으로서 예전부터 가족들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니 그것만으로도 솔직히 들떴달까.
☞ 보고 있으면 너희 가족들 생각났겠다. 너도 못 본 지 오래됐지?
하지만 이어지는 밀리의 말에 유신은 괜스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자연스레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뭘 하고 있을지, 식사는 했을지. 자고 있을지, 깨어 있을지.
아마도 지금 서울은 오후 1시일 것이다. 막 점심시간이 끝났을 즈음이다. 오후에 시작하는 가게 영업을 준비하고 있겠지.
“아.”
문득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발목을 쥐어 왔다. 어느새 닉이 침대 발치로 다가온 거였다.
“니카, 안 돼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유신은 닉을 향해 속삭였다. 하지만 말과 달리 밀어 내는 기색은 없었다. 닉이 유신의 발가락 쪽으로 손을 미끄러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싫어?”
“싫다기보다, 응.”
방금 씻고 나와 유신의 온몸은 아직 촉촉한 상태였다. 희미한 굳은살이 남겨진 발가락의 감촉이 좋아 닉은 별생각 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신의 표정을 보고 그도 자신과 같은 기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안 된다는지 모르겠다.
“봐, 좋으면서.”
닉이 손을 떼기는커녕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만져 와, 유신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니카, 제발.”
☜ 밀리, 이따 다시 연락할게.
유신은 간신히 밀리에게 인사를 보내 메시지를 적당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닉은 이제 거의 제 발을 양손으로 감쌀 기세였다.
“니카, 나 지금 밀리랑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이었는데, 계속 그러면 어떡해요?”
토라진 듯한 유신의 발언에도 닉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신의 표정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응? 무슨 이야기 하던 중이었는데, 유샤?”
“그냥, 당신이랑 무사히 만났고, 뭐 그런, 읏.”
닉이 엄지발가락과 발바닥이 이어지는 부분을 가볍게 간질여 유신이 움찔했다.
“애초에! 당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밀리한테 계속 연락을 못 하는 바람에 오해를 샀잖아요. 그거에 관해 설명해 준 것뿐인데.”
“아, 그래?”
유신은 발끈해 닉을 노려보았다. 닉이 눈썹을 올리며 그런 그를 마주 보았다. 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계속 말하지만 눈이 마주치면 이미 끝이다.
“풋.”
갑자기 유신이 피식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마주 보자 더는 참을 수 없어진 거였다.
닉이 냉큼 손이 닿을 만큼 유신의 가까이로 이동했다. 유신은 곤란하다는 듯 닉을 향해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얼굴이 완전히 웃고 있는 만큼 의미 없었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미소였다.
“어쩌죠, 니카? 난 역시 당신이 너무 좋아요.”
“뭐 어때? 나도 좋은걸.”
둘의 입술이 당연하다는 듯 맞닿았다. 숨결에서는 치약 향기가 났다.
“머리 마저 말려 줄까?”
닉의 말에 유신은 그제야 자신이 여태껏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앗, 아니요. 이미 다 말랐어요. 이거 그냥 깜박하고 있던 거.”
봐요, 말짱하죠? 하는 표정으로 유신은 급히 수건을 풀어 내 보였다. 왜인지 닉이 아쉬운 듯 입을 불룩하게 내밀었다.
“내가 말려 주고 싶었는데.”
“에이, 나도 내 머리 정도는 말릴 수 있어요. 애도 아니고.”
“응?”
“네?”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는 닉을 향해 유신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닉은 그냥 치근덕대고 싶었던 것뿐이고, 유신은 순수하게 말려 주는 행위에 집중한 거였다.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닉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유신이,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전화를 해야겠어요.”
“응? 방금 메시지 보냈잖아. 전화도 해?”
“아뇨, 밀리 말구요. 한국 우리 집에요.”
그 대답에는 닉도 멈칫했다. 그 역시 유신에게 부모님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은지 살펴 오는 다정한 청록색 눈동자를 향해, 유신이 작게 웃었다.
“응, 그러니까 곁에 같이 있어 주세요.”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유신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손으로 쓸어 넘겼다.
“혹시 같이 통화할까?”
이어지는 질문에 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아니고, 일단 이야기가 끝나면 부를게요. 그때까지는 옆에 있으면 충분해요.”
“아, 그럼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이 차림으로는 좀 그렇잖아.”
“괜찮아요. 영상 통화할 것도 아니고.”
“아냐. 기분이 다르잖아, 유샤.”
갑자기 닉은 신이 나서 옷을 갈아입겠다고 나섰다. 그대로 머리도 정리하고 오겠다며 잠시 욕실로 사라져 버렸다.
유신의 핸드폰 액정에는 이미 통화 버튼이 띄워져 있는 상태였다. 옷 갈아입는 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겠냐는 생각에 유신은 그 상태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순간 마침 스팸 광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 알람을 끄려던 유신은, 그만 실수로 통화 연결 버튼을 눌러 버리고 말았다.
그대로 전화를 잽싸게 끊기라도 했으면 됐을 텐데, 생각보다 빨리 통화가 연결되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 같았다.
“네, 엄마, 아빠. 저요, 유신이요. 갑자기 전화해서 놀라셨죠?”
입에 발린 인사말과 달리 지금 정말로 놀란 쪽은 고작 신호음 몇 번에 전화가 연결된 제 쪽이 분명했다. 애초에 아직 통화 버튼은 누를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 거긴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거 같은데. 가게는 아직 덜 바쁘죠? 네, 저는 잘 지내요. 너무 잘 지내죠. 아, 유호도 잘 지낸다고요? 그거 정말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고쳐 드는 유신의 손은,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다 못해 손톱까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아아, 역시 닉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 유신이 속상해해 봤자 이미 늦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여기 러시아예요. 상트페테르부르크, 니카의 본가에 왔어요. 신기하죠? 어릴 때 잡지에서 스크랩했던 바로 그 집 맞아요. 네, 니카의 아버님하고 누님한테도 인사드렸어요. 괜찮아요. 전 걱정 마세요. 다들 잘해 주셔서…….”
거기까지 말하고 유신은 어떻게 말을 이어 가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여기서 잘 이야기해야만 했다. 한 번은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계속 입 밖으로 토해 내고만 싶던 그 말들.
베타 가족 사이에서 당연히 베타인 줄 알고 살아오다 오메가로 발현한 지 십 년 가까이, 늘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단어 하나가 하나가 너무 무거워 그 무엇도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못했다. 유신으로서는 본의가 아닌, 예상치 못한 침묵이었다.
- 유신아?
말 없는 아들을 이상하게 여긴 듯 어머니가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거릴 따름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런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
유신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닉이 거기 있었다. 짐의 어디다 넣어 온 건지 턱시도 차림이었다. 밝은 금발도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있다.
옷 갈아입는다고 갑자기 욕실로 사라지길래 뭔가 했더니 처음부터 저럴 작정이었나 보다.
원래가 거적때기만 걸치고 있어도 멋있는 남자다. 간만에 보는 닉의 턱시도 차림에 유신의 눈이 절로 하트가 되었다. 아침에 잠깐 세르게이의 스리피스 정장을 보고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역시 턱시도는 턱시도다.
근데 왜 갑자기? 전화 때문이라면서 갈아입는 것도 이상했는데, 그 결과가 저런 각 잡은 옷차림인 것 또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저걸 챙겨 온 것부터가.
- 유신아? 왜 그러니?
하지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신의 어머니가 핸드폰 반대편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잠깐.”
닉이 그런 유신의 손에서 핸드폰을 넘겨받고는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자연스럽게 통화 상대방의 목소리가 주변으로 크게 울렸다.
- 무슨 일 있어?
대답 없는 유신을 그의 어머니가 슬슬 걱정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닉은 유신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신은 그것이 아까 자신이 부탁한 대로, 곁에 같이 있어 주겠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닉과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해도 좋을까? 이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엄마, 실은 말이죠. 저 사실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항상 두려웠어요.”
- 유신아, 갑자기 그게 무슨 이야기니?
“그냥 옛날부터 계속 하고 싶던 이야기예요. 무대에 올라가는 거 정말 좋아했지만요, 실은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항상 두렵기도 했어요.”
실패하거나 못하지나 않을까.
특히 오메가, 그것도 우성 오메가로 발현한 뒤로는 당연히 잘할 거라는 주변의 기대가 항상 자신에게는 너무도 무거웠었다.
무엇보다 그전에도 후에도 자신은 그냥 똑같이 자신인데. 여전히 당신들의 아들이고 형이고 제자일 뿐인데도, 발현 이후로 딱 잘라 다 큰 어른을 대하듯 미묘하게 바뀐 주변의 태도가 정말은 싫었더랬다.
하지만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만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계속 우수하고 자랑스러운 아들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괜찮은 척, 자신만만한 척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뭐가 진짜인지 알 수 없어졌다. 유학 오기 직전 충동적으로 발레를 그만두고 현대 무용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을 때는, 이거야말로 누군가가 말려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거기서조차 다들 전적으로 자신을 믿는다고 하자, 진심으로 조금 두려울 지경이었다.
결국 마치 벌이라도 받듯 먼 타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덕분에 결국 무용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을 때도. 결국 다음 학기 학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을 때에도, 그러다 자신이 술김에 대리모 센터에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정말은 오롯이 혼자서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 했더라도, 실은 같이 이야기하고 의지하고 싶었던 거다.
“윽.”
왠지 모를 울컥한 마음에 유신은 작게 신음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통화 상대방은 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묘한 긴장이 핸드폰 너머에서 느껴지는 것을 마냥 기분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난 다음, 드디어 천천히 대답이 돌아왔다.
- 이제라도 이야기해 줘서 고맙구나.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니?
놀랍게도 그 상대는 방금까지 통화했던 유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 쪽이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긴장해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났다.
“실은, 사실 저는.”
유신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누르며 안에서 토해 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 반대편 손은 여전히 닉에게 맡겨 둔 채였다.
***
“와, 갑자기 네 부모님하고 이야기하래서 깜짝 놀랐잖아.”
닉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며 뒷목을 쓸어내렸다.
시상식이라도 나가는 듯 턱시도를 차려입은 슈퍼스타가 그러니,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유신은 양손을 맞잡으며 즐거워했다.
“왜요, 니카? 말했잖아요. 내 이야기가 끝나면 부를 거라고.”
“그게 그런 의미였어?”
방긋 웃는 유신을 향해 닉이 어이없어했다. 유신이 여전히 웃는 채 대답했다.
“덕분에 우리 부모님하고 인사도 했잖아요. 계속 그러고 싶다고 하더니, 아니었나 봐.”
“음, 그렇긴 한데.”
- 아아, 자네가 유신과 교제하는 그 할리우드 배우인가?
- 세상에, 영화관에서 듣던 거랑 목소리가 똑같애.
유신이 부모님과 통화가 거의 끝나 가는 와중에 갑자기 부르길래 뭔가 했더니, 갑자기 제 부모님과 닉을 인사시켰던 거였다.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 그래서, 자네 우리 아들하고 결혼하는 건가?
- 에이, 여보. 그런 건 두 사람이 알아서 결정하겠죠.
- 당신은 좀 가만 좀 있어 봐! 지금 우리 아들은 임신 중이라고! 이런 건 아버지로서 분명히 확인해야지.
‘하, 할 겁니다. 당연히 합니다.’
그러다 닉은 얼렁뚱땅 결혼 선언까지 하고 말았다.
- 어머나, 축하해. 정말 잘 됐다.
- 추, 축하하네.
호들갑스럽게 돌아오던 결혼 축하는 덤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잘났고 그래서 임기응변에도 강하다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란 게 필요하지 않냐고. 투덜투덜 입 안으로 웅얼대는 닉에게 유신이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 덧붙였다.
“원래 계속 하려고 하던 것도 너무 재고 그러면 잘 안 되는 법이라고요. 상황에 따라 기세를 타서 몰아붙이기도 하고 그래야지.”
닉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그건 너한테도 해당되는 건가?”
“네?”
“어떻게, 부모님하고 이야기한 건 만족해?”
이어진 닉의 질문에 유신은 방심했다는 듯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곧 어깨를 늘어뜨리며 옅게 웃었다.
“사실 부모님께선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기도 해요. 고작 잠깐 몇 마디 한 거로 크게 달라진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하지만 말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당신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일단 이야기 시작은 했으니까 앞으로도 더 많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죠.”
처진 어깨와 반대로 그렇게 말하는 유신의 표정은 어딘가 산뜻해 보였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그런 유신의 마음을 읽었던 걸까? 복잡하게 지적하는 대신 그저 무심히 웃어 주는 닉에게, 유신도 배시시 마주 웃었다.
유신은 방금 자신이 닉에게 꽤나 미안한 행동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물론 닉이 계속 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방금 같은 방식은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닉의 턱시도 차림을 보니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달까? 그냥 자신도 닉의 가족을 만났으니, 그도 제 가족들과 인사시키고 싶은 마음도 컸다.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도 닉이 화도 안 내고, 오히려 기뻐하며 따라와 줬다는 사실이 참 고맙긴 했다.
“니카, 결혼식 관련해서 당신 부모님께도 말씀드려요?”
그리고 이게 또 무슨 소리냐면 어쩌다 보니 통화 중간에 결혼식 날짜까지 대충 정해 버렸다.
유신이 애 낳고 나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더니 부모님 둘 다 당연히 그게 올해 안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것도 애 낳고 바로는 못 할 테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면서, 자연스럽게 12월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해라고 하기엔 유신도 굳이 부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얼렁뚱땅 결혼식은 12월로 잠정 결정되었다. 유신의 부모님은 결혼식에는 꼭 참석할 테니 정확한 날짜가 나오는 대로 바로 알려 달라고 했다.
별생각 없어 보이는 유신과 달리 정작 닉은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중으로 당장 올가에게 연락해 12월의 결혼식 준비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부모님껜 내가 알아서 전할게, 유샤.”
“잘됐다.”
문득 유신이 닉을 향해 눈을 반으로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만족스러움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 유샤?”
“아니, 당신이 꼭 결혼 허락받으려고 턱시도를 입은 거 같아서요. 정말 어떻게 알고 그런 거예요? 어차피 영상 통화도 아니라서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사실 저도 오늘은 그냥 전화로 간단히 인사만 하게 할 생각이었고, 거기까지 이야기할 줄은 저도 몰랐다구요.”
“그렇지! 잠시 잊고 있었어.”
그리고 유신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마치 깨달았다는 듯, 닉이 피식 웃었다. 그 매력적인 입꼬리에 유신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빼앗길 때였다.
닉은 유신의 양 손목을 붙잡고 침대 앞으로 서게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를 앞에 놓고 훌쩍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만 바닥에 댄 닉의 그 자세는 확실히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니카? 뭐, 뭐예요? 가, 갑자기.”
누가 봐도 프러포즈를 하려는 기세에 유신이 얼굴을 붉혔다. 정작 닉은 진지하기만 했다.
“사실 이러려고 이렇게 입은 거야, 유샤.”
“왜요? 지난번에 식당에서 했었잖아요.”
“그땐 네가 입덧이 심해서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았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지난번은 가짜였으니까. 한 번은 제대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닉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물론 어디로 봐도 반지 상자였다.
그 안에서 예의 그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가 나오지는 않을까 유신은 순간 긴장했지만, 나타난 것은 평범하게 심플한 남자용 백금 반지 한 쌍이었다.
반지는 은백색으로 반짝이고, 너무 가늘지도 너무 굵지도 않은 것이 딱 적당했다. 작은 사각형이 이어진 듯한 표면 세공이 인상적이었는데, 덕분에 각도에 따라 보석이 박힌 것처럼도 보였지만 그렇지는 않고 전부 백금이었다. 사실 유신에게는 이렇게 보석이 없는 쪽이 더 취향이었다.
“이 반지를 준비한 지는 꽤 됐지만 계속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거든. 네가 여기 갈 때 팔찌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에야말로 꼭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어딘가 들떠 보이는 닉과 달리 정작 유신은 뭔가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떡하려는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당연히.”
그제야 닉은 자신이 제일 중요한 말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해, 이유신. 나와 결혼해 줘.”
유신의 초콜릿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닉은 속삭였다.
의외로 유신 쪽은 전혀 몰랐던 것 같지만, 닉은 훨씬 더 예전 처음 발레 콩쿠르에서 인사했던 순간부터 유신이 마음에 들었었다. 본인조차 잠시 잊고 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가브리엘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줄 상대에 대한 희망 사항을 물었을 때, 자각조차 없이 주르륵 튀어나오던 조건들에는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난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내 아이의 엄마라면 발레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수준급 이상으로.’
‘어두운 머리색이 좋아. 대신 얼굴은 희고.’
‘아니, 아예 아시안이 좋겠다. 동북아시아 쪽은 하얀 사람은 정말 희잖아. 거기다 어딘가 가냘프면서, 키는 작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예쁜 사람이 좋겠어.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형질은, 그래, 이왕이면 우성 오메가로 할까? 그리고 성별은 남자가…….’
솔직히 말하자면 닉은, 유신이 제 프러포즈를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고 살짝 자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유신에게서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조심스레 고개를 드는 닉의 시야에 턱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갸우뚱하는 유신이 들어왔다.
“아, 어떡하지.”
누가 봐도 명백하게 망설이는 중이라 닉도 얼결에 같이 당황했다.
“왜? 우리 서로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결혼 허락도 받은 거나 다름없잖아? 물론 너희 부모님은 아직 못 만나 뵀고 통화밖에 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 아기도 곧 태어날 거고 대충 결혼식 날짜도 정해졌는데, 이제 와서 거절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아닌데요.”
돌아온 대답도 부정이었던 데다, 거기서 유신이 몸을 훌쩍 돌려 제게서 멀어지는 바람에 닉은 더 사색이 되었다. 다행히 그가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리기 전에 유신은 금방 돌아왔다.
그 손에는 닉이 들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다른 상자가 들려 있었다. 덧붙여 방금 전 유신이 베개 아래서 숨겨 두었던, 황갈색 종이봉투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기도 했다.
“일어나요, 니카. 계속 그러고 있으면 무릎이 아프겠어요.”
유신은 닉의 양손을 붙잡아 일어나게 했다.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닉이 물었다.
“이게 뭐야?”
“확인해 봐요.”
상자를 열자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한 쌍의 남자 반지가 들어 있었다.
이번엔 금색이었다. 이쪽은 닉의 상자에 든 것보다 더 심심하게 생겼다. 아무 다른 장식 없이 금으로 된 긴 관을 반지 크기로 자른 듯한 형태로, 너무 번쩍이지 않고 은은하게 광택이 흘렀다.
그렇다. 강가의 장신구 노점에서 할머니에게서 산 것은 바로 이 한 쌍의 순금 반지였다. (물론 순금이라는 것은 노점 주인 할머니의 주장일 뿐이고 진짜 순금인지는 따로 알아볼 일이지만.)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도 반지를 준비했어요.”
즉,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생긴 금과 백금의, 금색과 은백색 두 쌍의 반지가 그들 앞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이래서 어떡하냐 그랬던 거로군.”
이제 알겠다며 닉이 혀를 찼다. 이제 와서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상관없긴 하겠지만.
문득 유신이 작게 탄성을 올렸다.
“나 지금 좋은 생각이 났어요.”
그는 닉의 오른손을 가져와 약지에 제 반지를 끼우더니, 닉이 가져온 반지도 함께 끼웠다. 이제 닉의 오른손 약지에는 두 개의 반지가 나란히 빛났다.
“이건?”
되묻는 닉을 향해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둘 다 그렇게 화려한 디자인은 아니라서, 이렇게 겹쳐서 껴도 꽤 괜찮죠? 즉,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 없이 둘 다 끼면 된다는 거죠.”
소소한 기쁨에 유신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닉이 놀란 것은 그런 부분도 물론 포함했지만 실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거 오른손인데.”
“네, 오른손.”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박자 늦게 닉도 드디어 깨달았다.
“유샤, 알고 있었구나! 러시아에서는 결혼반지를 오른손에 낀다는 걸.”
“당연하죠. 괜히 당신 팬을 십 년 넘게 한 게 아니라구요. 그래서 실은 지난번 청혼 때도,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이 오른손에 반지 끼워 줘서 엄청 부끄러웠어요. 마치 당신이 진심인 것 같아서.”
“난 항상 진심이었어.”
유신은 자신만만하게 닉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던 때와는 다르게, 정작 제 차례가 되자 한껏 수줍어하며 머뭇머뭇 제 오른손을 내밀었다. 닉이 남은 반지 두 개를 차례로 유신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하지만 반지를 다 끼우고서도 닉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유샤, 그래서, 프러포즈, 대답은.”
“아, 안 했구나.”
그제야 유신은 자신이 제일 중요한 프러포즈에 대한 대답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껏 긴장한 닉을 향해 유신이 왈칵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결혼하죠,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뭘 굳이 그런 걸 말로 해야 하냐는 듯 유신은 어딘가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닉은 그저 기뻐하며 유신을 끌어안았다.
그때 유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갑자기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닉도 이제는 바로 놀라기보다, 뭔가 하고 그런 유신을 가만히 살폈다. 그게 정답이라는 듯 유신은 바로 고개를 들어 닉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니카, 콩알이도 아빠가 좋대요.”
“정말?”
둘은 기뻐하며 거의 동시에 유신의 배에 손을 가져갔다. 나란히 놓인 오른손 약지에서 각각 금과 백금, 두 개의 반지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사진이 게시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좋아요’가 미칠 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날 할리우드 슈퍼스타 닉 메드의 공식 SNS 계정에는 ‘기념’이라는 단어와 함께, 반지를 끼고 맞잡은 두 개의 손을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속 두 개의 약지에는 각각, 금과 백금의 심플한 두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어떻게 봐도 결혼반지고, 어떻게 봐도 결혼을 자축하는 게시물이었다. 왜 반지가 두 개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터넷 연예 뉴스에 속보가 뜨고, 축하 댓글이 계속해서 달렸다. 댓글 중 예리한 몇몇이 왜 오른손이냐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줄줄이 올라오는 댓글에 묻혀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아주 가끔 닉의 본국인 러시아에서는 결혼반지를 오른손에 낀다는 정답이 올라왔지만, 이건 더더욱 묻혔다. 어차피 크게 중요한 사항도 아니었다.
이후 한동안 심플한 결혼반지를 두 개 겹쳐서 끼고 다니는 것이 멋져 보인다며 일종의 유행이 되기도 했다. 그중 몇몇은 남달라 보이겠다면서 일부러 오른손에 두 개의 반지를 끼고 다니기도 했지만, 물론 그런 것은 모두 이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정보일 것이다.
- 제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