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화 (2/324)

2화

복사기가 고장 났다. 이놈의 복사기는 한 번도 제대로 일한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을 괴롭히는 대머리 사수처럼 이 회사에 입사한 지 3년이 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괴롭혔다.

특히 지금같이 야근을 자처해야 할 정도로 바쁜 날, 복사기가 고장 나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은 없었다.

“제발… 오늘 진짜 바쁘다고… 중요한 회의가 곧이라 밖에 나갔다 올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이를 갈며 복사기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애걸복걸했지만 매정한 복사기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복사기와 씨름하던 재언은 전원을 껐다 켰다 하는 노동을 반복적으로 한 뒤에야 복사기를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복사기와의 씨름으로 멘탈이 털린 재언은 복사기에서 나오는 종이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대머리 사수가 5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도 기다릴 수 없었는지 다가와 잔소리를 퍼부었다.

“신 사원! 내가 복사해 놓으라고 한 자료, 아직도 못했어? 사람이 왜 이렇게 굼떠? 중요한 회의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고 했잖아.”

“…네.”

‘누가 봐도 복사기와 씨름하는 사람이었지 않나.’

옆을 지나가면서도 끝나지 않는 김 대리의 깐족거림에 살의가 들끓었다.

신재언은 입사하는 순간부터 준수한 얼굴, 커다란 키, 떡 벌어진 어깨로 회사를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물론 밝은 인사성으로 지금까지도 두루두루 인기가 많았다.

그런 그를 싫어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김 대리였다.

그는 볼품없이 배만 볼록 튀어나온 체형에 머리숱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꾸미고 다니지도 않으면서 성격도 나쁘고 만년 대리인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적어도 사원 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김 대리는 늘 신재언이 하는 행동마다 트집을 잡기 바빴다.

주변에서 김 대리의 잔소리를 얼결에 듣게 된 이들이 고개만 빼꼼 들어 재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만년 김 대리의 히스테리를 대신 받아 줄 생각은 없었는지 이내 못 본 척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망할 놈…….’

재언은 마음속으로 김 대리의 머리나 더 벗겨지라고 저주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몇몇 사람들과 다시 한번 회의 자료를 꼼꼼히 확인하며, 정리해 한 부 한 부 클립으로 묶었다. 그러다 보니 별일 아닌데도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갈까?”

“좋아요.”

회사가 무척 바쁜 시기라 다들 점심시간이 20분은 훌쩍 지나서야 누군가의 말에 하나둘씩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재언도 동기들이 좀비같이 질린 안색으로 등을 툭툭 칠 때쯤에서야 본인이 맡은 일을 내려놓고 사무실을 나섰다.

“김 대리 행패가 요즘 더 심해졌지?”

다른 팀에 속한 입사 동기 최윤정이 나란히 걸으며 재언의 어깨를 토닥였다.

“…익숙한 일이라서요.”

미안하다는 듯한 그녀의 쓴웃음을 보면서 신재언은 방금 그녀가 김 대리의 얼토당토않은 행패에도 나 몰라라 시선을 돌렸던 걸 떠올렸다.

물론 오지랖 부리며 끼어드는 것이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단 걸 알기에 서운하다거나 악감정이 생기진 않았다.

“이번에 승진이 또 무산됐다더라. 곧 너랑 직급 나란히 할 거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나 보지.”

“하하.”

“그렇게 습관적으로 부하들을 괴롭히니까 만년 대리인 거야.”

편안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배는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김 대리처럼 지방이 쌓인 게 아니고 올해 초 임신한 임산부였다.

사실 그녀는 함께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신재언에게 고백하고 차인 적이 있었다. 그 일로 데면데면한 사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녀가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지금까지도 잘 지냈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으니 구내식당 한편에 놓인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까부터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는 이번에 탈옥한 죄수 이야기였다.

그는 염력계 빌런으로 돈 때문에 다섯 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죄를 지은 자였다. 무차별적인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빌런의 교도소라 불리는 돌핀으로 이송하던 중 그를 따르는 잔챙이들로 인해 차량이 전복되면서 도주했다고 나왔다.

정부는 물론 히어로 협회까지 한바탕 뒤집어질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죄수의 이름은 강민철, 주특기는 염력을 이용한 폭파였다.

“정말 무섭다니까… 그래도 여기까진 피해가 없겠지?”

강민철의 얼굴 사진과 함께 아주 위험한 능력을 가진 빌런이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속보를 보던 신재언이 문득 들려온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기엔 ‘레헬’이 있잖아.”

최윤정이 볼록한 제 배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메밀국수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깨작거리는 게 영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신재언이 그녀의 앞접시에 돈가스를 몇 점 올려 주었다.

“이거라도 좀 드세요. 아이도 있는데 잘 드셔야죠.”

“분명 이게 먹고 싶었는데 냄새를 맡으니까 영 안 넘어가네. 고마워, 재언 씨.”

“뭘요.”

‘안전’하다라……. 그래, 전 세계에서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있는 이곳, 강남은 히어로 협회의 본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작은 땅덩어리에 세계적으로 중요한 본부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전부 ‘레드-헬-파이어’ 덕분이었다. 그는 히어로명으로 불리는 걸 아주 끔찍하게 여긴다고 소문이 났지만 어쨌든 그의 막강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강남은 이미 불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레드 헬 파이어, 통칭 레헬이라고 불리는 그는 세계에서 유일한 복수 능력자로 히어로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히어로 중에 가장 강했다.

그가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빌런들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실제로도 레헬이 한국에 있는 날엔 빌런들의 범죄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지기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돈가스를 한입에 욱여넣은 윤정이 한참 동안 우물우물 씹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흑… 지금 중요한 건 탈출한 빌런이 아니야. 오늘까지 은행에 가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빨리 다녀오는 건요?”

아직 점심시간이 이십 분가량 남은 데다가 회사 옆 건물에 은행이 있으니 운이 좋으면 십 분 내로 끝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건 윤정도 마찬가지였는지 남은 메밀국수를 급하게 후루룩 마시듯 먹고 일어나 가 버렸다.

신재언이 그러다 체하면 어쩌냐고 천천히 먹으라고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녀는 이미 식당 밖으로 나간 뒤였다.

혼자 남아 아직 접시에 가득한 음식을 다 처리하고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 은행으로 향했다. 아무리 빨라도 아직 은행에 있을 시간이니 은행 업무가 얼마나 더 늦어질지 확인하고 팀장에게 대신 말해 줄 생각이었다.

팀장도 요즘 회사 일이 바빠 점심시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걸 잘 아니 오 분 정도는 너그럽게 봐줄 것이다. 밴댕이 소갈딱지인 김 대리와는 달리 요령 있고 마음이 넓은 박 팀장은 팀원들을 감싸 줄 줄 아는 멋진 상사이니 말이다.

“…응?”

은행 입구에 선 신재언은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기가 묘하게 고요했다. 밖으로 나오는 사람도 없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은행이 점심시간에 한적할 리 없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왠지 모르게 이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점이다.

묘한 기시감에 한참을 은행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신뢰했다.

사실 신재언은 ‘럭키 가이’라는 이름의 정신계 능력자였다. 운이 좋을 뿐인 그의 능력은 광범위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저 길 가다가 만원을 줍거나 시험 기간에 봐 두었던 교과서 페이지에서 문제가 나온다거나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공부를 한 날이면 쪽지 시험이 이뤄졌다.

그렇다고 로또 1등에 당첨되거나 인생 역전할 정도의 운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불길한 기분이 들면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뒤를 돌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윤정이 은행에 있다는 걸 몰랐다면 이런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곳엔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은행에 들어간 게 대머리 김 대리였다면 오히려 기분 좋게 줄행랑을 쳤을 텐데 말이다.

신재언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눈을 꼭 감은 채 은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허탈하게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은행 안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외국에서나 쓸 만한 총기류를 든 무장 강도들이 안으로 들어온 신재언을 일제히 노려봤다.

“여기 인질 한 명 추가요.”

두 손을 등 뒤로 결박당한 신재언이 끌려간 곳엔 윤정이 꿇어앉아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제외하면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괜찮으세요?”

“응. 미안해, 재언 씨. 나 때문에…….”

“아니에요.”

겁먹은 윤정을 달래며 신재언은 은행 안을 눈으로 훑었다. 인질로 보이는 이들이 꽤 되는데 이상하게 밖에선 아무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히어로나 경찰이 나서지 않는 걸로 보아 지금 상황이 밖으로 새어 나가진 않은 모양이다.

‘능력자가 있나? 무슨 능력이지? 결계? 아니면 소음 차단? 강남 한복판에서 은행을 털 정도라니.’

이런 놈들은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간혹 은행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 비명을 지르거나 소란을 떨어 개머리판으로 호되게 맞아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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