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서울에서도 강남은 굉장히 안전한 지역인데,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니 어느 정도 능력에 자신이 있는 듯했다. 팔을 꾸물거리며 양손을 결박한 끈을 풀어 보려 했지만 포기했다. 신재언은 남들보다 운이 좋을 뿐 별다른 능력은 없는 소시민이었다.
“정말 막장이 아니면 나중에 인질들을 다 풀어 줄 거예요. 그때까지 좀 참아 봐요.”
갑자기 아까 느꼈던 것과는 다른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불운을 직감할 수 있다는 면에선 유용한 능력이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때, 총소리가 들려왔다.
탕-!
“꺄아아악!”
“으악!”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자 다시 한번 더 총소리가 울렸다.
탕-!
공포심으로 인해 조용해진 인질들을 훑으며 토끼 가면을 쓴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체격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 남자의 드러난 팔뚝은 문신으로 가득했다.
“잘 들어. 이제부터 네놈들을 인질로 삼아 히어로를 한 명씩 불러서 죽일 거다. 천하의 레헬도 네놈들을 다 구할 순 없겠지.”
‘노리는 게 돈이 아닌가?’
돈이 아니라 인질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은행을 선택한 것일까.
신재언이 생각에 빠진 사이 우락부락한 남자가 가면을 벗어 맨 얼굴을 드러냈다.
“헉!”
빌런이 자의로 얼굴을 드러낸다는 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얼굴은 아까까지 느긋하게 밥을 먹으며 구경했던 TV 화면 속의 탈옥범 강민철과 똑같이 생겼다.
그의 주변으로 모인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강민철의 탈옥을 도운 부하들이 분명했다.
“히어로 놈들의 목을 가져가서 ‘그분’께 인정받아 한자리 꿰찰 거야. 네놈들은 그를 위한 발판이다. 반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이 총과 내 능력으로 죽여 주지!”
침까지 튀겨 가면서 소리친 강민철이 손을 휘두르자 바닥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며 은행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번에는 윤정도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는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갑자기 몸을 웅크려 고통을 호소했다.
“배, 배가… 배가 아파!”
“윤정 씨, 정신 차려요! 젠장, 이봐! 여기 임산부가 있어. 이 사람은 보내 줘!”
인정에 호소하려 해도 상대는 빌런이었다. 그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신재언의 복부를 발로 차 나뒹굴게 한 뒤 머리카락을 잡아 올렸다. 재언의 푸른색 눈동자를 마주한 강민철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머리를 놔주었다.
“면상 한번 잘났군. 이런 놈들은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말한 강민철이 돌연 총을 들어 윤정을 향해 겨눴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신재언이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윤정을 그의 시야에서 가리려는 듯 막아섰다.
“임산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흥, 웃기는군. 그딴 자비는 네 히어로에게서나 찾아. 이 몸은 ‘그분’께 인정받아야 하는 몸이야. 그깟 계집과 태어나지도 않은 애새끼 죽이는 걸로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강민철이 품 안에서 검은색 십자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신재언은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깊게 한숨을 쉰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으아악!”
그 순간 강민철의 주변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바닥이 검게 변했다. 검게 물든 바닥에서 새하얀 손목이 그의 발아래에서 발목을 감싸며 기어 나와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인간의 손을 닮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인간이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게 꺾여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는 강민철과는 반대로 그의 부하들과 다른 인질들은 그가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두목? 왜 그러십니까?”
총을 든 부하 한 명이 강민철에게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의 발목을 감싸 쥐고 으스러트릴 듯 힘을 준 새하얀 손은 없어지지 않았다.
강민철이 마구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향해 총을 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호호호호.’
이윽고 검은 바닥에서 온통 새하얀 얼굴의 여성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을 가진 이였다.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피부와 길게 찢어진 입, 검고 기다란 손톱까지 세간에서 묘사하는 귀신과 흡사했다.
그런 몰골로 눈앞에 나타났는데, 강민철이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강민철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시작된 두목의 이상행동에 부하들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제길, 여기 또 능력자가 있는 건가?”
“무슨 짓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형님을 놔주는 게 좋을걸!”
“당장 멈추지 않으면 이 새끼 목이 날아갈 줄 알아!”
“히이익.”
부하 중 누군가가 인질을 한 명 붙잡고 허공에 소리쳤다. 급기야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안경 쓴 남자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눴다.
붙잡힌 인질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도 불쌍해 보이는 인질을 향해 신재언이 살짝 고갯짓했다.
어느새 늘어난 귀신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하나둘씩 무장 강도들을 붙잡고 입을 벌려 정기를 흡수했다. 순식간에 강도들의 영혼이 모두 귀신에게 먹혀 버렸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강도들이 총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하나둘씩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어떻게 된 일이야! 네 놈, 무슨 수작을 부렸어!”
강민철이 비명을 내지르며 마구 능력을 사용했지만, 실체가 없는 귀신들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저, 저 사람 왜 저래?”
윤정이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엔 강민철이 이유 없이 갑자기 발작하고 부하들이 픽픽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은행 안에 있는 인질들의 시야가 가려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유일하게 이곳에서 가장 멀쩡해 보이는 신재언이 강민철과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난 너 같은 부하 필요 없어.”
“히익, 허으윽, 서, 설마…….”
강민철이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지자 검은 바닥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긴 머리에 소복을 입고 혈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여성이 검게 칠해진 손톱을 뽐내며 나타났다.
“아버지, 그는 저희가 제법 눈여겨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차지 않으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말 섬뜩했다. 하지만 긴장할수록 표정이 굳고 무뚝뚝해지는 신재언의 성향상 그런 마음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덜덜 떨기만 했을 뿐이다.
그녀는 능력자인 빌런들을 손쉽게 처리한 뒤 재언에게 무언갈 바라는 것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런, 그런 놈은 필요 없어.”
“아…….”
그녀, 다크 카오스의 일곱 번째 자식인 귀신들의 성녀는 겁에 질려 잔뜩 굳은 신재언의 대답을 듣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아, 역시 아버지세요. 저런 품위 없는 자는 자식으로 거두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시지요? 아버지의 완벽한 안목에 적합하지 않은 쓰레기가 감히 심기를 어지럽혔군요!”
그녀의 감격 어린 목소리는 귀신처럼 스산하며 가느다랗고, 히스테릭했다.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배경음 삼아 눈을 부릅뜨는 게 여느 공포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귀신 그 자체였다.
언제 봐도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그의 뒤를 따라붙은 게 그녀였다니,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저놈의 계획대로 히어로 놈들의 목을 베는 것도 좋았을 거예요… 호호호…….”
“아니, 됐어. 그만 돌아가.”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는 인질들을 순식간에 저승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위험한 빌런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지옥에 있는 악귀를 불러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귀도술이 주특기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멋대로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소름 끼치는 능력이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은행은 물론 이 일대가 귀신들의 소굴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지간한 물리적인 공격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고 교회나 바티칸의 신부들 정도만 그녀에게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했다.
이곳에 있는 인질들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든 것 또한 그녀의 능력이었다.
신재언은 그 능력을 처음 만났을 때 겪었는데 그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서웠다.
“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일곱 명의 자식 중에 가장 충성심이 강한 그녀는 신재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검은색 십자가를 들고 바닥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으스스했던 분위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윤정 씨, 괜찮으세요?”
“어……? 아까까지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는데?”
“빌런들의 짓인가 봐요.”
여기서 아는 척하면 수상해 보일 테니 모르쇠가 정답이었다. 자신은 가늘고 긴,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윤정에게 재언은 빌런들이 비명을 지르더니 하나둘씩 픽픽 쓰러졌고 자신도 갑자기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간략히 설명했다.
다행히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신재언에게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윤정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겉으로는 크게 다치진 않아 보였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는지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곧이어 신고를 받아 달려온 경찰과 히어로들이 은행에 도착했다. 불안한 얼굴로 구급차에 오르는 윤정에게 팀장님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 회사 일은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서 몸조리나 잘하고 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출발하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재언이 은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과 구급대원들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옮기는 중이었다.
사건 현장을 살피는 히어로들을 말없이 쳐다보던 신재언은 남몰래 한숨을 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은행에 침입한 빌런 중 강민철의 부하 한 명이 소리와 관련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은행 안에 온갖 소란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주 섬뜩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시신들을 보며 히어로들은 ‘귀신들의 성녀’ 짓이라고 입을 모아 추측했지만, 그것이 이후에 공식적으로 발표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사망한 이들이 전부 빌런이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의 성녀’는 다크 카오스의 일곱 번째 자식인 만큼 아주 유명한 빌런이었다. 그녀가 죽인 바티칸 신부만 수백 명이었기에 요주의 빌런 중 하나였다.
그런 ‘귀신들의 성녀’가 빌런들에게서 위험에 빠진 시민들을 구해 냈다?
이 사건의 전말이 널리 알려지면 가장 곤란한 건 히어로 협회였다. 그렇기에 사건은 아마 축소될 대로 축소된 채 세간에 알려질 것이다.
“휴…….”
신재언은 히어로 협회가 어떤 결정을 할지 이미 짐작했지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기에 속으로 덜덜 떨었다.
그리고 그는 ‘귀신들의 성녀’라고만 불리는 그녀의 이름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기에 매사 조심해야 했다.
‘마리암’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어렸을 때 부모가 죽고 남동생과 함께 자란 고아였다. 기억나지 않는 어렸을 때부터 귀신을 보아 온 그녀를 재언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능력을 각성시켜 주었다.
그 후에는 당연하게도 어엿한 다크 카오스의 자식이 되어 세계를 혼돈에 빠트리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물론,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신재언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