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4화 (4/324)

4화

“눈엣가시 같은 레드-헬-파이어 때문에 공들인 일이 무산될 뻔했습니다.”

‘다행이다.’

“언젠간 그자의 머리를 뽑고 그 위에 오물을 뿌려 주도록 합시다.”

‘아니… 그건 좀…….’

이번에 그들이 모인 곳은 제법 빛이 들어오는 응접실이었다. 하지만 창밖에서는 비바람과 파도치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그들은 절벽에 있는 별장으로 추정되는 저택 안의 소파에 앉아서 우중충한 분위기는 다 내고 있었다.

당장 내일 있는 출근 때문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번에 회의를 한 번 빠졌다가 대한민국이 피바다가 될 뻔한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참았다.

회의의 주제는 항상 그렇듯 ‘레드 헬 파이어’였다.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서 그를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히어로인 레드 헬 파이어는 명실상부 세계 최강이었다. 그렇기에 여기 있는 일곱 명의 거대 빌런이 한꺼번에 덤벼도 상대하기 벅찰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사실을 굉장히 자존심 상해하지만, 신재언은 그 덕에 세계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안심했다.

“하지만 우리는 파괴를 계속할 겁니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위대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무슨 종교단체를 보는 것 같네. 그것도 사이비.’

저 말이 나온다는 건 이제 회의가 마무리된다는 뜻이었다. 레헬의 욕으로만 가득했던 회의였지만 신재언은 이제 그 정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다음에 다시 만나 뵐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벽에 이상하고 화려한 문양이 잔뜩 그려진 문이 생겼고 검은색 망사를 쓴 장신의 사람이 일어나 공손하게 문을 열며 손짓했다.

그는 체어맨이라는 빌런명을 가진 빌런으로 공간 전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문 너머에 있는 공간이 정상적이고 안전하기를 기대하는 건 어렵지만 신재언에게는 그저 편리한 능력일 뿐이었다.

체어맨은 다크 카오스의 네 번째 자식으로 늘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3m는 넘길 듯 커다란 신장이 특징이었다.

신재언은 그가 능력을 각성하기 전에 본얼굴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전신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진 화상을 입었는데 그의 부모가 자식의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인 탓이었다.

물론 체어맨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부모는 물론, 다른 무고한 사람들마저 불구덩이에 빠트려 자신과 똑같은 몰골로 만드는 걸 즐기는 미치광이였다. 손톱이 없어 항상 끼고 다니는 장갑에는 늘 피가 묻어 있었다.

‘…매번 봐도 무서워.’

신재언은 이곳에 모인 일곱 빌런 중에 그가 가장 거북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입만 열면 아버지 타령만 했다.

그나마 가장 잘 아는 사실은 자신이 아는 빌런 중에 체어맨이 가장 잔인하고 악독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고문하는 그에게 신재언이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눈을 찌푸리자 아버지의 눈을 더럽혔다고 자신의 눈알을 뽑아 버리려는 기괴한 짓까지 했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체어맨이 중얼거리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재언은 문을 통과했다. 어두운 시야가 순식간에 환해지며 그가 사는 원룸 안으로 들어왔다.

서울 외곽에 있는 신재언의 자취방은 그가 열심히 모은 돈과 겨우 대출받아 얻은 1.5룸의 집이었다. 나름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애정이 어린 집이었다.

물론 그의 자식들…….

신재언이 직접 자식들이라고 지칭하기에는 굉장히 당황스럽지만 어쨌든 세간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기에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사실 왜 아버지라고 부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자식들이 원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떠들어 댔지만 신재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집의 주인을 살해하고 차지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자취방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재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 봤자 누가 숨어 있는 걸 알아차릴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안정을 위한 행동이었다.

육안으로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재언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켰다.

[^^ 오늘은 빨리 끝났나 봐요.]

문자 메시지의 발신인은 신재언이 요즘 호감을 느끼고 만나는 상대였다. 상대는 정말 천사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자식들에게 대놓고 알릴 생각은 없었다.

물론 꽃뱀 같은 놈과 만난다며 입이 삐쭉 나오긴 했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에 토 달지 않겠다고 했다.

괜히 가만히 있는 녀석들에게 속마음을 말했다가 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 너머 전 세계가 피바다로 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재언은 불길한 상상이 끝도 없이 번지기 전에 생각하는 걸 멈추고 문자 메시지의 답장을 보냈다.

[네, 민재 씨도 오늘 빨리 끝났어요?]

게이인 신재언의 인생에서 연애 대상은 대부분 그와 성별이 같았다.

외모 허들만 높았던 탓에 지금까지 신재언의 연애 상대는 정말로 잘생겼었다. 하지만 얼굴과 다르게 성격이 개판이었던 경우가 아주 많았다.

일례로 이전에 사귀었던 어떤 놈은 신재언 모르게 관계를 카메라로 촬영하다가 걸려서 지금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게 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정도로 신재언은 의도치 않게 인성에 하자가 있는 놈들만 골라서 사귀어 왔다.

[만나고 싶어요.]

[그럼 우리 집으로 오실래요?]

그런데 지금 만나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쓰레기들과는 전혀 달랐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근사하고 잘생긴 외모에 성격까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그야말로 신재언의 완벽한 이상형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와, 그거 유혹이에요? ^-^*]

“하하, 귀여워.”

재언은 상대가 보낸 메시지의 답장을 확인하고 흐뭇하게 웃으며 TV를 켰다. 때마침 TV 화면에서는 꽃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사내가 피가 잔뜩 묻은 얼굴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히어로 레드-헬-파이어였다. 그는 얼굴이 알려지고 거주지까지 자세하게 공개되어도 무서울 게 없는 무적의 복수 능력자였다.

그의 능력 중 하나인 붉은 불꽃은 빌런들의 영혼마저 태워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 꺄아아악!

이제 막 빌런들을 무찌른 참으로 보이는 레드 헬 파이어에게 아나운서가 인터뷰를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 한 발 내딛는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레헬이 자신의 발아래 쓰러진 빌런의 뺨을 송곳으로 꿰뚫어 입을 찢어 버린 것이다.

지금 와서 모자이크한들…….

TV 화면 안은 아수라장이 펼쳐졌고 모자이크가 되기 전의 끔찍한 장면은 생중계로 전 세계에 퍼져 버렸다. 쥐고 있던 송곳을 바닥에 내던진 레헬이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히며 싱긋 웃었다.

- 날 레드-헬-파이어라고 부르면 입을 찢어 놓겠다고 했잖아…….

“…….”

사실 신재언도 ‘레드-헬-파이어’라는 그의 히어로명을 처음 들었을 때 ‘핫쉬…’하고 기겁했었다.

비록 자신 또한 ‘다크 카오스’라는 어마어마한 빌런명을 가졌지만 말이다. 자기 자신이 빌런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수줍은 얼굴로 인터뷰를 마친 레헬이 유유히 사건 현장을 등지고 빠져나갔다. 그런 모습을 빠짐없이 바라보던 신재언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조금 전 레헬의 행동에 관해 TV는 물론 인터넷도 속보로 아주 떠들썩했다. 물론 다들 레헬이 빌런의 입을 시원하게 찢어 놨다는 내용만 따로 잘라서 부각했다.

그들에게는 그가 얼마나 많은 빌런을 잡고 얼마나 빨리 범죄를 진압했는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딱히 언론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레헬이 범죄자를 처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레헬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레헬은 ‘다크 카오스’의 일곱 자식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빌런 ‘엔레이드맨’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유일한 히어로였다. 덕분에 엔레이드맨은 약 두 달간 꼼짝도 못 하고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딩동-.

문득 초인종이 울렸다. 신재언은 이미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어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방문에도 놀라지 않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열자 붉은색의 화려한 장미꽃 다발을 한 아름 안은 아름다운 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방금까지 TV 화면 속에서 움직이던 레드-헬-파이어, 레헬이었다.

“안녕하세요, 재언 씨.”

“…하하.”

그리고 신재언의 썸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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