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5화 (5/324)

5화

‘레드 헬 파이어’는 신재언이 봐 온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먹으로 그린 것 같은 정갈한 눈썹에 뭘 바른 것도 아닌데 반짝이는 분홍색 입술과 살짝 홍조를 띤 뺨이 신재언의 마음을 흐물흐물 녹였다.

‘아차… 저 얼굴에 홀려 말하는 걸 잊을 뻔했네.’

신재언이 뒤늦게나마 표정 관리를 하며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만날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시네요. 이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요.”

꽃다발을 품에 안고 횡설수설하던 신재언은 자신이 ‘레드 헬 파이어’를 현관 앞에 오래 세워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아뿔싸. 어느 정도 썸도 타고 사귈 뻔했던 사람으로 남아서 나중에 곱게 죽기 위한 계획이 틀어질 뻔했다.

레헬은 히어로지만, 잔인하기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재언도 이전에 우연히 그가 범죄를 저지른 빌런을 통구이로 만드는 걸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 빌런은 여성 네 명을 강간 살해한 악질적인 쓰레기였다. 그로 인해 딸을 잃은 아버지가 히어로 본사에 찾아와 막대한 후원금과 함께 직접 부탁을 했다.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가며 조롱하는 그놈을 잡아 딸과 똑같은 고통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심심한데 잘됐단 듯 직접 나선 게 바로 레헬이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범죄자를 느긋하게 몰아붙인 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능력으로 불을 붙여 태웠다. 상대가 쇼크사하지 않게끔 물을 조금씩 뿌리며 아주 천천히 태워 죽였다.

끔찍한 비명이 골목을 가득 메웠고 소리가 멈추자 레헬이 상쾌한 얼굴로 두 손을 탁탁 치며 뒤를 돌아나갔다.

의도치 않게 그 모든 상황을 숨어서 지켜본 재언은 다리가 풀려 한참 주저앉아 있었다. 하지만 더 큰 고비가 남아 있었다.

바로 레헬과 데이트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본 장면도 약속 장소로 가다가 목격한 것이었다. 재언은 겨우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빌런보다 더 악독한 방법으로 빌런을 처치한 그의 행위에 뉴스부터 시작해 포털사이트, SNS 등 모든 곳에서 그 일에 대해 시시비비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아무리 빌런이라도 사람을 죽이는 그의 방법이 너무나도 지나치다는 소리가 절반, 죽은 네 명의 힘없는 무고한 시민의 인권부터 생각하라는 소리가 절반이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열을 올리는 동안 레헬은 무엇을 했느냐 하면, 신재언과 식사를 마치고 와플 가게에서 느긋하게 와플을 사서 나오는 중이었다.

와플을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공원을 함께 걷던 신재언이 당신은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 같다고 말하자 레헬이 뺨에 잔뜩 홍조를 뗬다.

이상하게 레헬은 자신의 앞에선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자주 지었다. 물론, 그가 하는 말은 다른 의미로 신재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놈들을 죽이는 건 국가에서 허가한 살인이니까요.”

그리고 신재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달달 떨었다. 그의 말대로 아무리 레헬이 성격파탄자라고 해도 그는 단 한 번도 죄 없는 민간인은 건들지 않았다. 즉, 그가 저런 식으로 사이코패스처럼 구는 건 오직 빌런뿐이었다.

만약 신재언의 정체가 논란의 빌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변명도 한마디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레헬이라면 그냥 죽이지 않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괴롭힐 것이다.

완전히 빌런은 아니지만, 모종의 이유로 ‘다크 카오스’를 연기해야만 하는 신재언은 레헬과 이런 사이가 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도 헷갈렸다.

약 일 년 전에 레헬은 재언의 회사와 계약을 맺었고 그때 레헬의 담당을 맡게 된 직원이 신재언이었다. 그렇게 서로 알게 된 둘은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지금은 가끔 입을 맞추는 사이로 발전했다.

레헬은 예쁜 외모와는 달리 키도 크고 덩치가 꽤 큰 편이었다. 손도 커서 어깨나 팔뚝이 잡히면 재언이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 앞에서 레헬이 어깨를 잡고 깊게 입을 맞춘 뒤 떨어지자 신재언은 머쓱하게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를 노리는 많은 여성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시민 여러분, 레헬은 게이였습니다.

재언이 눈동자를 굴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레헬이 방긋 웃으며 뒤따라 들어왔다.

“저녁 드셨어요?”

“네. 민재 씨는요?”

“저도 먹었어요.”

“…하하.”

괜히 왼쪽 팔뚝이 가려워졌다. 신재언의 왼팔에는 굉장히 화려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또한 그가 빌런이 된 것처럼 자의로 새긴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기에 여름에도 민소매 티를 못 입는 것은 물론 속이 비치는 얇은 옷을 입을 때도 매우 신경 써야 했다.

둘 다 밥을 먹었으니 식사를 차릴 필요는 없지만, 재언은 간식이라도 내올 겸 냉장고를 열었다가 조용히 닫았다. 냉장고 안에 눈알 한 개가 데구루루 굴러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언이 사이코패스처럼 누군가의 눈알을 뽑아 보관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신체를 자유자재로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다크 카오스의 자식 중 한 명의 것이었다.

“…배달시켜 먹을까요? 제가 자주 가던 가게가 배달을 시작했더라고요.”

“저는 무엇이든 다 좋아요.”

레드 헬 파이어, 줄여서 레헬. 본명은 차민재인 그가 싱긋 웃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신재언은 최강의 히어로를 앞에 두고 빌런의 눈알과 목격해야 하는 상황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면 의심을 살지도 모르니 티 내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비명을 마구 질렀다.

그래도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함께 보기로 했던 영화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긴장이 풀어졌다. 차민재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나오는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요즘 서울 소문이 흉흉하던데, 재언 씨는 무슨 일 없죠?”

“그렇죠. 요즘 회사가 바쁘긴 한데 그럭저럭 버틸만해요.”

“계속 야근만 시키는 악덕 회사. 제가 날려 버릴까요?”

알게 된 지 일 년 정도 된 지금, 그에 관해 여전히 모르는 점이 많았지만 단 한 가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차민재는 장난을 치긴 해도 농담을 하지 않는다. 이전에 농담인 줄 알고 장난으로 해 보라고 말했다가 월급 전날에 회사가 정말 날아갈 뻔했다.

가장 중요한 월급도 못 받고 직장까지 잃을 뻔한 아찔한 경험이었다.

다달이 받는 월급이 제일 중요한 재언은 속으로는 절대 그러지 말라 외치면서 실제로는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흠… 언제든 필요하면 말해요.”

‘절대 부탁할 일 없을 거야.’

미묘한 민재의 미소에 재언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흉흉하다는 게 혹시 그, 말하는 대로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 이야기인가요?”

“맞아요.”

“아직 해결이 안 됐구나……. 워낙 도시 전설 같은 내용이라서 금방 사라질 줄 알았어요.”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에 관한 소문은 요즘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그것은 서울 시내 어디선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걸 본 사람의 소원을 이뤄 준다는 구멍이었다.

물론 구멍에 소원을 빈 사람은 소원을 이루어 주는 대가로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끔찍한 덩어리가 되어 나왔다. 소원을 빌지만 않으면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기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구멍 안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이 생겨나면서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소원을 이루고 살아남을 확률도 있단 사실은 많은 이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구멍을 찾아다니는 방송 프로그램이 생기는가 하면 일반인들마저 SNS를 이용해 찾으러 다녔다. 이렇듯 사태가 점점 커지자 히어로 협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원을 이뤄 준다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소원을 빌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재언 씨도 소원을 이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조심하세요. 물론 제가 지켜드릴 테니 너무 겁먹지 마시고요.”

나긋나긋하게 말한 레헬이 수줍게 웃었다. 지켜 준다는 대목에서는 귀가 분홍색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이런 일로 저만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빌런 앞에서는 그럴 수가 있을까.

신재언은 그 격차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겁먹은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재언이 맥주 캔을 정리하다가 차민재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마주 웃어 주었다. 사람들이 귀엽다고 칭찬하는 활짝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도드라졌다.

“맥주 한 캔씩 더 합시다. 가져올게요.”

“네.”

도와준다며 일어서려는 레헬을 다시 앉히고 주방으로 향한 신재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방금까지만 해도 발갛게 물들인 얼굴로 수줍어하던 표정과는 반대로 싸늘했다.

@

나름대로 달콤했던 그날로부터 사흘 뒤, 신재언은 회사를 폭파해 달라고 부탁할까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런 부탁을 하면 들어줄 사람이 차고도 넘치는데……. 특히나 그의 자식들은 신재언이 꾸몄을 거라고는 알 수 없게 아주 치밀하게 회사를 무너뜨려 줄 놈들이었다.

아니야… 그러지 말자

재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같이 취업도 힘든 시기에 악착스럽게 견뎌 냈던 취업 준비 생활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모아 둔 돈도 많지 않고 대출이자도 꼬박꼬박 내야 하기에 지금 백수가 되는 건 곤란했다.

빠르게 현실을 자각하고 원대한 야망을 포기한 신재언은 눈가를 비비적거리면서 회사 건물 밖으로 나섰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서울 한복판의 도로는 아직도 자동차들로 혼잡했다. 신재언은 저 속에 끼어서 또다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았기에 대중교통을 더 자주 이용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피곤을 몰아내며 집으로 향하던 그는 어두운 골목에서 남자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못 본 척 지나치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불량 학생들이 못된 짓을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기에는 아이들 복장이 지나치게 깨끗하고 단정했다. 물론 담배 연기가 흘러나오지도 않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도 있었다.

“얘들아, 너희 여기서 뭐하니?”

“아, 아저씨.”

…누가 아저씨야. 자식이라고 자칭하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아직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신재언은 학생들이 부르는 호칭에 잠시 울컥하다가 그들의 하얗게 질린 안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주저앉아 있던 한 아이가 떨리는 손으로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

눈을 가늘게 뜨고 골목 안쪽을 쳐다보던 재언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가 가리킨 곳엔 지름이 10cm 정도 되는 구멍이 서서히 닫히는 중이었다.

저것이 세간에 유명한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이 틀림없었다.

“제 친구가… 저기 끌려갔어요. 흑흑… 어쩌죠? 어른들을 부르려고 했는데 핸드폰이 말을 안 들어요.”

각기 다른 교복을 입고 같은 학원에 다니는 다섯 명의 학생들은 다 같이 집으로 가는 길에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을 발견했고 그중에서 가장 호기심 많은 학생 한 명이 구멍에 대고 소원을 말했단다.

소원의 내용은 ‘이번 기말시험 올 백 맞게 해 줘.’였고 그 학생은 순식간에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름이 ‘김혜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학생은 끌려간 학생과 가장 친한 친구였고 어떻게든 친구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며 엉엉 울었다.

우는 학생을 시작으로 다른 학생들마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일단 침착하게 학생들을 진정시키며 휴대전화를 확인한 재언은 김혜빈 학생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파가 완전히 먹통이었다.

그러는 사이 주먹만 했던 구멍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아지다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먹통이었던 휴대전화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구멍이 완전히 사라지자 친한 친구가 눈앞에서 끌려가는 걸 목격한 김혜빈 학생은 더욱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내가 히어로한테 직접 전화해야 한다니! 조금 우습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