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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6화 (6/324)

6화

신재언은 히어로 협회 건물 안의 회의실에 덩그러니 앉아 어색하게 웃었다. 이곳에 오는 건 이번이 세 번째인데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괜스레 죄를 지은 것처럼 불안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게 하는 곳이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이곳은 세계 곳곳에 지회를 두고 있는 히어로 협회의 본부였다. 40층이 넘는 커다란 건물 안에 있으니 위축된 것일지도 모른다.

재언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익히 아는 얼굴의 사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그는 이국적으로 생긴 이목구비에 매력적인 눈웃음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작년에 만났을 땐 고3이라고 했었으니 지금은 성인이 되었으리라.

올해로 성인이 된 잘생긴 청년의 히어로명은 ‘붉은 잔상’이었다. 이레일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히어로명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처음 그의 히어로명을 들었을 때 재언은 레드 헬 파이어도 충격적이었는데 이놈의 히어로명도 장난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레헬을 존경해 한국 히어로 협회에 가입한 ‘붉은 잔상’은 열심히 능력을 갈고닦아 레헬의 사이드 킥이 된 히어로였다. 진정으로 존경하고 스승으로 따르는 레헬에게서 최고의 히어로 자리를 물려받고 싶다는 포부를 가진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레헬과 알고 지내는 동안 얼굴을 몇 번 보긴 했는데, 이렇게 일대일로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하하, 학생들은 괜찮아요? 많이 충격받은 것 같던데…….”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정의로운 청년답게 충격받은 학생들을 떠올리며 괴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꼴값 떨지 말라고 생각했겠지만 어리고 잘생긴 청년이 저러고 있으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큰 모양이에요. 친구가 눈앞에서 끌려갔는데 많이 힘들 겁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하하… 제가 한 게 없는데요, 뭘.”

“에이… 저희가 도착하기 전까지 학생들을 달래고 계셨잖아요. 곤경에 빠진 모르는 학생들을 모른 척하지 않고 신경 써 주는 그 정의로운 모습……! 역시 레헬 선생님의 애인이세요!”

“…아직 애인은 아닌데…….”

멍하니 반박한 재언의 대답에 이레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말대로 그의 말은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자의는 아니지만 신재언은 빌런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놈들이 광신도처럼 따르는 빌런이었다. 게다가 정의롭지도 않고, 레헬의 애인도 아니니 청년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청년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일대를 조사했는데, 능력자 파동이 나왔습니다. 빌런이 수작을 부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범인을 알아내기엔 증거도 부족하고 증인도, 목격자도 없어요. 주변 CCTV를 확인해도 빌런으로 보이는 수상한 자도 없고요. 일단 선생님과 학생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 범위를 넓혀갈 생각입니다.”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아직 어린 학생인데 무사하겠지요?”

재언의 물음에 이레일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역시 정의로우신 분! 학생을 먼저 걱정하시다니, 이런 사람이 히어로가 돼야 했었는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귓가에 그가 감탄하는 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양심이 콕콕 찔린 신재언이 그가 가져다준 물병을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물을 마시는 재언을 향한 눈빛을 갈무리한 이레일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아, 물론 민간인에게 말해도 되는 범위까지만 설명하겠습니다.”

신재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러 장의 A4용지가 책상 위에 펼쳐졌다. 장마다 사진과 설명이 함께 첨부되어 있는 자료들이었다.

“윽…….”

신재언이 펼쳐진 사진들을 힐끔 보자마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안에 찍혀 있는 모습들은 대부분 사람의 형태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지고 뭉개진 끔찍한 장면들이었다.

이레일이 한 장을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장 처음 발견된 피해자는 스물여덟 살의 남성입니다. 회사에서 평판도 좋았고,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능력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혼녀도 실종됐는데, 그녀 역시 피해자를 발견하고 석 달 뒤 시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어서 다른 사진을 가리키고 말을 이었다.

“두 번째 피해자는 서른아홉 살의 남성이고 무직입니다. 연고가 없어 발견되고 신원 확인까지 가장 오래 걸린 사람이었어요. 피해자는 셋방살이 중이었고 몇 달간 월세가 밀려 집주인이 집으로 찾아갔는데 이미 이런 몰골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제 이렇게 됐는지도 알 수 없고요. 너무 충격적인 모습이라 집주인 분마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세 번째는…….”

“그만, 더 말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혹시 생존자가 있다는 소문도 진짜입니까? 그 사람들은…….”

“첫 번째 생존자는 마흔네 살 남성입니다. 중소기업 사장인 그는 소원으로 회사가 더 크게 성장해 직원들 월급을 올려 주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더군요. 구멍 안에 있을 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앞에 세 개의 문이 나타났고 그중의 하나를 선택해 나오니 길거리였다고 합니다.

두 번째 생존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으로 스물두 살 여성입니다. 소원으로는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그녀 역시 첫 번째 생존자와 동일합니다.”

말을 이어 가는 이레일의 표정이 싸늘했다. 정의감 넘치는 열혈 청년이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중요한 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원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이라니! 말도 안 되는 명칭입니다. 목숨을 담보로 소원을 이뤄 보겠다는 뜬소문이 퍼지고 있다는데,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사망자들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생존자들이 빈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그 구멍은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컸다.

이뤄 주지도 않을 거면서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현혹하는 능력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능력자들은 반드시 자신이 속한 국가에서 초능력 파동을 검사한 뒤 등록되어 실시간으로 관리받았다. 신재언의 ‘럭키 가이’ 능력 역시 국가에 등록된 상태였다.

능력이 빌런을 물리치기에는 약했던 탓에 히어로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신재언은 오히려 자신이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이레일이 건네준 자료들을 보고 있는 신재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한눈에 봐도 무고한 시민들을 걱정하는 듯한 분위기였기에 이레일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신재언은 성격이 상냥하고 곤란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로운 성품을 지녔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강한 능력을 가졌다면 분명 멋진 히어로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젊은 청년이 상당히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계 최악의 빌런 세대를 거느리는 다크 카오스는 섬뜩해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문, 문이라… 체어맨? 체어맨인가? 그런 이상한 능력도 솔직히 체어맨 정도밖에 없지 않나…….’

다크 카오스의 네 번째 자식 체어맨. 그의 능력은 허공에 문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었다.

사실 체어맨 단독으로는 살상을 위한 능력이었지만 일곱 명의 빌런이 다 같이 모일 때 참으로 편리한 능력이었다.

생존자의 목격담 중 문에 대한 내용을 듣자마자 떠오를 만큼 공간 전이 능력은 체어맨이 유일했다.

신재언이 심란한 마음에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레일이 한마디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희가 지켜드릴 테니까요.”

그는 아무래도 신재언에 대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하… 네…….”

미안해요, 정의로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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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어맨과는 3년 전 베트남 여행에서 처음 만났다. 여행지에서 길을 잃어 헤매고 있을 때 어둡고 더러운 골목길 안쪽에 누군가가 온몸을 잔뜩 웅크리고 구석에 구겨져 있었다.

신재언이 걸음을 멈추고 골목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옆에서 엔레이드맨이 말을 걸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신가요?”

골목 가득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득 담은 살기가 피부를 콕콕 쑤셨다. 여러 의미로 굉장히 위험한 분위기였다.

안쪽으로 들어가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니 그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치료를 하지 않은 듯했다. 바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게다가 그의 발목과 종아리는 살이 썩어 구더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체어맨은 한평생 커다란 체구와 못생긴 외모 때문에 학대당하다가 부모에게 살해당할 뻔한 순간에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병원에 가 봤자 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했고 지나가던 이들조차 그의 흉한 모습에 전부 발 빠르게 도망가 버렸다.

결국, 신재언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과거에 ‘어떤 인연’으로 죽기 직전에 놓인 한 노인의 부탁을 받았다.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노인은 신재언에게 자신의 능력을 물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증오로 가득 찬 이들의 능력을 각성’시켜 주는 해괴한 능력이었다.

사실 세상에 알려진 복수 능력자는 레드 헬파이어뿐이지만 신재언 또한 후천적으로 능력이 하나 더 생긴 능력자였다. 물론 파괴력으로만 따지만 레드 헬 파이어 쪽이 훨씬 우세했다.

‘럭키 가이’는 말할 것도 없는 데다 새로 생긴 능력도 혼자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증오가 있어야만 사용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능력은 사람이 빌런으로서 각성하도록 만들어 주는 악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신재언의 왼쪽 팔에 있는 문신에서 검은색 불꽃이 피어올라 체어맨의 화상으로 짓무른 얼굴을 휘감았다.

“오오, 아버지. 위대하신 힘을 사용하시려는 거군요! 그는 어떤 증오를 가지고 있답니까? 위대하신 아버지, 형제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엔레이드맨은 평소에 냉정하고 잔혹한 모습만 보여 주면서 유일하게 신재언을 대할 때만큼은 무슨 광신도처럼 괴상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그런 모습이었다.

이윽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잔인한 빌런인 체어맨이 탄생했다. 이후에 체어맨은 다른 형제들이 그러하듯 다크 카오스의 충성스러운 자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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