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신재언은 히어로 협회 건물을 힐끔 쳐다보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아팠다. 당분간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는 이레일의 적극적인 권유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보다는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학생들을 보호하는 데 힘써 달라고 부탁하자 이레일의 표정이 감동으로 흘러넘쳐 정말 볼만하게 변했다.
왜 자신의 주변엔 저런 놈들밖에 없는 것일까.
신재언은 인생에 대해 짧게 회의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엔레이드맨.”
집에 들어오자마자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침대에 앉은 뒤 허공에 대고 외치자 작은 키의 소년이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네, 아버지.”
엔레이드맨은 이제 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신재언과 열여섯 살에 처음 만난 뒤부터 쭉 이 모습이었으니 실제 나이는 스무 살을 넘긴 지 오래였다.
“네가 한 짓이지?”
신재언의 물음에 엔레이드맨이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했다.
“세계를 아버지의 발아래에 두겠다고 형제들과 다짐한 이후부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많은 곳을 혼돈에 빠트렸으나 오해하지 마셔요, 아버지. 이런 쪼잔하고 바보 같은 짓으로 아버지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아니라고?”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어라? 진짜 아닌가 본데.’
이놈 자식들의 믿음만큼은 어딘가의 광신도 같아서 옆에서 보고 있기 힘든 정도이지만 엔레이드맨이 저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아닐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까지 걸고 맹세한다는 말은 ‘억울해서 미쳐 죽어 버릴지도 몰라~’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은 정확히 엔레이드맨과 체어맨의 능력을 섞어 놓은 것이었다.
‘둠(doom)’이라는 이름을 가진 엔레이드맨의 능력은 돔(dome) 형태의 결계를 펼쳐 현실 세계와 결계 안쪽을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둠 안에서 엔레이드맨은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능력이 없거나 엔레이드맨보다 약한 자가 둠에 갇힌다면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건물을 파괴하고 사람을 죽여도 결계를 회수하는 순간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진다. 하지만 그의 둠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죽었던 자의 영혼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길 가던 누군가가 돌연사하는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건 엔레이드맨의 잔혹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일지도 모른다는 괴담도 떠돌았다.
엔레이드맨이 둠 안에서 누군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는데 죽이지 못한 상대는 레드 헬 파이어 뿐이었다.
당시에 엔레이드맨은 그를 둠 안에 가두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에게 역공당해서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다가 다른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날 크게 다친 엔레이드맨은 반년이 넘게 침대 위 생활을 한 반면에 레헬은 아주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하나같이 딱한 사정들 때문에 능력을 각성시켜 그의 자식들이 되었지만 재언은 무고한 사람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같이 파괴를 외치는 그들을 말리느라 매일같이 진이 빠졌다.
‘제발 사고 좀 치지 마라, 이 자식들아! 내가 원하는 건 따뜻한 집에서 연금이나 받으며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대놓고 외치기에는 솔직히 자신도 그들이 무섭기도 해서 용기가 나진 않았다.
신재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엔레이드맨이 저렇게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계속 추궁할 수 없었다. 만약 믿지 못한다고 하면 신뢰를 저버렸다 어쨌다 하면서 비뚤어지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했다. 그땐 정말 세계에 대재앙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믿어 줘야 한다.
“그런 잔챙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를 귀찮게 만들다니… 그 죄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중죄입니다. 히어로들 따위가 하는 짓을 따라 하고 싶진 않지만, 아버지를 거슬리게 하는 벌레는 잡아 죽여야지요.”
…빌런을 잡는 빌런이라니.
그 누군가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면 세 번째 형제인 ‘조각난 장난감’과 함께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만족하실 만한 결과를 만들어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다크 카오스의 세 번째 자식인 ‘조각난 장난감’은 조각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전에 냉장고에서 발견되었던 눈알 한쪽도 그녀의 것이었다.
살상능력에는 그리 소질이 없지만 조각난 눈과 귀를 사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데 탁월했다. 그녀가 듣고자 한다면 못 들을 것이 없었고 봐야겠다고 하면 보지 못하는 기밀은 없었다.
아무리 눈과 귀가 두 개씩으로 한정되어 있다 해도 체어맨이나 엔레이드맨이 있으면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잔혹한 연쇄 살인마에게 산 채로 온몸이 토막 나 작은 백팩에 담겨 산에 버려졌었다. 그런 그녀를 등산하던 신재언이 우연히 발견했고 증오와 한으로 가득한 그녀의 힘을 각성시켰다.
능력을 각성한 그녀는 가장 처음으로 자신을 토막 내 죽인 범인을 찾아가 똑같은… 아니, 더 잔혹한 방법으로 복수했다.
그녀의 능력이 무서운 점은 조각난 상대를 원하는 기간만큼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녀를 죽인 연쇄 살인마는 무려 한 달 반 동안 온몸이 조각난 채 하수구에 버려져 떠돌아다녀야 했다.
‘…이레일이 나온 걸 보면 레헬이 이 사건을 맡은 게 분명해. 게다가 엔레이드맨과 조각난 장난감까지 나섰으니 내가 더 나설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이레일과 이야기를 나누며 피해자들의 정보를 쭉 훑어보던 신재언은 무언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콕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만약 김혜빈이라는 피해자 학생의 친구 말대로 그렇게 소원을 빈 것이라면…….
그 학생은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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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사원, 4시까지 거래처에 물량 확인해서 리스트 뽑아 보내야 하는데 아직도 못 보낸 거야?”
“…네, 죄송합니다. 금방 끝낼 것 같습니다.”
“어휴, 답답해.”
김 대리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기며 지나갔다. 신재언은 퇴사를 각오하고 김 대리의 면상에 키보드를 던진 다음,
‘어제부터 해도 모자랄 일을 오늘 11시에 줘 놓고 무슨 개소리야! 게다가 지금 점심도 못 먹고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이거 네가 해야 할 일이었잖아, 이 대머리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월급을 위해 입을 꾹 닫고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4시가 되기 10분 전까지 쉴 틈도 없이 작성한 끝에 겨우 보고서를 완성했다.
보고서를 넘기자마자 김 대리가 화색이 되어서 부장에게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탕비실 안으로 들어가자 눈을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던 최윤정이 따라 들어왔다.
“어휴, 김 대리 왜 저래? 저러니까 만년 대리지! 저렇게 트집만 잡으면서 본인 일까지 부하에게 넘기니까 인사 평가도 맨날 빵점인 거잖아. 내가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해, 재언 씨. 이거 편의점에서 사 온 건데 좀 먹어.”
“감사합니다…….”
자신과 맡은 업무가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나서 봤자 신재언만 더 곤란해질 뿐이었다.
그것을 윤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지 윤정은 다음 인사 평가 때 김 대리에게 최하점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망할 김 대리가 시킨 일 때문에 하루를 통으로 날려 버렸으니 야근은 확정이었다.
한숨을 쉬며 샌드위치와 함께 마실 커피를 뽑고 있을 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네, 신재언입니다.”
- 신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레일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겨 내며 대답했다. 타이밍도 좋게 급한 불을 끄자마자 기다려 왔던 연락이 왔다.
샌드위치를 입에 물며 통화를 하는 도중에 김 대리와 눈이 마주쳐서 잠시 움찔했다. 그나마 양심이 남아 있는지 김 대리가 업무시간에 전화를 받는다며 구시렁거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식들을 이용해 호되게 혼내 줄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 어젯밤에 말씀하신 대로 정종운 학생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서울 XX구의 XX동 인근의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는데 크게 다친 곳은 없다고 하더군요. 선생님께서는 피해자가 살아 있을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도 알게 된 걸 레헬이 눈치 못 챌 리가 없는데. 알려 주지 않은 건가? 조수한테 너무 빡빡하네.’
신재언이 이 정도의 정보는 말해 주어도 레헬이 비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짧게 고민을 끝냈다.
“사망자들과 생존자들의 소원이 결이 달라요.”
- 사망자들의 소원을 어떻게 아신 거예요?
“사망자들의 정보들을 잘 보면 특징이 있어요. 공통으로 주변의 누군가가 죽었어요. 생존자들의 소원은 ‘회사가 잘 되게 해 달라’,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와 같은 사소한 것들이에요. 주변의 누군가가 죽지도 않았어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적어도 목숨과 맞바꿀 일은 아니란 소리예요.”
신재언은 느긋하게 핸드폰을 바꿔 든 뒤 샌드위치를 한입에 털어 넣고 커피를 후룩 마셨다. 수화기 저편으로 감탄 어린 말소리가 들려왔다.
- 사망자들은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에 누군가가 죽기를 바란다고 소원을 빈 거군요!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냥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하지만 이번에 피해 학생이 살아 있는 걸 보고 확신했어요. 세상에 대가 없는 친절이 어디 있겠어요.”
- 신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직 범인을 잡은 것도 아니고… 아마 레헬도 이 사실은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띄우지 마세요.”
이레일은 통화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선생님은 대단하다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부끄러워할 만도 한데 사실 재언에게는 꽤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하게 대답만 대충해 주고 말았다.
이 정도는 그가 지금까지 받아 왔던 찬사들에 비하면 약한 축에 속했다. 통화를 종료하고 머리를 긁적인 신재언은 남아 있는 업무를 마저 해치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