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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8화 (8/324)

8화

정확히 저녁 9시 40분에 업무를 모두 끝냈다. 재언은 이미 퇴근하고 없는 김 대리의 자리를 노려보며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건물 입구에서 어린 소년이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이런 밤중에 어린 소년이 눈알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건 그의 고유능력인 둠(doom) 때문이었다.

“아버지. 범인을 찾았습니다.”

역시 아무리 도시 괴담처럼 신출귀몰해도 조각난 장난감과 엔레이드맨의 눈을 피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엔레이드맨의 말에 의하면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은 결계 형태의 능력일 뿐이며 소원을 이뤄 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소원을 빌면 이뤄 준다는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소원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빙자해 살육을 즐기기 위한 어떤 미친놈이 만들어 낸 괴담일 게 분명했다. 굉장히 아니꼬웠다.

엔레이드맨의 둠을 빠져나오니 캄캄한 골목이 보였다. 주변이 눈에 익질 않은 것을 보니 강남이 아닌 다른 지역구인 듯했다.

엔레이드맨이 안내해 준 곳은 어느 건물의 작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자동차들 사이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그림자처럼 교묘하게 숨어 있었다.

“능력자는 이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이런 잔챙이 같은 능력이라도 사회에 내놓으면 조금이라도 혼돈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를 죽이면 히어로들에게나 좋은 것 아닌가요?”

딱히 사회에 혼돈을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도,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다지… 마음에 안 들어서.”

“과연.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난 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요.”

엔레이드맨은 더 말을 얹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곧이어 신재언은 일반 시민들이 죽어 나가는 무시무시한 구멍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발밑이 쑥 하고 꺼지는 느낌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폭발하듯이 솟구쳐 올랐다.

김 대리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끓는 것이 아마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서 원하는 답을 얻어 낸 듯했다. 거기다가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어 소원을 빌면 김 대리를 정말로 눈앞에서 치워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속삭임에 넘어가기에 재언은 지금까지 많은 유혹을 떨쳐 내 왔다. 그의 자식들은 신재언이 김 대리를 못마땅해하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죽여 흔적도 찾을 수 없게 해 주겠다고 틈만 나면 속삭였다.

솔깃했던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짜내어 참아 냈다.

‘정신계 능력이라. 내가 가진 능력이랑 비슷한 건가?’

아무튼 이건 능력을 쓴 본인을 만나면 해결될 일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생존자들이 진술했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두운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난 문 세 개는 어느 쪽으로 나가도 출구가 보일 것 같지 않았다. 허공에 둥둥 떠서 신재언의 뒤를 따라오던 엔레이드맨이 귓가에 속삭였다.

“아버지. 저와 비슷한 능력인데 최면을 걸 수 있습니다. 고작 이런 능력으로 아버지를 조종하려고 하다니 정말 간이 부었군요.”

엔레이드맨의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엔레이드맨이 자신의 둠(doom)과 비슷하다고 했으니 이곳은 능력자의 결계 안쪽일 테고 거기에 최면을 거는 능력까지 있다는 소리였다.

신재언은 세 개의 문 중에 가운데 문을 열고 넘어갔다. 그러자 둠(doom)이 점점 더 커졌다. 침입자를 막기 위해 능력자가 더 강하게 능력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이 정도 힘으로는 엔레이드맨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엔레이드맨은 일곱 자식 중 가장 처음으로 재언이 능력을 각성시킨 빌런으로 형제 중 가장 강했다.

“아, 헉!”

드디어 드러난 범인의 모습에 신재언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설마 능력자가 죽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눈앞에 해골 하나가 덩그러니 둥둥 떠 있었다.

엔레이드맨 같이 결계 능력을 가진 능력자들이 능력을 쓸 때 주의해야 할 점 하나가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능력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능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능력자들을 보통 능인이라고 부른다. 저만큼 백골이 되려면 죽은 지 오래라는 말이었다. 정말로 도시 괴담 그 자체였다.

상대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한 엔레이드맨이 한걸음 물러났다.

“이런 일에 능통한 건 제가 아니죠.”

그때, 갑자기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엔레이드맨이 물러난 자리에는 신부복을 입고 피눈물을 흘리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바티칸 소속임을 보여 주는 새하얀 신부복을 입고 커다란 지팡이를 든 청년은 백금발에 연갈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미남이었다.

하지만 저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잔인함은 체어맨 못지않다는 것을 신재언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가 흘리는 피눈물이 바닥에 점점이 흔적을 남겼다.

이윽고 성스러운 기운이 청년의 몸을 감쌌다. 그는 누구보다도 독실한 종교인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바티칸에서 이를 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죽이려 하는 빌런이었다.

바티칸이 숨기고 싶어 하는 ‘수치’이자 ‘타락한 추기경’ 에렌 성이었다.

“길 잃은 불쌍한 어린 양이여… 헤매지 말고 내게 오시오.”

그가 양팔을 벌리자 머리 위로 원형의 빛나는 테두리가 떠올랐다. 발밑에는 그가 흘린 피눈물로 흥건해졌다.

신에게 사랑받은 그 힘으로, 타락한 추기경은 많은 이들을 타락시켜 죽였다. ‘다크 카오스’의 두 번째 자식인 에렌 성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해골에 손짓했다.

인자하기 그지없는 그의 움직임은 죄로 가득한 인간마저 모두 용서해 줄 것처럼 성스러워 보였다.

“그대의 힘은 아버님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타락한 추기경’의 믿음은 더 이상 신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가 해골을 감싸 안자 품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결계가 천천히 깨졌다. 자칫 결계 안에 있는 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나 신재언은 엔레이드맨의 결계 안에 있기에 전혀 위험할 게 없었다.

그렇게 타락한 추기경은 지금까지 서울 시민들을 괴롭혀 왔던 ‘소원을 이뤄 주는 구멍’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이제 그 능력의 주인은 타락한 추기경의 수족이 되어 안식도 찾지 못하고 부려 먹힐 게 분명했다.

“전능하신 아버님. 오늘도 죄 많은 저를 구원해 주시옵고, 저의 부름에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신재언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던 에렌 성이 기묘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럴 때마다 신재언이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말아 달라고 몸서리를 쳤지만 아무도 그 말만큼은 들어주지 않았다.

에렌 성이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심했을 뿐, 그의 일곱 자식은 전부 저런 식으로 과하게 행동하고 충성스러운 광신도처럼 굴었다. 평범한 소시민이 받아 주기 힘든 행동들이었지만 그들의 과거를 전부 알고 있는 재언은 더 강하게 말리지 못했다.

타락한 추기경은 과거에 신에게 사랑받았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 역시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성직자였다. 그의 안에 있는 넘쳐흐르는 신성력은 그가 가진 믿음을 뒷받침해 주었었다.

그는 욕심, 거짓, 질투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많은 신자가 매료되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신에게 사랑받는 것이 확연한 신성력까지 있었기에 그는 더욱 유명해졌고 그만큼 질투 어린 시선을 받았다.

에렌 성은 강한 힘을 가졌지만,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다치게 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며 타락이라고 믿어 왔다.

그런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어떤 신자가 있었다. 아니, 신자라고 표현하기엔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젊고 아름다운 에렌 성을 향한 신앙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에렌 성을 병적으로 집착하던 신자는 그를 납치해 버리고 말았다. 추악한 스토커에게 온갖 성적인 희롱과 능욕을 당하고 황산으로 얼굴이 망가져 에렌 성의 외모는 빛이 바래 괴물처럼 변했다.

스토커 남자는 아름다움이 없어진 에렌 성을 마지막까지도 능욕한 뒤 목을 매 자살했다.

그렇게 에렌 성은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았지만 성스러웠던 지난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망가진 얼굴과 더럽혀진 몸만이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에렌 성은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로 마음을 다잡은 그 순간, 그가 믿었던 신과 바티칸이 그를 버렸다.

고통뿐이었던 그의 세계가 어그러지다 못 해 처참하게 부서졌다.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버려지고 그의 수치를 지우기 위한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그는 바다에 수장당해 죽을 위기에 놓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신을 만났다. 진정한 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봐요. 괜찮아요?”

황산 때문에 녹아 버린 피부를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오는 사람은 그가 여태까지 들어 왔던 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얼굴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는 에렌 성에게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아름다운 빛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가 에렌 성의 손을 잡고 어떻게 해야 하나 도움을 청하는 듯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소년을 쳐다봤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빼빼 마른 소년은 운이 좋아 첫 번째로 자식이 된 엔레이드맨이었다. 그 또한 이 사람에게서 ‘구원’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에렌 성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모습이 흉하게 변한 것은 물론, 바다에 수장당해 고통스럽게 죽을 뻔하면서 증오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그렇게 신재언은 죽을 뻔한 에렌 성을 구해 내 그의 증오를 능력으로 각성시켜 주었다. 그것은 에렌 성에게 있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흉하게 어그러진 피부도 모두 재생되어 이전의 아름다움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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