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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9화 (9/324)

9화

에렌 성은 신재언을 진정한 신으로 섬기게 되고 새로운 삶을 되찾자마자 가장 먼저 바티칸으로 쳐들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성직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피의 바티칸 살육’이었다.

그는 귀신들을 조종하는 ‘귀신들의 성녀’와는 다르게 엄청난 양의 신성력과 신앙심으로 죽은 육체를 되살렸다. 물론, 되살아난 사람은 좀비가 되어 에렌 성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했다.

죽은 육체의 주인이 능력자라면 그 능력마저 함께 되살아났다. 좀비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무시무시했다.

신앙심이 워낙 두터운 탓인지 어지간한 일에도 정신적인 흔들림이 없었지만, 한 번씩 정신 나간 짓을 스스럼없이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유일한 단점이라면 엔레이드맨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신재언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일을 첫째인 엔레이드맨이 해야 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 둘이 크게 싸웠고 결국 엔레이드맨에게 패배했다.

지금은 모아 놓은 좀비가 잔뜩 있을 테니 비등비등하게 싸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언이 ‘형제’들끼리의 싸움을 엄격하게 금지해서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사실 신재언은 그들의 관계를 위해 ‘형제 싸움’을 금지한 건 아니었다. 단지 세계 평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인 그들이 싸우면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이 말려들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락한 추기경을 부르다니, 엔레이드맨 성격이 많이 유해졌네.’

팔짱을 낀 채 엔레이드맨을 힐끔 쳐다본 신재언은 자신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에렌 성을 내려다봤다.

피눈물을 쏟고 있어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빛이 났다. 에렌 성의 고유 능력은 그가 사용하는 신의 힘과는 반대되는 성질이었기에 능력을 쓸 때마다 피눈물을 쏟아야 했다.

“그, 그… 능력자는 어떻게 됐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 신재언과는 달리 에렌 성의 얼굴에는 완연한 미소가 깔렸다.

“아버님의 마흔두 번째 종이 되어 제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마흔두 번째라니! 엔레이드맨과 싸울 땐 다섯 명밖에 안 됐고 저번에 만났을 땐 스물두 명이었잖아…….

이러다가 나중에 정말로 백 명을 넘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골치가 아파져 이마를 문지르던 신재언이 한숨을 쉬었다.

“…그놈은 죽어서도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이보다 더 지독한 짓을 일삼는 빌런 녀석들을 앞에 두고 질문하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녀석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건 물론 아주 악질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신재언은 불행한 과거를 가진 그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에렌 성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능력이 발현되는 시기가 너무 늦어 제대로 사용해 보기도 전에 죽었다더군요. 그게 억울해 한이 맺혔다고 합니다.”

“…….”

범죄자들의 심리 상태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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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언은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

상대는 당연히 레헬, 차민재였다. 커다란 선글라스는 끼고 나타난 그는 워낙에 키나 체격이 크고 근사해서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레드 헬 파이어를 원하는 곳은 어디에나 있었고 극성인 빌런들 때문에 히어로가 필요한 범죄 사건이 많았지만, 그는 휴가나 연차를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썼다.

‘히어로도 연차가 있구나…….’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표정에서 티가 났는지 차민재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원래 없는데 제가 그냥 쓰는 거예요.”

그렇게 함께 뮤지컬 공연을 보고 근사한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초대를 받았다.

“재언 씨, 우리 집에 올래요?”

“하하…….”

당신 댁에 가면 우리 애들이 뭘 할지 몰라요. …진짜로 무서워서 안 가는 거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민재 씨.

그 대 우리 집은 활짝 열어 뒀잖아요.

차민재가 아주 혹하는 제안을 했건만 신재언은 모른 척 눈을 굴렸다. 재언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표정을 굳혔던 차민재는 그가 눈을 마주쳐 오자 다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두 번 권유하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신재언은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을 사서 나왔다. 맥주 두 캔씩을 손에 들고 차민재와 나란히 걷던 재언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왜 그래요?”

“여기 보세요. 자몽 향이 나는 맥주래요. 집었을 땐 못 봤는데, 이제 보니까…….”

술을 즐겨 마시는 게 아니라 맥주를 구분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무거나 집어서 바구니에 넣었더니 그중 하나가 과일 맛이 나는 것이었다.

신재언은 맥주에서 과일 향이 나는 게 아주 싫었다. 자몽 그림이 떡하니 그려져 있는 맥주 캔을 들고 신재언이 진지한 얼굴로 멈춰서 있자 차민재가 재밌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손짓했다.

“제가 마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차민재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 고민도 해결했겠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재언의 집은 서울 외곽에 있는 신축 빌라로 직장인들이나 사회 초년생들이 많이들 사는 곳이었다. 게다가 근처에 학교도 있었고 경찰서, 마트 등 편의시설도 많아서 나름 살기 편했다.

그런데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다. 만약 수다를 떠는 대화 소리였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제법 격앙된 투로 지르는 소리였다.

재언이 알아차릴 정도인데 인간이기를 포기한 레드 헬 파이어가 듣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레헬은 못 들은 척 신재언에게 다음 말을 조를 뿐이었다.

“재언 씨, 병신 같은 신입이 들어왔다면서요. 그래서 그다음은 뭐에요?”

“잠시만요. 저기에서 무슨 소리가…….”

못마땅한 표정의 레헬을 이끌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중학생… 아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애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중심에 있는 애는 주변에 있는 다른 학생들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다른 점은 얼굴 여기저기에 반창고와 상처가 가득했다는 점이었다.

‘학교폭력이네. 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는 걸까.’

속으로 혀를 쯧쯧 찬 신재언은 자식 중의 한 명을 불러 저 안하무인의 폭력 가해자를 혼쭐내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레헬이 무료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삐죽이며 서 있었다. 혹시라도 불러냈다가 레헬에게 걸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으니 안 될 것 같았다.

대신에 그를 꼬여 내는 길을 택했다.

“민재 씨, 저기 보세요.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신재언이 자신을 부르자 눈빛을 반짝였던 레헬이 학생들을 빤히 보며 말했다.

“경찰을 부르는 게 나아요. 민간인을, 그것도 청소년을 상대로 능력을 쓰면 제법 골치 아파지니까요.”

그게 이유인 것치고는 지나치게 무관심해 보였다. 그의 대답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재언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곧 출동하겠다는 대답을 듣긴 했지만, 가만히 기다리기엔 저쪽 상황이 더 급했다. 한 사람을 둘러싼 학생 중 한 명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걸 본 신재언은 학생들 사이로 급하게 튀어 나갔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학생 한 명을 둘러싸고 때리고 있어. 교복 보니까 OO고 맞지?”

“아저씬 빠져요. 우리끼리 그냥 장난치는 거니까.”

요즘 학생들은 참으로 싸가지가 없었다. 게다가 비키지 않으면 그대로 한 대 칠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무섭다고 느끼면서도 괴롭힘 받는 학생을 힐끔 본 신재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보니 그 학생은 손이 있어야 할 곳에 날개가 붙어 있었다. 그는 하피 종족이 틀림없었다. 하피들은 인간 사회에서 인권을 인정받게 된 역사가 매우 짧았다. 아주 최근까지도 차별받는 게 당연했기에 늘 괴롭힘을 받아 왔다.

하피들의 왕 볼프강이 S급 히어로로 활약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그나마 나아지긴 했지만 은근한 괴롭힘은 여전했다. 지금같이 학교나 직장 내에서는 여전히 차별적인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물러날 수 없었다. 사실 어머니가 하피 종족이라 재언도 하피 혼혈이었다.

산속에서 가족들과 숨어 살던 어머니를 근처에 있는 마을 주민들이 불길한 상징이라며 몽둥이를 들고 쫓았다.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을 피해 도망가던 어머니를 구해 준 이가 바로 아버지였고, 둘은 사랑에 빠져 함께 살다가 자식을 낳았다.

그가 바로 신재언이었다.

재언은 날개뼈부터 어깨에 이어지는 날개만 가리면 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학생 때나 취업하는 데에 크게 차별을 받아 왔다.

자신도 그런 괴롭힘을 받아 왔는데, 겉으로 하피임이 드러나는 저 학생은 얼마나 괴로울까 싶었다. 재언이 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꾸짖었다.

“저 학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데. 학교에 알리기 전에 얼른 가.”

쫓아내려 손을 휘저었는데도 불량 청소년들은 얌전히 물러나 주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 중 덩치가 가장 크고 살집이 있는 학생이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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