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내가 요즘 체육관에서 기술을 하나 배웠는데, 걸리면 무릎뼈가 아작 나는 기술이거든?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어.”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하지만 신재언은 흉흉한 학생의 위협에도 그리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고통스러운 꼴을 당하는 건 저 학생 쪽일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요즘 아주 사이가 좋은 레헬이 뒤쪽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눈치였어도 썸을 탄 기간이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예상한 대로 신재언과 학생들 사이에 작은 불꽃이 화르륵 하고 타올랐다. 선명한 빨간 색의 불꽃은 영혼마저 태우는 레헬의 능력 중 하나였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허공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가 팔을 들어 올린 학생의 손에 약한 화상을 입게 했다. 다행히 신재언에게는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
크기도 작고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언제 봐도 무시무시했다. 저것도 힘 조절을 한, 아주 약한 수준이라는 걸 신재언은 이미 알았다.
레헬이 엔레이드맨의 결계 안에서 사용한 불꽃은 엄청나게 컸고 결계 전체가 녹아 버릴 만큼 어마어마했었다.
“이, 이 녀석 능력자야!”
그래도 능력자에게 덤비는 건 무모하다는 정도의 상식은 가지고 있었는지 학생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재빠르게 사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 저 녀석들은 운이 좋군요, 아버지.
신재언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들이 나서기 전에 다행히도 레헬이 적절하게 손을 써 준 듯했다.
이윽고 차민재가 곁에 다가와 허리를 감싸며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에요, 재언 씨. 요즘 애들은 무섭다고요.”
“제 옆에 히어로가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하긴, 맞는 말이에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웃는 차민재의 얼굴이 지나치게 고혹적이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만으로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예쁘고 고왔다.
신재언은 붉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방긋 웃고 있는 그를 꼼꼼하게 감상한 뒤 아직도 벽에 기대어 바르르 떠는 학생에게 시선을 주었다.
“학생, 괜찮아?”
“네… 감사합니다.”
무서웠는지 파르르 떠는 얼굴이 창백했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와 상처들이 신재언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소년이 팔을 들어 눈물을 닦으려 해도 인간의 팔이 아닌 날개로는 잘 닦이지 않았다. 아무리 날개를 팔처럼 쓸 수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인간 위주의 사회는 하피에게 매우 불친절했다.
집이 근처라는 학생을 데려다준 뒤 레헬과 나란히 걸으면서 신재언은 불편하고 찝찝한 마음에 표정이 잔뜩 굳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학생은 기운도 없었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마도 위기를 모면한 지금보다 다음을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혹시나 해서 학생이 가진 증오의 정도를 확인해 봤지만, 능력을 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재언 씨. 제가 학교 관계자에게 말해 놓을게요.”
“네.”
신재언은 차민재가 제안한 방안이 문제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레헬이 처음 능력을 각성한 나이가 아홉 살이라고 했다. 그 뒤로 성인이 되기 전 또 다른 능력을 각성했고 세계에서 유일한 복수 능력자가 되었다.
다른 이에게 능력을 물려받은 신재언 같이 특이한 케이스가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차민재는 태어나면서부터 강자였다. 그런 그가 하피 학생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실제로 신재언이 나섰던 건 일차적인 도움일 뿐이었다. 매일같이 피해 학생과 함께 다니며 지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방금 도와준 것으로 인해 더욱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가해 학생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학교에서 계속 마주하게 될 거고 가해자에게 화풀이 당할 게 명백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하피 학생의 걱정스러운 낯빛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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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신재언은 정신없이 신입 교육과 야근을 끝내고 혼자 남은 사무실 안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 신입. 누가 뽑은 거지? 저런 놈이 취직한다고? 우리 회사가 그렇게 급이 낮았나?’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무능력하고 실수를 반복하면서 헛소리를 내뱉던 신입을 떠올린 그는 주먹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나와 화장실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씻는 신재언의 뒤쪽으로 커다란 문이 생겼다. 문이 열리고 신재언을 맞이한 건 체어맨이었다.
거대하고 비쩍 마른 체어맨의 모습을 밤에 마주할 땐 섬뜩해서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 모시러 왔습니다.”
“고마워. 안 그래도 피곤해서 어떻게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
신재언은 검은색 망사를 뒤집어써서 얼굴 윤곽만 겨우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무서운 얼굴로 웃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체어맨이 만든 문을 건너가자 곧바로 자신의 집 안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말 눈물 나게 활용적인 능력이었다.
다른 형제들과 신재언에게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 주지만, 체어맨은 사실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빌런 TOP 5위 안에 드는 빌런’으로 유명했다.
사람을 잔인하게 고문하는 걸 좋아하는 체어맨을 찜찜한 마음으로 쳐다보던 신재언은 냉장고를 열어 데구루루 굴러다니는 눈알을 집어 들었다.
“조각난 장난감. 어제 그 아이를 보여 줘.”
그 말에 체어맨이 눈치 빠르게 바닥에다가 하수구 모양의 동그란 문을 만들었다. 그 안으로 눈알을 집어넣자 신재언의 방 안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바닥 전체가 까맣게 물들더니 마치 스크린처럼 어떤 광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다른 쪽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형상화하여 어디서든 재생할 수 있는 조각난 장난감의 능력이었다.
- 일으켜 세워. 어제 우리가 도망가는 게 재밌었지? 누군 존나 열 받아서 잠도 못 잤는데.
퍽-!
복부를 잘못 맞았는지 하피 학생이 입에서 음식물을 게워 내며 배를 움켜잡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보이는, 골목도 아니고 사람이 지나다니는 뻥 뚫려 있는 곳에서 학생들은 하피 학생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때리고 옷을 벗긴 뒤 동영상을 찍었다.
가끔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빠르게 지나갈 뿐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하피 학생이 화장실까지 끌려가 나체로 나뒹굴었을 때가 되어서야 가해 학생들은 속이 후련해졌는지 그대로 떠나 버렸다.
물론, 어딘가에 버린 교복은 찾아 주지 않았다. 남겨진 하피 학생은 변기 물을 잘못 마신 듯 헛구역질을 하다가 울음을 토해 냈다.
“흐음…….”
침대에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신재언이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폭력의 수위가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주변에는 학생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건 피해자가 하피여서 그런 게 분명했다.
“조각난 장난감. 그 아이에게 옷을 찾아 줘.”
그러자 허공에서 토막 난 손 한쪽이 나타나더니 화장실 구석에 있는 교복을 집어 올렸다. 핏기 하나 없는 손이 화장실 칸막이에 교복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웅크린 채 울고 있던 하피 학생이 그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신경 쓰는 일이라면 분명 위대한 뜻이 있으시겠지요. 저 학생들을 죽여 드릴까요? 제가 먼저 고문한 뒤에 아버지 앞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그러면 앳된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빌며 엉엉 울겠지요. 정말 짜릿하지 않습니까? 저 잔인하고 기세등등한 얼굴이 피부가 다 벗겨진 채 고통 속에서 울부짖을 걸 생각하면…….”
체어맨의 말은 딱히 피해 학생이 불쌍해서 하는 건 아닐 터였다. 누군가를 고문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체어맨이 기다랗고 마른 팔을 교차해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았다.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됐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은 신재언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저 애들의 처벌은 피해자가 생각해야 할 일이겠지.”
“아아, ‘가족’ 예정인 아이입니까? 그렇다면… 잘해 줘야겠군요. 환영식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검은 망사 안의 흉하게 일그러진 화상 자국 사이로 잇몸까지 드러내며 활짝 웃는 게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체어맨을 힐끔 쳐다본 신재언은 교복을 끌어안은 채 엉엉 울고 있는 하피 학생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 증오가 부족해.”
“그렇다면… 형제가 될 가련한 그에게 증오를 가득 쌓아 주면 되지요.”
마치 악마가 유혹하는 것처럼 낮고 끈적이는 목소리였다. 신재언은 그가 혹시라도 허튼짓할까 걱정스러워져서 얼른 덧붙였다.
“이런 코흘리개 애들 일에 네가 직접적으로 나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체어맨!”
“아버지의 말씀대로…….”
얌전히 대답한 체어맨이 아주 작은 문을 만들어 그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그가 지었던 뜻 모를 미소가 매우 찝찝했지만 콕 집어서 뭘 하지 말라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기만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