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땀만 뻘뻘 흘리는 신입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신재언이 입을 열었다.
“정훈 씨. 이거 왜 말 안 했어요? 이대로 클라이언트에 넘어가서 진행됐으면 중간에 이벤트가 뚝 잘려서 난리 날 뻔했는데. 해결도 안 하고 퇴근한 것으로도 모자라 왜 말도 안 했어요?”
“혼자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안 돼서… 혼날까 봐 그랬습니다.”
“……! ~~~!!!”
정말로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에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신입에게 실수하는 것까지는 괜찮으니 제발 실수했다고 말해야 어떻게든 수습하지 않겠냐고 한바탕 소리치는 자신의 모습이 반복 재생되었다. 하지만 그가 쳐 놓은 사를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신입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정말 일머리가 없는 축에 속했다. 같은 작업을 세 번째, 네 번째까지 계속 찾아와서 물어봤다.
그렇게 외우기가 힘들면 어디 적어 놓기라도 하면 될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적지도 않고 까먹기 일쑤니 자잘한 실수가 여러 번 반복되었고 그 책임을 전부 교육 담당인 신재언이 떠맡아 버렸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더 정신없어졌다.
신입 때는 그럴 수 있지, 실수할 수도 있지! 자신도 저 대머리한테 매일같이 깨져 가면서 물어봤었으니까.
하지만 더 환장할 것 같은 게 신입은 틀린 걸 맞았다고 우긴다는 점이었다. 신재언이 A라는 일은 A-라는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적어 주면서 알려 줬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을 A-가 아닌 B-로 적용하면서 문제를 만들었다.
맞게 한 것이라 우기다가 틀렸다는 게 밝혀지면 ‘신재언 씨’가 이렇게 알려 주었다며 몰아가기 일쑤였다. 자신이 언제 그렇게 알려 주었냐고 따지면 그건 그것대로 잔뜩 움츠러들어 마치 직장 내 괴롭힘이라도 하는 양 구는데 미칠 것만 같았다.
지각을 일삼고, 툭하면 아프다고 조퇴에 저번에는 공황장애가 있다고 거짓말하다가 걸리기까지 했다.
저런 사람이 대체 무슨 뒷배가 있어서 이곳에 들어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 팀장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잘라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실장이 이미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자르는 게 쉽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미치겠네.’
신입이 이번에 한 실수는 거래처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일이라 타격이 꽤 컸다. 그런데도 여전히 혼날까 봐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했다.
신입은 입사 후 1년까지는 실수해도 된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던 신재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우다다다 쏘아붙였다.
“…정훈 씨 혼자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데요? 이 일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아요? 진작 발견했으면 전화 한 번으로 끝날 일을 지금까지 말 안 한 것 때문에 팀원 전체가 나서게 생겼잖아요. 항상 말했지만, 신입이니까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혼날까 봐 말을 안 했다니, 그게 성인이 할 생각입니까?”
그러자 김정훈이라는 이름의 진상 신입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재언은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신입이 망쳐 버린 일을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거래처에 전화해 빈정거림을 한 바가지로 얻어먹으며 거듭 사과를 반복했다.
겨우 사건을 수습해 끝내고 나니 오백만 원가량의 손실과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너덜너덜해진 정신만이 남았다. 겨우 숨 돌릴 틈이 생긴 재언은 낮에 너무 심하게 쏘아붙였나 싶어 담배를 뒤적거렸다.
같이 담배나 피우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신입을 찾다가 그가 자리에 없어 옆에 있던 그의 동기에게 물었다. 마찬가지로 늦게까지 퇴근을 못 하고 있던 또 다른 신입이었다.
“민혁 씨, 혹시 정훈 씨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그가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이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게, 퇴근했습니다.”
“…….”
신재언은 그 길로 혼자 흡연실까지 올라가 담배를 물었다. 허무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미친놈…….’
@
밤 10시가 다 되어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 재언은 하피 학생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조각난 장난감이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하피 학생의 이름은 강세준. OO고등학교 1학년으로 지방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가 직장을 서울로 발령받아 전학 온 게 왕따의 시발점이었다.
그렇게 전학 온 지 반년 만에 전교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왕따가 되었고 일진 녀석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심한 짓을 당해 왔다.
왕따 가해자들은 동급생들 앞에서 피해자의 옷을 벗기고 사진 찍는 건 물론 화장실에 데려가 쓰레기를 먹이고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게 하는 등 온갖 악질적인 짓은 전부 시켰다. 이 정도면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려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가해자 중 주동자 격인 학생의 아버지가 제법 명망 높은 A급 히어로였기 때문이었다. 자식 교육을 잘 하면 될 것을 A급 히어로인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까 두려웠던 그는 돈을 써서 사건이 퍼지는 걸 막았다.
덕분에 가해자들의 폭력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조각난 장난감을 통해 가해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자니 대한민국의 장래가 참으로 암담했다.
- 니가 죽으면 그만할게.
그것은 하피 학생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재언은 강세준 학생이 걱정되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강세준의 부모는 둘 다 히피였고, 히어로 슈트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피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일쑤인 사회에서 악착같이 일을 하느라 하나뿐인 아들이 그런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강세준이 부모가 상처 입을까 혼자 속으로 삭인 탓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강세준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조각난 장난감에게 그 사실을 보고받았을 땐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쉬고 있는 신재언에게 조각난 장난감의 입이 데구루루 굴러오지 않았다면 늦었을지도 모른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강세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괴롭힘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플까.
갑갑한 현실에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신재언은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색 옷에 검은색 장갑을 착용했다. 그리고 서랍에서 검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피에로 가면을 얼굴에 썼다.
영화에 나오는 악당이나 쓸 법한 가면은 재언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자식들이 직접 만들어 선물해 준 것이다.
“아버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검은 망사를 뒤집어쓴 체어맨이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했다. 피에로 가면을 쓴 신재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체어맨은 벽에 손을 대고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의 너머는 어느 아파트의 옥상이었고 그곳에선 강세준 학생이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허공에서 갑자기 문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혼자 있어도 충분히 수상할 텐데 신재언의 뒤로 거대한 체구의 검은 망사를 뒤집어쓴 남자가 위협적으로 서 있는 걸 보며 강세준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색하게 웃으며 놀라지 말라고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가면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신재언은 자신이 손을 들어 올리자 아주 기절할 것처럼 펄쩍 뛰는 강세준의 태도에 얼른 본론만 꺼내고 끝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강세준 학생. 우리는 네 편이야.”
“…….”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교복 주머니 안쪽으로 손이 슬금슬금 들어가는 걸 보니 핸드폰으로 신고하려는 듯했다. 그래 봤자 레헬이 나타나는 게 아닌 이상 체어맨을 잡을 수 있는 능력자는 없기에 신재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체어맨은 생각이 다른지 바닥에 문을 만들어 강세준의 뒤쪽으로 연결되게 한 뒤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휙 낚아채 버렸다.
“히이익!”
“너무 겁먹지 마! 우리는 널 해치려고 온 게 아니야.”
파들파들 떨며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강세준을 진정시키려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사정이 딱해서 도와주려고 왔어. 네게 힘을 줄게. 그 애들을 미워하고 증오해 봐. 죽일 정도로 미워하면… 넌 힘을 각성할 수 있어.”
어라… 이 대사 너무 익숙한데……? 어딘가의 만화 같은 데서 무고한 시민이나 주인공을 악의 축으로 유혹할 때 쓰는 말이잖아.
자신이 한 말에 정신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었지만, 재언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 얼굴을 못 봤잖아. 빨개진 내 얼굴을 아무도 못 봤어!
내면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신재언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강세준이 달달 떨면서 뒤로 더 물러났다. 창백한 얼굴로 등에 닿는 옥상 난간을 날개로 짚으면서 아래로 시선을 보냈다.
내일이 주말이라 그런지 그는 가해 학생들에게 더 많이 맞고 끌려다녔다. 차민재가 도와주겠다 했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신재언이 고개를 숙여 강세준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피에로 가면을 쓴 괴한에게 겁에 질린 듯했다. 하지만 괴한이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단 걸 깨닫고 많이 진정됐는지 거칠게 내쉬던 숨이 잦아들었다.
“자, 내 손을 잡아.”
신재언이 손을 뻗어 강세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강세준이 손을 빼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
자리에서 일어나 쪼그려 앉은 강세준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그에게서 증오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을 미워하면 증오가 쌓인다. 우연한 계기로 능력을 얻게 된 신재언은 사람이 가진 증오의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남을 미워했다. 대머리 사수 김 대리는 신재언이 훤칠하니 잘생기고 인기가 많다는 것만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미워하고 증오를 쌓았다.
그런데 일방적인 폭행을 반년 가까이 당해 오면서 가해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신재언은 강세준의 정신 상태가 신기했다.
“너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니? 너를 그렇게 때리고 괴롭혔는데? 그들이 널 괴롭힌 건 재미있어서야.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거라고… 그들에게 복수할 유일한 기회야.”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나타나 증오니, 복수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괴한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것인지 대답이 참으로 모호했다.
그러나 재언은 이 일로 강세준을 재촉하거나 그의 마음을 강제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저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복수를 다짐하는 건 피해자인 네가 해야 하는 거야. 넌 생각도 없는데 우리가 널 도와준답시고 그 학생들을 죽일 순 없잖아?”
재언의 말에 움찔하고 몸을 떤 강세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말로 악당 같은 말에 그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어렸다.
자신이 한 말에 또다시 타격을 입어 할 말이 없어진 재언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발견했다. 몸을 숙여 주우니 지갑에 아슬아슬하게 꽂혀 있는 히어로 포토 카드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하피들의 왕 S급 히어로 볼프강의 포토 카드였다. 열쇠고리나 포토 카드를 볼프강과 관련된 것으로 들고 다니는 것으로 보니 히어로를 동경하는 모양이었다.
“네게 복수할 마음이 없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다만… 이 일은 우리 셋만의 비밀로 하는 거다?”
“…아.”
그사이 신재언의 뒤에서 체어맨이 문을 만들었다. 신재언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얼떨떨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강세준이 보였다.
“넌 언젠간 나를 찾게 될 거야.”
어라?
이 대사도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