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2화 (12/324)

12화

신재언은 난생처음으로 김 대리를 대할 때보다 더 심한 살의를 느꼈다. 너는 머리통에 뭘 넣고 다니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재언은 직장생활을 해 오면서 난생처음 ‘사내 왕따 조장’으로 조사받게 될 예정이었다.

다행히 다른 사원들, 심지어 다른 부서의 사원들까지 한목소리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고 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억울하게 사내 징계를 받을 뻔했다.

신입이라 업무도 잘 모르는 자신을 매일같이 구박하고 따돌리고 오늘은 팀원들이 자신을 노려보며 뒤에서 뒷말을 수군거렸다고 인사팀에 상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어제 신입이 했던 실수가 잘 마무리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음먹고 일찍 출근한 신재언은 박 팀장에게 끌려가 저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팀원들이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본 건 어제 그런 사고를 쳐 놓고 말없이 퇴근해 버린 게 원인일 텐데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긴, 그걸 알았다면 퇴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침부터 일어난 소동에 두통에 위통까지 온몸이 아파져 왔다.

‘나 때문에 공황장애가 도졌다는 건 무슨 소리고 그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니… 말도 안 되는 개소리도 작작 해야지…….’

이 모든 소란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윤정이 살며시 와서 속삭였다.

“재언 씨, 괜찮아요? 저 신입 진짜 악질이에요. 공황장애니, 뭐니 온갖 소란은 다 떨어 놓고 휴게실에선 애인이랑 통화하고 있더라니까요. 다음 주에 여행 일정을 잡아 놨는데 연차를 못 쓴다고, 이런 회사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했어요. 정말 기가 막혀! 본인이 아무 때나 막 써 놓고! 회사가 못 쓰게 막은 것도 아닌데!”

“…그러게요.”

“어휴, 저런 사람 때문에 진짜 억울한 직원들이 신고해도 의심받는 거야.”

사실 신입이 틈만 나면 아프다고 했지만, 병원 진단서를 떼온 적은 한두 번뿐이었다.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쉬니 나았다며 잡아떼는 걸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안하무인 신입 때문에 사내 분위기가 점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직급은 같은 사원이지만 3년 차랍시고 사수 비슷한 역할을 맡은 신재언은 신입이니 좋게 봐주자고 마음먹었던 게 이번 일로 터져 버렸다.

잡담도 일절 차단하고 일과 관련된 부분만 알려 주다가 한 시간 만에 같은 질문을 네 번째 받게 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정훈 씨, 지금 십 분마다 똑같은 걸 물어보는 거 아십니까? 저였다면 적었을 거예요. 외우지도 않는데 제가 몇 번이고 알려 주는 게 무슨 소용이죠? 이면지 찾아와서 적는 시늉이라도 하세요.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신재언은 눈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김정훈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크게 소리쳤다.

“신입이라 몇 번이고 물어봐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몰라서 물어봤는데 이렇게 꼽을 주시면, 저보고 일하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그러니까 적으라고…….”

“그러면 좋게 말해 주실 수도 있는데, 꼭 제가 수치심을 느끼게 공격적으로 말하셔야 했습니까?”

난데없이 높아진 김정훈의 말소리에 박 팀장이 휘적휘적 다가와 둘 사이를 막았다. 신재언은 그런 박 팀장을 쳐다보며 이마를 만졌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지나가던 정 대리가 신입을 데리고 나가고 박 팀장이 신재언을 데리고 탕비실로 들어가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 건네주었다.

“어휴, 힘들지, 재언 씨?”

“아닙니다.”

“저 신입. 아침부터 생난리를 쳤나 봐. 신고가 들어오긴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위원회를 열기는 하는데, 솔직히 우리 팀, 아니 사내에 그거 믿는 사람 한 명도 없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3년을 봐 왔는데 재언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우리가 제일 잘 알아.”

박 팀장이 등을 토닥이면서 위로를 해 주지만 신재언은 진심으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느 곳에든 또라이 질량 보존 법칙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는데, 아직 김 대리가 회사에 남아 있지 않은가.

하나가 있는데 또 하나가 추가되다니. 위아래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다.

결국, 신입 교육 담당을 바꾸는 것으로 상황이 종결되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그 이후로 신입은 별말 없이 아주 조용했다. 사람을 억울하게 사내 왕따 조장으로 신고해 놓고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마침 차민재와 술 약속을 잡은 신재언은 바로 술집으로 달려갔다. 맥주 500cc 한 잔을 꿀꺽꿀꺽 마신 그는 식탁에 머리를 박으며 신음했다.

“그 진상 신입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대체 그런 놈을 회사에선 왜 뽑은 걸까요?”

“재언 씨, 술주정 귀여워요.”

방긋 웃으며 재언의 한쪽 볼을 검지로 꾸욱 찌른 차민재는 손까지도 예쁜 사람이었다. 마디가 길고 예쁘게 정리된 손톱에, 새하얀 피부 덕분에 더욱 도드라지는 분홍빛 손끝까지 너무나도 완벽했다.

늘 정장을 입고 이마가 보이게 머리를 올렸는데, 오늘은 검은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내려 어려 보이는 복장으로 나타났다.

눈앞에서 천상의 미모를 마주하고 마음이 스르륵 풀린 재언이 머쓱하게 웃으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미안해요, 민재 씨. 저 혼자 너무 얘기했죠?”

“아니에요. 그런 신입이 들어와서 힘들겠어요.”

“하하.”

여기서 더 열 내기는 민망해 재언은 어색하게 웃으며 닭 다리를 입에 물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서울에서 제법 유명한 치킨전문점이라 치킨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가게 안이 북적거렸다.

레헬이 워낙 유명하고 얼굴이 알려져 사람 많은 곳이 꺼려지긴 했지만, 이 가게의 치킨은 재언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어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가게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몸을 사릴 수 있는 걸로 만족했다.

“민재 씨는 이럴 때 어떻게 해요? 히어로 협회에서도 매년 신입 히어로들이 들어올 거 아니에요.”

“음… 저한테 덤비는 바보 같은 히어로가 없긴 한데… 만약 있다면…….”

“네.”

“입을 찢어 놨을 거에요.”

“…….”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로 과거에 누군가의 입을 찢어 버린 전적이 있는지라 그의 말이 제법 신빙성 있었다.

차민재는 ‘레드-헬-파이어’라는 히어로명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진심으로 혐오했다. 자신을 히어로명으로 부르는 빌런들의 입을 하나하나 송곳으로 찢어 놓을 만큼 말이다.

하긴, ‘다크 카오스’라는 자신의 빌런명을 들었을 때 이게 뭐냐고 신문을 쫙쫙 찢어발긴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다.

맥주를 마시며 직장에 대해 한탄하던 신재언은 가게 한쪽 벽면에 설치된 TV에 눈길을 주며 턱을 괴었다.

- 비공식 협회, 빌런 협회가 점점 세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다크 카오스’의 영향력으로 많은 범죄자가 빌런 협회에 가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테러 또한 빌런 협회의 소행으로 밝혀져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다크 카오스’에 대한 현상금이 오백만 달러가 걸려 세계인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테러를 했다고!’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뒤집어쓰게 생겨 억울하기 짝이 없는 재언은 맥주만 꼴깍꼴깍 삼키며 힐끔 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차민재는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재언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사르륵 녹을 것 같은 미소를 흘렸다.

“그 애는 어떻게 됐어요? 아버지가 A급 히어로였다면서요. 민재 씨가 더 상사 아니에요?”

“불러다 주의를 주긴 했어요. 하지만 피해 학생이 괴롭힘당하는 게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바람에 조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하더라고요.”

“…….”

어젯밤에도 딱히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고 능력을 각성할 만큼 증오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 학생은 대체 뭘 원하는 걸까? 괴롭힘당하는 걸 보는 건 조금 힘든데…….

누군가는 괴롭힘 받은 적도 없는데 왕따 당한다며 억울한 사람을 신고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말 심하게 괴롭힘당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고 가해자들을 두둔했다.

심각한 표정이 된 신재언을 바라보며 차민재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눈여겨보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정말 믿음직하네요.”

차민재는 정말 천사였다. 그가 웃으니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모델과 담당자로서 처음 만났을 때도 화사하게 비추는 후광 때문에 눈이 멀 뻔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레헬의 성격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그는 재언에게는 상냥했다.

그리고 차민재가 먼저 관심 있다며 연락까지 했었다.

그래도 여태껏 재언이 만나 왔던 쓰레기들에 비하면 그 누구보다도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신재언은 차민재의 얼굴을 안주 삼아 싱글벙글 웃으며 맥주를 쭉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며 레헬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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