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취한다.
마지막에는 맥주에 소주를 섞어서 마셨더니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민재가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걸 극구거절한 재언은 택시에 올라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핸드폰에는 집에 들어가면 연락하라는 민재의 문자 메시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어쩜 이렇게 마음씨도 고울까!
사귀지도 않으면서 썸만 타는 것치고는 기간이 조금 길긴 하지만 이상하게 조급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헤실헤실 풀린 얼굴로 차민재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재언은 택시기사가 한참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저씨. 출발해 주세요.”
그런데 택시기사에게서 되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택시기사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는데, 그의 눈빛이 서늘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보니 그의 손에 커다란 식칼이 들려 있었다.
어어?
신재언이 당황하는 사이 택시기사가 운전석에서 몸을 뻗어 그를 덮쳤다.
푸욱-.
아니, 덮치려고 했다. 순식간에 길고 마른 손이 조수석에서 튀어나와 택시기사의 목을 꺾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조수석에는 체어맨이 앉아 있었다. 체어맨은 신재언을 공격하려 했던 택시기사의 목을 반대쪽으로 한 번 더 꺾으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무 취해서 헛것을 본 걸까. 대체 뭔데? 뭐야?
서울 한복판에서 택시기사가 커다란 식칼을 들고 처음 보는 승객을 죽이려는 게 흔한 거야?
술기운이 전부 날아간 기분을 느끼며 신재언이 황당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뭐야?”
그러자 택시 안이 귀신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모습을 보이는 귀신들의 성녀가 뒷좌석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신재언의 옆에 나타났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영혼은 다른 법.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주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거물급 빌런 둘이 나타나면 소란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이윽고 살아 있는 사람은 물론 택시기사의 시체까지 전부 사라진 채 빈 택시만 덩그러니 남았다.
체어맨의 능력 덕분에 절벽에 있는 별장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재언은 이미 죽은 택시기사를 꼼꼼하게 살폈다. 놀랍게도 평범한 택시기사는 아니었는지 그의 품 안에서 여러 가지 흉기들이 발견되었다.
커다란 사시미에 실톱, 망치 등등… 대체 이 남자는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귀신들의 성녀가 택시기사의 몸에 남아 있는 영혼을 강제로 빼내 한참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답게 영혼과 대화를 나눈 그녀가 재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김정훈이라는 이단자가 아버지를 죽이라고 사주했답니다.”
“잘하셨습니다.”
동생들에게 아주 자애로운 체어맨이 막냇동생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익숙한 이름에 신재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누구라고?”
“김정훈이라는 자입니다.”
“확실해?”
“저는 아버지께 결단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는 끔찍한 짓이랍니다.”
귀신들의 성녀를 포함한 그의 자식들은 다크 카오스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신재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되물은 것은 거짓말이기를 바라서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머릿속과는 반대로 재언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졌다.
신재언은 자신을 그렇게 사소한 이유로 죽이려는 사람을 용서할 정도로 속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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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어맨이 힘을 각성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부모를 고문해 죽이는 것이었다. 그 후로 그는 심심할 때마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를 납치해 와 고문하는 걸 즐겼다.
전 세계에는 너무나도 많은 파렴치한 부모가 있고 체어맨은 밤마다 그들을 찾아갔다.
‘…슬렌더맨인가? 아니지, 슬렌더맨은 아이들을 잡아가지 부모를 잡아가진 않잖아.’
김정훈을 납치하는 건 체어맨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고 때마침 주변에 히어로도 없었다.
알아보니 그가 신재언을 죽여 달라고 의뢰한 돈은 오백만 원이었다. 택시기사인 청부살인자와 김정훈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났다.
평소에 반복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며 욕설이 섞인 비방글을 올리는 김정훈이 살인을 해 보고 싶다며 택시기사가 올린 글에 쪽지를 보낸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도 놀라운데, 오백만 원을 준다고 죽이겠다고 신재언을 찾아온 예비 살인범의 태도도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이런 멍청한 놈이 어떻게 우리 회사에 입사했지?
신재언이 다니는 회사는 나름대로 알아주는 명품 브랜드라 공채로만 직원을 뽑았다. 아마도 평생 풀리지 않을 미스터리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일곱 명의 거대 빌런이 기절한 김정훈을 빙 둘러싼 채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게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그들은 눈앞의 인간을 살려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를 위험하게 하다니, 그 점 죽어 마땅합니다.”
타락한 추기경이 피눈물을 흘리며 지팡이를 들었다. 독실한 성직자이자 자비를 베풀며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던 바티칸의 자랑스러운 추기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입은 새하얀 신부복이 피로 얼룩졌다.
“그가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때까지 진정한 심판을 주도록 합시다.”
‘진정한 용서’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 타락한 추기경의 표정이 섬뜩했다. 이윽고 일곱 빌런이 검은색 십자가를 들어 올리며 김정훈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신재언은 그들의 엄숙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보다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도 사람이 죽는 걸 두 눈 뜨고 직접 보고 있을 만큼 담이 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 씻고 나온 재언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눈알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김정훈이 엉망이 된 몰골로 용서를 빌고 있는 장면이 나타났다. 손가락으로 눈알을 톡 치자 장면이 바뀌었다.
제법 부유해 보이는 주택단지 안의 화려한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의 히어로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뺨을 맞은 듯 부어오른 뺨을 손으로 감싼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굉장히 눈에 익은 그는 바로 강세준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가해 학생이었다.
- 언제까지 쓰레기 짓만 하고 다닐 거냐. 또 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면 집에서 쫓아낼 테니 그렇게 알아!
그렇게 말한 중년 남성이 아들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가, 방 안으로 밀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가정폭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그 학생의 얼굴에는 반성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 혼자 남은 가해 학생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씩씩거렸다.
- 강세준, 이 씨발 새끼. 감히 꼰질러? 내일은 진짜 죽여 버릴 거야. 그때 백 번 처맞은 거론 부족했나 보지.
그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강세준 학생이 괴롭힘 받은 사실이 없다고 진술한 건 이 때문인 듯했다. 방구석에 있는 각목을 휘두르며 히죽이는 것을 보니 강세준 학생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재언은 또다시 눈알을 톡톡 쳐서 김정훈이 나오는 장면으로 돌렸다. 어느새 혼내는 게 끝났는지 피투성이가 된 김정훈이 마음을 다해 용서를 빌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에 피눈물을 쏟고 있는 에렌 성이 인자하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드디어 진정으로 용서를 비는군요. 죄 많은 성자여,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드디어 용서를 받았으니까요.
타락한 추기경이 흐뭇하게 웃으며 지팡이를 들었고 김정훈의 비명을 끝으로 영상이 끝났다.
그가 직접 용서하겠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면 김정훈은 정말 최선을 다해 용서를 빌었음이 틀림없었다.
“어휴, 내 팔자야.”
재언은 찝찝한 기분으로 강세준 학생을 살폈다.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는데, 그게 마치 웃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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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던 괴한 두 명을 떠올리며 강세준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맞은 곳이 너무 아프고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S급 히어로 볼프강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힘겹고 괴로운 시절이 있어도 절대 굴하지 않았다.”
볼프강은 하피 종족으로서 사람들의 편견이 심하고 괴롭힘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당당하게 히어로가 되었다. 그러니 지금 강세준이 겪는 고통 또한 굴하지 않고 이겨 내면 그처럼 멋진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세준이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볼프강은 능력자였고 그는 비 능력자라는 사실이었다.
“네게 힘을 줄 수 있어.”
‘아냐, 너무 수상했어…….’
강세준이 고개를 흔들며 떠오르는 말을 애써 부정했다. 자신을 유혹하는 말들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볼프강의 말대로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견디다 보면 언젠간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알림음에 덜덜 떨며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억지로 들어가게 된 단체 채팅방엔 그를 괴롭히는 아이들의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 씨발 새끼야. 죽을 준비하고 있어라.]
[하수구에 빠트릴까? 아니면 매트에 묶어 두고 음쓰를 먹이는 건 어때.]
[일단 아구창 백 대부터 때리고ㅋㅋ]
“으… 으….”
강세준은 자신을 앞에 두고 어떻게 괴롭힐지 신나서 떠드는 이들을 보며 공포에 질렸다. 볼프강의 말을 계속 떠올리려고 해도 진정되지 않았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하피라는 이유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