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덜덜 떨면서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기어가 몸을 웅크렸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선생님들에게 말해 봤자 돌아오는 건 간단한 제재와 꼰질렀다며 더 악착같이 변하는 폭력뿐이었다.
“볼프강… 살려 줘요… 볼프강!”
하지만 볼프강이 짠! 하고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밉지 않니?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아?”
어젯밤 꿈처럼 나타났던 괴한이 해 주었던 말에 강세준의 신념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에게 행해지는 폭력의 수위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고 그를 방관하는 주변 사람들마저도 폭력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분명히 죄책감을 가졌을 그들은 괴로워하는 강세준을 봐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폭력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이전에 괴한들의 방해에 몸을 던지지 못했던 일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비실거리는 걸음으로 옥상에 올라가 핸드폰을 확인한 강세준은 누군가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이래도 오늘 자살 안 하면 내가 죽여 줄게, 등신아.]
시간이 지나면 그도 무언가를 깨닫고 그만둬 줄 줄 알았다. 핸드폰을 붙잡은 채 울고 있는 강세준의 눈앞에 신발이 나타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미남이었다.
그는 덧니를 드러내 웃으며 강세준의 두 날개를 잡았다.
“축하해. 너도 이제 능력자야.”
“…아.”
갑자기 강세준의 몸 안으로 폭발적인 힘이 들어왔다. 휘몰아치며 범람하는 힘에 눈이 뒤집히고 입에는 거품이 잔뜩 생겼다.
그리고 강세준이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눈앞에 여덟 명의 사람들이 그를 둘러싼 채 서 있었다. 그중에 일곱 명은 검은색 십자가를 들고 아까 강세준이 봤던 잘생긴 미남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검은색 십자가를 들지 않은 그를 보며 강세준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버지……!”
괴롭고 힘겨웠던 지난 시간과 평화를 사랑하며 그들이 스스로 그만두기를 간절히 바라기만 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환희에 찬 강세준의 눈동자에 오만하게 웃고 있는 신재언의 얼굴이 보였다.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일곱 명의 거대 빌런을 거느리는 그는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세준은 그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 세상은 아버지의 발아래 있어야 함이 마땅했다. 그래야 세상이 이치를 깨닫고 자신 같은 불행한 사람을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방해하는 역겨운 위선자들을 처리하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니야!’
신재언이 몸서리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세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해 학생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능력만 줬다고 생각하는 재언은 강세준의 눈동자를 보고 무언가 단단히 틀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히어로를 동경하고 있잖아! 대체 왜 세계를 파괴해서 잘못된 것들을 다시 설정하겠다는 해괴망측한 일을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니?’
혼란스러워하는 신재언의 속마음과는 달리 엔레이드맨이 잔뜩 감명받은 얼굴로 새로운 형제를 끌어안았다.
형제 중 가장 처음으로 빌런이 된 그는 나날이 늘어나는 형제가 너무나도 기꺼웠다. 비록 타락한 추기경과는 다투기도 했지만, 본디 형제들끼리는 싸우며 크는 법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가 똑같았다.
“형제들이여, 나는 정말 기쁘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아버지를 모실 수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가 검은 십자가를 두 손으로 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아… 아버지의 위대하신 영광으로 비틀어진 세계를 바로잡읍시다.”
‘미, 미친놈들아 그만해!’
신재언은 서른 살이 넘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성인이었다. 이런 대사를 참고 넘어가기엔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미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진 여덟 빌런에겐 신재언의 간절한 마음은 닿지 않았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며칠 전에 강세준과 가해자들을 싸잡아 고문하자고 제안한 체어맨이 새로 온 형제를 가장 따뜻하게 반겨 주었다.
질린 눈으로 자기들끼리 환호에 차서 ‘아버지’를 연호하는 빌런 놈들을 쳐다보던 신재언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벌써 시간이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었다. 미성년자를 데리고 이 시간까지 집으로 보내지 않는다니, 모범을 보여야 할 성인으로서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뭉쳐 있는 빌런 놈들을 흩어지게 하고 옥상에는 재언과 체어맨, 강세준만이 남았다. 그래도 말은 잘 듣는 녀석들이라 다행이었다.
신재언은 엉거주춤 서서 뒤를 돌아 강세준을 쳐다봤다. 그의 능력인 ‘증오를 각성시켜 주는 능력’은 한번 능력을 각성시키면 무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일단 각성한 능력은 회수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대체 무슨 능력을 각성한 거지?’
딱히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축 늘어트린 날개가 팔을 대신했고 겉으로는 전혀 변한 게 없었다. 본인도 어리둥절한 표정인 것을 보아 어떤 능력인지 아직 깨닫지 못한 듯했다.
아마도 복수할 상대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체어맨이나 엔레이드맨 같은 경우에는 능력을 바로 사용해 복수를 마쳤으니까 말이다.
“일단 늦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엄하게 당부했다.
“아직 능력을 사용하지 마. 사고 치지 말라는 소리야. 알겠어? 그래도… 가해자들을 만나면, 그때만큼은 네 뜻대로 해도 좋아.”
아직도 몽롱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강세준은 풀어진 얼굴로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나 진짜 간다? 집에 가? 내일 토요일인데 신입이 쳐 놓은 사고 때문에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그 신입은 지금쯤 저 바다 아래에 가라앉아 있을 거긴 한데, 그놈이 일하던 것도 내가 다 수습해야 한다고?
기분이 찜찜하지만, 딱히 거스르려는 기색은 없기에 딱히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체어맨과 조각난 장난감을 그의 곁에 붙여 줄 생각이었다.
신재언은 무슨 사고를 치면 두 사람이 바로 알려 줄 것이라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
강세준은 이제 체어맨과 단둘이 있어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전에는 기괴한 모습의 그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는데 지금은 반대로 깊은 유대감을 느낄 정도로 친근했다.
그가 뒤집어쓴 검은 망사 사이로 말라비틀어진 피부가 보였다.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주 끔찍한 짓을 당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나중에 반드시 다시 모일 날이 올 겁니다, 형제여.”
“…네.”
체어맨이 상냥하게 달래며 속삭이고는 문을 열어 세준의 집으로 바로 연결했다. 멍하니 어두운 자신의 방을 돌아보는 세준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인 체어맨은 이윽고 몸을 감췄다.
방금까지 느꼈던 환희와 감동이 거짓말인 것처럼 집 안은 적막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준은 멍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불을 켜기 위해 벽을 더듬거렸다. 환한 방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점점 현실이 느껴졌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가자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늘 일이 바빠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세준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이불이 폭신했고 아늑했다. 악몽보다도 지독한 현실이 기다리는 내일이 무서워 밤잠을 설쳤던 과거가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핸드폰에 계속 불이 들어왔다. 대부분 그를 괴롭히는 학생들이 보내온 메시지들이었다.
[드디어 자살했냐?]
[오오, 준혁이 ㅊㅋㅊㅋ 만원 빵 이겼네?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이 채팅 위험한 거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시지들 사이로 다른 글이 눈에 띄었다.
[S급 히어로 볼프강 사인회 당첨☆
강세준 님, 포토 카드 구매자 랜덤 추첨에 당첨되셨습니다.
금일 오후 8시 OO역으로 와 주시면 됩니다.]
히어로 볼프강은 그가 괴롭힘을 받을 때마다 정신적으로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는 강세준이 닮고 싶어 하는 영웅이었다.
그의 말을 항상 되새김질하며 그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싶었다. 언젠간 괴롭힘에서 벗어나 그들을 용서하며 자신만의 길을 당당하게 걷고 싶었다.
학교도 가지 않고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세준은 자신이 오후가 훌쩍 지나가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자 여전히 싸늘한 분위기의 집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홀린 듯 거실 중앙에 서 있던 강세준의 귀에 철컥거리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야간근무라도 섰는지 이제 퇴근하는 듯한 세준의 부모님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