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6화 (16/324)

16화

“이번에 신작이 나오면서 갑자기 해외촬영이 잡혔어요. 하필 제가 프로젝트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이번에 보러 가기로 했던 뮤지컬은 못 볼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겨우 퇴근하고 집에 도착해 씻고 나와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밤 11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로 잠이 들어야 내일 새벽에 멀쩡한 상태로 출근할 수 있었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신재언이 다니는 명품 옷 브랜드 회사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모델을 섭외해 광고영상을 찍어야 했다.

이전에 모델로서 일했던 차민재는 신재언의 느닷없는 약속 파기에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상냥한 말투로 재언을 달랬다.

- 괜찮아요. 일이 바쁘면 어쩔 수 없죠. 저도 이번에 협회에서 받은 의뢰 때문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으니 서로 쌤쌤이에요.

“민재 씨…….”

세간에 레드-헬-파이어는 히어로를 가장한 사이코패스이며 살인마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신재언은 그건 전부 악의 세력이 그를 음해하기 위해 꾸며 낸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성격대로라면 레헬은 프로젝트고 뭐고 감히 자신과의 약속을 취소하느냐며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재언이 민망하지 않게끔 의뢰를 핑계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주었다. 너그럽게 웃으며 용서해 주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이번 신작의 촬영지로 잡힌 곳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서쪽 해변에 위치한 루벤이라는 이름의 작은 섬이었다. 굉장히 폐쇄적인 곳이라 섭외하는 데 굉장히 난항을 겪었다고 들었다.

남아공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정부의 통제는 거의 받지 않고 섬 주민들끼리 문화를 이뤄 사는 곳이라 현대문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섬에서는 계속 거절을 해 왔던 것 같은데 사진작가가 섬의 분위기가 신작과 어울린다며 섬을 고집했다.

결국, 촬영지 섭외를 끈질기게 요청해 섬에서 요구하는 바를 최대한 들어주겠다고 설득하다 보니 촬영 일정도 급작스럽게 정해졌다. 허락이 떨어졌을 때 빠르게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이번 주말에 차민재와 만나 뮤지컬을 보고 가볍게 술 한 잔하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휴가를 길게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못했던 대청소도 하고 산이나 바다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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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A급 히어로 빅팜이라고 해요. 이번 해외 촬영의 경호를 맡은 히어로입니다.”

검은색 타이즈에 분홍색 목도리를 두른 빅팜이 검은색 안대를 고쳐 쓰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게 대체 무슨 심오한 패션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금색 벨트를 찬 허리에도 계속해서 시선이 갔다. 분명히 젊어 보이는 것 같은데 안대 때문에 연령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A급이라면 재언이 알 법도 한데 처음 보는 얼굴인 것을 보면 히어로 협회에 등록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인 듯했다. 신입인데 A급이면 실력 하나는 보장할 수 있을 테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재언은 빅팜과 악수를 하고 함께 여정을 떠날 팀원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을 맡은 박 부장, 경험 삼아 불려 온 최 사원, 외부업체에서 고용한 촬영팀과 스텝들로 총 열다섯 명 정도의 소규모 인원이었다.

사진작가는 본사에서 직접 고용한 베르테오라는 이름의 이탈리아인이었다. 이전에 레헬이 모델이었을 때 온갖 찬사를 늘어놓으며 작업했던 사진작가였다.

신재언은 가볍게 한 사람씩 인사를 나눈 뒤 가장 마지막 순서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경유만 두 번 하고 전용기로 4시간을 넘게 날아야 겨우 도착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경유지에서 체류한 시간을 제외하고 20시간을 넘게 비행기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초주검이 되어서 공항에 도착했다.

체어맨의 능력을 이용하면 문 한 번에 왔다 갔다 할 수 있건만 그럴 수 없으니 더 녹초가 되는 느낌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최 사원도 마찬가지인지 창백한 얼굴로 공항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전용기를 타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 이 녀석들, 나이도 젊은데 왜 이렇게 비실거려? 호텔에서 하룻밤 푹 쉰 다음 섬으로 출발할 거다.”

사원들보다는 해외 출장을 더 많이 다녀 본 베테랑 박 부장이 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

호텔 규모는 작지만 배정받은 룸은 1인실로 넓은 침대에 깨끗하고 조용해서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20시간이 넘게 비행하니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변을 관광하러 돌아다닐 기력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재언은 꽤 오래 목욕을 즐긴 뒤 침대에 누워 눈을 끔벅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직 남아 있는 피로를 어깨에 매달고 조식을 든든하게 먹은 뒤 전용기를 타고 섬에 도착했을 땐 찌는 듯한 더위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진짜 덥다.”

“거기 장비 조심해요. 안녕하세요, 신재언 씨. 엠디라고 해요.”

꽤 이국적으로 생긴 갈색 곱슬머리의 여성이 일행들 쪽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안경이 눈에 띄는 그녀는 루벤 섬 출신으로 일행의 가이드를 맡게 되었다. 외부업체 소속으로 고용된 사람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녀는 일행들과 인사하며 악수를 한 뒤 주변 탐사가 필요할 것이라며 안내를 시작했다. 마치 무인도 같은 섬에서 사람 사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지 여기저기에 여성의 형태를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석상 몇 개도 눈에 보였다. 특이한 건 석상의 머리가 모두 떨어져 있었다는 것인데,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부서진 건 아니고 인위적으로 베어 내거나 머리 없이 조각한 듯했다.

“루벤 섬은 풍요와 다산의 여신을 모시고 있어요. 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 하나같이 목이 잘려져 있네요. 불길하게…….”

엠디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목이 없는 석상은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게 했다.

눈을 찌푸린 그녀는 멈춰서서 석상의 목과 몸을 한데 모아 바닥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올리는 경건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재언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길로 주변 탐사는 중단되고 엠디가 루벤 섬의 유일한 마을로 일행을 이끌었다. 신재언은 원주민이라 해서 움막 같은 것을 지어서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생각보다 현대적인 목조식 건물에 들어가 짐을 놓은 일행은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영어가 아닌 그들만의 언어를 쓰기에 엠디가 옆에서 통역해 주었다.

“이분은 우리 마을 촌장님으로, 이름은 로스라고 해요. 이곳은 신성한 여신의 땅이니 외지인들은 각별히 주의해서 돌아다니길 바란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산속에 있는 사원 동굴은 외지인 출입금지니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시네요.”

“주의하겠습니다. 촬영에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촌장이라며 나타난 사람은 마을의 우두머리라고 하기엔 꽤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섬 주민들을 살피던 재언은 그들 모두 아까 봤던 여신상과 똑같은 작은 조각상을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있는 걸 눈치챘다.

이제 보니 이들은 신앙심이 대단한 모양인지 마을 중앙에 커다란 여신상을 세워 놓았다. 그 앞에서는 사람들이 절을 하며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정말 신기한걸. 마을 전부가 여신의 독실한 신자인가 봐.”

“그럴 수 있죠. 그럼 우리는 짐을 풀고 촬영에 들어가 볼까?”

도란도란 말을 주고받는 촬영팀 스텝들을 보던 재언은 문득 묘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눈으로 보이는 수상한 것은 없기에 착각이겠거니 생각하고 촬영팀과 함께 촬영지로 이동했다.

섬은 아주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더워서 일행들을 체력적으로 지치게 했다. 그래도 모두의 열정 덕분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경유지에서 만난 모델들은 덥지도 않은지 털코트를 입고 멋들어진 포즈를 열심히 취했다. 저런 게 프로구나 싶어서 새삼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 야외촬영에 사람들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훤한 대낮엔 싱그러운 느낌이 있는 섬이었는데, 해가 지자 드러나는 묘한 분위기가 이곳을 더 아름답게 했다.

그러다 보니 신이 난 사진작가 덕분에 촬영이 길어졌다. 모델들이 점점 견디기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일 때쯤 엠디가 사진작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 작가님. 촬영 일정은 아직 사흘이나 남았으니 지금은 철수하고 내일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밤이 너무 늦었어요. 여신님께서 분노하실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신님 어쩌고 하는 엠디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촬영을 철수하는 데에는 격하게 공감했다. 그늘에서 쉬고 있었던 박 부장마저도 고개를 끄덕이자 사진작가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를 맡은 빅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딱 봐도 더워 보이는 검은색 타이즈에 목도리까지 했으니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듯했다.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은 했지만,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큰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다. 재언은 마을 분위기가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촬영장을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용 목욕탕에 재언과 함께 들어간 최 사원은 발갛게 탄 피부를 찬물로 식히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진짜 쪄 죽는 줄 알았어요. 실시간으로 살이 타는 걸 느꼈다니까요? 이것 보세요, 재언 씨. 내일이면 피부가 다 벗겨질 거에요.”

“선크림을 바르면 좀 나아질 거예요.”

재언의 대답에 최 사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선크림을 실수로 안 챙겨 왔어요.”

“그러면 제가 빌려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소소하게 잡담을 하며 시원하게 찬물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마을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집집이 불도 이미 꺼져 있었다.

그들이 숙소로 머무는 루스 촌장의 집에 도착하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배가 고팠던 차에 잘됐다 싶어 주방으로 들어가자 박 부장과 엠디가 음식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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