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17화 (17/324)

17화

“무슨 일 있어요?”

“아, 신 사원…….”

박 부장이 난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촬영팀 막내가 보이질 않나 봐. 분명 촬영을 접기 전까지는 있었는데… 여기 도착하니까 어느새 사라지고 없더래. 밖이 그렇게 덥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런 밤중에는 위험하니까…….”

“아.”

촬영팀 막내라면 스물두 살가량의 남성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촬영 팀 보조 아르바이트로 따라온 스텝이었다. 키는 재언보단 작았지만 일도 잘하고 성격이 싹싹했다.

조금 까불긴 했어도 밉상은 아니었던지라 촬영팀 스텝들이 나름대로 귀여워하고 있다는 건 기억했다. 대화를 나눈 적은 없어도 오며 가며 얼굴은 익힌 상태였다.

프로젝트 총괄을 맡은 박 부장은 혹시라도 있을 안 좋은 일을 떠올리는지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밖에서 찾아보고 올까요? 길을 잃은 게 아닐지.”

“섬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길만 따라오면 금방 마을이 보여요.”

“그러면 숙소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닐까요? 화장실에 있어서 못 찾는다거나.”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어디에도 없었어. 그래서 걱정이라는 거야.”

박 부장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는 사이 겨우 더위를 이겨 내고 나타난 빅팜이 나섰다.

“그러면 제가 책임지고 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히어로니 어지간히 위험한 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자신 있게 말하던 빅팜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경호 의뢰를 받은 히어로로서 낮에 너무 덥다고 도망쳤던 게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능력자에 히어로인 그가 나섰으니 조금은 안심이 된 재언은 식사를 대충 끝내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작진 않았지만, 창문이 뻥 뚫려 있어 조금 신경 쓰였다.

2인실에 침대가 하나인지라 최 사원과 누가 아래에서 자야 할지 꽤 오래 실랑이를 벌였다.

“재언 씨가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닙니다. 제가 아래에서 잘게요.”

“바닥에 서늘해서 더 좋아요. 침대는 너무 더울 것 같거든요.”

한참 동안 양보를 반복하다가 시간을 더 지체하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루벤 섬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에 눈을 뜬 신재언이 머리를 긁적였다.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운 탓에 잠에서 깨 버렸다. 뻥 뚫려 있는 창문 너머로 확인하니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었다.

어두침침한데 왜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지?

“하아암.”

신재언이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바깥의 북적이던 소리가 갑자기 뚝 하고 끊겼다. 마치 TV 전원을 끈 것 같은 정적에 신재언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귀신이 들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이렇게 조용해진다고? 무서운데!’

겁쟁이 신재언은 고개만 빼꼼 내밀어 창밖을 슬그머니 내다봤다. 길거리에 마을 원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재언과 최 사원이 묵고 있는 방 쪽을 일제히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침대에 털퍼덕 앉아 무서워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무서워! 하마터면 지릴뻔했다고! 이게 무슨 일이야!’

가슴을 부여잡은 채 엉금엉금 기어가 바닥에서 곤히 자는 최 사원을 급하게 깨웠다.

“최 사원!”

“음~… 왜 그래요, 재언 씨…….”

“잠깐만 일어나 볼래요? 저기… 저기!”

“저기?”

잠에 잔뜩 취한 채로 최 사원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재언은 조심스럽게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방금까지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섬 주민들의 모습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있는데요?”

눈이 침침한지 아니면 아직도 졸린 지 최 사원의 목소리가 떨떠름했다.

‘귀, 귀신이다!’

귀신들의 성녀를 일곱 번째 자식으로 둔 재언은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덜덜 떨었다. 그에 비해 최 사원은 신재언이 피곤하고 더워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자리로 돌아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기도 힘들고, 귀신들의 성녀가 조용한 걸 보니 귀신도 아닌 듯했다.

최 사원의 말대로 덥고 어두워서 헛것을 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 재언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으… 중간에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기 힘든데…….’

게다가 새벽인데도 너무 더웠다. 더운 날씨에 잠이 들다가도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내일도 엄청 피곤해질 것 같았다.

잠을 설칠 만한 더위를 며칠 더 꼼짝없이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신재언은 다섯 번째 자식인 냉기와 제안의 마녀에게 이 방을 좀 식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녀는 물과 얼음의 능력을 쓸 수 있는 능력자로 재언이 다섯 번째로 능력을 각성시킨 다크 카오스의 자식이었다. 21세기에도 어딘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마녀사냥에서 산채로 화형당할 뻔한 걸 신재언이 구해 준 이였다.

“으아아악!”

어떻게든 잠이 들기 위해 노력하는 재언의 귓가에 남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가 몸을 일으켜 뻥 뚫려 있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자 이번엔 마을 저편에서 또다시 비명이 들렸다.

이번엔 정말 헛것이 아니었다. 신재언이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밖으로 튀어 나가자 마침 주방에 있던 엠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왔다.

“재언 씨? 무슨 일이에요?”

어쩐 일인지 그녀는 얼굴을 가득 덮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다. 주방 쪽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벌써 아침을 준비하던 중이었나 보다.

재언은 길거리를 가득 채웠던 마을 사람들에 관해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마을 너머 숲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비명을 들어서요. 못 들었어요?”

“네? 무슨…….”

엠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신재언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군.’

재언은 생각에 잠긴 채 턱을 쓰다듬다가 엠디가 혼자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혼자서 준비하고 계셨어요?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곧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 텐데 주방에 외지인을 들이지 않으려는 관습 있어서 금방 쫓겨날 거에요.”

도와주려던 것이 민망해질 만큼 손사래까지 쳐가면서 거절하는 엠디의 태도에 재언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방금 비명이 들렸다면… 분명 여신님이 노해서 누군가에게 벌을 준 게 분명해요. 그러니 재언 씨도 거기에 말려들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신재언은 그런 그녀에게 더 캐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런 상황에 공포심을 가지겠지만 적어도 신재언은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지가 아닌 검은색 홍채를 가진 눈알 하나가 데굴데굴 움직이고 있었다.

“조각난 장난감, 저쪽으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낱낱이 살펴보고 와. 그래도 위험할 것 같으면… 음…….”

한참 고민하다가 결정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타락한 추기경과 함께하도록 해.”

조각난 장난감은 신체의 작은 일부분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기 굉장히 유용했지만, 그 대신에 굉장히 약했다. 상처 입는 것까지는 금방 치유되지만 터지거나 잘리기라도 하면 복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렇기에 형제들은 그녀의 신체 일부를 하나씩 나눠서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다녔다. 혹시라도 그녀가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움직이기 쉽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반지 케이스 안에 있던 눈알이 둥실하고 떠올라 창문 너머로 유유히 사라졌다.

완전히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엠디가 방문객들을 깨우고 다녔다. 식사 준비가 끝난 모양인지 음식 냄새가 2층에 있는 그들의 방까지 올라왔다.

재언과 같은 방을 쓰는 최 사원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는 오늘 새벽에 재언이 자신을 깨웠던 걸 기억하지 못한 듯했다.

간단하게 세안만 끝낸 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촬영팀 스텝들이 보였다. 피곤함에 찌든 표정들을 보아하니 지난밤 피로에 앓았던 게 자신뿐만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장거리 비행 후 하룻밤 쉬고 찜통더위 아래에서 일을 강행한 탓에 건장하고 체력이 좋은 재언도 몸이 쑤시는 걸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전부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휴식을 가질 순 없었다. 섬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일정을 빠르게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폐쇄적인 이곳 섬에서 촬영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하지만 그만큼 루벤 섬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섬의 아름다움을 꼭 사진에 담고 싶다는 베르테오 작가의 열정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앉자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박 부장이 눈짓하며 인사를 건넸다.

“신 사원, 최 사원, 잘 잤어? 어휴, 이렇게 더운데 난 기절했어.”

“박 부장님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하… 저는 잠을 좀 설쳤어요.”

박 부장의 맞은편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신재언은 촬영팀의 분위기가 아직도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제 실종된 촬영팀 막내… 아직도 못 찾은 모양이야. 이거 참… 내가 책임자인데 골치 아프게 됐어.”

“A급 히어로 빅팜은 어디 있습니까?”

신재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검은색 타이즈를 찾아봤지만, 그와 비슷한 복장을 가진 이도 없었다. 박 부장마저 고개를 젓는 걸 보니 빅팜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고기가 많이 들어간 국과 잎으로 싸여 있는 밥을 받고 나무 숟가락을 들어 올린 신재언의 귓가에 엔레이드맨이 아무도 모르게 속삭였다.

‘아버지. 그 음식은 드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엔레이드맨이 자신을 굶기는 게 목적은 아닐 거고…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의 신변에 무언가 이상이 생길지도 모를 테니 따르는 게 이로웠다.

곧바로 숟가락을 내린 신재언이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투로 엠디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 입맛이 너무 없네요. 방에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엠디가 방긋 웃었다.

“네,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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