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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18화 (18/324)

18화

신재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엠디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이 드러나려는 걸 필사적으로 숨기며 박 부장에게도 말을 건넸다.

“부장님. 저 올라가서 쉬고 오겠습니다.”

“그래.”

박 부장도 피곤한 얼굴로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수저질을 이어 갔다. 지금 당장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의아했다.

방으로 돌아간 신재언의 앞에 작은 소년 모습의 엔레이드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종종 자신의 결계인 둠 안에 숨어서 신재언의 곁에 붙어 다녔다.

그런 그의 모습이 보인다는 건 재언이 엔레이드맨의 둠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이때는 누구도 신재언이 하는 말과 행동을 듣거나 볼 수 없었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창밖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이 두둥실 날아왔다.

신재언이 손을 뻗자 눈알이 손바닥에 안착해 데굴데굴 굴렀다.

“조각난 장난감. 조사해 오라는 건 어떻게 됐어?”

그러자 바닥에 어떤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A급 히어로 빅팜이 누군가를 피해 도망치는 장면이었다. 그의 뒤로 몇몇 사람들이 그를 쫓고 있었는데, 마치 빅팜을 사냥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누군가가 활을 쐈지만, 빅팜의 검은색 타이즈는 뚫지 못했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능력자로 보이는 누군가가 빅팜과 육탄전을 벌였고 결국 빅팜이 기절해 버렸다. 괴한들은 A급 히어로를 기절시켜 어딘가를 향해 질질 끌고 갔다.

조각난 장난감이 쫓아가려 해 봐도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지 그들은 그녀의 감시망을 피해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신재언이 봤을 때 빅팜을 끌고 간 괴한들은 아무리 봐도 섬의 원주민들이었다.

이런 외딴 섬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실종사건과 원주민이라니. 저번에 덜덜 떨면서 봤던 B급 공포 영화가 떠올랐다.

거기에선 차를 타고 가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나는 바람에 길을 헤매는 주인공 일행이 돌연변이들에게 쫓기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비슷하다.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신재언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설마! 식탁에 올라와 있던 고깃국의 정체는……!”

“다행히 아버지께서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닙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내용에까지 발을 담그려던 신재언을 엔레이드맨이 끌고 나왔다. 그러나 상상일 뿐이라서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는 재언의 앞에 엔레이드맨의 충격적인 말이 놓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식사에만 수면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내 것에만?”

“네.”

이게 더 무섭잖아! 무슨 소리야!

유약한 신경 줄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일반인인 재언이 끙끙 앓고 있을 때 엔레이드맨은 그저 태연했다.

이런 섬에 사는 무지렁이 같은 놈들 따위 모두 죽여 버리고 절대적인 존재인 아버지를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무사히 육지로 보내 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엔레이드맨의 그런 기색을 기막히게 눈치챈 신재언은 혹시라도 그가 섬 전체를 둠으로 가두고 학살을 시작할 것을 우려해 손짓으로 물러나게 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원주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면 모를까.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 상태에서 엔레이드맨을 풀어놓기가 매우 찝찝했다. 거기다가 잘못하면 동료 직원들이 말려들지도 모르는데 그건 재언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엔레이드맨이 순순히 모습을 감추자 재언은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다시 반지 케이스에 넣어 주었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식사를 끝냈는지 옹기종기 모여 촬영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느 한편에선 촬영을 중단하고 지금부터라도 실종된 촬영팀 막내와 히어로 빅팜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해진 시간 안에 찍어야 하는 촬영은 어쨌든 재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언쟁을 묵묵히 들으며 신재언은 히어로 빅팜이 섬의 원주민들에게 끌려갔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해 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그저 남아 있는 빵을 주워 먹었다. 엔레이드맨이 말린 덕분에 아침을 먹지 못한 탓이었다.

아침에 직접 짜 왔다는 산양 우유와 빵을 주워 먹어도 엔레이드맨이 아무 말 없었기에 마음 놓고 실컷 먹었다.

겨우 허기가 가실 때쯤, 신재언은 접시를 든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엠디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아깐 속이 좋지 않으시다더니, 지금은 많이 나아졌나 봐요.”

“네. 지금은 좀 살 것 같네요.”

입에 문 빵을 꿀꺽 삼킨 신재언은 이전처럼 엠디를 편하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업체에서 고용되었지만 어쨌든 이곳 주민인 그녀는 식사 준비까지 도맡아서 했다.

주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핑계로 신재언이 들어가지 못하게 내쫓기도 하고 아침밥에까지 수작질을 부렸다. 경계해야 할 주요 대상이었다.

결국 박 부장과 사진작가가 오랜 언쟁 끝에 타협을 이뤄 냈다. 사진 촬영 작가와 스텝을 최소한으로 두고 나머지는 막내와 히어로 빅팜을 찾기로 한 것이다.

신재언은 촬영 팀 막내를 찾으러 가는 박 부장을 대신해 촬영하는 데 따라가기로 했다. 촬영은 모델 세 명과 스텝 두 명, 사진작가 한 명, 직원인 신재언까지 전부 일곱 명으로 정해졌다.

사람이 사라졌다는데 촬영을 재개해야 한다는 사진작가의 태도가 참 매정하다고 느끼면서도 빠듯한 일정에 회사에서 바라는 작품을 내놓으려는 그의 프로의식에 감탄이 나왔다.

박 부장과 최 사원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장면을 마지막으로 신재언은 커다란 지프에 마지막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된 지 두 시간쯤 되었을까, 문제가 터졌다. 전파가 터지지 않는 섬이라 멀리 있는 사람과는 무전기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최 사원에게서 다급하게 무전이 온 것이다.

재언은 허리춤에 찬 무전기를 빼고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최 사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 촬영 스텝 두 명이 볼일을 보러 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혹시 염영지 님과 박중배 님이 촬영팀과 합류했나요?

“아니요. 이곳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신재언의 대답에 한참 동안 무전기에서 정적이 흘렀다가 최 사원에게 무전기를 건네받은 박 부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얼른 다시 모여 섬을 빠져나가 지원을 요청해야겠어.

‘…아까 빅팜을 끌고 갔던 원주민들인가?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둘씩 처리하고 있는 것일지도……. 박 부장님 말대로 섬을 빠져나가는 게 안전하겠어. 히어로 협회에서 S급 이상이 와야 안전하겠지.’

A급 히어로도 강한 축에 속했지만, S급 히어로들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 해도 부족했다. 잠시 레헬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협회에서 가장 아끼는 히어로를 이곳까지 보내 줄 리 없었다.

재언은 무전기 안테나로 턱을 꾹꾹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자식들을 이용해 도와줬다가 잘못 걸리면 오히려 자신이 위험해졌다.

나름대로 선량한 시민을 연기하지만, 자신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사안에서는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진작가와 스텝들을 불러와 논의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던 중 이쪽에서도 모델이 한 명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왕이지 씨는 어디 갔어요?”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델은 중국에 사는 한국인 교포로 팔다리가 길고 얼굴이 작은 것으로 요즘 유명세를 치르는 모델이었다. 세 명의 모델 중에 몸값이 가장 비싸 브랜드에서 전속모델로 고려하는 귀한 몸이었다.

신재언이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모델 두 명이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담배 피우러 간다고 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한 십오 분 정도 됐어요.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미치겠네!

만약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이 일은 박 부장 혼자서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신재언도 같이 망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생각하던 신재언은 모두 지프에 태운 뒤 무전기로 박 부장과 연락해 보겠다는 핑계를 대며 혼자 나왔다.

사람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순순히 지프에 올라탔다. 함께 있던 일행이 연속적으로 실종되는 상황이니 머릿속으로 잔뜩 안 좋은 상상이 드는 모양이었다.

겁먹는 것도 당연했다. 신재언은 무전기를 입가에 대고 무전하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타락한 추기경. 얘기는 들었지? 실종된 사람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아봐. 그리고 섬 원주민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조사해서 내게 보고해.”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의 주변에 있던 시선 하나가 사라졌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프에 올라타 박 부장팀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박 부장은 왕이지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넌 거기 있으면서 그렇게 귀한 모델이 사라졌는데 두 눈 멀쩡히 뜨고 뭐 했어!”

이성을 잃었는지 박 부장이 큰소리를 치며 신재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일이 잘못되면 책임질 거냐면서 왜 그녀를 혼자 두게 했냐 느니 같은 말을 되는대로 내뱉었다.

본인도 두 눈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 촬영팀 두 명을 잃어 놓고 온갖 폭언을 쏟아 냈다. 재언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지만, 원래의 점잖고 친절했던 박 부장을 생각하며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하면서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가 잔뜩 침체되어 있을 무렵 최 사원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엠디 님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어? 엠디 님 어디 갔어요?”

이 마을 주민인 엠디마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겁에 잔뜩 질린 채 마을로 돌아갈 생각도 못 하고 허겁지겁 차에 올라타 전용기가 착륙했던 해변으로 달려갔다.

물론 예약된 시간에 맞춰 오기로 한 전용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저희가 타고 온 보트, 저쪽으로 가면 있어요. 여긴 제대로 된 부두가 없어서 나무에 밧줄을 메 보트를 고정해 놨는데 장비들이 워낙 커서 우리도 다 탈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표정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신재언이 봤던 공포 영화 중 그 어떤 것도 주인공들을 쉽게 탈출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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