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보트를 묶어 놓은 줄이 누가 잘라 놓은 것처럼 깨끗하게 잘려져 있었고, 보트는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이 섬에 완벽하게 고립된 것이다.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른 건 모델 중 한 명인 이채연이었다. 그녀는 유일한 탈출 수단인 보트가 사라진 걸 알자마자 겁에 질려 소리쳤다.
“미쳤어! 우릴 다 죽일 생각이라고요. 이런 곳에서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해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섣부르게 판단하지 맙시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봐요.”
“그 야만인 같은 원주민들이 우리를 다 죽일 목적이면 어떻게 하게요?!”
그녀가 겁에 잔뜩 질린 건 이해했지만 여기 있어 봤자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민간인들이었고 그나마 믿을 만한 히어로는 사라져 버렸다.
섬의 원주민들을 의심하는 그녀의 감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덥고 피곤하고 초조한 마음에 판단력이 흐려진 듯했다.
결국, 일단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전 안 가요!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가요?”
“하지만 채연 씨. 여기 혼자 있어도 위험해요. 우리는 10명이 훨씬 넘으니 서로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니면 안전할 겁니다.”
아무래도 혼자 남겨지는 게 더 무서웠는지 이채연이 머뭇거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일 테니 사람들과 붙어 다니는 게 더 나았다.
신재언을 포함해 건장한 남자가 절반이 넘는데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봤자 원주민 중에 있는 능력자에게 모두 한 입 거리도 안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신재언은 침묵했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어 오면 대충 둘러댈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굵은 나뭇가지나 잔가지를 자르기 위해 챙겨온 날이 넓은 긴 칸을 들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해가 머리 위에 가장 높이 떠 있을 시간이라 볕이 너무 따가웠다. 잔뜩 긴장한 신체가 무더위와 만나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앞서가던 박 부장이 휘청거렸다.
섬 자체가 크질 않아 걸어서 마을까지 이동하는 데 삼십 분가량 걸렸다. 마을 어귀 산채에는 원주민들 전체가 이용하는 주방이 었었는데, 점심을 차리는 중인 듯 주방이 매우 분주했다.
옹기종기 모여 평화롭게 점심을 준비하는 광경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식인종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주방에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엠디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녀는 주방에서 나오다가 신재언 일행들과 마주치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여러분, 왜 다시 돌아오셨어요?”
박 부장이 눈을 잔뜩 굴리다가 일행 대표로 입을 열었다. 모두 천연덕스럽게 묻는 엠디를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우리 팀원 몇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게다가 보트를 묶었던 밧줄이 날붙이에 잘려져 있었고요. 이 섬사람들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게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네?”
그나마 상대방에게 너희가 우리 일행들을 섬에 가두고 잡아간 것이냐며 드잡이질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단지 힐끔거리는 창백한 시선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엠디도 박 부장의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은 듯 눈을 찌푸렸다가 돌연 배꼽을 잡으며 웃기 시작했다. 한참 허리 숙여 웃던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소리쳤다.
“무슨 굉장한 상상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터무니없는 오해네요! 밧줄이 잘렸다고 하셨죠? 저도 확인해 봐야겠으니 같이 가 봅시다.”
엠디가 정말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 깔깔 웃어대기에 박 부장과 최 사원의 표정이 굉장히 머쓱하게 변했다.
그들이 타고 나간 지프를 찾던 엠디는 그것을 해변에 두고 왔다는 소리를 듣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섬에 네 대뿐인 차량 중에서 트럭을 골라 올라타며 말했다.
“대체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하셨기에 차를 두고 걸어올 생각을 하신 거예요? 제가 웃긴 했지만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인 건 아시죠?”
“저희가 오해한 거라면 그때 사과드리겠습니다.”
박 부장이 쩔쩔매며 엠디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박 부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트럭 뒤쪽의 짐칸에 타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날이 워낙 더워서 그런지 차로 달리는 중인데도 땀이 줄줄 흘렀다. 편안하고 에어컨이 있는 자신의 소중한 집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얼른 해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신재언은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 냈다.
차로는 몇 분도 안 되어서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에서 보트를 묶어 두었던 장소를 단번에 찾아가 밧줄을 손에 들고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박 부장이 등 뒤에 숨는 바람에 신재언이 선두로 엠디의 앞에 서자 그녀가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얼마나 무서웠던 거에요? 이건 잘린 게 아니라 뜯겨 나간 거예요. 루벤 섬은 낮엔 잔잔하지만, 밤에는 파도가 매서워 튼튼한 밧줄이 아니면 뜯겨 나갈 수 있어요. 처음 오셨을 때 제가 안내했을 텐데요.”
그녀가 들고 있는 밧줄은 확실히 잘린 게 아니라 뜯겨 나간 듯 엉망이었다.
분명 아까 확인했을 땐 깨끗하게 잘려져 있었는데?
하지만 눈앞에 들이 밀어진 증거에 사람들은 공포심에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모두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올리는 동안 재언만이 굳은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다들 엠디의 말에 납득했지만, 그는 달랐다.
밧줄은 확실하게 날카로운 날붙이로 잘려져 있는 단면을 재언이 확인했었다.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건 엠디였다. 다들 공황에 빠진 걸 이용해서 피해가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누군가가 밧줄을 바꿔치기했고 엠디는 지금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신재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엠디를 살폈다. 다들 이것에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엠디. 이렇게 확인하게 해 주어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있어요. 실종자들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이 섬은 그렇게 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걸어도 해변이 나와요. 해변에서 이어진 길만 찾으면 마을로 돌아올 수 있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요. 여기에 위험한 야생동물도 없고…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히어로 협회와 남아공 정부에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 24시간 그들을 감시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여신이 아닌 이상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말씀드릴 수 없네요. 그리고 이 섬에 있는 유일한 보트는 어제 시마가 타고 나갔어요. 아무리 빨리 돌아온대도 이틀 정도 걸릴 테니 그때까진 이 섬에서 아무도 나갈 수 없고 연락도 취할 수 없어요. 일단 촬영을 잘 끝내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시죠.”
“여신만 안다고요?”
“네, 풍요와 다산의 신인 루벤 여신께서 이 섬을 지키시거든요.”
교묘하게 빠져나가는군…….
신재언은 엠디가 소중히 여기는 여신상 목걸이를 자세히 살폈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씩 목에 걸고 다니는 것과 똑같았다. 배와 다리 쪽이 항아리 모양인 걸 보면 다산을 중요시하는 건 잘 알겠다.
어쨌든 남은 이틀의 촬영 기간 동안 섬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일행은 마을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로스 촌장네에 돌아온 일행은 회의를 했다. 전부 한자리에 모인 건 아니고 신재언과 박 부장, 촬영팀 팀장과 부팀장만 남고 전부 각자 방으로 쉬러 들어갔다.
공용공간에 남은 네 명은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박 부장보다 세 살 어린 촬영팀 팀장 임보영은 막대한 계약금을 생각해서라도 촬영은 매듭짓고 싶어 했다.
“일교차가 크지 않은 걸 고려해도 이 더위에 계속 밖에 있는 건 위험해요. 촬영팀을 최소한으로 두고 사람들이 돌아가며 실종자들을 찾아야 해요.”
“…저도 그 말에 동감하지만 어디 한군데의 인원을 축소하는 건 위험해요. 촬영팀과 실종자를 찾는 팀 둘 다 반씩 나누도록 합시다. 섬이 께름칙한 건 사실이잖아요.”
신재언이 중간에 끼어들어 그녀의 말에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잠시 저녁 식사가 차려지는 동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다들 무언가 찝찝한 부분이 있는지 눈앞에 차려진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렸다.
재언은 이번 식사에도 혹시 수작질을 부린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아무런 제재가 없는 자식들 덕분에 안심하고 입을 댔다.
야무지게 밥을 챙겨 먹은 재언과는 다르게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배가 고플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재언은 출국 전에 챙겨 놓았던 과자를 몇 개 꺼내 식탁에 펼쳤다.
익숙한 음식이 보이자 그제야 다들 하나씩 입에 대기 시작했다.
“무서워 죽겠어요… 대체 이런 곳에서 굳이 사진을 찍어야 했을까요. 게다가 히어로 빅팜은 어디 간 거고요.”
임보영이 머리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히어로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리 무섭지 않았겠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도대체 이 섬은 꼭꼭 숨겨진 장소가 얼마나 많은지 조각난 장난감도 실종자들을 찾는데 고역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이 날고 기어도 찾을 수 없는 거다.
“이 차, 맛있네요.”
신재언이 뜨거운 차를 홀짝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말에 엠디가 뒤에서 들어와 신재언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루이보스 티에요. 나중에 좀 챙겨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신재언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긴장을 풀고 싶었는지 하나둘씩 재언을 따라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언이 식탁 위에 풀썩 엎드렸다. 그 뒤를 이어 촬영팀 팀장, 부팀장, 그리고 박 부장까지 식탁에 머리를 박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엠디가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나중이 있으면요.”
그녀의 뒤로 네 명의 건장한 원주민 청년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