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원주민들이 정신을 잃고 식탁 위에 쓰러진 네 명을 끌고 간 곳은 어두운 지하동굴이었다.
얼마나 잘 감춰 놓았는지 동굴 속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교묘하게 숨어 있었다. 이 정도로 꼭꼭 숨겨 놓는다면 조각난 장난감이 찾는 데 난항을 겪은 것도 이해가 갔다.
기절한 사람들을 하나씩 어깨에 둘러멘 남자들은 모두 그들이 모시는 여신의 얼굴을 조각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엠디는 웃으며 기세등등하게 선두에 서서 동굴 벽에 걸려 있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나무 지팡이 끝에도 정교하게 조각된 여신상이 있었다.
그녀는 마을의 유일한 신관이자 여신의 대리인이었다. 마을 원주민들은 여신이 그녀의 몸에 빙의해 마을을 풍족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다.
섬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자유롭게 섬을 드나들 수 있는 엠디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희생자들을 물색하고 데려왔다.
이번에도 베르테오 사진작가에게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뒤 섬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섬사람들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살살 구슬렸다.
사진작가로서 자부심을 가진 베르테오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한 공략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베르테오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미지의 섬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제물들을 잔뜩 이끌고 섬으로 들어왔다. 가이드로 분장하여 그들의 뒤를 쫓아다니던 엠디는 사냥감을 하나둘씩 물색하여 지하 동굴로 납치해 왔다.
그렇다. 제물이었다.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루벤은 일 년에 한 번씩 인간의 살점과 피를 먹어 힘을 비축하고 그 힘으로 마을을 풍족하게 해 주었다. 곧 있으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이런 평화로워 보이는 섬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A급 이상의 히어로를 한 명만 데려와서 다행이었다.
지하 동굴 구석에 짐승을 가둘 때나 쓰이는 철창 안에서 두 명씩 갇힌 사람들이 쓰러진 채 신음을 흘렸다.
“살려 주세요…….”
“제발 꺼내 주세요. 살려 주세요.”
다행히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음식도, 물도 받지 못해 기력이 잔뜩 쇠한 상태였다. 바깥만큼 숨 막히게 덥지는 않아도 동굴 안의 공기는 습하고 불쾌했다.
“제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들 힘내요. 한 명이라도 많은 피와 살점을 여신님께 공양해야 섬이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엠디는 기분 좋은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철창에 갇힌 사람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말의 내용이 너희를 죽여 제삿밥으로 삼겠다는 것인데 그 말을 듣고 힘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감상하며 엠디는 제물 중에 가장 늠름하고 잘생겼던 이를 떠올렸다. 엠디에게 신재언은 제사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아주 멋진 제물이었다.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여신을 위해 그를 제물로 바치면 섬에 더 많은 풍요가 찾아올 것이다. 엠디가 히죽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키자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21세기에 사람을 제물로 삼는 건 너무 고리타분한 방식이 아닐까요. 엠디.”
엠디와 사제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분명히 수면제를 먹고 곯아떨어졌어야 할 신재언이 한쪽 손으로 손목을 감싼 채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라도 약 기운이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손목과 발목까지 밧줄로 꽁꽁 묶어 놨는데, 어느새 그것까지 전부 풀린 상태였다.
잠시 깜짝 놀랐지만, 엠디는 금방 침착해졌다. 아무리 봐도 신재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혼자였다. 게다가 조사한 바로 재언은 능력자도 아니었다.
엠디는 제물로 데려올 사람들을 꼼꼼히 조사해서 섬으로 이끌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포함해 촬영팀, 모델까지 능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사실 신재언은 능력자이긴 하지만 F급도 받지 못한 운이 좋은 게 끝인, 별 볼 일 없는 능력이었다.
“운이 좋긴 좋군요, 재언 씨. 설마 수면제에도 통하지 않는 운이라니… 하지만 어쩌죠? 우리 사제들은 제법 강하답니다.”
A급 히어로 빅팜을 잡은 것도 그녀의 뒤에 있는 녀석들이었나 보다. A급을 잡을 정도면 실력이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도 신재언은 무서워하거나 도망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른 엠디는 튀어 나가려는 사제들을 멈추게 한 뒤 신재언을 구석구석 살폈다.
“멈춰 봐. 재언 씨, 왜 그렇게 여유롭죠?”
많은 제물을 잡아 왔던 엠디는 이런 돌발상황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동굴 밖으로 빠져나가 탈출에 성공할 뻔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데려온 제물들은 모두 공포를 느꼈고 도망치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신재언같이 멀뚱히 서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굳은 걸까 싶었지만,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관찰하는 엠디의 시선을 느꼈는지 신재언이 쓰게 웃었다.
“엠디. 대놓고 수상한 행동을 하기에 설마 했어요. 그래도 아닐 거라고 믿었거든요.”
머리를 긁적이면서 하는 말이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웠다. 그를 살피던 엠디는 먼저 공격할 생각이 없는 신재언을 먼저 구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사내 두 명이 동시에 땅을 짚었다. 그러자 동굴 바닥이 허공으로 솟구쳐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인 것처럼 신재언을 향해 날아왔다.
길게 늘어진 상태로 신재언의 주변을 휘감는 게 철창을 만들려는 듯했다. 이런 지하동굴에 저런 정교한 철창을 어떻게 만들어 옮겼나 했더니 쌍둥이로 보이는 사내들의 능력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신재언을 가둔 철창 앞에 거대한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사람 하나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게 커진 검은 구멍 안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튀어나왔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후광으로 반짝이는 새하얀 신부복을 입은 남자였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외모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날카로운 돌로 가득한 동굴에서 맨발로 나타났다.
“삿되고 어리석은 악마를 신으로 모시다니, 이곳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군요.”
“뭐야? 저 신부는 어디서 나타났지?”
백금색의 지팡이를 든 남자는 어딜 봐도 완벽한 사제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피눈물에서는 엄청난 사기가 흘러나왔다. 타락한 추기경이 불쌍한 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영광이신 우리 아버지께 해를 끼치려 하다니, 그 죄는 아무리 고해성사를 해도 자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엠디가 타락한 추기경을 향해 손짓하자 쌍둥이 남자들이 다시 땅에 손을 짚어 그를 가두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백금색의 검은 든 사내가 뻗어오는 창살을 모두 베어 버렸다. 두부가 잘리듯 손쉽게 두 동강 난 창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동굴 벽에 부딪혔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는 검은 머리에 푸른 반점이 온몸에 있는 남자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짚은 타락한 추기경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은 마치 성당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그는 과거에 바티칸의 성기사이자 에렌 성을 사랑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타락한 추기경이 부리는 시체 중 가장 강한 이였다.
그는 납치당했던 에렌 성을 바티칸에서 바다에 수장하려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결국 그가 하사해 주어던 검으로 스스로 심장을 꿰뚫어 자살했다.
에렌 성이 기적적으로 살아나 그를 찾았을 땐 자신을 목숨보다 사랑해 주었던 기사는 이미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런 성기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락한 추기경이 말했다.
“엉뚱한 신을 모시는 어리석은 신관님. 부디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하시고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전지전능하신 신은 오로지 아버지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비로우시니, 그대가 죽어 지옥에 처박히기 전, 죄를 사하여 주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니… 내가 인간의 죄를 어떻게 사해 줘.’
재언은 타락한 추기경의 말에 황당했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엄숙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엠디는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범상치 않은 상대인 것을 깨닫고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나름대로 여신을 섬기는 신관답게 그녀의 지팡이 끝에 푸르스름한 신성력이 감돌았다.
하지만 모시는 신이 살육과 피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신성력의 빛무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는 아름다운 추기경이 두 손을 활짝 뻗자 후광이 동굴을 환하게 비추며 엠디와 쌍둥이 사제들의 목이 한 번에 잘려 나갔다.
첫째이자 빌런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엔레이드맨이 고전했다던 상대답게 타락한 추기경의 기사는 한 번에 세 명의 능력자들을 순식간에 죽인 것이다.
타락한 추기경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엠디와 쌍둥이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부디 평안함이 함께하시길…….”
철창을 부수고 신재언을 꺼내 준 타락한 추기경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 저 이도교들을 제가 처리했습니다.”
“잘했어, 잘했어… 그러면 저 사람들을 좀 풀어 줄래? 내 팀원들이라 잘못되면 안 되거든.”
신재언은 에렌 성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인 뒤 팀원들이 갇혀 있는 곳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피눈물을 줄줄 흘렸다. 솔직히 말하면 재언은 그의 이런 모습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타락한 추기경의 도움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 철창에 갇힌 동료들을 무사히 구출해 냈다. 정신을 잃은 사람 중 몇몇이 타박상을 조금 입긴 했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을 듯했다.
상태가 제일 나쁜 이는 가장 먼저 잡혀갔던 촬영팀 막내였다. 탈수증세가 심해서 잔뜩 열이 올랐지만, 탈출해서 안정을 찾으면 괜찮아질 듯했다.
사람들은 전부 구했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마을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엠디가 제사로 사람들을 꾀어 죽이는 걸 알아도 방관했다. 아니, 사실 동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들을 가만두자니 또 다른 엠디가 나올지도 모른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곤혹스러워하는 재언을 지켜보던 타락한 추기경이 가슴에 손을 모아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 혹시 이후의 일에 대한 것이라면 당신의 충성스러운 아들인 제게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가?”
“네. 이들은 무고하고 불쌍하고 타락한 삿된 것들. 그들을 회개시키고 개화하겠습니다.”
‘이것도 좀 어긋난 신앙이 아닐까……. 뭐, 타락한 추기경은 적어도 민간인을 죽여서 제물로 삼진 않으니까!’
타락한 추기경은 세계적으로 종교분쟁을 일으키고 다니는 주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 큰일이 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 최악이고 차악일까 고민하던 신재언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 일은 네게 맡기겠어.”
“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타락한 추기경에게 뒷일을 맡긴 신재언은 동굴 입구에 사람들을 옮겨 놓고 마을에 있는 일행들을 불러왔다.
납치되었던 대부분의 사람은 지하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얼른 이 섬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히어로 협회에 S급 히어로를 요청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쳤다.
마을의 원주민들은 엠디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제물로 끌려갔던 이들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섬뜩하게 노려보며 모여들었다.
재빠르게 해변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때마침 정박해 있는 보트를 타고 섬을 빠져나갔다. 왜 그곳에 보트가 준비되어 있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겁에 질려 소리칠 뿐이었다.
“당장 저 미친 곳에 히어로들을 풀어야 해요! 사람을 납치해서 이상한 곳에 가두기나 하고! 원주민들 표정 봤어요?”
“그런데 이상하지… 왜 우리를 그냥 놔주었던 걸까?”
“낸들 알아요? 얼른 벗어나요.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서 머리가 욱신거린다고요!”
특히 지하 동굴에 잡혀 들어갔던 모델 한 명은 선실에 들어가 이불로 몸을 꽁꽁 감싼 채 덜덜 떨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좋은 꼴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보트는 어떻게 다시 해변에 떠밀려 온 걸까요? 전 이것도 누군가의 계략이 아닌가 두려워요.”
그녀의 추리는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딱히 계략까지는 아니지만,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신재언이 타락한 추기경에게 부탁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흉계는 전혀 없었다.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남아공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재언은 믿는 구석인 레드-헬-파이어에게 직접 전화로 곤경을 알렸다.
재언의 요청에 레헬이 한달음에 루벤 섬으로 날아왔을 땐 이미 그곳엔 누군가가 거주했다는 흔적만 있을 뿐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타락한 추기경이 잘 해결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