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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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최대 고민은 점심 메뉴 고르기다. 신재언을 포함한 팀원 몇몇은 일주일에 한 번씩 다 같이 모여 구내식당이 아닌 밖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돌아가면서 점심 메뉴를 고르는데, 이번 주는 재언의 차례였다. 그동안 편하게 사람들이 고른 음식집에 가서 먹기만 하면 됐는데, 막상 메뉴를 고르자니 너무나도 고민이 많았다.
‘분식? 한식? 저번에 윤정 씨가 데려가 줬던 백반집도 좋았는데… 부대찌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저번에는 김치찌개를 먹었고… 양식은 너무 비싸니까 패스.’
아침에 출근하면서부터 했던 고민이 일하는 내내 이어지더니 결국 점심시간이 되었다. 대충 업무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재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재언 씨, 메뉴 골랐어요?”
“하하… 네, 회사 뒤쪽에 산채 비빔밥집이 새로 생겼던데 거기 어떠세요?”
“뭐든 좋아요.”
‘휴… 겨우 골랐다.’
큰 프로젝트의 담당을 맡았을 때보다 더 커다란 업적을 이룬 사람처럼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쳤다.
직장인의 최대 고민인 점심 메뉴 고르기를 끝낸 재언은 신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왔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가게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아 보여 걱정했는데 다행히 웨이팅 없이 바로 들어가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야무지게 카페에 들러 커피를 손에 든 재언은 후배 두 명이 흡연실로 간다며 떨어져 나가고 최윤정과 나란히 회사 건물로 들어가려던 중에 걸음을 멈췄다. 신호등 앞에 있는 꽃다발과 포스트잇 때문이었다.
딱 봐도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듯 아직 정리되지 못한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살피던 신재언이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내둘렀다.
[박윤호(5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제 막 피어날 아기야.
왜 네가 이곳에 싸늘하게 변해야 했는지.
부디 천국에서는 고통 없이 즐겁기를.]
“여기서… 사고가 났나 봐요.”
“주말에 뺑소니가 났었다고 하더라고요. 뉴스에 나왔는데 못 보셨어요? 마약에 취한 채로 운전했는데 속도가 글쎄 150km가 넘었대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50km라니 말이 돼요? 결국, 앞차를 들이박고 신호를 기다리던 모자를 덮쳐서… 그렇게 됐죠, 뭐. 엄마 쪽은 다행히 살았는데, 아이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요.”
“헉… 그런 몹쓸 놈을 봤나. 세상 말세에요.”
신재언이 고개를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범인이 죗값을 전부 받기를 빌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을 끝낸 그는 아홉 시가 되어서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 더 늦게 끝나지 않은 게 어디냐고 자신을 위로하며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 도시락과 컵라면을 구매했다.
집에 쓰레기를 쌓고 싶지는 않았기에 편의점 테이블 의자에 앉아 구매한 음식들을 먹던 그는 무심코 건너편 신호등에 시선을 주었다.
낮에 들었던 안타까운 아이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언은 아이의 명복을 빌고 나서 라면을 호로록 먹기 시작했다.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신호등 전봇대 옆에 네 살에서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가 멍하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막 입에 넣으려던 면발을 후드득 떨어트린 신재언이 눈을 깜박였다.
‘저기에 언제부터 아이가 서 있었지?’
그런데 꼬마의 낯빛이 지나칠 정도로 창백했고 눈두덩이가 푸르스름했다. 주변을 지나다는 이들은 혼자 서 있는 아이가 보이질 않는지 그냥 지나쳤다.
결정적으로 어떤 사람이 저 꼬마를 그냥 통과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재언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귀, 귀, 귀신이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문득 ‘파도치는 절벽 위의 별장’에서 몸을 운신하고 있는 가출 청소년 버드맨에게 막내 자리를 물려준 귀신들의 성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귀신과 자유자재로 대화할 수 있고 수하로 부리는 것도 가능했다. 가끔 그녀의 능력을 볼 때마다 재언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받았다.
그런데 귀신이 된 아이를 보고 있자니 입맛을 잃어버린 재언은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라면을 버리고 뒷정리를 끝냈다.
티슈로 테이블을 깨끗하게 닦고 뒤를 돈 그는 여전히 보이는 꼬마 귀신의 모습에 미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꼬마는 뭘 찾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
꼬마 귀신의 울음소리는 주변을 지나가는 일반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귀신들의 성녀 때문에 신재언에게도 귀안이 살짝 열렸다는 건 알겠는데 다른 귀신은 보지 못하고 저 꼬마만 볼 수 있는 건 왜일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신호등 옆에 서서 목청껏 울고 있는 아이를 그냥 두고 가기가 힘들었다. 거기다가 귀신이 저렇게 울고 있으면 퇴마사나 저승사자가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게 되면 아무리 선한 귀신이라도 이승에 머물렀다는 죄로 악영향을 받았다. 물론, 이건 귀신들의 성녀가 살짝 귀띔해 준 사실이었다.
한숨을 푹 쉰 재언이 신호등 가까이에 다가가 쪼그려 앉아 꼬마 귀신과 눈을 마주했다.
“얘야. 너 왜 여기서 울고 있니?”
“허어엉- 엄마! 엄마!”
“엄마 찾고 있어?”
“엄마가 없어요. 으아앙!”
아무도 없는 골목이면 모를까. 강남 한복판의 신호등은 해가 져도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거기에 쪼그려 앉아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덩치 큰 남자라니.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신재언은 귓가가 잔뜩 빨개진 채로 꼬마 귀신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엄마 찾아 줄게.”
꼬마 귀신의 손은 살아 있는 선명한 촉감이 아니라 차갑고 미끈거리는 느낌만 있을 뿐이라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꼬마를 이끌며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자 귓가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보니 꼬마의 발목에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꼬마는 지박령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쇠사슬은 산 사람이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꼬마 귀신을 이승에 잡고 있는 지박(止泊)이 풀릴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꼬마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신재언이 결국 누군가를 불러냈다.
“귀신들의 성녀, 이 쇠사슬 좀 풀어 줘 봐.”
‘오호호.’
’호호호…….’
신재언의 귓가에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귀신들의 성녀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덥수룩하게 내린 그녀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귀신 꼴이지만 엄연히 산 사람인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귀신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비명을 터트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에 핏줄이 잔뜩 돋아나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빨간 입술에 반해 드러난 피부는 시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창백했다. 그녀의 발아래로는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새하얀 손들이 튀어나와 허우적거렸다.
그녀는 신재언이 명령한 대로 꼬마를 묶어 둔 쇠사슬을 손쉽게 끊어 주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러자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주변의 사람들이 방금 있던 일을 모두 잊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 각자 제 갈 길을 찾아갔다.
신재언만이 그곳에서 한숨을 푹 쉬다가 어린 꼬마 귀신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꼬마 귀신을 침대 위에 앉힌 신재언은 그에게 작은 사탕을 건네주었다. 귀신들의 성녀 덕분에 식사까진 아니더라도 작은 사탕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거다.
물론 미각이 없어서 맛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꼬마는 사탕을 입에 넣더니 돌멩이를 먹은 사람처럼 잔뜩 울상을 지으며 뱉어 냈다.
“맛없어요!”
맛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박윤호에요.”
간단하게 이름을 밝힌 꼬마가 한쪽 손을 쫙 펼쳐 보였다. 자신의 나이가 다섯 살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딱 그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로 보이긴 했다.
‘이렇게 건강해 보이는데 왜 벌서…….’
안쓰럽게 생각하던 신재언은 낮에 최윤정에게 들었던 일을 떠올렸다. 포스트잇에 쓰여 있는, 신호등에서 차에 치여 죽은 꼬마의 이름도 박윤호였다.
‘그렇게 된 거구나. 너무 안타까운걸…….’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아니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꼬마 귀신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도 꼬마는 신호등에 혼자 서서 모르는 사람을 잔뜩 보는 것보단 신재언의 집에 앉아 있는 게 더 마음이 놓이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울지도 않고 표정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아저씨. 우리 엄마 어딨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
“아저씨 아니야… 그리고 네 엄마는… 음…….”
차마 너와 네 엄마는 사고 때문에 죽거나 다쳤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커다란 충격을 받아 악귀가 되면 곤란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신재언이 원래 귀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꼬마의 모습이 흐려졌다 다시 보이기를 반복한단 거였다. 꼬마가 장난치듯 다리를 흔들 때마다 다리 두 개가 동동거리며 움직였다.
공포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에 혼미해질 것 같은 정신을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눈을 뜨니까 엄마가 없어요. 위험하니까 이리 오라고 했는데 안 가서 화났나 봐요.”
“…….”
시무룩한 꼬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재언은 꼬마의 등을 다독인 뒤 노트북을 켰다.
최윤정이 했던 말대로 꼬마 귀신이 저번 주말에 사고당해 죽은 혼령이라면 뉴스 기사에서 엄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뉴스 기사 한 귀퉁이에서 그녀에 대한 실마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중태에 빠져 아직 의식이 없다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