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그 꼬마 도령을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생령은 좋은 악귀가 되기 쉽답니다. 아버지를 위해 그녀가 성불 되기 전에 제가 잡아서 부려야겠어요.”
“악귀가 되었을 때… 말이지.”
‘이 광경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대략 반년 전에 귀신들의 성녀는 S급 히어로 광안의 성녀와 크게 싸웠던 적이 있었다. 광안의 성녀는 한국에서 유일한 S급 힐러로 목이 잘려도 바로 붙여 놓기만 하면 살릴 수 있는 무서운 히어로였다.
강원도 산골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성녀의 싸움은 지금 떠올려도 오금이 저렸다. 아마 지금도 그쪽 지역에는 심심치 않게 귀신이 출몰할 것이다.
귀신들의 성녀가 불러온 거대한 귀곡성과 광안의 성녀의 십자가 무리가 부딪쳤을 땐 세계가 정말 멸망하는구나 싶었다. 중간에 레드-헬-파이어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재언은 레헬과 썸을 타던 사이는 아니었기에 속으로 만 번 정도 감사를 표하며 엔레이드맨과 귀신들의 성녀를 데리고 모습을 감췄다.
그때도 귀신들의 성녀가 부적을 사용해 귀안을 열어 주었었다. 하필 어두운 산속에서 여는 바람에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귀신의 모습에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다 나네.’
사실 그때 재언의 사촌이 산속에서 실종되는 바람에 조각난 장난감으로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귀신들의 성녀가 산속에 있는 귀신들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모든 일의 원흉인 사촌은 하고많은 것 중에 창귀에게 걸려 목숨을 빼앗기기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를 찾는다고 힘을 쓰느라 히어로들에게 나 여기 있소-, 하고 광고하고 다녔던 것이었다.
귀안이 트였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귀신이 보이는 것을 철저하게 감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귀신 보는 중이라고 멀리서 봐도 티가 나는 신재언은 그게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옆에 귀신들의 성녀가 있어서 심적으로는 든든했다. 그녀는 악귀들이 재언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을 귀신으로 어지럽게 만든 뒤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을 드높여 찬양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마침 목이 긴 남자 귀신이 재언을 향해 날아오자 그녀가 가지방울을 휘둘러 쫓아냈다. 뺨을 맞은 귀신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저 멀리 날아갔다.
귀신들의 성녀 발아래에 있는 새하얀 손들이 허공을 휘젓다가 가끔 재언의 발목을 스쳐 갔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워 뒈지겠네!’
귀안이 트였다고 들리지 않아야 할 환청까지 귓가에 울렸다.
‘오호호- 호호… 호호!’
찢어지도록 날카로운 웃음소리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생령 근처엔 악귀들이 많습니다. 좋은 먹잇감이니까요. 악귀들에게 잡아먹히면 그 영혼도 마찬가지로 악령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에요.”
가지방울을 딸랑거리며 둘은 병원 근처의 공터로 향했다. 그쯤 되자 신재언은 눈을 그냥 감고 다니고 싶었다.
‘공터 나무 뒤의 피 흘리는 여자가 날 노려보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와들와들 떨던 신재언은 가로등 위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걸 발견했다. 산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가로등 위에 올라앉진 않을 테니 저건 귀신이었다.
그런데 병원복을 입은 귀신의 얼굴이 굉장히 낯익었다.
“아, 찾았다.”
“육신의 속박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갈 거에요. 아마 병원 주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직 육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귀신들의 성녀가 붉은 입술을 길게 찢으며 가지방울을 흔들었다.
방울이 흔들릴 때마다 주변에 있는 귀신들이 요동치며 유쾌한 듯 웃었다. 어떤 귀신은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흔들었고 어떤 귀신은 손톱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전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악귀들이 생령을 노린다더니 가로등 아래 흉측하게 생긴 귀신들이 생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성녀가 가지방울을 흔들어 악귀를 내쫓기도 전에 뒤쪽에서 섬광 같은 빛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신재언의 눈앞에 검은색 도포 자락이 펄럭거렸다. 이 또한 21세기에는 참으로 보기 드문 옷차림이었다.
검은 삿갓에 검은 도포, 꽃 조리개를 허리춤에 매고 도검을 든 사내가 가로등 아래에 있던 악귀를 일격에 베어 성불시켜 버렸다.
‘저건 당연히 그거겠지. 저승사자!’
“여기는 이승과 저승의 사이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길을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죠. 안심하십시오. 저는 저승사자 차사 광혼사입니다.”
저승사자는 날카롭고 매섭게 생겼지만 나름대로 준수하니 키도 큰 청년이었다.
어? 이제 보니 그가 귀신들의 성녀를 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오묘한 기운에 둘 사이에 낀 불청객이 된 듯한 착각이 든 재언은 눈을 크게 떴다.
‘저 저승사자, 눈깔이 심상치 않은데? 설마 우리 애한테 반했나?’
하지만 귀신들의 성녀는 저승사자가 자상하게 내민 손을 냉정하게 거절하며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하, 차였대요.’
속으로 저승사자를 한참 비웃던 신재언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젠 살아생전에 저승사자까지 보게 되는구나 싶어 인생에 대한 회의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게다가 드디어 찾은 생령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저승사자를 보고 도망친 게 틀림없었다. 일이 더 복잡해지는 느낌에 기운이 빠졌다.
귀신들의 성녀는 저승사자를 매우 증오하고 싫어했다. 죽은 동생의 영혼을 저승사자가 빠르게 데려가는 바람에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기 때문이다.
적대적인 귀신들의 성녀의 반응에도 광혼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승사자는 마치 호위라도 하려는 듯 둘의 뒤를 따랐다.
그런 저승사자에게 신재언이 대충 사정을 설명하며 이번 일을 못 본 척 넘어가 줄 수 없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승사자의 반응이 조금 뜻밖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있는 도검을 손에 든 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승의 일에 참견해선 안 된다고 하나 딱한 사정을 가진 영혼을 못 본 척 넘어갈 수는 없지요. 저도 손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귀신들의 성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네 도움은 필요 없어. 꺼져!”
“낭자. 악귀를 조종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아직도 저승은 옛것을 따르는 듯 저승사자의 말투가 굉장히 고전적이었다. 구닥다리 말투에 귀신들의 성녀가 몸서리를 치며 걸음을 옮겼다.
늘 섬뜩한 웃음소리를 내고 다니며 귀신을 부리고 다니던 그녀에게 저승사자라는 존재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저승사자가 들고 다니는 도검에 베이면 어떤 악귀든 성불 되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분위기가 묘하긴 해. 저 저승사자 설마 귀신들의 성녀를 알고 있나?’
마치 딸을 꾀는 불한당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신재언이 저승사자를 노려봤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에 충격받아 손바닥으로 연신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무슨 딸을 꾀는 불한당이야. 계속 헛것을 보니까 머리가 돌아 버렸나 봐.’
악귀를 조종하는 일이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위험한 일이 맞았지만 적어도 ‘귀신들의 성녀’라는 빌런명을 가진 그녀에게 통용되는 말은 아니었다.
당연히 귀신들의 성녀는 코웃음을 치며 저승사자의 말을 무시했다. 자존심 상할 만도 한데 저승사자는 검은 갓을 벗고 작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귀신들의 성녀는 정말로 저승사자가 자신들의 뒤를 쫓아오자 깜짝 놀라 재언의 뒤로 숨었다. 역시 이승의 존재에게 무서울 게 없는 귀신들의 성녀도 저승사자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도와주겠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는지 광혼사는 허리춤에 단 꽃 조리개를 만지작거렸다. 귀신들의 성녀가 워낙 불편해하는 통에 신재언이 슬쩍 끼어들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승사자가 이승의 일에 참견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마음은 고마우나 바쁘신 분을 잡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네 도움은 필요 없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표하는데도 광혼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일 땐 냉담해 보였는데 웃으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꽃 조리개를 양손에 소중하게 올려놓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꽃 조리개는 십 년에 한 번 저승의 눈을 일시적으로 가릴 수 있으니 제가 어떤 일을 하건 저승에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런 귀중한 걸 굳이 지금 쓰는 이유가 뭐야? 저 양반에게 전혀 도움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도와주겠다고 열정을 보이는데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아 재언은 입을 꾹 닫았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귀신들의 성녀가 이를 벅벅 갈았다.
“저승의 십 년은 이승의 일 년이니, 사실 말장난이나 다름없어요, 아버지.”
일 년에 한 번이든 십 년에 한 번이든 귀중한 꽃 조리개를 사용해 가면서 도우려는 저승사자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어쨌든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쫓아오려는 저승사자를 떼 내기도 쉽지 않기에 그저 이 일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만 몇 번이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악귀나 지박령을 저승으로 인도해야 하는 청렴결백의 저승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부터 이승에서 보는 모든 일은 내 눈을 통해 본 것이 아니니, 어떤 일에도 끼어들지 않고 오로지 당신들을 위해 손을 빌려 주겠다고 다짐하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쉬이 일들 보시오.”
그렇게 말한 저승사자는 재언의 집에 있는 어린 꼬마 귀신을 보고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참을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얼굴로 귀신들의 성녀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가지방울을 든 채 저승사자를 경계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