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둘을 지켜보던 신재언은 제발 둘 다 집에서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이 붙는다면 누가 이길지 짐작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와 겨우 취직한 회사가 있는 동네가 귀신 소굴이 될지도 모른단 것이었다. 이윽고 저승사자가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때가 타지 않은 어린 영혼이로군요. 이런 영혼은 억울하게 죽거나 제명에 살지 못하고 명을 달리하면 저승에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다시 환생하거나 저승사자가 될 기회를 얻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더럽혀져 악귀가 된다면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고 지옥에 처박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악귀들이 가장 많이 노리는 것은 이런 작고 순수한 영혼이지요.”
‘이 저승사자도 어릴 때 죽은 건가?’
그의 말에 신재언이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꾸벅꾸벅 졸고 있던 꼬마 귀신이 느닷없는 불청객에 깜짝 놀라 눈물을 글썽거렸다.
검은 삿갓에 검은색 도포를 입은 창백한 얼굴의 남자이니 꼬마 귀신이 무서워할 만도 했다. 겨우 귀신들의 성녀를 보고도 겁내지 않게 되었는데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엄마! 엄마! 흐아아아앙! 엄마!”
자지러지게 우는 꼬마 귀신의 목청이 어찌나 좋던지 집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만약 꼬마가 귀신이 아니었다면 이웃집에서 당장이라도 쫓아왔을지도 모른다.
쩌렁쩌렁 우는 소리에 신재언은 귀를 막아 봤지만, 손을 비집고 들어오는 울음소리에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광혼사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 때문에 우는 걸 아는지 꽃 조리개를 두 손에 두둥실 띄우며 꼬마의 관심을 끌어냈다.
이런 걸 보면 성품이 나쁜 자는 아닌데 왜 빌런을 도와주려 하는지 모르겠다. 꼬마의 울음이 점점 잦아드는 걸 확인한 재언이 주머니에서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평소 같으면 데굴데굴 구르며 신재언이 무엇을 시킬지 대기하던 그녀가 웬일인지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조각난 장난감과 사이가 좋은 귀신들의 성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장난감 언니는 귀신을 무서워한답니다, 아버지. 제가 귀신을 부를 때마다 눈을 꼭 감아요.”
“아, 그런가… 미안해, 조각난 장난감. 너는 이번에는 쉬도록 해.”
머쓱해진 그는 조각난 장난감의 눈알을 다시 반지 케이스 안에 넣어 주었다.
“체어맨은 뭐 하고 있지?”
“우리 막내를 달래고 있습니다. 오라버니는 가족들에게 아주 상냥하시니까요.”
오호호… 하고 웃는 그녀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1년 동안 계속 막내였다가 버드맨이 들어오면서 벗어난 게 못내 뿌듯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저승사자가 굉장히 온화하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담? 조각난 장난감의 귀안을 개방해 그녀의 능력으로 생령을 찾아내려 했는데…….’
그녀가 귀신을 무서워한다니 계획이 휴지 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두 번째로 부탁하려 했던 체어맨은 비뚤어져 방에서 나오지 않는 반항 청소년을 달래는 중이었고.
물론, 체어맨이 어떤 식으로 달래는지는 직접 ‘파도가 치는 절벽 위 별장’에 가서 봐야겠지만 분명히 정상적인 방법은 아닐 터였다.
‘거기도 한번 신경 써서 봐야 하는데…….’
신재언은 아장아장 걸어와 폭 안기는 꼬마 귀신을 품에 안고 등을 얼렀다. 고민에 빠진 그의 앞에 갑자기 저승사자가 도검을 들고 다가오더니 휘둘렀다.
재언은 깜짝 놀라 꼬마 귀신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려는 것도 잠시 베란다 창문이 쨍그랑! 하고 맑고 청아한 소리와 함께 깨져 버렸다.
‘뭐야! 내 베란다!’
집이 부서지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속으로 비명을 지른 재언의 시야에 침입자의 실체가 들어왔다. 그것은 놀랍게도 기다란 혀였다.
‘혀… 혀가 길어서… 창문을 깨…….’
무시무시한 광경에 굳어 버린 신재언의 앞에 광혼사가 도검을 내밀었다. 그러자 도검에 혀가 칭칭 감겼다. 광혼사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한걸음 힘 있게 내딛으며 호통을 쳤다.
“이놈!”
‘언제쯤이면 저 옛날 말투가 고쳐질 수 있을까.’
저승사자의 검은 도복이 휘날리며 베란다 창문이 활짝 열렸다. 신재언의 품 안에 있던 꼬마 귀신이 울음을 터트리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엄마, 엄마, 엄마아!”
귀신들의 성녀가 가지방울을 흔들어 귀신들을 불렀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모인 귀신들이 저승사자가 눈앞에 있자 괴상한 소리를 내며 벌벌 떨었다.
“이래서 방해된다고 했던 거예요!”
그녀가 온갖 성질을 부리며 가지방울을 재차 흔들었다. 사납게 울리는 방울 소리가 귀신들을 움직이게 했다.
저승사자가 도검을 휘두르며 베란다 창문을 통해 튀어 나갔고 그의 뒤를 귀신들이 바짝 쫓았다. 꼬마 귀신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계속 엄마를 찾으며 발버둥 쳤다.
총체적 난국이로다. 신재언은 깨진 베란다 창문을 한번 보고 눈물을 삼키며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뛰다시피 하며 건물 밖으로 나오니 묘한 곡소리가 들리면서 주변이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진짜 무서워 죽겠네!’
평범했던 집 앞 골목길이 귀신들이 지나는 길로 바뀌는 걸 눈앞에서 목격했다. 게다가 병원복을 입은 괴물같이 생긴 여자가 건물 벽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평범한 귀신의 모습은 아니지만, 재언은 그녀가 꼬마 귀신의 엄마 생령인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조심하십시오. 아이를 노리고 있습니다. 자식을 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결국 해가 되었군요.”
광혼사가 도검을 흔들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의 존재만으로도 생령은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와, 저승사자 겁나 멋있네.’
신재언이 감탄하며 마음속으로 엄지를 드는 순간 꼬마 귀신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깜짝 놀라 꼬마 귀신을 잡으려 손을 뻗어 봤지만, 한순간에 투명해진 아이를 평범한 일반인인 재언이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어?”
그때 순간적으로 기다랗게 뻗은 혀에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가슴에 가해진 충격에 헉하는 사이 귀신들의 성녀가 비명을 토해 냈다.
“아버지이!”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절규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졌지만 드러나는 눈에 실핏줄이 터져 잔뜩 붉어졌다.
그에 더욱 당황한 건 신재언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서 나뒹굴긴 했지만, 많이 다친 것도 아니었다.
좀 아프긴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고 그저 밀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죽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태도에 조금 머쓱해졌다.
‘내가 약하긴 하지만… 약한 건 알지만…….’
신재언이 괜찮다며 손짓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저승사자가 화들짝 놀라 하늘을 쳐다봤다.
귀신들의 성녀가 귀신같은 몰골로 눈물을 흘리며 세차게 가지방울을 흔들고 있었다. 폭주하는 그녀 때문에 하늘 높이 귀신들이 회오리치며 올라가는 게 보였다.
“헉!”
신재언이 잔뜩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귀신들의 성녀! 난 괜찮아, 난 괜찮다니까!”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귀신들이 땅에서부터 이어지듯 하늘까지 빙글빙글 돌며 길을 만들었다. 과거에 S급 히어로 광안의 성녀와 부딪쳤을 때 이승에 소환한 걸 다시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가마가 구름을 열고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가마 주변에 떠다니는 도깨비불, 가마를 운전하는 거대한 귀신의 목, 바퀴가 되어 구르는 얼굴이 비명을 지르며 노성을 터트렸다.
저 안에는 서울 전체를 귀신 소굴로 만들 만큼 강하고 악독한 악령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건…….”
광혼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귀신들의 성녀를 태우기 위한 가마, 바로 귀곡성이었다.
우우우-.
음울한 내며 귀신들의 가마가 내려오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바로 다음 주가 신재언의 월급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가마가 세상에 내려앉는 걸 막아야 했다.
“월급 다음날이면 괜찮지만… 이번 주는 안돼! 아직 카드 할부금이…….”
직장인들은 현금이 부족하면 신용카드를 쓰고 다음 달 카드값으로 월급의 반을 날려 먹는 실수를 매달 반복한다. 그건 신재언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귀신들의 성녀를 막기 위해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던 신재언이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억누르고 애써 발밑을 확인했다. 이제 막 열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히죽 웃으며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신재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신재언이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 직전에 광혼사가 소녀의 팔목을 잘라 냈다. 손목이 잘리고도 히죽히죽 웃으며 저승사자를 피해 도망치는 모습이 무시무시했다.
차라리 악몽을 꾸는 게 현실보다는 덜 무서울 것이 분명했다.
“괜찮으십니까?”
“예에.”
“그녀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겁니까?”
신재언이 어깨를 으쓱한 뒤 냉정하게 말했다.
“어려워요. 귀신들의 성녀는 3년 전에 하나뿐인 가족, 동생을 잃은 뒤 새로 얻은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다치는 걸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지금 그녀는 극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주변 이들의 말은 듣지 않을 겁니다.”
사춘기 소녀처럼 한번 열 받으면 끝까지 쏟아 내고 만다. 그게 스케일이 작으면 모를까, 골치가 아플 정도로 남다른 게 문제였다.
신재언이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자리에 첫째인 엔레이드맨을 부르면 사건은 해결되겠지만 귀신들의 성녀와 엔레이드맨이 서울에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또다시 혼란에 빠질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