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근하는 빌런-25화 (25/324)

25화

광혼사는 주변의 악귀들을 베어 가며 신재언을 보호하려 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악귀들이 잔뜩 흉한 모습으로 겁을 주긴 하지만 귀신들의 성녀가 있는 이상 누구도 신재언에게 해를 가하진 못했다.

그보다도 곤란한 건 히어로들이 지금 소동을 발견하고 몰려올지도 모른단 점이었다. 신재언은 귀신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귀곡성은 보이지 않겠지만 귀신을 보는 히어로가 존재한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이승에 저런 걸 소환했단 사실을 저승사자가 보았다. 아무리 그녀에게 호의적이어도 저승사자가 귀곡성을 보고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재언의 예상과는 다르게 광혼사는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더니 도검을 고쳐잡으며 하늘을 노려봤다.

“뭐 하시게요?”

“가마를 떨어트리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저승문을 열어 악귀들을 회수할 테니 그녀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그게 가능해요?”

“네. 그리고… 약속했다시피 이번 일을 저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어, 저기요, 저승사자님?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신재언은 대답하지 않고 검은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노려보는 광혼사의 옆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굉장히 익숙한데……?’

광혼사는 신재언이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건물 벽을 발판삼아 크게 도약했다.

‘우와 멋있다. 역시 저승사자라는 직업은 간지도 나고 능력도 짱짱이라니까?’

재언이 감탄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광혼사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꽃 조리개가 찰랑 소리를 냈다.

저승사자 차사라고 했으니 엄청 센 게 맞나 보다. 저런 저승사자가 왜 자신들의 편의를 봐주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사한 일이었다.

풀썩-.

바닥에 쓰러진 귀신들의 성녀를 안아 올린 재언이 바닥을 향해 소리쳤다.

“체어맨. 귀신들의 성녀가 위험에 빠졌어. 문을 열어!”

이윽고 바닥에 생긴 커다란 문을 열고 귀신들의 성녀를 안쪽으로 던져 넣었다. 그때, 하늘에서 굉음이 울리며 저승사자와 귀곡성이 저승문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실체가 없는 것들이라 망정이지 하마터면 서울이 쑥대밭이 될 뻔했다. 광혼사가 귀곡성을 무사히 저승문 너머로 보내는 것까지 확인한 재언은 찝찝한 얼굴로 문 안쪽으로 건너왔다.

‘절벽 위 파도치는 별장’의 어느 방 안에서 면사포를 쓰지 않은 피투성이의 체어맨이 싱긋 웃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실톱, 다른 한 손에는 펜치를 들고 있었다.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온몸이 화상 자국으로 가득한 체어맨은 웬만한 일로는 검은색 면사포를 벗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괴롭힐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검은색 면사포를 쓰고 다녔다.

체어맨이 잇몸이 다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피가 여기저기 튀었다.

어딘가의 공포 게임에서 튀어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몰골에 재언이 기겁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거듭 말하지만 신재언은 귀신은 물론 공포 게임에는 손도 못 대는 공포 찌질이 중 찌질이었다.

“막내의 기분이 계속 다운되기에 기운을 좀 돋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걸로 대체 뭘 어떻게…….”

“니들맨이라는 놈을 붙잡아 대령해 주니 침울하게 누워 있던 우리 막내가 힘을 내던걸요.”

체어맨이 기다란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황홀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굉장히 기분 나쁜 광경이었기에 눈을 돌린 신재언은 대답 없이 귀신들의 성녀를 안아 올렸다.

형제 중 가장 정신력이 약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기절해 있었다.

체어맨은 그제야 귀신들의 성녀가 위험하니 문을 열라는 재언의 말을 떠올려 냈다. 그는 신재언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를 보더니,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리의 사랑스러운 귀신들의 성녀가 어떤 놈에게 당해 이 꼴이 되었습니까! 아아, 용서할 수 없다. 그 자식을 지금 당장 죽여서 끓는 물에 처넣어 버립시다!”

“진정해, 진정해! 이 자식아, 너도 진정하라니까!”

체어맨이 화상을 입어 쭈글쭈글한 자신의 머리를 손톱으로 긁으며 괴성을 질렀다. 그녀가 기절한 건 맞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한 건 아니었기에 신재언은 펄쩍펄쩍 뛰는 그를 겨우 말릴 수 있었다.

‘아차, 꼬마 귀신.’

그제야 꼬마 귀신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주한 귀신들의 성녀에게 신경 쓰느라 미처 꼬마 귀신을 챙기지 못했다. 악귀가 된 엄마를 따라간다고 난리 치던데, 무사할까 걱정되었다.

뭐, 귀신들의 성녀가 곁에 없는 재언은 귀신 관련한 일에 무지렁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 당장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앓는 신음을 흘린 신재언이 체어맨에게 손짓했다.

“일단 귀신들의 성녀는 방에 데려가고… 깨어나면 연락해 줘.”

“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체어맨이 히죽 웃으며 귀신들의 성녀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신재언과 그의 자식들이 머무는 ‘절벽 위 파도치는 별장’은 일반인은 물론 히어로들조차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오갈 방법이라고는 오직 체어맨의 능력뿐이었다.

혼자 남게 된 신재언은 별장 지하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체어맨의 고문실이 있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그곳으로 내려간 적이 없지만, 왠지 모르게 가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실로 들어서니 한 소년이 우울한 표정으로 신재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신재언이 능력을 각성시켜 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소년이었다.

니들맨의 아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받은 뒤 한계치가 넘어가는 증오에 신재언이 능력을 각성시켜 주자마자 왕따 주범들을 공공장소에서 잔인하게 도륙해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트린 인물이었다.

그 덕에 한국은 여전히 버드맨에 대한 수배로 시끄러웠다. 버드맨의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이 하나둘씩 용기를 내 사실 그는 왕따 피해자였다고 진술했지만 전부 니들맨에 의해 막혔다.

각성한 이전의 이름을 버리지 않은 몇 명을 빼고는 대부분 평범했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빌런명으로 불리는 걸 좋아했다. 버드맨 역시 강세준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종일 우울해해 방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이전의 이름을 싫어했다.

오늘은 체어맨이 꼬셔서 방에서 나온 모양인데, 그의 양 날개가 피로 물든 것처럼 보이는 게 착각은 아니겠지.

“아버지.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요…?”

버드맨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비행 청소년을 개화시켜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재언이 고개를 들었다.

“어?”

“감히 어떤 놈들이 위대하신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까요. 그자들은 죄악입니다. 살아선 안 되는 쓰레기들이에요…….”

‘얘는 또 왜 이렇게 된 거야.’

신재언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버드맨은 신재언을 향해 몸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어린놈이 벌써 맛탱이가 가다 못해 360도 돌았는걸?’

“아버지는 위대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만물을 지배하실 재목이세요. 당신의 앞을 막는다면 제가 전부 죽여 버리겠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위대한 세상을 만들어 보아요……!”

‘싫다, 이놈 자식아! 사람을 증오하고 싶지 않다던 그 고등학생 맞아?’

재언이 기겁하며 버드맨을 다시 지하로 밀어 넣은 다음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지하에서 버드맨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대부분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하고 존경받아 마땅한지를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진짜로 소름 끼치고 무서우니까 안 해 줬으면 좋겠다. 게다가 그 눈동자는 이미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맛이 가 있었다.

저런 몰골로 세상에 나가면 사고 칠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지만, 아직 그는 이 별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위층에 도착하자 2층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엔레이드맨이 보였다.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장작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매일같이 자신을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을 테니 조용히 쉬게 해 주자는 생각으로 숨죽인 채 한층 더 올라갔다.

마침 면사포를 쓴 체어맨이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하에 있는 니들맨의 고문이 끝났다는 소리였다.

“아버지. 다행히 귀신들의 성녀가 금방 정신을 차렸습니다. 위대하신 아버지를 가장 먼저 찾았는데, 마침 잘 됐군요.”

“고마워. 그리고 버드맨 말인데, 음…….”

“막내는 아주 의젓하고 저희에게 깍듯하답니다. 좋은 재목이에요. 손속에 망설임도 없고 아버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아주… 귀여운 막내랍니다.”

말을 마치고 히죽-하고 웃는 체어맨의 미소가 재언에게는 너무나도 불길했다.

‘어… 그러냐…….’

신재언은 이제 지쳤다.

처음에야 미친놈들아! 그만하라고,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말라고 발광을 하며 탭댄스를 춰 댔지만, 그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제 말리기를 포기하는 단계에 이른 재언이 손짓을 하며 체어맨을 보낸 후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귀신들의 성녀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산발로 늘어트린 모습조차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귀신같아 보인다는 게 정말로 이상했다.

“아버지. 괜찮으신가요?”

“아무렇지도 않아. 그것보다 너는 괜찮아?”

그녀가 누운 채로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무래도 추태를 부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재언이 이제 서울로 올라가 꼬마 귀신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귀신들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도 데려가 주세요.”

“뭐? 정신 차린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냥 쉬고 있어.”

“이대로 위대하신 아버지 앞에서 추태를 부린 채 끝낼 수는 없답니다. 만회할 기회를 제발 주세요.”

‘무슨… 다른 사람이 보면 내가 실수했다고 호되게 혼내는 악당 보스라도 되는 줄 알겠다?’

한 번 고집부리기 시작하는 놈들은 재언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해도 어떻게든 해냈다. 뒤에서 수작 부리는 것보단 앞에서 감시하는 게 낫겠다 싶은 신재언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뒤에서 수작 부렸을 때 벌이는 사고가 더 컸기에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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