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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는 빌런-26화 (26/324)

26화

면사포를 뒤집어쓴 체어맨이 함께 온 것을 빼면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인원이었다. 다행히 광혼사가 잘 마무리해 줬는지 히어로들이 오진 않은 것 같았다. 다만 꼬마 귀신과 악귀가 된 생령이 보이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귀신들의 성녀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소매에서 가지방울을 꺼냈다. 방울 하나가 깨져 있는 것을 보아 귀곡성을 부르면서 그렇게 된 듯했다.

그녀는 가지 방울을 흔들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아버지, 그 여자 생령이 간절하게 바라는 게 아들을 찾는 것이라고 했지요?”

신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도 이해했다. 생령이 간절하게 바라왔던 건 아들을 찾는 일이었다.

아들을 찾았으니 생령이 가진 억울함을 풀러 가는 일만 남았다. 사람을 치고도 뻔뻔하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뺑소니범을 찾는 일이었다.

체어맨의 도움으로 가해자들의 집 안에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거실에서 집 안을 살피던 재언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설마 이 자식들 그렇고 그런 짓 하는 중인 거?’

혼자 민망해하면서 얼굴을 붉히던 신재언은 점점 커지는 신음에 고통이 섞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일행은 넓은 저택의 1층을 지나 신음이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 복도의 가장 왼쪽에 있는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가능하면 조심스럽게 가고 싶어서 살금살금 걷는 신재언의 뒤로 귀신들의 성녀와 체어맨이 당당하게 발소리를 내며 걸었다.

“…….”

‘이러다 주거침입죄로 잡혀가면 어쩌려고……?’

그래 봤자 체어맨의 성격상 집주인이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낚아채 지하 고문실로 데려갈 놈이었다.

다행히도 올라가는 내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늦은 밤이어서 자느라 침입자의 발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신재언이 신음이 들리는 방의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헉.”

방 안에는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있었다. 물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그 청년의 목에 무언가가 칭칭 감겨 있어 목을 조르고 있었다는 게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년이 정신을 잃을 찰나에 완력을 조절해 기절하지도 못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캑캑거리며 발버둥 치던 청년은 공포에 질려 몸을 바르르 떨다가 오줌을 지렸다.

“아!”

귀신들의 성녀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신재언의 눈에도 청년의 목을 조르는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였다. 방의 구석에 서서 악귀 같은 흉한 모습으로 혀를 기다랗게 내민 엄마 생령이었다.

귀신들의 성녀가 가지방울을 신나게 흔들며 말했다.

“아버지, 저자의 기운에 꼬마 도령이 보이지 않아요.”

“오호라, 저기에 뭐가 있는 겁니까?”

“오라버니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귀신들의 성녀와 체어맨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태연하게 수다를 떨었다. 특히 귀신들의 성녀는 더벅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눈을 휘어 웃으며 고소해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생령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면 돌이킬 수 없어지기에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지금이라도 멈추면 육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굳이 그 남자를 죽여 악귀가 되고 싶은가요?”

“닥쳐, 이 남자는 내 아들을 데려갔어. 내 아들은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고! 이 남자를 죽이고 악귀가 되어 이 집안의 씨를 말려 버리겠어!”

생령이 귀신들의 성녀의 말에 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생령은 어떠한 회유도 듣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에 증오가 가득했다.

평범하게 즐겨 왔던 일상이 이 남자 때문에 전부 잃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심지어 남자는 어린아이가 죽었는데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호호호… 당신은 좋은 악귀가 될 것 같군요.”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오호호…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는 그녀의 다리를 감싼 손이 어느새 길고 새빨간 손톱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귀신들의 성녀가 아무리 겁을 줘도 생령은 청년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붉은색 입술을 양쪽으로 당기며 활짝 웃었다.

‘가지방울의 방울이 하나 늘어나겠구나!’

“엄마아!”

그 순간 복도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재언은 물론 귀신들의 성녀까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검은색 도포와 갓을 쓴 저승사자 광혼사가 우뚝 서 있었고 그 앞에 꼬마 귀신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다행히도 꼬마 귀신을 챙긴 듯했다.

‘그런데 왜 저승으로 데려가지 않고 여기에……?’

꼬마 귀신이 신재언을 지나 엄마 생령을 향해 달렸다. 이성을 잃은 생령이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하려던 그때 저승사자가 허리춤에 달고 있던 꽃 조리개를 던져 그사이를 막았다.

허공에서 마치 필름처럼 모자가 생전에 함께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들이 태어났던 행복한 순간부터 자라오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방에 있는 지갑을 찾는다고 아들의 손을 놓는 바람에 신호등 가까이 다가가는 아들을 잡지 못했던 그날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아… 미안해. 내가 말 안 들어서. 그래서…….”

꼬마 귀신이 엉엉 울면서 엄마 생령의 다리를 껴안았다. 그러자 악귀처럼 흉하게 일그러진 생령의 모습이 점점 변하더니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녀는 눈물을 왈칵 터트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양팔을 벌려 꼬마 귀신을 힘껏 끌어안았다. 아들을 홀로 남겨 두고 가야 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생령은 필사적으로 육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런 생령을 보던 저승사자가 다가와 꼬마 귀신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는 걱정 말고 돌아가시오. 내가 저승까지 잘 데려가 주겠소.”

“아…….”

생령은 드디어 자신이 이성을 잃고 아들을 공격하려 했던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 이 이상 곁에 있어 봤자 아이가 위험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다시 깨끗한 상태로 돌아온 엄마 생령이 꼬마 귀신을 한참 동안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우리 아들… 아들… 잘 부탁드려요… 엄마도 곧… 따라갈게.”

“으응… 엄마… 오래 기다려도 되니까, 금방 오지 않아도 돼.”

“그런 말이 어딨어!”

꼬마 귀신이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생령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더니 전부 사라졌다. 광혼사는 꼬마 귀신의 손을 놓칠세라 힘 있게 잡았다.

귀신들의 성녀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나뿐인 소중한 남동생과 이별의 인사도 나누지 못한 과거를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귀신을 보지 못하는 체어맨만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귀신들의 성녀가 저승사자를 노려보며 체어맨에게 말했다.

“다 끝났어요, 오라버니. 꼴 보기 싫은 놈이 있어서 여길 벗어나야겠어요. 감히 위대하신 아버지 앞에서 내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오, 귀여운 내 동생.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라면 죽여 버리도록 합시다.”

“소용없는 일이에요. 얼른 쉬고 싶어요.”

두 사람이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던 광혼사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꼬마 귀신을 힐끔 쳐다보고 신재언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이제부터 환생과 저승을 선택해야 할 겁니다. 그게 무엇이든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예…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광혼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꼬마 귀신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았다. 이제 저승으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향해 신재언이 물었다.

“저승사자 차사. 대체 우리를 왜 도와주신 겁니까?”

“…….”

귀신들의 성녀가 귀곡성을 소환한 일은 저승사자로서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였는데도 조용히 넘어가고 오히려 도와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꼬마 귀신을 챙기는 걸 보면 착한 저승사자인가 싶긴 한데 탐탁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저승사자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눈을 내리깔고는 신재언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인… 앞으로도 제 누나를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광혼사와 꼬마 귀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귀신들의 성녀가 써 준 의식이 다해 귀안이 닫힌 탓도 있었다.

다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 신재언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엥?”

‘누나? 누가? 누굴 잘 부탁드려?’

그러고 보니 광혼사가 가지고 다녔던 꽃 조리개가 떠올랐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귀신들의 성녀가 애지중지하고 다니는 꽃과 같은 종류였다.

‘그런데 나이가 그녀보다 훨씬 많아 보였는데?’

“저승에서의 10년은 이승에서의 1년이다.”

문득 떠오른 문장에 신재언이 충격받아 굳은 사이 체어맨이 곁에 다가왔다.

“아버지, 위대하신 아버지… 이 쓰레기는 어떻게 할까요?”

게거품을 물고 바지에 소변을 지린 채 기절한 뺑소니범을 보는 체어맨의 표정이 밝았다. 면사포 속에 가려졌지만, 그의 미소가 아주 불길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흠… 이걸 어쩌지. 이놈은 잘못했어도 반성하지 않았잖아.”

신재언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귀신들의 성녀를 불렀다. 피해자들이 어영부영 넘어갔으니 그들을 죽이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대로 죗값도 받지 않고 넘어가기엔 너무나도 찝찝했다.

“…두 번 다시 운전을 못 하도록 만들자.”

“아아, 과연… 자비로우십니다. 아버지…….”

체어맨이 양팔을 벌려 아버지를 찬양했다. 그 모습이 이제 익숙해진 신재언은 시간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쉴 틈도 없이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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